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가이아나

가이아나

가이아나

“물의 나라”라는 뜻의 “가이아나”는 남쪽 국경선이 적도 위쪽으로 13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남아메리카의 한 나라입니다. 21만 5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가이아나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강우림과 정글의 물이, 40개가 족히 넘는 강과 셀 수 없이 많은 지류를 통해 흘러 나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중에 몇몇 강들은 이웃 나라들인 베네수엘라, 브라질, 수리남과 가이아나 사이에 국경을 이루기도 합니다. 강들은 또한 내륙 지방의 생명선으로서, 내륙 지방의 마을과 농장들은 강둑을 따라 분포해 있습니다. 사실 가이아나의 상업과 역사는 물길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도 그러합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네 개의 주요 강은 에세퀴보 강, 데메라라 강, 버비스 강, 코런타인 강입니다. 가장 긴 강인 에세퀴보 강은 길이가 1000킬로미터, 강어귀의 폭이 30킬로미터이며 그 강에는 365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섬들 중 하나인 포트아일랜드는 네덜란드 식민지 시대에 총독부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 주요 강들은 남쪽에 있는 내륙 산악 지대에 수원을 두고 북쪽으로 흘러가 마지막으로 좁은 해안 평야를 뱀처럼 지나서 대서양으로 흘러듭니다. 그 도중에 강물은 세계에서 가장 멋진 장관을 이루는 몇몇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데, 그중에는 카이어투어 폭포가 있습니다. 카이어투어 폭포는 에세퀴보 강으로 흘러드는 폭 120미터의 포타로 강에 있는데, 첫 낙하 지점의 높이는 226미터나 됩니다.

자연의 매력적인 요소가 풍부한 가이아나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원입니다. 물속에는 캐나다수달, 검정카이만, 그리고 이제껏 발견된 담수어 중에서 가장 큰 피라루쿠 즉 아라파이마가 서식합니다. 공기 호흡을 하며 육식을 하는 이 커다란 물고기는 길이가 3미터, 무게가 220킬로그램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그늘진 숲 속에는 재규어가 조용히 어슬렁거리며, 울음원숭이가 높은 나무들 위에서 소리를 지릅니다. 그리고 그런 나무들 위에는 700종이 넘는 새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에는 부채머리독수리와 화려한 색을 자랑하는 마코앵무와 큰부리새도 있습니다.

가이아나의 인구는 약 77만 명입니다. 그 가운데는 인도 출신의 연한(年限) 계약 노동자들의 후손인 동인도 사람들과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인 흑인들과 인디오들(아라와크족, 카리브족, 와피시아나족, 와라우족)과 혼혈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크리올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공용어로는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이아나는 남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입니다.

진리의 물이 가이아나에 이르다

1900년경에 사람들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생명을 주는 “물”이 가이아나에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4:14) 피터 조하슨이라는 남자가 코런타인 강에 있는 벌목장에서 일을 하다가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Zion’s Watch Tower and Herald of Christ’s Presence)을 한 부 받았습니다. 그는 그 내용을 엘긴에게 이야기해 주었고, 엘긴은 워치 타워 협회에 편지를 써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비롯하여 더 많은 성서 출판물을 요청하였습니다. 엘긴은 배운 진리에 고착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버비스 강 어귀에 위치한 뉴암스테르담에 작은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한편 가이아나의 수도인 조지타운에서는 에드워드 필립스가 만국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출판물을 받았는데,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만국 성경 연구생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배우게 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몹시 알려 주고 싶었던 필립스는 친척과 친구들을 자기 집으로 불러 모아 정기적으로 격식 없는 성서 토의를 하였습니다. 1908년에 그는 워치 타워 협회에 편지를 써서 당시에는 영령 기아나 *라고 하던 가이아나에 대표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4년 후에 이밴더 J. 카워드가 가이아나에 도착하여 조지타운과 뉴암스테르담에서 공회당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성서 강연을 하였습니다.

필립스의 아들 프레더릭은 카워드의 방문을 돌이켜 봅니다. 그의 편지는 이러합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카워드 형제는 조지타운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가 전한 소식을 통해 관심 가진 사람들이 우리 성경 연구생 집단에 합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과 「새로운 창조물」(The New Creation) 책과 그 밖의 출판물을 가지고 토의를 하였습니다. 곧 우리 집은 너무 좁아져서 1913년에 조지타운의 서머싯 하우스 건물의 위층 방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곳은 1958년까지 회중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914년에 에드워드 필립스는 다시 자기 집을 사용하도록 내놓았는데, 이번에는 가이아나의 첫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무실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1924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 자격으로 일하였습니다.

1916년에는 슬라이드와 활동사진으로 된 작품인 “창조 사진극”을 상영하여 전파 활동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프레더릭이 쓴 글은 이러합니다. “당시에 우리는 평화와 훌륭한 영적 번영을 누렸습니다. 지방 신문에는 저명한 성경 연구생인 찰스 T. 러셀이 했던 일련의 설교가 연재되기까지 하였습니다.”

1917년이 되었을 즈음에 가이아나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습니다. 가이아나는 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있었으며, 저명한 지방 교직자는 영국과 동맹국을 위해 기도하라고 대중을 선동하였습니다. 카워드는 신문사에 편지를 써서 성서 예언에 비추어 본 세계 상황에 대해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타운 타운홀에서 “바빌론의 벽을 쳐부숨”이라는 제목의 강력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파수대」(영문) 1983년 10월 1일호에 나오는 보고는 이러합니다. “교직자들은 몹시 화가 나서 당국자들을 설득하여 카워드 형제를 추방하고, 우리의 출판물을 상당수 금지하게 하였는데, 그 금지령은 1922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카워드의 용기 있는 증거 때문에 그를 존경하였습니다. 사실 카워드가 떠날 때 사람들은 부두에 늘어 서서 “그는 유일하게 진리를 전파한 사람이었다” 하고 외쳤습니다. 심지어 부두의 일꾼들은 카워드의 추방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려고까지 하였지만 형제들은 그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성경 연구생들은 한동안 왕국 진리가 퍼지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좀 더 교묘한 시험에 직면하였습니다. 브루클린 본부 성원으로 있다가 배교로 돌아선, 이전에 형제였던 한 사람이 여러 차례 가이아나를 방문하여 성경 연구생들이 조직에 등을 돌리게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파수대」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얼마 동안 이 나라의 성경 연구생들은 조직에 충성스러운 그룹, 반대 그룹,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제3의 그룹, 이렇게 세 그룹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충성스러운 그룹에만 여호와의 축복이 있었고, 결국 그 그룹은 번영하였다.” 충성스러웠던 사람들 중에는 각각 1915년과 1916년에 침례를 받은 맬컴 홀과 필릭스 파울렛이 있었습니다. 그 둘은 모두 여호와의 열심 있는 종의 신분을 유지하였으며, 90세가 넘게 수를 누렸습니다.

충실한 형제들에게 더 많은 격려를 베풀기 위해, 1922년에 세계 본부의 조지 영이 가이아나에 와서 약 3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일꾼이었습니다”라고 필릭스 파울렛은 말했습니다. 영이 가진 성경 지식, 힘 있는 목소리, 자연스러운 몸짓, 시각 도구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좀 더 면밀히 살펴보게 만들었습니다. 「파수대」(영문) 1923년 1월 1일호에서는 영의 보고를 근거로 “세계의 그 지역에서는 진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여 모든 공개 집회의 참석자 수가 더 많아져서 모임 장소가 꽉 차게 되었고, 그에 상응하여 형제들의 열심과 정성도 증가한” 것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일례로 서머싯 하우스에는 그 당시 왕국 전도인이 약 25명뿐이었지만 평균 100명이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1923년 무렵에는 형제들이 먼 내륙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흔히 그들은 먹을 것을 베풀어 주는 후대하는 사람들의 신세를 지면서 해먹(그물 침대)과 출판물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서 밤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뭇가지 아래 해먹을 걸고 그곳에서 밤을 보냈는데, 흔히 구름처럼 몰려드는 모기 떼를 견뎌 내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여호와의 조직에서 발행한 「일용할 천적 만나」(Daily Heavenly Manna)에 나오는 성구를 고려한 후에 다음 동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거나 배를 얻어 타고 가곤 하였습니다.

더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휘발유가 배급제가 되어 여행이 제한된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인 1931년에 성경 연구생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하였습니다. 해안에 흩어져 있던 성경 연구생들의 소규모 집단들은 열정적으로 그 새로운 명칭을 받아들였으며, 봉사 부면을 강화함으로 열심을 보였습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전도인들이 녹음된 성서 강연이 들어 있는 축음기를 봉사의 직무에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지부 감독자였던 프레더릭 필립스가 쓴 편지는 이러합니다. “당시에는 마을에 라디오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을에 도착하였다는 첫 표시로 음악을 틀어 그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평온한 열대의 공중으로 울려 퍼지게 하였습니다. 그 음악에 이어서 녹음된 강연을 틀어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우리 주위에 몰려들곤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잠옷 바람으로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라디오 방송국 역시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가이아나에 있던 한 방송국에서는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에 왕국 소식을 방송하였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활동이 사탄의 주의를 끌지 않을 리 없었고, 사탄은 제2차 세계 대전의 국가주의 열기를 이용하여 활동을 방해하려고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의 활동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가이아나에서는 52명의 왕국 선포자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에 「파수대」와 「위안」(지금의 「깨어라!」)지가 금지되었습니다. 1944년에는 그 제한 조처가 여호와의 백성이 발행한 모든 출판물에 대한 금지로 확대되었습니다. 「파수대」(영문) 1946년 7월 1일호의 보고가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심지어 워치 타워의 주석이 달려 있지도 않은, 다른 성서 공회에서 발행한 성서들마저도 금지되었습니다.”

1946년 4월에 세계 본부의 네이선 노어가 가이아나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윌리엄 트레이시와 함께 왔는데, 당시 트레이시 형제는 길르앗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은 형제들을 격려하고 금지령을 해제해 달라고 정부에 호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지타운에서 열린 모임 중에, 노어 형제는 함께 모인 180명의 형제들과 관심자들에게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봉사의 직무에 도움이 될 성서나 서적을 공급받지 못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놀라운 성장으로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계속 전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현대 종들이 계속 부지런히 활동할 때 그들에게도 그처럼 축복하시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동시에 형제들은 금지령의 해제를 위한 법적 수단을 계속 찾았습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후 1년이 지나가기 전에, 금지령에 이의를 제기하는 청원서에 3만 1370명의 서명을 받았습니다. 그런 다음 청원서를 정부에 제출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가이아나 사람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여호와의 조직은 실상을 알리는 전단을 발행하였습니다. 그 전단의 머리기사는 이러합니다. “영령 기아나에서 성서 금지—3만 1000명이 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에 서명, 종교와 관계없이 식민지 내의 모든 거주자들에게 숭배의 자유를 회복시켜 주기 바라다.”

또한 노어 형제는 금지령이 해제될 수 있도록 식민지 장관인 W. L. 히프를 만났습니다. 30분간의 면담이 끝날 무렵에 노어 형제는 히프 씨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책 한 권을 주면서 잘 읽어 보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히프 씨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그는 노어 형제에게 사실 우리의 출판물에 내려진 금지령이 바로 그 시간에 아홉 명으로 이루어진 최고 위원회에서 재검토되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고, 1946년 6월에 총독은 금지령을 해제하는 성명서를 공표하였습니다.

그 직후에 형제들은 먼지가 수북한 130개의 상자에 들어 있던 1만 1798권의 서적과 소책자를 돌려받았습니다. 이제 70명에 달하는 왕국 선포자들은 출판물을 다시 제공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격스러워하면서 단 10주 만에 그 출판물을 모두 배부하였습니다. 8월에 형제들은 또한 가두 증거를 시작하여 훌륭한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지부에서는 “잡지가 지방 신문이 팔리는 속도와 거의 비슷한 속도로 신속히 전해졌다”라고 보고합니다.

금지령 아래서도 형제들은 계속해서 값진 영적 양식을 받았는데, 부분적으로는 조지타운의 중앙 우체국에서 일하는 형제의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쓴 글은 이러합니다. “나는 「파수대」지가 꼭 지부에 도달되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자매들의 도움으로 연구 기사가 있는 잡지들을 타자하거나 등사하여 가족들이 회중 집회에서 사용할 수 있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새로운 선교인들이 활동에 박차를 가하다

가속하고 있는 차의 기어를 변속하면 차는 더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가이아나에서는 1940년대 중반에 길르앗 학교 훈련을 받은 선교인들이 도착하였을 때 전파 활동과 관련한 “기어 변속”이 있었습니다. 그 선교인들 중에는 제5기 졸업생들인 존 헤머웨이와 데이지 헤머웨이 부부 그리고 루스 밀러와 앨리스 밀러 부부뿐만 아니라 제3기 졸업생인 윌리엄 트레이시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열심 있는 증인들은 자신들이 길르앗 학교에서 배운 값진 것들을 지방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야외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트레이시 형제는 외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기도 하고 강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면서 외딴 곳에 사는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심자들을 찾기 위해 그 나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나는 해안 열차, 버스, 자전거, 강에서 운행하는 큰 배, 작은 배를 타고 다녔으며 심지어는 카누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은 또한 지방 파이오니아들이 잘 조직되게 도와 그들이 체계적으로 구역을 돌보고,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이전에 손대지 않은 구역까지 뻗어 나가 그곳에서도 봉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46년에 가이아나에는 회중이 고작 5개에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최고 91명뿐이었던 것을 고려해 보십시오. 하지만 하느님의 영에 의해 힘을 얻게 된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스가랴 4:6.

처음에는 선교인들과 함께 일한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상당수가 연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연로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있어서 훌륭한 영을 나타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아이작 그레이브스, 조지 헤들리, 레슬리 마이어스, 락클리프 폴러드, 조지 이어우드가 있었습니다. 자매들 중에는 마거릿 두크니, 아이비 하인즈, 프랜시스 조던, 플로렌스 톰, 애틀랜타 윌리엄스, 프린세스 윌리엄스(두 윌리엄스 자매는 서로 인척 관계는 아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적, 소책자, 잡지 들로 무장을 하고 멀리 떨어진 밭으로 왕국 소식을 가져갔습니다.

아이비 하인즈(현재의 성은 와이엇)와 플로렌스 톰(현재의 성은 브리셋)은 에세퀴보 강에서 내륙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바티카 지구에 임명되었습니다. 바티카는 내륙에 있는 금과 다이아몬드 매장지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형제 한 명이 홀로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지부 감독자이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던 존 폰팅이 기록한 바로는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20명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으며 50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제럼 플레비어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아이비 하인즈가 연설 자료를 여러 차례 충분히 읽어 주면 그 뒤로는 도움을 받지 않고도 연설을 하였습니다”라고 존은 말합니다.

파이오니아 자매들인 에스터 리치먼드와 프랜시스 조던은 둘 다 60대 후반의 연로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워 더 많은 구역을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폰팅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이 몇 년이나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는지 햇수 세는 것을 잊어버린 마거릿 두크니는 피곤해질 때까지 걸어 다녀서 때때로 공원 벤치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선교인들과 연로한 파이오니아들의 모범에 자극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파이오니아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든 활동의 결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집단과 회중들이 형성되었습니다. 1948년에는 가이아나에 22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1954년에는 그 수가 434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동안 서머싯 하우스에 모인 키티-뉴타운 출신의 형제들은 뉴타운 회중이라는 별개의 회중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증가하였는데, 그 회중은 수도에서 두 번째로 형성된 회중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조지타운에는 9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음향 재생 수레와 자전거를 탄 사람들과 당나귀

1950년대 초반에는 지부 사무실의 인도 아래 형제들이 보통 토요일 저녁이나 일요일 오후에 조지타운 전역에서 야외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체 제작한 이동식 음향 재생 수레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수레에 성능이 좋은 앰프, 대형 스피커 두 개, 스피커 받침, 전선을 실었습니다. 1949년에 침례를 받은 앨버트 스몰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는 집회 장소에 간판을 갖다 놓았습니다. 간판에는 ‘당신의 성서 질문들과 대답’이라는 문구가 있었고 이어서 집회 시간이 나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강연에 참석하였고, 일부 참석자들은 나중에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1954년 초에 네이선 노어와 그의 비서 밀턴 헨첼은 더 큰 증가의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조지타운의 글로브 시네마라는 극장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존 폰팅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1400개의 좌석이 가득 찼으며, 700명이 야외로 연결된 스피커로 그 연설을 듣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현수막을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방법으로 그 프로그램을 광고하였습니다. 어두워진 후에는 큰 조명 간판을 당나귀가 끌게 하고 그 옆에서 한 형제가 확성 장치를 사용하여 광고하였습니다.”

내륙으로 많은 여행을 하다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는 동안 윌리엄 트레이시는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도록 형제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 자신도 에세퀴보 강과 버비스 강 유역에 있는 곳들을 방문하였고, 그 지역에 있는 소규모 집단과 회중들과 함께 순회 대회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대회들은 보통 극장이나 학교에서 열렸으며, 흔히 충분한 크기를 갖춘 장소는 극장밖에 없었습니다. 1949년, 에세퀴보 강 어귀 근처의 서디에 있는 극장에서 열린 대회에서는 “공포의 대상으로 이용되는 지옥”이라는 공개 강연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지옥이 없는 교회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에, 갓 결혼한 윌리엄 트레이시는 다시 미국으로 임지가 바뀌었습니다. 존 폰팅이 지부 감독자이자 여행하는 감독자였던 그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존 역시 강의 일부 구역에서 활동을 도왔습니다. 형제들은 정기 운항선을 타고 다니곤 하였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이동 우체국 역할을 하는 그 배로 자신들의 카누를 저어 오면, 형제들은 누군가 음식과 숙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믿고 강변까지 태워 줄 수 있는지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마을에서 증거를 하고 밤이 되면 그들 중 한 가족이 베푸는 후대를 즐기곤 하였습니다. 다음날에는 누군가가 그들을 하류까지 태워 주어 그들은 다음 마을에서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에는 제재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의 관리자는 작업을 멈추고 사람들을 모아서, 형제들이 그들에게 15분 연설을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길르앗 제19기 졸업생인 토머스 마커비치는 1952년 7월에 가이아나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역시 과감하게, 아직 손대지 않은 구역으로 들어갔습니다. 토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전에 한 번도 진리를 접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왕국 소식을 전할 때는 특별한 기쁨이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매우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강배를 타고 데메라라 강을 다니다가 걸어서 정글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작은 오두막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곳의 주인은 인사를 하더니 나를 안으로 초대하여 자리를 내어 주고는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오두막 벽이 모두 1940년대에 발행된 「파수대」 잡지로 도배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집 주인은 이전에 아마도 강배 위에서나 조지타운이나 매켄지에서 왕국 소식을 접해 보았던 것 같았습니다.”

선교인인 도널드 볼링어는 처음으로 힘든 육로를 택하여 카이어투어 폭포로 간 사람이었습니다. 인디오들에게 증거하면서 그는 그들과 일하던 정부 관리를 만났습니다. 결국 그 관리는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후에 그곳에 형성된 집단을 돌보았습니다. 일부 전도인들은 세속 직업 때문에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금광 지구와 같은 외딴 지역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외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채굴장에 있는 오두막들을 다니며 전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강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연구와 전파 활동을 위한 훌륭한 계획표에 고착하였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우며 만족스러운’ 봉사

선교인인 존 헤머웨이와 데이지 헤머웨이 부부는 1946년부터 1961년까지 가이아나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베네수엘라와 가까운 북서부 지역에서 2주간의 휴가를 보내곤 하였는데, 그곳에는 카리브족과 아라와크족을 비롯하여 여러 토착 부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젠가 아라와크족 사람들에게 많은 양의 출판물을 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방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가톨릭 수녀들은 이 일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사실 그 수녀들은 아이들에게 그들의 부모가 출판물을 하나라도 받았는지 물어보기까지 하였습니다. 부모들은 그처럼 물어보는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화가 나서 사제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읽을 것인지는 그들 자신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제는 단념하지 않고 일요일 예배 중에 많은 사람이 받은 「당신은 이 땅에서 영원히 행복스럽게 살 수 있습니까?」 소책자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책략은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왔는데, 헤머웨이 부부가 떠나는 날 많은 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찾아와 바로 그 소책자를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내륙으로 300킬로미터 정도 들어가 있는 이 지역까지 가기 위해서 존과 데이지는 나룻배, 기차, 트럭을 타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생활필수품에 더하여 출판물과 자전거도 가지고 갔는데, 자전거는 인디오가 만들어 놓은 길까지 가기 위해 비포장 길을 가로질러 가는 데 꼭 필요합니다. 존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디오가 만들어 놓은 그 길들은 사방으로 뻗어 있어서, 길을 잃지 않고 안전하게 돌아오고 싶다면 기억을 잘 해 두거나 나뭇가지들을 꺾어 갈림길에 표를 해 두어야 합니다. 길에서 고양잇과에 속한 어떤 동물을 마주쳤을 때는 보통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그러면 결국 그 동물은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갑니다. 원숭이들은 침입자들에게 항의를 하듯 소리를 지르며 높은 나무 꼭대기 사이를 건너다니고, 나무늘보는 거꾸로 매달려 지나가는 사람을 나른한 눈으로 쳐다볼 것입니다. 공터에서는 이따금씩 파파야나무의 열매를 먹고 있는 다채로운 색상의 큰부리새들을 언뜻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헤머웨이 형제는 가이아나에서 15년 동안 선교 봉사를 한 후에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간단히 말했습니다.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야자나무로 지은 오두막의 흙바닥에 앉아서 인디오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 방식을 가르치는 일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줍니다. 성서의 가르침에 반응을 나타내고 그런 다음 하느님께 헌신하는 겸손한 사람들을 보는 것은 결코 잊지 못할 경험입니다.”

지방 파이오니아들이 길르앗에 가다

몇몇 지방 파이오니아들은 길르앗 학교에 가는 특권도 누렸으며, 그중 일부는 가이아나로 임명을 받아 돌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1953년의 제21기 졸업생인 플로렌스 톰(현재의 성은 브리셋)과 1958년의 제31기 졸업생인 앨버트 스몰과 실라 스몰 부부와 1970년의 제48기 졸업생인 프레더릭 매캘먼이 있습니다.

플로렌스 브리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외국 임지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가이아나의 스켈던을 임지로 받은 것은 여호와의 축복이었습니다. 예전의 학교 친구들, 교사들, 벗들, 그리고 친지들이 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연구를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에드워드 킹이 있었는데, 그의 아내는 이미 나와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성공회 사제가 에드워드의 아내가 연구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드워드를 불러 연구를 그만두게 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의 말을 따르는 대신 그 자신이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스몰 부부가 길르앗 학교에서 돌아온 후에, 앨버트 스몰은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봉사하였고 또한 수년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현재 그와 실라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지방 회중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스몰 형제는 또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물론 원래 가이아나에서 온 형제들 모두가 그곳으로 다시 임명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48기 졸업생인 리넷 피터스는 시에라리온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외국 임지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영화가 관심을 불러일으키다

1950년대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널리 사용한 영화의 제목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였습니다. 그 영화는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와 1953년 뉴욕 시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큰 대회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 영화는 증인들을 비롯하여 사람들 모두가 여호와의 조직과 그 활동 범위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확실히 그 영화는 강우림 깊숙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전에는 영화라고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영화는 흔히 큰 거주 지구 내의 야외에서 상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기 위해 수킬로미터씩 걸어오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어떻게 전기도 없는 곳에서 영화를 상영할 수 있었을까?’ 하고 궁금해할지 모릅니다. 1957년에 도착하여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길르앗 졸업생 앨런 존스톤은 여러 차례 영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전기가 없는 곳에서는 지방 사람들이 친절하게도 밤에 자신들의 상점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던 발전기를 빌려 주어 그것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큰 시트를 두 나무 사이에 팽팽하게 펼쳐서 스크린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존 헤머웨이와 데이지 헤머웨이 부부는 그 영화를 상영하고 나서 집으로 향하는 증기선을 탔습니다. 배에 탄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영화를 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머웨이 부부는 선장의 허락을 받아 갑판에 스크린을, 적절한 위치에 창문이 있는 선실에 영사기를 설치하였습니다. 존이 쓴 기록은 이러합니다. “가톨릭과 성공회의 사제들도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육지에 있을 때에는 자기를 낮추어 그 영화를 보려고 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배 위에서는, 아마도 보려는 마음이 없었겠지만 그들도 관람객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영사기를 돌린 곳은 그들의 선실이었습니다. 나중에 승객들은 여호와의 증인들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들로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존 폰팅은 영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당시의 영화 상영은 증인들이 거의 없고 보잘것없게 여겨지던 곳에서 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사람들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이 놀라운 세계적인 조직을 보고 우리를 더욱더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은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단 2주 만에 한 순회 감독자는 그 영화를 17회나 상영하였는데, 대부분 야외에서 상영하였으며, 5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또 다른 여행 중에 한 순회 감독자는 물살이 센 강 위에서 이틀을 지낸 다음 정글의 소로를 따라 도보로 갔는데, 많은 인디오들이 생전 처음 본 영화인 그 영화를 즐겁게 관람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기울인 노력에 대해 넘치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다음날에는 대부분 장로교인인 많은 마을 사람들이 우리 잡지를 받았습니다. 이 방문의 결과로 여호와의 백성에 대한 마을 전체의 태도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1953년부터 1966년까지 가이아나는 정치적·인종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1961년부터 1964년까지의 기간은 최악의 시기였고, 폭동, 약탈, 살인, 총파업이 일어났습니다. 대중교통 수단의 운행이 중단되었고 두려움이 널리 퍼졌습니다. 형제들은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일부 형제들은 당시에 만연한 상황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형제는 구타를 당하였고 앨버트 스몰을 포함한 다른 두 형제는 산탄총의 작은 탄알에 맞아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에 가야 하였습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게 변하자 영국 군대가 개입하였습니다.

그러한 격동의 시기에, 모든 나라에서 나와 참다운 평화와 연합을 전시하는 백성에게 초점을 맞춘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는 아주 시기적절한 영화였습니다! 게다가 형제들은 대중교통 수단의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해서 집회 참석이나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평소보다 조금 더 걷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전거를 탔습니다. 무엇보다도 형제들은 서로 참다운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앨버트 스몰은 “형제들은 서로 돌보아 주며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주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자매들이 활동에 앞장서다

자매들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왕국 소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 예로서 아이비 하인즈와 플로렌스 톰은 정글 가장자리에 위치한 바티카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마하데오라는 고립되어 있는 전도인이 그곳에서 아내 자멜라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의 동인도 여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자멜라 역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해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자멜라는 직접 성서를 읽고 싶어 하였고 두 아들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어 하였습니다. 플로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축복과 저의 도움으로, 자멜라는 금세 읽기와 쓰기와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기술을 익혔습니다.”

플로렌스와 아이비는 도착한 지 두 달이 지났지만 살기 적합한 곳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집회를 열 수 있는 장소도 필요하였는데, 그들은 이미 열 건이 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순회 감독자의 방문에 관한 통지를 받았을 때, 그들은 상황이 몹시 다급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내륙 지방의 노동자들과 조지타운의 많은 매춘부들이 바티카로 몰려오기로 되어 있던 바로 그 주에 순회 방문이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때는 도시 인구가 세 배로 늘어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습니다. 플로렌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순회 감독자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늦은 오후에 우리는 시 중심부에 있는 침실이 두 개인 작은 오두막을 세로 주겠다고 한 집주인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벽을 박박 문질러 닦고 칠을 한 다음 바닥에 광을 내면서 매우 열심히 일했습니다. 커튼을 달고 가구를 옮겼으며, 일은 새벽에 마쳤습니다. 그날 밤은 정말이지 바빴습니다! 순회 감독자인 존 폰팅은 우리 이야기를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그가 방문한 첫날 밤에 22명이 참석하여 조만간 바티카 회중이 설립될 것이라는 기대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왕국 선포자호로 강들을 누비다

초기에, 형제들은 강을 끼고 있는 정착지들을 방문하기 위해 배나 카누 등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활용하였습니다. 후에 형제들은 자체 보트를 소유하였는데, 그 배들은 이름이 왕국 선포자 1호, 왕국 선포자 2호 왕국 선포자 5호까지 있었습니다. (그중 처음으로 소유한 두 척의 배는 현재 운항하지 않는다.)

프레더릭 매캘먼은 이렇게 말합니다. “썰물일 때에는 노를 저어 포메룬 강의 동쪽 강둑을 따라 내려가며 해크니에 다다를 때까지 전파를 하곤 하였는데, 해크니는 강 어귀에서 11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 그 지역에서 조산사로 일하던 디캄브라 자매의 집에서 편안하게 하룻밤을 묵곤 하였습니다. 다음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강 어귀까지 계속 내려가 서쪽 강둑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채리티를 향해 34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오면서 봉사를 하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6마력짜리 중고 선외 모터를 구입할 때까지 5년 동안 노를 저어 포메룬 강을 오르내렸습니다.

물길을 항해하는 일에는 대체로 별다른 위험이 없었지만, 다른 배들도 다니기 때문에 형제들은 조심해야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국 선포자 1호2호는 노 젓는 배였기 때문에 속도가 빠르지 않았습니다. 프레더릭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포메룬 강에서 증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전속력으로 운항을 하던 큰 화물선이 내가 탄 배를 들이받았습니다. 그 배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럼주를 마시며 흥청거리느라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나는 왕국 선포자 1호에서 튕겨 나가 그들의 배 아래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프로펠러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들의 배 밑바닥에 계속해서 머리를 부딪히면서 목숨을 건지려고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탈진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한 젊은이가 내가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는 강으로 뛰어들어 나를 구해 주었습니다. 나는 몇 주 동안 부상으로 인해 계속 고통을 겪었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프레더릭은 그러한 불행한 일로 인해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보여 준 성서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전파하는 일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채리티로부터 11킬로미터 떨어진 시리키에서 회중 서적 연구가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나를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와의 한 주간

가이아나의 시골 지역에서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는 일은 체력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순회 감독자들과 그 아내들은 강, 비포장도로, 정글의 오솔길을 여행하는 것에 더하여 모기나 그 밖의 곤충, 큰 고양잇과 동물, 억수 같은 비,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강도들과 맞서야 합니다. 그들은 또한 말라리아, 티푸스, 그 밖의 열대병에 걸릴 위험에도 직면합니다.

한 여행하는 감독자는 데메라라 강 주변의 몇몇 격지 전도인들을 방문한 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매켄지 회중을 방문한 후 월요일에 우리는 나룻배를 타고 야루니 마을에 있는 형제를 방문하기 위해 떠났는데, 야루니는 매켄지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데메라라 강 주변에 있습니다. 일단 그곳에서, 우리는 매켄지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강의 양편을 카누로 다니면서 전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후대를 매우 잘하여 과일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들과 함께 식사를 하자고 초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금요일에는 강으로 노를 저어 나가 증기선에 올랐습니다. 수스다이크에 가서는 증기선에서 카누로 다시 갈아타고 강변으로 나갔습니다. 한 형제가 우리를 마중 나와, 데메라라 강을 건너 조지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그 가족과 함께 집회를 가졌습니다.

다음날 우리 모두는 데메라라 강을 건너 수스다이크로 가면서 그 구역뿐 아니라 티메리 공항 근처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우리는 또한 조지타운으로 실어 나를 모래를 트럭에 선적하는 곳인 모래 언덕들에도 갔습니다. 토요일 밤에는 조지아에 있는 가족과 또 다른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모두는 다시 강을 건너 수스다이크로 가서 오전에는 야외 봉사를 하고 오후에는 탁 트인 우체국 베란다에서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한 주가 끝났습니다.” 이러한 헌신적인 순회 감독자들과 그 아내들의 부지런한 활동은 보상을 받아서, 현재 수스다이크에는 번창하는 회중이 있습니다. 형제들은 1997년에 완공된 자체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에게도 불상사는 있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을 하던 제리 머리와 델마 머리 부부는 한 운하에 오게 되었는데, 그곳에 있던 다리는 몇 안 되는 널빤지를 묶어서 만든 것이었습니다. 델마는 제리가 오토바이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동안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다가 문제가 생겼는데, 제리와 오토바이, 그리고 옷 가방이 모두 다리 밑으로 떨어져 혼탁한 깊은 물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델마는 비명을 질렀고, 마을 사람들이 구조하기 위해 달려왔습니다. 잠시 후에, 한 형제가 기록한 바와 같이 “백인이 몸에 수초(水草)를 걸치고 신발에 진흙을 잔뜩 묻힌 채 철벅거리며 힘겹게 물가로 걸어 나왔을” 때, 염려는 웃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인디오들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이다

1970년대 초에 프레더릭 매캘먼은 채리티의 시장에서 증거를 하다가 모니카 피찰렌(176면 네모 참조)이라는 이름의 인디오 여자에게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인디오 보호 구역에 살고 있는 모니카는 잡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니카는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잡지를 읽고 그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그 보호 구역에 유일한 좋은 소식의 전도인이 되었고, 197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모니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새로 알게 된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을 기뻐하면서 활기차게 호별 방문 증거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집에 가려면 강이나 지류를 따라 노를 저어 가야 하였습니다. 관심자들의 수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함께 성서 연구 보조서인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의 내용을 읽고 토의하는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니카의 부지런한 활동은 열매를 거두었습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현재 그의 남편, 아들, 며느리, 손녀까지 포함해서 13명의 전도인이 즐겁게 그와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까지도 이 작은 집단은 가장 가까운 회중이 있는 곳인 채리티에 가기 위해서 12시간 동안 카누를 타고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자기 마을에서 집회를 열며, 참석자 수가 전도인 수의 세 배에 달합니다!

동시에 채리티에 있는 회중 역시 성장하였습니다. 현재 그 회중에는 50명의 전도인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집회에 오기 위해 포메룬 강을 여행합니다. 평균 집회 참석자 수는 60명이 넘으며, 2004년 기념식에는 301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채리티 회중 역시 새로운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미타에서의 주목할 만한 성장

가이아나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였던 또 다른 지역은 바라미타입니다. 가이아나의 북서부에 위치한 바라미타는 카리브 인디오 마을이 있는 곳입니다. 카리브족은 카리브 지역에 제일 먼저 거주한 사람들 가운데 속하며, 카리브라는 지명은 그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들의 언어 역시 카리브어라고 부릅니다.

카리브족 원주민인 루비 스미스는 1975년에 외할머니에게서 전도지 한 장을 받고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81면 네모 참조) 당시에 루비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루비는 영적으로 진보하였고 1978년 “승리의 믿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루비의 가족은 사업상 조지타운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루비는 유스터스 스미스와 결혼하였습니다. 유스터스는 카리브어를 할 줄 몰랐지만 아내와 함께 아내의 친척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꺼이 바라미타로 이사하였습니다. 루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셨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는 1992년에 바라미타로 갔기 때문입니다.”

루비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즉시 마을에서 증거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우리 집 밑의 공간에서 집회를 보았는데, 우리 집은 지상에서 약 1.5미터 위에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사람들이 그곳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기 때문에 우리는 천막을 빌렸습니다. 집회에 관한 소문이 퍼져 참석자들이 증가하였고 결국 그 수는 약 300명에 이르렀습니다! 카리브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파수대」를 통역하는 임무가 맡겨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들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리 비싸지 않은 FM 마이크 송신기를 사용하였고, 참석자들 가운데 다수가 자기 라디오를 가지고 와서 단지 올바른 주파수에 맞추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무렵에 남편과 나는 이 집단을 위한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비용을 계산하고 공사 계획에 관하여 논의해 본 다음 그 일을 추진해 나갔습니다. 오빠인 세실 베어드가 대부분의 건축 자재를 기부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노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공사는 1992년 6월에 시작되었으며, 이듬해 초반의 기념식에 꼭 맞게 완공되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인 고든 대니얼스의 강연에 800명이 참석하였을 때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바라미타 집단은 1996년 4월 1일에 회중이 되었고, 5월 25일에 왕국회관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회관을 확장하여 현재 500석 이상의 안락한 좌석을 갖추게 되었으며, 형제들은 그 회관을 순회 대회나 특별 대회일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작은 그룹으로 시작한 것이 오늘날에는 전도인이 100명 가까이 되고 공개 집회의 평균 참석자 수가 300명인 회중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념식에는 1416명이나 참석하였습니다!”

매우 성대한 결혼식!

바라미타 지역에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해 오던 많은 남녀들이 성서 표준과 일치시키기 위해 자기들의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였습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출생증명서와 같은 필요한 서류들을 취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기는 했지만, 생년월일이나 그 밖의 세부 사항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들도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79쌍의 남녀가 합동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인 아딘 실스가 결혼식 주례사를 하였습니다. 사흘 후에는 대부분이 신혼인 41명이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나타냈습니다.

바라미타에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관심을 나타내었으며, 마을 전체에 주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왕국회관 봉헌식에서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라미타는 이제 조용하고 평온한 곳입니다. 보통 마을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95년에 바라미타 지역은 심한 가뭄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여교사인 길리언 퍼사드는 당시 바라미타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길리언은 근처의 작은 비행장에 경비행기가 착륙하는 소리를 듣고는 조종사가 다시 이륙하기 전에 그를 붙잡아 세우려고 힘껏 달려갔습니다. 길리언은 조종사를 설득하여 조지타운에 데려다 달라고 하였고, 조지타운에 도착해서는 내리자마자 곧바로 지부 사무실로 가서 형제들이 처한 곤경에 관해 알렸습니다.

당시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이었던 제임스 톰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통치체는 우리에게 식품과 다른 생필품을 바라미타에 공수하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36명의 전도인에게 비행기를 타고 조지타운으로 가서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마련할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그 대회는 처음으로 참석하는 대회였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

1987년에 봉사 훈련 학교가 개교한 이래로 많은 나라에서는 그 학교를 졸업한 독신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의 활동으로부터 유익을 얻어 왔습니다. 가이아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많은 지방 형제들은 인근의 트리니다드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후 가이아나의 왕국 활동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현재 정규 파이오니아나 특별 파이오니아나 회중 장로로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고향 회중으로 돌아온 형제들은 여호와의 양 떼를 돌보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가외의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 예로서 친형제간인 플로이드 대니얼스와 라와니 대니얼스는 장로가 절실히 필요한 회중들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데이비드 퍼사드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동기생인 에드셀 헤이즐은 가이아나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학교를 나온 일부 형제들에 관하여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 형제들 모두가, 특히 그들이 봉사 훈련 학교를 나온 뒤에 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함

1970년대 말, 에세퀴보 강 서쪽의 대서양 연안에는 약 3만 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그중에 전도인은 30명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부에서는 때때로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하여 한 번에 한 달 동안 그 구역의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게 하였습니다. 한 증거 집단을 돌보던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은 그 구역을 전부 돌고 1835권의 서적을 전할 수 있었으며 많은 재방문을 하였고 여러 건의 새로운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형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2시간 동안 노를 저어 27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탕을 헤치며 보트를 끌거나 밀어야 했지만, 집주인들이 후대를 잘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은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음악 교사인 한 사람은 음악을 가르치는 데 우리의 노래책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편곡이 정말 잘되어 있더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를 위해 노래 두 곡을 연주해 주고는 여섯 권의 서적을 받았습니다.”

다른 형제 자매들은 더 크게 필요한 지역을 돕기 위해 자신을 내놓았습니다. 셜록 파할란과 줄리엣 파할란 부부의 모범을 고려해 보십시오. 셜록은 이렇게 씁니다. “1970년에 아내와 나는 에클즈 회중을 돕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회중은 데메라라 강가에 위치한 조지타운에서 남쪽으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곳 회중에는 문제들이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제명되어야 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회중에는 활동적인 전도인 약 12명과 그들의 침례받지 않은 자녀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장로는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회중에서는 외진 마을인 모카에 있는 작은 집단도 돌보았습니다. 월요일 저녁에는 모카에서 회중 서적 연구를 사회한 다음 에클즈에서도 사회를 한 번 더 하였습니다.

나는 또한 「파수대」 연구도 사회해야 하였습니다. 각자에게 돌아갈 만큼 잡지가 충분했던 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각 항을 읽고 난 다음 질문을 하였는데, 당시의 일반적인 진행 순서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잦은 정전 때문에 우리는 집회 때 초를 가지고 왔으며 우기에는 모기 떼를 견뎌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집회에 오거나 증거하기 위해 구역으로 갈 때 대부분의 형제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탔습니다. 모카에 있는 전도인들이 에클즈로 올 때도 그러했습니다. 집회를 마치면 나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내 작은 승합차에 잔뜩 태운 다음 그들을 모카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주곤 하였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까? 파할란 형제는 당시를 돌이켜 보면서 이렇게 씁니다. “에클즈에 있는 동안 아내와 나는 많은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했으며, 그들 중 다수가 가족들과 함께 진리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남자들 중 몇몇은 지금 회중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복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파이오니아의 낙원”에서 봉사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대부분 파이오니아들인 약 50명의 형제 자매들이 미국, 아일랜드, 영국, 캐나다, 프랑스로부터 “물의 나라”로 와서 “오시오! ···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마시십시오”라고 초대하는 일에 가담하였습니다. (계시 22:17) 어떤 사람들은 몇 달 동안,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자금이 떨어지면 많은 사람들은 귀국하여 잠시 일을 한 다음 다시 돌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이아나에서 봉사하게 된 것을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특히 그들은 일반적으로 성서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영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토의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도 여호와의 증인들과의 토의를 즐깁니다. 더욱이 집주인들은 때때로 형제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이아나를 파이오니아의 낙원이라고 하는 것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라고, 현재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리카르도 하인즈는 말합니다.

남편 에드셀과 함께 현재 지부에서 봉사하는 알린 헤이즐은 가이아나의 시골 지역에서 경험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1997년에 지부와 연락을 취한 다음 우리는 브라질 국경 부근에서 가까운 깊은 내륙 지역의 마을인 레뎀에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동료 캐나다인인 로버트 웰치와 조애나 웰치 부부, 미국인 자매인 세러 디안과 함께 봉사하였는데, 그들은 몇 달 앞서 레뎀에 도착하였습니다. 침례받은 형제인 수의사 리처드 아키도 그때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지부에서는 과거에 연구를 했던 약 20명의 명단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우리는 그들 대부분이 진실한 관심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고 싶어 하였습니다.

망고나무 아래서, 우리 파이오니아 여섯 명을 포함하여 열두 명이 참석한 가운데 첫 집회가 열렸습니다. 몇 달 후에 있은 첫 기념식에는 6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한편 우리 파이오니아 그룹은 세 사람으로 줄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40건의 성서 연구를 돌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가 왔을 때, 그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연구를 중단하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조언이었는데, 계속한 연구들이 잘 발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4년 후에는 레뎀에 14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레뎀에서 특별 대회일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는 1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이 기울이는 노력을 축복하신다는 그러한 명백한 증거는, 그분의 종들이 인내해야 했을지 모를 어떠한 어려움도 충분히 보상해 주는 것입니다.

회관과 “바닥 집”에 를 들다

가이아나에서는 활동이 시작된 때부터 적합한 숭배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과거 1913년에는 조지타운에 있던 몇 안 되는 형제들이 서머싯 하우스에 세를 들었는데, 서머싯 하우스는 45년 동안 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1970년까지 단 두 개의 회중, 즉 조지타운에 있는 찰스타운 회중과 버비스에 있는 팔미라 회중만이 자체 회관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3년 전에 가이아나는 전도인 1000명 선을 돌파하였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회중들은 세를 든 시설들에서 모였는데, 그런 곳들은 대개 이상적인 장소라고 할 수 없는 곳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950년대 후반에 데메라라 강가에 위치한 위스마르 회중은 점점 증가하여 형제들이 적합한 회관을 찾아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아일랜더 홀이라고 하는 장소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 중에 신권 학교와 봉사회를 위해 모였고, 일요일 저녁에 공개 집회와 「파수대」 연구를 위해 모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집회들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세부적으로 할 일이 꽤 많았습니다. 먼저 형제들은 매켄지에서 작은 배를 타고 위스마르를 향해 데메라라 강을 건넜습니다. 한 형제는 잡지 한 상자를, 다른 형제는 출판물 한 상자를, 또 다른 형제는 여러 가지 양식과 헌금함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물론 집회 전에 이 모든 것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면 이 모든 일을 거꾸로 되풀이하였습니다.

집회는 소위 바닥 집이라고 하는 집 아래의 공간에서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가이아나에서는 홍수에 대한 염려로, 보통 나무 기둥이나 콘크리트 기둥 또는 지주를 이용하여 땅바닥 위로 높이 띄워서 집을 짓습니다. 이러한 설계로 인해 회중 집회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가이아나에서는 만약 어떤 종교가 마땅한 집회 장소를 마련할 만한 여유가 없으면 그 종교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욱이 바닥 집에서의 집회는 때때로 집회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로 방해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개에게 겁을 먹은 닭 한 마리가 집회 장소로 날아 들어와 여섯 살 난 소녀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아이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비명을 질렀고,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건은 집회가 마친 후 우리에게 약간의 웃음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더 나은 숭배 장소가 필요함을 다시금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바닥 집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여는 것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참석하고자 하는 동기를 심어 주지도 못했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프레더릭 매캘먼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32년 동안 채리티 회중에 있으면서 우리는 다섯 차례 다른 바닥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집의 밑 부분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 들보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였습니다. 한 자매가 자기 아이를 업고 오다가 들보의 높이를 잘못 판단하여 들보에 아이의 머리를 찧었습니다. 나중에 그 자매는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인 자기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 자매의 부모는 회중에 자체적인 숭배 장소가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실제로 그 자매의 어머니는 회중에 한 구획의 땅을 기증하였고, 그 자매의 아버지는 왕국회관 건축을 위한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날 원래의 그 왕국회관은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여전히 그 마을에서 참 숭배의 중심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건물은 또한 지방 순회구를 위한 작은 대회 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초기에는 왕국회관을 완공하는 데 여러 달이 걸렸습니다. 에클즈에 있는 회관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당시 에클즈에서 장로로 봉사하였던 셜록 파할란은 이렇게 말합니다. “집회는 학교에서 열렸습니다. 우리는 자체 왕국회관을 소유하기만 하면 더 큰 증가가 이루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에클즈에 있던 몇 안 되는 전도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관 건축을 결의하였습니다. 나는 구역 내의 적합한 부지를 찾았지만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한편, 조지타운에 있는 형제들은 우리에게 주형 두 개를 빌려 주고 콘크리트 블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블록 12개를 만드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계속 반복하면서 우리는, 특히 자매들은 매우 능숙해졌습니다. 다른 어려움은 시멘트를 구하는 일이었는데, 당시에는 시멘트가 배급제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해진 양의 시멘트를 받기 위해 신청을 해야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배급량을 확실히 받기 위해 아침 일찍 부두로 나가서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그다음에는 에클즈로 가는, 시멘트를 실어 나를 공간이 충분한 트럭을 찾아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지가 필요하였습니다.”

셜록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972년에 아내와 나는 휴가를 내어 캐나다에 있는 사촌을 찾아갔는데, 그는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에클즈에 땅을 두 군데 가지고 있는데 그 땅을 돌보는 친척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면서 마침 에클즈에서 왕국회관을 지을 만한 부지를 찾고 있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두 군데의 땅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건축 공사 중에 하느님이 도와주신다는 또 다른 증거를 보았습니다. 시멘트 외에 다른 많은 건축 자재들이 부족하였지만, 우리는 다른 자재로 대체하거나 임시로 만들어 쓰면서 어떻게든 항상 일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필요한 기술을 갖춘 형제들이 거의 없었고 자원 봉사자들을 공사 현장까지 데리고 오는 일에도 많은 계획이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형제들을 태워 나르느라 내 작은 승합차는 수백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마침내 우리의 왕국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칼 클라인도 와서 봉헌사를 해 주었습니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었습니다!”

속성 건축 왕국회관

최근인 1995년까지도 가이아나에 있는 회중들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바닥 집을 포함하여 세든 건물에서 모였습니다. 따라서 지부에서는 이러한 필요를 돌보기 위해 전국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바로 그해 10월에 형제들은 조지타운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마하이코니 강에 인접한 마하이코니에 최초로 속성 건축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네 번의 주말 동안에 왕국회관을 건축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은 한 이웃 사람은 “닭장을 짓는다면 모르겠지만, 콘크리트 건물이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거요” 하고 말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오래지 않아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때때로 인종 간의 긴장이 팽배해지는 나라에서는, 왕국회관 건축 계획이 여호와의 증인들은 인종이나 국적에 상관없이 참 그리스도인 연합 가운데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잘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사실 마하이코니에서 있었던 공사를 지켜본 한 연로한 여자는 순회 감독자에게 “서로 다른 여섯 인종의 사람들이 저기서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봤어요!” 하고 감탄을 했습니다.

지부 건축

1914년에 최초의 가이아나 지부 사무실은 필립스의 집에 있었는데, 1946년이 되기까지도 계속 그곳에 있었습니다. 1946년에는 91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1959년쯤에는 그 수가 685명으로 증가하였으며 활동은 계속 확장되었습니다. 그래서 1960년 6월에 형제들은 조지타운의 브릭댐 50번지에 있는 부동산을 매입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곳에 있던 건물들을 약간 개수하여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1986년이 되자 이 건물들로도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체의 승인을 받아 그곳에 새로운 지부가 건축되었습니다. 국제 종들이 지방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1987년에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아버지를 도와 예루살렘 성벽의 한 구역을 재건하였던 살룸의 딸들처럼, 자매들도 지부 건축 공사에서 소중한 존재임이 증명되었습니다. (느헤미야 3:12) 예를 들어, 자매 120명이 약 10개의 팀으로 나누어져 공사에 필요한 콘크리트 블록 1만 2000개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16개의 주형을 사용하여 55일 만에 그 일을 끝냈습니다. 그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콘크리트는 배합이 정확해야 했는데, 시멘트가 알맞게 굳도록 충분히 질어야 하지만, 주형에서 떼어 낼 때 블록이 망가질 정도로 너무 질어도 안 되었던 것입니다.

지방 형제들은 야간 경비를 섰는데, 그들은 종종 세속 일을 마치고 곧바로 공사 현장으로 왔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국제 종들과 함께 일하였으며, 국제 종들은 형제들에게 유용한 기술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젊은 형제들 중에 한 명인 해리너린 (인달) 퍼사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일은 창문틀 모서리에 몰딩을 두르는 일이었는데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나는 제대로 될 때까지 애를 써 가며 일을 했습니다. 감독자는 일이 잘되었나 본 다음 내가 기울인 노력에 분명 만족해하면서 ‘이제 지부 전체를 돌면서 그 일을 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현재 그 젊은 형제는 왕국회관 건축이 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문 기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특정 자재들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 당국의 협조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포브스 L. 버넘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을 비롯하여 많은 관리들이 공사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지방 목수와도 같은 일솜씨에 모든 사람들이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건물에 최고 수준의 작업을 하고 있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1988년 1월 14일에, 지구 감독자로 봉사하는 브루클린의 대표자 돈 애덤스가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2001년 2월 12일에 또다시 건축을 위해 부지를 골랐는데, 이번에는 새로운 장소였습니다. 다시 한 번 국제 종들이 지방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건축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지부는 2003년 2월 15일 토요일에 봉헌되었습니다. 독일 지부에서 온 리처드 켈시가 332명의 청중에게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초기의 많은 선교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즐기기 위해서 가이아나로 돌아왔는데, 몇몇 선교인들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12개 나라에서 온, 가이아나의 전도인 수의 두 배가 넘는 4752명이 특별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창의성을 요구한 대회들

형제들은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을 위해 흔히 건물들을 빌립니다. 시골 지역에서는 모임 장소를 세우기까지 할지도 모릅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가이아나에서 봉사한 토머스 마커비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대회는 조지타운에서 데메라라 강을 따라 약 60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열렸습니다. 조지타운에서 약 200명의 증인들이 그곳 형제들을 지원하기 위해 참석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지에서 나는 자재를 이용하여 임시 대회 회관을 짓기로 결정하였는데, 대나무로 버팀목과 의자를 만들고 바나나 잎사귀로 지붕을 덮었습니다.

우리는 자재들을 모아서 작은 궤도차에 실은 다음 경사로를 따라 내려 보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커브길에서 궤도차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흔들거리며 질주하더니 실어 둔 자재가 모두 강 속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재난은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었는데, 그 자재들이 편리하게도 공사 현장까지 바로 떠내려갔던 것입니다! 대회가 시작되었을 때, 방문한 형제들은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이 사흘 동안의 프로그램에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가슴 뭉클하였습니다.”

토머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대회가 끝난 후에 우리 모두는 인근의 임명되지 않은 몇몇 구역들에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한 마을에서 우리는 공개 강연을 하였는데 마을 사람들 모두가 왔으며, 심지어는 애완용 원숭이까지 왔습니다. 그 원숭이는 잠시 동안 듣고 있더니 좀 더 좋은 다른 자리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원숭이는 몇 번 폴짝폴짝 뛰어와서 내 어깨 위에 앉았습니다. 원숭이는 잠깐 둘러보더니 다시 주인에게로 뛰어 돌아가 연설이 끝날 때까지 있었는데, 나로서는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큰 대회들

지난 세기 초에는 큰 모임들이 대개 카워드 형제나 영 형제와 같은 세계 본부의 특별 대표자들이 방문할 때에 맞추어 열렸습니다. 1954년에는 네이선 노어와 밀턴 헨첼이 신세계 사회 대회를 위하여 가이아나에 왔으며, 그 대회에 2737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1999년에는 가이아나에서 열린 두 번의 대회에 7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한 대회는 조지타운에서 그리고 다른 한 대회는 버비스에서 열렸습니다. 조지타운의 대회는 마지막 순간에 아주 큰 변동 사항이 생겨 형제들이 문제를 겪게 되었습니다. 지부에서 보낸 편지 내용은 이러합니다. “유명한 영화 배우와 그의 댄스 팀이 인도에서 왔는데, 국립공원 위원회에서는 우리가 먼저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우의 공연을 다른 날에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즉시 다른 장소 즉 크리켓 경기장을 마련하였고, 곧바로 회중들에 통보하였습니다. 대회는 8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카리브 해 지역에서는 크리켓 경기의 열기가 매우 높았으며, 크리켓 경기장을 거의 신성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경기장 관리인 측에서는 우리가 잔디밭을 걸어 다닌다는 것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드라마를 공연할 것입니까? 그리고 어디에 연단을 세울 것입니까?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길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일을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특정한 높이 위로 연단과 연단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 잔디밭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날 밤에 모두가 매우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날씨조차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그동안 거의 내내 비가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은 거의 계획대로 시작되었습니다.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비가 오지 않다가 마지막 날인 일요일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오래지 않아 크리켓 경기장은 물에 잠겼고, 수위는 연단과 통로 5센티미터 아래까지 차올랐습니다. 비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직전에 멎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전선을 땅에 깔지 않고 널빤지 밑에 붙여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연단과 통로를 높게 세워야 했던 것이 실제로는 축복이 되었습니다!”

드라마가 시작되었을 때 6088명의 참석자 모두는 눈부신 햇살 아래 드라마를 즐겼습니다. 2주 후에는 1038명이 버비스에서 열린 두 번째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총 7126명의 참석자는 그때까지 가이아나의 최고 대회 참석자 수였습니다. 좀 더 최근에는 참석자 수가 거의 1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 가운데서 여호와의 회복되고 영광스럽게 된 성전을 보았습니다. 그 성전에서부터 나온 물은 흘러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배로 불어난 급류”가 되었고, 심지어는 소금기가 많아 생명이 없는 사해에까지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에스겔 47:1-12.

1919년 이래 참 숭배의 진보와 더불어, 하느님의 백성은 그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오늘날 성서, 성서 연구 보조서, 집회, 크고 작은 대회와 같은 참된 영적 공급품의 강이 전 세계의 수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영적 갈증을 해소해 주고 있습니다.

가이아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은 그 예언의 성취에 참여하는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합당한 사람들이 이 물의 나라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관계없이, 생명을 주는 영적 양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문자적인 의미로 계속 강을 이용할 것입니다.—사도 13:48.

[각주]

^ 8항 영령 기아나는 1966년 5월에 독립하였을 때 국명이 가이아나로 변경되었다. 여기서는 문맥에 따라 다르게 표기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이아나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이다.

[140면 네모]

가이아나의 개요

국토: 상당부분이 해수면보다 낮은 곳에 있어서 약 230킬로미터에 달하는 제방으로 보호를 받고 있는 해안 지역은, 강물에 의해 퇴적된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부분의 가이아나의 강들이 수원을 두고 있는 내륙의 고원 지대를 포함하여 삼림 지대가 국토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주민: 인구의 절반 정도가 동인도 사람들의 후손이며, 40퍼센트 이상이 아프리카 흑인의 후손이거나 혼혈인이고, 약 5퍼센트가 인디오들이다. 인구의 약 4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며, 34퍼센트가 힌두교인, 9퍼센트가 이슬람교인이다.

언어: 영어가 공용어이지만, 크리올어 또한 전국에 걸쳐 사용된다.

생활: 노동 인구의 약 3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한다. 그밖의 산업으로는 어업, 임업, 광업이 있다.

식품: 주 작물로는 쌀, 카카오(또는 코코아 열매), 감귤류, 코코넛, 커피, 옥수수, 마니오크(또는 카사바), 설탕, 그리고 그 밖의 열대 과일과 야채가 있다. 식용 가축으로는 소, 돼지, 닭, 양이 있다. 주된 해산물은 물고기와 새우이다.

기후: 가이아나는 계절적 변화가 거의 없는 열대 기후이다. 해안 지역은 연 강우량이 150에서 200센티미터에 달한다. 가이아나는 적도 가까이에 있지만 대서양에서 지속적으로 불어오는 계절풍 덕분에 기후가 온화하다.

[143-145면 네모와 삽화]

아무도 그의 입을 “가둘” 없었다

맬컴 홀

출생: 1890년

침례: 1915년

약력: 레구안 섬의 원주민인 그는 그 지역에서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며 그곳에서 발전한 집단을 돌보았다.

그의 종손녀 이본느 홀의 회고

한번은 어떤 선거 위원이 종조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투표를 안 한다는 것이 사실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을 가두고 당신의 성서를 압수하겠소.” 할아버지는 그의 눈을 쳐다보면서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내 입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네 종교 지도자들이 오랫동안 당신에게 감추어 왔던 진리를 말하지 못하게 내 입도 가둘 수 있겠습니까?” 그 위원은 별 도리 없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봅시다.”

1915년에 침례를 받은 할아버지는 가이아나에서 가장 일찍 왕국 전파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진리를 위한 진정한 투사”였다고 한 형제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지타운에서 생계를 꾸려 나가다가 왕국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서머싯 하우스에서 있었던 공개 강연을 단 한 번 듣고 나서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집으로 가서 자신의 성서로 모든 성구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 후에 할아버지는 레구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즉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왕국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는 할아버지의 누나와 여동생과 몇몇 나이 든 조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아버지의 집에서 모인 집단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교직자들이 섬 주민들을 꽉 쥐고 있어 사람들에게서 좋은 소식에 대한 반응을 얻어 내기란 정말 힘들었습니다. 교직자들은 할아버지를 보고 “미친 성서광”이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도 할아버지의 열심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예로 할아버지는 일요일 아침마다 현관에 축음기를 설치해 놓고 녹음된 성서 공개 강연을 틀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길가에 서서 그 강연을 듣곤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몇 사람들이 감사하는 태도로 반응을 보였습니다. 기념식 날 밤에는 그 점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할아버지의 집 2층이 사람들로 가득 들어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사회자이자 연사이자 유일하게 표상물을 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성서 연구생 중 한 명인 리로이 덴보우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으며 한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에세퀴보 강의 선박 사무장이던 할아버지는 세속 직업에서 은퇴한 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레구안 섬과 인근의 와크남 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새벽 4시 30분에 일과를 시작하여 우유를 짜고 돼지를 돌보았습니다. 오전 7시 30분쯤에는 몸을 깨끗이 씻고 일용할 성구와 성서 구절을 읽고, 아침을 먹고, 그런 다음 봉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나가기 전에 펌프로 자전거 바퀴에 공기를 넣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어느 날이든 할아버지는 최소한 20킬로미터는 다녔습니다.

할아버지는 약 70년 동안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고 나서 1985년 11월 2일에 지상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 기간 내내 아무도 할아버지의 입을 “가둘”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현재 레구안 섬과 와크남 섬에는 회중이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155-158면 네모와 삽화]

어린 시절의 질문들에 대한 답이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앨버트 스몰

출생: 1921년

침례: 1949년

약력: 1953년에 파이오니아 봉사 시작. 아내 실라와 함께 1958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다가 다시 가이아나로 임명되었다.

“하느님이 너를 만드셨단다.” 이 말은 소년 시절부터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네 명의 동기간 중에 내가 제일 못하다고 말할 때면, 나는 하느님께서 세 명의 착한 아이와 한 명의 나쁜 아이를 만드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나는 주일 학교 교사에게 “하느님은 누가 만들었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도 얻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이가 들자 나도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장로 교회로 나갔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진 많은 질문들은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곤 하였는데, 그중 한 부분은 이러합니다. “자기 성에 있는 부자 남자, 그 문간에 있는 가난한 남자. 하느님은 그들을 높고 낮게 만드시고, 그들의 신분을 정해 두셨네.” 나는 ‘하느님이 정말 “그들의 신분을 정해 두셨”을까?’ 하고 궁금해하였습니다. 한번은 목사에게 “만약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다면 다른 인종들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간단하게도 창세기의 내용이 신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우리는 영국 군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결국 교회에서 가르친 것이 내가 성서에서 읽은 것과 상반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하고 자문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나는 24세가 되었을 때 실라와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교회에서 집으로 막 돌아왔는데, 여호와의 증인이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을 지옥이 없는 교회라고 부르곤 하였고,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개인 집에서 집회를 열었고 사제복도 입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나는 훌륭한 여자와 결혼한 것을 비롯하여 내 생애에 있었던 특정한 일들로 인해 하느님이 나를 돌보고 계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네십 로빈슨이라는 그 증인이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자전거 바퀴를 때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이어가 펑크 났어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좀 거들어요.” 그런 다음 나는 휙 돌아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다음 주에 성서를 손에 들고 교회에 가려고 문을 나서는데, 네십이 계단을 막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네 종교에는 관심이 없어요. 아내가 안에 있으니 아내에게나 이야기하세요.” 그러고는 교회로 갔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한 것을 후회했는데, 교회에서 목사가 하는 말은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만일 로빈슨씨가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면 아내가 일요일마다 하는 특별 수프를 준비할 시간이 모자랄 텐데’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해 보니 수프가 다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호기심에서 나는 아내에게 “로빈슨인가 하는 사람하고 이야기해 봤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네. 그 사람은 내가 요리할 동안 앉아서 전도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내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아내가 우리의 첫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사산이었습니다. 나는 로빈슨 씨에게 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하느님의 잘못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그들로부터 물려받은 우리의 불완전성의 결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은 만족스러웠습니다.

네십은 내가 나의 가구 작업장에 있을 때 종종 나를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주로 내 일을 중심으로 대화를 하였지만, 그는 어떤 식으로든 떠나기 전에 성서에 근거한 요점을 한 가지는 알려 주곤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대화는 가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것으로 점점 바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정식” 교직자들도 끝내 답을 알지 못했던, 평생 나를 괴롭혀 오던 한두 가지 질문을 하면 네십 역시 난감해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네십의 말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첫 번째 질문, 즉 “누가 하느님을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네십은 「킹 제임스 성경」으로 시편 90:2을 읽었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들이 생기기 전, 주께서 땅과 세상을 조성하시기도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어떻게 알려 주는지 보셨나요? 아무도 하느님을 만들지 않았답니다. 그분은 항상 계셨지요.” 나는 이러한 명백하고 논리적인 대답에 놀랐습니다.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여러 해 동안 내 속에 꽉 담아 두었던 모든 의문점을 질문하였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네십의 대답, 특히 땅을 낙원으로 만드실 하느님의 목적에 대한 대답은 전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마음의 기쁨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처음으로 왕국회관에 갔던 일은 특히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나는 청중이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교회에서는 한 번도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집회에 참석해 본 적이 없었던 아내는 그때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아내에게 이야기하자 아내는 “함께 가 봐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5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집회에 함께 나가고 있습니다!

아내와 나는 1949년에 대서양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1953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년 후에는 아내도 현재 50년째가 된 전 시간 봉사의 천직에 가담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길르앗 제31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고 우리는 다시 가이아나로 임명되었습니다. 우리는 23년 동안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고, 그런 다음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알려 주신 것에 대해서뿐 아니라 아내와 내가 그분을 섬기도록 허락하신 것에 대해서도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163-166면 네모와 삽화]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조이슬린 라말호 (이전의 성은 로치)

출생: 1927년

침례: 1944년

약력: 현재는 과부이지만, 남편과 함께 한 여행하는 봉사를 포함하여 54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나는 네비스의 카리브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홀어버이로서 감리교인이며 간호사였습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의 직장 때문에 우리는 섬에 있는 작은 마을로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 맞은 일요일에 우리는 감리 교회에 가서 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몇 분 뒤에 그 자리의 “주인”이 왔으니 다른 곳에 앉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비록 다른 교구민이 친절하게도 우리가 “자기” 자리에 앉아도 된다고 하기는 했지만, 어머니는 다시는 그 교회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성공회 교회에 나갔습니다.

1940년대 초에 어머니는 친구 집에 갔다가 세인트키츠에서 온 증인을 만나 그에게서 출판물을 몇 부 받았습니다. 독서광인 어머니는 그 출판물을 탐독하고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어머니는 재혼을 하였고, 우리 모두는 트리니다드로 이사하였습니다. 당시에 우리 출판물은 그 나라에서 금지되어 있었지만, 우리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는 성공회와 관계를 끊고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으며, 양아버지인 제임스 헨리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트리니다드에서 나는 로즈 큐피라는 젊은 자매를 만났습니다. 11년 후에 로즈가 선교 밭에서 내 짝 중 한 사람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여호와를 섬기려는 나의 열망은 계속해서 자라 갔습니다. 내 자신이 직접 증거한 때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첫 집에서 집주인이 나오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나는 얼마 동안인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성서를 펴서 다니엘 2:44을 읽어 주고는 바로 나와 버렸습니다!

나는 1950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겨우 2년이 막 지나고 나서 길르앗 제21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고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우리 학급에서 세 사람이 가이아나에 임명되었는데, 가이아나 출신의 플로렌스 톰과 나의 방짝 린도르 루리 그리고 나였습니다. 우리는 1953년 11월에 도착하여 스켈던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은 조지타운에서 약 180킬로미터 떨어진, 코런타인 강 어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격지 집단은 우리를 몹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켈던 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동인도 배경의 사람들이었고 힌두교인이거나 이슬람교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맹자였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증거하면 그들은 종종 “브럭 앰 업, 시스타”라고 대답했는데, 그 말은 “또박또박 말하거나 간단하게 말해 주세요, 자매”라는 뜻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집회에 20명 내지 30명이 참석하곤 하였지만, 진정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사람들이 오기를 그만두면서 그 수는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한 여자는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싶어 할 정도로 진보하였습니다. 하지만 약속된 시간에 그의 집을 찾아가 보니,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나와 함께 가고 싶어 하던 사람은 열네 살 된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로치 양, 나 대신 프레더릭을 데리고 가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그 여자의 아버지가 압력을 가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인 프레더릭 매캘먼은 영적으로 훌륭하게 진보하여 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170면 네모 참조.

나중에 나는 헨리에타로 임지가 조정되었는데, 그곳에는 격지 전도인인 형제 한 명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채리티 회중이 돌보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파이오니아 짝은 앞서 언급한 로즈 큐피였습니다. 로즈와 나는 매주 나흘을 헨리에타에서 보내고, 금요일에는 집회를 위해서 일찍 출발하여 자전거를 타고 채리티를 향해 먼지 나는 도로를 따라 30킬로미터를 넘게 달려갔습니다. 우리는 식료품, 시트, 담요, 모기장을 싣고 갔습니다.

우리는 길을 따라 가면서 증거하였고 몇몇 격지 전도인들과 무활동인 한 자매를 격려하기 위해 잠시 멈추곤 하였습니다. 보통 그들과 함께 「파수대」 연구를 하였습니다. 일요일에는 헨리에타로 돌아와서 우리의 성서 연구생들을 그룹으로 모아 놓고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때때로 자전거 바퀴의 바람이 빠지거나 비를 맞아서 흠뻑 젖은 일이 있었을 뿐, 심각한 불상사는 전혀 겪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결코 시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어느 날 한 여자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항상 행복하군요. 여러분을 괴롭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에 더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 봉사의 직무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방문하던 무활동 자매도 다시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매는 여전히 충실합니다.

1959년 11월 10일에 나는 파이오니아인 임마누엘 라말호와 결혼하였습니다. 우리는 헨리에타에서 남쪽으로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서디에서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임신을 했지만 유산을 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봉사의 직무에서 바쁘게 보낸 것이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자녀 둘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에 남편은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여러 다른 구역에서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우리는 몇몇 작은 집단이 장로들과 봉사의 종들과 심지어 자체 왕국회관까지 갖춘 번성하는 회중이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여행하는 활동도 즐겼습니다. 남편이 몹시 그립기는 하지만 여호와와 회중의 사랑에 찬 지원은 계속해서 큰 위로가 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봉사에 대한 여호와의 초대에 이러한 말로 응답하였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야 6:8) 고인이 된 남편과 나는 그 예언자의 훌륭한 태도를 본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사야처럼 어려운 시기를, 심지어 낙심하게 만드는 시기를 인내하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린 기쁨은 그러한 어려움들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170-173면 네모와 삽화]

나의 길르앗 임지는 나의 고국이었다

프레더릭 매캘먼

출생: 1942년

침례: 1958년

약력: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후에 다시 가이아나로 임명되었다. 아내인 마셜린드와 함께 현재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내가 열두 살 때, 선교인인 조이슬린 로치(현재의 성은 라말호)가 어머니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도 그 토의에 함께 하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연구를 중단하였지만, 나는 계속하였고 모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열네 살 때, 로치 자매와 그의 동료 선교인인 로즈 큐피와 린도르 루리는 증거하러 갈 때 자전거에 나를 태워서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들이 나타낸 선교 봉사의 영은 당시에 내가 깨달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내게 주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했을 때, 성공회 신자로서 견진 성사를 받을 준비도 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사제가 “성” 삼위일체에 대해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잠시 듣고 있다가, 나는 그 교리가 성서에 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네가 특정한 서적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 서적들은 독이다. 그것들을 읽지 마라. 너는 삼위일체를 믿어야 해.” 그때 이후로 나는 다시는 성공회 교회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계속 증인들과 연구를 하였습니다. 나는 1958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63년 9월에 나는 지부 사무실로부터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도록 초대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새로 받은 임지는 코런타인 강에 있는 피리쉬 회중이었고, 내 짝은 월터 맥빈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일 년 동안 봉사하면서 강의 상·하류에 있는 구역을 돌았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다음 임지인 파라다이스 회중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었는데, 1964년에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그곳에는 1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4년이 넘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회중 성원이 25명으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1969년에 나는 길르앗 제48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에 나는 감격스럽게도 브루클린 베델 가족의 손님으로 1969년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충실한 형제 자매들을 그토록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그 대회는 정말이지 대단한 영적 연회였습니다! 나는 통치체 성원 중 한 사람인 프레더릭 W. 프랜즈가 우리를 자기 방에 초대한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가 가진 책이 얼마나 많았던지, 침대를 어디에 두는지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우리의 길르앗 강사 중 한 사람인 율리시스 글래스 또한 하느님의 말씀의 훌륭한 연구생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잘 쓰고 잘 가르치는 일의 기본은 정확성과 간결성과 명료성입니다”라고 하던 말이 아직도 들리는 듯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임지가 가이아나라는 것을 알고서 실망스러웠습니다. 나에게 가이아나는 고국이었지, 외국 임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글래스 형제는 친절하게도 나를 따로 불러서 사물을 다르게 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길르앗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큰 특권이라고 상기시켜 주었으며, 아마도 내가 가이아나에서도 생소한 지역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고, 나는 포메룬 강에 있는 채리티 회중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에 채리티에는 전도인이 다섯 명뿐이었습니다.

내 짝인 앨버트 탤벗과 나는 강을 여행해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우리 배를 조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였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물살과 바람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한군데 가만히 머물러 있거나 그저 빙빙 돌기만 할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가장 잘 가르쳐 준 사람들 중 한 명이 지방 자매였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0년 동안 우리는 힘들여 노를 저어 가며 여기저기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지방 주민 한 사람이 회중에 모터를 팔겠다고 제안하였는데, 우리는 그 모터를 살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바로 그 모터를 사라고 지부 사무실에서 보내온 수표를 받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회중들에서 우리의 필요에 관한 소문을 듣고 우리를 돕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다른 배들을 구하였는데, 그 배들에 모두 왕국 선포자라는 이름이 붙었고 각각의 배들을 구분하기 위해 그 뒤에 번호를 붙였습니다.

여러 다른 파이오니아 짝들과 함께 봉사를 한 후에, 나는 내 인생의 짝이 된 마셜린드 존슨을 만났는데, 마셜린드는 매켄지 회중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있었습니다. 사망한 그의 아버지 유스터스 존슨은 사망하기 전 약 10년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를 했던, 가이아나에서 잘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현재 정규 파이오니아인 아내와 나는 합쳐서 72년간의 전 시간 봉사를 하였고, 그 가운데 55년 동안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여섯 자녀를 키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봉사의 직무에서 기울인 나의 노력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한 예로 우리는 1970년대 초반에 포메룬 강을 따라 증거를 하다가 젊은 재단사를 만났는데, 그는 성서 연구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는 훌륭한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성서 책들의 이름을 외우도록 권하였습니다. 그는 일주일 만에 그 이름들을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그 페이지 수까지도 다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들의 아홉 자녀 중 일곱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그는 나와 함께 채리티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초기의 열심 있는 선교인들이 보여 주었던 훌륭한 본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76-177면 네모와 삽화]

나는 편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였다

모니카 피찰렌

출생: 1931년

침례: 1974년

약력: 격지 구역에 있던 그는 2년 동안 편지로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였고, 동료 인디오들에게 널리 증거하였다. 현재는 시력을 잃었지만 봉사에 사용할 성구들은 기억하고 있다.

나는 와라무리라고 하는 인디오 보호 구역에서 살고 있는데, 그곳은 가이아나 북서부 지역에 있는 모루카 강가에 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진리를 접하게 되었을 때 가장 가까운 회중은 포메룬 강에 있는 채리티 회중이었습니다. 그곳은 통나무 카누를 타고 12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채리티에서 장을 보다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습니다. 프레더릭 매캘먼이 나에게 「파수대」와 「깨어라!」를 제공하였습니다. 나는 잡지를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옷장에 넣어 놓고는 2년 동안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병이 나서 얼마간 침대 신세를 졌고 매우 우울해졌습니다. 그때 문득 그 잡지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잡지를 읽었고 즉시 그것이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즈음에 남편인 유진은 직장을 찾기 시작하였고 강의 하류인 채리티 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도 건강이 좋아지기 시작하여 남편을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내가 가기로 한 주된 목적은 여호와의 증인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었는데, 우리가 머물고 있는 바로 그 집에 증인인 한 부인이 왔던 것입니다. 나는 “「파수대」를 보는 사람인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나는 2년 전에 시장에서 만난 남자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즉시 프레더릭 매캘먼을 찾아 나섰는데, 프레더릭은 우연히 근처의 구역에서 봉사하고 있던 일단의 전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 여자와 함께 온 매캘먼 형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사용하여 성서 연구를 어떻게 하는지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연구에 동의하였습니다. 남편과 나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편지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진리」 책과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이라는 책 두 권을 연구하였습니다. 「진리」 책을 연구하는 동안, 나는 성공회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고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사제는 나에게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들은 성서 이해의 폭이 매우 좁습니다. 가서 당신과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사제는 오지 않았습니다.

보호 구역 내의 유일한 전도인으로서, 나는 새로 알게 된 지식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남편에게도 증거하였는데, 기쁘게도 남편은 나보다 1년 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남편은 14명의 지방 전도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최근에 녹내장과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지만, 나는 봉사에 사용할 성구들은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를 섬길 수 있기에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181-183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의 청’을 들어주셨다

루비 스미스

출생: 1959년

침례: 1978년

약력: 카리브족 원주민인 그는 가이아나 내륙의 인디오 보호 구역인 바라미타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내가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난 때는 1975년이었습니다. 나는 열여섯 살이었습니다. 양아들에게서 전도지를 받은 할머니가 나에게 그것을 번역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할머니는 영어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도지에 설명되어 있는 성서의 약속에 놀란 나는 쿠폰을 작성하여 지부 사무실로 보냈습니다. 요청한 출판물들이 도착하자 나는 그 책들을 연구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배운 성경적 진리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할머니와 이모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슬프게도 아버지는 나의 활동에 반대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할머니와 이모도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 호응하여 몇몇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와서 성서에 관해 더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한편 나는 서적들을 더 많이 읽을수록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내 생활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더욱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무엇인가를 훔쳤다고 고백하는 일과 동생들 중 한 명과의 관계를 좋게 회복하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기도를 한 후에 두 가지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지부 사무실에서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셰이크 바크쉬가 우리 지역을 방문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하지만 바크쉬 형제는 오래 머물 수 없었고, 그래서 그와 유스터스 스미스라는 다른 형제가 나와 편지로 연구를 하였는데, 유스터스는 후에 나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1978년에 나는 “승리의 믿음” 대회를 위해 조지타운에 갔습니다. 나는 수도인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부 사무실로 가서 침례받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앨버트 스몰을 임명하여 내가 장로들이 침례받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토의하는 질문들을 복습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침례받은 여호와의 종이 되어 바라미타로 돌아가게 된 나는 정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열심으로 가득 찬 나는 즉시 전파 활동을 바쁘게 수행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냈으며, 그래서 나는 그들 중 몇 사람에게 간소한 숭배 장소를 짓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나는 매주 일요일에 그곳에서 영어 「파수대」를 카리브어로 통역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의 활동에 반대하였고 일요일에는 집에 있으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몰래 테이프에 기사들을 녹음하였고, 오빠들 가운데 한 명이 집회에서 그것을 틀었습니다. 그 무렵에는 약 100명이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 가족은 사업상 조지타운으로 이사하였고, 할머니는 매튜스리지로 이사하였습니다. 이모는 바라미타에 남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왕국 활동은 한동안 휴면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는 조지타운에서 유스터스 스미스를 직접 만났고, 얼마 안 있어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남편은 카리브어를 할 줄 몰랐지만, 우리는 바라미타에 있는 관심자들이 자라도록 돕기 위해 그곳으로 가기를 원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1992년에 실현되었습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집회들을 조직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참석자 수는 300명가량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파수대」 연구 후에 문맹 퇴치반을 열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우리의 첫아이인 욜란드가 수업을 거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수업을 시작했을 때 욜란드는 열한 살이었고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욜란드와 다른 딸 멜리사 둘 다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93년에 여호와께서는 왕국회관으로 바라미타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카리브어를 할 줄 알고 회중을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로 된 선물”을 주셨습니다. (에베소 4:8) 1996년 4월 1일자로, 우리는 바라미타 회중이 되었습니다. 또한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나의 친동기간 거의 모두가 그 회중에 속해 있다는 것도 알리게 되어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시 37:4.

[삽화]

남편과 함께한 현재의 모습

[148-149면 도해와 삽화]

가이아나—연대표

1900년: 개개인들이 「시온의 파수대」와 성서에 근거한 그 밖의 출판물들을 읽고 토의하기 시작하다.

1910

1912년: E. J. 카워드가 조지타운과 뉴암스테르담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하다.

1913년: 서머싯 하우스 건물에 있는 방을 세내어 집회 장소로 사용하다. 1958년까지 그곳을 사용하다.

1914년: 최초의 지부 사무실이 조지타운에 개설되다.

1917년: 정부가 교직자들의 압력을 받아 특정 출판물을 금지하다.

1922년: 금지령이 해제되다. 조지 영이 방문하다.

1940

1941년: 「파수대」와 「위안」(지금의 「깨어라!」)이 금지되다.

1944년: 여호와의 증인의 모든 출판물이 금지되다.

1946년: 6월에 금지령이 해제되다. 첫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50년대: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가 가이아나 전역에서 상영되다.

1960년: 지부에서 조지타운의 부동산을 매입하다. 그곳의 건물들을 지부와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다.

1967년: 1000명의 전도인 기록을 돌파하다.

1970

1988년: 이전에 소유하고 있던 부지에 새로운 지부를 봉헌하다.

1995년: 첫 번째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완공되다.

2000

2003년: 새로운 부지에 현재의 지부가 봉헌되다.

2004년: 2163명의 전도인이 가이아나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2,000

1,000

1910 1940 1970 2000

[14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가이아나

바라미타

해크니

채리티

헨리에타

서디

조지타운

매사이코니

수스다이크

바티카

야루니

뉴암스테르담

매켄지

위스마르

스켈던

버비스

오리앨라

레뎀

에세퀴보 강

데메라라 강

버비스 강

코런타인 강

베네수엘라

브라질

수리남

[134면 전면 삽화]

[137면 삽화]

이밴더 J. 카워드

[138면 삽화]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에 있는 서머싯 하우스, 1913년부터 1958년까지 회중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다

[139면 삽화]

조지 영

[146면 삽화]

프레더릭 필립스와 네이선 노어와 윌리엄 트레이시, 1946년

[147면 삽화]

1946년 6월에, 가이아나에서 우리의 출판물에 내려진 금지 조치의 공식적 해제를 알리는 이 성명서가 공표되었다

[152면 삽화]

네이선 노어, 루스 밀러, 밀턴 헨첼, 앨리스 트레이시(이전의 밀러), 데이지 헤머웨이와 존 헤머웨이 부부

[153면 삽화]

존 폰팅

[154면 삽화]

제럴딘 톰슨과 제임스 톰슨 부부는 가이아나에서 26년 동안 봉사하였다

[168면 삽화]

보트를 타고 집단 증거를 하다

[169면 삽화]

“왕국 선포자 3호”를 타고 모루카 강을 따라 전파하다

[175면 삽화]

제리 머리와 델마 머리 부부

[178면 삽화]

프레더릭 매캘먼과, 유진 피찰렌과 모니카 피찰렌 부부가 자신의 카누를 수리하고 있는 인디오 남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는 모습

[184면 삽화]

바라미타에서 열린 순회 대회, 2003년

[185면 삽화]

바라미타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성서 진리에 반응을 보였다

[186면 삽화]

통나무 카누를 타고 증거하다

[188면 삽화]

셜록 파할란과 줄리엣 파할란 부부

[191면 삽화]

가이아나—“파이오니아의 낙원”

[194면 삽화]

가이아나의 오리앨라에 있는 왕국회관

[197면 삽화]

조지타운, 브릭댐 50번지에 있는 이전의 지부 사무실, 1987년에 완공됨

[199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에드셀 헤이즐, 리카르도 하인즈, 아딘 실스

[200, 201면 삽화]

새로 건축된 가이아나 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