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라는 말을 들으면 얼음, 눈, 얼음집인 이글루가 생각날지 모릅니다. 이처럼 추운 곳이라는 인상은 지도를 보게 되면 더 강해집니다. 아이슬란드만큼 북쪽에 위치한 지역에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이 섬나라의 북쪽 끝은 북극권과 거의 맞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슬란드는 그 이름(문자적으로는 “얼음”과 “땅”을 의미)이나 위치에서 느껴지는 것만큼 춥지는 않습니다. 적도 약간 북쪽 지역에서 발생하는 따뜻한 해류 덕분에 기후가 생각보다 훨씬 더 온화합니다. 이글루도 없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매우 현대적인 사회이며 사람들은 지열 난방 장치가 갖추어진 잘 지어진 집에서 삽니다.

아이슬란드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한겨울에는 해가 하루에 몇 시간 정도만 지평선 위로 고개를 내밉니다. 길고 어두운 겨울밤에는 종종 북극광의 장관이 연출되어 생기가 돌기도 하지만, 해가 마치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여름에는 햇볕이 계속 내리쬐어 이를 충분히 보상해 줍니다. 이 나라의 최북단에서는 해가 여러 주에 걸쳐 지평선 위에 계속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자정에도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얼음과 불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빙하가 이 나라의 약 10분의 1을 덮고 있습니다. 또한 불도 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화산 활동과 지열 현상이 많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는 수십 개의 화산이 폭발했는데, 지난 몇 세기 동안에는 평균 5, 6년마다 한 번씩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 온천 역시 많이 있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지 않은 이 나라는 자연이 아름답고 야생 생물들이 많습니다. 깨끗한 공기, 인상적인 폭포, 바위투성이 산, 드넓은 광야가 있어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옵니다. 이른 봄에는 철새들이 해변의 절벽이나 습지대에 있는 여름 서식지로 돌아옵니다. 이 새들 가운데는 북극제비갈매기가 있는데, 이 새들은 해마다 지구의 정반대 쪽에 있는 남극으로 이주를 합니다. 서방뿔눈새, 참솜털오리, 바다갈매기가 절벽과 해안에 점점이 흩어져 있습니다. 시골에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작지만 튼튼한 아이슬란드 조랑말이 고지대를 돌아다닙니다. 초여름에는 수많은 연어들이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폭포를 뛰어오릅니다.

29만 570명의 아이슬란드 주민들은 바이킹의 후손들인데, 바이킹은 1100여 년 전에 이곳에 정착하였습니다. 이 정착자들 대부분은 노르웨이 출신으로, 고대 스칸디나비아어를 사용하였는데, 거기서 아이슬란드어가 나왔습니다. 그 언어는 든든한 문학적 유산과 더불어 다소 고립된 이 나라의 위치 덕분에 보존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대개 13세기에 기록된 오래된 사거 즉 영웅적 주인공들의 무용담을 현대인들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자기 언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외래어 도입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기 정착자들은 대부분 “이교도들”이었는데, 1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10세기가 끝나가기 직전에 얼마의 저명한 아이슬란드 지도자들이 개종을 하였고, 1000년에는 아이슬란드 의회인 알팅에서 이교의 최고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두 종교 가운데 어느 것이 나은지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오직 하나의 믿음 즉 “그리스도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결정은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지시 사항은 사람들이 몰래 이교 신들을 숭배하고 계속해서 이교 관습을 지키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그 결정은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내려진 것이었지만, 그래도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개방적이면서도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오늘날에는 인구의 약 90퍼센트가 국교인 복음주의 루터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서 성서를 볼 수는 있지만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뭅니다.

좋은 소식이 아이슬란드에 이르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많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캐나다로 이주하였는데, 그중에는 화산 폭발과 혹독한 추위로 인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들은 곳이 바로 그곳 캐나다였습니다. 게오르그 피욀니르 린달도 그러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느님께 헌신한 지 얼마 안 되어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린달 형제는 아이슬란드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40세 때인 1929년에 아이슬란드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해 6월 1일에 레이캬비크에 도착한 그는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한 사람입니다.

린달 형제는 발송된 출판물이 처음으로 도착하기까지 삼 개월을 기다렸지만, 출판물들이 도착하자마자 이 나라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1929년 10월 말까지 그는 아이슬란드어로 된 「하나님의 거문고」를 800권이나 전하였습니다. 당시에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곳에 온 후로 나는 여러 읍을 다니며 약 1만 1000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총인구는 10만 명 정도이거나 그보다 약간 많으며 따라서 전파해야 할 사람들이 9만 명이나 더 남아 있습니다. 여행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이곳의 모든 구역을 다니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아이슬란드는 해안선이 불규칙하고, 철로도 없고, 차도도 별로 없는 산악 국가여서 나는 주로 배를 타고 여행을 하였습니다.”

“아이슬란드”라는 표시가 찍힌 오래된 서류철에 들어 있는, 손으로 직접 쓴 몇 통 안 되는 편지에는 불평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습니다. 같은 해인 1929년의 편지에서 린달은 이렇게 썼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격려적인 경험을 알릴 수 있어 대단히 기쁩니다. 나는 이전에 다녀왔던 특정 지역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나에게서 서적을 구한 사람들 몇몇을 만났습니다. 한 남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문고」 책을 두 번이나 읽었고, 이제 세 번째 읽고 있습니다. 좋은 책이더군요. 와 줘서 고맙습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와 주었군요. 그 책은 정말 좋았습니다. 러더퍼드 판사의 책을 모두 아이슬란드어로 발행하지 그래요?’ 나는 그에게 그 책들 대부분을 덴마크어로 구할 수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보내 주세요. 물론, 목회자 러셀의 책도 보내 주세요. 그러면 금년 겨울 내내 연구할 거리가 충분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서적에 대해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진리의 소식을 전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이 이 섬의 모든 사람들을 방문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는데, 이 섬의 크기는 잉글랜드 크기의 반이 넘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남북 길이가 약 300킬로미터, 동서 길이가 약 500킬로미터입니다. 작은 만과 협만들을 포함하면 해안선의 길이는 약 6400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하지만 린달 형제는 10년 내에 섬 전체를 방문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출판물을 배부하였습니다. 그는 배를 타고 해안을 따라 여행하였고 내륙의 농장들을 방문할 때에는 두 마리의 조랑말을 사용하여 하나는 자신이 타고, 다른 하나로는 출판물과 소지품을 운반하였습니다. 린달 형제는, 그가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전에 몇 년 동안 함께 일하는 특권을 가졌던 형제들의 말에 따르면, 헌신적이고 진지한 성향을 가진 형제였으며, 수줍음을 타고 과묵하며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격이 당당한, 다시 말해서 키가 큰 사람이어서 여행할 때 타고 다니던 작은 아이슬란드 조랑말이 감당하기는 좀 벅찰 정도로 몸집이 컸습니다. 그는 때때로 조랑말이 없을 때 서적들이나 소지품들을 직접 들고 다닐 정도로 건장했습니다.

린달 형제는 1929년에 아이슬란드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을 때, 마치도 얼음을 깨는 것과도 같은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참을성과 끈기가 요구되는 일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거의 18년 동안이나 아이슬란드에 증인이라고는 린달 형제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활동하였지만 왕국의 편에 서는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1936년에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2만 6000권에서 2만 7000권가량의 서적을 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서적을 읽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진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대다수는 전혀 관심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일부 사람들은 그가 전한 소식에 인식을 나타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연로한 남자는 「하나님의 거문고」를 받았습니다. 린달 형제는 여러 달 후에 다시 방문하여 그 연로한 남자의 딸을 만났는데, 그 여자는 아버지가 그 책을 좋아해서 사망하기 전에 그 책을 철저하게 연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연로한 남자는 이교 관습에 따라 자신이 죽을 때 그 책을 관 안에 함께 넣어 달라고 부탁하였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1947년 3월 25일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졸업생들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하면서 린달 형제의 기나긴 외로운 시절도 끝이 났습니다. 그는 1953년에 캐나다로 돌아갈 때까지 이곳에서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고 나서 당시에 아이슬란드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팔 하이네 페데르센은 린달 형제를 만나 그가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한 것에 관한 정보를 직접 들어 보려고 캐나다의 위니펙에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 무렵에는 아이슬란드에서 린달 형제와 함께 활동하던 선교인들이 모두 그 나라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페데르센 형제는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다가 버스를 타고 위니펙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린달 형제가 그날 아침에 지상 생애를 마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망하기까지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수확하기 위한 많은 일꾼들

1947년에 처음으로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선교인 두 명이 도착함에 따라 좋은 소식의 전파 활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모두 덴마크 출신이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레오 라르센이었습니다. 1948년 12월에는 두 명의 선교인이 더 도착하였으며, 그들은 덴마크 출신의 잉바르 옌센과 영국 출신의 올리버 맥도널드였습니다. 이 새로운 수확하는 일꾼들은 린달 형제가 한 활동을 계속 하면서 많은 양의 출판물을 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겨울에는 레이캬비크와 그 주변에서 활동하였고, 짧은 여름 동안에는 해안을 따라 있는 시골 지역의 활동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잉바르 옌센에게는 특히 기억에 남는 전파 여행이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맞은 여름에, 나는 다른 선교인 한 명과 함께 시골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보통 우리는 버스나 배를 이용하여 자전거, 텐트, 침낭, 출판물, 식품을 가지고 선택한 구역으로 가곤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서쪽 해안에 있는 스티키숄무르 읍을 향해 배를 타고 가기 시작하여 다음날 오후에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의 계획은 읍에 있는 모든 집들을 방문한 다음 자전거를 타고 약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보르가르네스 읍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는 레이캬비크로 가는 배편이 매일 있었습니다. 여행의 시작은 순조로웠습니다. 6월 중순이라 햇빛이 비쳤습니다. 우리는 첫날에 그 읍의 일부 지역에서 전파한 다음 밤에 침낭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은 침낭 속이 따뜻하지가 않았는데, 다음날 아침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밤 사이에 눈이 10센티미터나 내린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은 배가 없어서 여행을 빨리 끝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획한 대로 읍에서 전파하고 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넘어 다음 읍으로 가면서 길가에 있는 농장들에서 전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서 진눈깨비, 비, 시속 110킬로미터로 몰아치는 강풍을 헤치고 나흘 후에 보르가르네스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길을 따라 오면서 만난 농부들의 특별한 후대 덕분에 그런 악천후도 어느 정도 견딜 만했는데, 농부들은 항상 그들을 안으로 초대하여 커피나 먹을 것을 대접하였습니다. 옌센 형제는 자신들이 하루에 식사를 여덟 번에서 열 번이나 했다고 회상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친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들이 기분 나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친절한 대접을 받다 보면 그들에게 여호와의 설립된 왕국에 관하여 철저하게 증거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선교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하고 처음 3년 동안에 형제들은 1만 6000부 이상의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재방문이나 연구는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출판물을 기꺼이 받기는 하지만 그 소식에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라르센 형제와 그의 아내 미시(1950년에 덴마크에서 결혼하기 위해 옴)는 동쪽 해안으로 가서 회븐의 읍들과, 에스키피에르두르, 네스쾨이프스타두르, 세이디스피에르두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이 힘든 여행 중에 그들은 300권의 서적과 거의 그 정도 되는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간단한 성경 소식과 레이캬비크에 있는 선교인들의 주소가 적힌 서표(書標)를 인쇄하여 모든 서적에 끼워 두었습니다. 출판물을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에 관하여 좀 더 알아보려면 편지를 쓰라고 권하였지만 그렇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52년에는 북부 해안에 있는 구역들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일 만하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그해 6월에 올리버 맥도널드와 그의 아내 샐리(1949년에 영국에서 결혼하기 위해 옴)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아쿠레이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의 영국인 영사가 이끌고 있던 플리머스 형제단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가 연설이나 글로 증인들을 공격하자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레이캬비크에 있을 때에는 그러한 반대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 파이오니아 부부는 두려움 없이 공격에 맞서 여느 때처럼 활동을 계속하고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거짓된 주장에 답변하였습니다. 일부 신문들에는 그들의 답변이 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파이오니아 부부는 도시에서 활동하는 것에 더하여 외곽 지역들로도 여행을 가서 출판물을 전하고 전형적인 후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왕국 소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찾지 못했습니다. 맥도널드 형제 자매는 1953년 7월에 레이캬비크로 돌아왔지만, 그들은 아쿠레이리를 떠나기 전에 진리의 씨를 뿌렸고, 그 씨는 후에 자라게 될 것이었습니다.

기초가 놓이다

아이슬란드에 있던 형제들은 27년 동안 심고 물 주는 일을 한 후에 마침내 자신들이 기울인 노력의 열매를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1956년 초에 일곱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왕국을 옹호하는 편에 서서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진리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 중 대다수가 진리의 편에 확고하게 서 있지 않았습니다. 아이리스 오베리라는 영국인 자매는 예외였지만 결국 아이슬란드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일곱 명의 새로운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고, 튼튼한 기초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7년경에는, 진리가 확고히 자리를 잡는 것을 보려고 열심히 일했던 선교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이 대부분 건강 문제로 아이슬란드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1957년에는, 덴마크에서 1956년에 온 에디트 마르크스라는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 한 명이 남아서 그 작은 회중을 돌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도와줄 수확하는 일꾼들이 필요하였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고 진리 안에서 강하게 되도록 도와주던 사람들이 갑자기 떠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덴마크와 스웨덴과 독일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올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전도인들과 파이오니아들이 왕국 전파 활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아이슬란드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후로 빠르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증가가 계속되었습니다.

증가와 더불어 정기적으로 순회 감독자가 방문을 하고 매년 지역 대회를 여는 것과 같은 흥분을 자아내는 발전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아이슬란드어 출판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아이슬란드어로 발행된 최초의 「파수대」는 1960년 1월 1일호였습니다. 「파수대」의 발행은 활동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국어로 이 출판물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형제들도 매달 훌륭한 영적 양식으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어 참으로 믿음이 강화되었습니다!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파수대가 아이슬란드어로 발행될 것이라고 광고했을 때, 연사 뒤에서 커다란 잡지 모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형제들은 여호와께서 주신 이 새로운 선물을 받고 크게 환호하였습니다!

페데르센 형제는 자신이 1959년 10월에 아이슬란드에 도착하였을 때를 회상하면서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당시에 야외에서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아이슬란드어 출판물이었고, 많은 집주인들은 이미 그 소책자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전도인들은 덴마크어,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 가운데 하나를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언어로 된 「파수대」와 「깨어라!」를 전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언어들 가운데 하나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모국어로 「파수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욱더 의미 깊은 일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어로 발행된 이 출판물은 전파 활동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봉사 연도 중에 41명의 전도인과 파이오니아가 809건의 예약을 받았고 2만 6479부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성서 연구 수가 증가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1962년 1월 1일에는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고 그것은 또 다른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는 미국 지부의 감독 아래 있었고, 그전에는 덴마크 지부의 감독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다가 1969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 인가를 취득하였고 법무·종무부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아이슬란드의 증인들은 다른 모든 종파들과 동일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고 결혼식을 올리고 장례식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도 받았습니다.

교직자들의 반대

지부가 개설된 그 달에 형제들은 교직자로부터 반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한 주요 신문의 머리기사에 국교의 주교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경고하면서 사람들에게 증인의 말을 듣지 말라고 권고하는 내용의 소책자를 발행하였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그 소책자의 제목은 「여호와의 증인—경고」(Vottar Jehóva—advörun)였습니다. 다른 신문들도 잇따라 그에 대한 보도를 실었습니다. 주요 석간 신문인 「비시르」는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는 형제와의 회견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 기사는 우리의 견해를 설명하였고 곧이어 다른 신문들에서도 그 내용을 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크게 증거가 이루어졌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독자들은 증인들을 지지하는 편지를 썼고 그러한 편지들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주교는 우리에게 보내는 “답장”을 실어서 반격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가장 유력한 신문인 「모르군블라디드」의 한 면을 가득 채운 기사를 통해 증인들의 활동과 믿음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경고가 들어 있는 그 소책자는 아이슬란드 전역에 배부되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의 증인들은 일반에 크게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이 우리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여러 해 동안 이 구역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증인들이 이와 같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한 신문에서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주교는 여호와의 증인의 홍보 책임자가 되었다.” 여호와의 백성은 심지어 여태껏 전파 활동을 하지 못한 이 나라의 외딴 지역에까지도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주교의 권고에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흔히 호기심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북쪽의 아쿠레이리에 있는 사람들은 적의를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하인리히 카르허와 카타리나 카르허 부부는 때때로 아이들로부터 돌멩이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나서 아쿠레이리에 있던 다른 종교적 반대자들은 그 지역에서 주교의 소책자를 재인쇄하여 다시 배부하였습니다. 레이캬비크에서도 오순절교인들은 우리의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거나 방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똑같은 일을 하였습니다.

대회를 조직하는 일의 어려움

크고 작은 대회들은 아이슬란드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언제나 즐거움을 주는 주요 행사입니다. 전도인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형제들은 주저하지 않고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첫 번째 대회는 1951년 7월에 두 명의 형제—캐나다의 퍼시 채프먼과 브루클린의 클라우스 옌센—가 그해 여름 유럽에서 열린 일련의 대회들에 참석하러 가던 길에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열렸습니다. 당시 아이슬란드에는 전도인이 손으로 꼽을 정도였지만, 대회의 최고 참석자 수는 55명이었습니다. 그다음 대회는 7년 후인 1958년 6월에 지구 감독자인 필리프 호프만이 방문하였을 때 열리게 되었으며, 38명이 공개 강연을 들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크고 작은 대회들은 매년 열리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크 기슬라손은 1950년대에 대회에서 프로그램을 맡아 수행했던 몇몇 형제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 대회에서 식품 봉사부를 맡게 되었던 때가 생각납니다. 일을 대부분 직접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일 프로그램 가운데 프로를 서너 개씩 맡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주방에서 일할 때에는 앞치마를 둘렀습니다. 그리고 연설을 하러 서둘러 대회장 안으로 가면서 재킷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형제들이 나에게 앞치마를 벗고 가라고 일깨워 주어야 하였습니다. 이제는 대회 참석자가 400에서 500명 정도 되며 프로를 다룰 자격을 갖춘 훌륭한 장로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서 드라마는 감동과 교훈을 주는 지역 대회의 절정입니다. 하지만 아이슬란드에는 전도인이 너무 적어서 드라마를 소리로만 제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덴마크 지부에서는 드라마를 생생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소리에 맞추어 상영할 수 있는 천연색 슬라이드 필름을 제공하였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즐기려면 상당히 많은 준비를 해야 하였습니다. 먼저 원고를 아이슬란드어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아이슬란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형제들의 목소리로 녹음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영어 테이프에서 뽑아낸 음악과 효과음을 더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등장인물에 따라서 목소리를 바꿔 가며 여러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몇몇 드라마는 고대 의상을 갖춰 입고 상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최초의 드라마는 에스더 왕비에 관한 드라마였는데, 1970년 지역 대회에서 상연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위해 일하였고 열심을 다하여 드라마 연습을 하였습니다. 성서 시대에 입었을 법한 의상을 입고 형제들은 얼굴에 수염을 붙였는데 이러한 일은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지역 대회에서 드라마가 상연될 것이라는 사실은 내밀이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예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작은 대회들에서는 거의 모두가 서로를 알고 있고 모두 연단 가까이에 앉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누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맞춰 보려고 하였습니다. 한 자매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드라마를 보면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형제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 형제는 느부갓네살 왕 역할을 하더군요!” 그리고 자매는 그 형제의 이름을 말했는데,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는 놀랐습니다. 형제들은 작은 대회들에서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두가 자기들이 쓰는 언어로 제공되는 드라마의 훌륭한 교훈들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국제 대회가 기쁨을 가져다주다

여러 해에 걸쳐서 아이슬란드에 있는 형제들은 다른 나라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는 기쁨도 누려 왔습니다. 다섯 명의 아이슬란드 대표단은 1958년 뉴욕에서 열린 ‘성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1961년에 유럽에서 열린 ‘연합된 숭배자들’ 대회와 1963년에 열린 “영원한 기쁜 소식”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1973년에 열린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형제들과 동료 관계를 즐겼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100명이 넘는 전도인들이 1969년 8월 5일부터 10일에 걸쳐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대표단은 그때까지 아이슬란드에서 다른 나라로 국제 대회를 참석하러 간 대표단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습니다. 그해 여름에 아이슬란드의 전도인 80퍼센트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외국으로 나간 것입니다.

1969년 대회에 아이슬란드에서 매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덴마크 지부는 아이슬란드 형제들이 같이 앉을 수 있도록 마련을 해 주었습니다. 아침이 되면 아이슬란드에서 온 형제들은 회기가 시작되기 전에 자신들의 구역에 모여 자신들의 언어로 제공되는 요약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이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 비아르니 욘손이라는 청소년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레이캬비크에서 선교인 집과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려고 건물을 임대하였는데, 그는 그 임대한 건물을 소유한 변호사의 아들이었습니다. 비아르니는 진리에 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형제들과 함께 코펜하겐으로 간 목적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대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까?

당시 지부의 종이었던 셸 게엘나르드는 비아르니의 아버지와 논의할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셸은 그에게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형제들이 그 대회에 참석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변호사는 그 말을 듣고는 자신의 큰아들 비아르니가 함께 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그는 게엘나르드 형제에게 자기 아들이 막 중학교를 졸업해서 외국 여행을 보내 주고 싶은데, 코펜하겐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셸은 좋은 생각이라고 여기고 변호사에게 비아르니가 대회장에 가서 대회를 참관할 마음이 있다면 코펜하겐에 숙소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변호사는 그 말을 듣고 기뻐서 비아르니에게 대회를 보러 가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함께 가고 싶은지 물었습니다. 비아르니는 기꺼이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비아르니가 코펜하겐에서 묵을 숙소를 알아보기 위해 숙박부로 연락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에게 증인 가족과 함께 지낼 곳을 찾아 주었습니다. 야코브라는 아이슬란드 형제와 함께 방을 쓰기로 되어 있던 미국 대표가 예약을 취소하여 비아르니가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인지 야코브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는 비아르니 혼자 가게 되었습니다. 숙박부에서는 집주인 가족에게 비아르니가 미국인 형제 대신에 가는 것이라고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족은 비아르니를 야코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곳에서 온 형제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늘 그렇게 하듯이, 그들도 경험담을 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덴마크 형제들은 “야코브(야곱)”가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한편 비아르니는 집주인 부부가 자신을 계속해서 야코브라고 부르자 약간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는 야코브가 성서에 나오는 이름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화를 할 때 서로를 성서에 나오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관습인가보다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오해는 비아르니가 머무르던 집에 있던 형제들 중 한 명이 아이슬란드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덴마크 형제를 만남으로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 형제는 덴마크 형제에게 “야코브”가 아이슬란드의 활동에 대해 거의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가 진리 생활을 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덴마크 형제는 “야코브”가 사실은 형제들과 함께 코펜하겐으로 여행을 온 아이슬란드 학생인 비아르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비아르니가 머물던 곳의 집주인은 따뜻하게 그를 환대해 주었고, 덴마크에서 관광을 할 때 한 주간 집에 더 머무르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친절은 비아르니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비아르니는 실제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비록 대회 프로그램을 온전히 즐길 만한 진리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는 보고 들은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돌아오자마자 가족과 함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비아르니는 진리 안에서 잘 발전하였고 1971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979년부터는 아이슬란드 지부의 지부 위원으로 봉사해 왔습니다.

스반베리 야콥손은 여러 해 동안 아이슬란드 지부에서 번역 일을 해 왔으며 지금은 번역부 감독자입니다. 그는 1973년에 어린 전도인으로서 영국 런던에서 열린 “하나님의 승리”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수천 명의 형제 자매들이 대회장으로 몰려 들어오는 장면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 기억이 납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많은 형제 자매들이 모두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은 정말 눈길을 끌었습니다. 수만 명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과 프로를 듣고, 그들과 노래를 부르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1958년에 침례를 받은 솔보리 스베인스도티르는 1961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네 자녀와 함께 배를 타고 덴마크로 6일간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솔보리는 케플라비크에 있던 작은 격지 그룹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대규모 국제 대회에 참석하여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3만 명이 넘는 형제들이 연합해서 다섯 가지 언어로 왕국 노래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잘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국제 대회를 위해 여행하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형제들은 그 여행에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마련하신 그처럼 놀라운 영적 연회에 참석하고 같은 믿음을 소유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영적 “웨이터”의 방문

많은 사람들이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이주하였습니다. 이주한 사람들 모두는 복잡한 아이슬란드어를 배우기 위해 오랫동안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말을 잘못 이해한 것이 뜻하지 않게 축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실례로 어느 날 하인리히 카르허는 호별 방문 봉사를 하면서 자신을 봉사자 즉 종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한 집에서는 젊은 여자가 문앞에 나왔는데, 하인리히가 자신을 소개하자 그 여자는 그를 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하인리히에 대해 오해를 하였습니다. 아이슬란드어로는 같은 단어가 “종”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웨이터”라는 뜻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는 하인리히가 지방 호텔에서 웨이터로 근무하는 남편의 직장 동료라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이 곧 집에 돌아올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남편의 직장 동료라고 생각한 이 사람을 초대하여 남편을 보고 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오해가 풀렸을 때 그 둘은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남편이 도착하자, 우리의 영적 “웨이터”는 그 젊은 부부에게 훌륭한 영적 식사를 대접하였으며, 그 부부는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인리히에게 다시 오라고 하면서 아내와 함께 와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 관심자 부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젊은 웨이터는 지방 호텔에서 일을 할 때에도 듣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부부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영적 “웨이터”가 찾아와서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자기들에게 증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기뻐하였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외국에서 온 형제들이 언어를 배우는 동안 오해 때문에 생겨난 재미있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샐리 맥도널드는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서론으로 이러한 말을 준비하였습니다. “저는 성서에 나오는 흥미 있는 점들 몇 가지를 전해 드리기 위해 이웃 분들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문하다(헤임새캬)라는 단어와 박해하다(오프새캬)라는 단어를 혼동하여, 웃으면서 “저는 이웃 분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루터교 교직자와 함께 호별 방문을

덴마크 출신의 홀게르 프레데릭센과 토베 프레데릭센 부부는 아이슬란드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여러 해 동안 충실히 봉사하였으며, 얼마 동안 여행하는 봉사도 하였습니다. 토베는 아이슬란드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이 힘들었지만, 열심과 열정으로 많은 사람들이 진리 안에 들어오도록 도왔습니다.

언젠가 순회 봉사를 하던 중에 홀게르는 젊은 전도인과 함께 작은 마을에서 호별 방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지역의 루터교 교직자가 그들과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그렇게 되기 조금 전에 그들은 그 교직자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교직자는 겉으로 보기에 우호적이었으며, 그들을 사무실 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교직자는 그들이 제공하는 책을 잠깐 보더니 “이 책에는 거짓 가르침이 들어 있소!” 하고 말했습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일어나더니 양손을 들고 그들에게 하느님의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나는 당신들이 나의 교구인 이곳에서 전파하는 것을 금지하오!” 하고 소리쳤습니다. 홀게르는 그 교직자에게 자신들이 전파하지 못하도록 막을 권리는 없으며 자신들은 계속해서 전파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교직자는 “나의 교구인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계속 전파한다면 나는 당신들과 함께 다닐 거요” 하고 말했습니다. 홀게르는 그에게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을 따라다니는 교직자와 함께 그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집 두 군데를 방문하고 나서 토베와 다른 자매 한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매들은 호별 방문 봉사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직자는 모두를 집으로 초대하여 커피를 대접하였습니다. 그들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홀게르는 교직자가 갑자기 뜻하지 않게 후대를 베푸는 것이 어떻게든 그들이 그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그들은 다시 와서 온 마을에서 봉사하면서 출판물을 많이 전하였고 듣는 귀를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눈사태로 길이 막히다

시골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종종 어두운 겨울철에 얼음이 얼어 있거나 눈더미가 쌓여 있는 산악 도로를 운전해 가야 합니다. 1974년 12월에 셸 게엘나르드와 이리스 게엘나르드 부부는 순회 활동을 하면서 북부 해안에 있는 아쿠레이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회중과 함께 머무르는 주간에 그들은 80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는 후사비크 읍으로 갔습니다. 홀게르 프레데릭센과 토베 프레데릭센 부부가 그들과 동행하였습니다. 그들 네 사람은 후사비크와 그 주변의 구역에서 며칠간 봉사한 다음, 한 학교에서 공개 강연으로 환등 강연을 하고 방문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자 그 지역으로 폭풍이 몰려와 몹시 추운 바람이 불고 눈과 진눈깨비가 내렸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참석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지품을 챙겨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 도시 전체가 눈보라로 인해 정전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어두컴컴한 학교를 나오면서도 정전이 되기 전에 환등 강연을 다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게엘나르드 부부와 프레데릭센 부부는 아쿠레이리로 돌아가야 하였습니다. 그들 부부는 지방 경찰과 몇몇 버스나 트럭 운전기사들에게 도로 사정이 어떤지 물어보고 조금 전까지 별 문제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두 부부는 가능한 한 빨리 떠나기로 하였지만 촛불 아래서 짐을 싸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차에 넣을 연료를 사러 갔더니 종업원이 손으로 기름을 펌프질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저녁 9시 정도 되었을 즈음에야 떠날 준비를 마쳤습니다.

셸은 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눈발이 점점 거세졌지요. 때로는 길이 어디인지 잘 보이지 않아 홀게르가 차에서 내려 손전등으로 길을 안내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차가 눈더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몇 차례 차를 밀고 삽질을 한 끝에 가까스로 눈더미에서 빠져나오긴 하였지만 결국 큰 눈 벽에 길이 막혀 멈춰야 하였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위쪽 산의 눈사태로 인해 쌓인 눈이었습니다. 평상시라면 후사비크에서 아쿠레이리까지는 차로 두 시간이면 갈 것을 그때까지 길에서 여섯 시간을 보내고도 절반밖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가 새벽 세 시였고 우리는 눈에 젖어 있었으며, 피곤했고, 추웠습니다. 그런데 근처 농장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 빛을 보고 용기를 내어 그곳까지 가서 문을 두드렸습니다. 예의 바르고 사려 깊은 홀게르가 현관문을 두드렸습니다.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그는 문을 열고 2층으로 올라가 조용히 침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농장 주인과 그의 아내는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보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침착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정전이 되었을 때 전등 스위치를 꺼 놓는 것을 깜빡 잊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따뜻한 후대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농장 주인과 그의 아내는 자고 있는 아이들을 다른 방으로 옮겨 우리 네 사람에게 두 개의 잠잘 방을 마련해 주었으며 조금 후에는 주방 식탁에 뜨거운 커피와 맛있는 빵을 차려 주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식사를 마치자 농장 주인은 우리에게 더 있다가 점심 식사까지 하고 가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가족과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계속해서 아쿠레이리로 갔습니다. 그 무렵에는 이미 두 대의 큰 제설차가 길을 깨끗이 치워 놓았기 때문입니다. 농장 주인과 그의 아내가 후대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성서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저인망 어선에서 전파하다

몇 해 전에 셸 게엘나르드는 야외 봉사를 하다가 한 젊은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리드리크였습니다. 그는 장남이었는데, 영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성서 토의를 즐겼습니다. 그는 질문을 많이 했고, 성서 지식을 얻는 일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나기가 쉽지 않았는데, 그가 저인망 어선의 기관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고, 집에는 바다에 나가는 사이사이에 며칠간만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셸은 저인망 어선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프리드리크의 어머니에게 그가 언제 집에 올 것인지 물어봄으로 그를 만날 수 있었는데, 때로는 항구에서 때로는 집에서 만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들은 그가 영적으로 진보하도록 도왔습니다.

1982년 말에 프리드리크는 레이캬비크에서 열리는 대회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무렵에는 여호와에 대한 그의 믿음이 이미 자라고 있었고, 그는 대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실 것을 기도하였습니다. 바로 그때 승무원들 중에서 휴가를 받아 조업을 나가지 않기로 되어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휴가를 취소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프리드리크는 일을 하지 않고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크는 대회 프로그램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이제 자신이 여호와를 섬기기 원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크는 고향으로 돌아와 약혼녀에게 자신의 결심과 그 결심이 자신의 생활에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약혼녀에게 그를 아내로 삼고 싶지만 만일 여호와의 증인과 결혼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파혼을 하라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선교인 집 현관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밖에는 프리드리크와 그의 약혼녀가 서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크는 짧지만 확실하게 “헬가가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인들은 헬가와 연구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같은 날, 얼마 후에 프리드리크의 남동생 한 명도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그 주에 프리드리크는 여동생을 집회에 데리고 와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운누르가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 합니다!”

프리드리크는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기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는 지식을 쌓아야 하였으며, 그런 다음 침례 문답도 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가 대부분의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셸은 프리드리크를 집에서는 만날 수 없어도 작업장에서는 만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어떤 해결 방법이 있었습니까? 프리드리크는 셸을 고용해서 저인망 어선에 승선하여 기관실에서 함께 일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1983년 초에 셸은 성서와 연구 자료들을 가지고 저인망 어선 스발바쿠르호에 올랐습니다.

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스발바쿠르호에 승선하여 했던 일과 봉사는 추억에 남을 만한 경험이었습니다. 일은 오전 6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6시 30분에 끝났습니다. 정오에는 점심을 먹었고,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휴식 시간이 있었습니다. 근무 시간 외의 시간은 프리드리크와 연구를 하는 데 사용하였고 다른 승무원들에게 증거할 기회도 많이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은 연구를 하고 영적인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서 보내곤 하였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점심시간 중에는 식당에 잠시만 머무른 다음 프리드리크의 선실에 와서 일용할 성구를 토의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물론 선교인이 승무원이 되자 배에 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사람들은 셸을 경계하였는데, 그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부 승무원들은 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기꺼이 들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점심시간에 일용할 성구를 토의한다는 것을 알고는 함께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루는 식당에서 대화가 길어지자 그는 조급한 마음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셸과 프리드리크에게 “지금 올라가서 일용할 성구를 읽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셸과 프리드리크는 승무원들을 프리드리크의 선실로 초대하여 알코올 의존증에 대해 다루는 「깨어라!」의 내용을 고려하였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을 만한 이 모임에 승무원 일곱 명이 왔으며, 모임에 대한 소식은 다른 저인망 어선들에 있는 승무원들에게도 알려졌습니다.

셸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발바쿠르호에 승선하여 약 2주 동안 봉사하고 일한 후에 우리는 다시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프리드리크와 침례 문답을 마쳤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성서 주제를 프리드리크와 함께 검토하였으며, 다른 승무원들에게 증거하고 그들에게 잡지와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프리드리크는 1983년 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프리드리크의 약혼녀인 헬가와, 어머니와 여동생도 모두 진리의 편에 섰습니다.

전화 연구

이 큰 섬의 외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은 언제나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전화는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계속 그들과 연락을 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 방법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었습니다. 몇 해 전에 오드니 헬가도티르라는 여자가 자신의 아들 부부를 방문하였는데, 아들 부부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들 부부가 자신들이 배우고 있는 것들을 오드니에게 말하자 오드니도 성서를 연구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드니는 아이슬란드 북서부 해안의 외딴곳에 살았는데, 그곳은 가장 가까운 회중에서도 3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드룬 올라프스도티르 자매가 오드니에게 전화로 연구하자고 제의를 하였고 오드니는 기쁘게 그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시작하는 기도를 한 후에 오드니는 곧바로 책에 나오는 연구 질문들에 대답하였습니다. 오드니는 연구 준비를 철저히 하여 인용된 성구를 적어 두었기 때문에 성구에 대해 이야기하면 즉시 그 성구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연구가 진행되는 동안에 성구를 찾는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한번은 오드니가 구드룬의 집 근처에 올 일이 있어 구드룬의 집에서 연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약간 어색해하였는데, 그때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 보며 연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드룬은 우스갯소리로 자기가 다른 전화가 있는 옆방으로 건너가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오드니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하자 남편인 욘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편이 관심을 보이자 오드니는 자신이 남편의 연구를 사회해도 괜찮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오드니는 연구를 사회할 수는 있지만 사회를 할 때는 머리 덮개를 쓰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남편과 연구를 하였고, 이웃 사람들에게도 증거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오드니는 침례를 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구드룬은 오드니가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 장로와 전화로 「우리의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조직됨」 책의 질문들을 검토할 수 있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분명 그는 자격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아직 정식으로 교회에서 탈퇴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약 일주일 후에 오드니는 구드룬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교회에서 탈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의 남편 역시 탈퇴하였습니다. 오드니의 남편에게는 그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그는 지방 교구 위원회의 회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후에 오드니는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오드니에게 대회는 매우 즐거운 경험이었는데, 그전에는 단 한 번 소규모의 증인 집단과 모임을 가진 것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회 프로그램 중 회견하는 자리에서, 그처럼 고립된 지역에서 지내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아이슬란드의 북서부 해안에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번도 혼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남편이 대회에 참석할 수 없어서 아쉽다고, 하지만 남편은 침례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참석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그의 남편은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사람들이 더 많이 사는 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선교인 집과 왕국회관에 대한 필요

1968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네이선 H. 노어 형제가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숙소로 사용할 만한 좀 더 적절한 건물을 찾기 원하였습니다. 그전에는 여러 집들에 세를 들어 사용했습니다. 이제 형제들은 왕국회관과 선교인 집과 지부 사무실이 다 들어갈 건물을 지을 만한 부지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레이캬비크의 흐레프누가타 5번지에 있는 적당한 집을 세내어, 1968년 10월 1일에 선교인 여섯 명이 이사를 왔습니다. 이 건물은 그 후 5년 동안 아이슬란드의 활동 중심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후에 형제들은 레이캬비크의 소가베구르 71번지에 있는 좋은 위치의 부지를 취득하였습니다. 1972년 봄에 새로운 지부 건물 건축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일은 이곳에 있던 몇 안 되는 형제들에게는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토목이나 건축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 중에는 건축 도급업자나 석수(石手)가 없어서 증인이 아닌 도급업자를 고용해야 하였습니다. 이 도급업자들은 아주 기꺼이 협조적으로 일해 주었으며 건축 현장에서 형제들도 함께 일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건축 현장 옆에 있는 오래된 집의 일부를 세내어 식당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자매들은 교대로 자기 집에서 음식을 요리하여 건축 현장으로 가지고 와 일꾼들에게 대접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그 지역에서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도급업자들과 시 당국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잘 알게 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공사가 진척되는 것을 보려고 공사장에 들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내부 미장 공사를 할 때가 되자 직업이 석수인 한 덴마크 형제가 일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또한 자매들도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시의 감리관 몇 사람은 건축 현장을 방문하였을 때 자매들이 시멘트 믹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리관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여자들도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 같군요. 확실히 모금함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돈을 간청하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이 교회를 짓는 데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겠는데요.” 그 건물은 1975년 5월에 봉헌되었으며, 그때 밀턴 G. 헨첼 형제가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여 봉헌식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 건물은 여러 해 동안 이 나라의 주된 선교인 집으로 사용되었으며 그에 더하여 레이캬비크에 있는 회중들의 왕국회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그 건물은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87년에 새로운 왕국회관과 선교인 집이 아쿠레이리 시에 건축되었습니다. 그 건축 공사와 관련하여 아이슬란드 형제들을 돕기 위해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6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왔을 때,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연합과 국제적 형제 관계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제일 좋은 나무”

여러 해에 걸쳐서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의 대표자들이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였고, 이러한 방문은 형제들에게 항상 큰 격려의 근원이 되어 왔습니다. 1968년에 있었던 주목할 만한 일로는,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노어 형제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가슴 뭉클한 연설을 하였고 경험담을 들려주었으며 아이슬란드에서의 왕국 전파 활동의 발전에 대해 토의하였습니다.

헨첼 형제는 1970년 5월에 처음으로 아이슬란드를 방문하였습니다. 몇몇 선교인들은 졸린 눈으로 그를 맞았습니다. 헨첼 형제가 아침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유명한 헤클라 화산이 전날 분화를 시작해서 선교인들은 밤새도록 그 화산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헨첼 형제는 선교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는 특별 모임에 그들 모두를 초대하여, 대공황 때에 자신이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파이오니아들이 어떻게 출판물을 닭, 달걀, 버터, 야채, 안경, 심지어는 강아지와 바꿨는지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파이오니아들은 생활필수품 부족을 겪지 않았습니다.

아이슬란드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곳의 음식이 자신들이 먹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아이슬란드의 특별 요리 가운데는 양의 머리를 반으로 잘라 삶은 스비드라는 요리가 있습니다. 접시를 내려다보니 이빨과 한쪽 눈이 그대로 있는 양의 머리 반쪽이 보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외국인들에게는 스비드의 “눈을” 들여다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언제든지 신선한 생선을 먹을 수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의 특별 요리 가운데 하르드피스쿠르라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가시를 발라내어 말린 생선 요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생선을 조리하지 않고 먹으며, 버터를 약간 발라서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통 이 생선은 딱딱해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두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인들은 이 생선이 나왔을 때 헨첼 형제의 반응이 어떤지 보려고 큰 기대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가 맛을 보자 선교인들은 맛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재치 있게 이처럼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먹어 본 것 중에서 제일 좋은 나무인 것 같군요.”

그 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통치체의 대표자들의 방문은 기억에 남는 격려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방문은 아이슬란드의 형제들이 비록 수가 얼마 되지 않고 외딴 지역에 있지만 그들이 국제적인 형제들 가운데 일부이며 그리스도인 사랑의 띠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시켜 주었습니다.

의사들 및 언론과 좋은 관계를 세워 나감

1992년에는 네 명의 형제들로 구성된 병원 교섭 위원회가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훈련을 받기 위해 두 명의 형제가 영국에서 열린 병원 교섭 위원회 세미나에 참석하였고, 다른 두 명의 형제는 덴마크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였습니다. 새로 형성된 병원 교섭 위원회는 조직을 갖추고 나서 큰 대학 병원의 의료진과 함께 모임을 가졌습니다. 130명이 그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의사, 간호사, 변호사, 병원 관리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병원 교섭 위원회가 전문 의료인들과 가진 최초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이해할 만하게도 형제들은 다소 염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임은 성공적이었고 그 후로 여러 병원에서 더 적은 수의 의사 및 다른 전문가들과 모임을 갖도록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저명한 외과 의사들이나 마취과 의사들과도 좋은 관계를 세워 나갔습니다. 이러한 접촉은 무수혈 치료와 관련된 문제들을 피하거나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97년에 환자의 권리에 관한 새로운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법은 환자의 동의가 없으면 어떤 치료도 할 수 없으며, 의식이 없는 환자의 의사(意思)를 알게 되면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함을 규정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그 법에는 12세 이상의 어린이에게도 치료법에 대해 의견을 물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의 사회자인 구드문두르 H. 구드문드손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매우 협조적이며 문제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큰 수술의 경우에도 수혈하지 않고 수술을 합니다.”

무수혈 치료와 수술에 관한 「깨어라!」 2000년 1월 8일호가 발행되었을 때 지부 사무실에서는 형제들에게 그 잡지를 가능한 한 널리 배부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그 잡지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지, 그리고 피 문제에 관한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안해 주었습니다. 처음에 일부 형제들은 그 잡지를 제공하기 주저하였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만 2000부 이상의 잡지가 일반에 배부되었습니다. 국민 22명당 1부의 잡지가 배부된 셈이었습니다. 한 형제는 “저는 좋은 대화를 너무나 많이 나눴기 때문에 구역 전체를 다 도는 것이 문제였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자매는 “제가 제공한 잡지를 거절한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국에 방송되는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고 있던 한 여자도 무수혈 치료에 관한 이 잡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 잡지를 받았는지 이야기한 다음 「깨어라!」에 설명된 수혈의 역사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누구든 무수혈 치료와 관련하여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증인들에게 이 문제와 관련된 출판물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깨어라!」를 전하기 위한 특별 운동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피와 관련한 우리의 입장이 합리적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증인들은 가능한 최선의 치료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과거에 피와 관련한 우리의 입장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던 사람들이 왕국 소식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나흘 만에 두 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하다

아이슬란드 형제들에게 있어서 1995 봉사 연도의 두드러진 일 중 하나는 6월 중에 두 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는 케플라비크에 건축되었고, 다른 하나는 셀포스에 건축되었습니다. 이 회관들은 아이슬란드에서 처음으로 속성 건축 공법을 사용해서 지은 왕국회관이었습니다. 이 두 회관을 짓는 데는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공사를 할 수 있도록 노르웨이 형제들이 사랑에 찬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노르웨이 지부에서 대부분의 건축 자재들을 보내 주었으며 12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공사를 돕기 위해 노르웨이에서 왔습니다. 건축 현장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놀라울 따름이군요” 였습니다. 아이슬란드 형제들은 속성으로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다는 소식을 듣기도 하고 그에 관한 글을 읽기도 했지만 이제는 직접 눈으로 그 회관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단 며칠 만에 아이슬란드에 있는 왕국회관의 수가 배로 증가한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것 역시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이슬란드 형제들은 두 채의 새 왕국회관이 생겼을 뿐만 아니라,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해 휴가를 내고 자비를 들여 노르웨이에서 온 형제 자매들과 훌륭한 교제를 나누면서 격려를 받았습니다. 우리의 국제적인 형제 관계에 대한 참으로 훌륭한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슬란드 형제들 역시 이 건축 공사에 힘을 보탰습니다. 150명이 넘는 지방 전도인들이 이 공사에 참여하였는데, 그것은 전국 전도인 수의 절반가량 되는 수였습니다.

이 왕국회관 건축은 또한 일반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전국으로 방송을 하는 두 개의 텔레비전 방송사에서는 뉴스 프로에서 그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두 군데의 건축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여러 라디오 방송사와 신문에서도 그 공사에 대해 보도하였습니다. 셀포스에 있는 지방 교회의 한 교직자는 증인들이 주목받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생각에 위험하고 잘못된 여호와의 증인들의 가르침에 대해 경고하는 기사를 지방 신문에 실었습니다. 그는 약하고 예민한 사람들은 특히 조심하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라디오 회견 가운데서도 같은 경고를 되풀이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교직자의 말은 바라던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관 건축 공사에 대해 감탄하였고, 형제들이 전파하다 만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교직자의 반응에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그 교직자의 경고가 신문에 실린 지 약 일주일이 지난 후 신문에 만화 한 컷이 실렸습니다. 만화의 앞쪽에는 교회가 보이고 뒤쪽에는 왕국회관이 보입니다. 두 건물 사이에는 강이 흐르는데, 잘 차려입고 미소를 짓고 있는 형제들이 손에 봉사 가방을 들고 왕국회관에서 교회 쪽으로 다리를 건너 걸어오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한 여자가 당황해서 휠체어에서 펄쩍 일어납니다. 발에 깁스를 한 남자와 맹인처럼 보이는 다른 남자가 뛰어가며 “도망가세요, 도망가세요, 증인들이 오고 있어요!” 하며 소리를 칩니다. 교회 계단에는 교직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서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만화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 신문의 편집부는 이 만화를 그해의 최고 만화로 선정하여 확대한 다음 편집부 사무실 벽에 전시하였습니다. 그 만화는 여러 해 동안 그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훌륭한 증거가 된 전시회

2001 봉사 연도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전과 전쟁 중에 나치의 박해를 인내하며 중립을 유지한 것에 초점을 맞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그 전시회는 세 곳에서 열렸고 총 관람객 수는 3896명에 달하였습니다. 마지막 주말에는 700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레이캬비크에 있는 전시회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나치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은 여호와의 증인들」 비디오의 아이슬란드어판이 전시회 기간 내내 세 곳의 모든 전시회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방문객들 중 상당수가 앉아서 비디오를 끝까지 시청하였습니다.

이전에 우리 증인들 역사의 이러한 부면을 알지 못했던 방문객들은 강제 수용소에서 증인들이 굳건한 입장을 고수한 것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여러 차례 전시회장을 방문한 한 여교수는 전시회를 통해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여호와의 증인들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강제 수용소에서 증인들이 나타낸 강한 믿음에 특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증인들은 믿음을 부인하기만 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국으로 방송을 하는 한 텔레비전 방송사와 지방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사들에서 그 전시회에 대해 호의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전시회가 열렸을 때 한 루터교 교직자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방문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한 형제가 그 교직자를 베델에 초대하였고 그는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베델을 방문한 지 며칠 후에 한 여자가 그 교직자에게 와서 어떤 성구와 관련된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교직자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 문의해 보라고 권하였는데, 그는 증인들이 대답해 줄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한 형제가 그 교직자와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동안의 번역

아이슬란드에 있는 적은 수의 전도인들에게 있어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공급하는 모든 영적 양식을 아이슬란드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종종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마태 24:45) 초기에는 캐나다에 사는 아이슬란드인 증인들이 대부분의 번역 일을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번역 일이 아이슬란드에서 수행되었습니다. 1947년에 온 최초의 선교인들은 같은 집에 살고 있던 연로한 시인 한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그래서 선교인들이 언어를 배우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선교인들을 위해 번역 일을 어느 정도 해 줄 수 있다고 제의하였고, 형제들은 그를 고용하여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과 「만민의 환희」 소책자를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옛말과 옛 표현들을 아주 많이 사용한 고대의 시적인 문체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선교인 중 한 명과 린달 형제가 번역문을 검토하여 고쳐 쓰기는 하였지만 그 책은 기대만큼 훌륭한 연구 보조 서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초판부터 널리 배부되어 총 1만 4568부가 인쇄되었습니다. 1949년에는 소책자가 2만 부 이상 인쇄되었습니다. 후에 형제들은 다른 번역자를 고용하여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What Has Religion Done for Mankind?) 책을 번역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형제들로 구성된 소규모 팀이 여러 소책자들을 번역하였습니다. 그중 하나는 1959년에 발표된 「“이 천국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소책자는 형제들이 많은 성서 연구를 새로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시점에 「파수대」를 아이슬란드어로 발행하라는 승인이 났습니다.

그 후로도 많은 훌륭한 서적들이 번역되어 발표되었는데, 1962년에는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1966년에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1970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1984년에는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1996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이 발표되었습니다. 1982년에는 연 4회 발행되는 「깨어라!」가 아이슬란드어 출판물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형제들에게는 아이슬란드어로 된 노래책이 없었습니다. 1960년에는 대회 때 사용하기 위해 네 곡의 노래를 번역하여 등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63년 11월 지역 대회에서는 선별된 30곡의 아이슬란드어 노래가 들어 있는 작은 노래책이 발표되어 형제들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때까지는 회중에서 노래를 부를 때 여러 언어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귄터 하우비츠와 루트 하우비츠 부부는 1958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어 독일에서 아이슬란드로 왔습니다. 루트는 외국인 형제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어, 덴마크어, 독일어, 스웨덴어, 영어, 핀란드어 노래책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아이슬란드 형제들은 어느 것이든 자기가 가장 잘 아는 언어로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루트는 “좀 어수선한 합창이었죠!”라고 말합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왕국 노래들이 점차 더 번역되었고, 마침내 1999년에는 225곡의 노래가 모두 실린 완전한 노래책이 아이슬란드어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한 이런 마련에 대해 매우 감사하고 있습니다!

1999년 8월에 열린 지역 대회는 아이슬란드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의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라!」 책이 영어판과 동시에 아이슬란드어로 발표된 것입니다. 대회에서 연사가 영어로 된 서적의 발표를 알리자, 청중 모두가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연사는 형제들에게 이 서적이 나중에 아이슬란드어로 발표될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대단히 기뻐할 만하게도, 아이슬란드어 서적을 보여 주면서 이 서적이 이미 아이슬란드어로 번역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이사야의 예언—온 인류를 위한 빛」 1권과 2권 역시 영어판과 동시에 발표되었습니다.

베델 확장과 큰 증가

1998년에는 지부 시설 개수 공사가 있었습니다. 길 건너편에 있는 두 채의 아파트를 구입하여 베델 성원을 위한 숙소로 사용하고 번역부에서 사무실 공간을 더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근년에는 번역자들이 뉴욕의 세계 본부에서 온 형제들의 방문으로부터도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번역 작업을 위해 여호와의 증인이 특별히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법을 번역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최근에는 본부에서 온 대표자들이 지부에서 ‘영어 이해력 향상 과정’을 주재하였습니다. 그 과정은 번역자들이 번역을 시작하기에 앞서 영어 본문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 보낸 편지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언어에 대한 제한된 지식만 가지고도 아이슬란드어로 번역을 시작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쁘게 생각합니다. 초창기에 번역된 것은 오늘날처럼 질이 높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작은 일들의 날이라고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스가랴 4:10) 우리는 아이슬란드에서도 여호와의 이름과 왕국이 알려져 왔으며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워 온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현재 지부 사무실에는 여덟 명의 상근 봉사자가 있습니다. 베델로 출퇴근하면서 비상근 봉사를 하며 일을 돕는 봉사자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지부에 있는 왕국회관을 대체하기 위하여 레이캬비크에 있는 회중들이 사용할 새로운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베델 봉사자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지부 건물을 개수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이슬란드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는 끈기와 자기희생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참으로,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들이 지난 76년 동안 아이슬란드에서 부지런히 일한 것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충실한 형제 자매들이 수확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서 이주해 와서 수년 동안 봉사를 하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계속 남아서 아이슬란드를 영구적인 거처로 삼기도 하였습니다. 여러 명의 훌륭한 아이슬란드 현지 전도인들이 나타낸 끈기 역시 칭찬받을 만합니다.

평균 왕국 전도인의 수는 적은 편이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곱 명의 선교인이 시골 지역과 이 섬의 작은 회중들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지난 봉사 연도에는 543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거의 180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아이슬란드의 형제들은 이사야 60:22에 기술된 다음과 같은 증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이 되고, 그 보잘것 없는 자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그 일의 속도를 더할 것이다.” 그때까지, 아이슬란드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인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완수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감사하는 태도로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리의 씨가 자라게 하실 것임을 확신합니다!—마태 24:14; 고린도 첫째 3:6, 7; 디모데 둘째 4:5.

[205면 네모]

아버지의 이름이 성(姓)처럼 사용되는 곳

지방 관습에 따라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혈족을 나타내는 성이 없다. 사람들은 서로를 이름만으로 부른다. 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의 이름에다 접미사 ‘-손’을, 딸의 경우에는 ‘-도티르’를 붙인 것이 아이의 성처럼 된다. 예를 들어 하랄두르라는 남자의 아들과 딸은 하랄드손과 하랄드스도티르라는 이름을 성처럼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해도 여자의 이름은 바뀌지 않는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매우 많기 때문에 전화번호부에는 사람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에 더해서 직업까지 나와 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족보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이전의 조상이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있다.

[208면 네모]

아이슬란드의 개요

국토: 이 섬나라는 북극권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그 둘레에 북대서양, 그린란드 해, 노르웨이 해가 있다. 화산, 온천, 증기를 뿜는 간헐천이 많다. 빙하가 국토의 10분의 1을 뒤덮고 있다.

주민: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대부분 노르웨이에서 건너 온 바이킹의 후손들로서, 대개 부지런하고 창의적이며 관대하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해안 근처에 살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아이슬란드어이지만 많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두 개 이상의 외국어를 말한다. 많이 사용되는 언어로는 영어, 독일어,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어에 속하는 몇몇 언어들이 있다.

생활: 어업이 아이슬란드 경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저인망 어선으로 열빙어, 대구, 해덕(대구의 일종), 청어를 잡아 올려서, 그 대부분을 가공하여 수출한다.

식품: 보통 물고기와 양고기를 먹는다. 아이슬란드의 특별 요리는 삶은 양 머리이다.

기후: 따뜻한 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기후가 온화하다. 겨울은 푸근하지만 바람이 많이 분다. 여름은 시원하다.

[210면 네모와 삽화]

1942년 9월 6일: “이 나라에는 봉사하는 사람이 여전히 파이오니아 한 명뿐이라 보고할 것이 많지 않습니다. 아이슬란드의 인구는 약 12만 명이며, 약 6000개의 농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농장을 방문하려면 안장을 얹은 조랑말이나 짐을 운반하는 조랑말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집들을 모두 방문하려면 대략 1만 600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며 넘어야 할 산들과 건너야 할 산의 급류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은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글은 게오르그 F. 린달이 아이슬란드에서 13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후에 쓴 것이다. 그는 그 후로도 5년 동안 아이슬란드의 유일한 전도인으로 활동해야 하였다.

[213, 214면 네모와 삽화]

충실한 봉사의 기록

올리버 맥도널드는 길르앗 학교 제11기 졸업생으로, 초기에 아이슬란드에 임명된 선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잉바르 옌센과 함께 1948년 12월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뉴욕에서 아이슬란드까지 화물선을 타고 왔다. 여행은 14일이 걸렸는데, 북대서양의 파도가 매우 거칠었다. 그 두 사람은 대부분의 여행 기간 내내 뱃멀미를 하였다.

1950년 3월에 맥도널드 형제는 영국 베델에서 일하던 영국 자매 샐리 와일드와 결혼하였다. 맥(맥도널드 형제의 애칭)과 샐리는 초창기에 많은 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고, 그들과 연구한 사람들은 지금도 충실히 여호와를 섬기고 있다.

1957년에 맥과 샐리는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아이슬란드에서 암 진단을 받았던 샐리는 영국에서 사망하였다. 맥은 샐리가 사망한 후에 다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고 정규 파이오니아로 그리고 여행하는 감독자로 13년 동안 봉사하였다. 1960년에 그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밸러리 하그리브스와 결혼하였다. 그들은 함께 스코틀랜드 북부로부터 영국 남쪽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채널 제도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여러 순회구에서 봉사하였다. 그들은 순회구에서 봉사하면서 북쪽으로 여행하여 계속해서 스코틀랜드 북부 해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셰틀랜드에서 봉사했는데, 그럴 때면 맥은 “다음은 아이슬란드입니다!”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래도 그들이 실제로 아이슬란드에 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1972년에 맥과 밸러리는 선교인으로 임명되어 다시 아이슬란드를 임지로 받았다. 맥은 지부의 종으로 봉사하였고 후에는 지부 조정 위원이 되었다. 맥과 밸러리는 아이슬란드에서 7년을 지냈고, 그 후에 선교인으로 아일랜드에 임명되었는데, 처음에는 더블린으로, 나중에는 북아일랜드로 임명되었다. 맥은 아일랜드에서 20년 동안 봉사한 후인 1999년 12월에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60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밸러리는 지금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삽화]

밸러리 맥도널드와 올리버 맥도널드 부부, 1970년대에 레이캬비크에서

[218면 네모와 삽화]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는 “연기 자욱한 만(灣)”을 의미하는데, 이곳에 처음으로 영구 정착한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온천에서 증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레이캬비크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의 레이캬비크는 총 인구 약 18만 명의 활기 넘치는 현대 도시이다.

[223, 224면 네모와 삽화]

그들은 아이슬란드를 고향으로 여겼다

팔 하이네 페데르센은 덴마크 출신이다. 1959년에 그는 아이슬란드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1년에 유럽에서 열린 “연합된 숭배자들” 국제 대회들 중 두 곳의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거기서 바이올렛을 만났다. 바이올렛은 이 국제 대회들 중 몇몇 대회에 참석하려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와 있었다.

대회가 끝난 후에 팔은 아이슬란드로 돌아왔고, 바이올렛은 집이 있는 캘리포니아로 돌아갔다. 그들은 5개월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962년 1월에 바이올렛은 팔과 결혼하기 위해 아이슬란드로 왔다. 팔은 당시에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슬란드 북서부의 인구가 별로 없는 지역에서 봉사하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그들은 한겨울에는 두 달 동안이나 해가 뜨지 않는 작은 읍에 살았다. 그 구역에 있는 몇몇 사람들을 방문하려면 가파르고 종종 얼음이 뒤덮인 산길을 가야 했으며 교통수단이라고는 팔이 덴마크에서 가져온 오토바이뿐이었다. 바이올렛은 햇볕이 따스한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많은 형제들은 바이올렛이 아이슬란드에 오래 있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바이올렛은 계속 머물러 있었고, 아이슬란드와 그곳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팔과 바이올렛은 1965년에 딸 엘리사베트가 태어날 때까지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다. 팔은 1975년까지 파이오니아를 계속하였고, 바이올렛은 그동안 가끔씩 파이오니아를 하였다. 1977년에 그들은 팔의 건강 때문에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다. 얼마 후 그들은 왕국 전도인을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그들은 다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딸이 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었을 때 아이슬란드로 돌아가 선교인으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선교 봉사와 여행하는 봉사를 수행하였다. 1989년에 팔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후 1991년에 베델 집이 공식적으로 개설되었는데, 이때 팔과 바이올렛은 최초의 베델 가족 성원 가운데 포함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계속 봉사하고 있다.

[228, 229면 네모와 삽화]

후대를 잘하기로 유명한 사람들

프리드리크 기슬라손과 그의 아내 아다는 1956년에 침례받은 일곱 명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드리크와 아다 부부는 올리버 맥도널드와 샐리 맥도널드 부부에게서 진리를 배웠다. 처음에는 프리드리크가 성서 연구를 하였다. 그때에 아다는 겨울 내내 바느질 동호회 활동에 몰두해 있었다. 봄이 되어 바느질 동호회 활동이 끝나게 되자 아다는 남편이 연구할 때 주방에 앉아 있곤 하였다. 결국 아다는 성서 토의에 호기심이 생겨서 남편이 연구할 때 자신은 참여하지 않고 함께 앉아 있어도 되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다 역시 연구에 온전히 참여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그들의 집에서 영어 「파수대」 연구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그들은 선교인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크는 이렇게 말한다. “선교인들이 살던 작은 다락방에서 집회를 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방에는 의자를 12개밖에 놓을 수 없어서 때때로 평상시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면 우리는 자그마한 옆방의 문을 열고 집회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정말 달라졌습니다. 현재 레이캬비크에는 세 개의 회중이 있고 집회를 보면 왕국회관이 가득 찹니다!”

프리드리크와 아다 부부는 후대를 잘하기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여섯 명의 자녀를 키웠지만 그들의 집은 형제들에게 항상 열려 있었다. 회중이 설립된 초창기 시절에 다른 나라들에서 아이슬란드로 온 많은 사람들이 프리드리크와 아다 부부와 즐겁게 지냈으며, 그 부부는 그 사람들이 거처를 마련할 때까지 숙소를 제공해 주었다.

[232면 네모와 삽화]

아이슬란드어 성서

최초로 성서를 아이슬란드어로 번역한 것은 스티오른이라고 하는 14세기의 책에 나오는데, 그 책에는 히브리어 성경의 일부를 번역하거나 풀어 쓴 것이 들어 있다. 최초의 아이슬란드어 “신약” 완역본은 1540년에 인쇄되었다. 그 성서의 번역자는 홀라르의 주교의 아들인 오두르 고트스칼크손이었다. 그는 노르웨이에서 신교를 받아들였고,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와 접촉하기도 하였다. 역사에 따르면 오두르는 아이슬란드로 돌아온 후 외양간에서 아주 힘들게 번역을 하였다. 자신을 고용한 가톨릭교인인, 스칼홀트의 주교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두르는 라틴어 「불가타」의 본문을 번역하였고, 자신의 원고를 직접 덴마크로 가지고 가서 인쇄하였다. 1584년에 구드브란두르 토를락손 주교는 최초의 아이슬란드어 성경 전서를 인쇄하게 하였다. 히브리어와 그리스 원어에서 번역한 최초의 성서 완역본은 1908년에 인쇄되었으며 1912년에는 개정판이 나왔다.

[삽화]

최초의 아이슬란드어 성경 전서인 “구드브란드스비블리아”

[216, 217면 도해와 삽화]

아이슬란드 연대표

1929년: 아이슬란드 최초의 전도인인 게오르그 F. 린달이 도착하다.

1940

1947년: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50년: 작은 회중이 형성되다.

1960

1960년: 처음으로 「파수대」가 아이슬란드어로 발행되다.

1962년: 지부 사무실이 레이캬비크에 개설되다.

1975년: 확장된 새 지부 사무실이 완공되어 봉헌되다.

1980

1992년: 병원 교섭 위원회가 구성되다.

1995년: 6월에 두 채의 왕국회관이 나흘 만에 건축되다.

2000

2004년: 284명의 전도인이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300

200

100

1940 1960 1980 2000

[20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아이슬란드

후사비크

홀라르

아쿠레이리

세이디스피에르두르

네스쾨이프스타두르

에스키피에르두르

스티키숄무르

보르가르네스

회븐

레이캬비크

스칼홀트

케플라비크

셀포스

[202면 전면 삽화]

[207면 삽화]

오른쪽: 게오르그 F. 린달, 1947년

[207면 삽화]

아래: 아이슬란드 조랑말과 함께 있는 린달 형제, 1930년대 초

[212면 삽화]

아이슬란드에 온 몇몇 최초의 선교인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잉바르 옌센, 올리버 맥도널드, 레오 라르센

[220면 삽화]

1962년부터 1968년까지 지부 사무실이 있었던 건물

[227면 삽화]

1969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아이슬란드에서 100명이 넘는 전도인들이 참석하였다

[235면 삽화]

이리스 게엘나르드와 셸 게엘나르드 부부, 1993년 1월, 아쿠레이리에서

[238면 삽화]

오른쪽: 저인망 어선 “스발바쿠르”호

[238면 삽화]

아래: 프리드리크와 셸

[241면 삽화]

오른쪽: 오드니 헬가도티르

[241면 삽화]

아래: 구드룬 올라프스도티르

[243면 삽화]

오른쪽: 아쿠레이리에 있는 왕국회관과 선교인 집

[243면 삽화]

아래: 비아르니 욘손, 지부 사무실 앞에서

[249면 삽화]

위: 셀포스의 왕국회관 건축, 1995년

[249면 삽화]

오른쪽: 완공된 건물

[253면 삽화]

아이슬란드 베델 가족

[254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비아르니 욘손, 구드문두르 H. 구드문드손, 팔 H. 페데르센, 베르그토르 N. 베르그토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