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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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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히티

타히티, 무레아, 보라보라 같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공중에서 내려다보면 녹색을 띤 짙은 파란색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태평양에 점점이 박혀 있는 보석 같아 보입니다.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고 다채로운 물고기들이 가득한, 오팔처럼 빛나는 석호는 황금빛 해변이나 화산으로 인해 검게 된 해변과 맞닿아 있습니다. 코코넛이 주렁주렁 열린 야자나무가 산들바람에 흔들립니다. 바위투성이인 내륙의 산악 지역은 푸른 초목으로 뒤덮여 있고 꼭대기는 구름에 가려 있어, 그림엽서의 한 장면처럼 곳곳의 경치가 매우 뛰어납니다.

화가들이나 작가들이 한결같이 이 섬들을 지상 낙원으로 묘사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마 천여 년 전에 이 섬들을 처음으로 발견하여 이곳에 정착한 옛날의 뱃사람들에게도 이 섬들은 틀림없이 낙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아마도 동남아시아인의 후손이었을 이 놀라운 개척자들은 오늘날 폴리네시아인으로 알려진 사람들의 선조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정착한 섬을 기점으로 하여 퍼져 나갔으며, 광활한 태평양으로 더 깊숙이 항해하여 수많은 섬과 환초를 자신들의 영토로 삼았습니다.

폴리네시아란 “많은 섬”이라는 뜻의 말로서, 오늘날 폴리네시아라고 불리는 곳은 북쪽의 하와이에서 멀리 남동쪽의 이스터 섬을 거쳐, 먼 남서쪽의 뉴질랜드까지를 잇는 가상의 삼각형 내에 있는 지역을 말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폴리네시아의 한 부분, 다시 말해서 타히티가 주도(主島)인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는 다섯 개의 군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각의 이름은 투부아이(오스트랄) 제도, 갬비어 제도, 마르키즈 제도, 소시에테 제도, 투아모투 군도입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16세기에 와서야 우연히 이 태평양 지역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다

1595년에 알바로 데 멘다냐 데 네이라라는 스페인 사람이 마르키즈 제도에 속한 일부 섬들을 발견하였습니다. 1606년에는 멘다냐 데 네이라의 지휘 아래 있었던 페드루 페르난데스 데 케이로스가 투아모투 군도의 일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1722년에는 네덜란드의 탐험가 야코프 로헤벤이 보라보라, 마카테아, 마우피티를 발견하였습니다. 1767년에 새뮤얼 월리스 선장이 영국 군함 돌핀호를 타고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타히티에 상륙하였습니다.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항해사 루이-앙투안 드 부갱빌 선장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타히티의 아름다움에 깊은 인상을 받은 동시에 주민들의 관능적인 풍습에 놀란 부갱빌은 타히티를 “누벨시테르”라고 명명하였는데, 「쿡과 오마이의 남태평양 예찬」(Cook & Omai—The Cult of the South Seas)이라는 책에서는 그 이름이 아프로디테[사랑과 미의 여신]가 바다에서 올라왔다고 하는 곳의 근처인 키티라라는 펠로폰네소스의 섬 이름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은 1769년부터 177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타히티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타히티가 속해 있는 군도를 소시에테 제도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탐험가들의 뒤를 이어 선교인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가장 효과를 거둔 사람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지원을 받은 단체인 런던 선교회 출신의 선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선교회의 선교인들 중 헨리 노트와 존 데이비스라는 두 명의 선교인은 타히티어를 문자 언어로 체계화하여 성서를 그 언어로 번역하는 엄청난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타히티어 성서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특히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지배적인 여러 섬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습니다. 재림교, 가톨릭, 모르몬교의 선교인들 역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는 마르키즈, 갬비어, 그리고 투아모투 동부에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 다섯 군도는 어떻게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습니까? 1880년부터 프랑스는 점차적으로 섬들을 합병해 나가기 시작하여 새로운 프랑스령 식민지를 형성하였습니다. 타히티의 파페에테가 수도가 되었고, 그 영토 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프랑스 시민권이 주어졌습니다. 1946년에 프랑스는 이 섬들을 해외 영토로 지정하였고, 1957년에 이 영토의 이름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채택하였습니다.

왕국 소식이 이르다

타히티를 방문한 최초의 증인은 시드니 셰퍼드로서, 그는 1931년에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시드니는 2년 동안 배를 타고 태평양의 섬들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뉴질랜드 출신의 프랭크 듀어가 왔습니다. 이 형제들은 비록 장기 체류 허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출판물을 많이 전하였습니다. 사실 그로부터 약 20년 후에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순회 감독자 레너드 (렌) 헬버그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나는 회중의 종과 함께 차를 타고 파페에테를 통과해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 회중의 종은 언덕이 많은 시골에서 살 때부터 알고 지내던 한 연로한 미국인을 태워 주려고 차를 세웠습니다. 그 남자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인 것을 알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여러 해 전에 당신네들 중 한 사람이 이곳에 와서는 러더퍼드 판사의 책 여러 권을 주었던 것이 기억나는군요.’ 이 일은 우리보다 앞서 있었던 파이오니아들의 활동에 관한 많은 증거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미국인이 말한 파이오니아는 시드니 셰퍼드나 프랭크 듀어 둘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좀 더 철저히 증거한 최초의 왕국 선포자들 가운데는 장-마리 펠릭스와 잔 펠릭스 부부가 있었는데, 이 부부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진리를 배웠습니다. 이들은 1953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55년에 이 부부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를 포함하여 더 크게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펠릭스 부부는 이 초대에 응하여 어린 아들 장-마르크를 데리고 1956년에 타히티로 이주하였습니다. 하지만 기술자였던 장-마리는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족은 타히티에서 북동쪽으로 23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투아모투의 마카테아 섬으로 이사하였고 거기서 인산염 공장에 취직하였습니다.

펠릭스 부부는 즉시 이웃 사람들과 장-마리의 직장 동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잔 펠릭스는 이렇게 기술합니다. “섬 주민들은 성서를 매우 존중하였고, 왕국 소식에 기꺼이 귀 기울였으며, 부지런히 성서를 연구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의 교직자들은 우리를 아주 박대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 신자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우리와 말을 해서도 안 되고 우리 집 곁을 지나가서도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그리스도인 부부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섬 주민들이 장-마리와 잔 부부를 매우 존경하기까지 하였는데, 그 부부는 마카테아에 있는 일부 유럽 사람들과는 달리 폴리네시아인들을 경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였는데, 장-마리가 다니던 인산염 공장의 책임자는 언제라도 고용인을 해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섬에 있던 두 명의 경찰이 이따금씩 그들을 찾아와 가족의 활동에 관해 질문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프랑스 경찰관들은 차츰 장-마리와 잔 부부가 전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경찰관들은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마우이 피이라이는 영적으로 잘 진보한 최초의 성서 연구생으로서 장-마리의 직장 동료이며, 폴리네시아인이었습니다. 마우이는 진리가 자신의 마음에 이르자,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예로서, 그는 흡연과 폭음을 중단하고, 15년 동안 동거하던 여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1958년 10월에 침례를 받은 마우이는 이 지역에서 여호와께 헌신한 최초의 폴리네시아인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고, 그 결과 교직자들은 분노하였습니다. 심지어 한 목사는 마우이가 해고당하게 하려고 계교를 꾸미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계교는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마우이는 평판이 좋은 부지런한 일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카테아에서 두 번째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제르멘 아마루라는 여교사였는데, 제르멘은 자신의 제자들 중 한 명인, 펠릭스 부부의 아들 장-마르크를 통해 진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장-마르크는 자신의 성서 지식으로 제르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래서 제르멘은 장-마르크의 부모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결과로 펠릭스 부부가 제르멘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제르멘은 모니크 사주라는 동료 교사와 그의 남편 라저 역시 여호와에 관해 알도록 도왔습니다.

펠릭스 부부와 마우이 피이라이는 또한 마카테아에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젊은 집사인 마누아리 테파아타우와 그의 친구인 아라이 테리이와도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 그 두 사람은 동료 신자들에게 삼위일체, 지옥불, 영혼불멸 등에 관한 성경 진리를 전하면서 자신들의 교회에 계속 참석하였습니다. 상상할 수 있듯이 이 일은 프로테스탄트 공통체에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고대 베레아에 살던 사람들과 같이, 진실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들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성서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사도 17:10-12.

두말할 나위 없이, 그 교회 목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증인의 말에 계속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추방해 버리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 위협에 굴복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적으로 진보하였고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마우이 피이라이의 아내인 모에아뿐만 아니라 마누아리와 아라이와 타이나 라타로가 있었는데, 타이나 라타로에 대해서는 이 기사의 뒷부분에서 언급될 것입니다.

전도인들과 성서 연구생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게 된 이 집단은 처음에는 펠릭스 부부의 집에서 모였으며, 장-마리가 프랑스어로 연설을 하면 마우이가 타히티어로 통역을 하였습니다. 1959년에 펠릭스 가족이 마카테아를 떠나자 그 집단은 마우이의 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마우이는 그 당시 침례받은 형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장-마리와 잔은 이 섬들에서 즐긴 봉사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남편과 사별하고 현재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잔은 이미 사망한 남편의 소감도 포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티끌만큼도 후회하지 않아요. 사실 마카테아에서 즐긴 봉사는 우리가 함께 살면서 남겼던 가장 훌륭한 추억이랍니다.”

좋은 소식이 타히티에 이르다

1955년, 펠릭스 가족이 마카테아로 가기 직전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렌 헬버그를 남태평양 지역에서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하였습니다. 그의 임지는 뉴칼레도니아에서부터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토록 넓은 구역에 전도인이 90명도 채 안 되었고, 타히티에는 전도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렌은 세 가지 기본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각각의 회중과 집단을 6개월에 한 번씩 방문하는 것, 고립되어 있는 전도인과 관심자 모두에게 연락을 취하는 것, 가능한 곳에서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사용하여 새로운 구역을 확장하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 12월에, 렌은 처음으로 타히티에 발을 내딛고, 그곳에서 2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는 학교에 다닐 때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렌은 영어를 하는 사람들을 찾으려는 생각에 먼저 사업 구역에서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타히티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매우 관심 있어 하였고, 렌에게 다시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다음 토요일에 그는 렌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한 후 렌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고, 기사가 운전하는 자기 차에 렌을 태우고 집으로 갔습니다. 렌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러다가 오후 한 서너 시경에 그가 소라 껍데기를 집어 들고는 그것을 부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마을의 모든 고위 인사들을 그의 집에 인접한 회관으로 소집하는 신호였습니다.

시장, 경찰서장,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집사들 몇 명을 포함하여 약 12명 정도가 왔습니다. 그는 나를 ‘이 섬의 새로운 종교’인 여호와의 증인의 대표자로 소개한 다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헬버그 씨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성서 질문에 모두 대답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제기된 모든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두 달 동안 매주 토요일에 이런 과정을 반복하였습니다. 비록 그 부유한 사람은 끝까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렌이 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에서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상영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곳에 120명 이상이 참석하였습니다.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습니까? 헬버그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6년 크리스마스 날 아루에 지역에서 호별 방문 봉사를 하다가 미켈리 가족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 가족은 간절한 마음으로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미켈리 가족은 미국에 사는 친지가 「파수대」와 「깨어라!」 지를 예약해 준 덕분에 그 잡지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후에 미켈리 부부의 딸인 이렌과 그의 남편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또한 렌은 가르니에 씨와도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그의 가족의 다른 성원들 역시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959년에 파페에테 회중이 설립되었을 때, 그 회중의 초기 성원들 중에는 미켈리 가족과 가르니에 가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57년에 헬버그 형제가 길르앗 학교에 갔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순회 감독자인 폴 에번스와 그의 아내 프랜서스에게 타히티를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타히티에서 머무른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70부가 넘는 성서와 서적들을 전하였고 「파수대」와 「깨어라!」 예약 신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에번스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타히티에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이제 충분한 성서 지식을 가졌고, 조직의 인도 아래 전파 활동을 몹시 시작하고 싶어 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한 지원과 인도를 받게 될 것입니까?

타히티 출신의 자매가 고향으로 돌아오다

아그네스라는 젊은 타히티 여자는 1936년에 타히티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얼 셴크라는 미국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진리를 받아들이고 1954년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이고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57년에 그들 부부가 친구인 클라이드 닐과 앤 닐 부부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을 때, 세계 본부에서 온 네이선 노어 형제는 도움이 크게 필요한 곳들이 많이 있음을 알렸습니다. 타히티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습니다.

닐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그네스는 흥분하여 벌떡 일어나서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그네스와 얼을 바라보며, 그들 부부와 열한 살 된 그들의 아들이 타히티로 가는 데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체 장애인인 얼 역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7년 동안 남태평양 지역에 살면서 화가, 조각가, 작가로서 일을 했었고, 그곳으로 몹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내인 아그네스는 여전히 프랑스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닐 형제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기도를 한 후에, 아내와 나는 열두 살, 여덟 살, 세 살인 세 아들을 데리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친구인 데이비드 카라노와 린 카라노 부부와 그 아들인 데이비드 2세 역시 우리와 함께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1958년 뉴욕 시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한 후 우리는 배를 타고 타히티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미국 지부는 관심자들 몇 명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그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 도착한 아그네스는 이미 부지런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프랑스어와 타히티어 둘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항상 아그네스와 함께 전파하였습니다. 아그네스와 함께 할 수 없을 때에는 당시에 연구 보조서로 사용되던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영어판과 프랑스어판 모두 가지고 다녔습니다.”

헬버그 형제와 에번스 형제 부부가 놓은 토대 위에 이러한 노력이 기울여진 결과로, 몇 주 지나지 않아서 17명이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닐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에 프로테스탄트 교직자였던 테라투아 바이타페라는 연구생이 기억납니다. 그는 교회의 교리들에 관하여 많은 의문을 품었기 때문에 직업을 잃었습니다. 테라투아는 방이 하나뿐인 아주 작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그 집에는 수도나 전기 시설도 없었습니다. 그는 4년간 신학교에서 배우고 7년간 교직자로 있으면서 배운 것보다 우리와 단지 몇 주간 성서 연구를 하면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말했습니다.”

닐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 섬에서 지내기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나자,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을 통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좋은 일이었는데, 타히티 사람들은 우호적이며 성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작은 집단의 전도인들은 처음에는 셴크의 집에서 모임을 열었습니다. 관심자는 단 두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닐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약 15명이 우리와 정기적으로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연구를 하던 한 부인은 2, 3년 전에 자기 집 앞에서 렌 헬버그의 자전거가 고장났을 때 그를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렌은 그 부인에게 출판물을 전하였고, 그래서 그 부인은 우리가 렌과 같은 종교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 부인의 집은 우리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집을 방문하면 그 부인은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하곤 하였는데, 보통 강철통 위에 맛있고 신선한 생선을 구워 주었습니다.”

1958년 12월에 닐 가족과 카라노 가족이 떠나기 전에, 클라이드 닐 형제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두 번째 침례 연설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침례 연설은 10월에 하였는데, 그때 마카테아에서 마우이 피이라이가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번에는 60명이 참석하였고 8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닐의 아들인 스티븐과 아우구스테 테마나하가 있었는데, 아우구스테는 나중에 후아히네 섬에 회중이 설립되도록 도운 타히티 사람입니다.

강화하는 기간

피지 지부의 요청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존 휴블러와 그의 아내 엘렌이 1959년 타히티로 이사를 와서 갓 형성된 파페에테 회중을 도왔습니다. 존은 아내와 함께 타히티에 머무를 수 있었던 7개월 동안 회중의 종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존은 스위스 태생으로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습니다. 엘렌도 남편과 함께 뉴칼레도니아에서 수년간 봉사한 덕분에 역시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휴블러 부부는 새로운 전도인들에게 절실히 필요로 했던 호별 방문 봉사 훈련을 베풀었는데, 대부분이 비공식적으로 전파하는 일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1960년에 존과 엘렌 부부는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받은 구역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지방 전도인들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었습니다. 존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다가 1961년에 나는 길르앗 학교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졸업 후에 나는 태평양에 있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모든 섬들을 위한 순회 감독자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왕국회관

휴블러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히티를 두 번째로 방문하고 있을 때 나는 전직 교사였던 마르셀 아나호아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당시에 우리는 자체 왕국회관을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장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땅을 팔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회중 기금이 얼마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께서 일들을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고 계속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마르셀과 연구를 하다가 그런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습니다. 마르셀은 ‘보여 주고 싶은 것이 있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마르셀은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더니 손으로 한 곳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이 보이나요? 이 땅은 내 소유랍니다. 원래는 건물을 지을 계획이었지만 이제는 진리를 배우고 있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 땅의 절반을 왕국회관을 위해 기증하겠어요.’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조용히 여호와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파페에테 회중은 법적인 절차를 밟은 다음 곧바로 최초의 왕국회관을 건축하였고, 그 회관은 1962년에 완공되었습니다. 회관은 섬의 전형적인 단순한 디자인을 따라 벽은 트여 있고 판다누스 잎으로 지붕을 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웃의 닭들은 회관이 좋아 보였는지 좌석에 둥지를 틀고 서까래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래서 집회에 참석한 형제들은 바닥과 가구 위에 달걀뿐만 아니라 이 깃털 달린 세입자가 남긴, 보고 싶지 않은 흔적들을 발견하곤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이 더 크고 영구적인 건물을 짓기까지 그 회관은 매우 적당한 모임 장소였습니다.

법적 불안감이 해소되다

초기에 형제들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법적 신분이 어떠한지를 확실히 알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952년부터 「파수대」지가 금지되었지만, 활동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영토인 이곳 역시 그와 같을 것이었습니까? 게다가 전도인들의 수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여호와의 증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1959년 말에는 경찰이 무슨 일이 있는지 보려고 집회 장소에 들어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은 법인체를 구성하라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면 불안감이 해소되고 의심도 사라질 것이었습니다. 1960년 4월 2일에 형제들은 자신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로서 공식적으로 등록되었다는 확인서를 받고 매우 감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파수대」 지는 여전히 프랑스에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금지령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도 적용될 것이라 생각하고 「파수대」 지의 기사를 실은 「라 상티넬」(파수꾼)이라는 잡지를 받았는데, 그 잡지는 스위스에서 보내 온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경찰이 당시 법인체의 책임을 맡고 있던 미셸 젤라에게 자기들은 「라 상티넬」이 「파수대」를 대신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잡지의 수입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1975년에 프랑스에서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해제되자 타히티의 형제들은 지방적으로 「파수대」지를 받기 위한 허가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밝혀진 사실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관보」에서는 금지령을 공포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는 「파수대」가 금지된 적이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편 지방 당국은 비자 발급 및 연장에 관하여 엄격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시민이 아닌 사람들, 이를테면 앞서 언급한 클라이드 닐과 앤 닐 같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체류할 수 있는 기간이 단지 몇 개월에 불과하였습니다. 존 휴블러의 가족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하지만 존은 법인체의 구성원으로서, 프랑스 법에 따라 법인체의 임원 중에 외국인을 한 사람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존이 순회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경찰국장은 어느 날 존의 사무실을 찾아와서는 존이 왜 그렇게 자주 섬들을 방문하는지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존은 법인체의 한 성원으로서 구성원들의 모임에 참석해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국장은 그 설명에 만족하였습니다. 하지만 존은 그 외에도 여러 차례 국장을 만나야 하였습니다.

1963년 초에 적어도 한 명의 유명한 목사를 포함하여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이 태평양에서의 핵무기 실험에 대해 분노하였습니다. 배교자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존 휴블러 형제가 선동자들 중 한 사람이라고 경찰에 고발하였지만, 물론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존은 다시 경찰국장 앞에 소환되었습니다. 존은 고발한 사람을 비난하는 대신, 성서에 근거한 우리의 중립 입장과 존중심을 가지고 정부 권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하여 친절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로마 13:1) 존은 또한 경찰국장에게 얼마의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결국 경찰국장은 누군가가 증인들을 곤란에 빠뜨리려 했던 것뿐이라고 올바로 결론 내렸습니다.

하지만 휴블러 가족은 결국 비자를 더 이상 연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으며, 1993년에 건강이 나빠져 중단하게 될 때까지 그곳에서 순회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휴블러 가족은 섬들에서 지내면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주목할 만하게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킨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74세의 여자로 14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존 휴블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 여자를 ‘마마 로로’라고 불렀습니다. 진리를 배운 마마 로로는 함께 살고 있던 남자와 결혼을 하였고 자녀들 모두를 법적으로 등록하였는데, 아이들의 아버지가 모두 달랐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시장은 자녀를 모두 기입하기 위해 서류 두 개를 붙여 길게 하나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마마 로로는 여호와의 방법대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이 충실한 자매는 침례를 받은 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는데, 잡지를 전하는 일에 특히 능숙하였습니다. 이 자매는 다른 전도인들과 함께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섬들에까지 전파하러 갔습니다.

타히티어 성서—축복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타히티어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번역가인 노트와 데이비스 덕분에 1835년 이후로는 타히티어로도 성서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그 성서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포함하여 성서 전체에서 타히티어로 이에호바라고 하는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제도 전역에 널리 배포된 이 타히티어 성서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정확한 지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타이나 라타로가 있었습니다. 1927년에 태어난 타이나는 마카테아에 있던 초기 성서 연구생 집단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는 자신의 모국어인 타히티어를 읽거나 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부지런히 노력을 기울였고 잘 발전하였습니다. 그는 심지어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하였고 후에는 봉사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현재 78세인 엘리자베트 아베는 투부아이 제도에 있는 리마타라라고 하는, 타히티에서 약 6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1960년 당시에 엘리자베트는 프랑스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타히티어는 읽고 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파페에테로 이사하였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 맏딸 마르게리테를 통해 성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트 역시 아홉 명의 자녀를 데리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남편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였는데, 남편은 엘리자베트가 집회에 가 있는 사이에 엘리자베트의 옷을 모두 집 밖으로 내던져 버리곤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집회는 프랑스어로 열렸고, 때때로 몇몇 프로를 타히티어로 통역하였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성구가 언급되면 자신의 타히티어 성서를 펴서 따라 읽음으로 프로그램으로부터 영적 양식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사용하여 엘리자베트와 연구했던 자매는 프랑스어로 된 내용을 말로 타히티어로 번역해 주었고, 엘리자베트는 성경 구절을 자신의 성서로 읽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자베트는 잘 발전하여 196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다음에 엘리자베트는 타히티어만 할 줄 아는 사람들과 연구를 하였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의 자녀들 역시 가르쳤으며 그중 여섯 명이 여호와께 헌신하였고, 자신이 직접 키운 몇몇 손자녀들 역시 헌신하였습니다.

그의 외손녀인 디아나 타우투는 지난 12년 동안 타히티 지부에서 번역자로 봉사하였습니다. 디아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히티어에 대해 훌륭한 지식을 갖도록 도와준 외할머니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현재 사람들이 자신의 모국어로 생명을 구하는 영적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특권을 누리고 있답니다.”

중국인들이 여호와를 알게 되다

1960년대에는 타히티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중국인이었습니다. 그 중국인들 가운데 처음으로 성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당시 십대 소녀였던 클라리스 리간입니다. 클라리스의 가족은 가난했습니다. 그는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고자 수업이 없는 매주 수요일에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증인 가족이 클라리스를 고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클라리스는 진리를 접하게 되었고, 부모의 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2년에 18세의 나이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알렉상드르 리 콰이와 아를레트 리 콰이 부부와 키 싱 리간 역시 타히티에서 여호와를 섬긴 최초의 중국인 가운데 들어 있었습니다. 택시 운전을 하던 알렉상드르는 어느 날 짐 워커와 샤미언 워커 부부를 만났는데, 그 증인 부부는 전파 활동을 돕기 위해 1961년에 뉴질랜드에서 왔습니다. 알렉상드르는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샤미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 나는 파이오니아였어요. 그래서 남편은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렉상드르에게 말했지요. 알렉상드르도 제의를 받아들였어요.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책을 사용하여 30분 동안 영어를 공부하고 30분 동안은 성서를 연구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했답니다.”

그러는 동안 알렉상드르의 동생인 키 싱 역시도 진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두 사람 모두 가톨릭으로 개종한 지 얼마 안 되었고 그 종교의 교리에 관하여 배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성서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교리 학습 과정이 끝날 때 사제가 학습반에 속한 약 100명의 사람들에게 질문이 있으면 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상드르는 손을 들고 영혼이 불멸이라는 성경적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제는 이렇게 반박하였습니다. “이 질문이 어디서 나왔는지 압니다. 당신은 여호와의 증인과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다음 그 사제는 학습반 사람들 앞에서 젊은 알렉상드르를 조롱하였습니다.

알렉상드르와 키 싱은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 교회가 진리의 관리인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의 아내와 함께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며, 후에 그 두 형제는 회중 장로로 임명되었습니다. 알렉상드르는 한동안 타히티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에 알렉상드르는 아내와 함께 소시에테 제도에 속한 라이아테아로 이사하여 왕국 활동을 지원하였고, 그런 다음 보라보라로 이사하여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바다에서 바뀐 인생 행로

안토니오 란차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텔레비전 공장 기술자였습니다. 1966년 그 회사는 타히티로 가서 애프터서비스를 운영할 자원자를 모집하였습니다. 안토니오는 3년 동안 계속될 그 일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인 안나와 어린 두 아들을 떼어 놓고 가려고 계획하였습니다. 안나는 몇 주 동안 울면서 남편의 마음을 바꿔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파페에테까지 배를 타고 가면 30일이 걸립니다. 안토니오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우호적인 사람이었지만 배에 탄 사람 거의 대다수는 그가 알아듣지 못하는 프랑스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항해 둘째 날에 그는 이탈리아 사람인 두 명의 가톨릭 수녀를 만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매일 행하는 종교 의식 때문에 이야기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수녀들은 이탈리아어를 할 수 있는 프랑스 부인 한 명이 배에 타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릴리앙 셀랑으로 증인이었습니다. 릴리앙은 자녀를 데리고 타히티에서 직장을 구한 남편과 함께 지내기 위해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안토니오는 릴리앙을 찾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 다음 릴리앙은 안토니오에게 이탈리아어로 된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주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영적인 주제를 가지고 많은 토의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토의를 하다가, 릴리앙이 안토니오에게 타히티에서 일하는 3년 동안 아내와 자녀로부터 떨어져 있기로 하여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릴리앙은 또한 에베소 5:28, 29과 마가 10:7-9 같은 성서 구절을 보여 주면서 결혼의 신성함에 대한 하느님의 견해에 관하여 알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안토니오는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파나마에 있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돈이 마련되는 즉시 두 자녀와 함께 타히티로 올 수 있도록 비행기편을 마련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안토니오는 다시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는 그 편지에 사제에게 부탁해서 성서를 한 권 구해 오라고 썼습니다. 사제는 이 부탁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사제는 안나에게, 그런 복잡한 책을 읽으려고 하다니 남편이 미친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습니다.

안토니오가 타히티에 도착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난 후, 그의 가족이 와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종교심이 강한 안나는 도착한 바로 다음날, 교회에 가서 가족이 다시 만난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자고 안토니오에게 말했습니다. 안토니오는 “좋아요. 교회에 갑시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안토니오는 가족을 데리고 가톨릭 교회가 아니라 왕국회관으로 갔습니다! 물론 안나는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안나는 프로그램을 즐겼고 성서 연구에 동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누가 안나와 연구를 하였습니까? 배에서 안토니오에게 증거했던 바로 그 자매, 릴리앙 셀랑이었습니다.

원래는 타히티에서 안토니오 혼자 3년 동안 머물기로 한 것이지만, 가족 모두가 35년 동안 그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안토니오와 안나와 이제는 네 아들 모두가 참 숭배 안에 연합하고 있으며, 안토니오는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한 가족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형제 자매들이 왕국 전도인이 더 크게 필요한 곳을 돕기 위해 외딴 섬들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마라 가족, 하아마루라이 가족, 테리이 가족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가족 중에서 혼자 진리 안에 있던 아토 라쿠르가 있었습니다. 바이에레티아이와 마리-메들렌과 다섯 자녀로 이루어진 마라 가족은 타히티에서 라이아테아로 이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봉사를 하고 있던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는 다른 곳으로 임지를 옮겼습니다. 그 섬에는 단지 자매 두 명과 몇 명의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바이에레티아이는 조각가로서 나무를 가지고 조각을 하다가 나중에는 산호로 조각을 했는데, 그래서 그는 이사를 하고도 직업을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장로였던 그는 자격을 갖춘 다른 형제가 올 때까지 5년 동안 라이아테아에서 작은 집단을 돌보았습니다. 그 후에 마라 가족은 타하로 이사하여 4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물질적인 면으로 보자면, 그 두 섬에서 지낼 때 마라 가족의 생활은 넉넉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바이에레티아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조각품을 팔기 위해서 타히티까지 가야 했습니다. 때로는 비행기 삯으로 지불할 돈이 없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작은 항공사를 맡고 있던 사람에게 돌아올 때 왕복 요금을 모두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외상으로 비행기표를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사실 때때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는 하였지만 필수품이 부족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자기희생과 관련하여 바이에레티아이와 마리-메들렌이 남긴 모범은 딸 잔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잔은 26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해 왔으며, 지금은 타히티 베델 가족 성원입니다.

1969년에 아토 라쿠르는 전근 발령을 받아 가족과 함께 투부아이 제도에 있는 루루투 섬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당시 침례받은 지 3년밖에 안 된 그는 가족 중에 혼자 진리 안에 있었고, 그 섬에는 다른 전도인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착한 다음날 증거하기 위해 나갔습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혼자서. 힘이 들었다. 큰 바빌론이 이곳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토 라쿠르의 집 거실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아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섬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교의 성원들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 집단을 ‘라쿠르의 종교’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계속 자라게 하셨’고, 우리 집단은 1976년에 회중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3:6) 라쿠르 형제가 2000년에 사망하기 전에 아내인 페레나를 포함하여 그의 가족들 중 여러 명이 참 숭배에 가담하였습니다.

루돌프 하아마루라이와 나르시스 하아마루라이 부부는 보라보라로 이사하였습니다. 타히티의 지방 전기 회사에서 관리직을 맡고 있던 루돌프는 그 직장을 그만두고 보라보라에서 코코넛을 채집하고 코프라(코코넛의 배젖을 말린 것)를 만드는 직장을 구했습니다. 그는 2년 동안 다른 직장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돌프와 그의 아내는 보라보라에 회중이 설립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그것은 정말 여호와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5년 이상 그 회중은 하아마루라이 가족의 집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2000년에 그들은 보라보라의 그림 같은 석호 근처에 건축한 새로운 자체 왕국회관으로 이사하였습니다.

15명의 자녀 가운데 아직 7명을 부양하고 있던 타아로아 테리이와 카테린 테리이 부부는, 역시 소시에테 제도에 속해 있는 작은 섬인 마우피티로 이사하였습니다. 1977년에 테리이 가족이 마우피티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전도인은 그들뿐이었습니다. 테리이 가족은 석호 가장자리에 위치한 초목이 우거진 작은 섬인 모투(산호섬)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주로 생선과 강판에 간 코코넛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습니다. 또한 식용 조개를 채집하여 팔기도 하였습니다. 테리이 가족은 증거하러 갈 때, 가시에 독이 있는 고기를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어서 석호를 가로질러 큰 섬으로 갔습니다.

1980년에 타아로아와 카테린 부부는 보라보라를 임지로 받았는데, 이번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받았습니다. 5년 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한 후에 그들은 15년간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그들의 초창기 성서 연구생들 중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좋은 소식을 위해 많은 박해를 인내하였습니다.

영적 아기들이 시험을 받다

테리이가 사회한, 보라보라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성서 연구생들은 에드몽(아포) 라이와 바히네리이 라이 부부였습니다. 그 부부는 에드몽의 어머니가 소유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 부부가 성서 연구를 한 지 약 6개월이 지났을 때, 에드몽의 어머니는 목사의 영향을 받아 아들 부부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에드몽과 바히네리이 부부는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숲 속에 있는 오두막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그 목사는 에드몽의 고용주에게 그를 해고하도록 설득하였으며, 사실 에드몽을 고용할 만한 다른 고용주들까지 찾아가 그에게 일자리를 주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8개월 동안 이 작은 가족은 주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집을 지으려고 하던 어떤 여자가 에드몽의 이전 고용주를 찾아왔습니다. 그 여자는 에드몽의 기술에 대해 아주 칭찬을 하면서 에드몽에게 집 짓는 일을 맡기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에드몽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다는 이유로 해고된 사실을 알고는 에드몽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그 도급인 역시 일을 맡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 에드몽은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에드몽의 어머니 역시 태도가 누그러져, 에드몽과 바히네리이 부부를 다시 집으로 불러들였습니다. 현재 에드몽은 보라보라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후아히네에 뿌리를 내리다

성서 연구생들로 이루어진 그 초기 집단 가운데는, 1958년에 타히티에서 침례를 받은 아우구스테 테마나하가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테는 침례를 받은 후 미국으로 이사를 했다가 1960년대 말에 아내 스텔라와 자녀 셋을 데리고 타히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점을 운영하였는데, 장사가 잘되었습니다. 하지만 1971년에, 순회 감독자로부터 그리고 앞서 언급한 마라 가족의 모범으로부터 격려를 받은 테마나하 부부는 그 상점을 팔고 타히티에서 160킬로미터가 넘게 떨어져 있는 후아히네 섬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후아히네 섬에는 자매 한 명과 관심자 몇몇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조직과 접할 수 있는 때는 가끔씩 파이오니아들이나 순회 감독자가 방문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테마나하 가족이 이사를 오자 감격하였습니다. 아우구스테는 즉시 집회를 조직하여, 자기 집 주방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약 2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처음에 아우구스테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테와 그의 가족은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실 것임을 신뢰하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며 바쁘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테마나하 가족이 전파하러 나가면 보통 아우구스테 테마나하는 차를 그 구역에 주차해 두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로 돌아오면 종종 차 안에 식품이 가득 들어 있곤 하였습니다. 누가 그것을 가져다 두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 구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친절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가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가족의 경제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여러 주간 계속되었습니다.

테마나하 가족이나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나타낸 열심과 인내 그리고 섬 주민들의 친절한 기질을 고려해 볼 때, 오늘날 후아히네에 번창하는 회중이 있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사실 이 섬에는 주민 53명당 1명이 전도인입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민 12명당 1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다른 많은 증인 가족들도 그와 비슷하게 자기희생적인 영을 나타냈습니다. 그 예로서 장-폴 라살과 크리스티앙 라살 부부는 1988년부터 마르키즈 제도에서 2년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장-폴은 타히티에 있는 사회 보장국의 이사였지만 봉사의 직무를 더 많이 수행하기 위해 그 명망 있는 직장을 사퇴하였습니다. 1994년에 라살 부부는 다시 이사를 하였는데, 이번에는 투아모투 군도의 랑이로아로 가서 3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장-폴은 현재 프랑스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좀 더 최근에는 콜손 데아네가 타히티의 교도소 부소장 직을 사임하고 아내 리나와 함께 투부아이 제도에 있는 투부아이 섬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둘 다 파이오니아이고 그 섬에 있는 작은 회중의 훌륭한 자산이며, 그 섬은 여전히 장로들을 크게 필요로 하는 지역에 속합니다.

가족들이 돕기 위해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다

몇몇 가족들이 활동을 돕기 위해 멀리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시카리 가족 즉 프랑시스와 자네트 그리고 여섯 살과 아홉 살 된 두 딸이 있는 가족을 고려해 보십시오. 프랑시스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우리는 봉사의 직무를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1971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영문)을 읽다가 전도인들에게 남태평양에서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몇몇 친구들과 친족들이 말리려고 하였지만, 시카리 가족은 도전이 되는 그 일을 받아들였고 1972년 4월에 파페에테에 도착하였습니다.

장로인 프랑시스가 오게 되자 푸나아우이아 마을에 타히티의 두 번째 회중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시스는 1976년에 타히티에서 지부 위원회 마련이 시행되었을 때, 당시 다른 회중의 주임 감독자인 장-피에르 프랑신과 함께 타히티 최초의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프랑시스는 12년 동안 그러한 자격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시카리 가족의 친구와 친족들이 나타낸 염려는 합당한 것이었습니까? 프랑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한 바와는 달리, 이주는 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실 현재 우리 식구의 전 시간 봉사 연수는 총 105년이며, 우리는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많은 축복을 누려 왔습니다.—말라기 3:10.”

1981년에 프랑스 지부는 파페에테에서 여객선으로 30분 거리에 있는 무레아 섬에 장로들이 필요하다고 「왕국 봉사」지에 광고를 실었습니다. 두 증인 부부가 그 부름에 응답하였는데, 그중 한 쌍이 알랭 라파엘리와 아일린 라파엘리 부부입니다. 그들은 무레아에 회중이 설립되도록 도왔으며, 그곳에서 8년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알랭은 1987년부터 1994년까지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1997년에 프랑스 지부는 장로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외딴 섬들로 이주해서 2년 이상 그곳을 도울 만한 은퇴한 형제들을 초대하였습니다. 타히티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제라르 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두세 부부 정도가 초대에 응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열한 부부가 자원하였습니다! 두 부부는 이곳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형제 자매들은 영적으로 장성하였고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전도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비록 선교인은 아니지만 선교인 생활과 외딴 섬에서의 문제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지부가 설립되다

태평양에서 활동이 진척됨에 따라 조직상의 조정이 뒤따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의 활동은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감독하다가 1958년에는 좀 더 가까이에 있는 피지 지부에서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변화는 1975년에 세계 본부의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W. 프랜즈가 타히티를 방문했을 때 있었습니다. 그들은 7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격려적인 연설을 하였고, 노어 형제는 한 왕국회관에서 참석한 약 500명에게 환등 강연을 하였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노어 형제는 장로들과 만나서 타히티에 지부를 개설하도록 제의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제안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순회 감독자인 알랭 자메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이 새로운 마련은 올바른 조치였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사실 피지는 오스트레일리아보다 가까웠지만 언어의 벽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형제들은 자체 지부와 직접 더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역 전체의 전도인 수가 300명이 채 안 되었기 때문에 지부 사무실은 작았습니다. 사실 그 사무실은 파페에테의 왕국회관에 딸려 있는 방이었습니다. 한쪽에 책상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지부 감독자는 시간제로 일을 했기 때문에 알랭과 그의 아내 메리-앤은 순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전도인이 없는 외딴 섬에서 전파할 수도 있었습니다.

투아모투 군도와 갬비어 제도에서의 전파 활동

타히티 지부 설립과 함께, 외딴 섬들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습니다. 어떤 경우는 형제들이 스스로 그룹을 지어 외딴 섬들로 떠났습니다. 한동안 지부 위원으로 일했던 악셀 창은 20명의 형제 자매들로 구성된 그룹이 전세기를 타고 투아모투에서 가장 큰 환초인 랑이로아로 간 때를 기억합니다. 악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랑이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나서 공개 강연을 준비하였습니다. 그곳의 시장은 지붕이 있는 자리를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청중이 우리 그룹뿐일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아마 사람들이 종교 지도자들을 두려워하고 있을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강연이 막 시작되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니 자리가 점점 채워졌습니다.”

창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강연 도중에 가톨릭 사제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의 모임 장소를 향해 급히 달려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까이 오더니 속도를 줄이고 자기 양들 가운데 누가 이곳에 참석했는지 하나하나 살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이런 식으로 나타나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알랭 라파엘리는 1988년에 갬비어 제도로 전파 여행을 조직하였습니다. 타히티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가톨릭이 매우 우세한 이 제도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가운데 가장 작고 가장 외딴 곳입니다. 증인이 이 제도를 방문한 것은 1979년 알랭 자메가 이곳에서 사흘을 보낸 것이 전부였습니다.

형제들은 먼저 시장을 찾아가 활동에 대해 설명을 하고 공개 집회를 열 만한 장소를 요청하였습니다. 시장은 예식장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자신은 선거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일은 형제들과 함께 해 줄 수 없다고 미안해하였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그를 이해해 주었습니다. 강연에는 시장과 지방 경찰관을 포함하여 3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알랭은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한 내용의 공개 강연을 하던 중에, 성서에 나오는 지옥은 단지 무덤일 뿐이며 그리스도께서도 가셨던 곳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러셨을 리가 없소!” 하고 청중 가운데 누군가가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알랭은 사도 신경 가운데 그리스도가 “지옥에 내려가시어”라고 된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청중은 어리둥절하였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청중은 그 구절을 여러 해 암송해 왔으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실제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가족은 현재 진리 안에 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종종 회중들을 방문하는 사이에 이따금 생기는 빈 주(週)를 이용하여 전도인이 아무도 없는 지역을 개척하였습니다. 타히티 출신의 마우리 메르시에와 멜라니 메르시에 부부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투아모투에 있는 많은 환초들 즉 마니히, 아나, 아헤, 타카로아, 타카포토, 하오에서 최초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습니다. 마우리는 또한 가능한 경우에는 언제나 공개 강연이나 환등 강연을 하곤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섬 주민은 대부분 우호적이었습니다. 가톨릭교의 성채와 같은 곳인 아나에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환등 강연을 하는 중에 일부 사람들이 고함을 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결국에는 그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선교인들이 섬들에 오다

1978년 초에 많은 선교인들이 프랑스에서 외딴 섬들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미셸 뮐러와 바베트 뮐러 부부는 1978년 8월에 도착하여 마르키즈 제도에서 가장 크고 인구가 가장 많은 섬인 누쿠히바에 임명되었습니다. 가끔씩 형제들이 가톨릭이 우세한 이 군도를 방문하였지만 아무도 장기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미셸과 바베트 부부는 걷거나 말을 타고 다녀야 했습니다. 종종 지역 주민들이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 부부는 말리기 위해 깔아 놓은 커피콩 위에서 잔 적도 있었습니다!

뮐러 부부는 마르키즈에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다가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부의 방문에 고마워하면서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사실 미셸과 바베트는 1년 동안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을 1000권이나 전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들과 모든 전도인들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훌륭한 선교인들이 기울인 노력의 결과로, 전파 활동은 마르키즈에서만 아니라 지부 구역 전역에서 매우 잘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록에 따르면, 전도인 신기록을 연속으로 69회나 달성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새로운 사람들은 모두 훈련이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대일로 도움을 베풀 경험이 많은 형제들이 늘 충분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뮐러 부부의 경우에는 새로운 전도인 두 명과 함께 봉사함으로 이러한 어려움에 잘 대처하였습니다. 한 전도인이 미셸이나 바베트와 함께 호별을 하러 가면, 그동안 다른 전도인은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길에서 기다렸습니다. 현재 뮐러 부부는 아프리카 베냉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증거 활동이 우리의 성경 지식을 시험하였다’

1982년 2월에는 선교인인 크리스티앙 벨로티와 쥘리에트 벨로티 부부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도착하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순회 봉사를 하고, 그 후로 5년 동안 라이아테아 섬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는데, 그 섬에는 아우트리거 즉 배가 뒤집히지 않게 해 주는 긴 부재(浮材)를 부착한 카누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증거하는 일은 노를 젓는 기술만이 아니라 “성서 지식도 시험하였다”라고 크리스티앙은 말합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기름부음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늘에 갈 것임을 어떻게 압니까?’ 또는 ‘묵시록에 나오는 야수들은 무엇을 상징합니까?’와 같은 질문들을 꽤나 자주 받곤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소규모 공동체가 그러하듯이, 라이아테아의 주민들도 모두 서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전도인이 무활동이 되면 집주인이 ‘한동안 아무개가 보이지 않는군요. 그 사람은 열정이 식었나 봐요?’라거나 ‘아무개는 도움이 필요해요. 그 사람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요!’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벨로티 부부가 라이아테아를 떠날 즈음에는 거의 모든 파레(“집”이라는 뜻의 타히티어)에서 누군가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해 본 경험을 갖게 되었습니다.

라이아테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벨로티 부부는 마우피티 섬에도 갔습니다. 한번은 그 부부가 서적이 마우피티로 직접 발송되도록 마련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적은 제때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티앙과 쥘리에트는 낙담하지 않고 전하려고 했던 서적과 동일한 개인용 서적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거의 30가족이 그 서적이 곧 도착할 것임을 확신하면서 서적을 신청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서적이 도착하자 한 관심자가 친절하게 그 서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벨로티 부부의 다음 임지는 투아모투 군도에 있는 랑이로아였는데, 그곳에서 증인은 그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임지는 다시 프랑스령 기아나가 되었다가 마침내 콩고 민주 공화국으로 바뀌었는데, 현재 벨로티 형제는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지부 위원회의 한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1985년 4월에 프레데리크 뤼카스와 위르멩다 뤼카스 부부가 프랑스에서 도착하여 타하 섬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전도인이 세 명뿐이었습니다. 그 젊은 부부는 처음 2주 동안 매우 힘들었습니다. 자기 집 거실에서 집회를 열었는데, 참석한 사람이라고는 자기들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왕국 노래를 부르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낙담하여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섬에는 전기나 전화 시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프레데리크와 위르멩다는 무전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인접한 라이아테아에 있는 선교인들과 연락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연결이 될 때 그러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또한 작은 냉장고가 있어서 이웃의 발전기에 꽂아 사용했습니다. 프레데리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발전기는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돌렸습니다. 하루는 집에 와 보니 토마토가 모두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이웃이 텔레비전으로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려고 발전기를 훨씬 더 일찍 돌렸던 것입니다.”

뤼카스 부부는 타히티어도 배워야 하였습니다. 다른 언어를 배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초보자들은 난처한 순간을 겪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 예로, 프레데리크가 기억하기를, 호별 방문 봉사 중에 자기는 “성령”—타히티어로 바루아 모아—에 관하여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아라는 어려운 발음을 완전히 익히지 못해서 “닭의 영”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부부가 타하에 도착했을 때 프레데리크는 23세로 봉사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인 알랭 자메에게 자기는 주어진 책임을 맡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알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여호와께서 당신을 훈련시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5년이 지나 뤼카스 부부가 다음 임지인 부르키나파소로 떠날 때, 타하의 작은 집단은 자체 왕국회관을 가진 전도인 14명의 회중이 되었고, 프레데리크 뤼카스는 장로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부부는 처음에 낙담하여 좌절하지 않았기에 정말 기뻐합니다! 최근에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는 우리의 젊은 시절 가운데 최상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참는 법을 배웠고,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을 때 기도를 하면 한결 좋아졌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우리의 피난처로 삼았고,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정말로 우리를 훈련시켜 주셨습니다.”

독신 선교인들이 어려운 임명을 받아들이다

프랑스 출신의 독신 선교인들도 도움을 베풀기 위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로 왔습니다. 초기에 온 사람들로는 조르주 부르조니에와 마르크 몽테가 있습니다. 그들은 둘 다 지부에서 봉사하였고 여행하는 봉사도 하였습니다. 마르크가 맡은 순회구에는 투부아이 제도, 갬비어 제도, 마르키즈 제도, 투아모투 군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환초들을 다니며 혼자 전파하였고 어떤 때에는 그 지역의 특별 파이오니아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가능한 경우에는 어디에서나 공개 강연을 하였는데, 어떤 섬들에서는 주민들이 거의 대부분 참석하였습니다. 마르크는 결혼한 후에도 한동안 여행하는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아내 제시카와 함께 보라보라 회중에 있으며, 장로이자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86년 2월에는 필리프 쿠지네와 파트리크 르마시프가 프랑스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마르키즈에 임명되었습니다. 마르키즈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여타 섬들과는 달리 섬을 보호하는 산호초가 없습니다. 이곳 섬들의 높은 절벽은 녹색을 띤 짙은 푸른색의 태평양 속을 거의 수직으로 파고드는 듯하며,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계속해서 그 절벽을 때립니다. 산등성이 사이로 시내와 폭포가 있는 좁고 비옥한 계곡이 있어서, 섬을 돌아다니는 많은 염소나 말이나 들소를 위한 최상의 서식지가 됩니다.

여러 해에 걸쳐서 파이오니아들과 전도인들이 드문드문 마르키즈를 방문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뮐러 가족이 1978년과 79년에 누쿠히바에서 18개월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이 군도 전체에 걸쳐 철저한 증거가 행해진 적은 없었습니다. 필리프와 파트리크가 온 후로 이러한 상황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사실, 가톨릭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사제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발전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두 형제에게 가해진 일부 협박에 대한 책임은 사제들에게 있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가톨릭 카리스마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자극제가 되어 지역 사회 내에서 광신적 행위가 증가하고 몇 건의 비열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파트리크와 필리프는 처음에는 함께 활동하다가 구역에 더 친숙해지게 되자 개별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차례로 한 사람이 히바오아에 있는 선교인 집에 머물면서 집회를 사회하면, 그동안 다른 사람은 다른 섬들을 방문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몇 주간 떠나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서로 완전히 떨어져 지내는 것이 더 실제적이고 효과적임을 알게 되어 파트리크는 북쪽 섬들에서, 필리프는 남쪽 섬들에서 증거하기로 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그 두 선교인을 돕기 위해 타히티인 가운데 특별 파이오니아들을 임명하여 그들과 함께 활동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파스칼 파터로, 현재 회중의 장로로 섬기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현재 순회 감독자인 미셸 부스타망트입니다. 이 열정적인 청년들은 기쁜 마음으로 젊음의 힘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잠언 20:29) 실제로 그들은 힘이 있어야 하였는데, 마르키즈에서 전파하는 일은 연약하거나 겁이 많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포장된 도로가 없고, 깊고 좁은 계곡을 굽이굽이 돌아가며 울퉁불퉁하고 종종 진흙탕이 되는 산길이 전부여서 집이나 마을들이 고립되어 있습니다. 이런 곳들을 찾아가는 유일한 실용적인 방법은 트레일 바이크라고 하는 작은 산악용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방법뿐이었습니다.

필리프는 오토바이를 타고 좁은 산길을 따라 가던 중에, 다른 차 때문에 놀란 한 무리의 들소가 자기를 향해 달려오던 때를 기억합니다. 한쪽은 낭떠러지이고 다른 쪽은 산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피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암벽의 경사면에 바싹 기대었는데,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습니다. 들소들은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지나쳤고, 필리프는 두려워 떨었지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미셸 부스타망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임명은 모험이었습니다. 무서웠던 때도 있었는데, 특히 어떤 섬들에 우리끼리만 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한때 내가 지내던 방갈로는 낮에 증거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깊고 어두컴컴한 계곡 속에 있었습니다. 근처 마을에서 침대를 구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하고 집으로 걸어와야 하였습니다. 그때는 땅거미가 질 무렵이었는데, 어둠 속에 우뚝 솟은 절벽이 나를 덮쳐 오는 듯하였습니다. 섬에서 행해지던 영매술 행위와 눈에 보이지 않게 돌아다니는 악귀들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를 하고 여호와의 이름이 많이 나오는 왕국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나의 방갈로에 들어왔을 때, 나는 문을 닫고 성서를 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평온함이 서서히 나를 감싸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3년간의 부지런한 활동 끝에 처음으로 마르키즈에서 성서 연구생이 진리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그 젊은 연구생의 이름은 장-루이 페테라노였습니다. 장-루이는 자기가 “양 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한 사제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사제는 젊은 장-루이를 “구원”하려고, 여호와라는 이름은 여호와의 증인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장-루이는 프랑스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크랑퐁 성서」(1905년판)의 시편 83:18을 인용하여 말하였는데, 그 성서는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합니다. 말문이 막힌 교직자는 떠났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마르키즈 사람이 신학적인 문제에 관해 가톨릭 성서를 사용하여 사제에게 성공적으로 맞선 것은 이때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가톨릭 주교의 개인 비서도 교회를 떠나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선교인들은 히바오아에서 유럽 출신의 장 오베를렝과 나딘 오베를렝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프랑스 화가 폴 고갱처럼 세상에서 떠나 있으려고 마르키즈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부부는 찾아가기가 매우 힘든 곳에서, 현대의 편의 시설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단순한 삶을 영위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장과 나딘은 3년 동안 연구를 하면서 생활의 많은 부분을 변화시킨 후 침례를 받았습니다.

필리프 쿠지네와 파트리크 르마시프는 1986년에 마르키즈에 도착하였는데, 군도 전역에 전도인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8년이 지나 필리프의 임지가 카메룬으로 변경되었을 때, 다시 말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마르키즈를 떠나려 할 때, 그곳에는 전도인이 36명 있었으며, 주민 210명당 1명이 전도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 주요 섬인 누쿠히바, 우아푸, 히바오아에 각각 하나씩, 세 개의 회중이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선교인이 도착하다

프랑스에서 온 마지막 선교인은 세르주 골렝과 마리-루즈 골렝 부부로 1990년 11월에 왔습니다. 이 부부 역시 마르키즈에 임명되었으며, 회중을 강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골렝 부부는 마르키즈어를 배웠고, 놀랍게도 사람이 거주하는 여섯 개 섬의 모든 가족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골렝 부부는 장로가 세르주 골렝뿐인 히바오아를 중심지로 하여, 그곳에서부터 전도인이 한 명도 없는 두 섬을 포함한 다른 많은 섬들을 정기적으로 찾아갔습니다. 세르주 골렝은 파투히바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그 지역의 가톨릭 집사와 프로테스탄트 집사가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자 매우 놀랐습니다. 그 집사들은 자기 종교의 예배가 마칠 때, 그 지방 학교에서 세르주가 제공할 30분간의 공개 강연에 사람들을 초대하는 광고를 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프로테스탄트 집사는 와서 세르주의 연설을 마르키즈어로 통역해 주었는데, 당시에는 그 집사가 마르키즈어를 세르주보다 더 유창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세르주는 청중이 자신의 성서로 다양한 성구들을 찾을 수 있게 해 주려고 성구들을 칠판에 적었습니다. 그는 또한 기도를 하였는데, 그 기도에 모든 사람이 분명한 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음날 골렝 부부는 파투히바에 있는 모든 가정에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그 부부는 파투히바 섬을 방문할 때마다 계속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섬의 인구는 600명이 채 안 됩니다.

성서 진리가 교도소를 뚫고 들어가다

육지의 다른 많은 곳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도 교도소에서 성서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 예로서 젊은 시절에 비행을 저질러 교도소에서 7년을 복역한 알렉상드르 테티아라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그는 탈옥수에 관한 유명한 소설의 주인공을 모방하여 적어도 여섯 차례 탈옥하였고, 그래서 나비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알렉상드르는 라이아테아의 은신처에서 성서와 「하나님이 거짓말하실 수 없는 사실」 책 한 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성서 전체를 읽었고, 그 책도 여러 번 읽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였다고 확신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알렉상드르는 그 책을 발행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였고 경찰은 그를 다시 타히티의 교도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콜손 데아네가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상드르는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콜손이 수감자에게 증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즉시 그가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알렉상드르는 콜손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더 배우고 싶다고 요청하였습니다.

콜손 데아네 형제는 교도소장의 허락을 받아 알렉상드르의 감방에서 그와 연구를 하였습니다. 곧 여러 명의 다른 재소자들 역시 연구를 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소장은 콜손에게 점심 휴식 시간에 그 재소자들과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두 명의 다른 장로가 이 일을 맡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30 내지 50명의 재소자들이 주간 성서 강연을 즐겼고, 그런 다음 원하는 사람들은 개인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알렉상드르는 급속히 발전하였고, 교도관들도 그러한 발전을 관찰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도소에서는 데아네 형제의 책임 아래 탈옥의 명수였던 알렉상드르에게 그가 처음으로 지역 대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알렉상드르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그는 석방되었으며, 여호와를 계속 섬기고 있습니다.

타히티 국제 대회

1969년에는 타히티에서 처음으로 국제 대회를 즐겼습니다. 당시에는 그곳 섬들에 전도인이 124명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16개 나라에서 온 210명의 대표자를 맞이하게 된 그들이 얼마나 가슴 설레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표단 가운데는 프레더릭 W. 프랜즈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통치체 성원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타히티를 방문하였습니다. 최고 참석자 수가 610명이었던 그 대회는 형제들에게 대단한 자극제가 되어, 이듬해에 전도인 수가 15퍼센트나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78년에 타히티는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 중 하나를 주최하였습니다. 이때는 참석자 수가 985명에 달하였습니다!

타히티어로 번역하는 일

전도인 수가 증가함에 따라 지부의 업무도 늘어났는데, 특히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폴리네시아의 주요 언어인 타히티어로 번역하는 일이 그러하였습니다. 타히티어를 잘 알고 있는 몇몇 연로한 전도인들은 지부가 설립되기 전부터 보통 프랑스어로 된 일부 출판물들을 틈틈이 번역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1963년부터 「왕국 봉사」지를 번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완역하였습니다.

1975년에 타히티 지부가 설립되자 번역 일은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새로운 번역자들은 학교에서 영어를 배워서, 영어에 친숙하였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이제 프랑스어 번역문이 아니라 영어 원문을 직접 번역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76년부터 지부에서는 「파수대」를 월 2회 타히티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고, 한동안 「깨어라!」도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유익하다’」,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 책을 번역하였고 노래 책도 완역하였습니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만큼 타히티어로 출판물을 많이 번역한 단체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에 걸쳐, 타히티어와 그 외의 폴리네시아 언어는 점차 프랑스어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추세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널리 사용되는 주요 언어인 프랑스어가 방송 매체에서, 그리고 대학교까지의 학과 과정에서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폴리네시아인들은 여전히 타히티어가 전통적인 고유의 언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형제들은 종종 타히티어로 증거합니다. 그리고 지부 구역 내에 있는 26개 회중 가운데 5개 회중이 타히티어 회중이며, 전도인의 약 20퍼센트가 이 회중들에 연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타히티어 출판물의 수요는 여전히 매우 많습니다.

집중적인 건축 프로그램이 시행되다

파페에테의 왕국회관에 딸려 있는 작은 방은 1975년부터 1983년까지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1983년에 파페에테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도시 파에아에 새로운 지부가 건축되었습니다. 온전히 지방 형제들의 힘으로만 지은 이 새로운 베델 복합 건물은 베델 가족을 위한 네 개의 숙소와 세 개의 사무실과 출판물 보관 창고와 왕국회관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1983년 4월 15일에 통치체 성원인 로이드 배리가 700명의 청중 앞에서 이 새로운 시설을 봉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지부 시설도 이내 너무 작은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통치체는 타히티 섬의 두 부분을 잇는 지협 근처의 시골 분위기가 나는 곳인 토아호투에 대회 회관이 딸린 더 큰 복합 건물을 건축하도록 승인하였습니다. 이 건축 계획은 뉴질랜드,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에서 온 형제들에 의해 완공되었습니다. 물론 지방 전도인들도 많은 지원을 하였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밀턴 G. 헨첼은 1993년 12월 11일에 이 새로운 복합 건물을 봉헌하였습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집중적인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도 시행되었습니다. 그 지방 지역 건축 위원회의 감독 아래, 형제들은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16채의 새로운 회관을 지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 대부분의 회중은 자체 왕국회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부의 조정과 추가 훈련

알랭 자메는 1995년까지 거의 20년 동안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있었지만 가족 책임 때문에 더 이상 그 일을 계속 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부 위원으로 남아 있으면서 이따금씩 지역 감독자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95년 9월에 통치체는 프랑스 베델 가족인 제라르 발자와 도미니크 발자 부부를 타히티로 보냈습니다. 제라르는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세 번째로 지부 위원이 된 사람은 뤼크 그랑제입니다. 그는 아내 레베카와 함께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1991년에 타히티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부부는 잠깐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한 다음 순회 활동과 지역 활동을 하다가 1995년에 지부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97년 5월에 타히티 지부는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을 열 수 있었습니다. 학급에 참석한 20명의 학생 가운데 많은 수가 특별한 봉사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예로 펠릭스 테마리이는 현재 그곳 섬들에 있는 순회 감독자 두 명 중에 한 사람입니다. 제라르 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 많은 형제들이 자격에 달하기 위해 애쓰고 자신을 내놓음으로, 다음 학급을 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확실히 여러 섬들에는 아직도 도움이 크게 필요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전도인이 없는 섬들이 있습니다. 다른 섬들에는 회중의 책임을 돌보기 위한 자격을 갖춘 형제가 필요합니다. 58개 섬에 사는 인구의 약 7퍼센트에 해당하는 주민들이 좋은 소식을 거의 듣지 못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영적으로 장성한, 프랑스 시민권을 가진 은퇴한 부부들이 그런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처럼 단 2년 동안이라도 우리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부에서는 기쁘게 그들의 신청을 받을 것입니다.”

급변하는 사회로부터 오는 도전

타히티는 특히 경제 성장과 더불어 급속한 세속화와 도시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른 섬들을 떠나 타히티를 향하는 인구 이동이 있게 되었습니다. 물질적 번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물질주의, 소비주의, 쾌락 추구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여호와의 백성이 이러한 교활한 압력에 희생되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영적인 것들에 우선순위를 두고 도덕적 순결을 유지하는 것이 특히 도전이 됩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축복은 계속 분명히 나타나, 현재 이 구역에서는 주민 141명당 1명이 좋은 소식의 전도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훨씬 더 아름다운 낙원 즉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영역인 영적 낙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요한 6:44; 사도 15:14) 더욱이 이 낙원은 머지않아 이 땅 전체를 뒤덮을, 그리고 어디에 살고 있든 모든 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준 고통과 슬픔과 심지어 죽음까지 사라질 문자적 낙원을 알리는 전조입니다.—욥 14:1; 계시 21:3, 4.

초기의 폴리네시아인은 큰 용기와 항해술과 수평선 너머에 있는 땅, 아마도 훨씬 더 좋은 땅에 대한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이 기사에 언급된 사람들과 같은 오늘날의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마련해 두신 훨씬 더 뛰어난 상을 위해 계속 진력합니다. 그들 역시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원들을 인도한 하늘의 별보다 더 확실한 방법으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을 앞에 놓여 있는 지상 낙원으로 틀림없이 인도하실 것입니다.—시 73:23, 24; 누가 23:43.

[각주]

^ 4항 이 기사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전체를 다루면서도 제목을 “타히티”로 한 것은, 타히티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타히티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사의 본문에 언급된 “타히티”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타히티 섬만을 가리킨다.

^ 54항 타히티어 성서가 있게 된 과정에 관해 알아보려면, 「파수대」 2003년 7월 1일호 26-9면 참조.

[72면 네모]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개요

국토: 총 면적 4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130개의 섬이 5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바다 위에 흩어져 있다. 그 섬들은 5개의 군도를 이루며, 각각의 이름은 투부아이(오스트랄), 갬비어, 마르키즈, 소시에테, 투아모투이다.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14개의 섬에 인구의 85퍼센트가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폴리네시아인이거나 폴리네시아 혼혈이다. 나머지 소수 집단으로 중국인, 유럽인, 미국인이 있다.

언어: 프랑스어와 타히티어를 주로 사용하며, 프랑스어는 행정·상업 언어로 사용한다.

생활: 경제의 주된 기반은 관광업을 포함하여 행정과 서비스 산업이다. 그 밖의 노동력은 농업, 제조업, 진주 양식업에 종사한다. 진주는 수출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식품: 상당 부분을 수입 식품에 의존한다. 지방 작물로는 바나나, 수박, 양상추, 카사바, 코코넛, 타로감자, 토마토, 파인애플, 파파야가 있다. 고기는 생선, 굴, 새우, 소, 염소, 돼지로부터 얻는다.

기후: 온화하고 습한 열대성 기후이지만 군도 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여름의) 우기는 11월에서 4월까지 계속된다. 타히티 중부는 해마다 비 때문에 9미터 이상 침수될 수 있다.

[74면 네모와 삽화]

높은 섬과 낮은 섬과 모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섬들은 모두 화산 활동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며, 주로 높은 섬과 낮은 섬의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높은 섬들은 바위가 많은 산지로 되어 있으며, 일부 섬들은 높이가 해발 수천 미터에 달하기도 한다. 타히티는 높은 섬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마르키즈 제도의 섬들을 제외한 높은 섬들은 모두 환초로 둘려 있다. 보라보라 주위에 있는 것과 같은 이러한 많은 환초들에는 모투라고 하는 초목이 우거진 작은 섬들이 있다. 사람들이 휴양지로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이런 모투들이다.

낮은 섬은 높이가 해발 몇 미터에 불과한 산호초이다. 대체적으로 고리 모양의 환초를 형성하여 수정처럼 맑은 석호를 만들어 낸다. 투아모투 군도의 섬들이 이런 종류이다. 어떤 석호는 그 크기가 엄청나다. 예를 들어 랑이로아에 있는 석호는 길이가 70킬로미터이며, 가장 넓은 곳은 폭이 20킬로미터에 달한다.

[77면 네모와 삽화]

교회 집사에서 왕국 선포자로

마누아리 테파아타우

출생: 1913년

침례: 1959년

약력: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집사였지만 마카테아 섬에 있는 최초의 성서 연구생들에게서 진리를 배웠다.

1956년에 증인인 장-마리 펠릭스와 잔 펠릭스 부부가 마카테아에 도착한 후에, 그들의 첫 번째 성서 연구생이었던 마우이 피이라이와 제르멘 아마루가 나에게 증거를 하였습니다. 곧 나는 교회의 동료 신자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으며, 그것은 교회에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습니다. 사실 목사는 나에게 여호와의 증인과 이야기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교회에서 탈퇴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집회는 펠릭스 가족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몇몇 다른 교회 신자들도 연구를 하고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최초의 이 작은 성서 연구생 집단에 속하게 된 것은 큰 특권이라고 생각합니다.

[83, 84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 나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셨다

레너드(렌) 헬버그

출생: 1930년

침례: 1951년

약력: 독신 순회 감독자로서 최초의 순회 임명을 타히티에서 시작하였다. 지금은 아내 리타와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고 있다

1955년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은 남태평양에서 순회 활동을 시작하도록 나를 임명하였는데, 이 광활하게 펼쳐진 구역에는 회중이 피지와 사모아에 하나씩, 단 두 개뿐이었고, 격지 집단이 여섯 개 있었습니다. 타히티에는 전도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나는 1956년 12월에 계획을 세워 처음으로 타히티를 방문하였는데, 피지에서 원양 여객선인 서던 크로스호를 타고 엿새를 여행한 끝에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림 같은 파페에테 항이 내려다보이는 하숙집에 숙소를 구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야외 봉사에 나가기 위해 옷을 입는데, 창 밖에 몇백 미터도 안 되는 곳에서 서던 크로스호가 떠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장 가까운 형제들로부터 30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그것도 외국어인 프랑스어를 말하는 사람들만 있는 새로운 땅에 혼자 있게 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깨어라!」 예약자의 주소 하나뿐이었습니다.

갑자기 외로움에 휩싸인 나는 주저앉아서 걷잡을 수 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울음을 멈출 수 없었던 나는 혼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은 공친 것으로 생각하고 잠이나 자야겠다. 내일 시작해야지.’ 그날 밤에 나는 매우 진지하게 기도를 드렸고 다음날 아침에 유쾌한 기분으로 일어났습니다. 오후에 「깨어라!」 예약자를 찾았는데, 그 사람은 알제리 출신의 여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언급된 루디아와 같이 그 여자와 그 여자의 34세 된 아들은 두 팔을 벌려 나를 환영해 주었고, 자기들의 집에 머무르라고 강권하였습니다. (사도 16:15) 갑자기 외롭다는 느낌이 사라졌습니다! 여호와께서 분명 나의 길고도 눈물 섞인 간구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렸습니다.

이제 와서 과거를 돌이켜 보면 여호와께서 얼마나 사랑이 많은 아버지이신지를 진정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꺼이 우리 자신을 바칠 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을 흘러넘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87, 88면 네모와 삽화]

초기의 파이오니아들

알렉시 티노루아는 1950년대 후반에 렌 헬버그가 조직한 모임에 참석하였다. 알렉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헬버그 형제가 프로테스탄트의 집사 여러 명과 함께 성서 토의를 하는 것을 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가르치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 증인들과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1960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9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즐겼습니다. 1965년에는 소시에테 군도에 있는 후아히네 섬에서 최초로 전파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데,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80명이 성서 진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도록 돕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알렉시는 2002년 5월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여호와를 섬겼다.

헬레네 마푸는 진리를 배운 직후인 1963년에 타히티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헬레네의 남편은 증인이 아니었지만 헬레네를 기꺼이 지원해 주었다. 헬레네의 남편이 하던 일 중에는 타히티와 라이아테아 사이를 항해하는 일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헬레네가 라이아테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을 때 반대하지 않았고, 헬레네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좋은 소식을 전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헬레네는 다시 타히티로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증인이라고는 자신과 메레아니 테파아로아라는 자매, 둘밖에 없는 반도로 이사하였다. (타히티의 이 조그만 반도 지역은 타히티이티라고 부르기도 한다) 헬레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반도에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우리는 짧은 시간 내에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분명 이 충실한 자매들을 축복하셨으며, 그리하여 나중에 바이라오 마을에 있는 그 구역에 회중이 형성되었다.

[101면 네모와 삽화]

“나와 여호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오”

이베트 질로

출생: 1932년

침례: 1968년

약력: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오래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

남편에게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싶다고 말하자 남편은 “나와 여호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오” 하고 마지막 결정을 강요하였습니다. 남편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나와 세 자녀를 남겨 두고 떠나 버렸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몇 년 후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나는 가족을 부양하면서 동시에 정규 파이오니아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세속 일을 하고, 그런 다음 야외 봉사 모임을 사회하였습니다. 1960년대 후반에 이곳 섬들에는 전도인이 약 100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항상 형제들이 모임을 사회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타히티 베델 가족의 성원이 된 리샤르 웡 푸를 비롯하여 1991년 이래 약 50명을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돕는 특권을 주신 그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쁘게도 나의 두 아들 역시 회중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05면 네모와 삽화]

마지막 공주를 위한 장례식

파페에테에 사는 장로인 미셸 젤라는 1976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한 타히티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타카우 포마레 공주와 관련하여 독특한 경험을 하였다. 공주는 포마레 왕조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포마레 왕조는 한동안 타히티와 인근의 여러 섬들을 다스렸다. 공주가 입양한 딸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그 딸은 공주가 증인이 아니었는데도 미셸에게 장례식 연설을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미셸은 정치계와 종교계의 관리들 및 언론계 인사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의 희망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연설을 하기로 하였다. 장례식 이튿날, 지방 신문에는 놓여 있는 관 앞에서 젤라 형제가 연설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실렸다. 참석한 사람들 가운데는 총독, 폴리네시아 정부의 대통령과 다른 관리들, 흰색의 정식 교직자 복장을 한 가톨릭 대주교가 있었다.

[109, 110면 네모와 삽화]

한 교직자는 우리에게 자기 스쿠터를 빌려 주었지만, 다른 교직자는 우리의 서적을 태워 버렸다

자크 이노디

출생: 1944년

침례: 1965년

약력: 아내 폴레트와 함께 프랑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고, 태평양 지역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하였다.

1969년에 나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배에 올라 새로운 임지인 타히티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우리의 여행은 약간의 짜릿함도 있었는데, 태평양 한복판에서 배에 불이 나 나흘 동안 표류했던 것입니다! 타히티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우리 순회구에는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 프랑스령 폴리네시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는 하나의 회중과 두 개의 격지 집단이 있었습니다. 1971년에 우리 순회구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만으로 축소되었는데, 그 덕분에 우리는 많은 외딴 섬들을 방문할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섬들 중 어떤 곳에는 이전에 왕국 소식이 한 번도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내와 나는 9개월간 후아히네에서 지냈고, 작은 섬인 마우피티에서도 얼마간 있었습니다. 후아히네에 있는 동안에는 44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먹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았는데, 대부분은 작살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검소하게 살았지만 결코 굶주리지는 않았으며, 물질적인 필요는 항상 채워졌습니다. 투부아이 섬에서 증거할 때는 한 목사가 우리에게 자기 스쿠터를 빌려 주어 뜻밖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였습니다. 아마 그 목사는 우리에게 교통수단이 없는 것을 보고 우리를 불쌍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1974년에 우리는 마르키즈 제도에 있는 누쿠히바, 우아푸, 우아후카, 히바오아, 네 개의 섬을 방문하였습니다. 지부에서는 우리에게 간호사 일 때문에 1973년에 우아푸로 이사하여 고립된 자매인 칼리나 톰 싱 비앙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 자매는 그곳에 13개월간 머무르면서, 마르키즈 제도에서 야외 봉사를 보고한 최초의 왕국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투부아이에 있는 친절한 목사와는 달리, 우아푸의 사제는 우리의 활동을 반대하였습니다. 사실 그 사제는 몰래 우리를 따라 구역을 돌면서 교구민들에게 우리가 전한 출판물을 모두 자기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칼리나의 집 앞에서 그것들을 모두 태워 버렸는데, 그 일은 우리만 아니라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르키즈에서의 활동은 발전하였으며, 우리는 거기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우리는 폴레트의 건강 문제로 전 시간 봉사를 그만두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호와께 우리가 가진 최상의 것을 드리겠다고 다짐합니다.

[113면 네모]

처음으로 섬을 방문하는 일

처음으로 외딴 섬이나 환초에 왔다고 상상해 보자. 당신은 사람들에게 한 주나 두 주 동안 증거를 할 생각이다. 하지만 그 섬에 증인은 당신뿐이고 공공 숙박 시설이나 교통수단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어디에서 머무를 것인가? 파이오니아이면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마르크 몽테와 자크 이노디는 여러 차례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였다.

마르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행기나 배에서 내리자마자 증거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숙박할 곳이 있는지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독신 남자로서 묵을 곳을 찾기가 항상 쉽지만은 않았지만, 보통은 누군가가 침대와 필요한 식사를 제공해 주곤 하였습니다. 다음 방문할 때는 숙소를 찾기가 항상 더 쉬웠는데,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더 쉬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부부를 대하는 것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자크는 자신의 접근 방법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종종 시장을 찾아가 내가 원하는 동안 머무를 수 있을 숙박 시설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아는지 그에게 물어보곤 하였습니다. 시장은 보통 적당한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러 섬에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를 존경하였고, 그를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보통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묵을 곳을 구하였습니다.”

[117, 118면 네모와 삽화]

야외 봉사는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알랭 자메

출생: 1946년

침례: 1969년

약력: 아내 메리-앤과 함께 프랑스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여러 형태의 전 시간 봉사를 하였다.

내가 열세 살이었을 때, 우리 가족은 프랑스에서 타히티로 이주하였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그곳에서 타히티 출신의 생물학과 학생인 메리-앤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1968년에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를 방문하였고,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새로 알게 된 희망에 관해 부모에게 알려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각각 타히티에서 다니던 교회에 편지를 써서 우리 이름을 명단에서 지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파페에테에 있던 아내의 교구에서는 그 이상의 조처를 취하여 아내를 공개적으로 파문하였습니다. 목사는 그러한 일이 있을 때 장인과 장모를 초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우리는 1969년에 침례를 받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있을 때 나는 군 복무를 하도록 소집되었으며, 중립 입장 때문에 두 달 동안 교도소에서 지냈습니다. 석방된 후에 아내와 나는 마르세유와 보르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연로한 부모의 요청으로 우리는 1973년에 타히티로 돌아가 1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전 시간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에 피지의 지부 감독자는 우리의 목표가 전 시간 봉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인지 물었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와 뉴칼레도니아에 순회 감독자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부모의 상황은 개선되었고, 우리는 초대를 받아들여 1974년 8월에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975년 N. H. 노어의 방문 중에 나는 타히티 최초의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1986년에 아들인 라우마가 태어나, 아내는 전 시간 봉사를 중단하였습니다. 행복하게도 라우마는 현재 우리의 영적 형제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우리가 누린 많은 봉사의 특권들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외 봉사는 아직도 우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123-125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양들을 돌보신다

미셸 부스타망트

출생: 1966년

침례: 1987년

약력: 아내 상드라와 함께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순회 감독자 두 명 중에 한 사람으로 봉사하고 있다.

우리 순회구에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다섯 군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순회구의 크기는 유럽만 합니다. 좀 더 외딴 섬들 중에는 전도인이 한 명이나 두 명밖에 없는 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외딴 곳에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을 방문합니다. 그 예로서, 투아모투 제도의 타카포토에 사는 로시타가 있습니다. 이 충실한 자매는 매주 모든 집회를 준비하며, 진리 안에 있지 않은 남편도 종종 그 자매와 함께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영이나 낚시를 하러 석호로 나가는 일요일에 로시타는 집회를 위해 옷을 차려입고 그 주에 살필 파수대 기사를 연구합니다. 로시타는 또한 야외 활동을 보고하는 면에서도 충실합니다. 로시타는 전화로 지부에 보고를 하는데, 사실 그의 보고는 종종 지부에 처음으로 도착하는 보고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특히 칭찬할 만한 이유가 되는 것은, 그가 사는 모투에서 가장 가까운 전화도 보트를 타고 45분을 나가야 있기 때문입니다.

비행기의 도착은 항상 무슨 행사와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로시타 자매를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왔을 때, 비행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누가 내리는지 보려고 모두 나와 있었습니다. 한번은 어떤 부인이 로시타에게 “누구를 마중하러 나왔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로시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영적인 형제 자매예요. 그들은 오직 나를 위해서, 나를 격려해 주려고 오고 있답니다.” 우리는 로시타와 야외에서 함께 봉사하고 그 자매에게 영적인 격려를 베풀어 주면서, 그의 집에서 3일을 머물렀습니다. 우리는 자정이 되기 전에 잠자리에 들 수 없을 때가 많았는데, 로시타가 영적인 교제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섬에서, 한 재림론자는 우리가 증인인 그의 이웃을 방문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그는 이웃의 우리 형제에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여기에 7년을 살았지만, 우리 교회에서 나를 격려해 주려고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이 남자는 그 섬에 있는 재림론자들의 소규모 집단의 비공식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니엘과 도리스는 투부아이 제도의 라에바바에에 단 두 명뿐인 전도인입니다. 그들은 매우 외딴 곳에 살고 있어서 찾기 힘들었지만 결국 그들을 찾았고, 우리는 그날 오후에 그 집에서 집회를 마련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들은 집회를 연다는 것에 감격해했고, 우리 모두는 나가서 참석하도록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집회를 위해 돌아오니, 농원에서 일하는 일곱 명이 그날 작업을 막 끝내고 와서 집 밖 도로변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로 감자를 담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튼 들어가시죠.” 그들은 따라 들어왔지만, 우리가 앉을 의자를 마련해 두었는데도 그들은 바닥에 앉았습니다. 그들은 집회를 즐겼고 집회 후에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날 오후에 우리 형제 자매가 가장 격려를 많이 받았고, 우리가 방문한 주된 목적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격지의 전도인들을 방문하는 일이 어려울 때도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는 섬에 비행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 넓은 대양을 가로질러 배를 타고 2시간 동안 더 가서 전도인 두 명이 사는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는 지붕이 없고 길이가 4미터인 고속정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배를 모는 사람에게 항해를 잘하는지 그리고 예비 모터가 있는지 물어서 확인을 하였습니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것은 아무래도 유쾌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날리는 바닷물 때문에 흠뻑 젖은 데다 뱃전에 부딪히는 파도 때문에 등이 아팠습니다. 돌아오는 뱃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드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오후에 나는 주(主) 섬으로 돌아와서 전파를 좀 더 하려고 자전거를 탔습니다. 하지만 배를 타고 와서 그런지 몸에 힘이 없고 덜덜 떨려서 산호로 만들어진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타자마자 넘어졌습니다!”

이상 말한 것을 보면, 우리가 격지에 있는 우리 형제 자매들을 방문할 때마다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이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사랑을 우리가 반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매우 특별한 영적 가족에 속해 있습니다.—요한 13:35.

[삽입]

“그들은 오직 나를 위해서, 나를 격려해 주려고 오고 있답니다”

[80, 81면 도해와 삽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연대표

1835년: 타히티어 성서 번역이 완료되다.

1930년대: 시드니 셰퍼드와 프랭크 듀어가 타히티와 아마도 그 밖의 섬들을 방문하다.

1940

1956년: 마카테아와 타히티에서 전파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1958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처음 두 차례의 침례가 베풀어지다.

1959년: 파페에테에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최초의 회중이 형성되다.

1960

1960년: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등록되다.

1962년: 섬들 가운데 최초의 왕국회관이 파페에테에 세워지다.

1969년: 타히티에서 처음으로 국제 대회가 열리다.

1975년: 타히티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1976년: 「파수대」가 타히티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다.

1980

1983년: 최초의 베델 집이 봉헌되다.

1989년: 1000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다.

1993년: 새로운 베델 집과 그곳에 인접한 대회 회관이 봉헌되다.

1997년: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이 열리다.

2000

2004년: 1746명의 전도인이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총 전도인 수

총 파이오니아 수

2,000

1,000

1940 1960 1980 2000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마르키즈 제도

누쿠히바

우아푸

우아후카

히바오아

파투히바

투아모투 군도

마니히

아헤

랑이로아

타카로아

타카포토

마카테아

아나

하오

소시에테 제도

마우피티

타하

라이아테아

보라보라

후아히네

무레아

타히티

투부아이(오스트랄) 제도

루루투

리마타라

투부아이

라에바바에

갬비어 제도

무레아

타히티

파페에테

푸나아우이아

파에아

토아호투

바이라오

[66면 전면 삽화]

[70면 삽화]

잔 펠릭스와 장-마리 펠릭스 부부는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철저히 증거한 최초의 사람들 중에 속한다

[71면 삽화]

마우이 피이라이는 이 지역에서 여호와께 헌신한 최초의 폴리네시아인으로서, 1958년에 장-마리에게서 침례를 받았다

[79면 삽화]

클라이드 닐과 앤 닐 부부(아래)는 타히티에서 아그네스 셴크(오른쪽)와 합류하여 전파 활동을 도왔다

[85면 삽화]

존 휴블러와 엘렌 휴블러 부부는 1960년에 순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86면 삽화]

1962년에 파페에테 회중은 최초의 왕국회관을 건축하였는데, 벽은 트여 있고 이엉으로 지붕을 인 단순한 구조였다

[89면 삽화]

「파수대」 지의 기사를 실은 「라 상티넬」 1965년 4월 15일호

[92면 삽화]

타이나 라타로는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해 타히티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92면 삽화]

엘리자베트 아베(앉아 있는 사람)와 그의 외손녀 디아나 타우투

[95면 삽화]

안나 란차와 안토니오 란차 부부

[96면 삽화]

바이에레티아이 마라와 마리-메들렌 마라 부부

[97면 삽화]

아토 라쿠르

[98면 삽화]

루돌프 하아마루라이

[99면 삽화]

바히네리이 라이와 에드몽 라이 부부(왼쪽)와 타아로아 테리이와 카테린 테리이 부부(오른쪽)

[100면 삽화]

아우구스테 테마나하와 스텔라 테마나하 부부

[102면 삽화]

크리스티앙 라살과 장-폴 라살 부부(왼쪽)와 리나 데아네와 콜손 데아네 부부(오른쪽)

[103면 삽화]

1970년대의 한 지역 대회에서 프랑시스 시카리의 연설을 타히티어로 통역하고 있는 라저 사주(왼쪽)

[107면 삽화]

아일린 라파엘리와 알랭 라파엘리 부부

[108면 삽화]

마우리 메르시에와 멜라니 메르시에 부부

[120면 삽화]

마리-루즈 골렝과 세르주 골렝 부부는 마르키즈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다

[122면 삽화]

알렉상드르 테티아라히와 그의 아내 엘마, 그리고 가장 어린 두 딸 라바(왼쪽)와 리바

[126면 삽화]

타히티어 번역 팀

[127면 삽화]

타히티에서 열린 최초의 국제 대회는 1969년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였다

[128면 삽화]

보라보라 섬에 있는 이 왕국회관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최근에 건축된 것이다

[130면 삽화]

크리스틴 테마리이와 펠릭스 테마리이 부부

[131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알랭 자메, 제라르 발자, 뤼크 그랑제

[132, 133면 삽화]

(1) 타히티 지부 시설

(2) 제라르 발자가 타히티어 “여호와께 가까이 가십시오” 책을 발표하는 모습, 2002년 7월

(3) 타히티 베델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