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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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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마지막 날에 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창세 3:15; 계시 12:13, 17) 루마니아는 그 예언이 두드러지게 성취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마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의 백성의 마음속에서 밝게 타오르는 진리의 불길이 꺼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20:9) 오히려 그들은 “많은 인내와 환난과 궁핍한 경우와 어려움과 매질과 감옥”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봉사자로 추천”하였습니다. (고린도 둘째 6:4, 5) 그들의 충절에 관한 기록이 이 어려운 시기에 하느님과 함께 걷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1914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기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 무자비한 독재자들, 극단적인 정치 이념들, 끔찍한 살육이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루마니아는 그러한 모든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었고, 그곳 사람들은 큰 고난을 겪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여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국가를 숭배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마태 22:21.

1945년 이전에는, 정교회와 가톨릭의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그리고 정치인들 및 경찰과 음모를 꾸미고 그들을 부추김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다음에 박해의 물결은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왔는데, 그들의 잔인하고 조직적인 박해는 거의 4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그처럼 억압받는 상황에서도 좋은 소식이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예수께서 “보십시오! 나는 사물의 제도의 종결까지 여러분과 항상 함께 있습니다”라고 하신 약속을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28:20) 이제 약 100년 전에 왕국의 씨가 오늘날 동유럽으로 불리는 땅에 처음 뿌려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루마니아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다

1891년에 성경 연구생 찰스 테이즈 러셀은 전파 여행 중에 동유럽의 여러 곳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과를 보고는 다소 실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어떠한 틈이나 여건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그는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루마니아에서는 머지않아 그러한 상황이 변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사실 러셀 형제는 그 자신이, 간접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그곳에서 활동이 시작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러하였습니까?

19세기가 끝나 갈 무렵에 많은 루마니아 사람들은 사회적·경제적 상황 때문에 일자리를 찾으러 미국을 포함하여 여러 나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물질 이상의 것 즉 성서 진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카로이 서보와 요제프 키시가 있었는데, 그들은 러셀의 성서 강연에 여러 차례 참석한 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러셀 형제는 이 두 사람이 성서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들을 꼭 만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러셀은 그 두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루마니아로 돌아가 친척들과 친지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는 것에 대해 고려해 보도록 제안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1911년에 배를 타고 루마니아로 돌아가서 트란실바니아의 티르구무레슈 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보 형제는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진리를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집에 도착하자 서보 형제는 기도와 일치하게 친척들에게 증거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숙식을 제공해 준 가톨릭 신자인 조카딸 주자나 에녜디가 있었습니다. 주자나의 남편은 정원사였고 주자나는 시장에서 꽃을 팔았습니다.

주자나는 매일 아침 일하러 나가기 전에 미사에 참석하였고 매일 밤 가족들이 잠자리에 들고 나면 정원에 나가 기도하였습니다. 서보 형제는 이것을 보고는 어느 날 밤 정원에 있는 주자나에게 다가가서 그의 어깨에 손을 살며시 얹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자나, 너는 마음이 정말 진실하구나. 너는 진리를 발견하게 될 거야.” 삼촌의 말처럼 이 훌륭한 여자는 마음으로 왕국 소식을 받아들였고, 티르구무레슈에서 최초로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주자나는 8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충실함을 유지하였습니다.

서보 형제는 또한 에녜디 가족을 위해 일하던 샨도르 요자라는 청년에게도 증거하였습니다. 샨도르는 두 형제가 사회하는 모든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배우는 속도도 빨랐습니다. 사실 18세의 이 젊은이는 오래지 않아 고향 마을인 무레슈 주의 서러체니에서 증거하면서 훌륭한 성서 강연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추천서”에는 여섯 부부와 24명의 어린이들(여자 어린이 13명과 남자 어린이 11명)이 포함되게 되었습니다.—고린도 둘째 3:1, 2.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는 티르구무레슈에서부터 시작하여 트란실바니아 곳곳에서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클루지나포카에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둠브라바 자치구에 있는 동안, 침례교인인 바실레 코스테아를 만났습니다. 바실레는 키는 작지만 의지가 강한 남자였고 열정적인 성서 연구생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관해 궁금했던 그는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가 성경을 설명해 주는 것을 주의 깊이 들었습니다. 헝가리어도 할 수 있었던 바실레는 침례받은 후에 자기가 사는 지역에 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헝가리 사람들에게 철저히 증거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콜포처(전 시간 봉사자)로 봉사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그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서보 형제는 또한 루마니아의 북서쪽 끝에 있는 도시인 사투마레에도 좋은 소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서보 형제는 파라스키바 칼마르를 만났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이 여자는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파라스키바는 아홉 명의 자녀가 여호와를 사랑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오늘날 파라스키바 가족은 5대째 증인입니다!

미국에서 성서 진리를 배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루마니아로 돌아온 루마니아 사람 가운데는 알렉사 로모체아도 있습니다. 알렉사는 트란실바니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고향 마을인 베네사트로 갔습니다. 오래지 않아 성경 연구생 곧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들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형성되었고, 그 지역에서 집회를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집단에는 알렉사의 조카들인 엘레크 로모체아와 가브릴러 로모체아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알렉사의 친족도 5대째 증인입니다.

엘레크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극심한 박해를 받아서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미국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개최된 성경 연구생의 특별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사실 그는 청중석의 루마니아어 구역에서 통역자로 봉사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가브릴러는 루마니아에 머물러 있으면서 서보 형제와 키시 형제와 동행하여 트란실바니아에서 전파하였으며, 새로 생긴 회중들과 집단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최초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엠마노일 킨차라는 루마니아 사람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체포되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의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집총 거부로 수감된 성경 연구생 몇 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엠마노일은 그들이 알려 준 성경의 소식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그는 1919년에 석방되어 마라무레슈 주의 바이아마레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였고, 성경 연구생들의 집단 하나가 형성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초기에 좋은 소식을 전파한 파이오니아들과 그들의 소식을 잘 들은 사람들이 나타낸 열심과 자기희생 정신 덕분에 제자들의 수가 증가하였으며, 루마니아에서 작은 규모의 성경 연구생 집단들이 급속히 많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카로이 서보와 요제프 키시가 루마니아로 돌아온 지 불과 8년밖에 되지 않은 1919년경에는 1700명이 넘는 왕국 전도인들과 관심자들이 150개의 성경 연구반(지금의 집단이나 회중)으로 조직되었습니다. 키시 형제는 고국에서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서보 형제는 1924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헝가리 밭의 활동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영적 양식 생산

왕국 소식을 널리 전하고 영적으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는 데 인쇄물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적 양식에 대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형제들은 인쇄업자들을 통해 현지에서 출판물을 인쇄하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1914년부터 티르구무레슈에 있는 오글린다(“거울”이라는 뜻)라는 사설 인쇄소에서 16면으로 된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을 매달 발행하였고, 서적과 전도지들도 발행하였는데, 이러한 출판물은 모두 헝가리어로 인쇄되었습니다.

루마니아어로 된 출판물은 1916년부터 현지에서 인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발행된 출판물들 가운데는 「“더 좋은 희생”의 그림자인 성막」 소책자, 8면으로 된 「간추린 파수대」 잡지, 「믿음의 가족을 위한 일용할 천적 만나」(현재의 「날마다 성경을 검토함」) 책, 그리고 노래 책인 「천년기 새벽의 찬송가」가 있었습니다. 1918년부터는 미국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에 있는 인쇄소에서 루마니아어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과 거짓 종교를 담대하게 폭로한 월간 전도지인 「만인의 설교단」을 발행하여 배편으로 루마니아에 보냈습니다.

좋은 소식 전파가 잘 진전되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을 조정하고 활동을 위한 법적 발판을 마련하는 일을 하도록 야코브 B. 시마라는 루마니아계 성경 연구생이 임명되었습니다. 시마는 1920년에 클루지나포카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카로이 서보를 만났으며 뒤이어 요제프 키시도 만났습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했던 일은 클루지나포카에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집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주택난 때문에 형제들은 한 형제의 아파트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20년 4월에 최초의 지부가 개설되었고,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라는 법인체도 설립되었습니다. 루마니아 지부에서는 한동안 구(舊)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헝가리의 활동을 감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시기에 발칸 반도에 불어온 혁명의 바람이 루마니아로 몰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정치적 불안에 더하여, 반유대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대학들에서는 상황이 심각하여 여러 도시에서 학생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정부는 공개 집회를 금지하는 방법으로 대응하였습니다. 그러한 소란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는데도 20명이 넘는 콜포처들은 체포되어 가혹한 처우를 받았으며 출판물을 압수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계속 야외에서 열심히 일하였고 출판물에 대한 수요도 계속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외부 인쇄소에 맡겨 인쇄하는 비용이 점점 더 많이 들게 되어 지부에서는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형제들이 이용하고 있던 클루지나포카의 레지나마리아 가(街) 36번지에 있는 인쇄소가 매물로 나왔습니다. 지부에서는 세계 본부의 승인을 얻어서 각각 4층과 2층인 두 채의 건물이 포함된 이 이상적인 시설을 매입하였습니다.

1924년 3월에 개수 작업이 시작되어 멀리 로드나, 바이아마레, 비스트리차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왔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개수 공사를 위해 헌금을 하려고 개인이 소유한 물건을 팔았으며, 식품이나 건축 자재를 기증한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물품을 대부분 데사지라고 하는, 어깨에 둘러메거나 말의 등에 실을 수 있게 되어 있는 특별한 가방에 담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인쇄 작업을 더 잘하기 위해 지부에서 구입한 것들 중에는 라이노타이프 세 대, 평판 인쇄기 두 대, 윤전 인쇄기 한 대, 자동 접지기 한 대, 금장 엠보싱 기계 한 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설을 갖춘 인쇄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루마니아에서 인쇄 품질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웠습니다.

베델 가족 여덟 명 중 한 명이, 인쇄실에서 삼교대로 근무하는 증인이 아닌 40명의 고용인들을 감독하였습니다. 인쇄실을 운영한 첫해인 1924년의 생산 보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로 서적 22만 6075권, 소책자 10만 부, 잡지 17만 5000부를 인쇄하였습니다! 인쇄한 서적 가운데는 성서 연구 보조서인 「하나님의 거문고」와 일곱 권으로 된 「성경 연구」의 제1권인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 있었습니다.

2년 동안 준비 작업을 한 후에, 지부에서는 또한 루마니아어판 「창조 사진극 시나리오」 책을 인쇄하였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나리오」는 천연색 유리 슬라이드, 활동사진, 그리고 영상과 동시에 나오는 음향을 사용하는 강연인 “사진극”을 기초로 만들어졌습니다. 독자들은 땅의 창조부터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끝까지의 사건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시나리오」는 “사진극”처럼 생생하지는 않았지만 400개의 인쇄된 그림들과 교리적·역사적·과학적 문제들에 대한 짤막한 교훈점들이 실려 있으며, 이 모든 것이 많은 독자들에게 성서를 더 조사해 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성경 연구반의 수가 증가하다

“왕과 그의 왕국을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광고하십시오!” 조셉 러더퍼드는 1922년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대회에서 위와 같이 권고하였습니다. 이 감동적인 권고를 들은 전 세계의 하느님의 백성들은 크게 고무되었으며, 더 큰 열심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형제들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새로운 구역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당시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어떻게 성서를 연구하였습니까? 그들은 ‘베뢰아 성경 연구회’라는 연구반에 참석하였습니다. 질문들이 주어졌고, 연구를 위해 여러 출판물에서 발췌한 인쇄 자료를 사용하였는데, 그러한 인쇄 자료는 우편으로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 계획표는 「파수대」에 실렸습니다. 또한 좀 더 발전한 연구생들은 ‘국제 주일 학교 공부’ 과정을 통해 유익을 얻었는데, 그 과정은 연구생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지부의 대표자들은 연구반들을 방문하여 연설을 하고 여러 방법으로 영적인 지원을 베풀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양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순례자들 즉 오늘날의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하였습니다. 순례자로 봉사한 사람이 1921년에 여섯 명이었다가, 불과 2년 후에는 여덟 명이 되었습니다. 이 열심 있는 일꾼들은 수백 군데의 도시와 마을에서 집회를 열고, 영적으로 굶주린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 순례자들 중에는 앞서 언급한 엠마노일 킨차와 오니심 필리포이우가 있습니다. 한번은 북부의 부코비나 지역에서 킨차 형제가 연설을 할 때, 청중 가운데 있던 상당수의 재림교 교인들과 침례교인들 중에서 몇몇 사람이 진리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후에 그 두 형제는 부쿠레슈티로 배정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도록 도왔습니다. 한 남자는 감사를 표하면서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엠마노일 형제와 오니심 형제를 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그 형제들은 저를 납득시키고 일깨워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주께서 이 도시에서 큰일을 하실 것이지만, 참을성을 나타낼 필요가 있습니다.”

1920년에 형제들은 처음으로 대회를 열었는데, 설라지 주의 브레비와 클루지 주의 오크나데줄루이에서 각각 대회가 열렸습니다. 두 곳 모두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었고, 그 지방 전도인들과 관심자들이 숙소를 제공하였습니다. 루마니아 전역에서 약 500명이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행실로 큰 증거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국 선포자들의 수가 급증하는 데 반대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형제들은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이 가하는 박해에 직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적들이 전쟁의 열기를 이용하다

당국자들은 국가주의에 영향을 받거나 교직자들의 부추김을 받아, 국기 아래 한데 뭉쳐서 나라를 위해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혀 동정심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많은 형제들은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사형을 당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 가운데는 클루지나포카 남쪽의 페트레슈티데미즐로크 마을에 살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오안 루스도 있었습니다.

이오안의 종손자인 다니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1914년에 종조할아버지는 군 복무 영장을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부쿠레슈티로 끌려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이 집행될 때 할아버지는 자신의 무덤을 판 다음, 그 옆에 서서 총살형 집행대를 마주 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자 형 집행 장교는 할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리 내어 기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기도에 감동을 받은 군인들은 머뭇거렸고 형을 집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장교는 한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서 할아버지에게 총을 쏘면 3개월 유급 휴가를 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그 제의에 응하였고 휴가를 받았습니다.”

1916년에는 키시 형제와 서보 형제도 체포되었고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들은 “위험 인물”이라는 판결을 받아 아이우드에 있는 보안이 철저한 교도소에서 18개월 동안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요제프 키시와 카로이 서보는 어떤 면으로 “위험 인물”이었습니까? 판사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공식 인정을 받는 가르침과는 다른 가르침을 선포”하였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기를 거부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신학과 상충되는 성서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수감된 것입니다.

그 두 사람은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교도소에 있으면서 회중들과 집단들에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의 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와 찬양과 영예를 받으실, 하늘에 계신 친절한 아버지께서 「파수대」로부터 빛이 비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 기뻐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파수대」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폭풍 속에서 깜빡이는 촛불을 지키듯 「파수대」를 지킬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 사람은 1919년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듬해에 지부 사무실 개설을 도울 수 있는 적절한 시기에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교직자들의 반대가 거세지다

1918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교직자들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백성을 반대하였습니다. 한 사제는 영혼불멸이나 마리아의 역할에 관한 성경 연구생들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였습니다. 그 교직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땅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성경 연구생들을] 미치게 만들고 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형제 자매이며 어느 나라 사람이든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그런 다음 그는 성경 연구생들이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고, 종교적이고, 평화롭고, 겸손한 척”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법적 조처를 취하기가 어렵다고 불평하였습니다.

1921년에 부코비나의 사제들은 내무부와 법무부에 성경 연구생들의 활동을 금지시켜 줄 것을 서면으로 요청하였습니다. 사실 진리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몹시 분노한 교직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화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정교회, 가톨릭교회, 그리고 다른 교회들에서 개인들과 폭도들을 부추겨 형제들을 공격하게 하면서 조직적으로 증오에 찬 선동 활동을 벌였습니다. 지부는 세계 본부에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교직자들이 공직에 아주 많이 진출해 있기 때문에 우리의 활동은 어느 정도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법을 준수한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있습니다.”

종무부는 빗발치는 교직자의 불평에 응하여 여호와의 백성들의 전파 활동과 집회를 저지하는 데 “공권력”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경찰은 교회의 손발이 되어, 평화를 교란한다는 거짓 혐의로 형제들을 체포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에 명확한 규정이 없어서 판사들의 판결은 각기 달랐습니다. 형제들의 선한 행실도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한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통 성경 연구생들은 대단히 평화로운 사람들이어서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해는 거세졌고 1926년 말에는 「파수대」가 금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적 양식의 공급이 중단된 것은 아닌데, 형제들은 단지 잡지의 이름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1927년 1월 1일호부터 루마니아어 잡지는 이름이 「수확」으로 바뀌었다가 그 후에는 「성서의 빛」으로 바뀐 다음 마지막으로는 「새벽」이 되었습니다. 헝가리어 잡지는 「그리스도인 순례자」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복음」,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잡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때 즈음에 야코브 B. 시마가 불충실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928년에는 그가 한 일 때문에 지부의 모든 재산과 장비를 잃게 되었습니다! 「1930 연감」에 따르면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의 확신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가슴 아픈 일로 인해 1929년에 독일 지부에서 루마니아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고, 후에 스위스 베른에 있는 중앙 유럽 사무실에서 감독을 맡게 되었습니다. 독일 지부와 중앙 유럽 사무실에서는 형제들이 후에 부쿠레슈티에 개설한 사무실을 통해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제발 책을 태우지 마세요!’

이처럼 시련이 가중되었지만 충실한 형제들은 활동을 재조직하여 증거를 계속하였으며,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기까지 하였습니다. 1933년 8월 24일에 루마니아 사무실에서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굶주려 있습니다. 야외에서 봉사하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증거 활동에 참여할 때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집집마다 따라다니면서 진리를 좀 더 들으려고 합니다.”

한 예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한 여자는 전하고 있던 서적을 요청하였고, 왕국 활동에 사용하도록 소액의 헌금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제는 이 사실을 알고 곧장 그 여자의 집으로 왔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다그쳤습니다. “그 책을 불에 태워 버리게 이리 주시오.”

그러자 그 여자는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신부님, 제발 책을 태우지 마세요. 이 책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었고 불행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 여자는 책을 내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출판물의 가치를 깊이 인식한 여자들 중에는 공작 부인도 있었는데, 그의 하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여자가 하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내 하인이 아니라 내 형제예요!” 다른 마을에서는 한 형제가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왕국을 전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린이들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출판물을 받으라고 권하면서 “그 책은 하느님에 관해 알려 줘요”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형제는 이처럼 열정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주는 후원자들 때문에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얼마 안 있어 가지고 있던 출판물을 모두 전하였습니다!

활동을 돕기 위해 니쿠 팔리우스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파이오니아가 그리스에서 루마니아로 왔습니다. 니쿠는 부쿠레슈티에서 봉사하다가 도나우 강의 주요 항구 도시인 갈라치로 이사하였습니다. 1933년 말에 니쿠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나는 거의 두 달 보름 동안 루마니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는데, 비록 루마니아어를 하지 못했지만 여호와 하느님께서는 많은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그리스 사람들과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전파하였고 주의 도움으로 20개 도시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직자들의 증오에 찬 선동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정직한 많은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듣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한 도시의 시장도 있었는데, 그는 여러 부의 팜플렛을 열심히 읽고 나서 자신은 신세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시에서는 한 남자가 여러 부의 출판물을 달라고 하면서 읽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활동을 재조직하다

시마가 불충실하게 되고 나서 2년이 지난 1930년에 마르틴 마기아로시가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트란실바니아 주 비스트리차 출신의 헝가리계 루마니아 사람이었습니다. 마기아로시 형제는 독일 지부에서 6주 동안 훈련을 받고 나서 부쿠레슈티에 사무실을 개설하였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임시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인쇄했던 루마니아어 「파수대」를 다시 루마니아에서 인쇄하였는데, 이번에는 부쿠레슈티에 있던 골든북이라는 출판사를 통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형제들은 1933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성서 책자 협회라는 새로운 법인체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주소는 부쿠레슈티 크리샤나 가(街) 33번지였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정치적 반대 때문에 형제들은 단지 영리 단체로 등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다시 확신을 갖게 해 주었으며, 전파 활동을 계속 진척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전도인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기까지 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였습니다. 특히 겨울에는 시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공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외국에서 방송되는 성서에 근거한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강연은 이웃 사람들이나 사제들이 두려워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파수대」에는 방송 시간표, 강연 제목, 라디오 주파수에 대한 광고가 실렸습니다.

좋은 소식을 더 널리 전파하는 데 기여한 또 다른 마련은 여호와의 조직이 제작한 휴대용 축음기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회중이나 개인이 이 축음기와 녹음된 성서 강연을 신청할 수 있었습니다. 「회보」(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에 실린 광고에 따르면, 그러한 녹음된 성서 강연은 “형제들뿐 아니라 축음기를 가지고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격려가 되었습니다.

내부로부터 시험이 오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인 각자가 진리를 증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이해의 빛이 더 밝아졌습니다. 1931년에는 성경 연구생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함으로 찬란한 빛이 번쩍이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근거한 이 이름은 단순한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여호와의 신격을 지지하고 선포한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43:10-12) 전파 활동을 반대하던 성경 연구생들은 이러한 사태 진전에 걸려 넘어졌고 조직을 떠났습니다. 배교자가 되어 천년기파라는 이름을 사용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믿음은 이러한 시험을 이겨 낼 것이었습니까? 그들은 교직자들과 배교자들로부터 오는 반대에 직면해서도 계속해서 전파하는 사명을 수행할 것이었습니까?

압력에 굴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를 충실하게 열심히 계속 수행하였습니다. 1931년 보고를 일부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루마니아에는 약 2000명의 형제 자매들이 있으며, 이들은 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금년에 5549권의 서적과 3만 9811부의 소책자를 배부하였습니다.” 이듬해에 형제들은 더욱더 열심히 활동하여 총 5만 5632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때때로 박해는 원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지역에서는 증인들이 모두 집단적으로 자신들이 “큰 바빌론”과 분리되어 있음을 공개적으로 알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계시 18:2, 4) 5일 동안 계속 이 용감한 형제 자매들은 공회당으로 가서 이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탈퇴한다는 서류를 작성하였습니다.

그 지역의 지도자들은 충격을 받았고 그 지방 사제는 경악하였습니다. 그 사제는 먼저 경찰서로 달려가 도움을 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회당으로 달려가서 공증인이 탈퇴서 작성을 도와준 것으로 보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화가 난 공증인은 만약 지역 주민들이 모두 온다고 해도 그들의 탈퇴 증명서 작성을 도와줄 것이라고 응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었고, 형제들은 서류 작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내게 총을 쏠 겁니까?”

교직자들은 설교를 하면서 여호와의 증인을 맹렬히 비난하였습니다. 또한 정부에 계속 압력을 가하여 증인들의 활동을 금지시키려 하였습니다. 물론 교직자들의 정치적 도구인 종무부는 계속해서 경찰을 통해서 형제들을 괴롭혔습니다. 한번은 경찰서장과 경찰관이 그리스도인 집회가 열리고 있는 집에 불법적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서장은 집주인에게 “예배 허가증을 보여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집주인 형제를 제오르제라고 부르겠습니다.

제오르제는 서장에게 영장이 없을 것임을 알아채고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권위로 내 집에 들어온 것입니까?”

서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제오르제는 서장에게 나가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문을 향해 갔습니다. 하지만 서장은 가면서 경찰관에게 현관에서 지키고 서 있다가 제오르제가 집 밖으로 나가려 하면 체포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얼마 후 제오르제가 집 밖으로 나오자 그 경찰관은 “법의 권위로” 제오르제를 체포하였습니다.

“무슨 법 말입니까?” 하고 제오르제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당신을 체포할 영장을 가지고 있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전직 경찰관인 제오르제는 법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장을 보여 달라고 말했습니다. 제오르제의 예상대로 그 경찰관은 영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은 제오르제를 법적으로 체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총을 장전하여 제오르제에게 겁을 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게 총을 쏠 겁니까?” 하고 제오르제가 물었습니다.

경찰관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난 그렇게 어리석지 않소.”

제오르제는 “그럼 총은 왜 장전하였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경찰관은 자신이 어리석게 행동했음을 깨닫고 자리를 떠났습니다. 제오르제는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사유지 침입죄로 경찰서장을 고소하였습니다. 놀랍게도 서장은 벌금형과 15일의 구류를 선고받았습니다.

또 다른 예로, 한 연로한 형제는 법정에서 훌륭하게 증거하였습니다. 판사는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서적 두 권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는 형제 앞에서 책을 흔들어 보이며 그 형제가 종교적 선전물을 배포하였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에 형을 선고하신다면, 저는 그것을 벌이 아니라 영광의 표로 생각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추종자들에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 자신도 박해를 받고 심지어 기둥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그것은 그분이 잘못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진리를 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왕국에 대한 예수의 소식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이 법정이 만일 제게 형을 선고한다면,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사람에게 형을 선고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판사는 고발을 기각하였습니다.

‘어느 곳에도 이보다 심한 고초를 인내한 형제들은 없다’

1929년에는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고 실업난이 심각해지고 정치적으로 불안해지자, 파시스트를 포함한 극단적인 정치 단체들의 세력이 급속하게 커졌습니다. 더욱이, 1930년대에 루마니아는 점차 나치 독일의 영향권 내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 진전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좋지 않은 조짐이었습니다. 사실 「1936 연감」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루마니아에서보다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 활동하는 형제들은 어느 곳에도 없다.”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530건의 소송에 제소되었습니다. 물론 검사들은 끊임없이 활동을 금지하고 부쿠레슈티의 사무실을 폐쇄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마침내 1935년 6월 19일 오후 8시에 경찰들이 영장을 가지고 부쿠레슈티의 사무실로 왔는데, 사실 그 영장은 불법적인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파일들과 1만 2000부가 넘는 소책자를 압수하였고 경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형제가 뒷문으로 빠져나가 호의적인 변호사에게 연락하였는데, 그 변호사는 정치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 변호사는 각각의 관계 당국에 전화를 걸어 그 불법적 폐쇄 조처를 취소시키고 파일을 모두 돌려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숨을 돌릴 수 있었던 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1937년 4월 21일에 종무부는 하나의 명령을 내렸는데, 그 명령은 관보와 신문들에 실렸습니다. 그 명령에는 루마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증인들의 출판물을 배부하거나 읽는 사람은 체포하여 처벌할 것이며 출판물은 압수할 것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명령에 대해 이의 신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관계 부처의 장관은 자신이 취한 조처에 근거가 빈약함을 알고는 세 차례나 청문회를 연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최종 일자가 오기 전에 국왕 카롤 2세가 루마니아에 독재 정치를 선언하였습니다. 1938년 6월에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제한을 가하는 새로운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형제들은 다시금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왕에게 정식 문서를 보내어 증인들의 출판물은 교육적이며, 반체제적이지 않고, 공공질서의 혼란을 조장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 문서에는 전에 이러한 취지로 판결한 상급 법원의 판결문을 언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왕은 그 문서를 종무부로 보내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938년 8월 2일에 종무부는 부쿠레슈티 사무실을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는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복역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가족 전체가 체포된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자기 집에서 개인적으로 왕국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형기는 3개월에서 2년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형제들은 처음에 어떻게 발각이 되었습니까? 교직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은 형제들을 몰래 감시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일꾼이나 외판원 등으로 변장하였습니다.

또한 누구든 출판물을 소지한 사람은 체포되었습니다. 숲에서 벌목 일을 하던 한 형제는 성서와 「연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경찰이 모든 사람들의 개인 소지품을 수색하였고 그 형제의 출판물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형제를 체포하여 자기들을 따라 법원까지 200킬로미터를 걸어가게 하였으며, 그곳에서 형제는 6개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덧붙이자면 교도소들은 죄수들로 포화 상태였고, 불결하였으며, 이가 득실거렸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멀건 수프뿐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련이 더욱 심해지다

1939년 9월 1일 새벽에 독일군이 폴란드로 쳐들어가 또 한 번의 세계적인 충돌의 불씨를 당겼는데, 이번 전쟁은 루마니아에 심각하면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소련과 독일은 지배권을 갖기 위해서 불가침 조약을 맺고 동유럽을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누어 케이크를 나누듯 루마니아를 분할해 버렸습니다. 헝가리가 트란실바니아 북부, 소련이 베사라비아와 북(北)부코비나, 불가리아가 도브루자 남부를 차지하였습니다. 그 결과 루마니아는 인구와 국토의 약 3분의 1을 잃었습니다. 1940년에는 파시스트 독재 정부가 정권을 잡았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헌법의 시행을 중지시키고 정교회, 가톨릭교회, 루터교 등 9개의 주요 종교만 인정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 내려진 금지령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테러 행위가 예사로 일어났고, 1940년 10월에는 독일군이 루마니아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루마니아와 스위스의 중앙 유럽 사무실 사이의 연락은 사실상 중단되었습니다.

루마니아의 여호와의 증인 대부분이 트란실바니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틴 마기아로시는 부쿠레슈티를 떠나 그곳으로 이사하여 티르구무레슈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아내 마리아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일찍 그곳으로 이사를 가 있었습니다. 부쿠레슈티 사무실에서 봉사했던 팜필 알부와 엘레나 알부 역시 더 북쪽에 있는 바이아마레로 이사하였습니다. 마기아로시 형제와 알부 형제는 이 두 도시에서 일하면서 전파 활동을 재조직하고, 지하에서 「파수대」를 생산하는 일을 조직하였습니다. 동료 일꾼인 테오도르 모러라슈는 부쿠레슈티에 머무르면서 여전히 루마니아로 남아 있는 지역에서 활동을 조정하다가 1941년에 체포되었습니다.

그동안에 형제들은 바쁘게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매우 조심스럽게 성서 출판물을 전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들은 누군가가 보기를 바라면서 소책자를 식당이나 기차 객실과 같은 공공장소에 놓아두었습니다. 또한 영적으로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이라는 성경의 명령에 계속 청종하였는데, 물론 의혹을 사지 않게 조심하였습니다. (히브리 10:24, 25) 한 예로 시골 지역에 살던 형제들은 수확기에 벌이던 전통 파티를 활용하였는데, 농부들은 서로를 도와 농작물을 거두어들이고 나면 파티를 벌이고 농담을 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들은 이런 파티를 그리스도인 집회로 바꾸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모든 면으로 압박을 받다’

마기아로시 형제는 1942년 9월에 체포되었지만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계속 전파 활동을 조정하였습니다. 알부 형제 부부 역시 약 1000명의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그들 중 다수는 매질을 당하고 6주 정도 구금된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몇 명의 자매들을 포함하여 100명의 증인들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2년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제 다섯 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후에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무장 경찰들은 깜깜한 밤에 어머니들과 어린 자녀들까지 끌고 갔으며, 그리하여 가축들을 돌볼 수도 없고 집은 비어서 도둑들이 약탈해 가게 되었습니다.

수용소에서 형제들은 경비병들로 구성된 “환영” 위원회를 만났는데, 경비병들이 각 사람의 두 발을 함께 묶고 그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잡고 있으면 다른 경비병이 철사를 박은 고무 몽둥이로 맨발을 마구 때렸습니다. 뼈가 부러지고 발톱이 빠졌으며 멍이 들고 때때로 피부가 나무껍질처럼 벗겨지기도 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은 수용소를 돌아보면서 이처럼 학대하는 것을 보고는 “우리 손에서 너희를 풀어 줄 너희 여호와는 어디에 있나?” 하고 말하며 빈정거렸습니다.

형제들은 “모든 면으로 압박을 받”았지만 “궁지에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둘째 4:8, 9) 사실 형제들은 왕국 희망으로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하였고, 그 희망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트란실바니아 북동부의 마을인 토플리차 출신인 테오도르 미론의 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테오도르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것을 금하신다고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군 입대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1943년 5월에 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마르틴 마기아로시와 팜필 알부와 다른 증인 수감자들을 만났고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테오도르는 영적으로 급속히 발전하였고, 불과 몇 주 만에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하지만 침례는 어떻게 받았습니까?

테오도르와 약 50명의 루마니아 증인들이 세르비아의 보르에 있는 나치 수용소까지 먼 길로 돌아서 가게 되었을 때 기회가 생겼습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헝가리의 야스베레니에 멈추었는데, 그곳에서 헝가리어를 하는 100명이 넘는 형제들이 그들과 합류하였습니다. 잠깐 머무르는 동안 경비병들은 형제들 몇 명을 시켜 강에 가서 물통에 물을 채우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경비병들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감독하는 사람 없이 강으로 갔습니다. 테오도르도 그들과 함께 갔고 그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수감자들은 야스베레니에서 기차와 배를 타고 보르로 갔습니다.

당시에 보르 수용소에는 6000명의 유대인, 14명의 재림교 교인, 152명의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미론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끔찍한 상황이었지만 여호와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종종 헝가리로 파견되었던 호의적인 경비대원 한 사람이 수용소 내로 출판물들을 반입해 주었습니다. 그가 알고 신뢰하던 증인 몇 명이 그가 집을 떠나 있을 때 그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그는 그 증인들에게 형제나 다름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중위였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우리에게 알려 주곤 하였습니다. 수용소 내에는 지금의 장로에 해당하는 형제들이 15명 있었는데, 그들은 매주 세 번의 집회를 마련하였습니다. 평균 80명 정도가 교대 시간과 겹치지 않을 때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기념식도 지켰습니다.”

일부 수용소의 경우에는 바깥에 있는 증인들이 음식과 물품들을 수감된 형제들에게 가져다줄 수 있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몰도바와 베사라비아와 트란실바니아에 있던 약 40명의 증인들은 트란실바니아의 쉬보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매일 그 지역에 있는 제재소로 가서 일을 했습니다. 수용소 내에서는 음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인근에 사는 증인들이 매주 음식과 옷가지들을 제재소로 가지고 왔습니다. 형제들은 받은 것들을 필요에 따라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와 같은 훌륭한 행실은 동료 수감자와 경비병 모두에게 매우 큰 증거가 되었습니다. 또한 경비병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책임감이 강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수감자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자유를 증인들에게 주었습니다. 쉬보트 수용소의 경비병 한 사람은 진리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전후의 축복

1945년 5월에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교도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당시 62세였던 마르틴 마기아로시가 부쿠레슈티로 돌아와 보니, 예전의 사무실은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타자기조차 한 대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이 주의 일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활동을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법적 등록을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그들의 노력은 오래지 않아 결실을 맺었습니다. 1945년 7월 11일에 루마니아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등록이 된 것입니다.

이처럼 협회가 등록되자 공개 집회와 대회 조직 및 출판물 생산이 용이하게 되었고, 그러한 모든 일로 인해 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그동안 있었던 혼란과 혼선을 많이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실 전쟁이 끝난 첫해에 루마니아에서 종이가 부족했는데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거의 87만 부에 달하는 소책자와 8만 5500부가 넘는 「파수대」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리고 1630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우리의 활동이 법적으로 등록되기 전에도 공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집회와 특별 공개 강연도 마련하였습니다. 마라무레슈 주의 증인들에 관해, 한 목격 증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군대의 후퇴가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에도 형제들은 함께 모였습니다. 그들이 이 지역에 있는 모든 마을에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감격적이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약 80킬로미터를 걸어오면서 노래를 부르고 증거를 하였습니다. 일요일마다 사회자는 다음 일요일에 집회를 열 장소를 광고하곤 하였습니다.”

증인들이 별로 없거나 한 명도 없는 도시와 마을에서 공개 강연을 하기로 광고하고, 실제로 강연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자정 무렵에 출발하여, 무려 100킬로미터를 걸어서 그러한 곳에 도착하였는데, 신발 값이 너무 비싸서 대개 맨발로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신발이 있었지만 어깨에 걸치고 다녔습니다. 아주 추울 때처럼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을 때만 신발을 신었습니다. 집회 전날에 형제들은 사람들에게 출판물을 전하고, 강연 제목을 광고하고, 집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강연이 끝나면 형제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이아마레, 클루지나포카, 티르구무레슈, 오크나무레슈에서 형제들은 여러 차례 대회를 열었고, 수백 명의 증인들과 관심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1945년 6월에 바이아마레에서 열린 모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은 도시 밖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행해진 침례였습니다. 한 형제의 정원에서 연설이 있은 후에, 118명의 침례 지원자는 정원 옆으로 흐르는 러푸슐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침례였습니다.

티르구무레슈에서는 형제들이 좌석이 3000개나 있는 극장을 빌렸습니다. 대회 전날 대회 참석자들은 기차나 마차나 자전거를 타고서 또는 걸어서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참석자들은 곧바로 전파하기 시작하여 노아의 방주에 관한 공개 강연에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강연 광고가 멋지게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보고 많은 형제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자유롭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형제들의 열심 있는 활동은 보람찬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참석자가 너무 많아서 극장에 들어오지 못한 청중들을 위해 두 개의 스피커를 극장 밖에 설치해야 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이웃들이 창가에서 그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시의 관리들과 유력한 인사들도 초대를 받아서 직접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을 위해 마련해 둔 자리가 모두 찼습니다. 그들은 함께 노래를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최초의 전국 대회

1946년 9월 28일과 29일 주말에 여호와의 증인은 루마니아에서 최초의 전국 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 장소는 부쿠레슈티에 있는 루마니 운동장이었습니다. 루마니아 철도청에서는 특별 기차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요금을 50퍼센트 할인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서 가장 먼 몇몇 지역에서 1000명이 족히 넘는 대회 참석자들이 기차를 타고 부쿠레슈티로 왔습니다. 많은 대회 참석자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으므로 오는 내내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끌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순조롭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직자들은 대회에 관한 소식을 듣고 기차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대회 전날인 금요일, 부쿠레슈티 증인들은 오전 9시에 역에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한 시간 내로 형제들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후 6시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마침내 기차가 역내로 들어왔습니다. 먼 길을 온 형제들과 기다리고 있던 형제들이 서로 부둥켜안았을 때의 감동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무장 경찰이 나와 있었지만 아무 할 일도 없었습니다.

부쿠레슈티는 전쟁 중에 가옥 약 1만 2000채를 포함하여 많은 것들이 파괴되어서 숙박할 곳이 부족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기지를 발휘하였습니다. “침대”를 더 마련하기 위해 형제들은 엄청난 양의 짚을 사들여 시외의 베르체니라는 지역에 사는 한 형제의 잔디밭에 펼쳐 두었습니다. 9월 말인데도 예년과는 다르게 날씨가 따뜻했기 때문에 대회에 참석한 가족들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며 짚으로 만든 매트리스에서 자녀들과 함께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바로 그 자리에 아름다운 새 왕국회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토요일 오전에 대회 참석자 3400명은 「파수대」가 다시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로 월 2회 발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사실, 그날 아침에는 처음 발행된 잡지 1000부가 형제들에게 배부되었습니다. 한동안 「파수대」에는 연구 기사를 4개씩 실어서 모두가 전쟁 중에 놓친 내용들을 받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일요일 오전은 증거 활동을 위해 떼어 놓았습니다. 전도인들이 무리를 지어 공개 강연을 광고하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들고 다닌 플래카드에는 망치와 칼과 모루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칼이 보습으로 바뀌었다’—이 말씀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 두 명의 예언자가 그 말씀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누가 이 일을 실천할 것인가?” 전도인들은 초대장을 나누어 주고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잡지를 어깨 끈이 달린 하얀 천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녔는데, 그 가방에는 “여호와의 증인”, “하느님의 왕국 선포자”, 또는 “신권 통치의 선포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에 마르틴 마기아로시 형제는 공개 강연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파리에서는 강대국들 간의 평화 회의가 열리고 있습니다. 여기 우리의 대회에는 1만 500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석한 여호와의 증인을 한 사람씩 모두 살펴본다 해도 칼이나 총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이미 칼을 보습으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나 전쟁의 상처를 볼 수 있었으므로 그 연설은 참으로 강력하면서도 시기적절하였습니다.

일요일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법무부 장관, 내무부 장관의 비서, 여러 명의 경찰관, 한 무리의 정교회 사제들도 있었습니다. 형제들과 관리들 모두는 사제들이 소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위협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방해하려고 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공개 강연 중에 그 사제가 연단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을 가로막고 팔을 꽉 붙잡아서 자리로 다시 데리고 갔습니다. 형제들은 그 사제의 귀에다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대회에서는 정교회 사제가 연설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리에 앉아서 들으신다면 크게 환영을 받을 것입니다.” 그 사제는 다시 방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후에 법무부 장관은 연설을 흥미 있게 들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질서를 잘 지키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후에 한 형제는 대회를 회고하면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적들의 음모는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형제들은 기쁨에 넘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다시 평화와 연합의 영을 나타냈습니다. 전쟁 중에 있었던 분열로 인해 많은 형제들이 대회에 착잡한 심정으로 왔기 때문에 그러한 영은 매우 격려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교직자들에게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 않았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당국자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관련된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설교 중에 형제들에 대한 비난을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일부 사제들은 심지어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왕국 전도인들이 전파하는 것을 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구타하게 하였습니다. 한번은 정교회 사제의 아내가 지팡이로 파이오니아 자매에게 폭행을 가했는데, 그는 지팡이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의 보고서에는 “우리는 그러한 교직자들에게 소송을 많이 제기하였습니다”라고 알려 줍니다.

연합을 회복시키기 위한 가외의 노력

스위스 지부에서 온 알프레트 뤼티만은 1947년에 2개월 동안 루마니아에서 보냈습니다. 원래 계획은 대회를 개최하고 뤼티만 형제가 세계 본부의 헤이든 C. 커빙턴과 함께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형제들에게 대회를 개최하도록 허가해 주지 않았고, 커빙턴 형제에게는 비자를 발급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알프레트 뤼티만에게는 2개월 비자를 발급해 주어서, 뤼티만 형제는 8월과 9월을 루마니아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프레트 뤼티만이 처음 방문한 곳은 부쿠레슈티였는데, 그곳 공항에서 뤼티만 형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전통적인 환영 방식에 따라 아름다운 꽃다발을 들고서 기다리고 있던 형제 자매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형제들은 뤼티만 형제를 알리온 가 38번지에 있는 부쿠레슈티 사무실로 안내했는데, 그곳은 한 관심자의 집이었습니다. 사무실을 1947년 1월에 그곳으로 옮겼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이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공식 주소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바사라비아 가 38번지로 두었습니다. 1945년 7월에 얻은 그 사무실에는 낡은 탁자와 소파, 고장 난 타자기, 색이 바랜 소책자와 잡지들로 채워진 가구가 있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압수당해도 손해가 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 사무실에서는 자매 한 명이 가끔씩 일을 하였습니다.

뤼티만 형제는 법인체 회장으로 일하던 팜필 알부와 루마니아의 활동을 감독하던 마르틴 마기아로시를 만났습니다. 이 두 형제는 또한 지역 감독자로도 봉사하였습니다. 수년간 외부와의 연락이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형제들은 회중의 신권 전도 학교와 선교인을 훈련하기 위한 길르앗 학교의 개교와 같은 최근에 여호와의 조직에 있었던 발전에 관해 듣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물론 모든 형제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신권 전도 학교 마련이 시행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사실 형제들은 즉시 학교 교과서인 「왕국 전도인들을 위한 신권적 도움」에 들어 있는 90개 과를 몇 권으로 나누어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로 인쇄하였습니다.

하지만 뤼티만 형제의 주된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회중과 집단을 방문하여 대회에서 들었을 주요 연설들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뤼티만 형제는 통역자로 봉사한 마기아로시 형제와 함께 트란실바니아를 시작으로 진리가 많이 전파된 지역들로 2단계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트란실바니아와 그 밖의 지역

대부분의 지역에서처럼 트란실바니아에서도 전도인들은 특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방문한 두 형제의 빡빡한 일정 때문에 기꺼이 밤늦게까지 모임을 가졌습니다. 한 예로, 바마부저울루이 마을에서는 프로그램이 밤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 진행되었는데, 75명의 참석자들은 불평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후에 알프레트 뤼티만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형제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간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문객들을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든 3시에 일어나든 개의치 않으며, 몇 분이 걸리든,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이 걸리든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걸어서 다니며, 때로는 먼 길을 맨발로 다니지만 우리보다 시간 여유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이며 스트레스도 덜 받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밤늦게 집회를 마련하는 것이 무리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마기아로시 형제는 그렇지 않다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다음에 들른 곳은 티르구무레슈 시였는데, 당시 그곳의 인구는 3만 1000명이었습니다. 그곳 역시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다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티르구무레슈에서 가까운 숲의 공터에 마련한 집회 장소에는 25개 회중에서 700명의 형제들이 왔는데, 어떤 형제들은 오는 데만 거의 50킬로미터를 여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이 두 형제는 클루지나포카에도 갔는데, 그곳에서는 48개 회중에서 300명이 모였습니다. 그 도시에 있을 때 마기아로시 형제는 1928년에 야코브 시마 때문에 잃게 된 인쇄실을 뤼티만 형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야코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뤼티만 형제의 보고는 이러합니다. “그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작년에 사망했습니다.”

그 이후로 사투마레,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가까운 시게트마르마치에이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지역에는 루마니아어 회중과 헝가리어 회중과 우크라이나어 회중을 모두 합해 40개가 넘는 회중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농부들과 마을 주민들은 바깥세상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먹을 모든 식용 작물과 아마와 삼을 재배하였으며, 양을 비롯하여 자기들의 가축을 길렀습니다. 또한 옷과 담요를 만들었고 가죽 제품도 스스로 가공하였습니다. 마을의 구두장이는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특별 모임에 참석한 많은 형제 자매들은 손수 아마와 삼으로 만든 옷에 수를 놓은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행은 둘째 단계로 접어들어, 뤼티만 형제와 마기아로시 형제는 루마니아의 북동쪽에 있는 몰다비아 지역으로 갔습니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은 프러터우치 자치구였는데, 그곳에 있던 형제들은 가진 것이 많지는 않았지만 후대를 매우 잘했습니다. 그들은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방문객들에게 신선한 우유, 빵, 폴렌타 죽, 삶은 달걀을 까서 녹인 버터에 살짝 담근 것을 대접하였습니다. 다들 음식을 조그만 대접에 담아 먹었습니다. 뤼티만 형제는 “이 음식이 매우 맛있었다”고 썼습니다. 그날 밤에 방문한 형제들은 따뜻하게 잘 수 있게 주방의 오븐 곁에 놓은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집주인들은 근처에서 짚 더미를 깔고 잤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증인들은 봉사의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였으며,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여호와의 풍성한 축복을 누렸습니다. 1945년 봄에 그 지역에는 33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1947년에는 350명이 있었는데, 이것은 2년 사이에 10배로 증가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서 120킬로미터를 더 가서 벌커우치와 이번커우치에 도착하였습니다. 참으로 시골을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루마니아 말은 작지만 우수해서 어느 길이든 아무리 험해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갈 수 있습니다.” 1945년에 형성된 벌커우치 회중은 전에 복음 교회에 속해 있던 전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회중의 종은 그 교회의 평신도 전도사였습니다. 이번커우치에서는 비 때문에 한 형제의 집 안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170명의 참석자들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불편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곳에 오기 위해 맨발로 30킬로미터를 걸어온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형제는 전부 합하면 열아홉 곳에서 259개 회중의 총 4504명의 전도인과 관심자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또한 알프레트 뤼티만 형제는 스위스로 돌아가는 중에 오러슈티에와 아라드에서 연설을 하였는데, 많은 형제들은 모임 장소까지 60 내지 80킬로미터를 걸어서 왔습니다. 사실 60세 된 한 농부는 맨발로 100킬로미터를 걸어올 정도로 훌륭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마니아의 활동 역사에서 주요 이정표가 된 이 특별 모임들은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에게 격려가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수확할 것이 익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압제적인 통치자와 전쟁의 고통에 신물이 났고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1947년 8월에는 루마니아 화폐인 레우가 급격히 평가 절하되어 하룻밤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왕국 소식을 반대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기꺼이 들으려고 하였습니다.

특별 모임은 또 다른 이유로도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이전보다 더욱 심한 새로운 박해의 폭풍이 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적 사상에 의해 생겨난 이 폭풍은 무자비하고 편협한 지도자들에 의해 거의 40년 동안이나 몰아쳤습니다!

철의 장막이 루마니아에 드리워지다

알프레트 뤼티만이 방문하기 1년 전인 1946년 11월에 공산주의자들이 루마니아에서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 후로 몇 해에 걸쳐서 공산당은 남아 있는 반대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고 공산화에 속도를 높였으며, 그에 따라 루마니아의 문화 및 정치 제도는 공산주의 식으로 맞추어지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폭풍 전의 고요한 시기를 최대한 활용하여 수십만 부의 잡지와 소책자와 다른 출판물을 인쇄하여 전국의 20개 창고에 나누어 보관하였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활동을 증가시켰고, 일부는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미하이 니스토르와 바실레 사바드슈가 있었습니다.

미하이는 트란실바니아의 북서부와 중앙을 임지로 받아 그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금지령을 내린 후에도 계속 파이오니아를 하면서 오랫동안 적들의 추적을 받았습니다. 미하이는 어떻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리창을 파는 사람이 사용하는 가방과 똑같이 생긴 가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작업복을 입고 유리창과 공구를 들고서 전파하도록 배정된 마을이나 도시의 중심지를 돌아다녔습니다. 경찰이나 의심스러워 보이는 사람이 보이면 큰 소리로 유리창 광고를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반대자들을 피하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한 활동은 흥미진진하였지만, 우리 파이오니아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집으로 맞아들인 가족들에게도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연구생들이 발전하여 전도인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바실레 사바드슈 또한 자주 옮겨 다녀야 하였는데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새로 들어선 공산주의 정권의 광범위한 보안 체계의 핵심이 된 보안대로 인해 흩어지게 된 형제들을 찾아서 지원하는 데 바실레는 특히 기여를 하였습니다. 바실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체포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조심하면서도 기발한 방법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일례로, 국내의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때는 항상 타당한 이유 하나를 마련해 두려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목욕 치료 의뢰서와 같은 것 말입니다.

의심받지 않게 행동함으로 형제들과 연락할 통로를 마련할 수 있었고 형제들은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나의 좌우명은 이사야 6:8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와 마태 6:33의 ‘왕국을 계속 첫째로 구하십시오’였습니다. 이 성구들은 나에게 기쁨과 인내할 힘을 주었습니다.” 바실레는 그러한 특성들이 필요하였는데,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결국에는 많은 사람들처럼 체포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조직에 대한 맹렬한 공격

1948년경에는 세계 본부와 연락하기가 매우 힘들어져서 형제들은 종종 엽서에 소식을 암호처럼 적어 보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49년 5월에 마르틴 마기아로시는 부쿠레슈티 사무실에서 일하던 동료 페트레 란카가 쓴 이러한 소식을 보냈습니다. “가족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몹시 세게 불고 추위도 심해서 우리는 밭에서 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후에 다른 형제는 “가족은 전혀 사탕을 받을 만한 입장이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많은 가족이 아픕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말은 루마니아로 영적 양식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많은 형제들이 교도소에 갇혀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1949년 8월 8일에 법무부에서 내린 결정에 따라, 부쿠레슈티 사무실과 숙소는 폐쇄되고 개인 소지품을 포함하여 모든 비품이 압수되었습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수백 명의 형제들이 체포되어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파시스트 정권 아래 여호와의 증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자 형제들은 “제국주의자”나 “미국의 앞잡이”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비밀 요원과 정보원들이 사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1953 연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가한 조처들이 “이제는 너무도 혹독해져서 루마니아 내에서 서방 국가로부터 오는 편지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요주의 인물이 되어 심한 감시를 받는다”라고 알려 줍니다. 보고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곳에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공포가 존재한다. 심지어는 한 가족끼리도 서로를 신뢰할 수가 없다. 자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1950년 초에 팜필 알부와 엘레나 알부 부부, 페트레 란카, 마르틴 마기아로시 등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어 서방 국가의 스파이라는 거짓 고발을 당했습니다. 자세한 내밀 사항들을 밝히고 “스파이 활동”을 자백하도록 고문을 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백한 것은 단지 여호와를 숭배하였고 그분의 왕국 권익을 위해 봉사하였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련을 겪은 후에 교도소로 간 형제들도 있고, 강제 노동 수용소로 간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해의 물결은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1950년 바로 그해에 루마니아에서는 전도인 수가 8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보여 주는 참으로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마기아로시 형제는 트란실바니아의 게를라 교도소로 보내져 1951년 말에 그곳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보고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혹독한 고난을 많이 겪었으며, 특히 1950년 1월에 체포된 후로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이제 그러한 고난은 끝이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약 20년 동안 마기아로시 형제는 교직자들과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잔악한 공격을 인내하였습니다. 그가 보인 충절의 모범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나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으며,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디모데 둘째 4:7) 마르틴의 아내 마리아는 투옥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역경을 인내하는 면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였습니다. 한 형제는 마리아를 “지적이며 주의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자매”라고 묘사하였습니다. 마르틴이 체포되자 친족들이 마리아를 돌보았는데, 그 친족들 중에는 그 자신도 교도소에서 있다가 1955년 가을에 석방된 양녀 머리오아라도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1955년에 정부에서 사면을 내려서 대부분의 형제들이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의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체포를 당하였으며 일부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투옥된 형제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고 굳건히 서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사실 형제들은 그들의 원칙과 충절로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 정치범은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훌륭한 사람들이며 자신의 종교를 포기하거나 부인하려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투옥되어 있던 곳에서 증인들은 “가장 인기 있는 재소자들”이었다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1964년에 다시 사면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는데, 1968년부터 1974년 사이에 더욱더 대대적인 체포가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널리 알렸기 때문에 고문과 조롱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기도할 때 우리 투옥된 형제들을 기억해 주실 것을 간절히 부탁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들이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시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 24:14에 예언된 바와 같이 계속 담대하게 좋은 소식을 전파해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우리는 마음을 다해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이제 살펴보겠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충성스러운 자들의 간절하고도 눈물로 호소하는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사탄이 불신의 씨를 뿌리다

마귀는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하느님의 백성을 공격하였습니다. 한 예로, 1955년에 석방된 형제들 가운데는 체포되기 전에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다시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지 않은 형제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분을 터뜨리며 불화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굳건함을 유지한 후에, 풀려나고 나서 그만 자존심에 굴복하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적어도 한 명의 탁월한 형제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보안대에 협조하기까지 하였으며, 그리하여 충실한 사람들과 전파 활동에 큰 해를 끼쳤습니다.—마태 24:10.

또한 하느님의 백성은 양심 문제와 관련된 견해 차이도 해결해야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들은 체포된 후에 흔히 교도소로 가거나 소금 광산에서 일하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소금 광산에서 일하기로 한 사람들이 성서 원칙을 타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자매들이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고,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거나, 심지어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에서 보면, 대다수의 형제들은 큰 쟁점 즉 하느님께 충성을 유지할 필요성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1958 봉사 연도 보고를 보면 야외 봉사에 참여한 사람의 수가 5288명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수는 전년도보다 1000명 이상 증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8549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고 39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또 다른 시험은 1962년에 「파수대」에서 로마 13:1에 언급된 “위에 있는 권위”가 인간 정부의 권위이며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설명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난폭한 통치자들로부터 심한 고난을 겪은 루마니아의 많은 형제들은 새로운 이해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사실 어떤 형제들은 그것이 마태 22:21에 나와 있는 원칙과 반대되게 국가에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간교한 속임수라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한 형제는 베를린과 로마와 그 밖의 도시들을 방문한 동료 증인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곳에 다녀온 형제는 새로운 이해가 공산주의자들의 속임수가 아니라 종 반열로부터 나온 영적 양식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역 감독자에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지역 감독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활동을 계속해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조언이었으며, 나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을 해 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의사소통에 큰 장애가 있기는 했지만 세계 본부와 루마니아의 활동을 감독하던 지부에서는 형제들이 밝혀진 진리에 보조를 맞추고 연합된 영적 가족으로서 함께 활동하도록 돕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한 목적으로 본부와 지부에서는 편지를 쓰고 「천국 전도」(오늘날은 「우리의 왕국 봉사」)에 실을 적절한 기사를 마련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어떻게 이러한 영적 양식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전국 위원회의 위원 모두는 여행하는 감독자나 회중 장로들과의 비밀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연락망은 신뢰할 만한 연락원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그들은 편지들과 보고들을 스위스에 있는 사무실에서 받아 오기도 하고 그곳으로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은 최소한 얼마의 영적 양식과 신권 지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충성스러운 형제 자매들은 각자의 회중이나 집단에서 화합의 영을 조성하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오시프 주칸도 그러한 사람이었는데, 이오시프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을 섭취하고 ‘어머니’와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지 않으면 아마겟돈에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지상 조직과 계속 접촉하는 것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형제들은 하느님의 백성에게 귀중한 자산이었고, 그들의 연합을 깨뜨리려는 자들에 대항하는 성채와 같았습니다.

적들의 책략

공산주의자들은 여호와의 종들의 믿음을 약화시키거나 겁을 주어 굴복시키려고 비밀 요원, 배반자, 고문, 거짓 선전을 사용하기도 하고 생명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비밀 요원과 정보원 가운데는 이웃 사람들, 직장 동료, 배교자, 집안 식구, 보안대 요원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안대 요원들은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신권 용어들을 배워서 회중에 슬며시 들어오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가짜 형제들”은 상당한 해를 입혔으며, 많은 형제들이 체포되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는 사부 가보르가 있었는데, 그는 책임 있는 위치를 맡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정체는 1969년에 밝혀졌습니다.—갈라디아 2:4.

또한 정부 요원들은 도청 장치로 개인이나 가족들을 염탐하였습니다. 티모테이 라저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보안대는 부모님과 남동생을 정기적으로 그들의 본부에 소환하여 한 번에 길게는 여섯 시간 동안 심문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 집에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았습니다. 그날 저녁 전기 기술자였던 남동생은 전기 계량기가 이상하게 빨리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위를 조사해서 두 개의 도청 장치를 발견하고는, 사진을 찍은 다음 떼어 버렸습니다. 다음 날 보안대 요원들이 와서는 자기들의 장난감을 달라고 했는데, 그들은 도청 장치를 장난감이라고 불렀습니다.”

거짓 선전은 종종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발행되었던 기사를 다시 사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 파와 그들의 반동적 성격”이라는 기사는 러시아의 한 신문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여호와의 증인이 “전형적인 정치 조직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그들의 목적은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국가 전복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증인들의 가르침을 선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권하였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장황한 정치적 선전이 반대자들의 실패를 간접적으로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선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여전히 매우 활동적이며 결코 잠잠히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하였기 때문입니다.

보안대 요원들이 형제나 자매를 붙잡았을 때, 전문적으로 자행한 잔인한 행위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붙잡은 사람들의 입을 열게 하려고 정신과 신경 계통에 해를 입히는 화학 물질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학대를 당했던 사모일러 버러이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심문을 시작한 다음 내게 약을 먹였는데, 그 약은 구타보다 더 해로운 것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몸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똑바로 걸을 수 없었고 계단을 올라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만성 불면증이 생겼습니다. 집중을 할 수가 없었고 말도 더듬었습니다.

몸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맛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소화 기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모든 관절들이 제자리에서 틀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고통은 정말 끔찍했습니다. 발에서는 땀이 어찌나 심하게 나든지 신이 두 달 만에 못 신게 되어서 버려야 했습니다. 심문자는 이렇게 고함을 지르곤 하였습니다. ‘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거야? 네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는 거야?’ 나는 화를 터뜨리고 싶었고 자제가 크게 필요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에 버러이안 형제는 이 시련의 결과로부터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보안대는 정신적인 고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알렉사 보이치우크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게 가장 힘들었던 밤은 그들이 나를 깨워서 어떤 형제가 구타당하는 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데리고 간 날이었습니다. 조금 후에는 어떤 자매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이어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 것들을 견디느니 차라리 내가 맞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다른 증인들의 이름과 집회 시간 및 장소를 알려 주면 눈감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내들에게는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투옥된 남편을 떠나라고 권하였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국가에 재산을 몰수당했기 때문에 집단 농장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지만, 남자들은 종종 열리는 정치 집회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은 조롱을 당했고 급여가 삭감되어 거의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그러한 상황으로 인해, 어떤 정치 집회나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정부 요원들은 또한 증인들의 집을 급습하여 개인 소유물도 압수해 버렸습니다. 특히 팔 만한 것들은 더욱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겨울에 종종 집에 있는 유일한 난방 기구인 난로를 부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하였습니까?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난로가 출판물을 감추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잠잠히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형제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학대와 생필품 부족을 인내하면서도 계속 여호와에 관해 증거하고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여호와를 찬양함

루마니아에는 교도소들 외에도 세 군데의 대규모 강제 노동 수용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도나우 강 삼각주에, 다른 하나는 브라일라의 큰 섬에, 나머지 하나는 도나우 강과 흑해를 연결하는 운하 변에 있었습니다. 공산 정권 초기부터, 투옥된 증인들은 종종 이전의 박해자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들은 이전의 정권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한 순회 감독자 형제는 20명의 사제와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처럼 갇혀 있던 사제들과 흥미로운 토의를 많이 하였습니다.

예로서, 어떤 교도소에서 한 형제는 전에 사제가 될 사람들을 심사하던 신학 교수 한 사람과 대화를 길게 나누었습니다. 형제는 얼마 있지 않아 그 교수가 성서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대화를 들은 수감자들 가운데는 실각한 정권의 장군도 있었습니다.

그 장군은 교수에게 “어떻게 저 평범한 기술자들이 당신보다 성서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학교들에서는 성서가 아니라 교회의 전통이나 그와 관련된 것들을 가르칩니다.”

장군은 납득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지식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 보니 우리는 비참하게 그릇 인도된 것이군요.”

시간이 흘러 많은 수감자들이 진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추어 여호와께 헌신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강도죄로 75년을 선고받아 형을 살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인간성이 눈에 띄게 변화하여 교도소 관리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관리들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일을 주었는데, 그 일은 보통 강도죄로 수감된 사람에게는 주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감시하는 사람도 없이 시내에 나가 교도소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해 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도소 생활은 몹시 힘들었고 음식이 부족했습니다. 수감자들은 심지어 감자를 조금이라도 더 먹을 수 있게 껍질을 벗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 사탕무, 풀, 잎이나 다른 식물도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사망하였고 모두가 이질을 앓았습니다.

도나우 강 삼각주에 있던 형제들은 여름에는 공사 중인 댐 건설을 위해 삽으로 흙을 퍼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겨울에는 얼음판 위에서 갈대를 베었습니다. 형제들의 숙소는 낡은 철제 연락선이었는데, 그곳에서 추위, 오물, 이, 그리고 수감자가 죽어도 꿈쩍하지 않는 비정한 경비병들을 견뎠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상황이 어떠하든 간에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고 도왔습니다. 디오니시에 브르치우가 한 경험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니시에는 석방되기 직전에 관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브르치우, 수감 생활을 해 보니 믿음이 바뀌지 않던가?”

디오니시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질 좋은 옷을 두고 질이 안 좋은 옷으로 바꿔 입으시겠습니까?”

그 관리는 “그렇게 하지 않겠지”라고 대답했습니다.

디오니시에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제 믿음보다 더 나은 것을 제공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믿음을 바꿔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자 관리는 디오니시에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며 말했습니다. “자네는 자유의 몸이네, 브르치우. 계속 믿음을 지키게.”

디오니시에 같은 형제 자매들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영적인 힘은 여호와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그러한 믿음은 놀라운 방법들로 그들을 살아 있게 해 주었습니다.—잠언 3:5, 6; 빌립보 4:13.

기억에 의존하여 연구함

안드라스 몰노스는 “교도소에서 지낸 시간이 신권적으로 훈련하는 기간”이었다고 말합니다. 안드라스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매주 형제들과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의 가치를 인식하였기 때문입니다. 안드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구할 내용은 흔히 종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투옥되기 전에 연구한 「파수대」 기사를 생각해 내곤 하였습니다. 연구 기사들의 질문들까지 포함하여 잡지의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형제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처럼 잘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이 영적 양식을 손으로 베껴 쓰는 일을 하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수감자들 중에는 체포되기 전에 그러한 일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132-133면 “복사 방법” 네모 안의 내용 참조.

그리스도인 집회를 계획할 때 책임을 맡은 형제들이 고려할 주제를 광고하면 수감된 각각의 형제들은 그 주제와 관련된 성경 구절들에서부터 그리스도인 성서 연구 보조서에서 배운 요점들까지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모두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모여 그러한 내용을 토의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집회에서 사회자 한 사람을 선정하였는데, 시작하는 기도를 한 후에 사회자는 적절한 질문을 하여 토의를 이끌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해설을 하고 나면, 사회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한 후에 다음 요점으로 넘어갔습니다.

일부 교도소에서는 집단적으로 토의를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창의성을 끝없이 발휘하였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화장실 창틀에서 유리를 떼어 내서, 습기가 있는 비누와 벽에서 긁어낸 석회 가루를 섞어 그 유리판에다 발랐습니다. 이 유리판은 마르고 나면 쓸 만한 필기도구가 되어, 그날의 교훈점들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한 형제가 조용히 글을 불러 주면, 다른 형제가 유리판 위에 글을 썼습니다.

우리는 몇 개의 감방에 나누어 수용되었으며, 감방별로 연구 집단이 구성되었습니다. 감방 내에서 형제들은 각각의 교훈점들을 돌려 가며 보았습니다. 하지만 유리판이 있는 감방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다른 감방에 있는 형제들은 모스 부호로 내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였습니까? 우리 중 한 형제가 최대한 조용하게 벽이나 난방 파이프를 두드려서 내용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때에 다른 감방에 있는 형제들은 컵을 벽이나 파이프에다 대고는 귀를 컵에 가까이 댔습니다. 컵이 바로 수신 장치 역할을 한 셈입니다. 물론 모스 부호를 모르는 형제들은 배워야 했습니다.”

몇몇 교도소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창의성 있고 재치 있는 자매들에 의해서 형제들이 외부로부터 신선한 영적 양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빵을 구울 때 반죽 안에다 출판물을 숨기곤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음식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매들은 심지어 성서의 일부분을 아주 작게 접어서 작은 플라스틱 공에 넣은 다음 공에 촉촉한 초콜릿이나 코코아 가루를 발라 교도소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련의 단점은 형제들이 화장실에서 그것들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화장실은 경비병의 감시를 받지 않고 혼자 몇 분 동안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차례가 끝나면 그 형제는 인쇄물을 변기의 물통 뒤에 숨겨 두곤 하였습니다. 증인이 아닌 다른 수감자들도 이 숨겨 놓는 곳을 알고 있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조용한 독서 시간을 갖곤 하였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충절을 유지하다

친자매 간인 비오리카 필리프와 아우리카 필리프는 다른 많은 증인들처럼 가족들로부터 반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빠와 남동생이 일곱, 언니가 하나 있었습니다. 비오리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우리카 언니는 여호와를 섬기려는 열망 때문에 1973년에 클루지나포카에서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침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언니의 진지함과 열심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조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배웠을 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연구를 계속해 나가면서 그리스도인 중립에 관한 성서 원칙들을 마음에 새겼고 공산당원이 되지 않았습니다.”

비오리카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75년에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집에서 나와 시게트마르마치에이 시에서 친척과 함께 살면서 학교 교사로 일했습니다. 내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기로 했기 때문에 학교 당국은 내가 학년 말에 해고될 것이라고 통보하였습니다. 가족은 내가 해고되는 것을 막으려고 나와 언니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지어 학교에 다니던 어린이들도 위협을 받았으며, 보안대로부터 위협을 받은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신체적·언어적 학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퇴학을 당해서 다른 학교에 다시 등록해야 했습니다. 더 이상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어린이들도 있었습니다. 보안대 요원들은 어린이들을 비밀 요원으로 활용하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현재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다니엘라 멀루찬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정치사상을 주입하는 도구로 사용되던 공산주의 청소년 연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급우들 앞에서 종종 창피를 당하였습니다. 9학년 초에 보안대 요원들은 나를 몹시 괴롭혔고, 교사들과 학교 직원들도 정보원 노릇을 하여 나를 힘들게 하였습니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나는 거의 언제나 2주에 한 번씩 수요일마다 교장실에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교장도 교장실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나를 심문한 보안대 대령은 우리를 얼마나 증오하고 열심히 추적했던지 비스트리차너서우드 주에 있는 형제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책임 맡은 형제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서류들을 가지고 나에게 오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목표는 형제들에 대한 나의 신뢰심을 약화시켜 내가 믿음을 포기하게 하고, 여학생이던 나를 보안대의 비밀 요원이 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당원이던 역사 선생님은 내가 그토록 자주 심문을 받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역사 수업을 취소하고 두 시간 동안 학급 전체 앞에서 나의 믿음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내 대답에 감명을 받으셨고 나를 그토록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토의가 끝나고 선생님은 우리의 견해를 존중하기 시작하였으며 출판물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학교 당국은 계속해서 나에게 반대를 가하였습니다. 실제로 10학년 말에는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었습니다. 그랬지만 나는 즉시 일자리를 찾았고, 여호와께 충성을 유지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나를 길러 준 부모가 공산 정권 아래 학대를 당하면서도 충절을 지킨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부모의 훌륭한 모범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이 시험을 받다

보안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한 공작을 벌이면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젊은 형제들을 주된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형제들은 체포되어 투옥되고 풀려났다가 다시 체포되어 교도소에 또 수감되었습니다. 목표는 그들의 사기를 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인 요제프 서보는 침례를 받은 직후에 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요제프는 2년 동안 복역하고 나서 1976년에 풀려났다가 그 후 얼마 안 있어 배우잣감을 만났습니다. 요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약혼을 하고 결혼할 날을 잡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는 클루지 군사 법정으로부터 다시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나는 결혼하기로 한 바로 그날에 법정에 출두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혼녀와 나는 계획대로 결혼을 했고 그 후에 법정에 출두하였습니다. 방금 결혼한 내게 법정은 3년 형을 선고하였고, 나는 형기를 꼬박 채웠습니다.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젊은 증인인 티모테이 라저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77년에 나와 남동생은 교도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1년 전에 석방된 형이 우리가 석방된 것을 축하해 주려고 집에 왔습니다. 하지만 형은 덫으로 곧장 걸어 들어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는데, 보안대 요원들이 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2년 7개월 15일 동안 떨어져서 지내야만 했는데, 이제 다시 형이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하고 교도소로 가게 된 것입니다. 동생과 나는 찢어지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기념식을 지키다

기념식 날 밤이면 반대자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잡아내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은 집을 급습하여 벌금을 물리고 증인들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 형제들은 소규모로 모임을 가졌으며, 때로는 가족들끼리만 모여서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였습니다.

테오도르 팜필리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기념식 날 저녁에 지방 경찰서장이 친구들과 함께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의 집을 급습하려고 떠나면서 차를 가진 낯선 사람에게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차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엔진에 시동이 걸려 차를 몰고 우리 집에 왔는데 그때 우리는 소규모로 기념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모두 완전히 가려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집이 깜깜하기만 한 것을 보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집으로 차를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기념식이 끝나서 모두 집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도 기념식을 마쳤고 형제들은 재빨리 떠났습니다. 친형과 나만 남아 있을 때 경찰 두 사람이 들이닥쳐 방 한가운데 서서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고 고함을 쳤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형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중입니다.’

경찰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집회가 열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나?’ 그러고는 형을 보면서 ‘그리고 당신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하고 물었습니다.

형은 나를 가리키며 ‘동생을 보러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낭패한 경찰관들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경찰관들이 그토록 열심히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단 한 사람도 체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계 본부가 루마니아의 관리들에게 호소하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가혹한 대우 때문에 본부에서는 1970년 3월에 미국 주재 루마니아 대사에게 4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써 보내고 1971년 6월에는 루마니아의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 6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형제들은 대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루마니아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 대한 그리스도인 사랑과 그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편지를 쓰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편지에는 믿음 때문에 투옥된 일곱 사람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으며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위에 언급된 사람들 가운데 몇은 교도소에서 매우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 여호와의 증인은 범죄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어떠한 형태의 정치 활동이나 국가 전복 활동에 참여하지 않으며, 종교적인 숭배 활동에만 전념합니다.” 그 편지는 끝 부분에서 정부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덜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루마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루마니아 헌법의 보장을 받고 있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들의 믿음을 알리거나 성서 연구를 위해 모일 때에 체포와 잔인한 대우를 무릅써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최근에 사면이 내려져 많은 형제들이 석방된 것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에게도 ···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한 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루마니아 전역에서 들어오는 소식은 변함없이 매우 슬픈 현실 즉 여호와의 증인이 여전히 정부의 박해 대상임을 알려 줍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가택 수색을 당하고, 출판물이 압수를 당하며, 남녀 할 것 없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으며 수년간의 형을 선고받거나 가혹한 대우를 당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전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한 국가의 명성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우리는 루마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와 함께 두 권의 책 즉 루마니아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와 독일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 가운데서의 영원한 생명」이 동봉되어 있었습니다.

1975년 이후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해에 루마니아가 유럽 안전 보장 협력 회의의 참가국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회의는 인권과 종교의 자유를 포함하는 기본적인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들만 체포와 투옥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에는 새 헌법에 관리들을 포함하여 어느 누구도 특정한 법적 승인을 받은 상황이 아닐 경우, 거주자의 동의 없이 개인 거주지에 들어갈 수 없도록 명시되었습니다. 이제 마침내 형제들은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개인 집에서 기념식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 집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하 인쇄 활동

금지령 기간에도 영적 양식은 인쇄물이나 등사 원지나 그 밖의 형태로 루마니아에 반입되어 현지에서 다시 생산되었습니다. 때때로 루마니아어와 헝가리어로 번역된 것도 있었지만 보통은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를 현지에서 번역해야 했습니다. 출판물 배달은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 유학생,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루마니아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하였습니다.

보안대는 배달원들을 잡아내고 루마니아에서 출판물이 생산되는 곳을 알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형제들은 조심성을 나타내어 여러 도시와 마을에 분산되어 있는 방음 처리가 된 몇몇 개인 집에서 작업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집들 내부에 비밀 공간이나 비밀 방을 만들고 그곳에 복사 장비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러한 비밀 방들 중에는 난로 뒤에 숨겨져 있는 것도 있었는데 그러한 난로들은 대개 벽에 붙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벽난로를 이동식으로 개조하여 비밀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샨도르 파라지디는 티르구무레슈에 있던 비밀 인쇄소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일용할 성구 책, 「천국 전도」, 「파수대」, 「깨어라!」를 생산하였습니다. 샨도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주말에 우리는 교대로 한 시간씩 잠을 자면서 무려 40시간을 일했습니다. 화학 약품 냄새가 옷과 몸에 배었습니다. 한번은 집에 도착했을 때, 세 살 난 아들이 ‘아빠, 아빠한테서 일용할 성구 냄새가 나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를 둔 트라이안 키라는 클루지 주에서 출판물을 복사하고 운반하였습니다. 트라이안은 ‘방아’라는 별명의 낡은 수동 복사기 한 대를 받았는데, 그 복사기는 폐기할 때가 한참 지난 것이었습니다. 그 복사기는 복사는 되었지만 질이 떨어졌습니다. 트라이안은 기계공인 형제에게 복사기를 분해하여 철저히 점검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사기를 점검한 그 형제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니 기계 상태가 어떤지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낡은 ‘방아’는 수리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그 형제는 표정이 갑자기 환해지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것을 하나 만들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말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해 주었습니다. 그 형제는 한 자매의 지하실에다 작업실을 만들고 자신이 쓰는 선반을 설치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복사기를 한 대가 아니라 열 대가 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방아’들은 루마니아 각지로 보내져 질 좋은 출판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1980년대에 많은 형제들은 성능이 더 우수한 오프셋 복사기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처음으로 니콜라에 벤타루가 훈련을 받게 되었고, 이어서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흔히 그랬던 것처럼, 벤타루의 집에서도 출판물 생산에 가족이 모두 매달려서 각기 맡은 일을 하였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이러한 작업을 하는 것은 도전이 되었는데, 보안대가 사람들을 염탐하고 집들을 급습하던 때에는 특히 그러하였습니다. 따라서 빠른 속도로 작업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으며, 그래서 형제들은 주말 내내 여러 시간 동안 출판물을 복사하고 운반하곤 하였습니다. 왜 주말에 그렇게 하였습니까? 주 중에는 직장에서 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형제들은 종이를 구입할 때 조심해야 했습니다. 종이를 살 때는 1림(약 500장)만 신청을 하려고 해도 용도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복사하는 데 필요한 종이는 한 달에 무려 4만 장이나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은 상점 직원들과 거래를 할 때 신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길에서 검문을 자주 했기 때문에 종이를 운반할 때에도 경계를 해야 했습니다.

번역의 어려움

루마니아 각지에 살고 있던 소수의 형제 자매들은 출판물을 현지 언어들로 번역하였는데, 그러한 언어 가운데는 북부의 소수 민족이 사용하던 우크라이나어도 있었습니다. 번역자들 중에는 진리 안으로 들어온 어학 교수들도 있었고, 독학을 하거나 어쩌면 어학 강좌를 통해 다른 언어를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번역자들이 노트에 손으로 써서 작업을 한 다음, 북쪽에 있는 도시인 비스트리차에 가지고 가서 교정을 보았습니다. 일 년에 한두 차례 번역자들과 교정자들이 만나서 작업과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제 자매들은 붙잡히게 되면 으레 수색과 심문과 구타를 당하고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된 사람들은 몇 시간 또는 며칠 동안 구류되었다가, 풀려난 다음 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여러 차례 반복되었는데 일종의 겁주기 작전이었습니다. 가택 연금을 당하거나 매일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형제들이 투옥되었는데, 그중에는 두미트루 체퍼나루와 도이나 체퍼나루 부부, 그리고 페트레 란카가 있었습니다.

두미트루 체퍼나루는 루마니아어 및 루마니아 역사 교수였고, 그의 아내 도이나는 의사였습니다. 보안대가 마침내 그들을 붙잡아 체포하였고 그들을 각각 다른 교도소로 보내 7년 반 동안 그곳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도이나는 그중 5년을 독방에서 지냈습니다. 사실 앞서 언급한 미국 주재 루마니아 대사에게 보낸 본부의 편지 가운데는 그들의 이름이 나와 있었습니다. 도이나는 투옥되어 있는 동안 남편과 투옥된 다른 자매들을 격려하기 위해 500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두미트루와 도이나 부부가 체포되고 나서 1년 후에 두미트루의 어머니인 사비나 체퍼나루 역시 체포되어 6년에서 2개월 모자라는 기간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가족 가운데 보안대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지만 계속 자유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은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인 사비나의 남편뿐이었습니다. 그는 큰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정기적으로 자기 가족 세 사람을 모두 방문하였습니다.

1938년에 페트레 란카는 루마니아 여호와의 증인 사무실의 총무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번역자로 일해 왔을 뿐만 아니라 그 임명까지 받게 되어 보안대가 정말 잡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보안대는 1948년에 페트레를 찾아내어 여러 차례 체포하였고, 1950년에는 마르틴 마기아로시와 팜필 알부와 함께 재판을 받게 하였습니다. 페트레는 영국과 미국의 간첩단의 일원으로 고발을 당해 루마니아에서 정말 힘든 교도소로 알려진 아이우드, 게를라, 질라바 교도소에서 17년을 인내하였고, 갈라치 주에서 3년 동안 가택 연금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충실한 형제는 1991년 8월 11일에 지상 생애를 마치기 직전까지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와 같은 충절 고수자들의 사랑에 찬 수고는 이러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불의하지 않으시므로, 여러분이 거룩한 자들을 섬겨 왔고 또 계속 섬기면서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히브리 6:10.

노천 대회

1980년대에 형제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처럼 기회가 있을 때 대규모로 모임을 갖기 시작했는데, 심지어는 수천 명이 모이기도 하였습니다. 결혼식 때에는 시골의 적당한 장소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내부를 성서적 그림과 성구를 수놓아 만든 멋진 카펫으로 장식하였습니다. 많은 “손님”들을 위해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두었고, 확대해 놓은 「파수대」 마크와 연표어가 있는 포스터를 연단 뒤에 걸어 두었습니다. 현지 전도인들은 대개 형편이 닿는 대로 음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모두가 이중으로 즉 물질적·영적으로 잔치를 즐겼습니다.

프로그램은 주례사 또는 장례사로 시작하여 다양한 성서 주제로 여러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때때로 연사들이 제시간에 도착할 수 없었으므로 자격을 갖춘 다른 형제들이 항상 빈자리를 채울 태세가 되어 있었는데, 마련된 골자의 사본이 없었기 때문에 대개 성서만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름철에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려고 시골로 많이 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기회를 활용하여 언덕이나 숲에서 작은 대회를 열었습니다. 심지어는 고대 의상을 갖춘 성서 드라마를 공연하기도 하였습니다.

인기 있는 휴양지로 흑해가 있었는데, 그곳은 침례를 주기에 이상적인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주의를 끌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었습니까? 한 가지 방법은 “게임”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침례 지원자들과 침례받은 전도인 몇몇이 물속에서 둥그렇게 둘러서서 서로 공을 던졌습니다. 연사는 한가운데서 연설을 하였으며 그런 다음 침례 지원자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슬기롭게 그렇게 하였습니다.

양봉가들을 위한 회관

1980년, 루마니아 북서부의 네그레슈티오아슈 시에 살던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한 법적 허가를 얻기 위해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양봉업 즉 벌을 기르는 일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벌통을 가지고 있던 일단의 형제들은 지역 양봉 협회를 설립할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집회 장소를 건축하기 위한 합법적인 이유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순회구 내의 장로들과 상의한 다음 루마니아 양봉 협회에 등록을 하였고, 시청으로 가서 집회 장소에 대한 건축 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당국에서는 길이 34미터에 폭 14미터의 목조 건물을 건축하도록 기꺼이 승인해 주었습니다. 양봉가들과 그들을 도운 많은 사람들은 힘이 나서 공사를 3개월 만에 마쳤습니다. 그들은 시의 관리들로부터 특별한 감사의 말을 듣기까지 하였습니다!

봉헌식은 참석자도 많을 것이고 몇 시간 동안 진행될 것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곡물 수확 파티를 위해 회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승인을 받았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3000명이 넘는 증인이 봉헌식에 모였습니다. 시 관리들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수확을 돕고 수확을 마친 후에 “축하”하기 위해 모인 것을 보고는 대단히 놀랐습니다.

물론 그 축하 행사는 영적으로 값진 대회였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건축된 공식적인 목적을 고려하여, 프로그램 가운데 벌이 자주 언급되기는 하였지만 영적인 의미로 언급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연사들은 벌의 부지런함, 비행하거나 조직하는 기술, 벌집을 지킬 때의 용기와 자기희생 정신 등 여러 가지 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이 봉헌식이 끝난 후에 이른바 ‘양봉 회관’은 그 이후의 금지령 기간과 금지령이 해제되고 나서도 3년 동안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지구 감독자들이 연합의 증진을 위해 도움을 주다

수십 년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의심과 불화의 씨를 뿌리고 의사소통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실 1980년대까지도 분열된 상태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지구 감독자의 방문은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었으며, 정치적인 상황 변화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는 당시에 오스트리아 지부의 지부 위원이었으며 현재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 형제가 여러 차례 루마니아를 방문하였습니다. 1988년에는 통치체의 대표자들인 시어도어 재라스와 밀턴 헨첼이 뢰시 형제와 통역자로 당시 미국 베델 가족의 일원이었던 존 브렌카를 데리고 두 차례 그곳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러한 격려적인 방문이 있은 후에 대다수의 여호와의 백성과 떨어져 있던 수천 명의 형제들이 확신을 가지고 다시 전체 무리와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정치적 변화가 점점 심해져 유럽의 공산권 전역이 불안정하게 되면서 그 기초 자체가 흔들렸으며, 마침내 1980년대 말에는 대부분의 정권들이 붕괴되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1989년에 국민들이 공산 정권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공산당 지도자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는 12월 25일에 처형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마침내 자유!

항상 그래 왔듯이, 여호와의 증인은 루마니아의 정치적 상황이 변할 때에도 엄정중립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는 당시 루마니아에 있던 1만 7000명의 증인들에게 그들 대부분이 마음으로 바라고만 있던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전국 위원회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4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는 루마니아의 활동에 관해 기쁜 보고를 하게 되어 마음이 흐뭇합니다. 수많은 형제들의 열렬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무자비한 박해가 끝나게 해 주신 우리의 사랑 많으신 아버지 여호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1990년 4월 9일에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조직으로 법적 인가를 받았으며, 즉시 전국에서 순회 대회를 열도록 조직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에는 4만 4000명 이상이 참석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전도인 수가 약 1만 9000명으로 증가해 있었으므로 전도인 수의 두 배가 훨씬 넘게 참석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야외 봉사 보고를 보면 1989년 9월부터 1990년 9월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15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당시에 전국 위원회는 오스트리아 지부의 감독 아래 활동을 인도하였습니다. 하지만 66년 만인 1995년에 루마니아에 다시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1980년대 무렵에 루마니아의 경제는 기울어져서 소비재 공급이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공산주의 정부가 무너지자 경제도 붕괴되어 사람들은 극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 헝가리, 그리고 당시의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들은 70톤이 넘는 식품과 의복을 루마니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냈으며, 형제들은 그러한 공급품 가운데 얼마를 증인이 아닌 이웃 사람들과도 나누어 쓸 수 있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지원이 베풀어질 때마다 형제들은 그 기회를 활용하여 철저히 증거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물질적 공급품만이 아니라 영적 양식 또한 트럭으로 가득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풍부한 양식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동안 이들에게는 집단 전체가 볼 「파수대」가 한 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더하여, 1991년 1월 1일호부터 루마니아어 「파수대」는 총천연색으로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루마니아에서는 출판물 배부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집단 토의에서 정규 집회로

박해를 받던 시절에 형제들은 신권 전도 학교와 같은 집회들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대신에 형제들은 작은 집단으로 모여 내용을 읽고 토의하였습니다. 대개 고려할 출판물은 불과 몇 부뿐이거나 한 부뿐이었습니다.

현재 루마니아 지부의 지부 위원인 존 브렌카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권 전도 학교 지침서」가 1992년 루마니아어로 인쇄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소수의 형제들이 그 책을 자체적으로 인쇄하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1년에 우리는 어떻게 신권 전도 학교를 사회하고 어떻게 조언을 할 것인지를 장로들에게 훈련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조언을 연단에서 하였기 때문에 장로들은 종종 조언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조언을 하면 형제들의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라고 어떤 장로들은 말했습니다.”

또한 약간의 오해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93년에,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형제가 어느 회중을 방문했을 때, 한 장로는 규모가 큰 회중에서는 2부 학급을 마련할 수 있다고 되어 있는 학교 계획표를 가지고 그 형제에게 왔습니다. 그 장로는 이 마련이 좀 더 발전한 학생을 위한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언제쯤 그 학급에서 연설을 하기 시작할 수 있을까요? 우리 회중에는 상급반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춘 형제들이 있습니다.” 방문한 형제는 친절하게 그에 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브렌카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순회 대회는 형제들을 교육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는데, 프로 중에는 지역 감독자가 사회하는 모범 신권 전도 학교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가 이 마련에 온전히 적응하기까지는 몇 해가 걸렸습니다.”

1993년에는 루마니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가 열리기 시작하여 수천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영적으로 진보하고 봉사의 직무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왔습니다. 확실히 루마니아에서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것이 도전이 됩니다. 시간제 직장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4년에 35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어떤 형태로든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을 위한 도움

1990년에 로베르토 프란체스케티 형제와 안드레아 파비 형제는 이탈리아 지부에서 루마니아로 임지가 변경되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활동을 재조직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케티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때 나는 57세였습니다. 당시 루마니아의 경제적 상황 때문에 나나 아내인 이멜다에게는 새로운 임지에서 활동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1990년 12월 7일 오후 7시에 부쿠레슈티에 도착하였을 때 기온은 섭씨 영하 12도였고 도시는 눈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몇몇 형제들을 만나 그날 밤에 머물 곳에 대해 물었습니다. 형제들은 ‘아직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증인인 젊은 부인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는 즉시 자기 집으로 우리를 초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시내에 적합한 아파트를 찾을 때까지 몇 주 동안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현지 형제들 또한 감정적으로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해 주어서 우리가 임지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67년에 길르앗 학교를 제43기로 졸업한 로베르토는 아내와 함께 거의 9년 동안 루마니아에서 지내면서 수십 년 동안 여호와를 섬기면서 경험한 것들을 토대로 형제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로베르토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1991년 1월에 전국 위원회는 42명의 여행하는 감독자들 모두와 만나는 모임을 마련하였습니다. 대부분이 각각 예닐곱 회중으로 된 작은 순회구를 돌보았습니다. 그들은 보통 연속해서 2주 동안 주말에 각 회중을 섬겼고, 대개 아내들은 회중을 함께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순회 감독자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당국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일반 직장에 계속 다녀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이 형제들은 다른 나라들에 있는 순회 감독자들처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회중을 섬기는 동일한 계획표를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마련에 관해 설명한 후에 나는 42명의 모든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여행하는 감독자로 계속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여 몇 분만에 이 나라에는 여행하는 감독자가 한 명도 없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몇몇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 고려한 후에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에서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형제들이 와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루마니아계 사람인 존 브렌카는 브루클린 베델에서 10년 동안 봉사한 뒤 루마니아로 임지가 바뀌었습니다. 처음에 존은 순회 및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91년 6월에 나는 지역 감독자로서 새로운 마련에 따라 기꺼이 전 시간 봉사를 하기로 한 순회 감독자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을 크게 바꾸어야 할 사람들이 그들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는데, 회중들 역시도 처음에는 적응하는 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장로들은 ‘전도인들이 매일 야외 봉사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힘을 합쳐 조정을 하였습니다.”

또한 왕국 전도 학교와 봉사 훈련 학교도 형제들을 교육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이아마레에서 왕국 전도 학교가 진행 중일 때 한 장로는 눈물을 흘리며 강사 한 사람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장로로 섬겨 왔지만 이제야 양치는 방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점들을 알려 주신 통치체에 감사드립니다.”

형제들은 봉사 훈련 학교에 관해 이야기는 들었지만 루마니아에서 이 학교를 연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러했기에 1999년에 제1기 학급이 열려 그 꿈이 실현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갈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8개의 학급이 더 열렸고 학생들 가운데는 이웃 나라인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출신의 루마니아어를 하는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진리를 발견했단다!”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증거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인구의 3분의 1인 약 700만 명은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지역들에서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전혀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수확할 것이 아직 많습니다! (마태 9:37) 정규 파이오니아, 특별 파이오니아, 회중 장로들이 이러한 필요에 반응을 보여 임명되지 않은 지역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더 많은 집단이 형성되고 회중이 생겼습니다. 그에 더하여 지부에서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는 특별 활동에 참여하도록 회중들에 권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이러한 활동은 매우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어느 외딴 마을에 사는 83세의 연로한 부인은 딸에게서 「파수대」 한 부를 받았는데, 그 잡지는 딸이 부쿠레슈티에 있을 때 쓰레기통에서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연로한 부인은 잡지를 읽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성서로 모든 성구를 찾아보았는데, 우연찮게도 그 성서에는 하느님의 이름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다음번에 딸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얘야, 내가 진리를 발견했단다!”

또한 그 부인은 마을의 사제와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사제는 대답은 하지 않고 성서와 잡지를 살펴보게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사제를 존중해서 그 부탁을 들어주었는데, 그 후로는 자신의 성서와 「파수대」를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후에 여호와의 증인이 전파하기 위해 그 부인이 사는 마을에 왔을 때 그 부인은 증인들을 안으로 초대하였으며, 「지식」 책을 사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훌륭하게 발전하였습니다. 현재 그 부인과 딸들 모두가 진리 안에 있습니다.

마침내 대회를 열 자유를 갖게 되다!

루마니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1990년에 “순결한 언어” 지역 대회를 보기 위해 모였을 때 대단히 기뻤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대회가 처음으로 참석한 대회였습니다. 대회는 브라쇼브와 클루지나포카 두 도시에서 열렸습니다. 그보다 2주 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루마니아어 대회에 2000명 이상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였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열린 대회는 단 하루만 계획되어 있었지만 형제들은 통치체의 대표자들인 두 명의 형제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의 연설을 듣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3만 6000명 이상이 참석하였고 1445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 수는 전도인의 약 8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였습니다!

1996년에는 부쿠레슈티에서 “경건한 평화의 사자” 국제 대회를 열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 교직자들이 대회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교회, 건물, 골목, 벽 할 것 없이 도시 전체에 증오심을 표현하는 포스터를 붙여 놓았습니다. 어떤 포스터에는 “정통 신앙 아니면 죽음”이라고 되어 있었고, 이러한 말이 적힌 포스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국에 이 대회를 취소시킬 것을 요청할 것이다. 와서 우리 선조들의 믿음을 지키자. 하느님, 우리를 도우소서!”

이러한 상황 때문에 시 관리들은 그 문제에 관해 재고해 보고는 부쿠레슈티에서 대회를 열지 못하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은 브라쇼브와 클루지나포카에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사용할 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한 이러한 곳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부쿠레슈티와 바이아마레에 소규모의 대회도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들은 형제들이 그러한 갑작스러운 통고에도 불구하고 평온함을 유지하며 대회를 재조직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회 전날에 나온 언론 매체들의 보도는 긍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나온 부정적인 보도들조차도 여호와의 이름이 주목을 받게 하였으므로 어느 정도 좋은 면이 있었습니다. 부쿠레슈티에 있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3주 만에 우리는 전국에 걸쳐 수년 동안 증거한 것과 맞먹을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루마니아 정교회에서 우리를 방해하려고 한 것이 실제로는 좋은 소식이 더 널리 알려지게 한 것입니다.” 대회들에는 총 4만 206명이 참석하였고 1679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2000년에 열린 “하느님의 말씀을 행하는 사람” 지역 대회에서 형제들은 루마니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을 받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인식 깊은 한 젊은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제가 사용하는 이 번역판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읽으면서 여호와께 더욱더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양봉 회관이 대회 회관으로

앞서 언급한 양봉 회관을 제외하면 공산 통치 시절에는 왕국회관을 한 채도 짓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지령이 해제되었을 때 엄청나게 많은 수의 왕국회관이 필요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왕국회관 기금 마련 덕분에 근년 들어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평균 열흘마다 한 채씩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이 건물들은 기본 설계도에 따라 구하기 쉬운 자재로 건축됩니다.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건축 공사 기간에, 특히 속성 회관을 건축할 때, 분명히 볼 수 있는 원활한 조직 운영과 자원하는 영은 이웃 사람들과 사업가들과 시 관리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무레슈 주에서 형제들은 공사 중인 왕국회관에 전기를 끌어 오기 위해 허가를 받으려고 당국자들을 찾아갔습니다. 한 관리는 “왜 그렇게 서두르십니까?”라고 물어보면서 “여러분의 신청을 처리하는 데에는 최소 한 달이 걸릴 것이고 그때까지도 공사는 별로 진척되지 않을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 문제를 관리자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그 역시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서두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 막 기초를 놓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그것은 지난주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지붕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관리자는 그 사실을 알고는 바로 다음 날 허가를 내 주었습니다.

루마니아 최초의 대회 회관은 네그레슈티오아슈에 건축되었는데, 주 강당에는 2000명이 앉을 수 있고, 야외극장 같은 공간에는 6000명이 앉을 수 있습니다. 뢰시 형제는 봉헌식 연사로 초대되어 매우 기뻐하였고, 루마니아어로 연설을 하였습니다. 5개 순회구에서 90개가 넘는 회중들이 건축 공사를 지원하였습니다. 아직 회관이 봉헌되기 전이었지만 2003년 7월에는 그곳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857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해할 만하게도 그 대회 회관은 그 지방 정교회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 이야깃거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실 몇몇 사제들은 형제들이 자진적인 영을 나타낸 것에 대해 칭찬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종을 치려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카로이 서보와 요제프 키시 형제는 1911년에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이 시작하려 한 활동을 어느 정도로나 축복해 주실지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10년 동안 루마니아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약 1만 8500명이나 침례를 받아서 전도인 수가 3만 8423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기념식에는 7만 937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이러한 성장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1998년에는 훌륭한 새 베델 집이 봉헌되었고 2000년에는 확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베델 경내에는 세 개의 왕국회관이 있는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목할 만한 성장의 기초는 그 많은 세세한 이야기를 글로 옮길 수조차 없을 정도로 잔악한 박해를 받던 기간에 놓여졌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확장에 대한 모든 영광은 충성스러운 증인들에게 보호의 그늘을 드리워 주셔서 도피처를 찾을 수 있게 해 주신 여호와께 돌아가야 합니다. (시 91:1, 2) 여호와께서는 충실한 종들에 관하여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어나는 혀는 모두 네가 정죄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의 종들의 유산이[다].”—이사야 54:17.

더없이 소중한 그 “유산”을 계속 간직하기 위해서 루마니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의를 위해 그처럼 많은 고난을 당한 모든 사람들의 귀중한 믿음을 본받음으로 그들의 눈물에 대해 합당한 인식을 나타내겠다고 결심합니다.—이사야 43:10; 히브리 13:7.

[72면 네모]

루마니아의 개요

국토: 루마니아는 면적이 23만 8000제곱킬로미터이고 모양이 타원형에 가까우며 동서의 길이는 720킬로미터이다. 주변 나라들로는 북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우크라이나, 몰도바, 불가리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헝가리가 있다.

주민: 루마니아의 주민은 2200만 명이며 루마니아인, 헝가리인, 독일인, 유대인, 우크라이나인, 집시와 그밖의 매우 다양한 외국계 및 고유의 민족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적어도 인구의 70퍼센트는 루마니아 정교회 신자이다.

언어: 공용어는 루마니아어이다. 루마니아어는 고대에 로마인들이 사용한 라틴어에서 발달한 언어이다.

생활: 노동 인구의 약 40퍼센트가 농업, 임업, 어업에 종사하고, 25퍼센트는 제조업, 광업, 또는 건설업에 종사하며, 30퍼센트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식품: 농작물로는 옥수수, 감자, 사탕무, 밀, 포도가 있다. 가축은 주로 양을 기른다. 소, 돼지, 가금류와 같은 동물들도 기른다.

기후: 지역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에 차이가 있다. 전반적으로 기후가 온화하며, 사계절의 구분이 뚜렷하다.

[74면 네모]

루마니아의 각기 특색 있는 지방들

루마니아는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며, 역사적으로 구분이 되는 몇 개의 각기 특색 있는 지방들로 나뉘어 있는데, 그러한 곳들로 마라무레슈, 몰다비아, 트란실바니아, 도브루자 지방이 있다. 북쪽의 마라무레슈 지방은 로마인들의 침략을 받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그곳 사람들은 외떨어진 산악 마을들에 살고 있으며, 조상들인 다키아인들의 문화를 보존해 왔다. 동쪽에 위치한 몰다비아는 포도주 양조장, 광천, 15세기의 수도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남부 지방인 왈라키아에는 루마니아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인 부쿠레슈티가 있다.

루마니아의 중앙에 위치한 트란실바니아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활 모양의 카르파티아 산맥에 완전히 둘러싸인 고원이다. 중세의 성들, 도시들, 폐허들이 많은 트란실바니아는 소설에 흡혈귀로 나오는 전설 속의 드라큘라의 고향이다. 드라큘라의 모델이 된 인물들은 15세기의 인물로 악마 블라드라고 불리던 블라드 드라쿨 대공과, 적들을 창으로 찔러 처형한 것으로 알려진 블라드 체페슈 대공이다. 당연히 이 지역의 여행 코스에는 그들과 관계된 곳들이 많다.

약 250킬로미터의 흑해 연안을 끼고 있는 도브루자에는 아름다운 도나우 강 삼각주가 있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인 도나우 강은 루마니아의 남쪽 국경을 이루며, 루마니아의 물은 대부분 이 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도나우 강 삼각주는 생태학적으로 다양하며, 면적이 4300제곱킬로미터나 되어 유럽에서 가장 큰 습지 보호 구역이다. 그곳에는 300종이 넘는 조류와 150종의 어류 그리고 버드나무에서 수련에 이르기까지 1200종의 식물이 살고 있다.

[87면 네모]

자몰시스 숭배에서부터 루마니아 정교회까지

통용 기원이 시작되기 전에 현재 루마니아로 알려진 지역에는 여러 세기 동안 서로 조상이 같은 게테족과 다키아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신 자몰시스는 하늘과 죽은 자들의 신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루마니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다.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는가?

발칸 반도에서 로마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을 때 게테·다키아 연합은 로마에 큰 위협이 되었다. 사실 게테·다키아 연합을 이끈 데케발루스 왕은 두 차례나 로마 군대를 무찔렀다. 하지만 기원 2세기 초에 로마는 세력이 강해져서 그 지역을 속주로 만들었다. 당시에 다키아라고 불리던 지역은 큰 번영을 누리고 있어서 많은 로마인 이주자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다키아 사람들과 결혼을 하고, 그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는데, 이렇게 해서 지금의 루마니아인들의 조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정착민들과 상인들은 이 지역에 명목상의 그리스도교를 들여왔다. 기원 332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도나우 강 북쪽에 살던 게르만 부족들의 연맹체인 고트족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그리스도교국은 영향력이 더욱 강해졌다.

동방 교회가 로마 교회와 결별한 1054년의 교회 대분열 후에 이 지역은 동방 정교회의 세력 안에 놓이게 되었으며, 후에 동방 정교회는 루마니아 정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루마니아 정교회는 신도가 1600만 명이 넘어 발칸 반도 최대의 독립 정교회가 되었다.

[98-100면 네모와 삽화]

폭탄이 비 오듯 쏟아질 때도 우리는 노래를 불렀다

테오도르 미론

출생: 1909년

침례: 1943년

약력: 교도소에서 성서 진리를 배웠다. 14년 동안 여러 곳의 나치 강제 수용소, 공산주의 강제 노동 수용소와 교도소에서 복역하였다.

1944년 9월 1일에 독일군이 후퇴할 때, 152명의 형제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함께 세르비아의 보르 강제 수용소에서 독일로 이송되게 되었는데, 나는 그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던 날도 있었습니다. 밭 옆의 길가에 있는 사탕무 같은 버려진 식품을 몇 조각이라도 줍게 되면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너무 약해져서 걸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튼튼한 사람이 그를 손수레에 태워서 데리고 갔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기차역에 도착하였고 4시간 정도 쉰 다음 두 량의 무개화차에서 짐을 내려 우리가 탈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좌석도 없었고 따뜻한 옷도 없었으며 각자 담요 한 장만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우리는 담요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밤을 꼬박 새우면서 이동하였습니다. 다음 날 오전 10시에 어느 마을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두 대의 비행기가 기관차에 폭격을 가해 기차가 멈춰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탄 화차는 기관차 바로 뒤에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 가운데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 사고에도 불구하고, 다른 기관차에 우리가 탄 화차를 연결하여 계속 이동하였습니다.

약 100킬로미터를 더 가서 두 시간 동안 역에 정차해 있는데, 몇 명의 남자와 여자가 감자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우리는 ‘감자 파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서 우리가 굶주려 있을 것을 알고 온 우리의 영적 형제 자매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각자에게 커다란 찐 감자 세 개와 빵 한 조각과 약간의 소금을 주었습니다. 이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는 12월 초에 헝가리의 솜버트헤이에 도착하기까지 48시간 동안 우리에게 지탱할 힘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솜버트헤이에서 눈에 덮여 있는 옥수수를 주로 먹으면서 겨울을 났습니다. 1945년 3월과 4월에 이 아름다운 도시도 폭격을 받았고 거리에는 갈가리 찢긴 시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벽돌 더미에 깔려 빠져나오지 못했고, 때때로 우리는 도와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삽과 같은 도구들을 가지고 몇몇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머무르던 곳 근처에 있는 건물들에 폭탄이 떨어졌지만 우리가 있던 건물은 무사했습니다.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모두가 겁에 질려서 대피할 곳을 찾아 달려갔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도 달려갔지만, 얼마 안 있어서 마땅한 대피 장소가 전혀 없기 때문에 달려가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있던 곳에 그냥 그대로 있으면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경비병들도 우리와 함께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하느님께서 자신들도 보호해 주실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솜버트헤이에서 지낸 마지막 날인 4월 1일 밤에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많은 폭탄이 비 오듯 쏟아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건물 안에 그대로 있으면서 노래로 여호와를 찬양하며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렸습니다.—빌립보 4:6, 7.

다음 날, 독일로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두 대의 마차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약 100킬로미터를 마차에 타거나 걸어서 마침내 러시아 전선에서 13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어느 숲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는 한 부유한 지주의 사유지에서 밤을 보냈고, 다음 날 경비병들이 우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 우리를 부양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하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 인사를 하고 각자 집을 향하여 걷거나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107면 네모]

행동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 사랑

1946년에 루마니아 동부 지역에 기근이 닥쳤다.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 루마니아에서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여파로 인한 피해가 덜한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에게 식품과 의복과 돈을 기부하였다. 예로서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가까운 시게트마르마치에이 시의 소금 광산에서 일하던 증인들은 광산에서 소금을 구입하여 이웃 도시들과 마을들에서 팔아 번 돈으로 옥수수를 샀다. 한편 미국, 스웨덴, 스위스 등의 나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약 5톤의 식품을 기부하여 도움을 주었다.

[124, 125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1600개의 성서 구절을 기억해 냈다

디오니시에 브르치우

출생: 1926년

침례: 1948년

약력: 1959년부터 5년이 조금 넘게 몇몇 교도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지냈으며, 2002년에 사망하였다.

투옥되어 있을 때 우리는 가족과 연락을 할 수 있었으며, 가족들은 매달 한 번 5킬로그램의 선물 꾸러미를 우리에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할당된 작업을 마친 사람들만이 선물 꾸러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항상 똑같이 나누었는데, 그 말은 음식을 보통 약 30등분으로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사과 두 개를 그렇게 나눈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각자의 몫은 작았지만 배고픔을 달래 주기는 했습니다.

우리는 성서나 성서 연구 보조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수감되기 전에 배운 것들을 기억해 내고 그것들을 서로 이야기함으로 영적인 힘을 유지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한 형제가 성서 구절 하나를 생각해 내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15분에서 20분 동안 의무적인 아침 구보를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그 성구를 되뇌면서 묵상하였습니다. 감방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약 30분 동안 그 구절에 대한 해설을 하였는데, 감방은 폭과 길이가 고작 2미터와 4미터여서 우리 20명이 들어서면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꽉 찼습니다. 우리는 모두 합쳐 1600개의 성서 구절을 기억해 낼 수 있었습니다. 정오가 되면 우리는 다양한 주제들을 고려하면서 관련된 약 20개 내지 30개의 성구도 검토하였습니다. 모두가 그 내용을 암기하였습니다.

처음에 한 형제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많은 성서 구절을 외울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이었습니다. 그 형제 역시 우리가 성구들을 20번쯤 반복해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을 듣고는 많은 성구를 기억하고 암송할 수 있었으며, 대단히 기뻐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굶주리고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계속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시고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석방된 후에도 계속 영성을 유지해야 하였습니다. 보안대가 우리의 믿음을 꺾으려고 우리를 계속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32, 133면 네모]

복사 방법

1950년대에는 손으로 베끼는 것, 흔히 먹지를 사용하여 베끼는 것이 성서 연구 보조서를 복사하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편리한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속도가 느리고 지루하기는 하였지만 한 가지 면에서 특히 유익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복사하는 사람들이 내용의 상당 부분을 외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투옥되었을 때 형제들에게 영적으로 격려를 많이 해 줄 수 있었다. 또한 형제들은 타자기를 사용하기도 하였지만, 타자기는 경찰에 등록해야 했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1950년대 말에는 등사기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등사 원지를 만들기 위해 형제들은 풀과 젤라틴과 왁스를 섞은 다음, 그것을 매끄러운 네모 판, 가능하다면 유리판 위에다 얇고 평평하게 발랐다. 직접 만든 특수 잉크를 사용하여 종이에 글을 써서 글씨가 도드라지게 하였다. 잉크가 마르고 나면 왁스를 바른 판 위에 종이를 놓고 고르게 눌러 등사 원지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등사 원지는 수명이 짧아서 형제들은 계속 등사 원지를 새로 만들어야 했다. 손으로 베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등사하는 것 역시 안전상 위험이 있었다. 필체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의 신분이 탄로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부터 금지령이 해제되기까지 형제들은 이동식 수동 복사기를 10대 이상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이 복사기들은 오스트리아에서 제작된 모델을 기초로 만들었으며 코팅지로 만든 인쇄판을 사용하였다. 형제들은 이 복사기에 ‘방아’라는 별명을 붙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매엽식 오프셋 복사기 몇 대를 갖게 되었지만, 형제들은 인쇄판을 만들 줄 몰라 기계를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1985년부터는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화학 기술자 형제가 형제들에게 필요한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 이후로는 생산되는 출판물의 양과 질이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

[136, 137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나를 훈련시켜 주셨다

니콜라에 벤타루

출생: 1957년

침례: 1976년

약력: 공산 정권 시절 출판물을 인쇄하는 봉사를 하였고 현재는 아내 베로니카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1972년에 서첼레 시에서 성서 연구를 시작하여 4년 후인 열여덟 살 때 침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 우리의 활동은 금지령 아래 있었고 집회들을 서적 연구 집단 크기로 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기적으로 영적 양식을 공급받았는데, 심지어는 오디오 테이프에 천연색 슬라이드까지 있는 성서 드라마도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에 내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슬라이드 영사기를 조작하는 일이었습니다. 2년 후에는 우리 지역의 지하 인쇄 작업을 위해 종이를 구입하는 특권도 받았습니다. 1980년에는 인쇄 기술을 배웠고 「파수대」와 「깨어라!」와 다른 출판물의 인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등사기와 소형 수동 인쇄기를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나는 여호와께 충실함을 나타낸 훌륭한 자매인 베로니카를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아내는 내가 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81년에는 오스트리아 지부에서 오토 쿠글리히가 와서 우리가 처음으로 갖게 된 매엽식 오프셋 복사기를 작동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1987년에 클루지나포카에 두 번째 인쇄기를 설치하였고, 나는 그 인쇄기를 가동할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을 맡았습니다.

1990년에 금지령이 해제된 후 아내와 나는 아들 플로린과 함께 계속해서 8개월 동안 출판물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플로린은 인쇄된 종이들의 순서를 맞추는 일을 도왔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인쇄된 종이를 눌러서 재단하고 중철하고 포장해서 발송하였습니다. 2002년에 우리 세 사람은 모두 부쿠레슈티에서 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인구가 1만 5000명인 미질이라는 마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으며, 플로린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39, 140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적들을 눈멀게 하셨다

아나 비우센쿠

출생: 1951년

침례: 1965년

약력: 십 대 초반부터 부모를 도와 출판물을 복사하였다. 후에 출판물을 우크라이나어로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968년 어느 날, 나는 등사 원지에다 「파수대」를 베껴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나가면서 깜빡 잊고 등사 원지를 숨겨 두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어 집에 돌아오자마자 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군지 볼 시간도 주지 않고 보안대 요원 다섯 명이 수색 영장을 가지고 집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나는 겁이 났지만 가까스로 침착함을 유지하였습니다. 동시에 여호와께 부주의했던 것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하면서 다시는 일을 다 정리하지 않은 채 나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책임자는 식탁에 앉았는데, 바로 옆에는 차가 멈춰 서는 소리를 듣고 내가 황급히 보자기로 덮어 둔 종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색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 등사 원지가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 있었고, 그는 몇 번이나 그 보자기를 반듯하게 정돈하였습니다. 그의 보고서에는 요원들이 집이나 사람들에게서 금지된 출판물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원들은 아버지를 바이아마레로 끌고 갔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위해 열렬히 기도하면서 그날 밤 우리를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며칠 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일이 있고 오래 지나지 않아, 출판물들을 베껴 쓰고 있을 때 또다시 집 밖에서 차가 멈춰 서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불을 끄고서 가려 놓은 창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는데, 제복을 입고 반짝거리는 견장을 단 사람 몇 명이 차에서 내려 길 건너편에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밤에 그들은 다른 팀과 교대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생각한 대로 보안대의 비밀 요원임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사하는 일을 계속하였고, 들키지 않도록 집 뒤편의 정원을 통해 출판물들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와 적들 사이에 있는 도로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 서 있었던 구름 기둥과 같단다.” (탈출 14:19, 20) 나는 실제 체험을 통해 아버지의 말이 정말 맞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43, 144면 네모와 삽화]

배기 파이프가 부서져서 무사하였다

트라이안 키라

출생: 1946년

침례: 1965년

약력: 금지령 아래 있던 시절에 출판물 생산과 운반을 책임 맡은 형제들 가운데 한 사람.

여름철의 어느 일요일에 나는 아침 일찍 차에다 여덟 개의 출판물 가방을 실었습니다. 가방을 트렁크에 모두 실을 수가 없어서 뒷 좌석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남은 가방을 실은 다음 그 위에다 담요를 덮고 맨 위에 베개를 던져 두었습니다. 차 안을 보면 누구라도 우리 가족이 해변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트렁크에 있는 가방 위에도 담요를 덮어 두어 예방 조처를 하였습니다.

우리 다섯 명—아내와 아들 둘과 딸 하나와 나—은 여호와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를 한 다음 출판물을 배달하기 위해 티르구무레슈와 브라쇼브를 향해 갔습니다. 길을 가면서 우리는 함께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100킬로미터 정도 갔는데 도로 여기저기에 움푹 파인 곳이 많이 있었습니다. 차 안에 잔뜩 실어 놓은 것 때문에 서스펜션이 눌려서, 배기 파이프가 도로에 있던 무엇인가에 부딪혀 떨어져 나갔습니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떨어져 나간 파이프를 주워서 트렁크를 열고 예비 타이어 옆의 담요 위에다 놓아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면서 길을 갔습니다!

루두슈 마을에서 경찰관이 우리를 세워 우리 차가 도로 주행에 적합한지 검사하였습니다. 경찰관은 엔진 번호를 확인하고, 경적, 와이퍼, 라이트 등을 검사해 본 다음 예비 타이어가 있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나는 차 뒤편으로 걸어가면서 머리를 숙여서 차창을 통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해요. 이제 여호와께서만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어요.”

트렁크를 열자 경찰은 곧바로 부서진 배기 파이프를 가리키며 “이게 뭐요?” 하고 묻더니 “벌금을 내야겠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경찰은 흠을 찾아내어 만족해하면서 검사를 마쳤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트렁크를 닫았습니다. 벌금을 내면서 이때처럼 행복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별일이 없었고 형제들은 출판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47-149면 네모와 삽화]

보안대와 맞닥뜨리다

비오리카 필리프

출생: 1953년

침례: 1975년

약력: 1986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였고 현재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아우리카 언니와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을 때 가족은 우리를 모질게 대하였습니다. 고통스럽긴 하였지만 그것은 장차 보안대와 맞닥뜨릴 때를 대비해 우리를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1988년 12월의 어느 날 저녁에 보안대와 한 번 맞닥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헝가리 국경에서 멀지 않은 오라데아 시에서 언니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번역 작업을 감독하고 있는 형제의 집에 들어갔을 때, 내 손가방 안에는 내가 교정을 보고 있던 잡지 한 부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보안대 요원들이 그곳을 수색하고 있으며, 거주자들과 모든 방문객을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는 가방에 있던 잡지를 들키지 않고 태울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요원들은 더 조사하기 위해 나와 다른 증인들을 보안대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밤새 나를 심문하였고 다음 날에는 내 법적 거주지인 우일레아쿠데문테 마을 근처의 작은 집을 수색하였습니다. 내가 그곳에 살지는 않았지만 형제들은 지하 활동을 위한 물품들을 보관하는 곳으로 그 집을 사용하였습니다. 요원들은 그런 물품들을 발견하고 나를 다시 보안대로 끌고 가서 그 물품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물품들과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말하게 하려고 나를 고무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나는 매질을 인내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하였습니다. 평온함이 나를 감쌌고 매번 맞고 나서 몇 초만 지나면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너무 부어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저녁 나는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돈이 한 푼도 없었고 배가 몹시 고팠으며 기진맥진하였습니다.

나는 큰 버스 터미널로 걸어갔는데, 보안대 요원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심문자에게 내가 살고 있던 곳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니와 가족이 위험해질까 걱정이 되어서 곧장 언니 집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여호와께 간청하면서 먹을 것이 몹시 필요하며 내 침대에서 자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청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터미널에 도착해 보니, 버스가 막 떠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버스 요금이 없었지만 뛰어가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우연히도, 그 버스는 나의 집이 있는 마을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보안대 요원 역시 버스에 타서 버스가 어디로 가는지 내게 묻고는, 버스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보아 우일레아쿠데문테에서 다른 요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운전사는 내가 버스에 타고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우일레아쿠데문테로 가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났습니다. 집에는 음식도 없고 침대조차 없었기 때문에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걱정거리들을 여호와께 털어놓고 있는데, 오라데아 외곽에서 운전사가 친구를 내려 주기 위해 버스를 세웠습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도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버스가 떠나자 행복한 느낌이 밀려들었고, 나는 아는 형제의 아파트를 향해 조심스레 갔습니다. 내가 막 도착하였을 때 그 형제의 아내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음식인 구야슈 스튜를 조리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같이 저녁을 먹자고 나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언니 집으로 갔고 내 침대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기도로 구했던 두 가지 즉 좋은 식사와 내 침대를 내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정말 놀라우신 분입니다!

[155면 네모]

청소년들이 영적인 초점을 유지하다

박해받던 기간에 청소년 그리스도인들은 칭찬할 만한 충절의 기록을 쌓았으며, 많은 청소년들이 좋은 소식을 위해 자유를 잃게 될 위험도 무릅썼다. 이제 그들은 다른 종류의 시험에 직면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일부 청소년들은 경계를 늦추어 버렸다. 하지만 다른 청소년들은 초점을 계속 유지해 왔다. 예를 들어, 큼피아투르지에 있는 고등학교의 청소년들은 오전 쉬는 시간에 함께 일용할 성구를 토의한다. 그들은 학교 뜰이나 운동장에서 성구 토의를 하며, 가끔 다른 학생들도 참석한다.

한 청소년 자매는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과 일용할 성구를 복습하는 것은 내게 피난처와 같아요. 여호와를 섬기지 않는 학교 아이들에게서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요. 또한 여호와의 증인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어 격려를 받아요.” 교장과 일부 교사들은 이 훌륭한 청소년들을 칭찬하였다.

[160면 네모]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다

2003년 5월 22일 목요일에 루마니아의 문화·종무부에서는 1990년 4월 9일에 설립된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조직이 정부에서 인가한 법인체임을 다시 확인하는 부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은 승인된 종교 단체들에게 주어지는 모든 법적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전파하고 왕국회관을 건축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다. 이러한 인가는 수년간의 많은 법적 투쟁을 통해 얻은 결과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80, 81면 도표와 그래프]

루마니아 연대표

1910

1911년: 카로이 서보와 요제프 키시가 미국에서 돌아오다.

1920년: 클루지나포카에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이곳에서 구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헝가리의 활동을 감독하다.

1924년: 클루지나포카에 인쇄실이 포함된 지부 시설을 매입하다.

1929년: 독일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가 후에 스위스의 중앙 유럽 사무실의 감독을 받다.

1938년: 정부가 지금의 부쿠레슈티에 있던 루마니아 사무실을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시키다.

1940

1945년: 루마니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협회가 등록되다.

1946년: 약 1만 5000명이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최초의 전국 대회에 참석하다.

1947년: 8월과 9월에 알프레트 뤼티만과 마르틴 마기아로시가 루마니아를 돌아보다.

1949년: 공산 정권이 여호와의 증인을 금지하고 협회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다.

1970

1973년: 스위스 지부의 감독을 받아 오다가 오스트리아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다.

1988년: 통치체의 대표자들이 루마니아를 방문하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다.

1990년: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 인가를 받다. 대회들이 개최되다.

1991년: 루마니아어 「파수대」가 총천연색으로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되다.

1995년: 루마니아 지부 사무실이 부쿠레슈티에 다시 개설되다.

1999년: 루마니아에서 봉사 훈련 학교 제1기 학급이 열리다.

2000

2000년: 루마니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발표되다.

2004년: 네그레슈티오아슈에서 최초의 대회 회관이 봉헌되다.

2005년: 3만 8423명의 전도인이 루마니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40,000

20,000

1910 1940 1970 2000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우크라이나

몰도바

루마니아

사투마레

오라데아

아라드

네그레슈티오아슈

바이아마레

마라무레슈

브레비

비스트리차

토플리차

클루지나포카

티르구무레슈

오크나무레슈

트란실바니아

카르파티아 산맥

프러터우치

벌커우치

이번커우치

프루트 강

몰다비아

브라쇼브

서첼레

미질

부쿠레슈티

왈라키아

갈라치

브라일라

도나우 강

도브루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66면 전면 삽화]

[69면 삽화]

1911년에 카로이 서보와 요제프 키시는 왕국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70면 삽화]

파라스키바 칼마르(앉아 있는 여자), 남편과 여덟 자녀와 함께

[71면 삽화]

가브릴러 로모체아

[71면 삽화]

엘레크 로모체아와 엘리사베트 로모체아

[77면 삽화]

클루지나포카에서 새로운 사무실을 건축하면서, 1924년

[84면 삽화]

박해가 거세지자 여러 가지 이름으로 출판물을 생산하였다

[86면 삽화]

활동을 돕기 위해 그리스에서 온 니쿠 팔리우스

[89면 삽화]

녹음된 성서 강연을 듣는 모습, 1937년

[95면 삽화]

마르틴 마기아로시와 마리아 마기아로시 부부(앞쪽), 그리고 엘레나 알부와 팜필 알부 부부

[102면 삽화]

바이아마레에서 열린 순회 대회, 1945년

[105면 삽화]

1946년에 열린 전국 대회의 포스터

[111면 삽화]

미하이 니스토르

[112면 삽화]

바실레 사바드슈

[117면 삽화]

보안대가 사용한 도청 장치

[120면 삽화]

도나우 강 삼각주에 있던 페리프라바 강제 노동 수용소

[133면 삽화]

‘방아’

[134면 삽화]

집 아래의 비밀 지하 작업장에 있는 베로니카 벤타루와 니콜라에 벤타루

[138면 삽화]

도이나 체퍼나루와 두미트루 체퍼나루

[138면 삽화]

페트레 란카

[141면 삽화]

1980년대에 열린 대회들

[150면 삽화]

루마니아에서 열린 최초의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 1993년

[152면 삽화]

로베르토 프란체스케티와 이멜다 프란체스케티 부부

[156, 157면 삽화]

교직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6년 “경건한 평화의 사자” 국제 대회에 수천 명이 참석하였다

[158면 삽화]

(1) 일곱 개의 왕국회관이 있는 건물, 티르구무레슈

(2) 루마니아 지부, 부쿠레슈티

(3) 대회 회관, 네그레슈티오아슈

[161면 삽화]

지부 위원회, 왼쪽 뒤부터 시계 방향으로: 다니엘레 디 니콜라, 존 브렌카, 가브리엘 네그로이우, 두미트루 오울, 이온 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