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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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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분주한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들의 피부색이 짙은 검은색부터 아주 흰색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 소음 사이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언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높이 솟은 건물들이 뜨거운 햇볕을 가려 생긴 그늘에는 과일이나 의복이나 그 밖의 호기심을 끄는 물건들을 파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원한다면 잠깐 동안 길가에서 이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다양한 4400만 명이 넘는 인구 가운데 전형적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을 분간해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전체 인구의 약 75퍼센트를 차지하는 흑인 원주민들은 줄루족, 코사족, 소토족, 페디족, 츠와나족, 그리고 그 외의 몇몇 소규모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백인들은 주로 영어와 아프리칸스어를 합니다. 백인들 중에는 17세기 중엽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의 후손과 그 뒤를 이어 이주해 온 프랑스 위그노 교인들의 후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초에 온 영국인들의 후손도 있습니다.

이 나라에는 대규모 인도인 공동체도 있는데, 그들은 나탈 주(州)(현재의 콰줄루나탈)의 사탕수수 밭에서 일한 노동자들의 후손들입니다. 이처럼 많은 인종과 문화가 혼합되어 있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적절하게도 ‘무지개 나라’라고 불립니다.

과거에는 인종 간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 나라의 인종 격리 정책은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았습니다. 최근에는 인종 격리 정책을 철폐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들어섬에 따라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는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영화관이나 식당 등 어떤 공공장소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으며 모두가 자유롭게 어울려 지낼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재정적으로 뒷받침만 된다면 인종에 관계없이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들떠 있던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인종 격리 정책이 야기한 문제들을 어느 정도까지 바로잡아 줄 것입니까? 그렇게 하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것입니까? 10년이 지난 지금도 심각한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정부가 직면하고 있는 큰 문제들 중에는 범죄의 증가, 41퍼센트에 달하는 실업률, 5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에이즈 감염자들 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인간 정부도 이러한 문제들을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경치

문제들이 많지만, 이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은 여전히 관광객들을 끌어들입니다. 햇빛이 눈부신 아름다운 해변, 인상적인 산악 지역, 다양한 하이킹 코스 등 관광 명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매장들과 식당들을 볼 수 있습니다. 기후 또한 온화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참으로 매력적인 곳입니다.

다양한 야생 동식물들은 주된 볼거리입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약 200종의 포유류, 800종의 조류, 2만 종의 종자식물을 자랑합니다. 유명한 크루거 국립공원과 같은 금렵 구역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립니다. 그곳에서는 야생 상태의 아프리카 5대 동물 즉 코끼리, 코뿔소, 사자, 표범, 물소를 볼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여러 숲들을 방문해 보는 것은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입니다. 평온한 숲 속에서 이국적인 새들과 곤충들 그리고 희귀한 양치식물과 이끼류와 꽃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옐로우드라고 하는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아주 작은 씨에서 그처럼 큰 나무가 자란다는 사실에 놀랄 것입니다. 이 나무들 중에는 50미터까지 자라고 천 년을 사는 나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일 세기 동안 이 나라에는 다른 종류의 씨가 뿌려져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 씨는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입니다. 시편 필자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을 큰 나무에 비하여 “의로운 자는 야자나무가 피어나듯 피어날 것이며 레바논의 실삼나무가 자라듯 크게 자랄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시 92:12) 그와 같은 의로운 사람은 가장 오래된 옐로우드보다도 더 오래 살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 3:16.

적은 씨로부터의 성장

19세기 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전쟁과 정치적 대립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같은 세기 후반에 발견된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 광산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신」(The Mind of South Africa)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앨리스터 스파크스는 “목가적인 국가가 하룻밤 만에 산업 국가로 바뀌면서 시골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들여 그들의 생활을 변화시켰다”라고 설명합니다.

1902년에 성서 진리의 씨는 네덜란드 출신인 한 교직자의 짐 속에 실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온 상자들 중 하나에는 당시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 얼마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출판물들은 클레르크스도르프에 살던 프란스 에버손과 스토펠 푸리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들은 읽은 내용이 진리임을 깨닫고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5대에 걸친 푸리 일가의 친족들 80명 이상과 에버손 일가의 자손들 여러 명이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었습니다. 푸리의 자손들 중 한 명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10년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출신의 윌리엄 W. 존스턴이 성경 연구생의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라는 지시를 받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왔습니다. 당시에 아마 30대 초반이었을 존스턴 형제는 신중하고 믿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반에 있는 한 건물의 작은 방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습니다. 이 사무실은 사실상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전체에 이르는 매우 방대한 구역을 돌보아야 하였습니다.

당시의 초창기 시절에 좋은 소식은 주로 백인 사회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당시 성경 연구생의 출판물은 네덜란드어와 영어로만 구할 수 있었으며, 몇몇 출판물이 현지 언어들로 번역된 것은 여러 해가 지난 후의 일입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네 종류의 밭 즉 백인, 흑인, 유색인 *, 인도인 공동체에서 활동이 진척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911년 이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 공동체에서 얼마의 진전이 있었습니다. 요하네스 창게는 더반 근처에 있는 고향 은드웨드웨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성서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는 영어로 된 「성경 연구」를 사용하여 정기적으로 작은 집단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이 집단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첫 번째 흑인 회중이 된 것 같습니다.

이 집단은 지방 교직자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웨슬리파 감리교 신자들은 이 집단의 성원들에게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집단 성원들은 자신들이 성서에 있는 것들을 가르친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차례 토의가 있은 후에 집단 성원들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그 집단을 만나서, 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집회를 사회하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성경 연구생들의 수는 많지 않았지만 전파 활동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12년의 보고에 의하면 총 6만 1808부의 전도지가 배부되었습니다. 또한 1913년 말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11개 신문에 유명한 성경 연구생인 C. T. 러셀의 설교가 네 개 언어로 실렸습니다.

전시에 이룬 신권적 성장

1914년은 전 세계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던 작은 그룹의 여호와의 종들에게도 의미심장한 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기에 하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로 연례 보고를 보내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 연례 보고를 제출할 때, 다음번엔 휘장 너머에서 본부로 보고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쓴 바 있습니다. 그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덧붙여 이렇게 썼습니다. “지난해는 아프리카에서 추수 활동이 시작된 이래 가장 바쁜 해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기쁘게 그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더 큰 추진력을 얻은 결과 1915년 보고에 따르면 「성경 연구」가 3141부나 배부되었는데, 그것은 전년도에 비해 두 배가량 되는 수였습니다.

이 시기에 진리를 발견한 사람으로 유능한 변호사인 야피 테론이 있습니다. 그는 수십 년 전에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출판물에 관해 다룬 더반의 한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기사는 1914년 이후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성서 예언들을 설명하는 「성경 연구」 시리즈에 예언되어 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야피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이 책들을 꼭 가지고 싶어서 서점이란 서점은 다 뒤져 보았지만 허사였고 결국 더반의 지부 주소로 편지를 쓰고 나서야 「성경 연구」 총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숨겨진 것들’을 이해하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시간이 지나 야피는 침례를 받았고 1921년 병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사람들에게 열심히 성서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1914년 4월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로 만국 성경 연구생의 대회가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렸습니다. 34명이 참석하였고, 그 가운데 16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16년에는 “창조 사진극”이 들어와 전국에 걸쳐 좋은 반응이 있었습니다. 신문인 「케이프 아르거스」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성서 영화 시리즈의 상영 성공은 영화를 들여온 만국 성경 연구회의 수완과 예지력을 여실히 보여 준다.” “사진극”이 야외에 미친 영향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단기간에 넓은 지역에 훌륭한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그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곳곳을 여행하며 약 8000킬로미터를 다녔습니다.

그해에 러셀 형제가 사망하자 다른 곳에서와 같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전파 활동이 일시적으로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러셀의 사망 후에 있었던 변화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참석하던 회중에 불화를 일으켰습니다. 예를 들어, 더반에서는 회중 성원 대다수가 회중에서 떨어져 나가 별도로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들은 “연합 성경 연구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원래 회중에 남은 사람은 단 12명뿐이었고 대부분이 자매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갓 침례받은 헨리 뮈르달이라는 청소년에게 매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반대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였고, 어머니는 많은 사람이 떠난 회중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헨리는 그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하고 기도한 끝에 회중에 남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늘 그렇듯이 떨어져 나간 집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17년에 지부 사무실은 더반에서 케이프타운으로 옮겼습니다. 전도인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였습니다. 그때 즈음에는 유럽계 성서 연구생의 수가 200에서 3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되며, 흑인 사회에서도 여러 회중이 잘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1917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은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모국어로 된 출판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지 형제들이 ···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 형제들이 일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왔다가 흑인 밭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한 형제들 중에는 제임스 네이피어와 매코피 응굴루가 있습니다.

진리를 위해 싸운 두려움 없는 전사들

그 초창기 시절에 소규모의 복음 전파자들은 두려움 없이 진리를 변호하였습니다. 노던트란스발(현재의 림포포 주)에 있는 닐스트룸에서 두 명의 남학생이 「성경은 지옥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What Say the Scriptures About Hell?)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자에 관한 진리를 알게 되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폴 스미트 *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생인 우리 둘이서 교회의 교리가 거짓임을 명명백백하게 알리자 닐스트룸은 마치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직자들은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중상자이자 박해자라는 평판에 걸맞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주간 설교는 수개월 동안 심지어는 수년 동안 이 ‘거짓 종교’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4년경에 닐스트룸에는 13명의 활동적인 증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1917년에 피트 데야헤르는 스텔렌보스에 있는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학교의 한 학생이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출판물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점을 우려한 교회 당국은 피트에게 그 학생과 이야기를 해 보고 ‘기독교 학생회’의 주간 성경 연구회에 참석해 보도록 그 학생을 초대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당국이 생각하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피트 자신이 진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피트는 교수들과 영혼과 지옥과 그 밖의 주제로 토론을 벌였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후에 피트와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신학 박사 드와이트 스나이만이 공개 토론을 벌였고 1500명의 학생들이 청중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아티 스미트 형제는 토론 과정을 이와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피트는 학식 있는 이 박사의 주장을 모두 논박하였고 성서를 사용하여 교회의 교리가 비성서적임을 증명했습니다. 학생 중 한 명은 자신의 소견을 밝히기를, ‘피트 데야헤르가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의 말이 옳다고 맹세했을 것입니다. 모든 점을 성서 구절을 대어 증명하긴 했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인종의 공동체에 씨를 뿌리다

스텔렌보스 인근의 작은 읍인 프란스후크를 방문했을 때 존스턴 형제는 그곳에 살고 있는 유색인 주민 중 몇 사람을 만났습니다. 수년 전에 아담 반 디먼이라는 현지 학교 교사가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서 나와 소규모 종교 집단을 구성한 일이 있었습니다. 존스턴 형제는 그를 방문하였으며, 반 디먼과 그의 동료들은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반 디먼과 그의 몇몇 동료들은 진리를 받아들였고 알게 된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활동적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유색인 밭에 왕국의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리는 훌륭한 기초가 놓였습니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G. A. 대니얼스는 그때 진리를 배워서 일평생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후에 유색인인 데이비드 테일러 형제 또한 이 밭에서 열심히 성서 진리를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성경 연구생과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에 그는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모든 유색인 회중과 격지 집단을 방문하는 일을 맡았는데, 당시 그는 스물네 살이었습니다. 그는 맡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기차나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룬 신권적 성장

1918년에 존스턴 형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고 헨리 앙케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헨리는 이전에 나탈 주 의회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은퇴하였고 젊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후 6년 동안 임명을 훌륭하게 완수하였습니다.

전시의 혼란과 조직상의 조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성서 진리에 열렬히 호응하면서 성장이 계속되었습니다. 1921년에 한 철도 보수반의 작업반장으로 일하던 크리스티안 펜터는 철로 밑에 종이 한 장이 끼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전도지였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그 전도지를 읽고 사위인 아브라함 셀리에에게 달려갔습니다. 크리스티안은 “여보게, 나는 오늘 진리를 발견했네!” 하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을 더 구하여 부지런히 연구하였습니다. 둘 다 헌신한 증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게 도왔습니다. 그들의 자손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이 100명이 넘습니다.

큰 확장

1924년, 인쇄기 한 대가 케이프타운으로 운송되어 왔습니다. 또한 도움을 주기 위해 영국에서 형제 두 명이 왔는데, 그들은 지부 감독자가 된 토머스 월더와 몇 년 후 그의 뒤를 이어 지부 감독자가 된 조지 필립스 *입니다. 필립스 형제는 거의 40년 동안 그 책임을 맡았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왕국 활동을 추진하고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1931년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하는 결의문이 발표되면서 복음 전파 활동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습니다. 그때 「천국—세계의 희망」 소책자가 발표되었는데, 거기에는 그 결의문 전체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소책자는 전국 곳곳에 배부되었고 구역 내에 있는 모든 교직자와 정치인과 유명한 사업가들에게 소책자를 전하기 위한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

1933년에는 케이프타운에 있는 더 큰 건물을 세내어 지부 사무실을 옮겼으며, 1952년까지 그곳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그즈음에 베델 가족은 21명으로 늘어 있었습니다. 초창기 베델 가족은 형제들의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매일 사무실과 인쇄실로 출퇴근하였습니다. 매일 아침 일하기 전에 그들은 인쇄실에 딸린 탈의실에 함께 모여 일용할 성구를 토의하였습니다. 그 후 함께 주기도문을 암송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집이 너무 멀어서 점심 식사를 하러 집까지 다녀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매식을 할 수 있게 1실링 6펜스(남아프리카 공화국 화폐로 15센트)가 지급되었습니다. 그 돈은 기차역 간이식당에서 으깬 감자 한 접시와 작은 소시지 하나를 사거나, 빵 한 덩어리에 과일 몇 개를 살 만한 돈이었습니다.

1935년에 유능한 인쇄 기술자인 앤드루 잭이 케이프타운 지부로 파견되어 그곳의 인쇄 일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에 늘 밝게 웃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 그는 발트 삼국 즉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전 시간 봉사를 하였습니다. 앤드루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한 후 인쇄 장비를 더 구하였고, 오래지 않아 혼자서 인쇄 시설을 최고 속도로 가동하게 되었습니다. 1937년에는 첫 번째 자동 인쇄기인 프론텍스가 설치되었습니다. 프론텍스 인쇄기는 40년이 넘게 아프리칸스어 잡지를 비롯하여 수백만 부의 광고지와 양식들을 생산해 냈습니다.

앤드루는 사망할 때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노년에도 정기적으로 야외 봉사에 온전히 참여함으로 베델 가족에게 훌륭한 모범을 남겼습니다.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자였던 앤드루 형제는 58년 동안의 헌신적인 봉사를 마치고 1984년에 89세의 나이로 지상 생애를 마쳤습니다.

전시의 놀라운 성장

제2차 세계 대전은 유럽에서만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많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얻고 신병들을 모집하기 위해 전쟁 소식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당시 대중의 강한 애국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1940 봉사 연도에 881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였는데, 그것은 그 전해의 최고 전도인 수 555명에서 58.7퍼센트가 더 증가한 수였습니다!

1939년 1월에 「위안」(현재의 「깨어라!」)지가 아프리칸스어로는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위안」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쇄한 최초의 잡지였습니다. 이 잡지를 인쇄하기 위한 활자는 수작업으로 조판했기 때문에 작업 속도가 더뎠습니다. 오래 지나지 않아 「파수대」도 아프리칸스어로 발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형제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나중에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매우 시기적절한 결정이었습니다. 라이노타이프 한 대와 접지기가 설치되었습니다. 아프리칸스어 「파수대」는 1940년 6월 1일호가 첫 호였습니다.

아프리칸스어와 네덜란드어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형제들은 아프리칸스어 독자들이 읽을 네덜란드어 「파수대」를 네덜란드에서 수입했습니다. 하지만 1940년 5월에 히틀러가 네덜란드를 침공하여 그곳의 지부가 갑자기 폐쇄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프리칸스어 「파수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쇄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잡지를 한 호도 빠짐없이 받게 된 것입니다. 매달 잡지 배부 수는 1만 7000부까지 증가하였습니다.

검열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다

1940년에는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의 압력과 우리의 중립 입장에 대한 정부의 우려로 인해 예약자에게 보내는 「파수대」와 「위안」이 검열 당국에 의해 압수를 당하였습니다. 또한 이 출판물들을 금지한다는 공고가 났습니다. 외국으로부터 우송되어 오던 잡지와 출판물도 도착하는 즉시 압수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여전히 제때에 영적 양식을 받았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항상 영어 「파수대」를 받아, 잡지를 조판하고 인쇄하였습니다. 조지 필립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금지령하에서 우리는 ···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아주 놀라운 증거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파수대」를 한 호도 빠뜨리지 않고 받아 보았습니다. 우리 수중에 들어온 잡지가 단 한 부뿐일 때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와 짐바브웨]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현재는 모잠비크]에 살거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외떨어진 농장에 사는 예약자들이, 또는 케이프타운을 경유하는 배를 탄 방문객이 필요한 잡지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1941년 8월에는 지부 사무실에서 나가는 모든 우편물이 아무 설명도 없이 검열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습니다. 그해 말에 내무부 장관은 국내에서 조직의 모든 출판물을 압수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느 날 오전 10시에 범죄 수사과에서 트럭을 몰고 지부 사무실로 와서 출판물을 모두 실어 가려고 하였습니다. 필립스 형제가 명령서를 확인해 보니, 명령서가 엄밀히 규정에 따라 작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관보」(Government Gazette)에 따르면, 압수할 책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스 형제는 범죄 수사과 요원들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다음, 변호사에게 연락하여 내무부 장관이 출판물을 압수하지 못하도록 긴급하게 대법원에 집행 정지 신청을 하였습니다. 그의 신청은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오 무렵에 집행 정지 명령을 받아 내었으며, 경찰은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닷새 후에 내무부 장관은 압수 명령을 취소하고, 법적 수속을 하는 데 든 돈을 지불해 주었습니다.

우리 출판물의 금지와 관련된 법적 투쟁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자기 집에 출판물을 숨겼습니다. 야외에서 사용할 출판물이 별로 없었지만, 형제들은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성서를 연구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서적을 빌려 주곤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943년 말 무렵에 새로운 내무부 장관이 취임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금지령 해제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1944년 초에 금지령이 해제되었고 당국에 의해 압수되었던 많은 양의 출판물들이 지부 사무실로 배달되었습니다.

왕국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했던 참숭배의 반대자들은 과연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1945 봉사 연도의 통계를 보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충실한 백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축복하셔서 활동이 유례없이 크게 진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평균 2991명의 전도인이 37만 264부의 출판물을 전하였고 4777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이 수치는 1940년의 최고 전도인 수인 881명에 비할 때 매우 두드러집니다.

신권 훈련의 유익

1943년에 도입된 신권 전도 과정(현재는 신권 전도 학교)을 통해 많은 형제들이 훈련을 받아 공개 연사의 자격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야외 봉사에서 효과적이 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1945년 무렵에는 훈련받은 연사들이 충분하게 되었고, 공개 집회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광고지와 광고판을 사용하여 강연을 광고하였습니다.

피트 벤첼 *은 당시 젊은 파이오니아였습니다. 그는 초창기 때인 당시를 추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파이오니아 짝인 프란스 멀러와 함께 베레니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1945년 7월에 우리의 공개 집회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앞으로 있을 네 개의 강연 중 두 개의 강연을 준비하였습니다. 나는 청중에게 연설할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한 달 내내 점심시간마다 강가로 내려가 한 시간 동안 강과 나무들을 청중 삼아 연설을 연습하였습니다.” 첫 강연은 베레니깅에서 있었고 37명의 관심 가진 사람들이 참석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기초가 되어 나중에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피트는 아내 리나와 함께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다가 베델로 초대되었습니다. 현재 지부 위원인 피트는 봉사의 직무에서 열심을 유지하였으며 지금도 부지런히 성서를 연구합니다. 59년 동안 전 시간 종으로서 여호와를 섬긴 리나는 2004년 2월 12일에 사망하였습니다.

사랑에 찬 지원이 베풀어지다

브루클린 본부의 감독하에 또 다른 발전이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형제들의 종을 임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순회 감독자에 해당합니다. 바쁜 일과를 소화할 수 있는 건강하고 활기찬 독신 남자들이 형제들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처음에 큰 회중들은 이삼일간, 작은 집단은 단 하루만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임명받은 형제들은 여행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했으며, 종종 불편한 시간에 기차나 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그들은 방문 기간 동안 회중 기록들을 주의 깊이 살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주된 목적은 형제들과 함께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봉사의 직무를 위해 그들을 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1934년 노던 트란스발에서 학교 교사로 일하던 때에 진리를 알게 된 헤르트 넬은 1943년에 형제들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전도인들을 도왔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충실한 봉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키가 크고 마른 체격에 단호한 인상을 지닌 그는 진리를 위한 열심 있는 투사였습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것으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또한 사람들에게 큰 사랑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오전 일곱 시부터 저녁 일고여덟 시까지 쉬지 않고 봉사하곤 하였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회중들을 방문할 때에는 밤이든 낮이든 몇 시에라도 기차를 타고 가서 회중 크기에 따라 며칠을 회중과 함께하다가 다음 회중으로 옮기곤 하였습니다. 그는 매주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1946년에 베델로 초대되어 아프리칸스어 번역자로 일하게 되었고 1991년에 사망하기까지 계속 그곳에서 충실하게 봉사하였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봉사한 마지막 기름부음받은 형제였습니다. 1982년부터 1985년 사이에 다른 충실한 기름부음받은 형제들인 조지 필립스, 앤드루 잭, 제럴드 개라드도 지상 생애를 마쳤습니다.

관대하게 자신을 바친 사람들

여호와의 종들은 회중을 영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여행하는 감독자 부부의 봉사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예를 들어 1965년에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고 현재는 정규 파이오니아인 루크 들라들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2006년 현재 나는 81세이고 아내는 68세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산을 오르내리고 강을 건너다니며 우리 구역에서 좋은 소식을 널리 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50여 년을 야외에서 보냈습니다.”

앤드루 마손도는 1954년에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965년에 나는 보츠와나를 임지로 받았는데, 그곳은 마치 선교인 임지 같았습니다. 그 나라는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기근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와 아내 조르지나는 저녁을 굶은 채 잠자리에 들고 아침을 거른 채 오전 야외 봉사에 나가는 사람들의 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사는 대개 점심 한 끼밖에 먹지 못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서는 지역 감독자로 임명되어 어니스트 팬더척 형제에게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헤어질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 위로 고개를 쳐들지 말고,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서 낟알이 잘 여물었음을 나타내는 곡식처럼 되십시오.’”

최초의 순회 대회

1947년 4월에는 더반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순회 대회가 열렸습니다. 길르앗 제5기 학급을 졸업하고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파견된 선교인 밀턴 바틀릿은 대회에 참석한 형제들을 보고 느낀 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흑인 증인들의 태도를 보고 정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들은 외모가 청결하고 수수하고 단정했으며, 진실하고 간절하게 진리를 더 배우고자 하였고, 야외 봉사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흑인층에서 관심자들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도움이 베풀어졌습니다. 1949년 1월 1일자로 줄루어 「파수대」 첫 호가 발행되었습니다. 줄루어 「파수대」는 케이프타운의 지부 사무실에 있는 작은 수동 등사기로 인쇄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산뜻하고 매력적인 잡지는 아니었지만, 값진 영적 양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1950년에는 여섯 개 언어로 문맹 퇴치반이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열심 있는 형제 자매들이 이 문맹 퇴치반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 전파 활동이 진전됨에 따라 적합한 집회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48년 케이프타운 인근의 스트랜드를 임지로 받은 한 파이오니아는 거기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왕국회관 건축을 조직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현지 자매 한 명이 건축 비용을 대어 주었습니다. 조지 필립스는, “이 새로운 회관에 바퀴를 달아 전국 곳곳으로 끌고 다니면서 형제들에게 왕국회관을 더 짓도록 격려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조직적으로 전국에 왕국회관 건축이 시행되기까지는 몇 해가 더 지나야 했습니다.

인도인 공동체의 격려적인 반응

1860년부터 1911년 사이에 인도의 계약 노동자들이 나탈 주의 사탕수수 밭에서 일하기 위해 이주해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계약이 끝난 후에도 남기로 하였고, 상당한 규모의—현재는 백만 명이 넘는—인도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1950년대 초에는 인도인 공동체 내에서 성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1915년에 태어난 벨루 나이커는 9남매 중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사탕수수 밭에서 일했으며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성서 수업을 받으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청년 시절에 누군가로부터 성서 한 부를 받았습니다. 그는 매일 성서를 읽어서 4년 만에 성서를 통독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태 5:6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진리와 의에 굶주린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벨루는 증인을 만나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5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로 침례받은 인도인 중 한 사람입니다. 당시 그는 하우텡 주 액턴빌에 있는 힌두교 공동체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심하게 반대하였으며 한 유명한 사람은 벨루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벨루는 성서 진리에 대한 확고한 입장 때문에 한 드라이클리닝 업체의 관리인 직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루는 1981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의 훌륭한 모범은 결실을 맺어 (인척을 포함하여) 4대에 걸쳐 190여 명의 친족이 현재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고펄 쿱새미는 열네 살 때 처음 고모부인 벨루로부터 진리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성서 연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고모부가 어린 우리들 몇 명에게 성서에 관해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힌두교인이라 성서가 생소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읽어 본 내용 얼마는 이치적인 것 같았습니다. 하루는 고모부가 회중 서적 연구에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따라가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고모부는 좋다고 했고, 그 후로 나는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서 공공 도서관에 가서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 몇 부를 찾았습니다. 가족의 반대가 심했지만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나를 버린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라는 시편 27:10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였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 때인 195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고펄은 아내 수실라와 함께 현재 연합하고 있는 회중의 주임 감독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부부는 약 150명을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자 고펄 형제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친족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 중 여러 사람들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는 자영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가 시간을 봉사의 직무에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4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습니다. 열심히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였고 관심 가진 사람을 찾으면 부지런히 재방문하였습니다.”

사랑과 인내가 결실을 맺다

도린 킬고르와 이저벨라 엘러레이는 길르앗을 각각 1956년과 1957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들은 더반 교외에 있는 채츠워스의 인도인 공동체에서 24년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도린은 그 구역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져야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 관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인심은 좋았습니다. 힌두교 신자들은 사람을 문간에 세워 두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종 ‘차나 한 잔 들고 가세요’라고 말했는데, 차를 마시지 않고는 다음 집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 봉사하고 나면, 찻물이 넘어올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인도인들이 그들의 뿌리 깊은 종교적 신념을 버리고 여호와의 숭배자가 될 때마다 그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저벨라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야외 봉사 중에 한 남자와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는 잡지를 받았습니다. 막 교회에 다녀온 그의 아내 다리슈니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리슈니는 아기를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즐겁게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다시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리슈니는 항상 집에 없었습니다. 후에 다리슈니의 말을 들어 보니, 내가 오면 밖으로 나가라고 목사가 말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그렇게 하면 내가 다리슈니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추리했던 것입니다. 나는 가족을 만나러 영국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도 나는 계속 다리슈니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와서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 줄 알았죠. 다시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뻐요.’ 우리는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그의 남편은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리슈니는 열심히 연구했고, 시간이 지나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리슈니가 가진 종교에서는, 결혼한 여자에게 금장식을 노란 줄에 달아서 목에 걸도록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탈리라고 부릅니다. 여자는 남편이 죽을 경우에만 탈리를 벗을 수 있습니다. 다리슈니는 전파 활동을 시작하려는 마음이 들었을 때 탈리를 벗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먼저 남편에게 물어보고 그의 반응이 어떤지 살펴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다리슈니는 그렇게 했지만 그의 남편은 탈리를 벗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다리슈니에게 참을성을 가지고 얼마간 기다린 다음 그가 기분이 좋을 때 다시 물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리슈니의 남편은 탈리를 벗어도 좋다고 동의하였습니다. 우리는 성서 연구생들에게 성서 진리를 옹호하면서 힌두교 가르침을 존중해 주고 재치 있게 처신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연구생들은 불필요하게 친구들과 친족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피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성서 연구생들이 개종하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해 주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선교 봉사를 하면서 인내하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되었는지를 묻자 도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임지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우리는 맡겨진 일에 몰두하였고 진정으로 그 일을 즐겼지요.” 이저벨라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벗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임지를 떠나게 되어 슬펐지만 건강 상태가 예전처럼 좋지가 않았지요. 우리는 베델에서 봉사하라는 친절한 초대를 감사하게 받아들였어요.” 이저벨라는 2003년 12월 22일에 사망하였습니다.

채츠워스에서 봉사한 다른 선교인들도 연로해져 감에 따라 선교인 집을 관리하거나 임지에서 계속 일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도 베델에서 봉사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에릭 쿡과 머틀 쿡 부부, 모린 스타인버그, 그리고 이제는 고인이 된 론 스티븐스가 있었습니다.

큰 공사

브루클린 본부에서 봉사하던 네이선 노어와 밀턴 헨첼이 1948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일런즈폰테인에 베델 집과 인쇄 시설을 위한 부동산을 구입하기로 결정이 났습니다. 공사는 1952년에 완료되었습니다. 베델 가족 성원들은 처음으로 한지붕 아래 모여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평판기 한 대를 포함한 가외의 인쇄 장비들이 많이 설치되었습니다. 「파수대」는 여덟 개 언어로 발행되었고 「깨어라!」는 세 개 언어로 발행되었습니다.

1959년에는 베델 집과 인쇄 시설을 확장하였습니다. 증축된 건물은 원래의 건물보다 규모가 더 컸습니다. 새로운 팀슨 인쇄기가 설치되었는데, 이 인쇄기는 지부의 첫 윤전 인쇄기였습니다.

인쇄 작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어 형제는 네 명의 젊은 캐나다 형제들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갈 것을 권하였는데, 그들은 빌 매클렐런, 데니스 리치, 켄 노르딘, 존 키콧입니다. 그들은 1959년 11월에 도착하였습니다. 빌 매클렐런과 그의 아내 메럴린은 지금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존 키콧과 그의 아내 로라는 현재 뉴욕 브루클린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켄 노르딘과 데니스 리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남아서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습니다. 그들은 계속 왕국 권익에 훌륭히 기여하고 있습니다. 켄의 두 자녀는 모두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는 관심자들을 돌보기 위해 확장된 베델과 새로운 장비가 온전히 사용되었습니다. 1952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도인 수가 1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1959년경에는 그 수가 1만 6776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인종 격리 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 연합을 유지하다

인종 격리 정책 아래서 형제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이해하려면 그 정책이 어떻게 시행되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법에 따르면 흑인, 백인(유럽인들의 후손), 유색인(혼혈인), 인도인 모두는 시내의 같은 건물 내에서 즉 같은 공장이나 사무실이나 식당에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밤에는 각 인종별로 그들의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거주 지역만큼은 인종별로 격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건물에는 백인과 다른 인종들을 위한 식당과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일런즈폰테인에 최초의 지부가 건축되었을 때 당국은 흑인, 유색인, 인도인 형제들이 백인 형제들과 같은 건물에서 살도록 허가해 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베델 가족의 대부분은 백인이었는데, 다른 인종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일할 허가를 받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델에는 12명의 흑인 및 유색인 형제 자매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현지어 번역자들이었습니다. 정부는 이 형제들을 수용하기 위해 주(主) 숙소동 뒤에 별채를 짓고 다섯 개의 방을 만들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인종 격리 정책이 더 엄격하게 적용되어 이 허가는 취소되었고, 우리의 형제들은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흑인 마을의 남자 합숙소에 머물면서 출퇴근을 해야 했습니다. 두 명의 흑인 자매들은 그 마을에 있는 증인 가정집에 기거하였습니다.

법에 의하면 이 베델 봉사자들은 백인 형제들과 함께 주(主) 식당에서 함께 식사도 하지 못하게 금지되어 있었고, 지방 자치 단체의 검사관이 그들이 법을 위반하지 않는지 감시하였습니다. 하지만 백인 형제들에게는 그들과 식사를 따로 한다는 것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식당 창문의 투명 유리를 불투명 유리로 교체하여 가족 모두가 방해받지 않고 함께 식사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1966년에 조지 필립스는 아내 스텔라의 건강 때문에 베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능한 형제인 해리 아넛이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어 2년 동안 섬겼습니다. 1968년부터는 프란스 멀러 *가 지부 감독자로, 그리고 후에는 지부 위원회 조정 위원으로 섬겼습니다.

청색 폭탄이 성장을 촉진하다

1968년 지역 대회에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발표되었습니다. 청색 폭탄이라는 애칭으로도 알려진 이 서적은 야외에서 활동의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발송부에서 매년 야외로 보내던 서적의 수가 약 9만 권이었는데, 1970 봉사 연도 중에는 44만 7000권이 된 것입니다.

1971년에 노어 형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즈음에 베델은 다시금 비좁게 되었는데, 베델 가족의 수가 68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증축이 계획되었고 형제들은 기꺼이 건축 봉사에 참여하거나 건축 비용을 기부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1972년 1월 30일에 완료되었습니다. 또 한 차례의 증축 공사는 1978년에 끝났습니다. 당시 하느님의 백성은 정부 당국자들에게 점점 더 심한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지원을 확신케 하는 이러한 모든 확장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중립의 시험

1961년 5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영국 연방에서 탈퇴하여 독립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폭력 사태가 점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국가주의를 부추겼고, 그로 인해 그해 이후로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어려운 시기가 닥쳤습니다.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군 복무가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960년대 후반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나미비아와 앙골라에서 군사 작전에 더 깊이 관여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법에 따라, 건강상의 결격 사유가 없는 모든 백인 청년들에게 군 복무가 의무화되었습니다. 병역을 거부한 형제들은 군 교도소에 90일 동안 구금되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구금된 형제들은 군장을 갖추고 헬멧을 쓰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들 중에는 마이크 마크스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군인으로 여겨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부대장인 대위는 우리에게 징벌을 내려 독방에 넣고는 배식량을 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형제들은 편지를 보내거나 받을 수 없었고 면회도 허가되지 않았으며 성서 외에는 다른 어떤 읽을거리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식사로 이틀은 하루에 빵 반 덩어리에 물만 주고 그다음 7일간은 일반 사병과 같이 배식해 주었다가 그다음 이틀은 다시 빵과 물을 주었는데, 이런 제한은 원래 교정 불능인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일반 사병용 식사도 종종 질이나 양이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형제들의 충절을 꺾으려는 온갖 시도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각각 작은 감방에 갇혔는데, 한동안은 샤워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대신 형제들은 각각 변기로 쓸 양동이 하나와 씻을 때 쓸 양동이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다시 샤워를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키스 위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루는 한겨울에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자, 헌병들이 매트리스와 담요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군복 외에는 다른 옷을 입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는 반바지와 속셔츠 차림으로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얼음장같이 찬 콘크리트 바닥에 물기가 남아 있는 수건을 깔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주임 상사는 밝고 건강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우리의 하느님이 그 추운 겨울밤에 우리를 돌보아 주신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습니다.”

90일간의 구금이 끝날 때가 되면 형제들은 군복을 입지도, 군 교도소에 수감된 군인들과 함께 훈련을 받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또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구금되었습니다. 당국은 형제들이 군 복무연한인 65세가 될 때까지 재삼재사 형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72년에 강한 여론과 정치적 압력에 밀려 관련 법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군 복무 기간과 동일한 기간의 실형을 한 번만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형기가 처음에는 12개월에서 18개월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3년으로 늘어났다가 결국 6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당국은 한발 물러나 형제들이 매주 한 번 집회를 열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군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제자를 삼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태 28:19, 20) 그들은 다른 수감자, 관리, 그리고 접촉할 수 있는 그 밖의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한동안은 토요일 오후에 편지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군 당국자들이 350명의 증인들에게 170명의 군인 수감자와 함께 식사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군 교도소는 증인과 증인이 아닌 사람의 비율이 2 대 1인 유일한 구역이 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당국자들은 형제들이 식사를 따로 하도록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국과 중립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은 의무 병역 제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는 1974년 7월에 양심적 병역 거부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의안은 종교적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띠고 있었습니다. 결의안은 군대가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사회”를 지키고 있으므로 군대가 벌이는 전쟁도 정의롭지 못하다는 주장을 근거로 양심적 거부를 지지한 것입니다. 한편, 네덜란드계 백인 교회들을 비롯한 다른 교회 집단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의 결의안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정부의 군대 관련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네덜란드 개혁 교회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의 결의안이 로마서 13장에 위배된다 하여 결의안을 거부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방군 소속 군목들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의 입장에 반대를 표명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에 가입된 교회의 교직자들도 있었습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교회들의 군목들은 합동 성명을 발표하여 그 결의안을 비난하면서 “우리는 ··· 교회의 모든 신도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각자 조국 수호에 기여하도록 촉구한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에 가입한 개개의 교회들도 뚜렷한 중립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전쟁과 양심」(War and Conscience in South Africa)이라는 책은 “대부분의 교회들은 ··· 신도들에게 양심적 병역 거부를 적극 권하기는커녕 교회의 입장조차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라고 시인합니다. 그 책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교회 협의회의 결의안에 대해 정부가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자 교회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고수하기를 주저하였다고 알려 주면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건설적인 행동을 선도하려던 교회의 시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에 그 책에서는 이렇게 시인합니다. “투옥된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절대다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은 양심에 근거하여 모든 전쟁에 반대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라고 설명합니다.

증인들의 입장은 순전히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증인들은 “현존하는 권위는 하느님에 의하여 그들의 상대적 지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중립을 유지하였습니다. (로마 13:1) 증인들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 자신의 참숭배자들은 세상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신 여호와께 우선적으로 충성합니다.—이사야 2:2-4; 사도 5:29.

형제들이 이처럼 감금되기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여호와의 증인들이 혹독한 대우를 피하기 위해 중립 입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임이 명백해졌습니다. 더욱이 군 교도소는 포화 상태였고 여론도 부정적이 되었습니다. 일각에서는 형제들을 민간 교도소로 이송하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호의적인 몇몇 군 당국자들은 그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들은 높은 도덕 표준을 가진 젊은 형제들을 존중하였습니다. 만일 형제들이 민간 교도소로 가게 되면 전과 기록이 남게 될 것이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가장 질이 나쁜 사람들에게 노출될 것이며 성추행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형제들에게 군과 관련되지 않은 정부 부서에서 사회봉사를 부과하는 마련이 시행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정치적 분위기가 바뀌어 의무 병역 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우리의 젊은 형제들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으면서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많은 형제들이 여호와를 충성스럽게 섬긴 훌륭한 기록을 남겼으며, 이 기회를 지혜롭게 이용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클리프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군 교도소에 있던 기간은 내 인생의 전환기였습니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 여호와의 보호와 축복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보게 됨에 따라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1973년 석방된 직후에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해서 그 이듬해에 베델에 들어가 지금까지 베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열일곱 살에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스티븐 벤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었고 진리에 대한 지식도 별로 없었습니다. 아침마다 바닥에 광을 내면서 일용할 성구 토의를 하고, 정기적으로 집회도 보고, 더 경험이 많은 형제와 성서 연구를 했는데, 그런 때에 받은 영적 지원을 통해 견딜힘을 얻었습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그랬던 때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 군 교도소에서 보낸 3년이 내 생애 최고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경험은 내가 어른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또한 여호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부당하게 감금을 당했지만 유익한 결과도 있었습니다. 군 교도소에 있던 형제들을 방문한 기디언 베나디는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얼마나 확실한 증거가 이루어졌는지 깨닫게 됩니다”라고 썼습니다. 우리 형제들의 인내와 그들이 받은 재판 및 판결에 관한 많은 언론 보도는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 입장에 대해 잊을 수 없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록은 군대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전역에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흑인 형제들의 충절

인종 격리 정책이 시행되던 초기에 흑인 형제들은 백인 형제들처럼 중립 문제를 겪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흑인들은 군 복무를 하도록 징집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흑인 정치 집단들이 인종 격리 정책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면서 흑인 증인들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쳤습니다.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고 구타를 당한 사람도 있고 불타는 집과 소지품을 두고 도망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는데, 모두가 중립을 타협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형제들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어야 한다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있었습니다.—요한 15:19.

어떤 정치 집단들은 지역 주민 모두에게 당원증을 사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런 집단의 대표자들은 사람들의 집을 찾아가 무기를 살 돈이나 백인 보안 유지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동지들의 장례 비용을 요구하였습니다. 흑인 형제들은 그러한 요구를 정중히 거절하였기 때문에 인종 격리 정책을 지지하는 정부의 스파이라고 고발을 당하였습니다. 어떤 형제 자매들은 야외 봉사를 하는 중에 공격을 당하였고 백인들의 선전물을 퍼뜨린다고 고발을 당하였습니다.

일라이저 들로들로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운동선수였지만 여호와의 헌신한 종이 되기 위해서 운동을 그만두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첫 번째 민주 선거가 있기 2주 전에 경쟁 관계에 있던 흑인 공동체들 간에 긴장 상태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일라이저가 속해 있던 회중은 몇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자주 돌지 못한 구역에서 봉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침례받은 지 두 달밖에 안 된 일라이저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인 두 명의 소년들과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문간에서 한 부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한 청년 집단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정치 운동을 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그 집단의 우두머리는 샴복이라고 하는 굵은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거기 뭐요?” 하고 물었습니다.

집주인은 “성서에 관해 이야기하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그 남자는 부인의 말을 무시하고 일라이저와 두 명의 짝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기 세 사람, 우리 당에 가입해. 지금은 성서 운운할 때가 아니야.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워야 할 때라고.”

일라이저는 담대하게 “우리는 여호와를 위해 일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일라이저를 확 밀치고는 샴복으로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가입해!” 하고 소리쳤습니다. 일라이저는 처음 한 대를 맞은 후로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참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사도 바울의 말에서 힘을 얻었습니다.—디모데 둘째 3:12.

결국 그 남자는 지쳐서 채찍질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들 중 한 사람이 일라이저가 그 지역 주민이 아니라면서 채찍질한 사람을 비난하였습니다. 청년들은 둘로 나뉘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고 그 우두머리는 자신의 샴복으로 심하게 맞았습니다. 한편 일라이저와 두 명의 짝은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이 시련으로 인해 일라이저는 믿음이 더 강해졌고, 두려움 없는 좋은 소식의 전파자로 계속 잘 발전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의 흑인 자매들도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려는 압력에 직면하여 큰 용기를 나타냈습니다. 플로라 멀린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멀린다 자매에게는 마키라는 침례받은 딸이 있었는데, 마키가 한 청년단의 정치 운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오빠를 변호하려 하자, 젊은 폭도들이 마키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습니다. 멀린다 자매는 딸을 이처럼 가슴 아프게 잃고도 원한을 품거나 상심하지 않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전하였습니다. 하루는 딸을 살해한 정치 집단의 대표자들이 멀린다 자매에게도 자기들의 정치 운동에 가담하든지 아니면 그 결과를 감수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협박했습니다. 이웃들이 나서서 멀린다 자매는 정치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하도록 돕는 일에 바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행동 대원들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고 그들은 결국 멀린다 자매를 내버려 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멀린다 자매는 그 모든 시련의 때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정규 파이오니아로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한 정규 파이오니아 형제는 버스를 타고 자기 구역으로 가던 중에 있었던 일을 설명합니다. 한 운동권 청년이 그를 밀치면서 왜 백인들이 만든 출판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흑인들에게 파냐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 형제는 그다음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내게 출판물을 버스의 창밖으로 내던지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말을 듣지 않자 내 뺨을 때리더니, 담뱃불로 내 뺨을 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출판물이 든 가방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넥타이는 백인들이나 매는 것이라고 하면서 내 넥타이를 풀어 버렸습니다. 그는 나 같은 사람은 산 채로 불에 태워야 한다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욕설을 퍼붓고 조롱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나는 더 큰 봉변을 당하지 않고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흑인 형제들의 충절에 관해 개인들이나 회중들이 보낸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콰줄루나탈에 있는 한 회중의 장로가 쓴 편지도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형제 모세스 니아무수아가 사망한 일에 관해 알려 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니아무수아 형제는 용접과 자동차를 수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한 정치 집단이 사제 총을 용접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형제는 거절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 2월 16일에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정치 집회를 열다가 그곳에서 반대파의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날 저녁 그들은 싸움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니아무수아 형제가 쇼핑센터로 가는 것을 보고는, 그길로 형제를 창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네가 총을 용접해 주지 않아서 우리 동지들이 싸우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이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봉사의 직무를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학교에서의 반대

증인 자녀들이 아침 조회 때 기도와 교회의 찬송가 제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흑인 학교들에서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백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에 관해 편지 한 통만 써 보내면 자녀들은 열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흑인 학교에서는 종교 의식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학교 당국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교사들은 그처럼 거부하는 학생들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부모들이 찾아와 증인들의 입장을 설명해 주어도, 교사들은 열외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학교 당국은 여호와의 증인 자녀들에게 아침 조회에 참석하도록 강요하였는데 학교의 일을 그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증인 아이들은 참석하기는 하였지만 노래를 부르거나 기도하는 동안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일부 교사들은 줄을 따라 걸어 다니면서 증인 아이들이 기도 시간에 눈을 감고 있는지 찬송가를 부르고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증인 아이들이, 심지어는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용기 있게 충절을 유지한 것을 보면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자 형제들은 이 문제를 법정으로 가지고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976년 8월 10일에 요하네스버그 대법원은 한 학교의 학생 15명이 관련된 중요한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렸습니다. 판결문은 이러합니다. “피고는 ··· 기도와 찬송가 제창을 거부할 원고 측 자녀들의 권리를 인정하였으며, ··· 또한 정학 및 제적 조처가 ··· 위법이었음을 인정하였다.” 이것은 중요한 법적 승리였으며, 결국 관련된 모든 학교들에서 이와 같은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직면한 다른 문제들

백인 학교에 다니던 많은 증인 자녀들은 그와는 다른 충절의 시험에 직면하여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인종 격리 정책을 시행하던 정부는 백인 청소년들을 동원하여 정권의 이념을 지지하게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1973년에 정부는 청소년 전시 대비라는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훈련에는 행군, 자기 방어 및 애국 운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일부 증인 부모들은 법적 자문을 구하였고 그 문제를 교육부 장관에게 가져갔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습니다. 장관은 청소년 전시 대비 훈련은 순수하게 교육적 차원의 제도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정부는 이 문제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을 널리 퍼뜨렸습니다. 어떤 학교들에서는 교장이 너그럽게 증인 자녀들을 일부 비성경적인 프로그램에서 열외시켜 주었지만 다른 학교들에서는 자녀들을 퇴학시켰습니다.

자녀를 사립학교에 보낼 여유가 되는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부 부모들은 자녀들이 통신 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교사인 증인들은 가정 학습을 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퇴학을 당한 많은 자녀들은 기본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집이나 회중에서 베풀어지는 성경적 교육을 통해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사야 54:13) 그들 중 많은 수가 전 시간 봉사의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이 용기 있는 젊은이들은 여호와를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시련을 인내하였기 때문에 기뻐하였습니다. (베드로 둘째 2:9) 그러는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이 변하게 되면서 우리의 자녀들이 애국 행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퇴학당하는 일은 사라졌습니다.

인종 격리 정책과 우리의 대회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법을 준수하기 위해서 형제들은 각 인종별로 따로 대회를 마련해야 하였습니다. 모든 인종이 한데 모인 것은 1952년 요하네스버그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전국 대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때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하여 그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종 격리 정책 규정에 따라 각 인종별로 구분해 앉아야 했습니다. 백인들은 서쪽, 흑인들은 동쪽, 그리고 유색인과 인도인은 북쪽에 앉았습니다. 간이식당도 인종별로 따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제약이 있었지만 노어 형제는 대회에 관해 “특히 즐거웠던 점은 모두가 함께 같은 경기장에서 ··· 여호와를 숭배한 것이었다”라고 썼습니다.

1974년 1월에 요하네스버그 지역에서 세 개의 대회가 열렸는데, 각각 흑인, 유색인과 인도인, 그리고 백인을 위한 대회였습니다. 하지만 대회 마지막 날에 특별한 마련이 있었는데, 요하네스버그의 랜드 스타디움에서 모든 인종들이 함께 모여 오후 회기를 본 것이었습니다. 총 3만 3408명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정말 기쁜 대회였습니다! 이번에는 모든 인종이 자유롭게 어울려 함께 앉았습니다. 유럽에서 온 많은 방문객들도 참석한 덕분에 더욱더 기억에 남을 대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대회를 조직하던 형제들이 경기장을 예약하고 보니 그곳은 국제적인 다인종 행사를 위해 별도로 지정된 경기장이었기 때문에 오후 회기 때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편견에도 불구하고 개최된 대회

그로부터 몇 해 전에 요하네스버그에 국제 대회가 마련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정부 대표가 반투(흑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요하네스버그의 관공서를 방문하였는데, 회의록을 살펴보다가 여호와의 증인이 흑인 형제들을 위한 대회를 열기 위해 모폴로 파크를 예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는 프리토리아의 본부에 그 사실을 보고하였고 그 즉시 반투 관련 업무부는 증인들이 “인가된 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약을 취소시켜 버렸습니다. 백인 형제들은 요하네스버그 중심부에 있는 밀너 파크 쇼 그라운드를 함께 예약했었고, 유색인 형제들은 요하네스버그의 서쪽 교외에 위치한 유니언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볼 예정이었습니다.

베델에서 두 명의 형제가 관련 부서의 장관을 만났는데, 그는 이전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교직자였습니다. 형제들은 증인들이 수년 동안 모폴로 파크에서 대회를 보아 왔었고 백인 형제들과 유색인 형제들도 각각 대회를 볼 예정임을 지적하면서, 흑인 형제들이 함께 모일 권리는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하지만 장관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모폴로 파크는 요하네스버그 서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 두 형제는 요하네스버그 동편에서 대회를 열도록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는데, 그곳에도 큰 규모의 흑인 거주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담당 관리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프리토리아에서 장관을 만난 사실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대회를 열 장소를 요청하자 관리는 깊은 동정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와트빌 스타디움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와트빌 스타디움에는 모폴로 파크에는 없는 계단식 관람석이 있었습니다.

대회장이 바뀐 사실을 모든 형제들에게 신속히 알렸습니다. 형제들은 성공적으로 대회를 개최하였고, 1만 5000명이 참석하였으며, 정부의 방해도 없었습니다. 그 후 여러 해 동안 형제들은 아무 문제없이 와트빌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법인체를 설립하다

1981년 1월 24일에 통치체의 인도 아래 50명의 회원으로 이루어진, ‘남아프리카 공화국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법인체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법적 기구는 여러 해 동안 영적 권익을 증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지부의 형제들은 자체적으로 결혼 주례를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기 위해 애썼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프란스 멀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매번 정부 관리들은 우리 종교가 결혼 주례를 할 사람을 둘 정도의 위상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안정되어 있지도 않은 것 같다고 하면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법인체가 없었기 때문에 흑인 거주지들에 왕국회관 건축 허가를 받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당신들의 종교는 인가된 종교가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매번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법인체가 설립되자 형제들은 결혼 주례를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당국은 또한 흑인 거주지들에 왕국회관을 건축할 수 있게 허가해 주었습니다.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00명 이상의 장로들이 결혼 주례를 합니다. 이들이 왕국회관에서 결혼식을 주재할 수 있어서 신랑과 신부가 먼저 법적으로 결혼식을 하기 위해 법원에 갈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인쇄 방식의 획기적인 변화

인쇄 방식이 급속히 바뀜에 따라 활판 인쇄기는 구식이 되었습니다. 더욱이 교체할 부품들은 구하기 힘들고 가격이 비쌌습니다. 그래서 컴퓨터 사진 식자기와 오프셋 인쇄기로 바꾸어야 할 때가 왔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자료 저장과 사진 식자 기능을 겸한 독립형 장치를 구입하고, 1979년에는 일본 지부에서 관대하게 기증한 TKS 윤전 오프셋 인쇄기를 설치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주 많은 언어로 출판물을 생산하기 때문에 자체 사진 식자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1979년에 뉴욕 브루클린의 형제들은 현재 멥스(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라고 불리는 시스템 개발에 착수하였습니다. 멥스는 198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설치되었습니다. 번역과 사진 식자 작업에 컴퓨터를 사용하여 다양한 언어들로 동시에 출판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성장을 위해 미리 계획하다

1980년대 초가 되자 일런즈폰테인의 베델 시설은 증가하는 야외의 필요를 돌보기에 너무 작아졌습니다. 그래서 요하네스버그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거리에 있는 크루거스도르프에 땅을 매입하였습니다. 87헥타르에 달하는 그 부지는 한편에 시원스러운 시내가 흐르는 아름다운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은 건축 공사에 참여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고, 어떤 형제들은 지원하기 위해 휴가를 내기도 했습니다. 뉴질랜드와 미국 등 다른 나라들에서 자원 봉사자들이 왔고, 건축은 6년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로 번역자로 일하던 흑인 증인들이 함께 살도록 허가를 받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습니다. 허가가 나기는 했지만 20명으로 제한되었고 그들만의 전용 숙소를 따로 지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정부가 인종 격리 정책을 완화하면서 베델 형제들은 인종에 관계없이 어느 방에서나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델 가족은 훌륭하게 건축된 베델 건물과 넓고 구조가 잘 짜여진 방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이 3층짜리 빨간 벽돌 건물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습니다. 크루거스도르프에 건축이 시작되었을 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활동적인 증인의 수가 2만 80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987년 3월 21일 봉헌식 무렵에는 그 수가 4만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래도 정말 그토록 건물을 크게 지을 필요가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무실 구역의 한 층은 사용하지 않았고 숙소 역시 한 동이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미리 계획하려 했으며, 앞으로의 성장에 대비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다

회중들이 늘어남에 따라 더 많은 왕국회관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의 형제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차고나 건물의 별채나 학교 교실을 사용했는데, 교실에서는 어린이용 책상에 앉아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 집단에서도 같은 학교의 교실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시끄럽게 노래하고 북을 치는 요란한 소음을 견뎌야 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지역 건축 위원회는 빠른 속도로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새로운 공법들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는 속성 건축 경험이 있는 11명의 캐나다 형제들이 요하네스버그의 힐브라우에 2층짜리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지 형제들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고 건축 공법을 개선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은 1992년 소웨토의 딥클루에프에 세워졌습니다. 형제들은 1962년부터 이 지역에 왕국회관 부지를 얻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부지를 얻기 위해 애쓴 형제들 중 한 명인 제커라이아 세디베가 1992년 7월 11일에 열린 왕국회관 봉헌식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왕국회관을 결코 가질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때 우린 젊었지요. 이제 나는 은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회관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소웨토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으로 말이지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관할의 나라들에는 600채의 왕국회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회관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순결한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하지만 전도인 30명이 넘고 자체 왕국회관이 필요한 회중은 약 300개가 더 있습니다.

지부 사무실의 인도 아래 일하는 25개의 지역 건축 위원회는 회관을 짓기 원하는 회중들에 실제적인 지원을 베풀고 있습니다. 회중들은 무이자로 융자를 받아 공사비를 충당할 수 있습니다. 18년이 넘게 왕국회관 건축 일을 지원해 온 피터 버트는 하우텡 지역 건축 위원회의 사회자입니다. 그는 위원회에 소속된 형제들이 대개 가족과 직장이 있는 가장들이기는 하지만 다른 형제들을 위해 기꺼이 많은 시간을 바쳐 봉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또 다른 지역 건축 위원회에 속해 있는 야코프 라우텐바흐의 설명에 의하면, 위원회의 성원들은 대개 전체 공사 기간 동안 현장에서 일합니다. 그에 더하여 건축이 시작되기 전부터 모든 계획에 참여합니다. 야코프는 자원 봉사자들이 얼마나 즐겁게 협조적으로 일하는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비용으로 때때로 멀리 떨어져 있는 현장까지 가기도 합니다.

야코프는 많은 형제들이 기꺼이 자신의 시간과 자산을 바쳐 왕국회관 건축 공사를 지원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실례를 들었습니다. “친자매간인 두 자매는 자신들의 운송 회사를 이용하여 우리의 장비들을 실은 13미터짜리 컨테이너를 전국 각지, 심지어는 이웃 나라에 있는 공사 현장으로 운송하는 마련을 하는데, 1993년 이래 그렇게 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거래하는 많은 회사들이 우리가 하는 일을 보고는 기부를 하거나 할인을 해 주기도 합니다.”

주의 깊이 계획하고 작업 팀들을 조직하고 나면 형제들은 대개 3일 만에 회관을 완공합니다. 그것을 보고 존중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 현장에서는 공사 첫째 날이 끝나 갈 무렵 인근의 맥줏집에서 술을 잔뜩 마신 두 사람이 형제들에게 다가왔습니다. 평소에는 공터를 지나 집으로 가는데 이제 보니 그 공터에 회관이 들어서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는 길을 물었습니다.

자기희생 정신

1990년대 초에 불어 닥친 정치적 변화는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유례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상황은 복잡했습니다. 폭력 사태가 증가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적 대립이나 경제적 불만족이 원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왕국회관 건축은 계속되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에 속한 자원 봉사자들이 현지 형제들의 안내를 받아 흑인 거주지 내로 들어왔습니다. 어떤 자원 봉사자들은 성난 폭도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1993년에는 소웨토에서 한 회관을 짓는 동안, 폭도들이 건축 자재를 왕국회관 현장으로 운반해 가던 세 명의 백인 형제들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자동차 창문이 모두 깨지고 형제들이 다쳤습니다. 형제들은 가까스로 계속 운전해서 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현지 형제들이 안전한 길로 그들을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공사 계획은 지연되지 않았습니다. 예방 조처를 취하였고, 그다음 주말에는 다양한 인종에 속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현장에서 작업을 하였습니다. 현지 파이오니아들은 회관 주변 구역에서 가두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을 발견하면 현장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다친 형제들은 며칠 만에 회관 건축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습니다.

회중들은 왕국회관 건축에 자원한 형제들의 헌신적인 수고와 희생에 깊이 감사합니다. 파니 스미트와 일레인 스미트 부부는 15년이 넘도록 종종 자비를 들여 먼 거리를 여행하면서 46개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을 짓도록 도왔습니다.

콰줄루나탈에 있는 한 회중은 지역 건축 위원회에 이와 같이 편지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 와서 우리 회관을 짓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가족과 함께하는 즐거움과 여가 시간과 그 외의 여러 가지를 희생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여러분들이 건축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여러분들의 개인 비용을 들였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선하게’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느헤미야 13:31.”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을 가지고 있으면 이웃에 긍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대표적인 예로 한 회중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왕국회관을 짓고 나자 참석자 수가 늘어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 집회를 둘로 나누어 봐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곧 회중을 분할해야 할 것 같습니다.”

때때로 시골의 작은 회중들은 회관 건축을 위한 자금을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많은 회중들은 기금을 모을 여러 가지 방도를 찾아내었습니다. 한 회중에서는 형제들이 돼지를 팔았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자 소 한 마리와 말 한 마리를 팔았습니다. 그런 다음 양 열다섯 마리와 소 한 마리와 말 한 마리를 팔았습니다. 한 자매는 필요한 페인트를 모두 사 주겠다고 했고 다른 자매는 카펫을 샀으며 또 다른 자매는 커튼 값을 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 한 마리와 양 다섯 마리를 팔아 의자를 샀습니다.

하우텡에 있는 한 회중은 왕국회관이 완공되고 나서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회관이 지어지고 나서 적어도 2주 동안은 야외 봉사를 마치면 회관으로 가서 감상을 하곤 했습니다. 야외 봉사 후에 일단 왕국회관을 보지 않고는 집으로 갈 수 없었죠.”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다

품위 있는 숭배 장소를 마련하기 위한 여호와의 증인의 노력은 종종 지역 주민의 이목을 끕니다. 콰줄루나탈의 움라지 회중은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더반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의 모임은 여러분이 지역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기울이는 수고에 감사드리며 계속 그렇게 해 주시기를 권면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의 노고 덕분에 그 지역이 아름다운 곳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임은 쓰레기를 없애고 주변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애써 왔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환경이 지역 주민의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지역을 깨끗하게 하는 시민들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이 보여 주신 모범에 감사드립니다. 무슨 일을 하시든지 계속 움라지 지역을 깨끗하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회중은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유명한 한 도둑이 우리의 새 왕국회관에 침입했다가 회관 주변 주민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은 그 도둑이 ‘자기네 교회’를 털려 했다고 말했는데, 왕국회관이 그 지역에서 유일한 종교 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도둑은 경찰에 넘겨지기 전까지 주민들에게 몰매를 맞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 필요한 왕국회관을 짓다

1999년에 여호와의 조직은 재원이 부족한 나라의 왕국회관 건축 마련에 착수하였습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서 이 활동을 조직하도록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지역 왕국회관 사무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사무소에서는 각 지부로 대표자를 파견하여 형제들이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를 마련하도록 도왔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는 부지를 매입하고 왕국회관 건축단을 조직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또한 국제 종들이 파견되어 현지 형제들을 돕고 훈련시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 사무소는 아프리카에 25개의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를 마련하여 37개 나라에서 왕국회관 건축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1999년 11월 이래, 이러한 마련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나라들에서는 7207채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었습니다. 2006년 중반의 추산에 따르면 이러한 나라들에는 3305채의 왕국회관이 더 필요합니다.

정치적 변화의 영향

이전 정부의 인종 정책에 대한 불만이 쌓여 감에 따라 사회 불안과 폭력 사태가 야기되었고 일부 여호와의 증인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흑인 거주 지역들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 대부분은 신중하게 대처하였고 그 어려운 시기에도 계속 여호와를 충실히 섬겼습니다. 한번은 한 형제 가족이 한밤중에 잠들어 있는 사이에 누군가가 그 집에 화염병을 던졌습니다. 그 가족은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형제는 후에 지부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저와 우리 가족의 믿음은 이제 훨씬 더 강해졌습니다. 소유물은 모두 잃었지만 여호와와 그분의 백성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었으니까요. 형제들은 우리를 물질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물의 제도가 끝나기를 고대하고 있으며, 영적 낙원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1994년 5월 10일,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습니다.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로 민주적인 방법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며, 그 선거 때 흑인들은 최초로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주의적인 태도를 나타냈으며 기대감에 들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일부 형제들에게 또 다른 종류의 도전이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호와의 백성들 중 일부가 그리스도인 중립을 타협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실수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으며 성경에 근거한 격려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마음의 변화

더 많은 왕국회관이 건축된 것은 여호와께서 축복하신다는 증거이지만, 정말 기적과 같은 변화가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린도 둘째 3:3)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진리에 매료되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986년에 랄슨 물라우드지는 살인죄로 투옥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팜플렛에서 지부 주소를 발견하고는 성서를 배울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편지하였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레스 리가 허가를 받아 그를 방문하여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랄슨은 곧 자기가 배운 것들을 다른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90년 4월에 교도소 내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랄슨은 정기적으로 지방 회중 성원들의 방문을 받고 있으며, 매일 한 시간씩 감방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시간을 활용하여 다른 재소자들에게 전파합니다. 랄슨은 세 사람이 침례에 이르도록 도왔고 현재 두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그가 받은 사형 선고는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가석방될 가능성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와는 아주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여호와께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퀴니 루소라는 관심자는 회중 서적 연구에 참석하여 서적 연구 감독자에게 열여덟 살 된 자신의 아들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아들은 교리 문답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그와 훌륭한 대화를 나누었고, 그는 어머니를 따라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퀴니는 그 형제에게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장로이자 교회 위원회의 회장인 자신의 남편 제니도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남편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는 남편과 대화를 나누었고, 남편은 성서 연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는 지역 대회 주간이어서, 형제는 퀴니를 초대하였습니다. 형제는 그의 남편 제니도 나흘 내내 함께 참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회 프로그램과 증인들 사이의 사랑을 보고 제니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열여덟 살 된 아들과 교회 집사인 장남도 함께 앉아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교회에서 탈퇴하였고, 즉시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야외 봉사 모임에도 참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제니에게 아직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의 자격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증인들과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할 수는 없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이 평생 동안 진리를 찾았으며 더 이상은 잠자코 있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루소 가족 중에는 스물두 살 된 아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는 신학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제니는 그 아들에게 더 이상은 학비를 대 주지 않을 것이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편지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제니와 세 아들은 회중과 함께 크루거스도르프에 있는 베델에서 하루 동안 일을 했습니다. 신학생인 그 아들은 베델을 보고 감명을 받아 친형제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한동안 연구를 하고 나서 그는 성서에 대해 대학에서 2년 반 동안 배운 것보다 지난 한 달 동안 배운 것이 더 많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온 가족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아버지는 장로이며 아들들 중에는 장로도 있고 봉사의 종도 있습니다. 딸들 중 한 사람은 정규 파이오니아입니다.

‘너의 천막 줄을 길게 늘여라’

장래의 확장에 대비해서 베델에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크루거스도르프 시설을 봉헌한 지 불과 12년 만에 대대적인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54:2) 이 기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이곳 지부의 감독을 받는 주변 나라들에서는 전도인이 62퍼센트나 증가하였습니다. 창고 한 동과 세 동의 새로운 숙소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세탁실과 사무동도 증축되었으며, 제2 식당도 마련되었습니다. 1999년 10월 23일에는 이 모든 증축된 건물을 여호와께 봉헌하였습니다. 봉헌사는 통치체의 대니얼 시들릭 형제가 했습니다.

최근에는 인쇄 시설이 8000제곱미터나 확장되었습니다. 이 시설에는 새로운 만 롤란트 리토만 윤전 인쇄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부에서는 잡지를 자동으로 재단하고 숫자를 세서 쌓는 기계들을 들여왔습니다. 독일 지부에서 제본 설비를 보내 주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 전체를 위해 소프트커버 서적과 성서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회를 열 적합한 장소

필요한 대회 회관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건축 공사가 계획되었습니다. 첫 번째 대회 회관은 요하네스버그 남쪽의 에이켄호프에 건축되어 1982년에 봉헌되었습니다. 케이프타운의 벨빌에도 대회 회관이 건축되어 1996년에 밀턴 헨첼 형제가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2001년에는 또 하나의 대회 회관이 프리토리아와 요하네스버그 사이에 있는 미드랜드에 완공되었습니다.

처음에 지역 주민들은 미드랜드 건축 공사를 반대했지만 형제들에 대해 알고 또한 무슨 일을 하는지 보고는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은 1년 동안 두 주에 한 번씩 여러 상자의 과일과 채소를 보내 주었습니다. 어떤 회사들에서는 감동을 받아 헌금이나 헌물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 회사에서는 정원에 사용할 비료를 무료로 보내 주었습니다. 또 한 회사에서는 공사를 위해 형제들에게 1만 랜드(약 150만 원)짜리 수표를 주었습니다. 물론, 형제들도 대회 회관을 위해 관대하게 헌금하였습니다.

이 대회 회관은 아름답고 멋진 건물입니다. 하지만 봉헌사를 한 통치체의 가이 피어스 형제는 이 대회 회관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의 위대한 하느님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는 데 사용되기 때문임을 지적했습니다.—열왕 첫째 8:27.

사람이 만든 법이 갈라놓지 못하다

여러 해 동안 흑인 지역에서는 대회를 열 적합한 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림포포 주에서 형제들은 보호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 살고 있었으며, 그 당시에 백인들은 그곳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지역 감독자 코리 시거스 형제는 그 지역에 들어갈 허가를 받을 수도 없었고 대회를 열 장소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시거스 형제는 보호 지역에 맞닿아 있는 농장의 주인을 찾아갔지만, 이 사람은 자기 땅에서 대회가 열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거스 형제가 이동 주택 차를 그곳에 주차하는 것은 허락해 주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보호 지역 내의 숲에 있는 공터에서 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공터는 그 농부의 땅과 접해 있었고, 공터와 그 땅 사이에는 철조망이 쳐 있었습니다. 시거스 형제는 공터와 맞닿아 있는 농부의 땅에 이동 주택 차를 주차해 놓고 그 차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형제들과 “연단” 사이를 철조망이 갈라놓고 있었지만, 형제들은 대회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으며 시거스 형제는 법을 어기지 않으면서 형제들에게 연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익한 변화

통치체는 2000년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모든 회중이 진정한 관심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에게 무가로 출판물을 배부하는 마련을 시행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전도인들은 사람들에게 우리의 세계적인 복음 전파 활동에 소액의 기부를 하도록 권하였습니다.

이 자진적인 기부 마련은 야외에서 만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유익했습니다. 전에는 많은 형제들이 「파수대」 연구와 회중 서적 연구용 출판물을 받기 위해 헌금할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도인이 100명인 회중에 「파수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10명 정도밖에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자기 잡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베델의 수출부는 업무가 크게 늘었습니다. 2002년 5월에는 총 432톤의 물품을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로 보냈습니다. 물론, 보낸 물품은 대부분 성서 출판물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현재 말라위, 모잠비크, 잠비아, 짐바브웨 지부를 위해서 출판물의 창고 관리를 맡아 하고 있습니다. 창고 관리 업무 가운데는 이 나라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언어의 출판물을 모두 관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 회중에서 출판물을 신청하면,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출판물을 트럭에 실어 지부들로 보냅니다. 이때 각 지부에서 출판물을 그대로 지부의 차량에 옮겨 실어 서적 보관소로 배달할 수 있도록 짐을 포장하여 싣습니다.

기부 마련이 시행된 이래로, 출판물의 수요가 크게 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잡지 생산량은 매달 100만 부에서 440만 부로 대폭 증가하였습니다. 연중 출판물 신청량도 1999년에는 200톤이었던 것이 3800톤으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에 건축 자재도 보냅니다. 그에 더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곤경에 처한 형제들을 돕기 위해 구호물자를 마련해 왔습니다. 심한 박해 때문에 집을 떠나 난민촌에 머물러야 했던 말라위 형제들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주었습니다. 1990년에는 심한 가뭄이 들어 피해가 심각한 앙골라에도 구호물자를 보냈습니다. 앙골라에서는 내전마저 일어나 많은 형제들은 극심한 가난으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에게 트럭 여러 대분의 식품과 옷을 보냈습니다. 2000년에는 큰 홍수 피해를 겪은 모잠비크 형제들에게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2002년과 2003년 초에는 심한 가뭄 피해를 겪고 있던 짐바브웨 형제들에게 800톤이 넘는 옥수수를 보냈습니다.

번역의 발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는 규모가 큰 번역부가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성서 번역이 더 필요해짐에 따라 번역부가 커지게 된 것입니다. 현재 102명의 번역자가 13개 언어로 출판물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신세계역 성경」은 현재 7개 현지 언어로 나와 있습니다. 츠와나어 「신세계역」에 관해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성서는 이해가 잘돼서, 성서를 읽을 때나 낭독을 들을 때 즐겁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 양식을 섭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이 영으로 인도하는 조직에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과학 기술은 번역자들을 지원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통치체는 브루클린에 있는 본부 형제들에게, 번역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나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도 이 일을 돕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협동 작업으로 현재 ‘워치타워 번역 시스템’이라고 하는 프로그램이 개발되어 전 세계 번역자들이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은 실제 번역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세속 회사들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제한적인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습니다. 형제들은 그렇게 하기보다는 번역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도구들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예를 들어, 번역자들이 성서들을 컴퓨터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또한 자체적으로 번역용 전자 사전들을 만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일부 현지 언어들에는 쓸 만한 사전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청각 장애인 밭에 씨를 뿌리다

왕국 소식의 전도인들은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청각 장애인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습니다. 1960년대에 준 캐리커스는 청각 장애인 여자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는 역시 청각 장애인인 남편과 함께 잘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이래로 진리를 받아들인 청각 장애인의 수가 증가해 왔으며, 이 나라 전역에서 도시들에 수화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지역 대회 때 청각 장애인석이 마련되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청각 장애인 참석자들이 수화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박수”의 의미로 손을 흔드는 것을 보는 것은 감동적인 일입니다.

최초의 수화 집단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브릭스턴 회중에 형성되었습니다. 준의 남편 조지가 감독을 맡게 되었으며, 현재 조지는 장로입니다. 베델 봉사자 몇 명을 포함하여 회중의 자원하는 형제들을 위해 수화 강습이 마련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 돌보는 지역에는 현재 한 개의 수화 회중과 다섯 개의 집단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에서 맺는 왕국 열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외에도 다섯 나라의 복음 전파 활동을 감독합니다. 이제 이 나라들의 밭에서 진행되는 왕국 전파 활동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나미비아

이 나라는 대서양에서부터 보츠와나의 서쪽 국경까지 펼쳐져 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나미비아는 국제 연맹의 위임을 받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 차례의 소요와 유혈 사태 끝에, 나미비아는 마침내 1990년에 독립하였습니다. 이 나라는 대부분의 지역이 건조하고 인구 밀도가 낮지만, 경치가 대단히 아름답고 야생 생물과 특이한 식물이 많은 곳들도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미브 사막을 보려고 오며, 이 척박한 곳에서 살아가는 대단히 다양한 야생 생물들을 보고 놀랍니다. 나미비아는 경치가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9개의 민족 언어를 사용하는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나미비아에 왕국 소식이 처음으로 전파된 때는 1928년이었습니다. 그해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직접 만나서 전파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상당량의 성서 출판물을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이 무렵에 나미비아에서 처음으로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특이한 방법으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베른하르트 바데는 달걀을 샀는데, 우리 출판물에서 찢어 낸 종이들에 싸여 있었습니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열심히 읽었지만 발행소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달걀들 중에서 우리 출판물의 마지막 면에 싸여 있는 달걀이 나왔습니다. 그 면에는 독일 지부의 주소가 있어서, 그는 편지를 써서 더 많은 출판물을 요청하였습니다. 베른하르트가 연합했던 회중을 나중에 방문한 순회 감독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사망할 때까지 봉사를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1929년에 레니 테론은 나미비아의 수도인 빈트후크로 파견되었습니다. 이 파이오니아 자매는 기차와 우편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나미비아의 모든 주요 도시에서 증거하였습니다. 넉 달 만에 그는 독일어와 아프리칸스어와 영어로 된 서적과 소책자를 6388부나 전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주기적으로 나미비아에서 전파하기는 했지만, 계속 남아 관심자들을 돌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1950년에 몇몇 선교인이 오면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선교인들 가운데는 거스 에릭손과 프레드 헤이허스트와 조지 쿠트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사망할 때까지 충실하고 훌륭하게 봉사하였습니다.

1953년경에 이 나라에는 8명의 선교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딕 월드런과 코랄리 월드런 부부 *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현지 당국의 강한 반대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월드런 부부는 원주민들에게 성서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흑인 지역에 들어가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딕은 신청을 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월드런 부부는 1955년에 딸이 태어나서 선교 봉사를 중단해야 했지만, 딕은 한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1960년에 딕은 마침내 흑인 거주 지역인 카투투라 시에 들어갈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관심을 보인 사람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잠깐 사이에 이 도시에 사는 여러 사람이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50여 년이 흐른 지금, 딕과 코랄리 부부는 나미비아에서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밭에서 왕국 권익의 증진을 위해 큰 기여를 했습니다.

나미비아에 있는 다양한 민족 집단에게 성서 진리를 전한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습니다. 은동가어, 쾅갈리어, 헤레로어 같은 현지 언어로 나온 성서 출판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현지인 성서 연구생 가운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있는 증인들의 감독을 받아 몇몇 전도지와 팜플렛을 번역했습니다. 당시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한 에스터 본먼은 콰니아마어를 공부하여 마침내 다른 현지어 하나에 더하여 콰니아마어로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동가어를 사용하는 에이나 네콰야 자매와 함께 「파수대」를 번역했는데, 일부 기사는 콰니아마어로 되어 있고 또 일부 기사는 은동가어로 되어 있습니다. 오밤보랜드에서 사용되는 이 두 언어는 그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합니다.

1990년에는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추어진 번역 사무실이 빈트후크에 개설되었습니다. 더 많은 번역자가 일하게 되어, 현재는 앞서 언급한 두 언어 외에도 음부쿠슈어, 쾅갈리어, 쿠쿠호와브어, 헤레로어로도 출판물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안드레 본먼과 스티븐 잰슨이 이 사무실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나미비아는 주요 다이아몬드 생산국 가운데 하나입니다. 「파수대」 1999년 7월 15일호 “나미비아에는 살아 있는 보석들이 있다!” 기사에서는 이 점을 언급하면서,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을 “살아 있는 보석들”에 비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 전파 활동이 많이 수행되었지만 이 나라의 일부 지역에는 좋은 소식이 거의 전파되지 않았음을 지적했습니다. 그 기사에는 이와 같은 요청이 실려 있습니다. “당신은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들을 몹시 필요로 하는 곳에서 봉사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미비아로 건너와서 더 많은 영적인 원석들을 찾아내어 연마하는 일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에 대한 반응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그리고 몇몇 남아메리카 나라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에서 형제들의 문의 편지가 130통이나 왔습니다. 그 결과, 83명의 증인들이 나미비아를 방문하였고 그 가운데 18명이 계속 머물렀습니다. 그중 16명은 나미비아에 올 때 정규 파이오니아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자원 봉사자들이 나타낸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지부 사무실에는 「파수대」에 실린 요청에 관해 문의하는 편지가 옵니다. 윌리엄 하인델과 엘렌 하인델 부부는 1989년 이래로 나미비아 북부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해 왔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 사는 오밤보족이 사용하는 은동가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이 특별한 지역에서 그들은 인내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많은 보람을 느꼈습니다. 윌리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회한 성서 연구생들을 비롯한 회중 청소년들이 영적인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회중에서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이 크고 작은 대회에서 연설하는 것을 보면 가슴 뿌듯합니다.”

최근에는 여러 명의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이 나미비아에 임명되어, 관심자들을 돌보고 회중을 섬기는 면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2006년에 나미비아에서는 1264명의 전도인이 봉사하여, 지난해에 비해 3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레소토

인구가 240만 명에 불과한 작은 나라인 레소토는 사방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나라가 자리 잡고 있는 드라켄즈버그 산맥은 매우 높아서, 강인한 등산가들은 이곳에 올라 멀리까지 펼쳐진 멋진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보기에는 늘 평온한 것 같지만 이곳 역시 정치적 소요에 휩싸인 때가 있었습니다. 1998년에 선거를 둘러싼 논란으로 인해 수도인 마세루에서 군대와 경찰 간에 전투가 벌어진 것입니다. 비요 퀴스민과 시르파 퀴스민 부부는 그때 마세루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비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다행히도 형제들 중에는 다친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인 식품과 연료가 없는 형제들을 위해 구호 마련을 조직했습니다. 이 일로 회중은 연합의 띠가 강화되었고, 이 나라 전역에서 집회 참석자가 증가했습니다.”

레소토의 경제는 주로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광산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합니다. 이 나라가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산악 지역에 있는 이 왕국에서는 소중한 영적 보물을 찾을 수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서 진리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2006년에는 3101명의 왕국 전도인이 활동하여, 지난해에 비해 2퍼센트 증가했습니다. 현재 세 쌍의 선교인 부부—휘팅거 부부, 뉘그렌 부부, 패리스 부부—가 마세루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아벨 모디바는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 레소토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했습니다. 그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에서 아내 레베카와 함께 봉사하고 있는데, 레소토에서 겪었던 인상 깊은 일들을 서두르지 않는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대부분의 시골 지역에는 도로가 없었습니다. 외딴 지역에 있는 전도인들에게 가려면 걸어야 했습니다. 때로는 7시간을 걸었지요. 종종 형제들은 말을 끌고 와서, 한 마리는 내가 타고 한 마리는 짐을 싣고 가게 해 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슬라이드 영사기와 12볼트짜리 건전지도 가지고 다녔지요. 강물이 불어나 있으면, 물이 줄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어떤 마을들에서는 촌장이 마을 사람 모두에게 공개 강연에 오라고 하더군요.

집회에 참석하려면 여러 시간을 걸어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은 대개 순회 감독자의 방문 주간에 왕국회관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형제들의 집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순회 감독자의 방문은 특별한 행사가 되었지요. 저녁에는 함께 모여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음 날에는 야외 봉사를 나갔지요.”

페르올라 뉘그렌과 비르기타 뉘그렌 부부는 1993년부터 마세루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비르기타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사람들을 도울 때 잡지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97년에 나는 마팔레사라는 여자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마팔레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연구 시간에 집에 있지 않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종종 우리를 피하기까지 했지요. 그래서 연구는 중단했지만, 계속 잡지 통로로 방문을 했습니다. 몇 년이 흐르고 나서 마팔레사가 집회에 왔더군요. 어느 날 「파수대」에서 분노를 제어하는 것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가 자신의 문제에 대한 여호와의 대답이라고 생각한 거지요. 친족들하고 항상 다투었으니까요.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고, 그 후로 마팔레사는 한 번도 집회에 빠지지 않았답니다. 또한 야외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레소토에 있는 형제들은 임시변통으로 지은 건물을 왕국회관으로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레소토에 있는 회중들에 왕국회관 건축을 위해 재정적 지원을 해 주었습니다.

해발 약 3000미터의 고지대에 있는 모코틀롱 시의 왕국회관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왕국회관입니다. 이 왕국회관을 짓기 위해 자원 봉사자들은 멀리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도 왔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콰줄루나탈 주의 형제들은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고 현장으로 건축 장비와 자재를 운반할 차량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아주 소박한 생활환경에서 지내야 했으며, 자신이 사용할 침구와 취사도구도 가져와야 했습니다. 왕국회관은 10일 만에 완공되었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한 연로한 현지 형제는 매일 현장에 나와서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1920년대에 여호와의 종이 된 때부터 줄곧 왕국회관이 건축될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회관 공사가 척척 진행되자 기뻐했습니다.

2002년에 레소토에는 기근이 들었습니다. 형제들은 옥수수 가루와 기타 일용품을 트럭에 실어 기근이 든 지역으로 가서 그곳 증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한 감사의 편지에는 이러한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옥수수 가루를 주려고 우리 집에 왔을 때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형제들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도움을 받고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조직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졌으며, 영혼을 다해 하느님을 섬기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보츠와나

이 나라는 칼라하리 사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는 170만 명이 넘습니다. 기후는 일반적으로 덥고 건조합니다. 수많은 공원과 야생 생물 보호 구역을 방문하려고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경치가 아름다운 오카방고 삼각주 지역은 태곳적 평온함을 간직한 데다 야생 생물이 많아 인기가 높습니다. 삼각주 지역의 수로를 오가는 전통적인 교통수단은 현지에서 자라는 나무로 만든 모코로라고 하는 통나무배입니다. 보츠와나는 경제가 건실한 편인데, 주로 다이아몬드 광산업 덕분입니다. 1967년에 칼라하리 사막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된 이래, 보츠와나는 세계의 주요 다이아몬드 수출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소식은 1929년에 한 형제가 몇 달 동안 보츠와나에서 전파 활동을 하여 처음으로 전해지게 된 것 같습니다. 조슈아 통과나는 1956년에 보츠와나에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 그는 당시에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이 그곳에서 금지되어 있었다고 회상합니다.

열심 있는 선교인들은 이 생산적인 구역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습니다. 블레이크 프리스비와 그웬 프리스비 부부는 팀 크라우치와 버지니아 크라우치 부부와 함께 츠와나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는 비요 퀴스민과 시르파 퀴스민 부부가 사람들에게 열심히 영적 도움을 베풉니다.

이 나라의 남부 지역에서는 휴 코미캔과 캐럴 코미캔 부부가 열정적인 선교 정신을 나타냅니다. 휴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회중에는 에디라는 열두 살 된 형제가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에디는 신권 전도 학교에 등록하고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위해 글을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으로 자격을 갖추게 되자, 많은 시간 야외 봉사를 했고 급우 한 명과 성서 연구도 시작했습니다. 에디는 침례를 받은 후로 종종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합니다.”

보츠와나에 있는 상당수의 회중은 동쪽 국경 가까이에 있는 번창하는 수도 가보로네와 그 인근 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은 인구 밀도가 높습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서부 지역의 마을들과 칼라하리 사막에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소수의 산족(부시먼족)들이 지금도 정착해 살지 않고 채집을 하거나 활과 화살로 사냥을 하며 살아갑니다. 전도인들은 외딴 구역에서 봉사하는 특별 전파 활동 기간에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시골 지역에 있는 유목민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는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합니다. 이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고 주변의 재료를 써서 집을 짓고 땔감을 구하느라 바쁘게 보내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낯선 사람이 새 힘을 주는 성서 소식을 가지고 오면, 사람들은 기꺼이 부드러운 사막의 모래 위에 모여 앉아 소식을 듣습니다.

여섯 명의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 가운데 한 사람인 스티븐 로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항상 옮겨 다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길을 건너듯이, 국경을 넘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카방고 강을 건너가다가 나룻배에서 성서 연구생인 마크스를 만났습니다. 휴가를 내서 친구들과 친족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기 위해 가는 길이라는 말을 들으니 기뻤습니다. 마크스는 시간만 나면 복음 전파 활동을 한답니다.”

보츠와나에서는 좋은 소식에 대한 반응이 고무적입니다. 2006년에는 1497명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여, 지난해에 비해 6퍼센트 증가하였습니다.

스와질란드

이 작은 군주국은 인구가 약 110만 명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직장을 구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농사를 짓고 삽니다. 스와질란드는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몇 개의 동물 보호 구역이 있습니다. 스와지족 사람들은 친절하며 아직도 고유의 전통을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전 왕 소부자 2세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며 우리 출판물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그는 성서에 관한 연설을 들으려고 교직자들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도 왕궁으로 초대하였습니다. 1956년에 초대받은 증인은 영혼불멸 교리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영예로운 칭호를 사용하는 문제에 관해 연설하였습니다. 연설이 끝나자 왕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연설의 내용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그 형제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조상 숭배에서 유래한 애도 관습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취해야 했습니다. 스와질란드의 몇몇 지역 추장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통적인 애도 의식을 따르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살고 있던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영적 형제들은 그런 형제들을 늘 돌봐 주었습니다. 스와질란드 대법원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호와의 증인에게 승소 판결을 내리면서 증인들이 집과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판시하였습니다.

제임스 하케트와 돈 하케트 부부는 스와질란드의 수도인 음바바네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1971년과 1970년에 길르앗을 졸업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제임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선교인들이 다른 관습에 적응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봉사하고 있었는데, 추장이 내가 공개 강연을 했으면 하더군요. 추장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우리가 앉아 있던 곳은 건축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시멘트 블록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습니다. 땅바닥이 젖어 있어서 나는 시멘트 블록을 보고는 그것을 깔고 앉았습니다. 아내도 내 옆에서 시멘트 블록을 깔고 앉았지요. 그러자 스와지족 자매가 아내에게 와서는 자기 자리로 가서 같이 앉자고 하더군요. 아내가 지금 자리가 편하다고 말했지만, 그 자매는 계속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설명을 듣고 보니, 땅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들이 있어서 여자가 남자보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시골 지역의 관습입니다.”

하케트 부부는 이전에 관심을 나타낸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 교사는 학생 하나를 내보내서 시간이 여의치 않다고 했습니다. 이 부부는 말을 전하러 나온 학생인 패트릭에게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방문한 이유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부부는 얼마간 대화를 하고 나서 패트릭에게 「청소년은 묻는다—질문과 효과있는 대답」 책을 주고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고아인 패트릭은 삼촌의 집에 딸린 방에 살고 있었지만,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면서 먹을 것도 직접 장만하고 시간제 일을 해서 학비도 벌어야 했습니다. 패트릭은 잘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으며, 지금은 회중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스와질란드에서는 1930년대에 복음 전파 활동이 시작된 이래 계속해서 고무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이 지역에서 2292명이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활동적으로 참여하였으며, 2911건의 성서 연구가 사회되었습니다.

세인트헬레나

길이 17킬로미터에 너비 10킬로미터인 이 작은 섬은 아프리카 남서 해안의 서쪽에 있습니다. 기후는 대체로 온화하고 쾌적한 편입니다. 세인트헬레나의 인구는 약 4000명이며, 유럽계와 아시아계와 아프리카계 주민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영어를 사용하는데, 독특한 억양이 있습니다. 공항은 없고, 남아프리카와 영국을 오가는 배편만 하나 있습니다. 텔레비전은 1990년대 중반에야 비로소 위성 방송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이 처음으로 세인트헬레나에 전파된 때는 두 명의 파이오니아가 이곳을 잠깐 방문했던 1930년대 초입니다. 경찰관이자 침례교 집사였던 톰 스키피오는 그들에게서 얼마의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톰은 자신이 알게 된 내용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설교단에서 삼위일체가 거짓이며 지옥불과 불멸의 영혼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를 비롯하여 성서 진리를 옹호했던 사람들은 교회를 떠나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톰과 몇몇 사람들은 세 대의 축음기를 사용하여 야외 봉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걷거나 당나귀를 타고 섬 전체를 돌았습니다. 톰은 또한 여섯 명이나 되는 많은 자녀들에게 진리의 기초를 확고하게 놓아 주었습니다.

1951년에 야코뷔스 반 스타덴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파견되어 이 섬에 있던 충실한 증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봉사를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돕고 회중 집회를 정기적으로 열도록 마련하였습니다. 톰의 아들들 중 하나인 조지 스키피오 *는 모두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는지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모든 관심자들 가운데는 차가 단지 두 대밖에 없었습니다. 지형이 험하고 언덕이 많았으며, 당시에는 거의 모든 도로가 좋지 않았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아침 일찍 걸어서 출발하였습니다. 나는 내 조그만 차에 세 사람을 태우고 어느 정도 가다가 내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계속 걸어갔습니다. 나는 돌아가서 세 사람을 또 태우고 어느 정도 가서 내려 주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집회에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후에 조지는 결혼하여 네 자녀를 두었지만 14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아들 세 명은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야니 멀러는 아내인 아넬리스와 함께 세인트헬레나에 몇 차례 순회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인과 함께 야외 봉사를 하면, 그는 어김없이 다음 집에는 누가 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말해 줄 겁니다. 우리가 이 섬을 방문하여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할 때가 올 것인가?’라는 제목의 「왕국 소식」을 배부할 때, 섬 전체를 하루 만에, 그것도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다 돌아 버렸습니다.”

야니는 이 섬에 도착할 때와 떠날 때를 특히 잊지 못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배가 도착할 때, 형제들은 대부분 부두에 모여 우리를 환영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가 떠났던 날 눈물바다가 됐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이 모두 부두에 서서 잘 가라고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았는데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

2006년에는 125명이 이 섬 전역에 성서 진리를 전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기념식 참석자는 239명이었습니다. 이 섬의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1 대 30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앞으로의 전망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인종 간의 갈등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인종을 초월하는 독특한 “결합의 띠”가 있습니다. (골로새 3:14) 다른 사람들도 이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1993년에 많은 외국 형제들이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방문했습니다. 약 2000명의 증인들이 더반 공항에 나가서 미국과 일본에서 온 대표단을 환영하였습니다. 외국에서 온 대표단이 나타나자 그들은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형제들은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껴안았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 가운데는 유명한 정치 지도자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몇몇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분과 같은 연합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 문제들은 오래전에 해결됐을 것입니다.”

2003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라” 국제 대회는 참석자 모두에게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주요 중심 도시에서 국제 대회가 열렸으며, 또한 여러 곳에서도 작은 규모로 지역 대회들이 열렸습니다. 두 명의 통치체 성원—새뮤얼 허드와 데이비드 스플레인—이 국제 대회에 참석하여 연설을 했습니다. 그 대회에는 18개국에서 참석자들이 왔으며, 일부 참석자들은 전통 의상을 입고 와서 대회 분위기가 더욱 국제적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모든 대회의 참석자는 총 16만 6873명이었으며, 247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한 저닌은 「위대한 선생님에게 배웁시다」 책이 발표되자 이러한 말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선물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우리 아이들이 읽고 감동받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회중의 머리이신 예수께서는 이 불경건한 세상에서 우리가 힘겹게 싸우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나는 진심으로 여호와 하느님과 지상에 있는 그분의 종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세기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활동한 여호와의 증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충실한 사람들의 인내와 확고함에 관한 기록을 보며 기뻐합니다. 2006년에는 7만 8877명의 전도인이 8만 4903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2006년 기념식 참석자는 18만 9108명이었습니다.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분명 세계적인 밭의 일부인 이 지역에도 적용됩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4:35) 따라서 지금도 할 일이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증거가 이처럼 많으므로, 우리는 온 땅 곳곳에 있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 이렇게 외칩니다. “여호와께 승리의 함성을 올려라, 너희 온 땅 백성아.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겨라!]”—시 100:1, 2.

[각주]

^ 17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유색인’이란 단어는 혼혈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 29항 폴 스미트의 체험기는 「파수대」(영문) 1985년 11월 1일호 10-13면에 실려 있다.

^ 40항 조지 필립스의 체험기는 「파수대」(영문) 1956년 12월 1일호 712-719면에 실려 있다.

^ 61항 피트 벤첼의 체험기는 「파수대」(영문) 1986년 7월 1일호 9-13면에 실려 있다.

^ 97항 프란스 멀러의 체험기는 「파수대」 1993년 4월 1일호 19-23면에 실려 있다.

^ 231항 월드런 부부의 체험기는 「파수대」 2002년 12월 1일호 24-28면에 나온다.

^ 250항 조슈아 통과나의 체험기는 「파수대」 1993년 2월 1일호 25-29면에 나온다.

^ 266항 조지 스키피오의 체험기는 「파수대」 1999년 2월 1일호 25-29면에 나온다.

[174면 삽입]

세인트헬레나의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1 대 30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68, 69면 네모]

인종 격리 정책이란?

인종 격리 정책을 가리키는 아프리칸스어 “아파르트헤이트”는 문자적으로 “분리”를 의미하며, 1948년 선거 중에 국민당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국민당은 그해의 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든든한 지지에 힘입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양한 인종 집단들을 서로 엄격히 격리하는 제도가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백인 우월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추진된 이 정책이 채택됨에 따라 거주, 고용, 교육, 공공시설의 사용, 정치 등 생활의 기본적인 면들을 규제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주요 인종 집단은 백인, 반투족(아프리카 흑인), 유색인(혼혈인), 아시아인(인도인)으로 분류되었다. 인종 격리 정책 지지자들은 인종별로 ‘홈랜드’라고 하는 구역을 지정하여 그곳에서 살면서 고유의 문화와 전통에 맞게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일부 사람들에게 이론적으로 가능해 보였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총과 최루 가스와 으르렁거리는 개의 위협을 받으며 많은 흑인들은 얼마 안 되는 소유물만 가지고 집에서 쫓겨 나와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은행이나 우체국 같은 대부분의 공공시설에는 백인과 그 외의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식당이나 극장은 백인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백인들은 여전히 사업이나 집안일에 값싼 흑인 노동력을 이용하고 싶어 했다. 그 결과 많은 가족들이 서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예를 들어 흑인 남자들은 허가를 받아서 도시에 나가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하면서 남자 합숙소에 수용되었지만, 아내들은 홈랜드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로 인해 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겼고 부도덕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백인의 집에서 일한 흑인들은 보통 고용주의 소유지에 있는 숙소에 머물렀다. 가족들은 백인 거주 지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부모들은 한참 동안 가족들을 만날 수 없었다. 흑인들은 언제나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인종 격리 정책은 교육, 결혼, 고용, 재산권 등 생활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인종 간의 화합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부의 법이 하느님께 신성한 봉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지 않는 한 그 법에 복종하였다. (로마 13:1, 2)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인종 집단의 동료 숭배자들과 교제할 기회를 찾으려고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여러 차례 개혁을 단행하였고 인종 정책을 완화하였다. 1990년 2월 2일에 당시의 대통령 F. W. 데클레르크는 흑인 정당의 인가, 넬슨 만델라의 석방 등 인종 격리 정책의 철폐를 위한 조처를 발표하였다. 1994년에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다수 흑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인종 격리 정책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72, 73면 네모와 지도]

남아프리카 공화국—개요

국토

해안 지대는 폭이 좁고 지대가 낮다. 이 해안 지대를 따라 산맥들이 솟아 있고, 이어서 광대한 내륙 고원이 펼쳐져 있다. 이 내륙 고원이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고원의 가장 높은 곳은 동쪽의 인도양을 바라보는 쪽인데, 그곳의 드라켄즈버그 산맥은 높이가 3400여 미터에 달한다. 국토 면적은 남한의 약 12배이다.

주민

인구는 4400만 명이며 배경이 매우 다양하다. 2003년에 정부에서 발행한 인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주민들은 다음의 네 그룹으로 나뉜다. 아프리카 흑인 79퍼센트, 백인 9.6퍼센트, 유색인 8.9퍼센트, 인도인 또는 아시아인 2.5퍼센트.

언어

11개의 공용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영어를 사용한다.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순으로 나열하면, 줄루어, 코사어, 아프리칸스어, 세페디어, 영어, 츠와나어, 세소토어, 총가어, 스와지어, 벤다어, 은데벨레어이다.

생활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금과 백금 생산량은 세계 제일이다. 수백만 명이 광업이나 농업 또는 식품, 자동차, 기계, 직물 등을 생산하는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다.

기후

케이프타운을 비롯한 최남단 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로, 겨울에는 비가 많이 오고 여름에는 건조하다. 내륙 고원은 기후가 달라서, 여름에는 뇌우가 쏟아져 더위를 식혀서 상쾌하게 해 주고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고 날씨가 맑다.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나미비아

나미브 사막

카투투라

빈트후크

보츠와나

칼라하리 사막

가보로네

스와질란드

음바바네

레소토

마세루

테야테야넹

남아프리카 공화국

크루거 국립공원

닐스트룸

부시버크리지

프리토리아

요하네스버그

클레르크스도르프

던디

은드웨드웨

피터마리츠버그

더반

드라켄즈버그 산맥

스트랜드

케이프타운

프리토리아

미드랜드

크루거스도르프

카기소

요하네스버그

일런즈폰테인

소웨토

에이켄호프

하이델버그

[삽화]

케이프타운

희망봉

[80, 81면 네모와 삽화]

처음으로 증거한 때

아베드네고 라데베

출생 1911년

침례 1939년

약력 콰줄루나탈의 피터마리츠버그에 있었던 최초의 흑인 회중에서 섬겼으며 1995년에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다.

나는 피터마리츠버그 인근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감리 교회의 전도사였습니다. 1930년대 중반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 얼마를 받게 되었습니다. 나는 읽은 내용에 동감하였지만 증인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습니다.

같은 합숙소에 있던 사람이 내게 「천당과 연옥」(Heaven and Purgatory)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읽은 내용은 정말 처음 접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소책자를 읽고 부활과 땅에서의 희망에 관해 성서가 알려 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케이프타운에 있는 지부 사무실로 편지를 써서 서적 몇 부를 주문하였습니다.

시내에서 증인들을 보았지만 말을 건네기가 망설여졌습니다. “백인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 말고, 백인이 먼저 말을 건넬 때까지 기다리라”라는 부족의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퇴근길에, 증인들의 확성차가 내가 살던 합숙소 밖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합숙소 문에 다다를 무렵, 여름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나이 든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대니얼 얀센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증인에 대해 알아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러더퍼드 형제의 강연을 들려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얀센은 내 손에 마이크를 쥐어 주면서 “여기 모인 사람들도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들은 내용을 줄루어로 이야기해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연사가 한 말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얀센은 “기억나는 대로만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여호와에 관해 처음으로 증거한 때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얀센은 내게 함께 전파 활동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먼저 그는 내가 성서의 가르침과 온전히 일치하게 기본적인 교리를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만족스러워했습니다. 나는 4년 동안 백인 부회 즉 회중과 연합하였는데, 흑인은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규모가 작아서, 한 형제의 집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당시에는 각 전도인들이 증거 카드를 받아서 그것을 가지고 집주인들에게 성서의 소식을 알려 주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축음기와 4분짜리 강연이 녹음된 몇 장의 레코드와 출판물 가방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전도인들은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축음기를 바로 틀 수 있게 준비해 놓고 바늘도 새것으로 갈아 놓았습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면 전도인은 인사를 하고 녹음된 강연을 소개하는 증거 카드를 보여 주었습니다. 강연이 반 이상 진행되면 전도인들은 가방을 열어서 강연이 끝났을 때 집주인에게 전할 관련 서적을 준비하였습니다.

[88, 89면 네모와 삽화]

충실한 모범

조지 필립스

출생 1898년

침례 1912년

약력 1914년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다. 거의 40년 동안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감독자로 봉사하였고 1982년에 충실한 가운데 사망하였다.

조지 필립스는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다. 그는 열여섯 살 때인 1914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1917년에는 그리스도인 중립 때문에 투옥당하였다. 1924년에 러더퍼드 형제는 직접 그에게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봉사하도록 권하였다. 러더퍼드 형제는 “조지 형제, 1년이나 아니면 그보다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겁니다” 하고 말했다.

조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받은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영국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으며, 전파 활동에 관련된 것들은 하나같이 규모가 훨씬 더 작았습니다. 당시에는 전 시간 봉사자가 6명뿐이었고 조금이라도 봉사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약 4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구역은 케이프에서 케냐까지 전부 다였습니다. 어떻게 1년 안에 그 넓은 구역을 다 돌면서 효과적으로 증거한단 말입니까? 하지만 걱정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관건은, 일을 시작하고 가지고 있는 도구들을 잘 이용하고 결과는 여호와께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여러 인종이 살고 있고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복잡한 나라입니다. 그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알아 간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 광대한 밭에서 활동을 조직하고, 필요한 기초를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여호와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 넘치게 공급해 주셨고 나는 그분의 보호와 인도와 축복을 풍부히 경험하였습니다. 나는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득이 된다’는 것과 ‘가장 높으신 분의 은밀한 장소’에 계속 거하려면 그분의 조직에 밀접히 고착하면서 그분의 일을 그분의 방식대로 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디모데 첫째 6:6, 개역한글판; 시 91:1.

[92-94면 네모와 삽화]

가족이 영적으로 굳건하도록 도움

요세퍼트 부사네

출생 1908년

침례 1942년

약력 한 가족의 가장인 그는, 고향인 콰줄루나탈의 줄루란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하네스버그에 와서 일하던 중에 진리를 배웠다.

나는 1908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줄루란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가족은 검소한 농장 생활에 만족하였지만, 나는 열아홉 살 때 던디 읍에서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뒤에 나는 많은 젊은이들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금광업의 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에서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곳으로 이사해서 여러 해 동안 광고 전단을 붙이는 일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볼거리들과 기회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생활이 우리 부족의 전통적인 도덕관을 침식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비록 많은 젊은이가 시골에 사는 자기 가족을 잊었지만 나는 결코 가족을 잊지 않았고 고향의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돈을 보냈습니다. 1939년에 나는 줄루란드 출신의 클로디나와 결혼하였습니다. 나는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400킬로미터 떨어진 요하네스버그에서 일을 계속했습니다. 대부분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는 가족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지만 가족들이 수준 높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동안 친구인 엘리아스와 나는 참종교를 찾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인근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어느 곳도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에 엘리아스가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습니다. 나는 엘리아스를 따라, 요하네스버그에 처음으로 형성된 여호와의 증인의 흑인 회중과 정기적으로 연합하였습니다. 1942년에 여호와께 헌신을 한 후, 소웨토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줄루란드의 집으로 갈 때마다 내 믿음을 아내에게 전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아내는 교회 활동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우리 출판물을 자기 성서와 비교해 보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말씀의 진리가 점차 아내의 마음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에 아내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열정적인 그리스도인 봉사자가 되어 성서 진리를 이웃에게 전하였고 우리 자녀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몇몇 사람이 성서 진리를 깨닫도록 돕는 행복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1945년경에 요하네스버그 부근에는 네 개의 흑인 회중이 있었는데, 나는 스몰마켓 회중의 부회의 종(현재의 주임 감독자)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윽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는 기혼 남자들은 가족에게 돌아가서 가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책임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라는 성경적 지침을 받았습니다.—에베소 5:28-31; 6:4.

그래서 1949년에 나는 가족을 여호와의 방법대로 돌보기 위해 요하네스버그에서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축 검사관의 조수로서, 가축을 소독액 통에 담그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봉급이 적어서, 여섯 자녀가 있는 가족을 부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비용을 대기 위해 집에서 재배한 야채와 옥수수를 팔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우리 가족이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마태 6:19, 20에 기록된 예수의 지침을 청종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적인 보물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보물을 얻으려면, 요하네스버그 주위의 광산에서 금을 캘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매일 저녁 나는 자녀들에게 성구를 하나 읽어 주고, 각자 느낀 바를 내게 말하게 하였습니다. 주말에는 그들을 번갈아 가며 전파 활동에 동반했습니다. 농장에서 농장으로 걸어가면서 성경적인 이야기를 나누었고 성서의 높은 도덕적 표준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습니다.—신명 6:6, 7.

여러 해 동안, 우리 가족 외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 후대를 베풀 수 있는 가족이 없었습니다. 이 부부들은 우리 자녀에게 훌륭한 영향을 미쳤으며, 자녀에게 전 시간 복음 전파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5남 1녀를 두었습니다. 여섯 자녀 모두 이제는 성장했고 영적으로 강합니다. 여호와의 조직에서 지침을 베풀어 주어서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가족의 영적 필요에 더 잘 주의를 기울이도록 격려해 준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합니다! 얻은 축복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큽니다.—잠언 10:22.

요세퍼트 부사네 형제는 1998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히 여호와를 섬겼다. 고인의 장성한 자녀들 역시 영적 유산을 계속 소중히 여기고 있다. 아들들 중 한 명인 티오필러스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섬기고 있다. 부사네 형제에 관해 더 자세히 알기 원한다면, 「깨어라!」 1993년 10월 15일호 19-22면을 읽어 볼 수 있다.

[96, 97면 네모와 삽화]

“왕국 봉사는 내가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해 주었다”

토머스 스코사나

출생 1894년

침례 1941년

약력 파이오니아 임지에서 사람들을 영적으로 돕기 위해 다섯 가지 언어를 배웠다.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소책자 몇 부를 1938년에 한 교사에게서 받았습니다. 당시에 나는 요하네스버그에서 동쪽으로 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델마스에 있는 감리교회의 전도사였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성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영혼이 불멸이며 악한 자들은 지옥에서 고초를 당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 소책자들을 읽고는 성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 37:38; 에스겔 18:4) 또한 나는 하느님의 백성들은 대부분 하늘에 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점도 알 수 있었습니다.—시 37:29; 마태 6:9, 10.

나는 이러한 진리를 배우게 되어 매우 기뻤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동료 전도사들이 반대하였고 나를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에서 탈퇴하여 델마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작은 집단과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1941년에 침례를 받았고 1943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루스텐버그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은 왕국 선포자들이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나는 타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곳 추장에게 머물 곳과 체류 허가를 신청해야 하였습니다. 그는 허가를 받으려면 12파운드를 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돈을 낼 형편이 아니어서 그곳에 살던 친절한 백인 형제가 그 돈을 지불해 주고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금전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내가 사회한 연구생들 중 한 명은 잘 발전하여, 내가 그 임지를 떠난 후에 회중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에 나는 더 서쪽에 있는 리히텐버그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그 도시의 흑인 거주지에 머무를 수 있도록 백인 감독관에게 신청해야 했습니다. 그는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인 마피켕에 있는 백인 파이오니아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 백인 감독관을 찾아갔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곳에 오는 것이 싫소. 당신들은 지옥이 없다고 가르치는데, 사람들이 지옥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누가 옳은 일을 하겠소?”

그처럼 거절당했기 때문에 나는 마피켕으로 갔으며, 지금도 그곳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국어가 줄루어이지만, 진리를 배운 직후 여호와의 증인의 출판물을 모두 읽기 위해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영적으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봉사의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세소토어, 코사어, 츠와나어도 배웠고, 아프리칸스어도 조금 배웠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 헌신하도록 도왔으며, 그 사람들 중 네 명은 지금 장로입니다. 전 시간 봉사는 또한 내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이가 많이 들 때까지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지식을 얻고 야외에서 성공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혼자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성령으로 나를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정기적인 전 시간 왕국 봉사는 내가 여호와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었으며, 나는 그분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회견은 1982년에 있었다. 스코사나 형제는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속 충실한 행로를 걸었다. 그는 1992년에 사망하였다.

[100, 101면 네모와 삽화]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지역 감독자

밀턴 바틀릿

출생 1923년

침례 1939년

약력 최초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임명된 길르앗 출신 선교인. 특히 흑인 지역에서 왕국 권익의 증진을 위해 부지런히 일했다.

밀턴 바틀릿은 1946년 12월에 케이프타운에 도착하였으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된 최초의 길르앗 출신 선교인이었다. 그는 순회 활동과 지역 활동을 시작하라는 임무를 받아 수행하였다. 당시 바틀릿 형제는 유일한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그 후로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특히 흑인들 가운데서,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형제들은 밀턴을 깊이 사랑하였다. 밀턴은 차분한 성격이어서 형제들이 문제들을 가져와 이야기할 때면 주의 깊이 잘 들었다. 그래서 그는 형제들이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들에 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 자세하면서도 정확한 보고를 보낼 수 있었다. 그 덕분에 형제들의 행실과 숭배 방식을 성서 원칙과 더욱더 일치시키도록 도울 수 있었다.

밀턴은 성경 지식이 풍부하였고 잘 가르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그러한 도움을 베풀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의지가 강하고 끈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특성은 백인인 그가 흑인 마을에 들어갈 때 인종 격리 정책을 시행하는 관리들에게 허가를 받기 위해 꼭 필요한 특성이었다. 편협한 관리들은 종종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밀턴은 도움을 받기 위해 시의원들 같은 더 높은 당국자들을 찾아가야 하였다. 그런 다음에는 의회에서 다음 회의를 갖고 호의적이지 않은 결정을 번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이러저러한 방법을 사용하여 밀턴은 대부분의 흑인 지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때때로 잠복 경찰들이 밀턴의 연설 내용을 알아보려고 파견을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이유 한 가지는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여호와의 증인은 공산주의 선전원이라고 거짓 고발을 하였기 때문이다. 한번은 흑인 경찰 한 명이 대회를 살펴보러 파견을 나온 적이 있었다. 약 20년이 지난 후에 밀턴은, “그것은 잘된 일이었습니다. 그 경찰이 그 주말에 들은 것 때문에 참숭배를 받아들였고, 지금도 영적으로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했다.

밀턴이 스물세 살의 나이에 독신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3867명의 전도인이 있었다. 밀턴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26년을 봉사한 후에는 전도인 수가 2만 4005명에 달하였다. 1973년에 밀턴과 그의 아내 실라는 밀턴의 연로한 부모를 돌보기 위해 한 살 난 아들 제이슨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페이지에 있는 사진은 1999년에 그들 부부가 확장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봉헌식에 참석했을 때 찍은 것이다. 그들의 사랑에 찬 수고를 기억하고 있는 오래된 많은 사람들을 26년 만에 만날 수 있어서 그들은 정말 기뻐하였다!

[삽화]

밀턴 바틀릿과 실라 바틀릿 부부, 1999년

[107면 네모와 삽화]

독특한 배경

인상적인 명소인 테이블 산은 케이프타운 시의 멋진 배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케이프타운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름에는 테이블 산의 평평한 꼭대기가 가끔씩 두꺼운 구름에 아름답게 덮이는데, 적절하게도 이 구름을 가리켜 “테이블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산비탈을 타고 올라가는 강한 바람으로 인해 수증기가 응결되어 테이블 산 위에 두꺼운 구름이 생겨서 일어난다.

[114-117면 네모와 삽화]

구금 기간에 충절을 지키다

로언 브룩스와의 회견

출생 1952년

침례 1969년

약력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1970년 12월부터 1973년 3월까지 구금되었다. 1973년에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고, 1974년에 베델에 들어갔다. 현재 지부 위원이다.

구금되어 있던 군 교도소 막사는 어떤 곳이었습니까?

우리가 구금된 막사는 각각 34개의 감방이 두 줄로 마주 보고 있는 긴 건물이었는데, 마주 보고 있는 감방들 사이로 통로가 있었고 통로 한가운데는 배수구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로 2미터, 세로 1.8미터의 독방에 한 명씩 갇혀 있었습니다. 감방에서 나올 수 있는 때는 하루에 두 번뿐이었습니다. 아침에 세수와 면도를 하고 변기통을 비울 때, 오후에 샤워할 때를 제외하고는 나올 수가 없었지요. 편지는 보내지도 받지도 못했습니다. 성서 외에는 책이 허가되지 않았고, 펜이나 연필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접견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은 구금되기 전에 성서를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와 같은 책들과 합본해 두었습니다. 그 책은 크고 오래된 아프리칸스어나 네덜란드어 가족용 성서와 비슷했기 때문에, 헌병들은 다른 책이 합본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성서 출판물을 받아 볼 있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는 가능할 경우 출판물을 몰래 들여왔습니다. 우리는 개인 물건을 모두 큰 가방에 넣어 빈 감방에 두었습니다. 그런 물건 중에는 세면도구도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헌병은 필요한 세면도구를 가방에서 꺼내 오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 가방에 출판물도 두었습니다.

한 형제가 헌병에게 말을 걸어 주의를 끌면 다른 형제는 책을 바지나 속셔츠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감방에 돌아와서는 숨기기 좋게 책을 접지 단위로 나눠서, 모두가 읽을 수 있게 돌렸습니다. 책을 숨길 곳은 많았습니다. 어떤 감방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사방에 구멍이 있었으니까요.

감방을 불시에 수색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한밤중에도 수색을 당했지요. 헌병들은 언제나 출판물을 조금 찾기는 했어도 결코 다 찾지는 못했습니다. 마음씨 좋은 헌병들 중 하나가 종종 방 수색이 있을 때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출판물을 비닐에 싸서 배수관 속에 넣어서 밀어 올려놓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바람이 몹시 쳐서, 출판물 묶음 하나가 감방 건물 안의 배수구로 떠내려 와서 우리는 당황했습니다. 수감되어 있던 군인 몇이 그것으로 축구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갑자기 헌병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감방으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아무도 그 출판물 묶음에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우리는 얼마 후에 감방에서 나왔을 때 그것을 감방 안으로 가져왔습니다.

구금되어 있는 동안에 충절의 시험을 받았습니까?

늘 받았지요. 군 교도소 관리들은 항상 우리를 시험할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우리에게 매우 잘해 주었습니다. 가외로 음식을 주고, 데리고 나가서 운동도 시켜 주고, 일광욕까지도 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는 갑자기 군복을 입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우리가 거부하면, 이전처럼 우리를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의 일입니다. 플라스틱 군용 헬멧을 쓰라고 하더군요. 우리가 거부하자, 소장은 몹시 화가 나서 그때부터 샤워도 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당 물 한 양동이를 받아 감방에서 씻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신발이 없었습니다. 발에서 피가 나는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신발을 만들었습니다. 바닥에 광을 내는 데 쓰는 낡은 담요 조각을 모으고, 구리선을 구해서 한쪽은 넓적하게 만들고 다른 쪽은 뾰족하게 만들었습니다. 넓적하게 만든 쪽에 구멍을 내어 그 구리선을 바늘로 썼습니다. 담요에서 실 가닥을 뽑아 담요 조각들을 꿰매서 신발을 만들었지요.

한번은 아무런 사전 통고도 없이 세 사람이 한 감방에 들어가라고 명령하더군요. 비좁기는 했지만 그렇게 지내니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약한 형제들이 더 경험 많은 형제들과 지내도록 마련했습니다. 성서 연구와 야외 봉사 연습 시간도 가졌지요. 소장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들은 사기가 올라갔습니다.

소장은 이 방법이 실패한 것을 깨닫고는, 증인들은 모두 증인이 아닌 두 명의 수감자와 한 감방을 쓰라고 명령했습니다. 다른 수감자들은 우리와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받았지만, 질문을 하기 시작하더군요. 우리에게는 증거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결과, 그 수감자들 중 한두 명이 군사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이내 원래대로 한 감방에서 한 명씩 지내게 되었지요.

집회를 볼 있었습니까?

우리는 정기적으로 집회를 보았습니다. 모든 감방의 문 위에는 창문이 나 있었는데, 창문에는 철망이 쳐 있고 일곱 개의 쇠창살이 수직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담요의 양쪽 끝을 쇠창살 두 개에 감아 묶어서 작은 해먹을 만들어 거기에 걸터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걸터앉으면 건너편 감방의 형제들을 볼 수 있었고, 큰 소리로 말하면 같은 건물에 있는 다른 형제들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용할 성구를 토의했고, 잡지가 있으면 「파수대」 연구를 했습니다. 매일 일과가 끝날 때면 돌아가면서 공개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끼리 순회 대회 프로그램을 짠 적도 있었습니다.

장로 형제가 허가를 받아서 교도소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기념식을 볼 수 있을지가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체적으로 기념식 준비를 했지요. 건포도를 물에 불려 포도주를 만들고 배급받은 빵을 납작하게 만들어 말렸습니다. 한번은 허가를 받아서 밖에 있는 형제들로부터 작은 병에 든 포도주 한 병과 무교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졌습니다. 법이 바뀌어 우리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종교적 병역 거부자들은 일정 기간의 형을 한 번만 선고받으면 재차 형이 선고되지 않았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22명의 형제가 석방된 후에, 구금되어 있던 88명의 형제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접견을 할 수 있었고 편지도 보내고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석방되고 나서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바깥 생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았지요. 부모님과 형제들은 우리가 회중에서 조금씩 더 많은 책임을 맡도록 친절하게 도와주었습니다.

그 시절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때의 경험은 유익했습니다. 믿음의 시험은 우리를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었고 인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성서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고 매일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신뢰하는 법을 확실히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충실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희생을 하고 나니, 계속 인내하면서 가능한 한 전 시간 봉사를 하여 가장 좋은 것을 그분에게 바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126-128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위험한 때에 여호와를 신뢰하였다

제블론 은쿠말로

출생 1960년

침례 1985년

약력 진리를 알기 전에 성서를 흑인의 편에서 해석하는 라스타파리교의 교인이었다. 침례를 받고 얼마 안 있어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다. 현재 아내인 노무사와 함께 순회 봉사를 하고 있다.

내 파이오니아 짝과 나는 크루거스도르프 베델의 건축 공사를 도운 후에, 항구 도시 더반 근처에 있는 더 크게 필요한 곳인 콰은덴게지 시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하고 나서 며칠 후에 한 정치 집단에서 상황을 알아보려고 다섯 명의 청소년을 우리 집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 집단으로부터 도시를 지키고 있으니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 지역에서는 줄루어를 사용하는 이 두 집단 사이의 반목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폭력 사태의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된 원인이 백인들의 통치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전쟁으로 황폐되어 국민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을 언급하고는,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 청소년들은 흑인들이 정권을 잡아도 범죄와 폭력과 질병은 여전할 것이라는 데 동의하더군요. 이어서 우리는 성서를 펴서 하느님의 왕국만이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정부라는 점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며칠 밤이 지나고 나서,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자유의 찬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총을 든 사람들이 보이더군요. 집들이 불타고 있었고 사람들은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겁이 난 우리는 여호와께 힘을 주셔서 위협이나 협박에 용기를 잃거나 충절을 꺾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예수를 부인하지 않은 순교자들을 생각했습니다. (마태 10:32, 33) 그런데 갑자기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몰려와서 우리 집 문을 두드리더군요. 그들은 인사도 않고 다짜고짜 인텔레지(주술사가 처방해 주는 부적과 같은 약을 가리키는 줄루어)를 사야 하니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두르지 말라고 부탁하면서, “주술사가 주술로 사람을 죽이도록 선동하고 있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도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친족이 주술 때문에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하나같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우리는 성서를 펴서 그들의 대장에게 신명기 18:10-12에 기록되어 있는 주술에 대한 하느님의 견해를 읽어 달라고 했지요. 그가 성구를 읽고 난 후에, 우리는 그들에게 성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잠깐 조용한 틈을 타서 우리가 여호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그들의 말을 듣는 것 중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무 말도 않고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여러 차례 무사히 넘길 수 있었으며, 여호와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저녁 다른 정치 집단이 우리 집에 와서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기를 사야 하니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이 위험한 것이 반대편 정치 집단 탓이라고 하면서 해결책은 더 좋은 무기로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돈을 주든지 아니면 결과를 감수하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의 조직이 인권을 보장하고 다른 사람의 양심을 존중하는 헌장을 채택한 바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옳다고 믿고 있는 헌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느니 차라리 죽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죽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우리는 여호와의 조직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헌법”은 성서이고, 성서에서는 살인을 정죄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그 집단의 대장은 동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입장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분명히 밝힌 것은 우리 도시의 발전을 위해, 이를테면 양로원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하거나 이웃 사람이 병원에 갈 돈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돈을 내겠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돈을 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그 집단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우리는 악수를 하면서 그들에게 차분하게 처신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131-134면 네모와 삽화]

독신 자매들의 100년간의 번역 봉사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 가족 중에는 독신의 선물을 가치 있는 왕국 봉사에 사용한 여러 형제 자매들이 있다. (마태 19:11, 12) 다음의 세 자매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공급하는 영적 양식을 번역하는 일을 한 기간을 모두 합하면 100년이 된다.—마태 24:45.

마리아 몰레포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림포포 주의 몰레포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아직 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 언니 알레타가 나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자,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다른 언니가 나에게 교사 자격을 딸 수 있도록 3년 동안 대학 등록금을 대 주겠다고 했습니다. 고맙기는 했지만, 언니의 제의를 거절했지요. 여호와를 섬기고 싶었고 또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두 언니 알레타와 엘리자베스와 함께 봉사하고 싶었으니까요. 1953년에 침례를 받고, 1959년에 신청서를 작성하여 정식으로 정규 파이오니아로 임명되기 전까지 6년 동안 이따금 파이오니아 시간을 하곤 했습니다.

1964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나에게 영적 양식을 세페디어로 번역하는 일을 비상근으로 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계속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며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66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베델 봉사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더군요. 매일 야외 봉사를 할 수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견해를 조정할 수 있었어요. 파이오니아 시간만큼은 할 수 없어도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를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때로 생각한 것이지요. 주말 야외 봉사를 정말 재미있게 하다 보니, 너무 늦게 돌아와 토요일이나 일요일 저녁 식사 시간을 놓치곤 했습니다. 나이 든 베델 자매들이 토요일 오전에 쉴 수 있도록 조정이 되자, 이 여유 시간을 야외 봉사에 사용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베델에 들어와서 처음 8년 동안은 베델 숙소가 아닌 별도의 건물에서 다른 번역자 자매와 함께 방을 썼습니다. 인종 격리 정책을 시행하던 당국이 처음에는 우리가 백인 형제들 가까이서 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1974년에는 더 이상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흑인 번역자들은 흑인 지역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나는 템비사에 사는 한 증인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매일 베델까지 먼 거리를 다녀야 했습니다. 크루거스도르프에 새 베델이 건축되었을 때, 인종 격리 정책을 시행하던 정부가 정책을 완화하기 시작해서 나는 다시 다른 베델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베델에서 번역자로 계속 일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독신의 선물을 사용하여 그분을 섬긴 나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동생 안나도 계속 독신으로 지내기로 하고 지난 35년 동안 전 시간 복음 전파 활동을 즐겁게 수행하는 것을 보는 축복까지 누리게 해 주셨습니다.

첼렝 모체켈레

나는 레소토의 테야테야넹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종교심이 강해서 나를 비롯한 자녀들을 억지로 교회에 데리고 다녔습니다. 나는 교회에 가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런데 이모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고 어머니는 이모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지 않으니 좋더군요. 하지만 세상이 좋고 노는 것이 좋아서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1960년에는 학업을 마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로 갔습니다. 집을 떠날 때 어머니는 나에게 간곡하게 “첼렝아, 요하네스버그에 가거든 증인들을 찾아보고 증인이 되려고 해 보렴” 하고 부탁했습니다. 요하네스버그에 처음 도착해서, 나는 마음껏 놀 기회에 정신이 팔렸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들이 대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는 것을 알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말이 생각나서 소웨토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했을 때, “여호와 하느님, 도와주세요. 저도 증인이 되고 싶어요”라고 기도한 생각이 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7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레소토에 있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에 어머니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1968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에서는 나에게 전 시간 세소토어 번역자로 일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어머니와 함께 집에 살면서 이 임명을 수행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나는 가족에게 전 시간 봉사를 중단하고 가족을 돕기 위해 직업을 가지면 어떻겠느냐고 했지요. 하지만 어머니와 침례를 받은 막내 여동생 리오펠로는 그런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리오펠로는 전 시간 번역자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나를 지원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1990년에 나는 크루거스도르프의 새 베델 시설에서 봉사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계속 번역을 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계속 독신으로 지내기로 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처럼 행복하고 의미 깊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스 은쿠나

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동부에 있는 부시버크리지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인 어머니는 아버지의 수입이 적어서 전 시간 일을 했지만 나를 진리 안에서 양육했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글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는 연로한 자매와 함께 주 중에 전파 활동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시력이 약해서 내가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이 봉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지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후에도 계속 그 자매와 오후에 야외 봉사를 했습니다. 전 시간 봉사자들과 교제하다 보니 봉사에 대한 사랑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편에 서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쁩니다. 열 살 때쯤에 나는 여호와께 평생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하고 싶다고 기도로 아뢰었습니다. 1983년에 침례를 받고 가족의 물질적 필요를 돌보기 위해 몇 년 동안은 일을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게 되어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려는 목표를 이루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내 월급 관리를 어머니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델 가족이 되어 줄루어 번역자로 봉사하기 위해 베델 봉사 신청을 했습니다. 그 신청이 받아들여지자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베델에서 독신 자매로 봉사하면서 많은 기쁨을 누렸습니다. 아침 숭배 때 듣는 해설은 야외 봉사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배경이 다른 동료 숭배자들 가까이서 함께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 성품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나는 자녀가 없지만 영적인 자녀와 손자녀는 많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결혼해서 가정을 가졌더라면 그런 축복은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 독신 자매들은 베델 번역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총 36명이 여호와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숭배자가 되도록 도왔다.

[146, 147면 네모와 삽화]

산의 장관

드라켄즈버그 산맥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가로질러 약 1050킬로미터나 뻗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한 부분은 콰줄루나탈 주와 레소토 사이의 자연 국경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을 가리켜 흔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위스라고 한다.

웅장한 센티널 봉과 완만하지만 위험한 멍크스카울 봉 그리고 옆면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어서 아주 위험한 데블즈투스 봉과 같은 험준한 산봉우리들은 모험심 강한 등산가들을 유혹한다. 그러한 산에 오르는 것은 위험하다. 하지만 산등성이에 오르는 여러 개의 길은 가파르기는 해도 안전하며 특별한 등산 장비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산행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따뜻한 옷과 텐트와 예비 식량을 챙기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산등성이는 때때로 몹시 춥고 밤에는 바람이 세다.

해마다 수많은 등산객들과 야영객들과 등산가들은 스트레스와 공해에 찌든 도시를 떠나서 신선한 산속 공기를 쐬고 가슴속까지 시원한 상쾌한 산속의 물을 마시고 웅장한 산을 보려고 이곳을 찾는다.

[삽화]

부시먼족이 바위에 그려 놓은 그림

[158, 159면 네모와 삽화]

영매술과 일부다처 생활을 청산하다

아이작 체흘라

출생 1916년

침례 1985년

약력 그리스도교국에 환멸을 느낀 그는 진리를 알기 전에 부유한 주술사였다.

아이작과 세 친구—마틀라바네, 루카스, 필립—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동부에 있는 세쿠쿠네 산맥 지방에서 자랐다. 이 네 청년은 교회 성원들의 위선을 보고 사도파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네 사람은 함께 참종교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은 서로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네 친구 중 세 사람은 마침내 각자의 아내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는 유명한 주술사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아이작이 주술사가 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결국 부자가 되었다. 그에게는 소 100마리가 있었고 은행에는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다. 부자들이 전통에 따라 으레 여러 명의 아내를 두듯이, 아이작도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한편, 마틀라바네는 아이작을 찾아서 세 명의 옛 친구들이 참종교를 어떻게 찾았는지 알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작은 마틀라바네를 다시 만나 기뻤으며 옛 친구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된 이유를 몹시 알고 싶었다. 아이작과 「땅에서 영원히 사는 길」 팜플렛으로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 팜플렛의 현지어판에 나오는 17번 삽화에는 아프리카인 주술사가 점을 보러 온 사람에게 점을 쳐 주기 위해 땅에 뼛조각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작은 함께 나와 있는 신명기 18:10, 11을 통해 그러한 영매술을 하느님께서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또한 여러 명의 아내를 둔 남자가 나오는 25번 그림을 보고는 마음이 괴로웠다. 그 그림에는 참그리스도인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없음을 알려 주는 고린도 첫째 7:1-4이 나와 있다.

아이작은 성경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진심으로 원하였다. 그래서 나이가 68세나 되었지만, 둘째 부인을 내보내고 본부인인 플로리나와 법적으로 결혼했다. 또한 주술사 일도 그만두고 점을 칠 때 쓰는 뼛조각을 없애 버렸다. 한번은 아이작이 성서 연구를 하고 있을 때, 고객 두 사람이 멀리서 왔다. 아이작이 주술사로 일하고서 받지 못한 550랜드(당시 돈으로 약 14만 원)를 주기 위해서였다. 아이작은 그 돈을 받지 않고 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면서, 자신은 이전에 하던 일을 그만두었으며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작은 목표를 이루었다. 1985년에 아이작은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았으며, 현재 90세이고 지난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로 섬겨 왔다.

[124, 125면 도표와 그래프]

남아프리카 공화국—연대표

1900

1902년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들어오다.

1910년 윌리엄 W. 존스턴이 더반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다.

1916년 “창조 사진극”이 들어오다.

1917년 지부 사무실을 케이프타운으로 이전하다.

1920

1924년 인쇄기가 케이프타운으로 운송되다.

1939년 「위안」이 최초로 아프리칸스어로 인쇄되다.

1940

1948년 케이프타운 부근에 왕국회관이 건축되다.

1949년 줄루어 「파수대」가 인쇄되다.

1952년 베델이 일런즈폰테인에 완공되다.

1979년 TKS 윤전 오프셋 인쇄기가 설치되다.

1980

1987년 크루거스도르프에 새로운 베델이 건축되다. 1999년에 확장되다.

1992년 소웨토에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세워지다.

2000

2004년 인쇄 시설이 확장되다. 만 롤란트 리토만 인쇄기로 출판물을 생산하다.

2006년 7만 8877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기록하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80,000

40,000

1900 1920 1940 1980 2000

[148, 149면 도표와 삽화]

여러 가지 언어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쇄 시설에서는 「파수대」를 33개 언어로 생산한다

다양한 옷차림

아프리카에서는 화려하고 다양한 민속 의상과 장신구와 직물 디자인을 볼 수 있다

줄루어

인사 “사니보나”

모국어 사용자 수 10,677,000 *

전도인 수 29,000 *

세소토어

인사 “두멜랑”

모국어 사용자 수 3,555,000

전도인 수 10,530

세페디어

인사 “토벨라”

모국어 사용자 수 4,209,000

전도인 수 4,410

총가어

인사 “세와니”

모국어 사용자 수 1,992,000

전도인 수 2,540

코사어

인사 “몰웨니”

모국어 사용자 수 7,907,000

전도인 수 10,590

아프리칸스어

인사 “할로”

모국어 사용자 수 5,983,000

전도인 수 7,510

츠와나어

인사 “두멜랑”

모국어 사용자 수 3,677,000

전도인 수 4,070

벤다어

인사 “리 아 부사”

모국어 사용자 수 1,021,800

전도인 수 480

[각주]

^ 519항 모든 숫자는 대략적인 것임.

^ 520항 모든 숫자는 대략적인 것임.

[66면 전면 삽화]

[71면 삽화]

옐로우드

[74면 삽화]

스토펠 푸리

[74면 삽화]

「성경 연구」

[74면 삽화]

윌리엄 W. 존스턴과 더반 회중, 1915년

[74, 75면 삽화]

요하네스 창게와 가족

[75면 삽화]

최초의 지부 사무실은 이 건물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77면 삽화]

야피 테론

[79면 삽화]

헨리 뮈르달

[79면 삽화]

피트 데야헤르

[82면 삽화]

헨리 앙케틸, 1915년

[82면 삽화]

그레이스 테일러와 데이비드 테일러

[82면 삽화]

1931년에 나온 이 소책자에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결의문이 들어 있다

[84면 삽화]

1931년 케이프타운의 베델 가족, 조지 필립스와 스텔라 필립스도 있다

[87면 삽화]

코사어로 녹음하는 장면

[87면 삽화]

앤드루 잭과 프론텍스 인쇄기, 1937년

[87면 삽화]

아프리칸스어로 발행된 「위안」과 「파수대」의 첫 호

[90면 삽화]

대회 참석자들, 요하네스버그, 1944년

[90면 삽화]

광고판을 사용하여 강연을 광고하는 모습, 1945년

[90면 삽화]

축음기를 든 프란스 멀러와 피트 벤첼, 1945년

[95면 삽화]

형제들의 종인 헤르트 넬, 1943년

[95면 삽화]

시골에서 증거하는 모습, 1948년

[99면 삽화]

앤드루 마손도와 두 번째 아내 아이비

[99면 삽화]

루크 들라들라와 조이스 들라들라

[99면 삽화]

줄루어로 발행된 「파수대」 첫 호

[102면 삽화]

벨루 나이커의 모범 덕분에 190명의 친족이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02면 삽화]

고펄 쿱새미의 21세 때 모습과 아내 수실라와 함께한 현재 모습. 이 부부는 150명이 헌신하도록 도왔다

[104, 105면 삽화]

이저벨라 엘러레이

도린 킬고르

[108, 109면 삽화]

처음 지은 건물, 1952년

일런즈폰테인 베델, 1972년

[110면 삽화]

주요 대회

(위) 「어린이들」 책 발표, 1942년; (중간) 침례 지원자들, 1959년; (아래) 대표단들을 환영하는 코사족 합창단, 1998년

3428명이 작년에 침례를 받았다!

[120면 삽화]

일라이저 들로들로는 채찍질을 당하였다

[121면 삽화]

정규 파이오니아인 플로라 멀린다. 딸이 잔혹하게 살해당하였다

[122면 삽화]

모세스 니아무수아는 폭도에게 살해당하였다

[140, 141면 삽화]

가속화된 왕국회관 건축

카기소에 있는 회중이 지원을 받아 새로운 숭배 장소를 갖게 되었다

공사 전

공사 중

공사 후

하이델버그에 있는 라단다 회중은 새로운 왕국회관을 무척 좋아한다

아프리카의 37개 나라에서 7207채의 회관이 완공되었지만, 3305채를 더 지어야 한다!

[147면 삽화]

루소 가족, 현재

[150면 삽화]

미드랜드 대회 회관

[155면 삽화]

짐바브웨로 보내는 구호물자, 2002년

[155면 삽화]

번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156, 157면 삽화]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2006년

숙소동, 사무동, 새 인쇄기, 발송부

[156, 157면 삽화]

지부 위원회

피트 벤첼

로이소 필리소

로언 브룩스

레이먼드 음탈라네

프란스 멀러

피테르 데헤르

야니 디페린크

[161, 162면 삽화]

나미비아

윌리엄 하인델과 엘렌 하인델

코랄리 월드런과 딕 월드런, 1951년

나미비아 번역 사무소

[167면 삽화]

레소토

(맨 위) 순회 봉사 중인 아벨 모디바; (위) 한 선교인 주위에 모여든 동굴 주민들; (왼쪽) 페르올라 뉘그렌과 비르기타 뉘그렌

[168면 삽화]

보츠와나

노점상에게 증거하는 통과나 부부

오두막에서 오두막으로 봉사한다

[170면 삽화]

스와질란드

제임스 하케트와 돈 하케트

공예품 시장에서 진리를 전하는 모습, 음바바네

[170면 삽화]

세인트헬레나

「왕국 소식」 배부 운동이 하루 만에 끝나 버렸다 (아래) 제임스타운 항

[175면 삽화]

1993년 국제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