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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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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중심지에 있는 브리비바스 가(번역하면, ‘자유 거리’)에는 높이 42미터의 ‘자유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1935년에 제막된 이 기념비는 정치적 자유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1920년대 이래로 라트비아 사람들은 더 나은 자유 즉 성서 진리를 아는 데서 오는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영적 자유와 관련하여, 한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이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수십 년 동안 적들은 그 귀중한 소식의 전파를 막으려고 했으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펴보겠지만, 지상에 있는 그 어떤 세력도 전능하신 하느님이나 그분의 아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분들은 모든 국경을 초월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계시 11:15.

1201년에 리가를 건설한 튜턴 기사단 시대로부터 소련의 공산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는 독일, 러시아, 스웨덴, 폴란드 등 여러 강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았습니다. 1918년에 라트비아는 처음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1940년에 소련의 한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라트비아 공화국으로 독립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독립이 진정한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만 인류를 온전히 자유롭게 하실 수 있으며,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 가운데는 그분이 약속하신 자유에 관한 감동적인 소식도 들어 있습니다. (누가 4:18; 히브리 2:15) 이 좋은 소식은 어떻게 라트비아에 전파되었습니까? 우리의 이야기는 안스 인스베르그라는 선원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안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별이 총총한 어느 날 밤, 바다에서 나는 주께 마음을 토로하면서, 영과 진리로 그분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인도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요한 4:24) 고국인 라트비아에서 교회 신자들의 위선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그들과는 관련을 맺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14년에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만국 성경 연구생(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성서에 근거하여 제작한 ‘창조 사진극’을 보았습니다. 내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진리를 찾은 것입니다! 나는 1916년 1월 9일에 침례를 받고 전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돈이 떨어지게 되면 다시 배를 타곤 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얼마 후 안스는 라트비아에 왕국 소식을 널리 전하였습니다. 그는 자비를 들여 라트비아의 신문들에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광고들을 실었습니다. 크라스틴시라는 은퇴한 교사가 그 광고들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라트비아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최초로 여호와께 헌신한 성경 연구생인 것 같습니다. 안스는 1922년에 뉴욕 브루클린에 있던 성경 연구생의 세계 본부의 성원이 되었습니다. 뉴욕에서 그는 자주 부두에 가서 선원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했는데, 부두를 가리켜 “나의 멋진 연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1962년 11월 30일에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1925년에 북유럽 사무소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개설되었습니다. 이 사무소에서는 발트 삼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과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의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1926년 7월에는 영국 출신의 리스 테일러가 라트비아의 활동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리가에 사무실을 열고 소규모의 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참석자 20명 가운데 14명은 이 나라 최초의 야외 봉사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후 형제들은 경찰로부터 허가를 받아 공개 집회를 열었으며, 리가와 리예파야와 옐가바에서 975명이 성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이 강연은 많은 라트비아 사람들에게 제2 언어인 독일어로 제공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집회를 더 열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만민을 위한 자유”

1927년 9월에 라트비아, 스칸디나비아 반도, 에스토니아에서 온 약 650명의 사람들은 코펜하겐에서 세계 본부 성원인 조셉 F. 러더퍼드의 “만민을 위한 자유”라는 연설을 들었습니다. 이듬해에는 같은 제목의 소책자가 라트비아어로 번역되었으며, 콜포처 즉 파이오니아들은 이 소책자의 배부에 앞장섰습니다.

그러한 초창기 파이오니아 중에는 라트비아의 활동을 돕기 위해 독일에서 온 형제들이 적어도 10명은 되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당시에 22세였던 요하네스 베르거입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임명된 도시에 도착하면, 우선 공개 강연부터 했습니다. 그 결과, 라트비아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공개 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슬로카 시에서 극장을 빌렸고, 나는 겨울에 월요일마다 강연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멀리서 조랑말을 타고 왔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는데도 대단히 큰 봉사의 특권을 받았습니다.”

1928년에는 약 40명의 왕국 전도인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그중에서 침례받은 사람은 15명이었습니다. 1929년에는 사무실이 리가 시 샤를로테스 가로 이전하였으며, 9명이 더 침례를 받았고, 9만 부가 넘는 서적과 소책자가 야외에서 배부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1927년에 페르디난드 푸르크라는 젊은이는 어머니 에밀리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4년 뒤에 페르디난드는 자신의 고향 리예파야의 한 제과점에서 증거하던 중에 장래의 파이오니아 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제과점 주인은 옆에 있는 친형의 이발소로 쏜살같이 달려가더니, “형! 빨리 와 봐! 내 가게에 어떤 사람이 와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발사 하인리히 체흐는 성서 진리가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페르디난드의 짝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여러 도시를 다녔습니다.

반대가 일어나다

형제들은 소수였지만 열심히 봉사했기 때문에 교직자들은 화가 났습니다. 사실, 리가의 한 탁월한 교직자는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모두 파문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리예파야의 교직자들은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고 비방하고 출판물을 받지 말라는 글이 쓰여진 팜플렛을 배부하였습니다. 또한 주요 교회 신문을 통해서도 성경 연구생들을 헐뜯었습니다.

1929년에 정부는 교회의 압력에 못 이겨 라트비아에서 독일인 콜포처들을 추방했습니다. 1931년경에는 대부분의 성서 연구 보조서가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공격으로 인해 형제들은 활동을 중단했을까요? 라트비아 사무실에서는 이와 같이 썼습니다. “마귀의 반대[는] ··· 우리가 더욱더 충실함을 나타내도록 고무할 뿐입니다. 이곳에서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며 ··· 우리는 전파 활동에 매진할 것입니다.”

1931년에 영국 출신의 몇몇 형제들은 파이오니아들이 발트 해 연안 국가들로 가서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형제들 가운데 일부는 영적 양식을 이웃 나라인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에서 라트비아로 가져오는 일을 도왔습니다. 당시에 18세이던 에드윈 리지웰은 리투아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90대가 된 리지웰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와 내 봉사 짝인 두 명의 형제, 앤드루 잭과 존 셈페는 출판물을 라트비아로 가져가라는 특별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리가행 야간열차를 타서, 낮에 침구를 보관해 두는 좌석 밑 공간에 딱 맞게 만든 꾸러미에 출판물을 넣어 좌석 밑에 숨겼습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는, 부피가 늘어나도록 특수 제작한 가방에 옷가지와 함께 그 꾸러미들을 넣었습니다. 매번 신경이 곤두서는 배달을 하고 나면, 우리는 자축을 하곤 했지요. 당시에 활동을 감독하던 퍼시 던험 형제는 우리를 리가 시내의 식당으로 데리고 나가서 밥을 사 주었습니다.”

페르디난드 프루크는 종종 리투아니아 국경에서 형제들과 만났습니다. 형제들이 그에게 출판물을 주면, 그는 그 출판물을 헛간 다락의 건초 더미 속에 보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당국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그 후로는 경찰이 정기적으로 불시에 그의 집을 찾아와 금지된 출판물이 있는지 수색했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수색하던 중에 다락에 올라가기가 싫어서 페르디난드를 대신 다락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페르디난드는 경찰관을 달래려고 오래된 「파수대」 몇 부를 가지고 내려와서 넘겨주었습니다. 경찰관은 흡족해하며 떠났습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발전하다

앞서 언급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퍼시 던험은 1931년에 라트비아 밭을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14년 이전부터 성경 연구생으로 활동한 퍼시 형제는 경험 많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경험은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31년 말에 라트비아 사무실에서 보낸 보고서는 이러합니다. “이 세상 재물은 별로 없지만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부유한 사람들에 의해 어려움 속에서도 활동이 수행되고 있습니다. ··· 우리의 소식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 문의하는 사람들이 매주 사무실로 찾아와서 서적을 요청하며 언제 다른 책들도 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뒤이어 이 보고서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신권적인 발전에 관하여 이와 같이 덧붙였습니다. “최근에 리가에서 있은 모임에서 우리는 만장일치로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주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주신 새 이름[여호와의 증인]을 기쁜 마음으로 채택하였습니다.”

1932년에 사무실은 리가 시의 체수 가로 이전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아일랜드에서 봉사하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파이오니아 마거릿(매지) 브라운이 라트비아로 와서 퍼시 던험과 결혼하였습니다. 매지 자매는 1923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편 우리 활동에 대한 반대가 더욱 거세졌습니다. 매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1933년 2월 9일에 리가의 한 신문에서는 우리가 공산주의자라고 비방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초인종 소리가 나서 나가 보니 경찰들이 권총을 들이대면서 ‘손들어!’ 하고 소리치며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7시간 동안 그들은 금지된 서적을 찾으려고 집 안을 수색했습니다. 점심시간에 그들에게 차를 대접했더니 마시더군요.

형제들에게 공급할 출판물은 주로 다락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수색에 앞서 책임자인 경찰관은 남편의 호주머니를 조사하면서 열쇠 몇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건 무슨 열쇠요?’라고 경찰관이 묻자, 남편은 ‘다락 열쇠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경찰들은 다락에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책임자인 경찰관은 떠나기 직전에 열쇠들을 남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경찰들은 몇몇 출판물을 훑어보더니, 압수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출판물을 압수했고 그와 함께 편지들과 얼마의 돈 그리고 등사기와 타자기도 압수했습니다. 경찰은 라트비아인 증인 가족들의 집을 여섯 곳이나 이와 비슷하게 불시에 수색했지만 그릇된 일을 했다는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고, 기소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라트비아 전역에는 왕국 전도인이 50명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얼마의 법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형제들은 등록을 신청하였습니다. 1933년 3월 14일에 만국 성경 연구회가 정식으로 등록되었을 때 형제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형제들은 성서 출판물을 수입할 허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법적 지위를 이용하여 현지에서 얼마의 소책자를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라트비아어로 번역하는 일은 「리츠」지의 편집장이자 호평받는 작가인 알렉산드르스 그린스가 하였습니다.

얼마 가지 못한 등록

1934년 5월에 쿠데타가 일어나 계엄령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적들은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틈타 하느님의 백성이 공산주의자라고 고발하였습니다. 6월 30일에 내무부 장관은 만국 성경 연구회의 사무실을 폐쇄하고 4만 부가 넘는 서적과 소책자와 약간의 현금을 압수하였습니다. 해산시킨 법인의 청산 대리인으로는 교직자들이 선임되었습니다! 몇 차례 재등록을 신청하였지만 신청은 거부되었습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1940년 6월에는 러시아군이 라트비아에 진주하였습니다. 8월에 라트비아는 소련의 열다섯 번째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름이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뀌었습니다. 10월 27일에 던험 부부는 라트비아와 사랑하는 라트비아 형제 자매들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로 재임명되어, 그곳에서 퍼시는 1951년에 지상 행로를 마쳤고 매지는 1998년에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사무실 폐쇄, 인도하던 형제들의 추방, 전쟁 때문에 겪은 고난 그리고 그 후 수십 년간의 가혹한 공산 통치는 활동에 대단히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실, 1990년대 초가 되어서야 마침내 과거 편협한 시대의 잔악한 사슬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충실한 자들을 위로하신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라트비아에 있던 적은 수의 증인들은 본부와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위로를 통하여” 희망을 계속 살아 있게 하였습니다. (로마 15:4) 전쟁이 끝나고 나서 1940년대 말에 독일 지부에서는 마침내 리가, 벤츠필스, 옐가바, 쿨디가에 있는 몇몇 형제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리가에서 서쪽으로 16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도시인 쿨디가에 살던 에르네스츠 그룬드마니스는 독일에서 몇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20년 동안 진리 안에 있었던 그는 그 편지들에 적절한 때에 공급되는 영적 양식이 분명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편지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우리의 선하신 아버지 여호와 하느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분은 적절한 때 형제를 지원하고 강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편지에는 뒤이어 역대기 둘째 16:9의 이러한 말씀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눈으로 온 땅을 두루 살피셔서, 그분을 향하여 그 마음이 온전한 자들을 위하여 힘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그러한 편지들은 참으로 시기적절하고 격려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비공식 증거를 할 모든 기회를 활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마르타 발도네 자매는 벤츠필스에 있는 보건소에서 물리 치료사로 일하면서 환자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렇게 전파한 사람 가운데 알렉산드라 프레클론스카야(지금의 성은 레제프스키스)가 있는데,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마르타는 나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나는 그 이름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어요.”

알렉산드라의 아버지인 페테르는 1880년에 태어났는데, 페테르도 성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딸은 이렇게 썼습니다. “아버지는 1917년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1914년부터 1924년까지는 페트로그라드, 1924년부터 1991년까지는 레닌그라드라고 불림]에 살았어요. 하지만 혁명의 결과는 아버지가 바라던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당원증을 반납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야 했지요. 아버지가 라트비아로 오자, 나는 아버지를 마르타에게 소개해 주었어요. 아버지는 정직하고 친절한 분이어서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였지요. 1951년에 아버지는 러시아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믿음 때문에 갇힌 몸이 되어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1953년에 시베리아에서 사망했습니다.”

시베리아로 추방되다

라트비아의 새 정부는 소련이 점령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문화 및 정치 제도를 소련의 공산주의 모델에 맞추어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또한 개인이 소유한 농장들을 집단 농장화하여 국가가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처와 관련하여 몇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추방이 이루어졌으며, 1949년에는 가장 많은 사람이 추방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약 10만 명의 라트비아인이 시베리아 지역을 비롯하여 러시아 북부로 추방되었습니다. 2년 뒤에 공산주의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에게 초점을 맞춰서, 수천 명의 증인을 점령지에서 추방하였습니다. 그중에는 그때까지 라트비아에 살고 있던 약 30명의 전도인 가운데 최소한 2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벤츠필스 출신의 발리야 랑게는 그때 아직 침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KGB(소련 국가 보안 위원회)가 1950년 9월의 작전 기간에 체포한 사람들 가운데는 그도 있었습니다. 리가에서 심야 심문을 받던 중에 그는 “소련의 시민으로 반국가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발리야는 차분하면서도 공손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뿐입니다.”

발리야의 이름은 19명의 증인들의 이름과 함께 1950년 10월 31일자 문서에 실렸습니다. 그 문서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들은 모두 10년간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을 선고받았고 재산이 몰수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결국 다시 기소되었습니다. 일례로, 파울리네 세로바는 우편으로 성서 출판물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당국이 알게 되면서, 다시 시베리아로 가서 4년을 더 보내야 하였습니다.

수용소에서 형제들은 계속 전파하고 제자를 삼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자가 된 사람들 가운데 야니스 가르슈키스가 있습니다. 1956년에 침례를 받고 지금은 벤츠필스에서 살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노동 수용소로 가게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답니다.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진리를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태도입니다!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테클라 온츠쿨레는 정치적 선동을 한 혐의로 고발되어 시베리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고향에서 멀고 먼 옴스크 시에서 그는 유배된 증인들에게서 진리에 관해 듣게 되었습니다. 테클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침례받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밤늦게 얼음같이 찬 강물에서 받았거든요. 추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1954년에 테클라는 알렉세이 트카치와 결혼했습니다. 트카치는 1948년에 몰다비아(지금의 몰도바)에서 침례를 받았으며 나중에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습니다. 1969년에 이 부부는 몇 명의 다른 증인들과 함께 라트비아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라트비아인 추방자들은 수용소에서 사망하였습니다.

한편 라트비아에서는—KGB를 따돌리다

소수의 증인들은 검거를 피했습니다. “나는 거처를 계속 옮기고 여러 농장에서 일해서 KGB를 피했기 때문에 추방을 면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계속 전파를 했지요. 사람들은 잘 들었고, 그중에는 진리 안으로 들어온 사람도 있어요.” 알렉산드라 레제프스키스의 말입니다. KGB 요원들은 라트비아에 남아 흩어져 지내던 소수의 증인들을 반동분자라고 비방하며 그들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증인들이 미국의 첩자라고 거짓 비난을 하는 팜플렛을 돌리기까지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공산당 정보원들의 심한 감시 때문에 조심스럽게 전파하고 장소를 바꿔 가면서 몰래 집회를 보아야 하였습니다.

알렉산드라는 카를리스 레제프스키스와 결혼한 후 시부모의 시골 오두막으로 남편과 함께 이사하였습니다. 그 오두막은 리가에서 6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투쿰스 시 근처의 숲 속 외진 곳에 있어서, 겨울에 집회를 보기에 아주 좋았습니다. 디타 그라스베르가(당시의 성은 안드리샤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레제프스키스 형제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했어요. 버스를 타고 투쿰스에 간 다음 눈 쌓인 숲길을 걸어가다 보면 정말 스릴이 넘쳤어요. 마침내 오두막에 닿으면,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맛있는 수프 냄새에 군침이 돌곤 했지요.”

카를리스는 숲 속에 출판물을 숨겨 두곤 했습니다. 한번은 두 개의 가방에 책을 가득 넣어 묻고 장소를 주의 깊이 표시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날 밤에 심한 폭풍이 불어서 표시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카를리스는 가방을 찾으려고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가방은 그 숲 어디엔가 묻혀 있습니다.

여름에는 형제들이 숲이나 호수 또는 바닷가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소련 내 다른 나라들에서 했던 것처럼, 형제들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를 이용하여 성경적인 강연을 했습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에서 빌야드 카르나, 실베르 실리크사르, 렘비트 툼을 비롯한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라트비아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고 출판물을 전해 주고 그곳에 있는 약 25명의 침례받은 전도인들의 봉사 보고를 모았습니다. 라트비아 형제들은 러시아어 「파수대」를 받으면 무척 기뻐했습니다. 파울스 베르그마니스와 발리야 베르그마니스 부부는 그 「파수대」를 라트비아어로 번역하여 학생들의 연습장에 손으로 썼습니다.

“우리에게는 「파수대」가 한 부밖에 없었어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에스토니아 형제들은 러시아에서 마이크로필름 형태의 「파수대」를 구해서 라트비아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진이 인기 있는 취미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집에서 사진을 인화하여 여러 부로 만들어서 배부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다른 출판물들도 주로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에서 같은 방식으로 이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에게는 「파수대」가 한 부밖에 없었어요.” 당시에 열 살쯤 되었던 비다 사칼라우스키에네가 회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동안 각 집단은 필름을 인화하여 만든 잡지를 받으면 한 가족씩 돌려 보아서 모두가 읽고 노트할 수 있게 했어요. 아무도 잡지를 24시간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었지요. 집회 때 사회자는 잡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기억에 의존하거나 노트를 보면서 연구 질문에 대답했어요.” 이러한 영적 마련은 비다가 학창 시절에 확고하게 진리의 편에 서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남동생 로무알다스가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을 때 충절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모든 부류의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베라 페트로바는 27년 동안 공산당 활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한 일 중에는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공산당원이 몇 명이나 참석해 있는지 본 후에 지방 공산당 서기에게 보고하는 것도 있었지요. 그런데 언니 하나가 진리를 받아들이고서 나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관심이 생겨 러시아 정교회 사제에게 성서를 한 부 달라고 했지요.

‘왜 성서가 필요하지요?’ 사제가 묻더군요.

‘가르쳐 주시는 것이 성서와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어서요.’ 내가 대답했습니다. 사제는 나에게 성서를 주지 않더군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성서를 구해서 읽기 시작했지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가르침이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나는 계속해서 영적으로 발전했고 공산당을 탈당했지요. 그리고 198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테오필리야 칼비테라는 간호사는 다우가프필스의 시장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쟁이 시작되고서 얼마 되지 않아 그의 남편은 전투 중에 행방불명되고 말았습니다. 테오필리야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라트비아 적십자사의 총재가 되었으며 61년 동안 의료계에서 일하면서 20개가 족히 넘는 국가 포상을 받았습니다. 테오필리야는 65세쯤 되었을 때 파울리네 세로바라는 증인을 만나, 하느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이유에 대해 성서에 근거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테오필리야는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 사람들이 영적 건강을 회복하도록 돕는 더 큰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충실을 지켰으며, 1982년에 사망했습니다.

“오, 그건 사전이라네”

1981년에 열여덟 살이던 유리 캅톨라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3년 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형기 중 2년을 시베리아에서 보냈습니다. 우리는 천막에 살면서 숲에서 일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온도가 섭씨 영하 30도로 떨어졌을 때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 여호와께서는 항상 나를 영적으로 돌봐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어머니가 식품을 보내는 소포에 그리스어 성경도 한 권 넣어 보냈습니다. 교도관은 소포를 검사하던 중 성서를 발견했습니다.

‘이게 뭐지?’ 교도관이 물었습니다.

내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근처에 있던 검사관이 ‘오, 그건 사전이라네’ 하더니 성서를 가져가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1984년에 석방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우크라이나에 정착하지 않고, 리가로 와서 약 2년 동안 적은 수의 증인들과 연합했습니다. 하지만 라트비아가 여전히 소련의 일부였기 때문에, 나는 다시 군 복무에 소집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6년 8월 26일에 다시 강제 노동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번에는 라트비아에서 4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리가에 있는 교도소에서 한동안 복역한 후에 나는 발미에라 시 근처에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1990년 초에 내 석방을 위한 심리가 있었는데, 그때 판사는 ‘유리, 4년 전에 당신을 투옥시킨 판결은 위법이었소. 당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지 말아야 했소’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갑자기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1991년에 유리는 라트비아에 하나밖에 없던 회중의 성원이 되었으며, 회중에 두 명뿐인 장로 중 한 사람으로 봉사했습니다. “밭이 참으로 희어져 수확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썼습니다.

유리는 라트비아에 처음 왔을 때 무덤 주위를 청소하고 있던 한 아주머니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인생이 이렇게 짧은 이유가 무엇인 것 같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내 쪽으로 몇 걸음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는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몇 분 뒤에 나무에서 큰 가지가 부러져서 아주머니가 청소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쿵 하고 떨어졌습니다. 아주머니가 거기에 계속 있었더라면, 떨어지는 가지에 맞아 큰 일이 날 뻔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나에게 주소를 알려 주었고, 나는 한 자매가 아주머니를 방문하도록 마련했습니다. 1987년에 그 아주머니는 아들 내외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편안한 생활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소련 내의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전파 활동을 돕기 위해 라트비아로 왔습니다.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기꺼이 희생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안나 바트냐는 봉제 공장에 일자리를 얻어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환경이 결코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요. 우리는 기차나 역, 공원과 공동묘지, 교회 근처에서 비공식 증거를 했어요.

기차에서 우리는 둘씩 짝 지어 전파했지요. 항상 만원인 기차에서 객차들을 오가며 봉사했어요. 한 사람은 증거를 하고, 다른 사람은 계속 망을 보았어요. 근처에 있는 사람들도 종종 토의에 끼어들곤 했지요. 그러다 보면, 때로는 사방에서 질문이 쏟아져 나왔어요. 기차가 서면, 우리는 필요할 경우 다른 객차로 가곤 했어요. 여호와께서 우리의 봉사를 축복하시는 것을 보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이었지요.”

안젤리나 츠베트코바는 교회에서 기도하고 나오던 중에 처음으로 진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84년에 여호와의 증인인 알도나 드로누카가 나에게 다가와서 성서를 읽어 보았느냐고 묻더군요. ‘조금 읽었어요.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서 궁금한 것이 많아요’라고 대답했지요. 우리는 서로 주소를 알려 주고는 정기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몇 달 후에 알도나가 리투아니아에서 있는 결혼식에 초대하기에 가겠다고 했어요. 300명쯤 되는 사람들이 왔더군요. 피로연에서 우리는 성서 강연을 연이어서 들었는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곳에서 나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해 왔고 결혼식이라는 것도 대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런 사실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 겸손한 사람들이 나타내는 사랑과 연합에 감동을 받았어요. 나는 1985년에 침례를 받았고, 1994년에는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여섯 자녀 가운데 다섯이 침례를 받았고, 막내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입니다.”

큰 모임에 참석할 자유

1980년대 중반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의 규제가 약해지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더 공개적으로 모임을 열 수 있었습니다. 1989년에는 라트비아에서 약 50명이 폴란드에서 열린 “경건한 정성” 지역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모든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었던 것은 내 영적 발전에 전환점이 되었어요.”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마리야 안드리샤카의 말입니다.

1990년에도 라트비아에서 50명 이상이 폴란드에서 열린 “순결한 언어”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안나 만친스카는 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국경을 통과하는 데 필요한 서류 몇 가지를 놓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서 서류들을 가지고 역으로 돌아왔는데, 기차는 이미 떠나 버렸더군요. 서둘러서 다음 역으로 갔지만 또 늦어 버렸어요.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 리투아니아까지—리가에서 250킬로미터를—가서야 비로소 기차를 따라잡았습니다. 택시비가 많이 들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지요!” 안나는 현재 라트비아 베델 가족의 일원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991년에 형제들은 마침내 구소련의 공화국들에서 공개적으로 대회를 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트비아에서는 대회 참석자들이 “경건한 자유 애호자” 대회 참석을 위해 여러 대의 버스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여행하였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대회 주제였습니다!

바이노데에 사는 루타 바라카우스카는 증인이 아닌 남편 아돌프스를 설득하여 탈린에 함께 갔습니다. 아돌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대회에 갈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내 차의 예비 부품을 살 계획이었거든요. 하지만 첫 회기에 참석하고 나서, 연설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우호적인 태도와 품위 있는 말 그리고 서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에 어찌나 감동을 받았던지 대회 기간 내내 참석을 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고 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요. 1992년에 나는 침례를 받아 아내처럼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에는 라트비아에서 지역 대회를 열 적합한 장소를 빌릴 수가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주로 에스토니아나 리투아니아로 갔습니다. 라트비아에서 최초로 열린 대회는 리가의 큰 체육관에서 열린 1998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대회였습니다. 청중석은 언어—라트비아어, 러시아어, 라트비아 수화—에 따라 세 구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마지막 기도가 끝난 후 모두는 박수를 쳤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이 역사적인 행사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급속히 발전한 시기

공산 통치가 끝나고 나자, 라트비아에서는 우리 활동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1995년 이전에는 라트비아어 「우리의 왕국 봉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이 야외에서 사용했던 제공 방법이 때때로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그러한 약점을 열정으로 보충했습니다. 다체 슈킵스나는 처음에 어떻게 해서 진리를 듣게 되었는지 이렇게 설명합니다. “1991년에 한 노점에서 지옥과 내세에 관한 책을 샀어요. 책을 사서 몇 걸음 갔는데, 뒤에서 ‘독약을 사셨군요!’라는 말이 들리더군요.

이 말을 들으니 걸음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여호와의 증인 두 명—부부—이 자기 소개를 하더군요. 그 후 우리는 성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어요. 사실, 거의 모든 것에 관해 이야기를 했지요. 하데스, 게헨나, 크리스마스, 십자가 그리고 마지막 날까지 말이에요! 솔직히 말해, 이해가 가지 않은 점들이 있기는 했지만 좋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어요.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고, 그로부터 몇 주 동안 그 증인 부부는 내가 궁금해했던 여러 가지 성서 질문에 대답해 주었어요.”

“그때 굴하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야니스 폴크마니스는 소련 역도 챔피언이었으며, 1993년 3월에 마지막으로 출전한 경기에서는 라트비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야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92년에 직장 동료인 야니스 치엘라프스가 성서 연구를 하는데 나도 와서 보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일로 내 인생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나는 라트비아 역도 챔피언이 되고 나서, 석 달 뒤에 왕국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1993년 8월에는 침례를 받았지요. 내가 체육관에서 증거하니까, 내 트레이너가 핀잔을 주더군요. 하지만 그때 굴하지 않기를 잘했습니다. 내 친구들인 에두아르드스 에이헨바움스와 에드가르스 브란치스가 그 이유를 설명해 줄 겁니다.”

에두아르드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니스 폴크마니스가 나에게 무료 성서 연구를 제의하더군요. 그래서 ‘정말로 무료라면, 당장 시작할 수 있겠네’라고 했지요. 우리는 정말로 그렇게 했습니다! 배운 내용이 이치에 맞았습니다. 특히 부활 가르침이 그랬는데, 영혼불멸 교리보다 훨씬 합리적이었습니다. 아내도 연구를 시작해서, 1995년에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에드가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니스는 체육관에서 열심히 증거를 했습니다. 나에게 네 번이나 성서 연구를 제의했지만, 매번 나는 거절했지요. 하지만 「파수대」와 「깨어라!」 그리고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은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운동선수가 성서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군요. 마침내 나는 호기심에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1995년에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나쁜 습관을 극복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바르스 야츠케비치스에게는 술이 문제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말에는, 우선 아침을 맥주로 때우고 나서 보드카 한 병을 다 마셨지요. 1992년 1월의 어느 날 저녁, 팔걸이 붕대를 하고서 집에 있는데 기분이 우울해서 자살할 생각이 자꾸 들더군요. 술에 취해 있다가 강도를 당했었거든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웃 사람이 왔더군요. 그 사람하고는 전에 몇 차례 성서에 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서 연구를 제의하기에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연구할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나는 지옥불에서 고초를 당할 것을 항상 두려워했는데, 이제 죽은 사람들의 실제 상태에 관해 배워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일주일에 세 번씩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넉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서는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합니다. 어리석게도 나는 나쁜 친구들과 저녁에 어울리다가 과음을 했고 다시 자살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비롭고 참을성이 많으신 분이지요. 몇몇 사랑 많은 형제들도 나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일로 참으로 큰 교훈을 배웠습니다! 1992년에 나는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라트비아 베델 가족의 일원입니다.”—고린도 첫째 10:12; 시 130:3, 4.

마리스 크루민시도 베델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 생활을 크게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마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군 복무를 하고 나서 인생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대 후에 대학에서 강의를 빼먹었다가 제적을 당하였습니다. 목표가 없었던 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어느 날 술을 먹고 싸우다가 체포되었습니다. 감방에 앉아서 내가 어긴 법들에 관해 생각해 보니, 그 법들 중 상당수가 사실 하느님의 법에서 나온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하느님께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했고 하느님을 찾겠다고 맹세했지요.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 여러 교회에 다녀 보았지만 번번이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서와 그 외의 종교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에 기차를 타고 가다가 동창생을 만났는데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잠깐 기차를 타고 가면서, 옛 친구에게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과 세상에 고난이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내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나는 연구를 시작했고 1991년에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1992년에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1년 뒤에는 라트비아 베델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1995년에는 핀란드 출신 파이오니아인 시모나와 결혼했습니다.”

에드가르스 엔드젤리스는 법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습니다. 에드가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90년대 초에는 정치적 변화가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나는 리가에서 법과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인생의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철학과 동양 종교들에 관한 책들을 읽었습니다. 또한 합기도라는 무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그즈음에 나는 아내인 엘리타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참석한 집회에서 우리는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형제들과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형제들 모두에게서 참으로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무렵에 나는 무술 사범에게서 불교의 선(禪)을 하는 사람들만이 합기도 고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합기도 수련을 중단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서 나는 길게 기른 머리를 잘랐고, 1993년 3월에 아내와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이후로는 법률 지식을 사용하여 라트비아에서 ‘좋은 소식을 변호하고 법적으로 확립하는 일’을 돕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빌립보 1:7.

그리스도인 믿음을 시험받다

1993년에 옐가바에서 음악 대학에 다니던 네 명의 학생은 소속된 합창단이 독립 기념일 축제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어 믿음을 시험받게 되었습니다. 네 명의 여학생들은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합창단 지휘자에게 그리스도인 양심 때문에 그 행사에 참여할 수 없으니 열외시켜 줄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지휘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자매들의 부모들에게 편지를 써서, 학생들이 노래를 부르든지 아니면 퇴학을 당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자매들은 세 명의 히브리인들처럼 여호와께 순종했습니다.—다니엘 3:14, 15, 17; 사도 5:29.

다체 푼출레는 그 자매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한 것과 형제들의 지원이 충실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퇴학을 당했지만 나는 진리를 위해 확고함을 유지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어요. 사실, 여호와께서는 나를 잘 돌봐 주셨거든요. 불과 몇 달 후에, 나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자리를 얻었어요. 거기에서 쌓은 경험은 2001년부터 하게 된 베델 봉사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수혈 문제가 충절의 시험이 되었습니다. 1996년 9월 6일에 옐레나 고들레프스카야라는 17세 소녀는 자동차에 치여 골반 여러 곳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해 있었던 옐레나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피를 멀리하기로 굳게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사도 15:29) 그 당시에는 라트비아에 있는 대부분의 의사들이 무수혈 치료 기술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담당 의사들은 교정 수술을 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일주일쯤 뒤에 두 명의 의사가 밤늦게 무자비하게도 옐레나에게 강제로 수혈을 하였고, 옐레나는 사망하였습니다.

옐레나의 어머니 마리나는 그때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마리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딸아이의 강한 믿음을 보고는 놀랐습니다. 딸아이는 타협하지 않았어요.” 현재 침례받은 증인인 마리나와 그의 가족은 부활 때에 옐레나를 얼싸안을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사도 24:15.

영적 자격을 갖춘 남자들이 매우 중요한 필요를 충족시키다

전도인 수가 급속히 증가하자, 인도하는 일을 할 영적으로 장성한 남자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에, 미국에서 자랐지만 라트비아어를 사용하는 세 명의 형제들이 라트비아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할 기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아내들과 함께 소개하면, 발디스 푸린시와 린다 푸린시, 알프레드스 엘크스니스와 도리스 엘크스니스 그리고 알프레드스의 동생인 이바르스 엘크스니스입니다. 다섯 사람 모두는 1992년 7월에 리가에 왔습니다. 방이 네 개 있는 그들의 아파트는 선교인 집과 서적 보관소 및 번역 사무실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울 때는 실수를 웃고 넘길 줄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도리스 엘크스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두 명의 아가씨와 연구를 하던 중에 사탄이 어떻게 ‘뱀’을 사용해서 하와에게 이야기했는지 설명하려고 했는데, ‘뱀’을 뜻하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한 다른 라트비아어 단어를 쓰고 말았어요. 결국, 뱀이 돼지가 된 거지요!”

1994년에는 페테리스 루테르스와 진 루테르스 부부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습니다. 1954년에 침례받은 페테리스는 라트비아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자랐습니다. 진은 사랑 많고 친절한 태도로 이내 모두의 사랑을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1999년에 사망했습니다. 페테리스는 계속 라트비아에 있기로 결정하였으며 현재 지부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페테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라트비아에 와서 형제들이 열심히 전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회중들은 그때까지도 확실한 회중 구역을 배정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리가에도 증거되지 않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불과 몇 회중에만 정기적인 공개 강연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신속하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길르앗 졸업생들이 도움을 주다

1993년 초에는 길르앗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처음으로 왔습니다. 스웨덴 출신의 부부들인 안데르스 베리룬드와 아그네타 베리룬드 그리고 토리니 프리들룬드와 레나 프리들룬드는 인구가 6만 명이 넘지만 전도인은 28명뿐인 옐가바 시로 임명되었습니다. 현재 지부 위원인 안데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형제들과 함께 야외 봉사를 했는데, 형제들은 쉴 틈을 주지 않더군요! 식사할 겨를도 없이 다음 연구 장소로 형제들과 함께 뛰어다니며 일고여덟 시간 연구를 했던 날도 있었지요! 그들의 열심은 정말 격려적이었습니다. 그때 연구를 했던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지금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토리니 프리들룬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석 달 동안의 언어 학습 과정이 끝나고 나니, 도와주는 사람 없이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전파하지 않은 구역을 골라 봉사를 했는데, 반응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접근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로 상의한 끝에, 우리는 다른 접근 방식을 사용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매 집에서 성구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우리는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1995년 4월부터는 길르앗 졸업생들이 더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핀란드 출신의 바세 베리만과 하이디 베리만 부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현재 러시아어 순회구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바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현지 형제들에게 봉사 중에 틀리게 말하면 바로잡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형제들은 기꺼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야외 봉사를 할 때뿐만 아니라 집회 중에도 거침없이 바로잡아 주더군요! 요즘은 형제들이 ‘바세 형제가 라트비아 사람 다 됐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가슴 뿌듯합니다.”

덴마크 출신의 카르스텐 아이스트루프와 야니 아이스트루프 부부는 야니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라트비아에서 함께 봉사하였습니다. 카르스텐은 “내가 여호와를 영예롭게 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선교 임명을 계속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형제들은 참으로 훌륭한 모범입니다!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이 오다

1994년부터 라트비아에는 독일, 영국, 폴란드 출신의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이 20명 이상 임명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온 형제들은 덴마크 출신의 미칼 우드센과 예스 키에르 닐센입니다. 그들은 라트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산업 도시인 다우가프필스로 임명되었습니다.

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1월의 어느 추운 날 오후에 리가에서 남동쪽으로 약 24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다우가프필스로 떠났습니다. 그날 리가에서 출판물을 가득 실은 낡은 자동차에 탈 때 눈이 내리고 있었지요. 운전을 하는 형제는 영어를 몰랐고, 우리는 라트비아어나 러시아어를 몰랐습니다. 운전하는 형제는 50킬로미터 정도를 달리고 나면 항상 차를 세워서 엔진을 손보더군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히터를 고친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차 안이 춥기는 차 밖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그런 식으로 덜커덩거리는 길을 달려서, 자정이 다 되어서야 다우가프필스에 도착했습니다. 그 당시 이 도시에는 전도인이 16명이었습니다. 이듬해 말쯤에는 전도인 수가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라트비아어로 번역하다

1992년 이전에는 출판물을 주로 러시아어로 받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라트비아 사람들이 러시아어를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모국어로 된 출판물을 더 좋아합니다.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알려 줍니다. “새로운 전도인이 몇백 명밖에 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중에 번역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이 이 자원하는 젊은 형제 자매들의 일을 인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번역자들의 수고 덕분에, 라트비아어 「파수대」는 1995년 1월부터 월간으로 발행되었다가 1996년 1월부터는 월 2회 발행되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현재 라트비아어로는 여러 권의 서적과 팜플렛이 나와 있으며 「깨어라!」지가 발행되고 있습니다.

1993년 초에 번역 팀은 리가에 있는 비좁은 선교인 집에서 브리비바스 가에 있는 한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8월에는 미에라 가 40번지의 새로 개수한 사무실로 옮겼습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해서 이 새 건물을 갖게 되었습니까?

관대한 선물

조지 하크마니스와 그의 아내 시그리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난민으로 라트비아를 떠났습니다. 이 부부는 영국 런던에서 진리를 배워 1951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 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992년에 라트비아로 돌아와 5년 동안 지냈습니다.

1991년에 라트비아가 소련 연방에서 탈퇴한 후, 사람들은 국가가 수용한 부동산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시그리드와 그의 언니(역시 증인임)는 50년 이상 집안의 관련 서류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미에라 가 40번지의 건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건물을 되찾은 후에, 감사하게도 그 건물을 여호와의 조직에 기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은 그 건물을 20명의 숙소가 딸린 5층 규모의 번역 사무실로 개조했습니다.

통치체의 밀턴 G. 헨첼 형제는 1994년 8월 20일에 봉헌식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이때 형제들에게 옆에 붙어 있는 미에라 가 42번지의 6층짜리 건물과 땅을 매입하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던 주인은 제안을 받아들여 그 건물과 땅을 팔았습니다. 이 건물 역시 완전히 개수하였으며, 베델 가족은 35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확장을 더 해서 도합 55명의 베델 봉사자들을 위한 사무실과 방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법적 인가

라트비아에서는 우리 활동에 대한 법적 등록이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1996년에 관리들은 옐레나 고들레프스카야에 관한 부정적인 언론 보도를 근거로 등록을 거부하였습니다. 한 국회의원은 우리 활동이 금지될 수 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계속 관리들을 만나 우리 활동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1998년 10월 12일에 국가 인권 사무소의 소장은 두 회중—리가 중앙 회중과 리가 토르나칼른스 회중—이 1년 동안 잠정적으로 법적 등록이 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 달 뒤에 옐가바에 있는 회중도 그와 같이 등록되었습니다.

라트비아 법에서는 새로운 회중들이 해마다 재등록할 것을 요구합니다. 정식 등록이 되려면, 최소한 10개의 회중이 10년 동안 등록해야 합니다. 한편, 등록을 기다리고 있는 회중들은 정부의 방해 없이 집회를 볼 수 있습니다.

집회 장소를 마련한 방법

1990년대에는 급속한 발전 때문에 집회를 볼 좀 더 큰 장소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 다우가프필스에서는 적합한 건물이 경매로 나왔는데, 입찰에 응한 사람들은 형제들뿐이었습니다. 1998년 12월에 개수 공사가 시작되어, 8개월 후에는 그 도시에 있는 140명이 넘는 전도인들이 자체 왕국회관에 모여 집회를 보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기초부터 건축한 최초의 왕국회관은 1997년에 유르말라에서 완공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한 성서 연구생은 질 높은 공사에 감탄하면서 증인들에게 자기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우리의 일이 영적인 것임을 설명하며 거절했습니다. 한편, 리가의 토르나칼른스 지역에 있는 형제들은 화재가 난 영화관을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하였습니다. 불에 그은 그 건물은 1998년 8월경에 아름다운 두 개의 왕국회관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핀란드에서 준 도움

핀란드 형제들은 라트비아에서 우리 활동의 진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으며, 1992년부터 2004년까지는 이곳의 활동을 감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핀란드에서는 또한 라트비아에서 사용할 모든 잡지를 인쇄하고 있으며, 여러 해에 걸쳐서 인도를 베풀 유능한 형제들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95년에 라트비아에 온 유하 후투넨과 그의 아내 타이나 후투넨이 있습니다. 유하는 현재 지부 위원회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루벤 린드와 울라 린드 부부도 우리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부부는 합하면 80년이 넘게 전 시간 봉사를 하였으며, 린드 형제는 핀란드로 돌아가기 전에 4년 동안 라트비아 전국 위원회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에 더하여, 150명이 넘는 핀란드 형제들이 여러 건축 공사에서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사랑에 찬 수고에 더하여, 라트비아에 있는 전도인, 파이오니아, 선교인들의 봉사에 대한 여호와의 풍성한 축복 덕분에, 이 나라에는 2004년 9월 1일에 지부가 생겼습니다.

특별 전파 활동

대부분의 라트비아 전도인들은 크고 작은 도시나 그 주변에 살고 있습니다. 2001년 초에 회중들은 전도인들에게 휴가 기간에 격지 구역에서 특별 전파 활동에 참여하도록 권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자원한 93명의 전도인은 아홉 그룹으로 나뉘어서, 각각 배정받은 여러 시골 소도시와 마을들로 갔습니다.

베델 가족 성원인 비아체슬라프스 자이체프스는 이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휴가를 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자매들과 더 친해질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였습니다. 봉사를 한 후, 우리는 함께 식사하고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다음 날의 활동을 계획했지요. 그런 다음 축구를 하고 호수에서 더위를 식혔습니다. 낙원을 미리 맛보는 것 같았지요.”

형제들은 4200시간이 넘게 봉사하여 전도인당 평균 41시간 이상 봉사했고, 9800부가 넘는 출판물을 전했으며, 1625건의 재방문을 하고, 227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했습니다. 그때 이래로 해마다 비슷한 활동이 마련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참자유에 이르는 길을 찾고 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안스 인스베르그라는 라트비아 사람의 경험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별이 총총한 어느 날 밤 바다에서 하느님께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안스는 하느님을 “영과 진리로” 숭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싶었습니다. (요한 4:24) 여호와께서는 그 진실한 요청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때 이래로 2400명이 넘는 마음이 정직한 라트비아 사람들이 영적 자유에 관한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거의 그만큼의 사람들이 지금 성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마태 9:37, 38.

라트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참자유를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돕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브리비바스 가에 있는 자유 기념비가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왕국으로 이끕니다. 그 왕국이 오기를 갈망하고 여호와를 “영과 진리로” 숭배하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모든 형태의 고통과 고난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전한 자유—“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로마 8:21.

[각주]

^ 53항 유리 캅톨라의 체험기는 「파수대」 2005년 9월 1일호에 실려 있다.

[190면 삽입]

“침례받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거예요. 밤늦게 얼음같이 찬 강물에서 받았거든요. 추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정말 행복했어요.”

[203면 삽입]

“뒤에서 ‘독약을 사셨군요!’라는 말이 들리더군요”

[184, 185면 네모와 지도]

라트비아—개요

국토

라트비아는 동서 길이가 450킬로미터이고 남북 길이가 210킬로미터이며, 국토의 약 45퍼센트가 숲으로 덮여 있다. 늑대, 말코손바닥사슴, 멧돼지, 물범, 비버, 사슴, 수달, 스라소니 등의 동물 외에도, 나이팅게일, 딱따구리, 먹황새, 백로 등 여러 종의 새가 살고 있다.

주민

230만 명에 달하는 주민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수도인 리가에 살고 있다. 주요 종교는 러시아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루터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라트비아 사람들은 자신이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언어

주요 언어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이다. 라트비아어는 주민의 약 60퍼센트가 사용하고, 러시아어는 주민의 30퍼센트 이상이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생활

거의 60퍼센트에 달하는 사람들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공장에서 일하거나 농업에 종사한다.

식품

농산물로는 감자, 보리, 사탕무와 여러 가지 채소 및 곡류 등이 있다. 돼지, 소, 양, 염소 등의 가축 외에 가금류도 많이 기른다.

기후

습도가 높으며 날씨가 대개 흐린 편이다. 여름은 비교적 시원하고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다.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에스토니아

러시아

라트비아

발미에라

리가

유르말라

슬로카

투쿰스

벤츠필스

쿨디가

리예파야

바이노데

옐가바

다우가프필스

리투아니아

발트 해

리가 만

[삽화]

리가

[186면 네모와 지도]

라트비아의 네 지역

일반적으로 라트비아는 지리적·문화적으로 네 지역으로 나누는데, 지역마다 독특한 특징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리가 만과 접해 있는 비드제메는 네 지역 중에서 가장 크며, 시굴다와 체시스 그리고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와 같이 유서 깊은 성곽 도시들이 있다. 동쪽으로는 라트갈레의 저지대와 푸른 호수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다우가프필스가 있다. 라트비아의 곡창 지대라 일컬어지는 젬갈레는, 벨로루시에서 흘러와서 라트비아를 거쳐 리가 만으로 흘러들어 가는 서(西)다우가바 강 남쪽에 있다. 이 지역의 자랑거리는 두 개의 거대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다. 이 궁전들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을 설계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라스트렐리가 설계한 것이다. 네 번째 지역인 쿠르제메는 곳곳에 농장과 숲과 해변이 있으며, 발트 해 연안을 끼고 벤츠필스와 리예파야 등의 도시들과 많은 어촌들이 있다.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1 비드제메

2 라트갈레

3 젬갈레

4 쿠르제메

[192, 193면 네모와 삽화]

교직자에게 증거하여 그와 나의 인생이 바뀌었다

안나 바트냐

출생 1958년

침례 1977년

약력 우크라이나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다. 30명이 넘는 사람이 침례를 받도록 도왔으며, 현재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라트비아에 전도인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1986년에 이곳으로 이주해 왔어요. 우리는 공개적으로 전파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성서를 장바구니에 숨기고서 공원이나 다른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에게 접근했지요. 우리는 왕국 희망에 대화의 초점을 맞추면서, 좋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만 성서를 사용했어요. 사람들은 친족이나 이웃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여간해서는 우리를 집에 초대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대개 관심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연구를 했어요.

출판물은 아주 귀했지요. 사실, 몇 년 동안 우리 회중에는 성서 연구 보조서인 러시아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이 한 부밖에 없었어요. 우리는 이 책을 야외에서 효과적으로 사용했지만, 회중 성원이 아니면 절대로 빌려 주지 않았지요!

나는 짝과 함께 교회 근처에서 증거하다가 교직자인 표트르 바트냐를 만났어요.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어디에서 성서를 살 수 있냐고 물었지요. 그는 “나도 성서에 관심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어요. 이튿날 우리는 근처의 공원에서 표트르를 만나서 「진리」 책의 목차를 보여 주고 어떤 제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으냐고 물었지요. 그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일반 관습들”을 고르더군요. 그날 대화는 무척 유익했고, 그렇게 해서 한 형제가 그와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어요.

표트르는 정확한 성서 지식을 갖추게 되면서 동료 교직자들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기본적인 성서의 가르침조차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표트르는 교회에서 탈퇴하고 여호와께 헌신했지요.

1991년에 표트르와 나는 결혼해서,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뒤에 남편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어요. 내가 어떻게 그러한 슬픔을 견뎌 낼 수 있었냐고요? 봉사에 온전히 몰두하고 사람들이 “모든 위로의 하느님”을 알도록 도운 것이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지요. (고린도 둘째 1:3, 4) 사실, 나는 1997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는 특권을 받았답니다.

[삽화]

표트르

[200, 201면 네모와 삽화]

나는 공의로운 정부를 염원했다

인드라 레이투페

출생 1966년

침례 1989년

약력 전에는 공산주의자였으며, 1990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30명이 넘는 사람이 침례를 받도록 도왔다.

나는 자랄 때 하느님도 성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옳은 것을 옹호하고자 했고, 인간이 선하고 공의로운 정부를 세우는 데 예외 없이 실패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여호와의 증인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들이 성서에서 보여 준 것에 깜짝 놀랐어요. 그들의 말이 이치에 맞았거든요! 왕국 정부와 예수께서 옹호하신 공의에 대해 배우고 나니 감동이 되더군요. 1989년에 한 호수에서 침례를 받고, 6개월 뒤에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 시작했지요. 그때 우리 부부는 아이가 하나였는데, 나중에 쌍둥이가 태어났어요. 남편 이반도 여호와의 증인이어서 사랑에 찬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전 시간 봉사를 할 수 있었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자주 거리나 공원에서 비공식 증거를 했어요. 사실, 쌍둥이가 봉사에 도움이 되었지요. 사람들은 쌍둥이를 보면 호기심이 생겨 쉽게 편한 마음으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거든요.

리가의 한 공원에서 증거를 하다가 안나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었어요. 안나는 벤치에 앉아서 음악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미 입장권도 사 놓고 있었지요. 하지만 인류를 위한 성서의 희망에 대해 어찌나 더 알고 싶었던지 음악회에 들어가지 않았어요. 우리는 함께 성구를 읽었고 그 공원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지요. 6개월 후에 안나(오른쪽)는 자매가 되었고 지금은 지부의 번역 팀에서 봉사하고 있어요. 여호와께서 내 봉사를 축복해 주신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삽화]

가족과 함께

[204, 205면 네모와 삽화]

그들은 꼭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 같았습니다

안드레이 게블랴

출생 1963년

침례 1990년

약력 파이오니아, 대리 순회 감독자, 도시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아내 옐레나이다.

리가행 기차에서 1990년 1월에 두 여자가 나에게 성서를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꼭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 같았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성서를 읽고 싶어 했지만 성서를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자들에게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는데, 그들 중 하나는 인드라 레이투페였습니다. (200-201면 네모 참조) 며칠 후에 그들이 우리 집에 왔습니다. 나는 그때 그들을 몹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서를 능숙하게 사용하여 내 질문에 답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명을 받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때 교직자였다가 당시에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던 표트르 바트냐와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192-193면 네모 참조.

넉 달 뒤에 나는 처음으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여름에는 한 달에 한 번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숲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형제들은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 계획표에서 일부를 선택해서 다뤘습니다. 그리고 대개 침례를 받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점심 휴게 시간 전에 침례 연설을 들었습니다.

나는 새롭게 알게 된 것과 집회에서 느끼는 형제 사랑 때문에 정말 기뻤습니다. 되도록 빨리 침례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해 8월 말에 기회가 와서, 호수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90년대 초에 나는 내 화실에서 여러 사람과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중에는 영적 형제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1992년에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더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옐레나가 영적 자매가 된 것입니다.

[208, 209면 네모와 삽화]

5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다

아리야 B. 레이베르스

출생 1926년

침례 1958년

약력 라트비아 태생으로, 여러 나라에서 살았으나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라트비아로 돌아왔다.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아버지는 짐을 싸서 가족과 함께 라트비아를 떠나기로 결정했어요. 세월이 흘러 나는 결혼을 하여, 남편과 함께 베네수엘라에서 살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고 선교인 자매와 가정 성서 연구를 하기로 했지요. 우리는 독일어로 연구를 했어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할 때 베네수엘라의 공용어인 스페인어를 배웠어요.

1958년에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고, 두 달 뒤에 나는 침례를 받았어요. 남편이 사망하고 나서 딸과 나는 스페인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지요. 그 당시에는 프랑코 장군이 독재 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겸손한 사람들은 진리에 굶주려 있었지요. 스페인에서 16년간 있으면서 약 30명의 사람이 침례를 받도록 돕는 특권을 누렸지요.

1991년에 소련의 공산 체제가 붕괴되고 나서 라트비아를 방문했는데, 왕국 선포자가 크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고국에 돌아가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려는 꿈은 1994년에 이루어졌어요. 라트비아를 떠난 지 꼭 50년 만의 일이었지요.

라트비아 밭은 참으로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어 있었어요. 예를 들면, 한 남자에게 증거를 했는데 우리 서적을 한 권 달라고 하더군요. 자기 딸이 종교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우리 책을 딸에게 주고 싶다는 거예요. 나는 그의 딸의 주소를 받았고 성서 연구가 시작됐지요. 1년도 안 되어 그의 딸은 침례를 받았어요. 나는 그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고국에 돌아와 파이오니아 봉사를 수행할 특권과 힘을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삽화]

스무 살 때

[216, 217면 도표와 그래프]

라트비아—연대표

1916년 선원인 안스 인스베르그가 침례를 받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인스베르그가 라트비아의 신문들에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광고들을 싣다.

1920

1926년 리가에 사무실이 개설되다.

1928년 라트비아어 최초의 출판물인 「만민을 위한 자유」 소책자가 발표되다. 독일에서 콜포처들이 오다.

1931년 퍼시 던험이 사무실 감독자가 되다.

1933년 만국 성경 연구회가 등록되다.

1934년 정부가 만국 성경 연구회의 사무실을 폐쇄하다.

1939년부터 1992년까지는 보고가 없다.

1940

1940년 라트비아가 소련에 합병되다. 던험 부부가 어쩔 수 없이 떠나다.

1951년 증인들이 시베리아로 추방되다.

1960

1980

1991년 라트비아가 독립을 되찾다.

1993년 길르앗 학교에서 훈련받은 선교인들이 처음으로 오다.

1995년 라트비아어 「파수대」가 월간으로 발행되다.

1996년 리가에 전국 위원회가 구성되다.

1997년 유르말라에 최초로 왕국회관을 신축하다.

1998년 리가의 두 회중이 법적으로 등록되다.

2000

2001년 최초의 특별 전파 활동이 조직되다.

2004년 9월 1일에 라트비아가 지부가 되다.

2006년 지부 확장 공사가 끝나다. 2400명이 넘는 전도인이 라트비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2,000

1,000

1920 1940 1960 1980 2000

[176면 전면 삽화]

[178면 삽화]

리가에 최초로 개설된 성경 연구생 사무실이 있던 건물, 1926년

[178면 삽화]

기쁜 소식을 전해 준 라트비아어 「만민을 위한 자유」, 1928년

[178면 삽화]

리스 테일러

[180면 삽화]

1927년에 침례를 받은 페르디난드 푸르크

[180면 삽화]

하인리히 체흐와 그의 아내 엘사, 리예파야에 있던 그들의 이발소 앞에서

[183면 삽화]

에드윈 리지웰(왼쪽)과 앤드루 잭은 라트비아에 출판물을 몰래 들여왔다

[183면 삽화]

퍼시 던험과 매지 던험

[183면 삽화]

사무실 성원들과 다른 증인들, 1930년대

[191면 삽화]

1950년에 체포된 증인에 대한 KGB 목록. 많은 사람이 시베리아로 가게 되었다

[191면 삽화]

시베리아, 1950년대 초

[194면 삽화]

이 장례식과 같은 비교적 큰 모임에서 형제들은 영적 강연을 들었다

[194면 삽화]

파울스 베르그마니스와 발리야 베르그마니스 부부는 「파수대」를 라트비아어로 번역하여 학생들의 연습장에 손으로 썼다

[194면 삽화]

형제들은 마이크로필름 (실제 크기임)을 사용해서, 「파수대」를 인화하여 여러 부로 만들어 배부하였다

[197면 삽화]

파울리네 세로바는 간호사 테오필리야 칼비테에게 진리를 처음으로 알려 주었다

[199면 삽화]

유리 캅톨라, 1981년

[199면 삽화]

현재 모습, 수감되었던 교도소 앞에서

[202면 삽화]

1998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대회. 라트비아에서 최초로 열린 이 대회에는 청각 장애인 구역도 있었다

[207면 삽화]

야니스 폴크마니스는 라트비아 역도 챔피언이 되고 나서, 석 달 뒤에 왕국 전도인이 되었다

[207면 삽화]

마리스 크루민시는 교도소에 있을 때 처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했다

[210면 삽화]

다체 푼출레는 국가주의적인 노래를 부르지 않아서 퇴학을 당했다

[210면 삽화]

옐레나 고들레프스카야는 강제 수혈을 받은 후에 사망하였다

[210면 삽화]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회중들을 강화한다

[215면 삽화]

라트비아 베델 가족

[215면 삽화]

지부 위원회, 2006년

페테리스 루테르스

안데르스 베리룬드

한누 칸칸페

유하 후투넨

[215면 삽화]

리가 시 미에라 가에 있는 세 개의 지부 건물

[218면 삽화]

라트비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이제 공개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

[218면 삽화]

화재가 난 이 영화관(왼쪽)이 두 개의 왕국회관(아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