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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니옹

레위니옹

레위니옹

레위니옹 섬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들—아마도 아랍 무역상들—은 이곳에서 열대의 낙원을 보게 되었습니다. 짙푸른 인도양에 초록색 보석처럼 박혀 있는 레위니옹은 대륙 전체에 견줄 만큼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다양합니다. 새까만 화산성 모래가 깔려 있는 해변, 수많은 폭포, 열대 우림, 무수한 들꽃, 깊은 계곡, 험준한 화산 봉우리, 지름이 수 킬로미터나 되고 식물이 무성한 칼데라(분화구가 붕괴되어 생긴 우묵한 곳)와 활화산 등, 이 섬에는 자랑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많은 레위니옹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섬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저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담긴 소중한 진리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레위니옹에 최초로 발을 디딘 왕국 선포자는 가까운 섬인 모리셔스에 임명된 선교인 로버트 니즈벗입니다. 로버트는 1955년 9월에 며칠간만 머물렀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이 성서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많은 출판물을 전하였으며, 여러 건의 「깨어라!」 예약을 맡았습니다. 그는 관심자들과 편지로 계속 연락을 취했습니다.

1955년부터 1960년 사이에 로버트와 지구 감독자 해리 아넛은 이 섬을 몇 차례 잠깐 방문하였습니다. 1959년에 프랑스 지부는, 탄광 광부였다가 은퇴하여 마다가스카르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폴란드계 프랑스인 아당 리시아크에게 레위니옹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아당은 1959년 12월 한 달 내내 이 섬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주민의 90퍼센트가 열렬한 가톨릭교인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신세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합니다. 사제들은 진리가 전파되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깨어라!」 예약자에게 그 지방 사제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을 빌리고 싶어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약자는 ‘사제가 직접 오면, 빌려 주겠다’라고 말했는데, 그 사제는 오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에서 도움을 줄 사람들이 오다

당시에 활동을 돌보고 있던 프랑스 지부에서는 자격을 갖춘 전도인들에게 레위니옹으로 이주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페구 가족—앙드레와 자닌 그리고 여섯 살 난 아들 크리스티앙—과 친척인 노에미 뒤레이가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1961년 1월에 배편으로 도착하였습니다. 미미라는 애칭으로 알려졌던 노에미는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2년간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많은 관심자들을 찾아내어, 주도(州都)인 생드니에서 머물고 있던 호텔 방에서 집회를 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가족이 가정집으로 이사하면서, 집회도 그 집에서 열었습니다. 약 1년 뒤에 생드니에 새로 형성된 집단은 30명 정도가 앉아서 집회를 볼 수 있는 작은 건물을 임대했습니다. 그 건물은 목조 건물로, 지붕이 골함석이었고, 창문 두 개와 출입문 하나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허락을 받아 안쪽에 있는 벽들을 헐고 작은 연단을 꾸미고 등받이가 없는 긴 나무 의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화창한 일요일 아침이면, 열대 지방인 이곳에서는 함석지붕에서 열기가 엄청나게 내려왔습니다. 집회가 시작되고 나면, 모든 참석자가 이내 구슬땀을 흘렸습니다. 특히나 연단 위에 서 있으면 지붕이 바로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땀을 아주 많이 흘렸습니다. 게다가, 회관 안이 만원인 경우가 많아 여러 사람이 밖에 서서 창문이나 출입구를 통해 연설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바람이 통하지 않던 회관 안은 더더욱 덥고 답답해졌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불편하기는 했어도 모두들 집회에서 환영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이 첫해 말에는 50명가량 되었습니다. 왕국 전도인은 일곱 명으로 늘었고, 성서 연구는 47건이나 되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 중에는 연구를 한 주에 두 번씩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쁩니다. 정말 기쁩니다.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 다 할지 모르겠습니다.” 형제들이 편지에 쓴 말입니다.

새로운 성서 연구생들 가운데는 1961년에 마다가스카르에서 연구를 시작한 미리암 앙드리앵도 있었습니다. 그는 임시변통으로, 앞서 언급한 왕국회관을 대회 회관으로 사용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형제들이 한 일은 그저 야자나무 가지를 써서 회관 옆에 그늘이 더 생기게 한 것뿐이었습니다. 초창기에 그런 큰 모임에는 최고 11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1961년 10월에 모리셔스에서 열린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는 다비드 수리, 마리안 란응구, 뤼시앵 베쇼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전파 활동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둘째 해에는 전도인이 32명으로 늘었고, 파이오니아들은 각각 무려 3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했습니다! 일요일 집회 참석자는 100명으로 늘었으며, 그들의 민족적 배경도 다양하였습니다.

레위니옹에 사는 인도계 주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두 가지 종교 즉 가톨릭교와 힌두교가 한데 뒤섞여 있는 관습을 따릅니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전의 관습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참을성 있고 친절하면서도 옳은 것에 대해 확고한 태도를 보여서, 좋은 결과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는 파이오니아와 2년 동안 연구를 하면서도 거짓 종교의 관습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에게 점을 쳐 주고 남자와 동거를 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 자매는 다른 자매가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연구를 인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연구를 인계받은 자매는 이렇게 썼습니다. “몇 달 후에 그 여자의 인식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영매술 행위를 중단하여 나는 정말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동거하는 남자가 결혼을 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남자와 계속 살기로 하였고, 나는 연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길에서 그 여자를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다시 연구를 사회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좋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는데, 이미 배운 것들을 적용해서 진심으로 연구를 하고 싶은지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여호와께 기도해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는 그 말대로 하고는, 용기를 내서 동거하는 남자에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참으로 기쁘게도, 그 남자는 결혼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새 신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1963 봉사 연도에는 11차례나 왕국 전도인 신기록이 수립되었으며, 그해의 마지막 전도인 신기록은 93명이었습니다. 레위니옹에는 이제 두 개의 회중과 하나의 집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1962년 12월에 생질레뱅의 해변에서 있었던 이 섬 최초의 침례 행사에서는 20명의 새로운 전도인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63년 6월에 열린 두 번째 침례 행사에서는 38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61년에 레위니옹에는 인구 4만 1667명당 한 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3년 뒤에는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1 대 2286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적으로 기름진 땅인 이 섬에서 말씀이 “자라게 하”고 계셨습니다.—고린도 첫째 3:6.

먼 곳에도 왕국 소식을 알리다

최초의 증인 가족이 온 지 불과 4년 뒤인 1965년경에 생드니 회중은 전도인이 110명이 넘을 정도로 발전하였으며, 그 지역의 구역을 3주마다 한 번씩 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구역은 거의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해결책은 무엇이었습니까? 형제들은 버스를 임대하여, 생뢰, 생필리프, 생피에르 등의 다른 해안 도시들로 가서 전파하였습니다.

어떤 구역은 가는 데 여러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길은 대개 좁고 가파르며 꼬불꼬불했습니다. 현재 생드니에서 르포르 시까지는 차로 15분 거리이지만, 당시에는 두 시간이 걸리는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믿음이 있어야 했다’고 한 형제는 회상합니다. 새로 난 길도 낙석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길옆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곳곳에 있어서 비가 많이 오면 때때로 위에 있는 바위들이 떨어지는데, 어떤 것들은 수 톤이나 나갑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크리스티앙 페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덟 살쯤 되었을 때, 우리 일행은 격지 구역에서 400부 내지 600부의 「깨어라!」를 전하곤 했습니다. 「파수대」는 금지되어 있었지요. 믿지는 않지만 우호적인 남편들 몇은 그런 날 바람 쐬러 나가길 좋아했기 때문에 부인을 따라왔는데, 봉사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야외 봉사가 끝나고 나면, 우리는 음식을 먹고 놀았습니다. 나 같은 아이들에게는 정말 신나는 일이었지요. 분명, 이 특별한 활동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직상의 조정으로 더욱 활기를 띠게 되다

1963년 5월에 밀턴 G. 헨첼 형제가 세계 본부의 대표자로서는 처음으로 레위니옹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155명의 청중에게 특별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의 방문으로 인해, 회중을 돌보고 좋은 소식이 아직 전파되지 않는 곳에서 활동할 네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임명되었습니다. 다비드 수리는 르포르로, 뤼시앵 베쇼는 생앙드레 시로, 마리안 란응구와 노에미 뒤레이(현재의 성은 티스랑)는 생피에르로 임명되었습니다.

1964년 5월 1일에는 활동을 감독하는 지부가 프랑스 지부에서 모리셔스 지부로 바뀌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레위니옹에 서적 보관소가 개설되었습니다. 한편, 전도인들은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형제들은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회중 책임을 얻으려고 힘쓰라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1964 봉사 연도에는 57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한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이 21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전해에는 생앙드레에 있던 집단이 회중 신청을 했는데, 신청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1963년 6월 말에는 침례받은 전도인이 12명이 됩니다. 앞으로 두 달 동안은 대여섯 명의 새로운 전도인이 나올 것 같습니다. 형제들은 3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신청은 승인되었고 두 명의 형제가 회중을 돌보게 되어 장 나소 형제가 회중의 종 즉 주임 감독자로, 뤼시앵 베쇼 형제가 그의 보조자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 당시에는 진리 안에 들어온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38세였던 장은 체구도 크고 마음도 넓은 사람이었으며, 전문학교 강사이자 건축 기술자였습니다. 1962년에 침례를 받은 그는 왕국 활동의 진전에 도움이 될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생앙드레에 있는 자신의 땅에 자신의 돈을 들여 레위니옹 두 번째의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그 왕국회관은 튼튼하고 멋진 목조 건물로, 50여 명이 편안히 앉아 집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생앙드레에 있던 집단이 원래 돌보던 구역에는 지금까지 여덟 개의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장은 1997년에 사망할 때까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겼습니다.

1960년대 초에 형성된 세 번째 집단은 항구 도시인 르포르에 있었는데, 이 집단에는 남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생폴의 관심자들도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르포르의 집들은 수수한 목조 가옥들이었고, 선인장과 비슷하지만 가시가 없는 청산호라는 식물이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다비드 수리는 집 한 채를 임대하여 집회를 열었습니다. 1963년 12월에 이 집단은 회중 신청을 했습니다. 왕국 전도인이 16명이었고, 그 가운데 8명은 침례받은 전도인이었습니다. 전도인들은 한 달 평균 야외 봉사 시간이 22.5시간이었습니다. 다비드와 그의 보조자가 사회한 연구만 해도 38건이나 되었습니다! 그달에 방문한 순회 감독자의 공개 강연에는 5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르포르에는 또한 크리스티앙 보네카즈와 조제트 보네카즈 부부도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침례를 받고 1960년대 초에 레위니옹에 왔습니다. 당시에 독신이었던 그는 집안에서 혼자만 진리 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리 형제는 친절하게도 집회가 열리는 집을 크리스티앙과 조제트 부부에게 양보하고 다른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회중이 매우 커져서 이 부부도 이사를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한편 가톨릭교가 우세한 이 지역의 교직자는 사람들이 증인들을 적대시하게 만들려고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종종 낮에는 전도인들에게, 밤에는 형제들의 집 지붕에 돌을 던졌습니다.

성서 연구를 이제 막 시작한 라파엘라 호아로는 그 청소년들 얼마를 알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청소년들이 돌을 던지자, 라파엘라는 돌을 던진 청소년들의 집으로 따라가서, “우리 형제에게 또 돌을 던지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고 말했습니다.

“호아로 아줌마, 죄송해요. 저희는 그 사람이 아줌마 동생인 줄 몰랐어요.” 청소년들이 대답했습니다.

라파엘라는 세 딸과 함께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딸들 중 욜렌은 뤼시앵 베쇼와 결혼했습니다.

교직자가 편견을 조장했지만, 형제들의 열심과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해 르포르에는 열심 있는 회중이 생기게 되었고 왕국회관은 이내 사람들로 넘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회관 안에서 연설을 듣는 사람보다 밖에서 연설을 듣는 사람이 많은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의자를 둘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두었습니다. 심지어는 연단에도 의자를 두었으며, 어린이들을 청중 쪽 연단 가장자리에 앉혔습니다. 마침내 형제들은 훌륭한 왕국회관을 지었으며, 현재 그 지역에는 여섯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선두에 서다

레위니옹에서 초창기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니크 라피에르가 있습니다. 미리암 토마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머니와 나는 아니크와 연구를 했어요. 아니크는 나에게 봉사를 열심히 하라고 격려했고, 나는 그에게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요. 나는 6개월 뒤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섬 전체가 우리 구역이었는데, 우리는 대개 걸어 다녔어요. 버스가 없었고 차도 얼마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나소 형제는 차가 있어서, 가능할 경우에는 항상 우리가 봉사하러 갈 때 태워 주었어요. 정말 봉사가 즐거웠어요. 우리 모두는 의욕이 대단했지요.”

가장인 앙리뤼시앵 그롱댕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녀들에게 파이오니아를 하도록 격려했습니다. 순회 감독자들은 여호와께 최상의 것을 바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맏이인 앙리프레드는 지금 마흔 살인데, 전 시간 봉사를 천직으로 삼았습니다.”

앙리프레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회중에는 열심 있는 청소년들이 많았습니다. 청소년들 중에는 침례를 받은 청소년도 있었고, 나처럼 아직 침례를 받지 않은 청소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방학이 되면 침례를 받았든 받지 않았든 봉사를 60시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 목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나는 지금 아내 에블린과 함께 순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악귀의 반대

레위니옹에서는 영매술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자닌 코리노(이전의 성은 페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라몽타뉴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났는데, 바늘로 인형을 찔러 나를 저주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몰라 성서 연구생에게 설명을 부탁했지요. ‘저 사람은 주술사인데, 자매를 해치라고 신들에게 빌 거예요’라고 연구생이 말하더군요. 나는 연구생에게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을 보호하신다고 안심시켜 주었지요. 물론, 나는 아무 해도 입지 않았습니다.”

한 형제는 어렸을 때 가족이 교령회(交靈會)를 했다고 회상합니다. 1969년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악귀들은 그가 집회에 오면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해서 그를 단념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 집회에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들으려고 연설을 녹음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악귀들은 떠났습니다. 그는 조금 뒤에 야외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야고보 4:7.

1996년에 오순절교인인 로제다 카로라는 여자는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전에 그는 같은 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의 조언을 받고서 당뇨병 약을 끊었다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남편 클레도는 그 지역의 공산당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불같은 성격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주술을 하고 힌두교 의식에 참여했지만, 나중에 오순절교인이 되었습니다.

로제다가 연구를 시작하자, 클레도는 반대를 하면서 회중 장로들에게 위협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로제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몇 달 뒤에 클레도는 병원에 입원하여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의식을 되찾았을 때, 두 명의 증인이 그에게 수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증인들이 아내를 위해 수프를 가져온 줄 알았습니다.

“아니에요, 카로 씨. 카로 씨 드시라고 가져온 거예요!” 자매들이 말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순절교인은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데, 내가 그토록 반대했던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내게 주려고 먹을 것을 가지고 왔으니 말입니다. ‘아내가 믿는 여호와 하느님이 정말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로제다와 내가 같은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요.” 클레도의 말입니다.

클레도는 순간적 감정에서 그런 겸손한 요청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프기 전에 이미 태도가 좀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이웃집에서 연구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연구 사회자 자매에게 “거기서 연구하는 것이 안 좋으니, 집으로 오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사실, 클레도는 두 사람 모르게 옆방에서 연구하는 것을 들었고 들은 내용을 좋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클레도는 글을 몰랐지만, 병이 낫자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를 하여 1998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클레도와 로제다는 나이가 많아 건강 문제가 있지만, 계속 충실하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내륙 지방으로

레위니옹 사람들 가운데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계곡에 사는 소수의 주민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계곡은 1200미터 이상의 험한 산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사는 드넓은 칼데라는 일종의 거대한 사화산으로, 식물이 무성합니다. 이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를 볼 기회가 좀처럼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르크드마파트라는 칼데라에 가는 방법은 걷거나 헬리콥터를 타는 것뿐입니다.

아프리카인 노예의 후손인 루이 넬로프는 시르크드마파트에서 자랐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가톨릭 사제를 가마에 태워 나른 적도 있었습니다. 루이는 마침내 생드니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진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새로 알게 된 믿음에 관해 친척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68년 어느 날 루이와 그의 아내 안 그리고 15세와 67세인 두 명의 자매는 내륙 지방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배낭 하나와 여행 가방 하나, 출판물이 가득 든 봉사 가방 하나를 가지고 갔습니다.

처음에는 강바닥을 따라 걷다가, 좁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탔습니다. 곳곳에 한쪽은 가파른 바위이고 다른 쪽은 절벽인 곳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사람이 사는 곳마다 전파를 하였습니다. 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날 밤에 여호와께서는 그 지역에 하나밖에 없는 상점의 주인을 통해서 우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침대와 부엌이 딸린 방 두 칸짜리 오두막을 내주었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났고, 자연이 만든 거대한 원형 극장인 칼데라로 내려가는 높이 1400미터의 산꼭대기에 다다랐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옛 친구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친구는 우리를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짐을 일부 맡기고, 다음 날 목적지를 향해 계속 갔습니다. 가는 길에 작은 야생 구아버 열매를 먹고 힘을 내고, 왕국 소식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겸손한 사람들에게 전파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후 6시에 친척 집에 도착했습니다. 친척은 우리를 보고 반가워하였고 맛있는 닭 요리도 해 주었습니다. 친척이 닭 요리를 준비하는 것을 보니 하느님의 천사들을 대접한 아브라함과 사라 생각이 나더군요. (창세 18:1-8) 물론, 우리는 친척이 요리하는 동안 그에게 증거를 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밤 11시가 되어서야 밥을 먹었습니다.

다음 날, 목요일에 우리는 칼데라를 두루 다니면서 눈에 띄는 집을 다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구아버로 식사를 때웠습니다. 한 친절한 사람이 커피를 대접해 주어서, 우리는 조금 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발은 쉴 수 있었어도, 입은 쉴 수가 없었지요! 사실, 그 사람은 성서에 관해 우리와 이야기한 것을 어찌나 좋아했던지 자기 집에서 1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모든 집을 우리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걸어가는 동안 그는 하모니카를 불어 주더군요.

마침내 우리는 짐을 맡긴 곳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금요일 늦게 집에 도착할 때까지, 67세 된 자매를 포함하여 우리 네 사람은 약 150킬로미터를 걸어 60집을 방문했고 100부가 넘는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물론, 나에게는 시르크드마파트에 간 것이 고향을 방문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두 명의 전도인에서 다섯 회중으로

1974년에 크리스티앙 페구는 어머니와 함께 남쪽에 있는 도시인 라리비에르로 이사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 도시에는 회중이 없었습니다. 그 무렵 스무 살이었던 크리스티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집 차고에서 집회를 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30명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 아주머니와 그의 딸 셀린하고 연구를 시작했는데, 셀린은 윌리스 그롱댕과 약혼한 상태였습니다. 열렬한 공산주의자인 윌리스는 약혼녀가 우리와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셀린은 우리 말을 들어 보라고 윌리스를 설득했습니다. 어머니는 윌리스와 그의 부모님을 찾아갔습니다. 매우 기쁘게도 그들은 어머니의 말을 잘 들었고 그 소식을 좋게 생각하였습니다. 온 가족이 연구를 시작했고, 1975년에 윌리스와 셀린은 침례를 받고 결혼했습니다. 윌리스는 마침내 장로로 임명되었습니다.”

크리스티앙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라리비에르를 빼고도, 우리 구역에는 레자비롱, 레마크, 레탕살레, 실라오 등의 내륙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레마크에서 관심자를 많이 만났습니다. 그 마을 위에는 사화산의 언저리인 르카프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 아침이면 300여 미터 밑에 펼쳐진 초목이 무성한 거대한 원형 극장을 볼 수 있습니다.”

푸드루 가족은 르카프의 기슭에서 멀지 않은 작은 땅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맏이인 장클로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5남 5녀는 채소를 길러 시장에 내다 파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아버지는 제라늄을 재배하고 증류하여 향수에 쓰는 원액을 만드는 일도 했습니다. 우리는 마을에 있는 학교까지 5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는데, 대개는 밭에서 기른 것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하굣길에는 때때로 약 10킬로그램의 식료품을 모두 머리에 이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고, 술에 취하면 난폭해졌습니다. 나와 동생들은 집에서 좋지 않은 장면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가족의 장래가 걱정되었습니다.”

장클로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974년에 나는 파이오니아 형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라리비에르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교회에서 위선과 불공정을 보았던 터라 무신론자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내가 한 모든 질문에 그 형제가 성서를 사용해서 대답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내 니콜과 나는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을 찾아가 성서 진리를 알려 주었으며, 여러 차례 동생들과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때로는 부모님도 우리 말을 듣곤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 장마리와 장미셸 그리고 여동생 로즐린은 우리가 연구할 때 함께 연구를 하려고 정기적으로 우리 집에 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으로 발전하여 전도인이 되었으며 1976년에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내가 동생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며 나와 이야기를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어찌나 화를 냈던지, 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버지를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어머니는 글을 몰랐지만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마침내 아버지의 태도가 누그러졌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2002년에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우리 가족 중에서 우리 형제간 10명과 각각의 배우자들 그리고 어머니를 포함해서 26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연로하지만 지금도 열심히 봉사를 합니다. 장미셸과 장이브는 얼마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중단해야 하였습니다. 두 사람 다 회중 장로이며, 장이브는 아내 로제다와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맏아들과 나는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1974년에 크리스티앙 페구와 그의 어머니가 왔을 때, 라리비에르와 주변 도시들에는 회중이 없었지만 지금은 다섯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실라오 시에 있습니다. 이 도시는 시르크드실라오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속의 샘들과 온천으로 유명합니다. 실라오 회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라리비에르의 전도인들은 좁고 꾸불꾸불하며 낙석이 잘 떨어지기로 악명 높은 길을 37킬로미터나 와서 오후 5시경까지 전파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현재 이 도시에는 약 30명의 전도인이 있으며 자체 왕국회관도 있습니다.

남쪽 지역의 영적 발전

레위니옹 사람들은 이 섬의 남부 지역을 “개발이 안 된 남부”라고 부르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다소 황량한 해안에서 보면, 레위니옹의 활화산 피통드라푸르네즈(용광로봉)가 우뚝 솟아 있고 엄청나게 큰 파도가 쳐서 하얀 물보라가 입니다. 생피에르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입니다.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드니즈 멜로와 릴리안 피엡시크는 1960년대 말에 이곳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후에 관심자가 많아지자 특별 파이오니아 미셸 리비에르와 그의 아내 르네가 이 두 자매와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초창기 성서 연구생 가운데는 클레오 라피에르가 있습니다. 그는 건축 기술자였는데, 1968년에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클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한 집회는 큰 나무 밑에 있는 가로세로 3미터짜리 헛간에서 열렸습니다. 그 ‘왕국회관’을 헐어 증축을 했는데, 나도 그 일에 참여했습니다.”

예비군에 편입되어 있었던 클레오는 바로 그해에 소집 영장이 나왔습니다. 클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성서 지식이 별로 없었지만, 당국에 편지를 써서 내 중립 입장을 설명하였습니다. 답장이 오지 않아서, 사정을 알아보려고 섬 반대편의 생드니에 있는 군 기지로 갔습니다. 한 장교가 나에게 집에 가서 교도소에 갈 준비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는 자주 기도하고 부지런히 연구를 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시 소집 통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기지에 도착해서, 그곳에 함께 가 준 형제에게 한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십중팔구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 차를 팔아서 돈을 아내에게 주십시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장교들이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약 45분 뒤에 상사가 내 앞으로 왔습니다.

‘내 눈앞에서 썩 꺼지시오! 집으로 가시오.’ 상사가 말했습니다.

50미터도 채 못 갔는데, 그 상사가 큰 소리로 나에게 다시 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좀 전과는 다른 말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프랑스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해 듣기는 했지만, 직접 만나 보기는 당신이 처음입니다.’

그때에는 생피에르에 형제가 나밖에 없어서 모든 회중 집회를 내가 사회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도움을 받았으며, 1979년에는 선교인 부부인 앙투안 브랑카와 질베르 브랑카가 왔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처음에 회중들과 집단들은 대개 가정집이나 가정집을 개조한 곳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사이클론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견고한 건물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벽돌 건물은 비싸고 건축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손이 짧지 않아 레위니옹에 마침내 그러한 왕국회관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이사야 59:1.

예를 들면, 생루이 시에서는 회중이 새 왕국회관의 설계도를 받았을 때 젊은 형제 하나가 조적 기술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형제는 강사에게 증거를 하였고, 왕국회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원 봉사자들이 건물을 지을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강사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는 실습을 시키기 위해 학급 전체를 건축 현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학생들은 기초를 파는 일을 도왔으며, 강사는 후에 기초 공사에 필요한 철근을 기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공휴일에 190제곱미터의 바닥에 콘크리트를 치기로 하였고, 100명이 넘는 열심 있는 자원 봉사자들은 공사를 위해 아침 일찍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도시에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형제는 기지를 발휘해서, 알고 지내던 소방서장에게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이 친절한 서장은 즉시 소방차 한 대를 보내서 공사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해 주었습니다.

왕국회관이 완공되었을 때, 새로운 관심자 한 사람은 형제들과 이 공사에 감명을 받고는 수표책을 꺼내서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가 한 헌금은 새 확성 장치를 설치하기에 거의 충분한 돈이었습니다. 1988년 12월에 모리셔스를 방문 중이던 통치체의 캐어리 바버 형제가 레위니옹에 와서 봉헌사를 하였습니다. 1996년에는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생질레뱅에 완공되었습니다. 현재 이 섬에는 왕국회관이 17개 있으며, 34개의 회중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대회를 열 것인가?

레위니옹에서는 전파 활동이 초기에 매우 순조로웠기 때문에 대회를 열 넓은 장소를 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1964년에 형제들은 이 섬 최초의 순회 대회를 열기로 계획하였습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장소를 물색했는데도, 한 곳을 제외하고는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드니에서 찾은 그곳은 건물 2층에 있는 식당이었습니다. 그 건물은 낡고 임대료도 비싼 데다 나무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은 그 건물에서 예상 참석자 수인 200명 이상이 대회를 봐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달리 방도가 없어서 그 식당을 예약하였는데, 한 친절한 사람이 확성 장치를 기증하였습니다. 대회 날이 되어 형제들이 건물에 가득 차게 되자, 바닥이 삐걱거렸지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일요일 날 참석자는 230명이었으며, 21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서 시르크드마파트에서 자란 루이 넬로프 형제가 감사하게도 생드니에 있는 자기 땅의 일부를 임시 대회 회관을 지을 부지로 제공했습니다. 임시 대회 회관은 지붕에 함석을 얹고 벽은 바람이 잘 통하게 야자나무 잎을 엮어 만든 간단한 목조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열린 첫 대회는 사흘간의 지역 대회였습니다. 그 대회에 참석한 미리암 앙드리앵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첫날 아침 우리는 봉사를 나갔다가 돌아와 점심을 먹었는데, 쌀, 콩, 닭고기에 매운 고추를 넣어서 아주 매운 진짜 크레올 음식이었어요. 매운 고추 요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요리하는 형제들이 루겔 마르마이(어린이용 소스)를 준비했답니다.”

참석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 대회 회관은 확장되었고, 왕국회관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침내 그 땅에 있던 집들에 세 들어 살던 사람들이 이사를 나가자, 루이는 감사하게도 땅 전체를 회중에 기증하였습니다. 그곳에는 현재 벽돌로 지은 멋진 왕국회관이 들어서 있으며, 생드니에 있는 두 회중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1997년에는 라포세시옹 시에 대회 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5년 전에 사 두었던 땅에 지은 그 건물은 벽이 트여 있고, 침례장이 연단에 딸려 있습니다. 이 대회 회관은 16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크고 작은 대회들을 위해 일 년에 최소한 12번 사용됩니다. 대회 회관 옆에는 9명이 살 수 있는 선교인 숙소가 있습니다. 또한 서적 보관소와 레위니옹 밭을 위한 사무실도 있습니다.

어디에서 지역 대회를 열 것인가?

자체 대회 회관을 마련하기 전에 형제들은 지역 대회를 열기 위해 생폴에 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을 빌렸습니다. 형제들은 스타디움을 빌려 놓고도 대회를 바로 앞두고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 했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스포츠 행사나 문화 행사에 우선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시 당국은 형제들에게 스타디움 옆에 있는 전시장 터를 사용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곳은 노천 전시를 위한 공터였기 때문에, 의자도 그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회 참석자들은 자신이 앉을 의자와 양산을 가져와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연단에 올라가면 청중의 얼굴은 안 보이고 형형색색의 양산만 보였습니다.

레위니옹 사무실에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한번은 시 당국에서 전시장 터를 이중으로 예약을 받았습니다. 주크 음악—아프리카 리듬과 레게 음악과 칼립소 음악이 혼합된 음악—을 연주하는 마르티니크 출신의 악단도 예약을 한 것이었습니다. 관리들은 주크 악단이 전시장 터를 사용하게 하고, 우리에게는 ‘최초의 프랑스인들의 동굴’—최초의 프랑스인 정착민들이 상륙한 곳—이라고 하는 휴양지에서 대회를 볼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높은 절벽이 뒤에 있었고 그늘을 드리운 나무가 많아서 경치는 좋았지만, 의자와 연단이 없는 데다 화장실도 아주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곳에서 대회를 본 것은 잘된 일이었습니다. 대회가 있던 토요일 저녁에 폭풍이 불고 번개가 쳐서 스타디움의 전기 장치가 모두 망가져 주크 음악회가 도중에 끝나고 만 것입니다. 길에서 5킬로미터 아래에 있던 우리는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지역 주민 중에는 일을 그렇게 처리한 것에 대해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조직적인 발전

1967년 6월 22일에 법인체인 아소시아시옹 레 테무앵 드 제오바(여호와의 증인 협회)가 설립되었습니다. 1969년 2월에는 이 섬 최초의 순회 감독자가 임명되었습니다. 순회 감독자 앙리 자미는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자란 형제였습니다. 그의 순회구는 레위니옹의 회중 여섯 개와 모리셔스의 회중 네 개 그리고 몇몇 격지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레위니옹에만도 두 개의 순회구가 있습니다.

1975년에 프랑스에서 「파수대」에 대한 22년간의 금지령이 해제되자, 형제들은 즉시 레위니옹 밭에서 이 잡지를 사용했습니다. 전에는 「뷜탱 앵테리외르」라는 출판물을 사용해 왔는데, 이 출판물은 프랑스에서 인쇄되었고 「파수대」와 내용이 같았지만 사람들에게 배부하지는 않았습니다. 1980년 1월에 프랑스 지부는 레위니옹을 비롯하여 이 지역에 있는 섬들의 필요에 맞춘 프랑스어판 「우리의 왕국 봉사」를 인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레위니옹 크레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일부 출판물—전도지, 팜플렛,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 책과 「오직 한 분의 참 하느님을 숭배하라」 책 등—을 이 언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영적 마련은 이 외딴 지역에서 좋은 소식을 널리 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넓은 인도양에 비하면 레위니옹은 하나의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강력한 찬양의 함성이 하느님께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언자 이사야의 이러한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섬들 중에서 여호와에 대한 찬양을 알려라!’ (이사야 42:10, 12) 레위니옹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 화산섬의 해변에 끝없이 밀려오는 거대한 푸른 파도처럼 계속해서 변함없이 충실하게 여호와에 대한 찬양을 알리기 바랍니다.

[228, 229면 네모와 지도]

레위니옹—개요

국토

마스카렌 제도에 있는 세 개의 섬—모리셔스, 레위니옹, 로드리게스—중 가장 크며, 길이가 약 65킬로미터, 너비가 약 50킬로미터이다. 섬의 중앙부에 있는 세 곳의 칼데라(오래전 거대한 화산이 붕괴되면서 생긴 분지)는 가파른 암벽에 둘러싸여 있지만 사람이 살고 있으며 식물이 무성하다.

주민

주민은 78만 5200명이며, 대부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중국, 프랑스계의 혈통이 섞인 혼혈인이다. 주민의 약 90퍼센트가 가톨릭교인이다.

언어

프랑스어가 공용어이지만, 레위니옹 크레올어가 흔히 사용된다.

생활

경제는 주로 사탕수수 및 당밀이나 럼주와 같은 사탕수수 가공품 그리고 관광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식품

쌀, 육류, 물고기, 렌즈콩을 비롯한 콩류가 주식이다. 사탕수수에 더해, 코코넛, 리치, 파파야, 파인애플, 양배추, 상추, 토마토, 바닐라 등의 작물을 재배한다.

기후

남회귀선보다 약간 북쪽에 있어서, 습도가 높은 열대성 기후이며, 지역에 따라 강우량과 기온의 차이가 심하다. 열대성 폭풍이 자주 발생한다.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마다가스카르

로드리게스

모리셔스

레위니옹

레위니옹

생드니

라몽타뉴

라포세시옹

르포르

생폴

생질레뱅

시르크드 마파트

시르크드 살라지

실라오

시르크드 실라오

생뢰

르카프

레마크

레자비롱

레탕살레

라리비에르

생루이

생피에르

생필리프

피통드라 푸르네즈

생브누아

생앙드레

[삽화]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

용암류

생드니

[232, 233면 네모]

간략하게 살펴본 레위니옹의 역사

고대 아랍의 뱃사람들은 이 섬을 ‘디나 모르가빈’(서쪽 섬)이라고 불렀다. 포르투갈인 항해자들은 1500년대 초에 그때까지도 무인도였던 이 섬을 발견하고, ‘산타아폴로니아’라고 이름을 지었다. 프랑스인 자크 프로니는 1642년에 12명의 폭도를 마다가스카르에서 산타아폴로니아로 추방하면서, 이 섬이 프랑스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1649년에는 프랑스를 통치한 왕가의 이름을 따서 이 섬의 이름을 ‘일부르봉’으로 바꿨다. 프랑스 혁명 중이었던 1793년에 부르봉 왕조가 몰락하자, 이 섬의 이름은 파리 국민군에 마르세유의 혁명주의자들이 합류(union)한 것을 기념하여 레위니옹(Réunion)으로 바뀌게 되었다. 몇 차례 더 이름이 바뀐 뒤에, 1848년에 레위니옹이라는 이름이 다시 채택되었다. 1946년에 이 섬은 프랑스의 해외 주(州)가 되었다.

1660년대 초에 프랑스는 이 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커피와 사탕수수 농장을 세웠으며, 동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데려와 일을 시켰다. 1848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프랑스는 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계약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현재 이 섬에 살고 있는 혼혈인들은 대개 이러한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1800년대 초에 커피 재배 산업이 쇠퇴하면서 사탕수수가 주요 수출 농작물이 되었다.

[236, 237면 네모와 삽화]

육체미 선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뤼시앵 베쇼

출생 1937년

침례 1961년

약력 한때 유명한 육체미 선수였다. 1963년부터 1968년까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으며, 1975년부터는 장로로 봉사하고 있다.

지금도 1961년의 어느 날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나는 친구인 장을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구해” 주려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장의 아내가 나에게 와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는데, 거짓 예언자들(장의 아내는 증인들을 이렇게 불렀음)이 남편과 논쟁이 붙으면 남편을 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에게 손만 댔다가는 흠씬 두들겨 줘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은 상냥하고 합리적이었으며 사람을 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내 나는 십자가에 대한 토론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증인들은 성서를 사용해서 예수께서 단순한 말뚝 즉 기둥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후에 나는 천사장 미가엘이 하느님의 백성을 위해 “서 있”다고 한 예언자 다니엘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다니엘 12:1) 증인들은 성경을 사용해서 미가엘이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1914년부터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서 “서 있”다고, 다시 말해 통치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마태 24:3-7; 계시 12:7-10) 나는 그 대답과 증인들의 성서 지식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증인들이 우리 지역에 올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과 하느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호별 방문을 할 때 따라다니며 함께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생앙드레에서 모임을 갖는 격지 집단과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글을 잘 읽지는 못했지만, 처음으로 참석한 집회에서 당시에 「파수대」 대신 사용하던 「뷜탱 앵테리외르」의 몇 항을 읽었습니다. 그 후에 침례를 받고 나서 곧바로 서적 연구를 사회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서적 연구를 어떻게 사회하지?’ 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자닌 페구 자매는 내가 걱정하면서 불안해하는 것을 알고는, 친절하게도 자기가 항을 낭독할 테니 인쇄된 연구 질문으로 내가 질문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고, 연구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1963년에 밀턴 헨첼 형제는 레위니옹을 방문하여, 특별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고려해 보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기 때문에, 신청서를 작성했고 임명을 받았습니다. 내가 임명된 곳은 생앙드레 시였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9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이제 막 형성된 회중은 장 나소 형제의 집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장 형제가 자동차 사고로 고관절에 금이 갔을 때, 나는 6개월 동안 회중을 돌봐야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연설을 하고 신권 전도 학교를 사회하고 봉사회 프로를 다루고 지부 사무실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 나는 가외의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역에서 우리는 가톨릭교와 힌두교가 혼란스럽게 뒤섞여져서 만들어진 미신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가족의 경우에는 최소한 20명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현재, 생앙드레 지역에는 다섯 개의 회중이 있습니다.

[238면 네모와 삽화]

내 믿음은 조롱 때문에 시험을 받았다

미리암 토마

출생 1937년

침례 1965년

약력 1966년부터 계속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사촌인 루이 넬로프와 내가 1962년에 전파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거의 모든 집에서 안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커피와 레모네이드, 심지어는 럼주까지도 주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직자의 영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태도가 변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집주인들은 우리를 조롱하였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한 도시에서는 우리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중에는 봉사 중에 하느님의 이름을 사용하기를 중단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가 그 점을 알아채고는 그에 관해 묻더군요. 우리는 그에게 이유를 설명하면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하지만 순회 감독자는 우리에게 더욱 담대하게 행동하도록 친절하게 조언하면서 격려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조언에 깊이 감사하였고, 그가 한 말을 여호와께서 베푸신 징계로 보았습니다. (히브리 12:6) 사실, 하느님의 참으심과 자비 그리고 성령이 없었다면 나는 오래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40년이 넘는 소중한 시간을 파이오니아 봉사에 바칠 수 있었습니다.

[246, 247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시련을 인내하도록 도와주셨다

쉴리 에스파롱

출생 1947년

침례 1964년

약력 레위니옹에서 초창기에 침례를 받았으며, 병역을 거부하여 3년간 투옥되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진리를 받아들이자, 부모님은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섬기려는 내 결심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1964년에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고 1965년에는 특별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생앙드레 회중과 생브누아 회중을 감독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도 누렸습니다. 두 회중에는 각각 12명과 6명의 전도인이 있었는데, 장클로드 퓌르시와 나는 정기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두 회중을 오가곤 하였습니다.

1967년에 나는 입영 통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기를 들 수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레위니옹에서는 병역 거부가 처음 있는 일이라, 당국은 내 입장을 이해해 주지도 인정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한 장교는 400명가량 되는 신병들 앞에서 나를 구타한 다음 절뚝거리게 된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군복을 자기 책상에 놓고는 나에게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구타하겠다고 했습니다. 키가 거의 180센티미터나 되고 체구가 건장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서, “나를 다시 때리면, 정식으로 탄원을 하겠습니다. 프랑스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나에게 달려들었지만 때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나를 사령관에게 데리고 갔는데, 사령관은 내가 프랑스에서 3년간 중노동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대로 3년 형을 살기는 했지만, 레위니옹에서 지냈고 중노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판사는 나에게 형을 선고한 후에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와 악수하고서 내 처지에 대해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은 판사로서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교도소 부소장도 나에게 우호적이어서 내가 법정에서 일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접견실에 따라와 우리 부모님과 회중 성원들을 만나 보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삼십 명과 함께 한방을 썼지만, 두 명이 쓰는 감방으로 가게 되어 좀 더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전등을 신청했더니, 놀랍게도 허가가 나왔습니다. 재소자들이 전기를 이용하여 자살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전기 제품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전등 덕분에 나는 성서 연구를 할 수 있었고 통신 강좌로 회계 공부를 마칠 수도 있었습니다. 1970년에 석방되자, 판사 한 사람이 친절하게도 일자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249면 네모]

사이클론의 위협

1962년 2월에 사이클론 제니가 레위니옹과 모리셔스를 휩쓸고 지나갔다. 거품이 이는 괴물로 변해 버린 인도양은 여러 곳의 해안 지대를 침수시켜 버렸는데, 특히 레위니옹의 피해가 심각하였다. 생드니에서는 건물 피해가 있었으며, 나무에서 잎들이 다 떨어져 버렸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길거리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전신주들은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고, 전선들은 땅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작은 왕국회관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이클론으로 인해 37명이 목숨을 잃고, 250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그때 형제들은 모리셔스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모리셔스에서는 피해가 그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형제들은 며칠 동안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인명 피해는 없었다.

2002년에는 사이클론 다이나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서 3주 동안 실라오로 가는 길이 막혔다. 레위니옹 사무실은 그곳에 있는 30명의 형제들에게 공급품을 보내기 위해 사륜 구동 차량을 신속하게 마련하였다. 그 차는 경찰이 이끄는 15대의 차량으로 이루어진 수송단과 함께 이동하였다. 포장도로 곳곳이 강물에 쓸려 가서 수송단은 강바닥으로 내려갔다가 도로로 다시 올라와야 하였다. 실라오에 있던 형제들은 차가 도착하자 매우 기뻐하였다!

[252, 253면 도표와 그래프]

레위니옹—연대표

1955년 9월에 로버트 니즈벗이 방문하다.

1960

1961년 프랑스에서 한 증인 가족이 와서 많은 관심자들을 찾아내다.

1963년 세계 본부의 M. G. 헨첼이 155명의 청중에게 연설하다.

1964년 프랑스 지부의 감독을 받아 오다가 모리셔스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다. 이 섬 최초의 순회 대회에 230명이 참석하다.

1967년 법인체인 아소시아시옹 레 테무앵 드 제오바가 등록되다.

1970

1975년 프랑스에서 「파수대」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다.

1980

1985년 전도인 수가 1000명을 돌파하다.

1990

1992년 전도인 수가 2000명을 돌파하다. 지부에서 레위니옹 사무실과 대회 회관과 선교인 집을 짓기 위해 라포세시옹에 부지를 매입하다.

1996년 최초의 속성 건축 왕국회관이 완공되다.

1998년 새로 건축한 라포세시옹 대회 회관에서 첫 대회가 열리다.

2000

2006년 약 2590명의 전도인이 레위니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3,000

2,000

1,000

1960 1970 1980 1990 2000

[223면 전면 삽화]

[224면 삽화]

아당 리시아크는 레위니옹에서 한 달간 전파했다, 1959년

[224면 삽화]

노에미 뒤레이, 자닌 페구 그리고 그의 아들 크리스티앙. 레위니옹으로 가는 길에, 1961년

[227면 삽화]

르포르 왕국회관, 1965년

[230면 삽화]

전파하러 다니기 위해 옆이 트인 버스를 임대하였다, 1965년

[230면 삽화]

조제트 보네카즈

[235면 삽화]

자닌 코리노

[235면 삽화]

생폴에서 증거하는 모습, 1965년

[243면 삽화]

클레오 라피에르

[244, 245면 삽화]

루이 넬로프와 안 넬로프는 외딴 마을들에서 증거하였으며 오가는 길에 구아버로 식사를 때웠다

시르크드마파트

[248면 삽화]

생루이에 완공된 왕국회관, 1988년

[251면 삽화]

크고 작은 대회들

2층 식당에서 열린 이 섬 최초의 순회 대회, 1964년

최초의 프랑스인들의 동굴, 이곳에서 지역 대회가 열렸다

생드니의 임시 회관, 196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