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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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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될 것이다.” (말라기 1:11) 약 2450년 전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매우 인상적인 이 예언은 오늘날 러시아에서 실로 참됨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서쪽 칼리닌그라드 시의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종들 위로 해가 질 때, 동쪽으로 열한 개 시간대가 떨어져 있는 축치 반도—베링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알래스카와 마주하고 있는 반도—의 전도인들 위로는 이미 해가 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에서 왕국을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일에는 결코 해가 지는 법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정권 기간에 용기 있는 형제 자매들이 지칠 줄 모르고 수행한 활동은 풍부한 축복을 거두어 왔습니다. 이제 살펴보겠지만, 그들은 가혹한 박해를 견뎌 냈으며 그것은 오늘날 러시아에서 15만 명이 넘는 전도인이 활동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공식 명칭은 “러시아 연방”이며, 이 나라는 단일 국가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나라는 연방 국가로서 여러 종족과 언어와 민족들이 각각 그 나름의 독특한 문화와 더불어 한데 어우러져 있습니다. 이 기록은 다양한 인종과 언어와 종교가 커다란 모자이크를 이루고 있던 나라, 다만 오늘날의 민주적인 러시아가 아닌 차르 즉 황제가 다스리던 100여 년 전의 러시아 제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스크바의 교직자들에게 담대히 증거하다

종교 부흥기였던 그때, 러시아 정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신심 깊은 사람이었던 세묜 코즐리츠키는 당시 성경 연구생으로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인도하던 찰스 테이즈 러셀을 만났습니다. 세묜의 손녀인 니나 루포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1891년에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러셀 형제를 만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계셨고, 러셀 형제에 대해 마치 친형제처럼 늘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1800년대 말에 러셀 형제와 그의 동료들은 성서에 들어 있는 강력한 진리를 가르쳐서 순결한 숭배를 회복시키는 활동을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활동에는 그리스도교국 교회들과 교직자 계급의 거짓 가르침을 폭로하는 일도 포함되었습니다. 성서 진리에, 그리고 그와 더불어 러셀 형제와 그의 동료들이 순결한 숭배를 위해 보인 열심에 고무된 세묜은 모스크바의 교직자들에게 담대히 전파하였습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니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할아버지는 재판도 없이 쇠사슬에 묶여 곧바로 시베리아로 유배되셨는데, 모스크바의 대주교를 모독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1891년에 시베리아에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후에 세묜 코즐리츠키는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에 속하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1935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계속 열심히 전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진리가 들어갈 있는 어떠한 여건도 찾아볼 없었다’

세묜 코즐리츠키가 유배되던 그해에, 러셀 형제는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였습니다. 그 방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러시아에서 진리가 들어갈 수 있는 어떠한 틈이나 여건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 그의 말은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이 진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독재 정권이 사람들이 진리를 듣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러셀 형제는 그런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시온의 파수대」 1892년 3월 1일호에 이렇게 썼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제국 내의 모든 사람을 지나치게 속박하며, 제국 내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늘 의심의 눈초리로 봅니다. 외국인은 모든 숙박업소에서 그리고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거나 그곳을 떠나기 전에 모든 기차역에서 반드시 여권을 제시해야 합니다. 숙박업소 주인이 여권을 받아 경찰서장에게 주면, 그는 외국인이 떠나기 전까지 여권을 보관합니다. 그래서 어느 외국인이든 그의 입국 혹은 출국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손쉽게 알아낼 수 있습니다. 관리들과 당국자들이 정중하지만 딱딱한 태도로 대하므로, 외국인 체류를 단지 허용하는 것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의 사상에 지장을 줄 만한 내용이 있지 않은지 확인하기 위해 외국인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서적과 신문을 철저히 검열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진척되기란 매우 어려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진리의 씨가 움트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작은 일들의 날”이 시작되다

일찍이 1887년에 「시온의 파수대」는 그 잡지의 개별 호들을 여러 곳으로, “심지어 러시아에까지” 우편으로 보낸 적이 있다고 보고하였습니다. 1904년에 러시아에서 성경 연구생의 한 작은 집단은 어렵게나마 성서 출판물을 받을 수 있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에서는 “출판물이 [정부 검열관들의] 이목을 끌게 되어 하마터면 받지 못할 뻔”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작은 집단은 출판물을 받게 된 것을 매우 고마워하면서, “이곳에서는 출판물이 금이나 다름없습니다. 구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이 출판물을 전할 기회를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그들은 그 출판물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러시아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실제로 시작되었으며, 미미하기는 하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참숭배의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시작은 작았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스가랴의 말처럼, ‘누가 작은 일들의 날이라고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스가랴 4:10.

그 후 여러 해 동안, 독일에 있는 열심 있는 형제들이 러시아로 출판물을 보냈습니다. 대부분 독일어 출판물이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907년에는 러시아에 있는 한 독일 침례교회의 신자들이 「천년기 새벽」 책 시리즈를 우편으로 받았습니다. 그중 열다섯 명이 참숭배의 편에 서자 교회는 그들을 파문하였습니다. 그들을 반대했던 교직자는 나중에 「천년기 새벽」 책의 내용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11년에는 특이한 방법—신혼여행—으로 활동이 촉진되었습니다. 독일 출신의 젊은 헤르켄델 부부가 결혼을 한 후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러시아로 전파 여행을 온 것입니다. 헤르켄델 부부는 기쁘게도 왕국 전파자들로 이루어진 격지 집단들을 발견하였으며 그들을 영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그 이전에 러시아의 한 독자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독일에서 보내오는 출판물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어졌던 하늘의 만나만큼이나 제게 소중합니다. ··· 러시아어 출판물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저는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여러 출판물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번역이 시작되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1911년에, 당시 그 일부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사는 R. H. 올레신스키라는 폴란드 형제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 전도지를 러시아어로 인쇄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는 러셀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한 부를 동봉합니다. 만 부를 찍는 데 73루블이 청구되었습니다. ··· 어려움이 많지만, 그럼에도 하느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이 전도지를 비롯한 다른 출판물들이 전해졌으며, 그들은 그 출판물들을 러시아로 가지고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새로운 언어 밭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가 놓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전도지와 팜플렛과 소책자 등 다른 출판물도 발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번역 활동에 더욱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러셀 형제는 1912년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핀란드를 방문하였습니다. 카를로 하르테바는 핀란드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를 대표하여 활동하도록 위임장을 받았습니다. 1913년 9월 25일에 차르의 대표자인 뉴욕 주재 러시아 제국 영사가 위임장에 관인을 찍고 서명을 하였습니다.

두 달 예정의 전파 여행이 길어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얼마 전에, 조셉 F. 러더퍼드는 조직의 대표자로서 브루클린을 떠나 몇몇 나라를 여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여행 중에 폴란드의 도시인 우치에서 도이치만이라는 성경 연구생을 만났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도이치만 형제는 가족과 함께 러시아 이곳저곳을 다니는 두 달 예정의 전파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여행이 더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도이치만 가족은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 볼가 강가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918년에는 폴란드로 돌아가기로 하였지만 천연두가 돌아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는 내전이 일어나서 국경이 폐쇄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자녀 셋을 잃었는데, 그중 한 명은 천연두로 다른 한 명은 폐렴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굶주림과 공포가 만연해 있었습니다.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한 혼란의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특히 외국인들이 “적”에게 협력한다는 혐의로 고발되어 재판도 없이 즉결 처형을 당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무장한 군인 한 명과 함께 도이치만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 남자는 “저자는 적입니다. 체포해야 합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군인은 “이유가 뭐요?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했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도이치만 형제가 해 준 목수 일에 대한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지어낸 것입니다. 양편의 이야기를 들어 본 군인은 그 남자의 거짓된 동기를 알아차렸고 그를 집 밖으로 밀쳐 내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 군인은 도이치만 형제에게 성서에 관한 대화를 함께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대화 덕분에 도이치만 형제 가족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921년에 공산주의 정부가 반대편 군대를 물리쳤고 내전은 끝났습니다. 얼마 후에 도이치만 가족은 폴란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성경 연구생들과 볼셰비키

제1차 세계 대전이 맹위를 떨치면서, 러시아 형제들과 다른 곳의 형제들이 이따금 주고받던 연락마저 끊기게 되었습니다. 세계 전역에 있던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형제들도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즉위하신 일의 의미를 온전히 알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나라가 머지않아 20세기에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들 얼마를 겪게 될 것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중 상당수가 성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1917년 후반기에 러시아 혁명으로 370년간의 차르 통치가 막을 내렸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재해 계심을 알지 못하는 러시아의 새로운 통치 세력인 볼셰비키는 이전의 모든 정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인간 정부를 수립할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몇 년 안 되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이 그 면모를 드러내었습니다. 이 나라는 결국 전 세계 육지 면적의 거의 6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주목할 만하게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몇 해 전에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첫 번째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종교이든 자신이 선호하는 종교를 밝힐 수 있을 뿐 아니라 포교하거나 개종할 수 있는 전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관리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그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어볼 권한조차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개인의 양심이 관련된 문제이므로 누구도 침해할 권리가 없다.”

러시아의 일부 지역들에서는 사회 민주당이 그러한 공식적인 원칙을 준수하였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들은 성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새로운 정부는 애초부터 무신론적이었고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부르며 종교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볼셰비키가 처음으로 한 일 가운데는 정교분리 법령을 발포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종교 단체의 포교 활동은 불법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교회 재산은 국유화되었습니다.

이 새로운 정부는 하느님의 왕국에 충성을 다하는, 곳곳에 산재한 성경 연구생들의 집단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1917년의 혁명이 있은 지 얼마 후에 시베리아에서 한 성경 연구생은 암울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이곳 러시아의 상황이 어떤지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공산주의 원칙에 입각한 소련 정부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평등 실현을 위해 많은 노력이 기울여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만, 하느님과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1923년경에는 성경 연구생에 대한 반대가 격렬해졌습니다. 형제들은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 드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 생필품, 음식, 옷 ··· 등은 있지만, 우리는 영적 양식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보내 주신 서적들은 정부에서 압수해 갔습니다. 그러니 가지고 계신 모든 러시아어 출판물에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지 형태로 보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진리의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 다섯 사람이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고, 열다섯 명의 침례교인도 우리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파수대」 1923년 12월 15일호에서는 “협회는 주의 은혜에 힘입어 러시아에 출판물을 들여보내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1925년경에는 「파수대」를 러시아어로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에서의 증거 활동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 단체에 속한 한 사람은 지옥불 교리를 사랑의 하느님과 조화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동료 신자들에게 그에 관해 질문하자 그들은 하느님께 그를 그런 생각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후에 그와 그의 아내는 「파수대」 몇 부를 받았고 즉시 진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출판물을 더 요청하는 편지 가운데서 “우리는 바다 건너오는 만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다른 형제들도 그런 “만나”를 받아 보고 있다고 정기적으로 알려 왔으며, 미국에 있는 형제들이 그처럼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출판물을 발행함으로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내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였습니다.

“무엇이든 있는 대로 다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파수대」 1925년 9월호에는 시베리아에서 보낸 감동적인 편지가 실렸습니다. 농갓집 출신인 한 교사는 자신이 가족과 함께 1909년에 러시아 남부에서 시베리아로 이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출판물을 읽으며 가슴 벅찬 기쁨을 느꼈다고 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제 마음의 소망은 더 큰 능력과 활력을 가지고 어둠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하느님의 거룩한 진리에 더욱더 깊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는 출판물을 더 요청하는 것으로 편지를 끝맺으면서 “무엇이든 있는 대로 다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습니다.

같은 호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편집인의 답변이 실렸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에 출판물을 보내려고 한동안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모든 시도가 좌절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비롯하여 이와 비슷한 다른 편지들은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한 마케도니아에서의 간청과 같습니다. (사도 16:9) 주의 뜻이라면 우리는 기회가 되는 대로 속히 여러분을 도울 것입니다.”

실로, 「파수대」와 그 밖의 출판물들은 ‘증거하기 위하여’ 좋은 소식을 러시아어로 전파하는 데 참으로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었습니다! (마태 24:14) 2006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러시아어 출판물은 6억 9124만 3952부에 달하며, 이는 스페인어와 영어와 포르투갈어를 제외한 다른 어떤 언어보다도 많은 수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왕국을 선포하려는 그분의 증인들의 노력을 풍성하게 축복해 오셨습니다.

해외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증거하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고 공산주의 국가가 수립되면서, 많은 러시아인이 다른 나라들로 이주하였습니다. 러시아어 「파수대」와 그 외의 출판물들은 소련의 국외에서 인쇄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다른 나라들로 영적 양식이 유입되는 것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20년대 말엽에는 전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러시아어 출판물을 받아 보게 되었고, 라트비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우루과이, 파라과이,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와 같은 나라들에 사는 러시아인들이 감사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형제들은 그러한 일부 나라들에서 러시아어로 진행되는 그리스도인 집회와 전파 활동을 조직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러시아어 성서 강연이 라디오 방송국들을 통해 정기적으로 방송되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 주 브라운즈빌 등지에 러시아어 회중들이 형성되었고 대회들도 조직되었습니다. 일례로, 형제들은 1925년 5월에 펜실베이니아 주 카네기에서 사흘간의 러시아어 대회를 열었는데, 250명이 참석하고 29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상황의 변화

레닌이 사망한 뒤에, 모든 종교에 대한 정부의 공격이 거세어졌습니다. 1926년에는 전투적 무신 연맹이 창설되었는데, 그 명칭에 이 단체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끊임없이 무신론적 선전을 쏟아 내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의 광활한 영토 전역에 무신론적 사상이 퍼졌습니다. 러시아의 한 성경 연구생은 세계 본부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이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은 진리를 배우는 데 분명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전투적 무신 연맹은 「안티렐리기오즈니크」라는 잡지를 비롯하여 무신론을 조장하는 출판물을 발행하였습니다. 1928년에 그 잡지에서는 “보로네시 오블라스트에 분파들이 득실대고 있다”고 단언하였습니다. * 그 잡지는 그러한 분파들 중에 “진첸코와 미트로판 보빈을 필두로 하는 성경 연구생” 48명에 관해 언급하였습니다. 유의할 만하게도, 「파수대」 1926년 9월호에는 러시아에서 미하일 진첸코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가 실렸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사람들은 영적 양식에 굶주려 있습니다. ··· 우리에게는 출판물이 거의 없습니다. 트룸피 형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러시아어 출판물을 번역하고 복사하는 일을 하고 있으며, 그런 방법으로 우리는 영적 양식을 섭취하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모든 러시아 형제들의 인사를 전하는 바입니다.”

1926년 9월에 트룸피 형제는 형제들이 러시아어 출판물을 받을 수 있게 당국이 허가해 줄 것 같다고 편지하였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베델의 형제들에게 독일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사무실을 통하여 전도지, 소책자, 서적 및 제본 「파수대」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러더퍼드 형제는 그러한 요청에 응하여 조지 영을 모스크바에 보냈습니다. 그는 1928년 8월 28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였습니다. 영 형제는 한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몇 가지 흥미 있는 경험을 했지만, 얼마나 오래 이곳에 머물도록 허용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모스크바의 한 고위 관리와 면담할 수는 있었지만, 1928년 10월 4일까지 유효한 비자만 겨우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새로 형성된 소련 정부는 종교에 대해 불분명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몇몇 정부 문서에서는 종교 단체들이 소련의 인적 자원에 흡수될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해가 지나면서 그러한 기대는 정책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해할 필요가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소련 정부가 여호와의 백성을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정신과 마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소련 정부는 하느님의 백성을 설득하여 그들이 순응하게, 강제로라도 국가에 전적인 충성을 바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여호와께 충성을 바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영 형제가 떠난 뒤, 러시아의 형제들은 하느님의 왕국을 계속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다닐 스타루힌이 러시아의 왕국 전파 활동을 조직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스타루힌 형제는 전파 활동을 진척시키고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모스크바, 쿠르스크, 보로네시 등의 러시아 도시들과 우크라이나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기도원에 있는 침례교인들에게 전파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진리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1929년 1월에 러시아의 형제들은 공개 집회를 열기 위하여 쿠르스크에 있는 교회 건물을 1년에 200달러를 주고 빌렸습니다.

같은 해에 브루클린 베델의 형제들은 소량의 성서 출판물 발송품을 소련에 들여보내기 위해 소련 인민 무역 위원회에 허가를 신청하였습니다. 그 발송품에는 「하나님의 거문고」와 「구출」 책이 각각 800부씩 들어 있었고 소책자도 2400권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달이 되지 않아서, “출판물 관리국의 반입 금지로 반송함”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채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반송 사유가 구식 러시아어 문자로 출판물을 인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형제들은 모든 러시아어 출판물이 반드시 러시아어의 최근 변화에 따라 정확하게 번역되고 인쇄되도록 하였습니다.

질 높은 번역의 필요성

1929년부터 「파수대」지의 몇몇 호에는 영어와 러시아어를 둘 다 할 줄 아는 유능한 번역자들이 필요하다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 「파수대」 1930년 3월호에는 “영어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영어를 할 줄 알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유능하고 헌신한 형제가 필요합니다”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필요를 아셨으며, 여러 나라에서 번역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한 번역자들 중 한 사람으로 알렉산드르 포르스트만이 있었는데, 그는 1931년에 이미 러시아어로 기사들을 번역하여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 지부 사무실을 통해 세계 본부로 보내오고 있었습니다. 라트비아에 살던 포르스트만 형제는 열정적인 번역자였습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았고 영어와 러시아어에 모두 능통하였기 때문에, 성서 출판물을 신속하게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매주 몇 시간만 번역 일을 하였는데, 믿지 않는 아내와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세속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포르스트만 형제는 1932년 12월에 전 시간 번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번역자로 일하는 동안 전도지와 소책자와 서적을 번역하였으며, 194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러시아에서의 왕국 활동이 곧 법적 인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번역된 러시아어 출판물을 구할 수 있게 하는 데 많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북유럽 사무실의 감독자였던 윌리엄 데이는 러더퍼드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틀림없이 러시아에서의 제한 조치가 곧 풀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1억 80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 훌륭하게 번역된 출판물이 준비되어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라디오 방송

어마어마하게 큰 러시아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은 라디오였습니다. 「파수대」 1929년 2월호에는 “러시아어 강연이 라디오로 방송될 것입니다”라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일요일에 에스토니아에서 소련으로 프로그램이 방송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 지부 감독자였던 월리스 백스터 형제는 후에 이렇게 회상하였습니다. “1929년에 긴 토의 끝에 1년간의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러시아어 방송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레닌그라드에 사는 사람들이 방송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소련 정부가 보인 반응은 에스토니아 교직자들의 반응과 비슷하였습니다. 둘 다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경고하였습니다.” 1931년에는 청취자가 듣기 편리한 시간대인 오후 5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중파로 러시아어 방송을 하였습니다. 3년 반 동안 방송을 하다가 1934년 6월에 방송이 중단되었습니다. 에스토니아 지부 사무실에서 보낸 한 편지에서, 형제들은 방송이 금지된 경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교직자들은 우리가 하는 라디오 강연이 공산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선전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에스토니아] 정부에 조언하였습니다.”

상황이 변하다

1935년에 브루클린 베델의 형제들은 앤톤 쾨버를 소련에 파견했습니다. 그가 그곳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제 막 정권을 잡은 독일에 있던 인쇄기를 소련으로 보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쾨버 형제는 러시아에 있는 몇몇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몇 년간, 러시아에서의 왕국 전파 활동은 꾸준히 진척되었습니다. 라트비아 지부 사무실의 감독하에 성서 출판물이 러시아어로 번역되었습니다. 하지만 인쇄된 출판물을 러시아로 들여보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상당히 많은 양의 출판물이 창고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증인들의 수는 매우 적었습니다. 따라서 소련 정부는 증인들에게 거의 혹은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곧 변할 것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1939년에 폴란드를 침공한 뒤 얼마 안 있어, 소련은 열다섯 개 공화국 가운데 마지막 네 나라—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에스토니아—를 합병하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뜻하지 않게 소련 영토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 나라는 머지않아 국가 자체의 존립을 위해 끔찍한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는 가혹한 억압하에서 하느님께 충성을 나타낼 시기였습니다.

확고한 입장을 취할 준비를 갖추다

1941년 6월에 독일은 소련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으며, 이 공격으로 소련의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은 완전히 허를 찔린 셈이 되었습니다. 그해 말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군해 들어갔으며, 소련의 붕괴는 임박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스탈린은, 러시아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大) 애국 전쟁’을 위해, 전시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스탈린은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심이 남아 있으므로 전쟁을 위한 노력이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교회를 허용해 줄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943년 9월에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를 대표하는 최고위 교직자 세 명을 크렘린에서 공식 접견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교회와 정부 간의 관계가 개선되고 일반 대중이 접할 수 있는 교회가 많아졌습니다.

러시아의 형제들은 독일의 여호와의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전적인 중립을 고수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로 인한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주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마태 22:37-39)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와 발트 해 연안국들에서는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1000명이 넘는 증인들이 중립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한가운데 있는 노동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바실리 삽추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열네 살 되던 해인 194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전쟁 기간 중에, 활동하던 형제들 거의 모두가 러시아 한가운데 있는 교도소와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일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충실한 자매들과 나와 같은 십 대 청소년들이 회중과 야외 봉사와 관련된 책임들을 맡았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그 당시 여전히 자유로웠던 한 형제가 있었는데, 건강이 몹시 나빴습니다. 그는 내게 ‘바실리,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있는데, 형제들이 충분치가 않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병약한 형제가 여호와의 일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게 되니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기꺼이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지하실에 임시방편으로 만든 인쇄 시설에서 소중한 영적 양식을 복사하여 형제들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전달해 주었는데, 특히 투옥되어 있는 형제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자매들과 십 대 청소년들이 비이기적으로 사랑에 찬 노력을 기울였지만, 만들어지는 영적 양식의 양은 여전히 부족하였습니다. 러시아에서 이주해 가는 폴란드 형제들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었는데, 그 형제들은 폴란드에 있는 사무실로 보고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여행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형제들은 러시아에서 사용할 영적 양식 및 등사 원지와 잉크 등의 도구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각자 자기 처소로 가게 하여라”

1946년에 폴란드에 살고 있던 일부 형제들은 강제로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반 파시콥스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들은 우치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답변에는 ‘각자 자기 처소로 가게 하여라’라는 재판관기 7:7의 말씀이 인용되어 있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나는 여호와께서 이 어려운 구역에서의 전파 활동을 어떻게 지혜롭게 인도하셨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든 그곳이 우리의 ‘처소’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당국에서 내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신적인 나라로 이주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우리는 한 형제의 집에 모인 열여덟 명의 침례 지원자를 만나 그들이 침례받을 준비를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출판물을 모은 다음 검열을 당할 때 눈에 띄지 않도록 포장하였습니다. 얼마 후 동이 트자, 폴란드 군인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우리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한 달 치 식량과 필요한 가재도구들을 가지고 가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차역까지 호송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소련 치하의 우크라이나는 우리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주민들과 지방 당국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증거하고 싶어서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담대히 밝혔습니다. 뜻밖에도 그 지역 농업 위원회의 서기가 다음 날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출판물을 보내오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특히 그가 우리에게 출판물을 주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가 가족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을 때, 우리는 이 나라에 여호와의 ‘보배로운 것’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개 2:7) 오래지 않아 그의 가족 전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으며 여러 해 동안 충실히 봉사하였습니다.”

해야 할 많은 일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과 그 후, 러시아에서는 가장 열악한 여건하에서 활동이 수행되고 있었습니다. 폴란드 지부 사무실은 본부에 보낸 1947년 4월 10일자 편지에서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파수대」나 여호와의 증인의 인쇄물을 받으면 10년간 강제 노동을 하게 되거나 유배될 것이라고 신도들에게 겁을 줍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주민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고, 사람들은 영적 계몽을 간절히 원합니다.”

「1947 연감」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증인들은 인쇄된 서적도, 보기 좋게 인쇄된 「파수대」 잡지도 구할 수가 없습니다. ··· 많은 경우 여전히 손으로 힘들게 베껴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 ··· 연락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파수대」를 소지한 것이 발각될 경우 종종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레기나 크리보쿨스카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치 철조망이 나라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서 우리가 감옥에 있지는 않아도 수감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열심히 섬기던 남편들은 교도소와 수용소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여자들도 많이 인내해야 했지요. 다들 불면증에 시달렸고 소련의 국가 보안 위원회(KGB)의 감시하에 정신적인 압박을 받았으며 일자리를 잃는 등 시련이 많았습니다. 당국자들은 우리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갖가지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사야 30:21) 우리는 사탄이 왕국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려고 그러한 상황을 이용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그분이 돕고 계심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렵사리 국내로 밀반입된 성서 출판물을 통해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과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지혜를 얻었습니다. (고린도 둘째 4:7)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셨으며, 심지어 국가가 거세게 반대하는 기간에도 새로운 사람들이 그분의 조직에 계속 들어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시초부터 여호와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여호와의 영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철조망 너머로 던진 편지

후에 레기나의 남편이 된 표트르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1944년에 고르키 오블라스트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전파하려는 열심은 식을 줄 몰랐습니다. 표트르는 편지를 여러 통 썼는데, 각각의 편지에는 성서의 가르침을 간단하게 설명한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각 편지를 봉투에 넣고 그 봉투에 실로 돌을 매달아서 높다란 철조망 너머로 던졌습니다. 표트르는 누군가가 그 편지들을 읽게 되기를 바랐는데, 어느 날 정말로 누군가가—리디야 불라토바라는 소녀가—그 편지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표트르는 리디야를 보고는 가까이 와 보라고 조용히 불렀습니다. 그는 리디야에게 성서에 관해 더 알고 싶으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리디야는 좋다고 했고 그들은 다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 후로 리디야는 정기적으로 와서 그 소중한 편지들을 더 주워 갔습니다.

리디야는 열심 있는 자매이자 좋은 소식의 전파자가 되었고, 얼마 안 있어 마리야 스미르노바와 올가 세브류기나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도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자매들을 영적으로 도와주기 위해 다름 아닌 수용소로부터 이 작은 집단에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표트르는 작은 짐 가방의 바닥을 이중으로 만들었으며, 거기에 잡지를 넣었습니다. 표트르는 수감자가 아니면서 증인도 아닌 사람들이 그 가방을 가지고 수용소를 오가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매들이 사는 주소 중 한 곳으로 그 가방을 전달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자매들은 그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조직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경찰은 당시에 으레 그랬듯이 요원을 보내어 자매들을 염탐하게 하였습니다. 교사였던 그 요원은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매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자매들은 그런 면에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자매”에게 기꺼이 성서 진리를 전해 주었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어떤 방법으로 출판물을 받는지도 말해 주었습니다. 다음번에 그 가방을 보내려고 할 때, 표트르는 붙들렸고 25년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습니다. 자매 세 명도 각각 2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알려 주어야 한다’

전시와 그 후 여러 해 동안 소련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계속 맹렬히 반대하였습니다. 1947년 3월에 폴란드의 형제들은 소련 서부에 있는 한 지역의 고위 관리가 그해 봄이 지나기 전에 그 지역에 단 한 명의 여호와의 증인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도 있습니다. “이 편지를 작성하는 중에 단 하루 동안 100명의 형제 자매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에 관해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훌륭하게 여호와께 충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곳 형제들은 강제 수용소에 있는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구출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증인들은 또한 전파 활동을 하고 투표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책임 맡은 형제들은 1947년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러시아의 최고위 당국자들이 우리 형제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것 같기는 해도 우리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국자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점들을 알리고 설명하는 일이 부족합니다.”

등록하기 위한 노력

얼마 있지 않아 폴란드 지부 사무실에서는 러시아 형제 두 명이 경험 많은 변호사와 함께 소련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등록하는 데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게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폴란드에서 러시아의 형제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왕국의 좋은 소식이 전파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마가 13:10)”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습니다. “참을성을 나타내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눈물을 기뻐하는 외침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시 126:2-6.”

1949년 8월에 미콜라 퍄토하, 미하일로 추마크, 일리야 바비추크는 등록 신청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정부는 특정 조건들을 이행할 경우에만 여호와의 증인을 인가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형제들이 소련에 살고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의 명단을 넘겨주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이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활동이 계속되고 전도인들의 수도 꾸준히 증가하기는 하였지만, 많은 형제들은 여전히 자유를 박탈당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네가 믿는 여호와는 너를 이곳에서 구해 주지 않을 거다’

표트르 크리보쿨스키는 1945년 여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들은 재판을 받은 다음 여러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내가 있던 수용소에서는 많은 수감자들이 진리에 진정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교직자였던 한 수감자는 자신이 들은 내용이 진리임을 곧 이해하고 여호와의 편에 섰습니다.

그렇지만 여건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간신히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감방에 수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감방은 빈대가 들끓었기 때문에 벌레 소굴이라고 불렸는데, 어찌나 많았던지 사람 몸의 피를 전부 빨아 먹을 것 같았습니다. 검열관은 감방 앞에 서서 ‘네가 믿는 여호와는 너를 이곳에서 구해 주지 않을 거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받는 일일 배급량은 빵 300그램과 물 한 잔이었습니다.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없어서, 나는 작은 문에 기대어 아주 가는 틈새로 공기를 들이쉬느라 안간힘을 썼습니다. 빈대가 피를 빨아 먹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열흘간 벌레 소굴에 있으면서, 인내할 힘을 달라고 여호와께 거듭거듭 청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5:15) 감방 문이 열렸을 때 나는 기절하였고 깨어 보니 다른 감방에 있었습니다.

그 후에, 노동 수용소의 재판관은 내가 ‘소련 정부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키고 선전을 하였다는’ 이유로 보안이 가장 삼엄한 형벌 수용소에서 10년 감금형에 처할 것을 선고하였습니다. 그 수용소에서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수감자들은 대개 살인과 같은 폭력적인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은 명령에 따라 내게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는 몸무게가 겨우 36킬로그램밖에 되지 않았으며 간신히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진리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진 진실한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관목들 사이에서 엎드려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한 연로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댁은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 끔찍스런 곳에까지 오게 된 거요?’ 하고 그는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말을 듣자 곁에 앉아 나를 껴안으며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젊은이,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성서에 관해 배우고 싶었다네!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겠나?’ 나는 기뻐서 날아오를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오래된 복음서의 몇몇 부분을 내가 입고 있던 해진 옷에 꿰매어 놓았기 때문에, 즉시 그것을 꺼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수용소 구내식당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면서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벗이 되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발전하였고 나는 힘을 얻었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이렇게 해 주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몇 달 뒤, 그는 석방되었고 나는 고르키 오블라스트에 있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의 여건은 훨씬 좋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네 명의 수감자에게 성서 연구를 사회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1952년에 우리가 출판물을 소지하고 있는 것이 수용소 담당관들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그들은 재판을 하기 전에 심문을 하면서 단단히 밀봉한 상자에 나를 가두어 놓고는, 내가 질식하려고 하면 상자를 열어 숨을 조금 들이쉬게 한 다음 다시 상자를 닫곤 했습니다. 그들은 내가 믿음을 포기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우리에 대한 형이 선고될 때 나와 성서 연구를 한 사람들 중에 당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 네 명 모두 2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는 더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지만,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에서 25년을 더 복역하고 10년간 유배되는 것으로 형이 바뀌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오자, 우리는 멈추어서 우리를 지원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감시원들은 깜짝 놀라면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뻐하는지 의아해하였습니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서로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나는 보르쿠타에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리스도인 중립 덕분에 생명을 건지다

수용소 생활은 몹시 힘겨웠습니다. 증인이 아닌 많은 수감자들은 자살을 하였습니다. 이반 크릴로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에서 나온 뒤에 우리 형제 자매들이 강제 노동을 하던 여러 탄광에 갔습니다. 우리는 연락을 취하였고, 얼마의 잡지를 베껴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그 베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증인들은 어느 수용소에서나 전파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석방된 후에 그 사람들 중 일부는 보르쿠타 강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시험이 되는 일이 항상 있었습니다. 한번은 1948년에 보르쿠타에 있는 한 수용소에서 일부 수감자들이 소요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반란 가담자들은 국적이나 종교 등을 기준으로 집단을 편성한다면 소요가 대성공을 거둘 것이라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시 수용소에는 열다섯 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란 가담자들에게 우리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런 일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에 대항하는 소요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확고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소요는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습니다. 무장한 군인들이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반란 가담자들을 다른 막사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 다음 막사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 안에 있던 사람 거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인들이 형제들에게는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이반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48년 12월에 한 수용소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은 여덟 명의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해 겨울은 몹시 추웠고 탄광 일도 고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형제들의 눈에 확신과 강한 희망이 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확신에 찬 태도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수감자들에게까지 힘을 주었습니다.”

시베리아로 유배되다

증인들은 당국의 잔인한 반대를 받으면서도 여호와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계속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스크바에 있는 중앙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KGB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KGB가 스탈린에게 보낸 1951년 2월 19일자 서신의 일부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신봉자들의 지하 조직이 소련을 반대하는 활동을 더는 진척시키지 못하도록, 소련 MGB[국가 보안부, KGB의 전신]는 신분이 알려진 여호와 신봉자들과 그 가족들을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와 톰스크 오블라스트로 유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KGB는 누가 증인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소련에 속한 여섯 개 공화국에서 8576명을 시베리아로 유배하도록 허가해 달라고 스탈린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 요청은 수락되었습니다.

마그달리나 벨로시츠카야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1년 4월 8일 일요일 새벽 2시에 우리는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 장교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딱딱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하느님을 믿는 대가로 시베리아로 유배될 거요. 두 시간 내로 짐을 싸도록 하시오. 방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갈 수 있지만 곡물과 밀가루와 곡류 제품은 안 되오. 가구와 목재 용품과 재봉틀도 가져갈 수 없소. 집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선 안 되오. 침구와 옷가지와 가방을 챙겨서 나오시오.’

우리는 예전에 출판물을 통해 동부 지역에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일을 수행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울거나 흐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깜짝 놀란 장교는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는군’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1948년부터 이런 일을 예상해 왔다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살아 있는 닭을 한 마리만이라도 가지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허락해 주지 않았습니다. 장교들은 우리가 기르던 가축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닭을 나누었는데, 한 사람은 다섯 마리, 다른 사람은 여섯 마리, 또 다른 사람은 서너 마리를 가졌습니다. 닭장에 닭이 두 마리만 남게 되자, 그 장교는 닭을 잡아서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태어난 지 여덟 달 된 우리 딸은 나무 요람에 누워 있었습니다. 우리가 요람을 가져가도 되느냐고 묻자 장교는 요람을 분해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기를 누일 수 있는 부분만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얼마 후 이웃 사람들은 우리가 유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웃 남자가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이 든 작은 가방을 가져와서는 우리를 태워 가고 있던 수레에 던져 넣었습니다. 우리를 호송하던 군인이 그것을 눈치 채고는 그 가방을 수레 밖으로 내던져 버렸습니다. 거기에는 나, 어머니, 남동생 둘, 남편 그리고 여덟 달 된 딸, 이렇게 여섯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벗어난 뒤, 우리는 자동차에 실려 지역 본부로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우리에 관한 서류가 작성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트럭에 실려 기차역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날은 화창한 일요일이었습니다. 역은 유배되는 사람들과 그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우리가 탄 트럭은 어떤 열차 차량 바로 옆에 멈추어 섰는데, 거기에는 이미 우리 형제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열차가 가득 차자 군인들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인원을 점검하였습니다. 우리 차량에는 52명이 탔습니다. 열차가 떠나가기 전에, 우리를 배웅하러 온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고 흐느껴 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그중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이며 시베리아로 유배되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증기 기관차가 큰 소리로 기적을 울렸습니다. 그러자 우리 형제들은 우크라이나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대에게 머무르게 하세.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세. 우리는 그분의 왕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네.’ 우리 대부분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온전한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노래를 몇 절 더 불렀습니다. 어찌나 감동적이었던지 몇몇 군인들까지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뒤이어 열차가 출발하였습니다.”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헤르젠 대학교 교수인 N. S. 고르디옌코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박해자들이 달성한 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결과는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소련에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을 약화시키려 했으나, 실상은 그 조직을 강화시켜 주기만 한 셈이 되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관해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새로운 정착지에서 그 종교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통하여 주민들을 ‘전염’시켰다.”

많은 증인들은 새로운 환경에 금방 적응하였습니다. 소규모 회중들이 조직되고 구역도 배정되었습니다. 니콜라이 칼리바바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때 우리는 시베리아에서 집집으로 전파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집을 방문하고 두세 집을 건너뛰어 다른 집을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일을 하였을까요? 우리는 첫 방문을 한 다음 약 한 달 안에 재방문을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먼저, ‘닭이나 염소나 소를 파시나요?’ 하고 사람들에게 물었지요. 그런 다음 조금씩 대화를 왕국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얼마 후에 KGB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내 신문에는 주민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고 경고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증인들이 집집을 다니며 사람들에게서 염소와 소와 닭을 구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양이었습니다!”

가브릴 리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KGB의 주도면밀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소련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종교 이야기를 건네려는 것 같다 싶으면 즉시 경찰을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전파하였는데, 비록 처음에는 성과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가 일부 주민들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과음에 빠져 있던 한 러시아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게 되자 자신의 삶을 성서 원칙들과 일치시키고 활동적인 증인이 되었습니다. 후에, 한 KGB 장교가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누구와 어울려 다니는 거요? 그 증인들은 모두 우크라이나인들이잖소.’

그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술주정뱅이로 길옆 하수구에서 뒹굴고 있을 때는 관심도 없으시더니, 이제 정상적인 어엿한 시민이 되니까 저를 싫어하기로 마음먹으셨나 보군요.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시베리아를 떠나고 있지만,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하느님께 가르침받는 시베리아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이르쿠츠크의 한 관리는 모스크바에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이 지역의 몇몇 노동자들은 그 사람들[여호와의 증인들]을 모두 북쪽의 어느 한 지역으로 보내어 주민들과 일체의 접촉을 차단시키고 재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시베리아와 모스크바의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잠잠하게 할 방도를 도무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당신들을 모두 쏴 죽였을 거요”

1957년 초에 당국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층 더 강화하였습니다. 형제들을 미행하고 집을 수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번은 봉사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아파트에 있던 물건이 모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KGB가 출판물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하여 두 달 동안 심문하였습니다. 당시 작은딸인 율리야는 11개월이었고 큰딸은 두 살이었습니다.

수사관은 조사를 하면서 ‘당신은 독일인이 아니오?’ 하고 내게 물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독일인’이라는 말은 ‘파시스트’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독일인들을 증오하였습니다.

‘저는 원래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만, 나치에 의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인들에 관해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 독일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비벨포르셔라고 불렸던 그들은 지금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불립니다. 저는 어떤 증인도 총탄이나 포탄을 결코 발사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그 독일인들이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하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수사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계속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 중에 반란이나 소요에 가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자신들의 활동이 금지되어도 하느님을 계속 숭배합니다. 한편 증인들은 합법적인 권위가 제정한 법이 창조주의 더 높은 법과 상충되지 않는다면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 복종합니다.’

갑자기 수사관은 내 말을 가로막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연구해 온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우리는 증인과 그 활동에 대해 철저하게 연구하였소. 당신들의 기록에 조금이라도 책잡힐 것이 있었다면, 만약 단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렸다면, 당신들을 모두 쏴 죽였을 거요.’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세계 곳곳에서 용기 있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고 그러한 본이 소련에 사는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고 있구나. 그렇다면 아마 우리가 이곳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도 다른 곳에 있는 형제들에게 어떤 면으로든 도움이 되겠지.’ 이런 생각은 여호와의 길에 굳건히 머물도록 나를 한층 더 강화시켜 주었습니다.”

50개도 넘는 수용소에 수감된 증인들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중립을 유지하며 열심히 봉사하는 것에 정부는 계속 신경이 거슬렸습니다. (마가 13:10; 요한 17:16) 형제들은 그러한 일들과 관련된 입장 때문에 종종 부당하게 장기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56년 6월부터 1957년 2월 사이에 세계 곳곳에서 열린 199개의 대회에서 무려 46만 2936명이나 되는 대표자들이 만장일치로 탄원서를 채택하였고, 그 사본들을 모스크바에 있는 소련 국무 회의에 보냈습니다. 그 탄원서의 일부는 이러합니다. “유럽에 속하는 러시아 지역에서 시베리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북극해와 북극의 섬인 노바야제믈랴에 이르기까지 50개도 넘는 수용소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수감되어 있습니다. ···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공산주의자라고 하고 공산 치하의 나라들에서는 제국주의자라고 합니다. ··· 공산주의 정부들은 그들을 ‘제국주의자들의 스파이’라고 고발하여 재판을 하고 길게는 20년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국가 전복 활동에도 결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탄원서는 소련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상황이 나아지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러시아의 여호와의 증인 가족들은 자녀를 키우기가 몹시 힘들었습니다. 당시 아들 셋을 키우던 모스크바 출신의 블라디미르 소스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무적으로 누구나 소비에트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교사들과 다른 학생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을 지향하는 어린이 단체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가하였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필요한 교육을 받길 바랐고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여호와에 대한 사랑이 자라 가게 하는 것은 우리 부모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조장하는 사상들이 판을 치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대단한 인내와 끈기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딸의 귀를 잘라 내었다는 누명을 쓰다

세묜 코스틸레프는 아내 다리야와 함께 시베리아에서 자녀 셋을 양육했습니다. 세묜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광신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61년에 둘째 딸 알라가 1학년에 입학하였습니다. 하루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한 아이가 잘못하여 알라의 귀에 상처를 냈습니다. 다음 날 교사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는데, 반 친구의 잘못을 일러바치고 싶지 않았던 알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인 우리가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 교사는 우리가 억지로 성서 원칙들을 따르게 하려고 아이를 때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학교는 검찰 기관에 그 일을 신고하였습니다. 내가 다니던 회사까지도 이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마침내 1962년 10월에 법정 심리를 위해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기까지 약 1년 동안 조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재판이 있기 전 두 주 동안, 문화 궁전 건물에는 ‘위험한 여호와 파에 대한 재판 임박’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아내와 나는 자녀들을 성서에 따라 양육하였다는 이유로 고발을 당하였고, 또한 잔인한 행동을 했다는 누명을 썼습니다. 법원은 우리가 딸아이에게 강제로 기도를 시키고 양동이 끝으로 그 아이의 귀를 잘라 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증언해 줄 유일한 사람은 알라뿐이었지만, 그 아이는 우리가 살던 이르쿠츠크에서 북쪽으로 7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키렌스크라는 도시에 있는 한 고아원에 보내져 있었습니다.

청년 동맹 운동가들이 홀을 가득 채웠습니다. 심의를 위해 휴정하자 모인 사람들은 소란을 피웠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밀치면서 욕설을 퍼부었고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소련’ 옷을 벗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다들 우리를 죽여야 한다고 소리 질렀고 그 자리에서 당장 죽여 버리자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군중이 점점 더 분노에 휩싸여 가는데도 재판관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심의는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군중이 밀려들자 한 자매와 그의 믿지 않는 남편이 군중과 우리 사이에 서서 우리를 해치지 말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 대한 고발이 모두 거짓임을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군중에게서 우리를 말 그대로 낚아채서 구해 주었습니다.

마침내 재판관이 인민 법정 보좌관들과 함께 나타났고 우리에게서 부모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내용의 판결문을 읽어 주었습니다. 나는 교정 노동 수용소로 호송되어 2년을 복역하였습니다. 큰딸은 부모가 위험한 분파에 속해 있어서 그 슬하에서 양육을 받으면 나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그 후 그 아이 역시 고아원에 보내졌습니다.

아들은 세 살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예전처럼 비공식 증거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알라는 열세 살에 고아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알라가 1969년에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즈음에 우리가 살던 도시에 있는 문화 궁전에서는 종교에 관한 일련의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가서 그들이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한 강사는 「파수대」 한 부를 들고는 ‘우리 나라의 연합을 좀먹는 해롭고 위험한 잡지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이런 예를 언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이 잡지를 읽고 기도하라고 강요합니다. 어떤 집에서는 어린 딸이 그 잡지를 읽고 싶어 하지 않자 아버지가 그 아이의 귀를 잘라 내 버렸습니다.’ 알라는 깜짝 놀랐는데 양쪽 귀가 모두 멀쩡한 채로 그 자리에 앉아 강연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라는 또다시 부모와 떨어지게 될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 보리스는 열세 살 되었을 때 여호와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우리의 활동이 여전히 금지되어 있던 당시에 보리스가 동갑내기 증인들과 가두 증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성서나 성서 출판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 한 대가 와서 아이들을 모두 민병대 본부로 데려갔습니다. 민병대원들은 아이들을 심문하고 몸을 수색하였지만 성구 몇 구절을 적어 놓은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은 집에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보리스는 집에 돌아와서 자신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이 여호와의 이름 때문에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자녀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KGB는 우리 부부를 여러 차례 소환하였습니다. 한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들을 소년수 수용소로 보내야 하는데, 아직 열네 살이 안 되었다는 것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오.’ 우리에게는 아들아이가 전파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현재 나는 아들과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며, 모두 진리 안에서 걷고 있습니다. 큰딸은 우즈베키스탄에 사는데, 아직 여호와를 섬기지는 않지만 우리와 성서를 존중해 주고 종종 우리를 보러 옵니다. 아내 다리야는 끝까지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다가 200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여전히 힘닿는 대로 회중과 함께 격지 구역에 가서 전파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습니다. (사도 13:48) 나는 이사야 65:23에 기록된 바와 같이,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여호와께서 우리 각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부모가 훌륭한 본을 보이다

블라디슬라프 아파뉴크는 러시아 베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신과 동기간들에게 어릴 적부터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었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은 1951년에 우크라이나에서 시베리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우리가 스스로 결정을 내리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부모님이 자녀들인 우리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늘 자신들의 단점들에 관해 이야기하실 수 있었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수한 것을 숨기려고 하지 않으셨지요. 그분들이 여호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쾌활한 분들이셨는데, 특히 영적인 주제들에 대해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때 즐거워하셨습니다. 부모님이 묵상을 하고 여호와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정말로 좋아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도 여호와에 관한 진리를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하고 질병과 전쟁이 더는 없을 신세계에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할지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습니다.

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 반 전체는 피오네리라는 소련 청소년 단체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소련의 거의 모든 어린이들은 피오네리에 가입하는 것을 대단히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였습니다. 반 친구들은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우리 각자는 장차 공산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나갈 사람들로서 소련 피오네리의 일원이 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공식적으로 서약하는 문서를 작성해야 하였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그 벌로 나를 교실에 가두고는 ‘서약서를 쓰기 전에는 못 나올 줄 알아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반 친구들이 창문을 두드리며, 나와서 같이 놀자고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쓰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한 채로 교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다른 선생님이 왔습니다. 내가 교실에 있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집에 보내 주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거둔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마음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잠언 27:11) 나는 집에 돌아와 있었던 일을 모두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은 기뻐하셨고 아버지는 ‘얘야, 참 잘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가 소련을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되다

때때로 형제들은 성서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나데즈다 비시냐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편과 나는 당시에 아직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진리로 인해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경찰이 일터로 와서 나를 작업복 차림으로 연행해 갔습니다. 남편인 표트르도 일을 하다가 붙잡혀 왔습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경찰은 우리 집을 수색하여 성서 한 권과 「아마겟돈 후—하느님의 신세계」(After Armageddon—God’s New World)라는 소책자를 찾아냈습니다. 표트르는 그들이 임신한 지 7개월째 되는 나를 체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소련 당국을 반대하는 활동을 한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우리는 성서를 믿고 있으며 성서는 소련 정권보다 훨씬 더 높은 권위가 있다고 그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원칙에 따라 생활하려고 하는 것이지요’라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재판 날이 되었을 때는 출산 예정일이 고작 2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이 심리 중간 중간에 휴식 시간을 주어서 나는 무장한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밖을 거닐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렇게 거닐던 중에, 무슨 일을 저질렀느냐고 그 군인이 내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그에게 좋은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재판관은 우리에게서 압수해 간 성서와 출판물이 ‘소련을 반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남편과 나뿐만 아니라 우리 출판물과 성서까지도 소련을 반대한다는 고발을 당하였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어디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보르쿠타에 있는 노동 수용소에서였다고 말하자 재판관은 화가 나서 ‘수용소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둘 다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10년을 복역하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표트르는 러시아 중부의 모르도바에 있는 한 수용소로 보내졌고, 나는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1958년 3월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힘겨웠던 시기에 여호와께서는 내게 최상의 벗이자 돕는 분이 되어 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가 아이를 데려가 돌봐 주셨고, 나는 시베리아 케메로보로 보내져 그곳에 있는 한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나는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8년 뒤에 석방되었습니다. 한 여자 담당관이 막사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소련을 반대하는’ 말을 한 적이 결코 없고 우리 출판물은 오로지 종교적인 성격을 띤 것일 뿐이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석방되고 나서 196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교도소와 수용소에서는 성서와 성서 출판물이 매우 귀하였습니다. 1958년에 모르도바의 한 수용소에서는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집회를 봤습니다. 수용소 담당관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지 못하도록, 한 집단이 「파수대」 연구를 하는 동안 몇몇 형제들이 소리가 들릴 만한 간격을 두고 서서 망을 보게 하였습니다. 담당관의 모습이 보이면 가장 가까이 있던 형제가 망을 보는 다음 형제에게 “온다” 하고 말하였고, 계속 그런 식으로 전달하여 집회를 보는 집단에 알리곤 하였습니다. 모인 사람 모두는 이리저리 흩어졌고 잡지도 감추었습니다. 그래도 담당관들이 불쑥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한번은 형제들이 발각된 적이 있었는데, 보리스 크릴초프는 담당관들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잡지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책 한 권을 집어 들더니 막사에서 뛰쳐나갔습니다. 담당관들이 한참을 추격한 끝에 그를 붙잡아 보니 그의 손에 있는 책은 레닌의 책이었습니다. 그는 7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야 하였지만 잡지를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였습니다.

모스크바에 진리의 씨가 뿌려지다

모스크바에서는 한 작은 집단으로부터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보리스 크릴초프는 수도인 그곳에서 열심히 전파하던 초창기의 몇 안 되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건축 현장 근로자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단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비공식 전파를 하려고 노력하였지요. 내가 하는 일을 눈치 챈 KGB는 1957년 4월에 내가 살던 아파트를 수색하여 성서 출판물을 찾아냈고 곧바로 나를 체포하였습니다. 수사관은 나를 조사하면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국가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당신들을 풀어 주면 많은 소련 국민이 당신들 편이 될 거요. 그러니 당신들이 국가에 큰 위협이 된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소.’

‘성서는 우리가 법을 준수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한 우리가 왕국과 하느님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해야 한다고 알려 주지요. 참그리스도인들은 어느 나라에서도 결코 권력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수사관은 ‘우리가 수색하다가 찾아낸 그 출판물은 어디서 난 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 출판물에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그 출판물은 성서 예언을 다루는 것이지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닌데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건 그렇소. 하지만 외국에서 발행되는 출판물이지 않소’ 하고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결국 블라디미르 시에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철저히 몸수색을 당하였지만 놀랍게도 얇은 종이에 베껴 쓴 「파수대」 네 부를 수용소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신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나는 감방에서 네 부를 전부 다시 베꼈습니다. 그곳에 나 말고 다른 증인들도 있으며 그들이 7년 동안 아무런 영적 양식 없이 지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계단통에서 대걸레질하는 일을 하던 한 자매를 통해 그 잡지들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형제들과 어울리던 사람들 중에 밀고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성서 출판물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고 교도소 책임자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모든 사람을 수색하고 출판물을 전부 빼앗아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내게 와서 매트리스 속에서 출판물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85일간 독방에서 지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여전히 나를 계속 돌봐 주셨습니다.”

강연회들 덕분에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다

소련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에 맞서 이념적인 투쟁을 하는 데 강연회를 이용하였습니다.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강사들이 우리 수용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무신론을 조장하는 강연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항상 질문을 하였습니다. 때때로 강사들은 가장 간단한 질문들에도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강당은 늘 사람들로 가득 찼고 모두가 매우 주의 깊이 경청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참석했는데, 강연을 끝마칠 즈음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하였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이전에 러시아 정교회 사제였던 강사가 수용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있을 당시 믿음을 포기하고 무신론자가 되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한 형제가 ‘강사님은 수감되기 전부터 무신론자였습니까 아니면 그 후에 무신론자가 된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강사는 ‘한번 생각해 보시오. 인간이 우주에 갔지만 거기서도 하느님을 보지 못하였소’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강사님은 사제였을 때 정말로 하느님이 지구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사람들을 보고 계실 거라고 생각한 겁니까?’ 하고 형제가 물었습니다. 강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토의 덕분에 많은 수감자들은 그런 문제에 대해 숙고해 보게 되었고 후에 일부 사람들은 우리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한 자매는 그와 같은 강연을 듣다가 한마디만 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좋아요. 보나마나 여호와의 증인이겠지요’ 하고 강사가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서서 “너를 죽여 버리겠어!” 하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하고 자매가 물었습니다.

강사는 ‘글쎄요, 똑똑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겠군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자매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왜 그분과 싸우는 거죠? 그분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싸울 대상도 없을 텐데요.’ 청중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전파하는 사람이 반드시 또 올 것이다

물론 소비에트 이념에 관한 강연이 수용소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강연은 대개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 경험 많은 강사들이 마을과 도시를 방문하였는데, 특히 보르쿠타, 인타, 우흐타, 식팁카르처럼 증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굿시미트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1957년에 한 연사가 인타에 있는 광부들을 위해 문화 궁전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 300명이 모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과 전파 방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열다섯 번에 걸쳐 방문하여 어떻게 소식을 전하는지를 정확히 설명하고 난 뒤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싫다는 표시를 하지 않으면 전파하는 사람이 반드시 또 올 것입니다. 그들이 두 번째 왔을 때에도 여러분이 싫다고 하지 않으면 세 번째 방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는 두 시간 동안 그러한 방문 중 여섯 가지를 우리가 하는 방식대로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다루었으며, 노트를 보면서 사용되는 성구를 모두 읽어 주었습니다. 아내 폴리나는 수용소에 있는 내게 이 일에 관해 편지를 써 보내면서 그 강연을 듣던 형제들이 자신들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놀라워하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이 강연이 있은 다음에 신문에는 증인들에 관한 부정적인 내용이 실렸는데, 그 가운데는 왕국에 대해 완벽하게 설명해 놓은 내용도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강연 전체가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덕분에 도시에 거주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파하는 방법과 그 내용에 관해 듣게 되었습니다.

1962년에 한 강사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강연을 하러 모스크바에서 왔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 관해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한 엄청난 액수의 돈이 매달 브루클린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여러 나라에 있는 증인들의 활동을 진척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 중 어느 누구도 옷장 하나조차 없습니다. 숙소를 청소하는 사람이든 협회장이든 관계없이 모두가 식당에서 함께 식사하며 서로 간에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동지라고 부르는 것처럼 그들 모두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릅니다.’

한동안 강당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념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인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우리 자신의 힘과 정신을 사용하여 그 모든 일을 이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당국자들 스스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로 인해 크게 힘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러한 연설들 덕분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당국자들로부터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진실을 들을 기회가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서의 가르침이 자신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를 직접 경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염탐이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다

전화를 도청하고 편지를 가로채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여 염탐하는 것은 KGB가 여러 해 동안 널리 사용하던 관행이었습니다. 때때로 KGB는 회중에서 인도하는 일을 하던 형제들의 집에 몰래 도청 장치를 설치하였습니다. 금지령하에서 25년간 지역 감독자로 봉사한 그리고리 시불스키는 1958년에 다락방에서 그런 장치를 발견하게 된 경위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시베리아의 툴룬 시 외곽 지역에 있는 2층짜리 연립 주택의 위층에 살았습니다. 한번은 집에 와 보니 건물 다락방에서 드릴로 구멍을 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KGB가 우리가 하는 말을 엿들으려고 다락방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출판물이 처마 아래뿐만 아니라 다락방에도 있었습니다.

저녁에 가족이 함께 모였을 때 내가 알아챈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우리는 당분간 집에서는 회중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는 그 주 내내 그렇게 놔 두었습니다. 그 주가 끝나 갈 무렵, 나는 한 형제와 함께 다락방에 기어올라가 도청 장치에 연결된 전선을 찾아냈습니다. 전선은 두 널빤지 사이를 지나 처마 주위를 돌아 KGB 사무소 방향인 시가지 쪽으로 곧장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필시 모든 내용을 녹음하고 있었겠지만, 당시에 그들이 녹음한 것이라고는 라디오 방송뿐이었을 것입니다.”

KGB가 조직에 잠입하다

KGB는 직접적인 박해로는 증인들의 열심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활하게도 속임수를 사용하여, 감독하는 일을 하도록 임명된 사람들과 조직 전체에 대한 불신의 씨를 형제들 사이에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KGB가 사용한 책략 한 가지는 경험 많은 요원들을 회중에 심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몇몇 요원들은 조직 내에서 감독하는 직분에 임명될 수 있었습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전파 활동을 둔화시키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찬 분위기를 조성하여 인도하는 형제들에 대한 의심이 자라게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직접 형제들에게서 성서 출판물을 빼돌려서 KGB에 넘겨주었습니다. 한 보고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59년 사이에 활동한 단 두 명의 요원이 500부가 넘는 「파수대」와 다른 출판물을 KGB에 넘겨주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일부 형제들은 전국 위원회를 불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언비어들이 파다했는데, 일부 전국 위원들이 사실은 KGB와 내통하고 있고 출판물을 복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충실한 형제들을 배신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반 파시콥스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9년 4월에 새로운 전국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나도 위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마귀가 형제 관계를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개의치 않고 진리를 지켜 나가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 역사에서 가장 힘겨운 시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의심이 커감에 따라 일부 형제들은 전국 위원회에 회중 보고를 보내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회중 전도인들은 계속 봉사를 열심히 수행하며 정기적으로 보고를 제출하였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 보고가 더 이상 전국 위원회로 보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1958년경에는 여러 집단의 형제들 때문에 수천 명의 전도인들이 전국 위원회와 단절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르쿠츠크와 톰스크에서 그리고 후에는 러시아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조직과 분리된 형제들의 집단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처럼 분리된 집단들은 모든 회중이 인정해 주리라고 기대하며 1958년 3월에 그들 나름대로의 “전국 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통치체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소련의 형제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숭배에서 다시 연합되도록 도왔습니다. 스위스에 살던 알프레트 뤼티만은 북유럽 사무실의 지부 감독자였으며 당시 소련의 활동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959년에 러시아의 형제들에게 편지하면서,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사람들만이 여호와로부터 축복을 받게 될 것임을 설명하였습니다. 스스로 분리되었던 일부 형제들은 그 편지의 내용을 받아들이고 전국 위원회에 대한 믿음을 다시 세워 나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확신을 온전히 회복하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그 기간 내내 전국 위원회는 연락원들을 통하여 성서 출판물을 공급하였습니다. 분리된 사람들도 출판물을 연구하기는 하였지만 야외 봉사 보고는 여전히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KGB는 형제들 사이에 불신의 씨를 계속 뿌렸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일부러 자유롭게 둔 반면에 어떤 형제들은 교도소로 보낸 것입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형제들은 자유로운 증인들이 KGB에 협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책임 맡은 형제들에 대해 지나치게 의심을 품고 비평적이 되었습니다.

널리 선전된 재판

이르쿠츠크의 한 정부 관리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보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대규모 지하 활동을 구축했습니다. KGB 요원들은 1959년 후반기에 다섯 군데의 지하 인쇄 시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쇄 시설들은 시베리아에 있는 도시들인 지마와 툴룬 그리고 마을들인 키토이, 옥탸브리스키, 잘라리에 있었습니다. 인쇄 시설들이 발각되자 인쇄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처음에 체포된 네 명의 형제들은 인쇄 작업에 관한 진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수사관들이 교활한 방법으로 이 형제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KGB는 그 증언 내용을 왜곡하여 지방 신문에 실었습니다. 이 네 명의 형제들은 석방되고 다른 여덟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이 1960년 4월에 툴룬에서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KGB는 재판 과정을 널리 선전하여 이목을 끌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석방시킨 형제 네 사람을 검사 측 증인으로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회중의 많은 사람들은 이 형제들이 KGB에게 포섭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KGB는 이 선전용 재판을 이용해서 참석한 증인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지역 주민들이 증인들에게서 등을 돌리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속셈으로 KGB는 재판이 있기 전에, 형제들이 여러 해 동안 출판물을 인쇄하던 지하실 한 곳을 구경하는 마련을 조직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마을은 지하 “분파”의 활동에 대한 소문들로 떠들썩해졌습니다. 재판 날이 되자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홀을 가득 메웠는데, 그중에는 신문과 텔레비전 기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모스크바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도 그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법정이 일대 혼란에 빠지다

그런데 뜻밖에도 KGB의 계획이 갑자기 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진술서를 제출하였던 네 명의 형제들이 자신들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재판 전날, 이들 모두는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재판 중에 그들은 자신들이 속아 넘어갔으며 증언 내용도 왜곡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죄수석에 앉아 있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고 선언하였습니다. 법정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또한 재판에 회부된 형제들도 반대 심문을 받을 때, 다른 사람들이 말려들지 않도록 잘 대답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재판관이 그리고리 팀추크에게 누가 그의 집에 인쇄 시설을 만들었느냐고 묻자, 그는 “제가 만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출판물을 인쇄한 사람이 누구냐고 질문하자 그는 “접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출판물을 배부한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에도 “접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종이를 사서 전달해 준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또다시 “그것도 접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검사는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혼자서 감독도 하고 필요한 물품도 대고 거기다 일까지 한단 말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 편지에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검사 측 증인들이 아무도 없게 되자 검사는 형제들이 외국인들과 공모하고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는 브루클린 베델의 네이선 H. 노어가 보낸 편지 한 통을 증거로 제출하였습니다. 재판을 참관한 사람들 중 한 명인 미하일 사비츠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검사는 KGB가 가로챈 편지 한 통을 큰 소리로 읽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노어 형제가 소련의 형제들에게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는 여호와께서 홀에 있던 우리 모든 증인들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편지에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성서에 근거한 현명한 조언과 더불어 동료 신자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시련을 겪더라도 계속 충실하도록 격려하는 내용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에게 지혜와 인도를 구하며 임명된 형제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라고 촉구하는 내용도 들어 있었습니다. 검사는 그 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낭독했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아주 열심히 들었습니다. 마치 대회에 참석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형제들은 법정에서 서로 다른 형기를 선고받았지만, 참관한 사람들은 흔들림 없이 여호와를 섬기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다시 숭배에 연합하다

소련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마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고 생각한 KGB는 마지막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1960년에는 갑자기 450명 이상의 형제들을 모르도바에 있는 한 수용소에 수감시켜 버렸습니다. 그중에는 조직과 연합하기를 중단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에서 각각 인도하는 일을 하던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조직이 결국 와해될 것이라고 KGB는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노동 수용소 신문에는 비방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누가 누구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게 될 것인지가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자신들이 함께 있다는 점을 활용하여 연합을 이룰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이오프 안드로니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책임 맡은 형제들은 조직과 연합하기를 중단한 사람들을 비롯하여 증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들은 「파수대」 러시아어판 1961년 9월 1일호에 실린 ‘약속된 모든 선의자들의 연합’이라는 기사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 기사에는 고대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신 방법을 알려 주는 원칙들과 실례들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 회중 내에서 평화와 연합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다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기사를 주의 깊이 연구함으로 신권적인 연합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고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영적 양식이 틈을 메워 주다

「파수대」에 실린 그 기사는 수용소 밖에 있던 증인들이 다시 연합을 이루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인도하는 일을 하도록 임명받은 형제들은 기도를 하고 그 기사를 함께 읽었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러더퍼드 형제가 1941년 8월에 있은 한 대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여호와의 조직에 굳건히 고착하고 인간 지도자를 따르지 말 것을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인가가 발생하여 성장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어떤 중요한 인물 곧 많은 추종자를 가진 한 지도자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본인이 주의 종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며 우리가 연합된 가운데 함께 일하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그리스도를 섬긴다고 믿으신다면 “예”라고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이구동성으로 “예!”라고 하는 힘차고도 분명한 대답이 뒤따랐습니다.

미하일 사비츠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당시 소련의 증인들은 특히 그러한 연합을 이룰 필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사랑과 인내심을 보이면서 우리에게 영적 지원을 베풀어 주신 데 대해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조직과 연합하기를 중단하였던 한 형제는 그 기사 내용을 듣자마자 내게 그 잡지를 달라고 하면서, ‘우리가 브라츠크를 비롯한 여러 곳의 형제들에게도 읽어 줄 수 있도록 그 잡지를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우리에게 그 잡지가 한 부밖에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주일 뒤에 잡지를 꼭 돌려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정말 잡지를 돌려주었고 그에 더해 장기간에 걸친 여러 회중의 봉사 보고도 함께 주었습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이 여호와의 숭배자들의 연합된 가족으로 돌아왔습니다.”

30년이 넘게 전국 위원으로 일한 이반 파시콥스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외국에서 온 한 형제 편으로 노어 형제에게 부탁하기를, 이 나라에 있는 모든 형제들이 연합을 이루고 신권 질서에 복종할 것을 요청해 달라고 했습니다. 노어 형제는 그에 동의하였고, 1962년에 영어와 러시아어 두 가지 언어로 된 그의 편지 25부를 받았습니다. 실로, 많은 사람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편지였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전국 위원회는 형제들을 연합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962년 여름 즈음에는 하나의 지역구 전체가 조직과 다시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형제들이 특별 위원회에 임명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형제들이 기울이는 노력을 축복하시어 그들에게 “위에서 오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야고보 3:17)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순회 감독자로 봉사한 알렉세이 가부랴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1965년에 우솔리예시비르스코예에서 전국 위원회를 만났습니다. 위원회는 우리에게 유배되고 투옥되고 분열되어 뿔뿔이 흩어진 형제 자매들을 모두 찾아내어 그들이 다시금 회중과 연합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찾기 시작할 얼마의 사람들의 주소를 받았습니다. 내가 받은 구역에는 톰스크 오블라스트와 케메로보 오블라스트 그리고 노보쿠즈네츠크 시와 노보시비르스크 시도 포함되었습니다. 그 밖의 형제들은 다른 구역들을 배정받았습니다. 우리는 회중 책임을 맡을 형제들을 임명하고 훈련시키는 일은 물론 회중들과 개별 집단들을 조직하는 일도 해야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금지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출판물 배달 경로를 구축하고 회중 집회들을 조직할 필요도 있었습니다. 단시간 내에 우리는 조직과 연락이 두절되었던 84명의 형제 자매를 방문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양들’이 다시금 훌륭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백성들과 함께 그분을 섬기게 되는 것을 보고 참으로 행복했습니다!”—요한 10:16.

조직과 연합하기를 중단하였던 많은 사람들은 곧 전국 위원회와 다시 연합을 이루었고 야외 봉사 보고를 제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1년경에는 4500명 이상의 전도인들이 여호와의 조직과 다시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80년대 중반에는 여전히 금지령 상태였지만, 전파 활동이 계속 진행되고 새로운 사람들이 회중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귀중한 마이크로필름들

조심성 있으면서도 용감한 형제들은 소련에 살면서 영적 양식을 재생산하기 위해 언제나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선 어떻게 영적 양식을 입수할 수 있었습니까?

가장 흔히 쓰인 방법 한 가지는 마이크로필름을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접한 나라들에서 일하던 형제들은 주로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로, 그리고 다른 여러 언어들로도 발행된 잡지와 서적과 팜플렛을 촬영하였습니다. 30미터짜리 필름 릴들이 장착된 마이크로필름 카메라로 페이지마다 작업을 해야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습니다. 발행된 모든 품목들을 여러 번 촬영하여 복사본을 많이 만들어서 배부하기 쉽게 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마이크로필름으로 만들어 낸 영적 양식을 이어 놓으면 수 킬로미터는 족히 될 것입니다. 취급하기 쉽게 마이크로필름을 약 20센티미터 길이로 잘라서 연락원이 그 필름들을 소련으로 들여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시베리아의 지하 인쇄 시설

성서 출판물을 복사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일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1949년과 1950년에만도, 형제들은 다양한 출판물을 4만 7165부나 복사하여 회중들에 전달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동일한 기간에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집회가 3만 1488번이나 열렸다고 전국 위원회는 보고하였습니다.

필요한 출판물의 양이 계속 증가하여 새로운 인쇄 시설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스타흐 사비츠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55년에 우리 집에 지하 인쇄 시설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던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우리는 약 두 달간 현관 아래쪽을 파내어 가로 2미터 세로 4미터 정도 되는 방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약 30세제곱미터나 되는 양의 흙을 파내었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그 흙을 가져가서 어떻게든 숨겨야 하였지요. 1.5미터쯤 파 내려가니 영구 동토층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속 일을 하러 간 사이에, 어머니는 이웃들의 이목을 끌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마른 나무를 가져다가 얼어붙은 땅 위에 작은 불을 피워 놓아 그 땅을 녹이곤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파낸 공간에 널빤지를 대어 바닥과 천장을 만들었습니다. 장소가 마련되자마자 한 부부가 그곳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지하실에서 일도 하고 생활도 하였지요. 어머니가 요리와 세탁을 해 주고 돌봐 주었습니다. 이 인쇄 시설은 1959년까지 가동되었습니다.

1957년에, 출판물을 복사하는 일을 감독하던 형제가 내게 ‘인쇄 시설에서 일해 줄 수 있나요? 잡지를 한 달에 최소한 200부는 찍어 내야 하는데’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200부, 후에는 500부의 잡지를 찍었습니다. 그렇지만 필요한 출판물의 양은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우리 유배된 사람들은 낮에는 감독관의 지시하에 정해진 생산량에 맞추어 작업을 해야 했고 일주일에 하루만 일을 쉬었기 때문에, 복사하는 일을 밤중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인쇄 시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곤 하였습니다. 인쇄를 하느라 거의 한숨도 못 잤는데, 일단 시작하면 끝을 내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잉크가 말라 버리곤 하였기 때문에 작업을 중지했다가 나중에 이어서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떤 때는 500면을 인쇄한 뒤 본문이 잘 보이도록 바늘로 일일이 수정하기도 하였습니다. 환기가 거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된 종이를 말리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밤중에 집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인 툴룬으로 인쇄한 잡지를 배달했습니다. 잡지가 그곳에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크라스노야르스크와 브라츠크와 우솔리예시비르스코예 등지에 사는 증인들이 이 출판물들을 사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감독하는 일을 하던 형제들은 1959년에 내게 툴룬에 있는 기차역 바로 옆에 새로운 인쇄 시설을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또다시 나는 흙을 파내고 조명 장치를 설치하는 등 처음에 인쇄 시설을 만들 때 했던 것과 비슷한 일을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윽고 한 가족이 그리로 이사 와서 약 1년간 일하였습니다. 결국 KGB가 그 인쇄 시설을 찾아냈습니다. 지방 신문에는 ‘조명 장치 설치 방법은 숙련된 전기 기술자들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는 보도가 실렸습니다.

우리 가족과 몇몇 형제들을 빼면 내가 인쇄 시설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녁엔 도통 나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회중의 형제 자매들은 나의 영적 상태를 염려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방문하여 격려해 주려고 우리 집에 오곤 하였지만 도무지 나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주도면밀하게 감시를 당하던 그 시기에는 내밀을 철저하게 지켜야만 인쇄 시설을 가동시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출판물을 생산하다

당국자들은 증인들에게 성서와 성서 출판물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정부는 성서 출판물을 인쇄하거나 들여보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거듭되는 통치체의 요청을 거부하거나 무시해 버렸습니다. 출판물이 매우 부족하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회중과 집단들에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롯한 나라 곳곳에서 출판물을 생산할 방법들을 계속 강구하였습니다.

1957년에 스테판 레비츠키는 「파수대」 한 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받았는데, 식탁보 아래 둔 것이 발각되었던 것입니다. 스테판은 이렇게 말합니다. “3년 반 뒤에 대법원에서는 나에 대한 선고가 무효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석방되기 전에, 형제들은 내게 모스크바 근방으로 이주하여 전파하는 일과 다른 영적인 활동들에 참여해 보라고 권유하였습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지역에 거처를 마련하고 수도인 그곳의 여러 지역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노력을 축복해 주셨고, 몇 년 안 되어 모스크바에 형제 자매들로 구성된 집단이 하나 조직되었습니다. 나는 1970년에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고르키(지금의 니즈니노브고로드), 오렐, 툴라가 포함되어 있는 순회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중들에 출판물을 공급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모스크바와 러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충분한 양의 성서 출판물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부면에서 기꺼이 더 많은 일을 하고자 한다고 여호와께 기도로 말씀드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의 몇몇 인쇄소들과 연줄이 있는 인쇄 전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에게 모스크바의 인쇄소에서 작은 책자를 인쇄하는 것이 가능할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무슨 책인데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조마조마해하며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라는 책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 한 명이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공산주의자였고 어느 당 조직을 이끌고 있었지요. 그는 돈을 받고서 소량의 서적을 인쇄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이 성서 연구 보조서를 직접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우리 출판물을 그런 방법으로 인쇄하는 것은 큰 위험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는데, 나에게도 그렇고 인쇄하는 사람에게도 그러하였습니다. 대개 밤에 일을 하였는데, 매번 인쇄를 마치면 아무도 모르게 재빨리 서적을 인쇄소 밖으로 내가야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마련을 축복해 주셨고 많은 성서 출판물이 그곳에서 인쇄되었는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책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은 물론 심지어 노래 책까지도 인쇄되었습니다! 참으로 적절한 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양식이었습니다. (마태 24:45) 우리는 그 인쇄소를 9년 동안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출판물을 인쇄하고 있던 중에 그 인쇄소의 감독관이 예기치 않게 들어왔습니다. 인쇄를 하던 사람은 재빨리 인쇄기를 조정하여 건강 관련 잡지를 인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서두르다가 실수로 그 잡지에 우리 출판물 여섯 면을 넣게 되었고, 감독관은 새로 인쇄되어 나온 잡지를 한 부 들고 자기 사무실로 갔습니다. 그는 잡지를 읽다가 전혀 엉뚱해 보이는 내용이 잡지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인쇄하던 사람을 불러 어떻게 해서 잡지에 그런 내용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KGB가 이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인쇄하던 사람은 장기간 수감될 것이라는 위협에 못 이겨 알고 있던 사실을 다 실토하였습니다. 그러자 KGB는 신속하게 나를 찾아냈는데, 모스크바에서 그들에게 알려져 있던 여호와의 증인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5년 반의 수감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인쇄를 했던 사람은 3년 형을 받았습니다.

“아마겟돈이 오게 하소서!”

많은 형제 자매들은 교도소에서 오랜 기간을 복역했습니다. 그리고리 가틸로프는 15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교도소는 ‘백조’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퍄티고르스크 휴양지를 끼고 있는 다섯 개 산들 중 한 산의 꼭대기에 있었는데, 코카서스 산맥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 지역이었지요. 이 교도소에서 1년간 지내면서 다양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가 있던 감방은 훌륭한 전파 ‘구역’이었고, 다른 곳으로 갈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교도소 책임자들은 그 감방에 새로운 사람들을 들여보내고는 며칠 후에 데려가 버렸지만, 나는 항상 그곳에 두었던 것입니다. 나를 다른 감방에 두는 일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여호와의 왕국에 관해 철저히 증거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겟돈에 대해 궁금해하였습니다. 믿음 때문에 그토록 오랜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놀라는 수감자들도 있었습니다. ‘믿음을 부인하고 그만 집에 돌아가는 게 어때요?’ 하고 묻는 동료 수감자들도 있었고 때로는 책임자들까지도 그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진리에 진실한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을 때면 늘 행복하였습니다. 한번은 누군가가 감방 벽에다가 ‘아마겟돈이 오게 하소서!’라고 낙서해 놓은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비록 교도소 생활 자체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진리에 관해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이 중에 요나답이 있으신가요?”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 열심을 나타낸 많은 그리스도인 자매들도 수용소에서 형을 살았습니다. (시 68:11) 지나이다 코지레바는 자매들이 서로에게뿐 아니라 증인이 아닌 수감자들에게도 어떻게 사랑을 나타냈는지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침례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59년에, 베라 미하일로바와 류드밀라 옙스타피예바와 함께 시베리아 케메로보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550명의 수감자가 있었습니다. 도착하여 보니 입구에 여자 몇 명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중에 요나답이 있으신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의 소중한 자매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이 따뜻한 온정과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역력히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런 느낌은 가족에게서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이 자매들은 수용소 생활이 우리에게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마태 28:20)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곳에 영적 양식 공급 프로그램이 매우 잘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가족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건초를 거두어들이는 여름철이면 특히 더 좋았지요. 수용소 행정국은 우리가 도망을 가거나 수용소 규칙을 어길 것이라는 염려를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명의 군인이 20명이나 25명이 넘는 자매들을 지키곤 하였는데, 실상은 우리가 그 군인을 위해 망을 봐 주었습니다! 누군가 오고 있으면 항상 그를 깨워서 근무 중에 잠을 잔 일로 처벌을 받지 않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가 잠을 자는 동안, 우리는 휴식 시간에 영적인 주제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정말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1959년 말에 나는 몇몇 자매들과 함께 보안이 삼엄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우리는 창유리도 없는 추운 감방에 갇혔습니다. 밤에는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일을 하였습니다. 당국자들은 우리에게 야채를 분류하는 일을 시키고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감시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가 다른 수감자들과는 달리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자, 그들은 우리가 잠을 잘 때 사용하도록 건초 얼마를 가져다주고 창유리도 끼워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1년을 복역한 뒤, 다른 모든 자매들과 함께 이르쿠츠크에 있는 보안이 허술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자매들이 120명 정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1년 3개월을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맞은 첫 겨울에는 매섭게 추웠을 뿐더러 눈도 많이 왔습니다. 우리는 제재소에서 힘이 많이 드는 육체노동을 하였습니다. 담당관은 출판물이 있는지 보려고 종종 우리 몸을 수색하였습니다. 그들은 그것 말고는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없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출판물을 숨기는 기술에 숙달되어 있었는데, 때로는 너무 잘 숨겨서 문제일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베라와 내가 일용할 성구를 적은 종이 몇 장을 숨긴 적이 있었는데, 어찌나 잘 숨겼던지 작업복 상의 속에 있는데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담당관이 그것을 찾아내었고 베라와 나는 5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바깥 온도는 섭씨 영하 40도 미만이었고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감방 벽에는 서리가 생겼습니다.

감방에는 콘크리트로 된 작은 선반이 있었는데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한 크기였습니다. 너무 추울 때면 다리는 벽 쪽으로 향하게 하고 등을 서로 맞댄 채로 앉아서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얼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곤 하였습니다. 일일 배급량은 뜨거운 물 한 잔과 흑빵 300그램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하였는데,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정상적인 것을 초월하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둘째 4:7) 우리가 막사로 돌아오자 자매들이 특별히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미리 뜨거운 음식을 준비해 두고 우리가 씻을 수 있도록 물도 데워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함”

지나이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용소에는 수감자들이 많지 않은 데다 모두가 증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파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첫째 3:1의 원칙이 적용되는 상황이었지요. 우리가 당시 사용하던 표현을 빌리자면, 말 없는 전파를 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막사를 깨끗하고 질서 있는 상태로 유지했고 서로 정겹고 친근하게 대하였습니다. (요한 13:34, 35) 그뿐 아니라 증인이 아닌 사람들과도 사이가 좋았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서 배운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때때로 증인이 아닌 사람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베풀곤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한 자매는 다른 수감자들이 수리 계산을 해야 하면 기꺼이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1962년에 우리는 이르쿠츠크의 수용소에서 모르도바의 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도 외모를 단정히 하고 몸을 청결하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침구도 늘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우리 막사에서는 50명 정도의 수감자들이 생활하였는데 대부분 자매들이었습니다. 막사를 청소하는 사람은 자매들뿐이었는데, 다른 수감자들은 그런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막사 바닥을 늘 깨끗이 닦고 사포로 문질렀습니다. 수용소 행정국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막사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던 수녀들은 청소를 하지 않겠다고 했고 지식인들도 청소하기를 꺼렸기 때문에, 주거 상태는 거의 대부분 우리가 하는 일에 달려 있었습니다. 석방되는 자매들의 인성 보고서에는 ‘적응력이 좋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함’이라는 문구가 항상 들어가 있었습니다.”

가리개 역할을 톡톡히 해 준 키가 큰 꽃들

지나이다의 말을 계속 들어 봅시다. “한번은 몇몇 자매들이 커다란 꽃이 피는 꽃씨를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는 예쁜 꽃들을 키웠으면 한다고 행정국에 이야기하면서 그런 용도로 쓸 비옥한 흑토를 수용소로 들여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아주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막사를 따라서 화단을 만들고 기다란 길을 내어 그 길을 따라 꽃을 심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수용소에는 줄기가 긴 장미, 수염패랭이꽃 등 아름다운 꽃들이 빽빽하게 피었는데,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꽃들이 키가 컸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에 있던 화단에는 화사한 달리아와 빽빽하게 무리를 이룬 키가 큰 여러 빛깔의 데이지가 피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거닐면서 꽃들 뒤에서 성서를 연구하였고 울창한 장미 덤불 속에 출판물을 감추었습니다.

우리는 걸어 다니면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다섯 명씩 집단을 조직하였지요. 자매들은 각자 성서 출판물의 다섯 항 중에 한 항을 미리 암기해 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시작하는 기도를 하고 나서 차례대로 항들을 암송하고 그에 관해 토의하였습니다. 마치는 기도를 한 다음에도 계속 걸었습니다. 우리는 [161면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작은 책자 형태로 만든 「파수대」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무언가를, 특히 일용할 성구를 연구하였고 일주일에 세 번 보는 집회에서 사용할 항들을 암송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서의 여러 장 전체를 암기하려고 노력하였고 서로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 내용을 되풀이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우리는 당국자들이 수색을 하다가 출판물을 압수해 갈까 봐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수용소 행정국은 다른 수감자들을 통해 수용소에서 우리의 활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시도했지만 많은 수감자들은 우리에게 호의적이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막사에서 지내던 사람들 중에 올가 이빈스카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친구 사이였습니다. 올가 역시 작가였는데 그는 우리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증인들이 매우 잘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고 특히 우리가 영적 양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야고보 3:17.

“그만하면 됐어!”

지나이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판물을 받아 보았지요. 여호와께서 친히 그 과정을 감독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그분이 약속하신 대로였지요. (히브리 13:5) 어떤 때는 그분이 감시원들의 눈을 그냥 멀게 해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겨울철에 우리 작업반이 출입문을 통과하여 수용소로 들어갔고, 감시원들은 늘 하던 대로 옷을 전부 벗게 해서 몸을 수색하였습니다. 나는 맨 끝에 있었는데 두 벌로 껴입은 바지 속에 새로 받은 출판물을 숨겨 두고 있었지요.

날씨가 추웠기 때문에 나는 마치 양파 껍질처럼 겹겹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여자 담당관은 우선 내 겨울용 코트를 살펴본 다음 그 안에 받쳐 입은 소매 없는 누비 웃옷을 살펴보았습니다. 나는 그가 질려 버리기를 바라면서 시간을 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천천히 스웨터 하나를 벗은 다음에 또 하나를 벗었습니다. 그가 스웨터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동안, 스카프 여러 개를 천천히 벗고 그런 다음 조끼를, 그다음에는 셔츠 하나를, 그러고 나서 셔츠 하나를 또 벗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바지 두 벌과 펠트로 만든 부츠뿐이었습니다. 나는 부츠 한 짝을 천천히 벗은 다음 다른 쪽도 천천히 벗었고, 마찬가지로 겉에 입은 바지도 느릿느릿 벗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어떡하면 좋지? 마지막 남은 바지도 벗으라고 하면 재빨리 달려가서 자매들에게 출판물을 던져 주고 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겉에 입은 바지를 벗자 여자 담당관은 짜증을 내면서 ‘그만하면 됐어! 여기서 어서 나가!’ 하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재빨리 옷을 입고 수용소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출판물을 어디서 구했을까요? 미리 정해 둔 장소에 형제들이 출판물을 놓고 가면 우리는 번갈아 가며 그 출판물을 수용소로 가지고 왔습니다. 일단 출판물을 수용소로 들여오면 안전한 장소에 숨겨 놓았는데, 수시로 그 장소를 바꾸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출판물을 계속 베끼고, 베껴 쓴 것들을 숨겨 두었습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서 베끼는 일을 하였는데, 담요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오는 불빛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일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늘 바쁘게 지냈습니다. 심지어 식당에 갈 때에도 각자 성구가 적힌 종이를 한 장씩 가지고 갔지요.”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소련 정부는 1965년에 갑자기 특별 사면령을 내렸는데, 1949년부터 1951년 사이에 시베리아로 유배된 모든 증인을 풀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 자매들 대부분은 이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허락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시베리아에 머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봉사와 관련하여 더 크게 필요한 지역으로 이주하기로 하였습니다.

마그달리나 벨로시츠카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시베리아에서 거의 15년간 유배 생활을 했지요. 겨울에는 온도가 영하 6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고, 여름에는 등에와 모기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는데 눈동자를 공격하기까지 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 덕분에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었어요. 그래도 그 추운 시베리아 지역에 진리의 씨를 뿌릴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잘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15년 동안 매달 감독관 사무실에 가서 유배지에서 도망가려고 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서명하였습니다. 때때로 감독관은 우리 집에 와서 유숙하곤 하였습니다. 그럴 때면 그는 우리에게 각별히 친절한 태도를 보였는데, 성서에 관해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곤 하였습니다.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런 삶을 택한 동기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그에게 우리가 수용소에서 풀려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손바닥을 펴 보이더니 ‘여기서 털이 자랄 가능성이 있을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없지요’ 하고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만큼이나 가능성이 없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여러분이 믿는 하느님이 여러분을 위해 무슨 행동을 취하지도, 기적을 행하지도 않으신다면 그럴 거라는 말입니다’ 하고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1965년의 어느 여름날, 나는 편지를 부치러 기차역에 갔습니다. 멀리서 나를 본 감독관은 ‘마그달리나, 허락도 없이 어디 가는 겁니까?’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디를 가려는 게 아니고요, 편지를 부치려는 겁니다’라고 내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게 다가와서 ‘오늘 석방될 겁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는데, 마치 ‘하느님이 당신을 석방시켜 주셨군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살던 곳 말고는 소련 내의 어디든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흩어져서 전파하거라. 지금이 절호의 때이니 지체하지 말고 흩어지거라’라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는 듯하였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해 주었다면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살던 고향 마을에 다시 정착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는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 하였지요. 우리 가족은 코카서스 지역에 정착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소련 전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같은 해에 있었던 한 정부 회의에서 어떤 관리는 당혹해하며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자진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막 세워진 신생 도시에 어떻게 해서 이 여호와 신봉자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겁니까? 깨끗한 새 도시에 갑자기 여호와 신봉자들이 나타났단 말입니다!” 당국자들은 증인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땅을 “여호와에 관한 지식”으로 가득 채우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이사야 11:9.

“당신들에게 ‘성수’가 있다고 하던데요”

증인들은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형벌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그런 형벌 수용소에서 여러 해를 보낸 니콜라이 칼리바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네 사람은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의 비호렙카라는 마을에 있는 형벌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70명가량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식수가 공급되지 않았고, 하나밖에 없는 송수관은 오수 처리 시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물을 마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음식도 먹기에는 부적합했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수용소에서는 증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일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일을 잘하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행정국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우리는 수용소의 다른 구역으로 가서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돌아올 때 양동이에 식수를 담아 올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감자들이 우리에게 와서는 ‘당신들에게 “성수”가 있다고 하던데요. 반 잔만이라도 줄 수 없나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는 물을 나누어 마셨습니다.

수감자들 가운데는 마음이 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이전에 도둑질을 하였거나 다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도 있었지만, 진리를 배우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고 우리를 노골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어떤 강사가 여호와의 증인을 비난하는 강연을 하러 수용소에 왔었는데, 반대하던 그 사람들이 우리 편을 들어 주면서 강연에 증인들을 중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럿이 함께 왔으면 합니다”

형제들은 여호와께 지혜를 주실 것을 청하면서 왕국 권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인지를 늘 생각하였습니다. 니콜라이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멀지 않은 모르도바에 있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흥미 있는 일이 있었지요. 놀랍게도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을 감시하는 일을 했던 몇몇 관리들과 담당관들이 우리에게 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찬송가도 들려주고 여러분의 신앙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해 주었으면 좋겠군요. 여럿이 함께 왔으면 합니다. 열 명에서 스무 명, 어쩌면 좀 더 올 수도 있어요.’

우리에게뿐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한 그들은 우리가 만날 장소에 망볼 사람들을 조직해 둘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는 우리가 더 경험이 많기 때문에 우리도 망볼 사람들을 정해 놓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망을 보는 군인들은 우리가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는데, 우리가 모임을 갖던 장소와 초소 사이에 일정 간격을 두고 서 있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일단의 증인들이 관리들과 담당관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고, 그런 다음 한 형제가 한 가지 성서 주제에 관한 짤막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 와 있는 것 같았지요! 그런 방법으로 우리는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집단과 여러 차례 집회를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어떻게 우리뿐 아니라 이 진실한 사람들도 돌보시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니콜라이의 말을 더 들어 봅시다. “우리는 그 수용소에서 모르도바에 있는 수용소로 갈 때 잡지를 많이 가지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증인들이 많이 수감되어 있었지요. 형제들은 출판물을 넣을 수 있도록 이중으로 된 짐 가방을 내게 주었습니다. 담당관들이 검열을 하다가 그 가방에 필요 이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준비하였습니다. 모르도바의 수용소에서는 우리를 아주 철저하게 검열하였습니다. 한 담당관은 내 짐 가방을 들어 보고는 ‘엄청나게 무겁군! 보물이 들어 있는 게 틀림없어!’ 하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내 짐 가방과 다른 물건들을 옆으로 치워 두고 다른 사람들의 소지품을 검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검열이 끝나자 다른 담당관이 ‘당신 물건들을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내 가방은 검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절실히 필요한 신선한 영적 양식을 막사로 들여갈 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베껴 쓴 전도지들을 부츠에 넣어 간 적도 몇 차례 있었습니다. 나는 발이 큰 편이기 때문에 부츠 속에 종이를 여러 장 넣을 수 있는 공간이 항상 있었습니다. 나는 깔창 밑에 종이들을 넣고 부츠에 그리스를 잔뜩 발랐습니다. 내가 바른 그리스는 매우 미끈미끈하고 냄새도 고약했기 때문에 담당관들은 내 부츠라면 질색을 하였습니다.”

“담당관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나는 담당관들을 감시한 격이었지요”

니콜라이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도바의 수용소에서, 형제들은 내게 성서 출판물 복사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내가 맡은 책임 한 가지는 출판물을 베끼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숨길 만한 시간이 있도록 담당관들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담당관들은 우리를 감시하고, 나는 담당관들을 감시한 격이었지요. 일부 담당관들은 현장을 덮칠 심산으로 자주 막사에 불쑥 들어오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는 사람들을 감시하기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루에 한 번 막사에 오는 담당관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좀 더 관대한 편이었고 문젯거리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는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둔 원본들을 복사하였습니다. 몇몇 원본들은 난로 속에 놓아 두었는데, 심지어는 수용소 행정관 사무실에 있는 난로 속에 두기도 했습니다. 행정관을 위해 청소를 해 주던 형제들이 난로 속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고, 우리는 귀한 「파수대」 원본 여러 부를 그곳에 두었습니다. 담당관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우리를 검열한다 해도 원본들은 행정관 사무실에 늘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었지요.”

형제들은 출판물을 숨기는 데 능숙해졌습니다. 숨기는 장소로 애용했던 한 곳은 창턱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치약 튜브에 출판물을 숨기는 법까지 익혔습니다. 원본들을 보관해 두는 곳을 아는 형제는 두세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필요할 때면 그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원본을 가져왔고 사본을 만든 다음에는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원본을 늘 안전한 곳에 둘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대부분 복사하는 일을 소중한 임무로 여겼는데, 15일간 독방에 가게 될 수 있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수용소에서 10년을 지내면서 약 3년 동안은 독방에 있었습니다.”

거미줄 「파수대」

형제들이 보기에는, 수용소 행정국에서 증인들이 가지고 있는 성서 출판물을 검열하고 압수하는 특별한 체계를 개발한 것 같았습니다. 일부 관리들은 특히 이 일에 열심을 보였습니다. 이반 클림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도바 제19수용소에 있을 때, 한번은 개를 데리고 온 군인들이 형제들을 수용소 지역 밖으로 데리고 가서 철저하게 검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증인들이 옷을 벗게 하고 심지어는 발을 감싸는 데 쓴 헝겊마저도 풀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베껴 쓴 종이 몇 장을 발바닥에 붙여 놓았기 때문에 들키지 않았습니다. 또한 손가락 사이에 끼울 수 있는 크기의 작은 책자들도 만들었습니다. 감시원들이 전부 손을 들라고 명령하였을 때에도 손가락 사이에 있던 일부 책자들 역시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영적 양식을 간수하는 다른 방법들도 있었습니다. 알렉세이 네포차토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형제들은 일명 거미줄 사본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펜촉을 아주 뾰족하게 해서, 괘선이 그어져 있는 공책 한 줄당 서너 줄의 글을 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느다란 글씨로 베껴 쓴 「파수대」 다섯 부 내지 여섯 부가 성냥갑 한 개에 들어갔습니다. 그처럼 작게 베껴 쓰는 일을 하려면 시력도 아주 좋아야 할 뿐더러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일할 수 있어야 하였습니다. 전등이 모두 꺼지고 다른 사람들이 전부 잠자리에 들면, 형제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고서 베끼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빛이라고는 막사 입구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전구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일을 몇 달간 하게 되면 시력이 나빠졌습니다. 이따금 감시원이 눈치를 챌 때도 있었는데, 우리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쓰고 또 쓰고, 대체 잠은 언제 자려고 하나?’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클림코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번은 상당량의 출판물과 함께 성서까지도 압수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형제의 의족 속에 모두 숨겨 놓았던 것들이었지요. 감시원들은 강제로 그 형제의 의족을 벗긴 다음 산산조각을 내 버렸습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사진으로 찍어서 수용소 신문에 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히려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적으로 종교적인 활동만 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또다시 보여 주는 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발각되는 일이 있고 난 후에 의기양양해진 수용소 행정관은 형제들에게 ‘너희들에게 아마겟돈이 닥쳤구나!’ 하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행정관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과 다름없이 함께 모여 노래도 부르고 책도 읽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검찰 총장과 대화를 나누다

1961년 말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검찰 총장이 점검차 모르도바의 수용소에 왔습니다. 그는 수용소를 순시하면서 증인들이 생활하는 막사들에도 들어가 보았습니다. 검찰 총장은 형제들이 몇 가지 질문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가 소련 사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검찰 총장은 ‘아니오,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더 나누다가 그는 무심코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에서는 1959년 한 해에만도, 증인들과 관련된 일에 500만 루블의 예산을 책정하였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당국자들이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여호와의 증인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500만 루블이나 되는 국가 행형 기금을 지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정말로 엄청난 액수였는데, 당시에는 5000루블이면 좋은 차나 쓸 만한 집을 살 수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을 모스크바의 당국자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검찰 총장은 계속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소련 국민들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증인들에게 해 보라고 한다면 당신들을 완전히 없애 버릴 거요.’ 그의 말은 소련 사회가 증인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신론적이고 이념적인 선전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증인들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대회를 개최하게 되면 실상을 아시게 될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50만 명 정도가 당신네들 편이 될지 모르겠소만, 그래도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 편일 거요’ 하고 그가 말했습니다.

검찰 총장과 나눈 대화는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의 말은 거의 맞았습니다. 구소련에 속했던 나라들 전역에서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선전이 아니라 성서 진리의 순수한 말씀을 듣습니다.”

“증인들을 위한 휴양지를 만들어 놓았군”

빅토르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수용소 행정국에서는 검찰 총장에게 증인들이 가꾸어 놓은 모든 꽃과 나무들을 보여 주었고, 수령한 후 막사에 놓아 두었지만 아무도 훔쳐 가지 않은 소포들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놀란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모든 것들을 쳐다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우리는 그가 수용소 행정국에 모든 꽃과 나무들을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용소 행정관에게 ‘노동 수용소가 아니라 증인들을 위한 휴양지를 만들어 놓았군’ 하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증인들이 소포를 받는 것을 금지시키고 가외로 음식을 살 수 있었던 곳인 간이 식품점도 폐쇄시켰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들에게 다행스러웠던 일은 행정관이 모든 명령을 다 이행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자매들은 전과 다름없이 꽃을 계속 기를 수 있었습니다. 자매들은 가을철에 꽃을 꺽어 커다란 꽃다발을 만들어서 수용소 직원들과 그 자녀들에게 선물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입구에 있는 초소에서 부모들을 만나 꽃을 받아 들고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학교로 뛰어가는 것을 보면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을 매우 좋아하였습니다.”

빅토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64년 초의 어느 날, KGB에서 근무하는 친형제가 있었던 한 담당관이 우리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대대적인 운동이 국가 차원으로 조직되고 있다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해 후반에 니키타 흐루쇼프가 갑자기 실각하게 되었고 박해의 물결은 수그러들었습니다.”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에서 왕국 노래를 부르다

1960년대에, 모르도바에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했던 한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이 1년에 단 한 번 소포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그것도 ‘특별한 상’으로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검열을 받는 일이 늘 있었습니다. 성구를 적어 놓은 종이를 갖고 있다가 발각되는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10일간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들은 다른 수용소들에서보다 더 적은 양의 음식을 배급받았습니다.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들에서는 일도 더 고되었는데, 증인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의 그루터기를 파내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알렉세이 네포차토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질 때가 자주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이 기운을 북돋고자 사용한 한 가지 방법은 왕국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없지만 여러 음역대가 있는 남성 합창단을 구성하였는데, 그 소리는 무어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노래들 덕분에 증인들뿐 아니라 관리들까지도 기분이 좋아졌으며, 관리들은 일과 시간 중에 형제들에게 노래를 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벌목을 하고 있는데, 호위대 감독관이 와서는 ‘노래 좀 몇 곡 불러 보게. 분대장님이 직접 신청하시는 거야!’ 하고 말하였습니다.

분대장은 형제들이 왕국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여러 번 들어 보았던 것입니다. 정말로 절묘한 시점에 신청이 들어온 것인데, 우리는 기력이 완전히 소진될 지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수용소에서 노래를 부를 때면 인근에 있던 집에서 관리들의 아내들이 현관에 나와서 선 채로 한참 동안 노래를 듣곤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전 노래 책에 나오는 ‘땅은 영광을 돌리라’라는 6번 노래의 가사를 특히 좋아하였습니다. 좋은 표현도 많이 들어 있고 선율도 아름다운 노래였지요.”

그는 “딴 세상”에 와 있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이 실제로 어떤 사람들인지가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한 주간의 일이 끝나 가던 어느 날 뜰에 앉아 쉬고 있는데, 우리 수용소에 값비싼 전기 기구가 몇 대 들어왔습니다. 배달을 하는 운전사는 영적 형제가 아닌 우리 수용소의 수감자였고, 계호자로 온 사람은 다른 수용소의 구매 주임이었습니다. 창고가 닫혀 있고 창고 주임도 휴가를 간 상태여서, 증인들더러 배달된 물품들을 수령하여 내려 달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전기 기구들을 내려서 창고 옆에 쌓아 두었는데, 거기에서부터 우리 형제들이 생활하던 막사까지는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구매 주임은 창고 주임의 수령 서명도 없이 정해진 절차도 밟지 않고 배달을 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더군요. 그렇지만 운전사는 그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물건에 손도 안 댈 겁니다. 주임님은 “딴 세상”에 오신 겁니다. 이 수용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잊어버리셔도 됩니다. 손목시계를 풀어서 여기 아무 데나 놓고 가도, 내일 와 보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걸요.’ 구매 주임은 50만 루블 상당의 물품을 서명도 받지 않고 그냥 놓고 갈 수는 없다고 고집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수용소 행정국 사람들이 와서 트럭을 수용소 밖으로 빼라고 하였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구매 주임에게 배달 송장을 놓고 가고, 다음 날 와서 가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저주저하다가 떠났습니다. 그가 이튿날 아침 다시 와서 서명된 송장을 받아야 한다며 수용소에 들여보내 달라고 하자, 감시원은 이미 서명이 되어 있는 송장을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나중에 그 감시원의 말을 들어 보니, 구매 주임은 수용소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떠났다고 하더군요. 30분 동안 서서 수용소 입구와 서류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가 다시 되돌아 서서 또 쳐다보고 있더라는 겁니다. 아마도 그는 살면서 그렇게 특이한 경험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자기가 없는데도 값비싼 물품이 제대로 배달되고 송장에 서명이 되어 있고, 그렇게 모든 일이 정직하게 처리되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 일이 ‘극히 위험한 범죄자들’로 분류된 수감자들이 형을 살고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노동 수용소에서 있었다는 것이지요. 증인들을 겨냥한 부정적인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일들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여호와의 증인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그 사람들이 다시 전파하고 있네요”

1960년에 형제들이 모르도바 수용소에 함께 수감된 지 며칠 뒤에, 그중 100명이 넘는 증인들이 인근 마을 우다르니의 특수 교도소인 제10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이곳은 증인들을 재교육하기 위한 “실험적인” 교도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수감자들은 나치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입었던 것과 같은 줄무늬 죄수복을 입었습니다. 증인들은 다른 일들에 더하여 숲에서 어마어마한 크기의 나무 그루터기들을 파내는 일도 해야 하였습니다. 매일 각자 적어도 열한 개 내지 열두 개의 그루터기를 파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형제들로 이루어진 한 작업반 전체가 종일토록 함께 일해도 거대한 오크나무 그루터기 한 개조차 파내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종종 왕국 노래를 부르며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때때로 수용소 행정관은 형제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는 “오늘 증인들 저녁 식사는 없어. 그래야 노래를 못 부를 테니. 일한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하고 소리치곤 했습니다. 이 수용소에 있었던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어려운 여건에서도 영적으로 깨어 있었습니다. 우주 주권 쟁점에서 여호와의 편에 서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함으로 늘 기운을 잃지 않았습니다.”—잠언 27:11.

교도소 전체를 감독하는 몇몇 “교육자”들에 더해, 각 감방에도 “교육자”가 있었는데, 이들은 대위 급 이상의 장교들이었습니다. 이 장교들의 목표는 증인들이 믿음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굴복하는 즉 믿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매달 교육자들은 각각의 증인들에 대한 인성 보고서를 작성하곤 했으며, 몇몇 교도소 직원들이 거기에 서명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항상 모든 증인에 대해 “재교육 조치에 반응을 보이지 않음. 신념이 확고함”이라고 기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반 클림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총 10년의 형기 중 6년을 이 교도소에서 복역하였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극히 위험한 상습범’으로 분류되었지요. 장교들의 말대로, 당국자들은 증인들의 행실을 관찰하기 위해 일부러 이례적으로 힘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그 교도소에서 5년을 복역한 이오프 안드로니크가 한번은 수용소장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희가 이 교도소에 얼마나 있게 되겠습니까?” 소장은 숲을 가리키며 “자네들 전부가 죽어서 저기에 묻힐 때까지는 있어야 할 걸”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오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전파하지 못하도록 다른 사람들과 격리 수용되었습니다. 아주 치밀하게 우리를 감시했지요. 우리 중 단 한 명이라도 수용소 내의 다른 구역으로 갈 일이 생기면 담당관이 항상 따라다녔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보안이 허술한 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증인이 아닌 몇몇 수감자들은 수용소 행정국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 이겼군요. 그들을 격리시켰지만, 지금 그 사람들이 다시 전파하고 있네요.’”

한 장교가 자신의 성서를 알아보다

제10수용소에서는 성서는 고사하고 출판물을 들여오는 것조차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 교도소로 들여오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교도소에 수 년간 수감되었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불가능한 일이란 없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교도소에 있는 100명의 증인들을 위해 적어도 한 권의 성서라도 주시기를 청했는데, 결국 두 권을 갖게 되었답니다!” (마태 19:26)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어떤 대령이 교도소 교육자로 일하도록 선발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지식이 전무한 사람이 어떻게 증인을 “교육”하겠습니까? 그는 어떻게 해서인가 너덜너덜한 성서 한 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침례교인인 한 나이 든 수감자에게 성서를 다시 제본해 달라고 하였고, 담당관들에게는 그에게서 성서를 빼앗지 말라고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그 침례교인은 증인들에게 자신이 성서를 한 권 받았다고 으스댔고, 증인들이 보도록 빌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이 귀중한 보물을 받자마자, 이음매를 뜯어내 모든 증인 수감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복사하게 했습니다. 그 후 며칠간 증인이 있는 모든 감방은 일종의 필사 작업장으로 변했습니다. 각 페이지마다 두 장씩을 베껴 썼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모든 페이지를 한데 모았고 그렇게 해서 성서는 세 권이 되었습니다! 대령은 새로 제본된 성서를 받았고 우리도 두 권을 갖게 되었지요. 한 권은 읽는 데 사용했고, 다른 한 권은 ‘안전한 금고’인 고압 전선이 지나가는 전선관에 넣어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 전선관 안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담당관들은 가까이 가는 것조차 꺼렸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곳을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고압 전기는 우리의 도서실을 지키는 믿음직스러운 파수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수색하던 중에, 그 대령은 베껴 쓴 성서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나자 매우 곤혹스러워하면서 “내가 직접 수용소에 가져온 성서의 일부잖아!” 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기념식을 거행하다

매년 형제들은 수용소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모르도바의 한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단 한 명의 형제도 이 행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수용소 행정국은 기념식을 거행하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기념식 날짜를 알고 있었고 그날이 되면 으레 모든 수용소 근무자들을 동원하여 철통 같은 감시를 하게 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념식이 열릴 장소나 정확한 시간을 몰랐기 때문에, 저녁 무렵이 되면 대부분의 감시원들은 형제들을 철저히 감시하다 지쳐 버렸습니다.

형제들은 늘 포도주와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한번은 기념식 당일에 감시반이 서랍에서 표상물을 찾아내어 압수해 갔습니다. 후에 그 감시반은 다른 감시반과 교대하였고, 감시반 대장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형제가 표상물을 도로 가져와서 들키지 않고 형제들에게 전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형제들은 세 번째 감시반이 교대 근무할 때 표상물을 사용해서 기념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 표상물이 꼭 필요했었는데,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 표상물을 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자 수용소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다

다른 수용소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발렌티나 가르놉스카야는 케메로보에 있는 여자 수용소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수용소에는 180명가량의 자매들이 있었어요. 우리가 함께 모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요. 10년 동안 기념식을 두 번밖에 거행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내 청소 구역이었던 한 사무실에서 기념식을 열기로 했습니다. 자매들은 기념식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몰래 사무실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80명 정도의 자매가 왔지요. 우리는 누룩이 들지 않은 빵과 달지 않은 붉은 포도주를 책상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시작하기로 했지요. 한 자매가 시작하는 기도를 했고, 처음에는 모든 일이 품위 있는 방식으로 즐겁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서 고함 소리가 들렸고 감독관들이 우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감시반 대장이 높이 달린 창문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을 열라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담당관들이 들이닥쳐서 연설을 하던 자매를 붙잡아 독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용감하게도 다른 자매가 그 자매 대신 연설을 계속하자 그도 끌고 갔습니다. 곧이어 세 번째로 다른 자매가 연설을 계속하려 하자, 그들은 우리 모두를 다른 방으로 몰아넣고 독방에 가두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노래와 마치는 기도로 기념식을 끝냈습니다.

막사로 돌아오자 다른 수감자들이 우리를 반기면서 ‘갑자기 당신들이 모두 안 보이기에 아마겟돈이 와서 하느님이 당신들은 하늘로 데려가고, 우리는 멸망시키려고 여기 남겨 둔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수감자들은 이미 수 년간 우리와 함께 있었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있고 난 후에, 그들 중 몇 명이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바짝 붙어 있었습니다’

보르쿠타에 있는 한 수용소에는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와 발트 해 연안국 등 소련의 여러 공화국에서 온 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반 클림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48년 겨울이었지요. 우리는 성서 출판물이 없었지만, 이전 잡지에서 본 기억이 나는 것들을 조그만 종이에 적어서 담당관들이 모르게 숨겨 두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그런 종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길고도 힘겨운 수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철에 우리를 바깥으로 내몰아서 5열로 줄을 세우곤 하였습니다. 흔히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우리를 세곤 했지요. 우리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밖에 서 있느니 차라리 종이를 넘겨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이 재삼재사 우리의 인원수를 세는 동안, 우리는 서로 바짝 붙어서 한 가지 성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늘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는 데 몰두했지요.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충절을 지키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얼마 후에는 형제들이 성서 한 권을 수용소로 들여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색을 당할 때 그 성서 전체가 압수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성서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수용소에 올 만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감시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힘닿는 데까지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소포가 오면 매번 그냥 ‘눈감아’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대개 각 소포마다 「파수대」 한두 페이지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몇 그램도 채 나가지 않는 이 종이들이 수 킬로그램 되는 음식보다 훨씬 더 소중했습니다. 증인들은 모든 수용소에서 물질적으로는 늘 궁핍했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부유했습니다.”—이사야 65:13, 14.

“50등분으로 나누려고 할 걸!”

형제들은 진리에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과 매주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여러 수감자들이 심지어 성서에 관심이 없는 수감자들도 오후 7시 이후에는 막사에서 성서 연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특별히 조용히 하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이오프 안드로니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자신의 일을 진척시켜 나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성서 원칙들을 적용함으로 서로에게 그리스도인 사랑을 나타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소포로 음식물이 오면 서로 나누어 먹었는데, 수용소에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지요.

미콜라 퍄토하는 한 수용소에서 형제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KGB 장교가 ‘미콜라에게 사탕 하나를 주면 50등분으로 나누려고 할 걸!’ 하고 말한 적도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바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육적 양식이든 영적 양식이든 관계없이 수용소에 들어온 것은 모두 나누어 가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했을 뿐 아니라 반응을 보일 만한 진실한 사람들에게도 좋은 증거가 되었습니다.”—마태 28:19, 20; 요한 13:34, 35.

좋은 행실에 대한 상여금

한 수용소에서는 여호와의 증인과 직접 접하면서 일하는 수용소 직원들에게 봉급의 30퍼센트에 달하는 상여금을 주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빅토르 굿시미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전에 수용소 출납원으로 일했던 여자가 그 일에 대해 말해 주더군요.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형제들이 많이 수감되어 있는 수용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화를 내거나 욕하지 말고 늘 재치 있고 정중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 좋은 행실을 하면 그들은 봉급을 더 받곤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모범적으로 생활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직원들은 훌륭한 행실에 대해 급료를 받은 겁니다. 수용소에는 의료 요원, 노동자, 회계사, 담당관 등 총 100명가량의 많은 사람들이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어느 날 수용소 밖에서 일하는 한 형제는 작업반장이 큰 소리로 욕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이튿날 수용소에서 그를 만난 형제는 ‘감시원실에 있던 누군가 때문에 아주 단단히 화가 나셨었나 봅니다. 주변이 떠나갈 듯이 욕을 하시던 걸 보니 말이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하루 종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그랬던 걸세. 그래서 속 좀 삭이려고 수용소 밖에 나갔던 거지.’ 정말이지, 여호와의 증인처럼 행동하기란 사람들에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창유리를 끼우면서 전파하다

형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할 기회를 활용하였고, 때때로 그런 노력의 결과로 훌륭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습니다. 니콜라이 구출랴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종종 우리는 수용소 간이 식품점에서 식품을 구했습니다. 나는 식품을 구하러 갈 차례가 되면, 성서와 관련이 있는 이야기를 몇 마디라도 하려고 항상 노력했습니다. 식품을 주는 일을 하던 여자는 늘 주의 깊이 들었고, 한번은 나더러 무언가를 읽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습니다. 사흘 후, 한 장교가 나에게 문으로 나오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증인과 함께 수용소장 집에 가서 창유리를 끼워 주라는 것이었지요.

그 형제와 나는 군인들의 계호를 받으며 시내로 갔습니다. 그 집에 도착해 보니 간이 식품점에서 일하던 여자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수용소장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군인 한 명은 집 안에, 두 명은 집 밖 거리에서 창문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우리에게 차 대접을 하며 성서에 대해 더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날 우리는 창유리를 끼우면서 철저한 증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대화가 끝날 무렵, ‘저를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부모님도 여러분처럼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분들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남편 몰래 우리 출판물을 읽었는데, 남편이 증인을 몹시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직장으로 돌아가십시오’

당국자들 가운데는 증인들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서 우리를 변호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의 브라츠크 지역에 있는 목재 가공 공장의 공산당 사무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당신들이 소련 정부를 지지하지 않으니, 소련 정부도 당신네들을 돌봐 주지 않을 거요. 당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여호와한테나 가서 돌봐 달라고 해 보시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해고당한 형제들은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이 공개적으로 전파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호별 방문 봉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집에서 어떤 여자가 문을 열어 주자, 형제들은 자신을 소개하고 방문한 목적을 간단히 설명했습니다. 부엌에서 “누가 왔나 보지? 들어오시라고 해요” 하는 남자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형제들이 집 안으로 들어가자, 그 남자는 “오늘은 평일인데, 왜 직장에 안 갔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형제들은 직장을 잃게 된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남자는 검사였고 점심을 먹으러 집에 온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그 남자는 전화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공장에 전화를 걸어 사무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모두 해고한 것이 사실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다는 대답을 듣자 검사는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랬소? 당신들이 법을 어겼다는 것을 알기나 합니까? 당신들은 그렇게 할 권리가 없소이다! 모든 증인들을 복직시키고, 당신들이 내린 결정으로 인해 근무하지 못한 3개월에 대해 배상도 해 주시오.” 검사는 전화를 끊고 형제들에게 “내일부터 직장으로 돌아가서 일을 계속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1947년부터 출판물을 숨겨 온 사람이올시다”

1970년대쯤에 형제들은 출판물을 생산하고 배부하고 숨기는 데 능숙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신속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리 시불스키는 이렇게 회고합니다. “1976년에 우리 집이 수색을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날 저녁에, 나는 형제들의 보고와 주소를 별 생각 없이 서랍 장 아래에 넣어 두었지요. KGB 요원들은 수색을 하면서 어디에서 뭘 찾아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양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습니다. 한 KGB 요원이 나에게 ‘소파를 뜯어보게 펜치하고 드라이버 좀 줘요’ 하고 말하더군요. 나는 기도를 한 다음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다른 증인들의 집을 수색할 때처럼 느닷없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수색했더라면 여기서 뭔가 찾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너무 늦었군요. 아무것도 찾지 못할 테니까요.’

‘뭘 찾을 수 있었단 말이지요?’ 하고 그 요원이 물었습니다.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말하는 거죠.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겁니다.’

나는 연장을 건네주면서 ‘수색이 다 끝나면 소파를 원래대로 조립해 주셔야 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동안 머뭇거리더군요. 그들이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나는 그중 젊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아하니, 여호와의 증인 출판물을 수색하는 일을 한 지 아직 3년도 채 안 된 것 같군요. 하지만 나는 1947년부터 출판물을 숨겨 온 사람이올시다. 출판물은 안전한 곳에 두었으니 괜히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은 떠나 버렸습니다. 형제들의 보고와 주소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페레스트로이카—변화의 시기

1985년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발표되었지만 기대하던 결과가 즉각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지역에서 증인들은 예전처럼 여전히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에 독일 지부 사무실은 세계 본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봉사 연도 초에, [소련에 있는 형제들이] 지방 당국에 등록한다면, 당국이 형제들에게 집회에 더해 어쩌면 출판물과 관련해서도 더 많은 자유를 주고자 하는 조짐이 보였습니다. 형제들은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기념식을 거행할 수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당국의 태도가 몰라보게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얼마 후, 임명된 형제들은 영적 양식을 소포로 받겠다고 자진하는 형제들의 우편 주소를 독일 지부에 보냈습니다. 그 자진한 형제들은 소포를 받아서 장로들에게 주었고, 장로들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유익을 얻도록 마련하였습니다. 1990년 2월경에는 한 달에 한 번씩 개인 우편으로 영적 양식을 받는 데 사용되는 개인 주소가 약 1600개에 달하였습니다.

1989년에는 소련에 있는 수천 명의 증인들이 폴란드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나베레즈니예첼니 시 출신의 증인인 예브도키야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처음으로 진정한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지요. 내가 일하던 회사의 책임자는 내가 국외로 나가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뭐라고요? 텔레비전도 못 봤습니까? 국경은 폐쇄되었고, 지금은 아무도 통과시키질 않고 있단 말이오!’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나는 확신에 찬 태도로 ‘국경은 개방될 거예요’라고 대답했지요.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브레스트에 있는 세관 검문소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만 국경을 통과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검문도 받지 않았고 모두 정중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증인이 아닌 어떤 사람이 대회 참석자인 것처럼 우리 사이에 끼어 국경을 통과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관원들이 재빨리 알아채고 그를 구금했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알아보았을까요? 대회 참석자들은 손에 작은 가방만 든 채로 한결같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모스크바에서 받은 따뜻한 환영

1949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등록하기 위해 모스크바 당국에 신청한 지도 40년이 흘렀습니다. 당시에 형제들은 양심상 스탈린 정부의 요구에 따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 2월 26일에 모스크바의 종무 위원회 위원장이 여호와의 증인 대표자들을 접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는 두 명의 부위원장과 다른 세 명의 위원도 참석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대표자들 열다섯 명도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와 소련의 다른 공화국들에서 온 열한 명의 형제들과 브루클린에서 온 밀턴 헨첼과 시어도어 재라스 그리고 독일 지부의 빌리 폴과 니키타 카를스트룀이었습니다.

위원장은 이러한 말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여러분과 만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여러분에 관해 많이 듣기는 했지만 직접 만나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군요. 우리는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신과 일치하게 개방적인 태도로 대화에 임할 것입니다.” 형제들은 소련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등록할 수 있도록 신청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위원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기쁩니다. 시기도 적절하고요. 얼마 안 있으면 씨 뿌리는 시기인 봄이 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좋은 결과와 결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위원장의 요청에 따라 형제들이 자신을 소개하자, 여호와의 증인들이 칼리닌그라드에서 극동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방방곡곡에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에 있는 네 개의 회중을 대표합니다. 그에 더해 극동과 하바롭스크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 및 노보시비르스크 오블라스트와 옴스크 오블라스트도 담당하고 있지요.” 위원장은 “구역이 어마어마하군요. 그보다 영토가 작은 나라도 많겠는데요!” 하며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한 부위원장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의 신앙을 더 잘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더러 있거든요. 이를테면, 여러분이 보는 어떤 책에서는 하느님이 땅을 깨끗이 하시고 현존하는 모든 정부를 제거하실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 점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폴 형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떤 종류의 폭력에도 가담하지 않습니다. 책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그것은 특정한 성서 예언들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느님의 왕국과 지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 전파합니다.”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지요”라고 부위원장이 말했습니다.

대화가 끝나 갈 때쯤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뵙게 되어서 아주 기뻤습니다. 여러분은 가능한 한 속히 등록될 것입니다.”

1991년 3월에 여호와의 증인은 러시아에서 공식 인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인구가 1억 5000만 명이 넘었던 러시아에서 보고된 왕국 선포자의 수는 1만 5987명이었습니다. 이제 러시아에 있는 형제 자매들은 여호와로부터 더 많은 지침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마태 24:45; 28:19, 20.

“이런 기쁨과 자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핀란드가 러시아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통치체는 핀란드 지부에 요청하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992년 6월 26일부터 28일까지 열릴 국제 대회를 조직하는 일을 돕게 하였습니다. 형제들은 50년이 넘게 금지령 아래서 생활하다가 자유로운 가운데 대회를 보게 된 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습니까? 한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경기장에는 수천 명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더군요. 이런 기쁨과 자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현 세상에서 이런 자유를 누리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지요. 그런데 여호와께서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수용소의 격리된 감방에서 우리 다섯 명이 누워 있었던 것하며 한 번에 네 사람이 교대로 나머지 한 사람의 몸을 덥혀 주던 기억들을 함께 떠올렸습니다. 경기장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능한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고 싶었지요. 그 기분은 뭐라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회 기간 내내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그러한 기적을 목격하게 되니 너무 기쁜 나머지 울음이 나오더군요. 이미 70세가 훌쩍 넘어 버린 나이였지만 날개를 단 듯 경기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요. 50년간 그런 자유를 고대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시베리아로 유배되는 것을 허용하셨고, 그 후에 우리는 교도소와 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경기장에 있게 된 거지요! 여호와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선 채로 흐느껴 울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며 믿을 수 없어 하였지요. 몇몇 젊은 형제들이 우리 주위에 모여서는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건 아니고요?’ 하고 묻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울음이 나와서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겨우 우리 중 한 명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린 기뻐서 우는 거라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여러 해 동안 금지령 아래서 어떻게 여호와를 섬겨 왔는지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당시 여호와께서 그토록 신속하게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리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었지요.”

그 잊지 못할 대회에 이어 핀란드 지부는 열다섯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를 러시아로 파견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992년 7월 1일에 핀란드 출신의 열심 있는 부부인 한누 탄니넨과 에이여 탄니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임지에 도착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첫 언어 수업을 마치고 그들은 봉사에 나가 사람들에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습니다. 한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90년대 초에는 그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하고 싶어 했습니다. 가두 증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주소를 주었지요. 모든 사람들이 출판물을 원했습니다. 거리에서 한 사람에게 잡지나 전도지를 주면, 그걸 본 다른 열 명의 사람들이 다가와서는 출판물을 달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출판물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종종 거리나 지하철에서 즉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10월부터는 폴란드에서도 많은 특별 파이오니아가 왔습니다. 처음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독신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두 번째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폴란드에서 와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되었습니다. 1년 뒤에는 일단의 폴란드 파이오니아들이 모스크바로 파견되었습니다. 몇 해 후에는 주로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들인 폴란드 출신의 170명이 넘는 자원 봉사자들이 러시아에서 섬기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활동으로 인도하는 큰 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국제 대회가 있고 난 후, 통치체는 그 도시에서 가까운 솔네치노예라는 마을에 위치한 적합한 부지(7헥타르)와 오래된 건물 몇 채를 매입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러시아에 베델을 지을 때가 된 것입니다. 핀란드 지부는 건축 공사를 도우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992년 9월에 일단의 자원 봉사자들이 처음으로 핀란드에서 솔네치노예로 왔습니다. 그 자원 봉사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후에 지부 위원이 된 아우리스 베르그달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내인 에바 리사와 나는 러시아에서 베델을 짓는 일을 도우라는 초대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을 인도하고 계심이 분명했습니다. 세계 전역에서 형제들이 공사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핀란드 출신의 건축 감독자였던 알프 세이데르뢰프와 그의 아내인 마르예이레이나는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형제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핀란드 지부 위원들 역시 큰 격려를 베풀었습니다. 공사 기간 중에 브루클린 본부에서 온 형제들도 솔네치노예를 방문하였습니다. 아우리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93년에 모스크바 국제 대회를 마친 뒤 밀턴 헨첼이 우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자원 봉사자들에게 연설할 때뿐 아니라 그들과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도 대단히 격려적이었습니다.”

베델 건축 일을 하는 자원 봉사자들이 700명가량 되었는데,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지역, 유럽,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와 구소련의 다른 공화국들에서 왔습니다. 그들의 다양한 문화와 배경만큼이나 일하는 방식도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군대로도 되지 않고, 힘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고 한 스가랴 4:6의 말씀대로 공사는 완료되었습니다. 실로 여호와께서 그 “집”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시 127:1) 러시아의 형제들은 왕국 활동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쳤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젊고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지만 이미 그들 중 다수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질 높은 속성 건축법과 신권 조직과 관련된 일을 처리하는 법을 배우려는 열망에 차 있었습니다.

활동을 조직하다

1993년 말엽에 러시아 전국 위원회 위원들이 솔네치노예에 모였습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이반 파시콥스키, 드미트리 리비, 바실리 칼린, 알렉세이 베르즈비츠키, 아나톨리 프리빗코프, 드미트리 페두니신이었습니다. 약 1년 뒤에 미하일 사비츠키도 전국 위원이 되었습니다. 통치체는 독일 지부의 호르스트 헨셸을 임명하여 형제들이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돕게 하였습니다.

먼저 조직해야 할 일들 가운데는 여행하는 활동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러시아에는 다섯 개의 순회구가 설립되었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두 개, 모스크바와 그 인근 지역에 세 개가 있었습니다. 첫 전 시간 순회 감독자 다섯 사람은 모스크바를 임지로 받은 아르투르 바우에르, 파베우 부가이스키, 로이 외스테르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임지로 받은 크시슈토프 포프와프스키, 한누 탄니넨이었습니다. 후에 로만 스키바 역시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를 1992년에 졸업한 미국 출신의 매튜 켈리는 일부 시간을 지역 감독자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한누 탄니넨은 1990년대 초의 초창기 순회 방문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합니다. “나는 카렐리야의 페트로자보츠크에 있는 한 회중에 다가오는 방문에 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 방문 주간 동안 있을 집회의 진행 방식에 관해 기술하였지요. 아내와 내가 그 회중을 방문하기 위해 도착해 보니 한 장로가 기차역에 마중 나와 있었고 우리는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나에게 편지를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받기는 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서, 와서 전부 설명해 주실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지요.’

무르만스크에 처음으로 순회 방문을 가 보니 385명의 전도인이 1000건이 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연구가 관심 있는 사람들 여러 명과 함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성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의 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열세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는데, 연구하는 사람들은 50명이 넘었지요!

우리의 두 번째 임지는 볼고그라드 오블라스트와 로스토프 오블라스트였습니다. 인구가 100만이 넘는 볼고그라드 시에는 회중이 단지 네 개에 불과했습니다. 형제들은 집회를 진행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호별 방문을 하는 방법을 몹시 배우고 싶어 했습니다. 방문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회중을 구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순회 감독자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지난 방문 이후로 침례받은 사람들을 계수했습니다. 회중마다 그사이에 침례받은 사람들의 수가 50명이나 60명 혹은 80명이 되었으며, 심지어 100명이 넘는 회중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도시에는 3년 만에 새로운 회중이 열여섯 개나 형성되었습니다.”

1996년 1월에는 러시아에 지부 위원회가 임명되었습니다. 동시에 전 시간 지역 감독자들도 처음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중에는 로만 스키바(시베리아와 극동), 로이 외스테르(벨로루시,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랄 산맥까지), 한누 탄니넨(코카서스에서 볼가 강까지), 아르투르 바우에르(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지역 감독자들은 자신의 지역구와 더불어 한 개의 작은 순회구도 섬겼습니다.

광대한 지역을 여행하다

로만 스키바는 1993년 초에 처음으로 폴란드에서 러시아로 온 특별 파이오니아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1993년 10월에 순회 봉사를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임명된 순회구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남부와 프스코프 오블라스트의 회중들 그리고 벨로루시에 있는 모든 회중들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래도 러시아에서 제일 큰 순회구는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광대한 지역을 여행하는 데 곧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1995년 11월에는 우랄 산맥 지역의 순회구에 배정되었고 대리 지역 감독자로도 임명되었습니다. 내가 봉사하던 구역은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전역과 극동 지역이었습니다. 한 형제가 이 지역의 크기를 계산해 보았는데, 폴란드만한 나라가 38개나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습니다! 시간대는 여덟 개나 되었지요! 약 2년 후에는, 지부로부터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 있는 한 집단을 방문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스키바 형제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은 북극권의 북쪽에 있는 노릴스크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두 번 타야 했는데, 먼저 노릴스크에서 노보시비르스크까지 간 다음에 거기서 예카테린부르크까지 가야 했지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던 정말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습니다. 노릴스크에서 비행기 이륙 시간이 열두 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아내인 류드밀라와 나는 공항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가 여행하면서 개인 연구를 하는 법을 익혔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제때에 회중을 방문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알타이의 산간 마을인 우스티칸에 있는 한 회중에 가기 위해 비포장 산길을 차를 몰고 가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가는 도중에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결국 너무 늦어 회중 기록을 검사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집회에도 두 시간이나 늦었지요. 우리는 실망했고 필시 모든 사람이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임대한 강당에 1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도인은 고작 40명이 채 안 되었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지체되는 동안 다른 산간 마을들에 사는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잊지 못할 대회들

처음으로 지역 대회가 몇몇 대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그곳 형제들은 이전에 대회를 준비해 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형제들은 1996년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지역 대회를 개최할 만한 적합한 경기장을 선정하였습니다. 로만 스키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관중석에는 풀이 자라고 있었고, 경기장 안에는 2미터나 되는 자작나무들이 있었지요. 대회가 열리기까지는 3주밖에 남지 않았고 그 도시와 교외에 있는 회중은 고작 세 개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경기장 책임자는 어떻게 그 경기장에서 대회를 열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기꺼이 우리에게 협조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일을 시작하였고 예정된 날짜가 되었을 때는 경기장이 번쩍번쩍 광이 났습니다. 책임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책임자는 감사의 표시로 형제들이 경기장의 한 건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를 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대회가 끝난 뒤에 경기장에서는 다시 스포츠 행사들이 열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시에서는 수익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대회를 열기 위해서는 때때로 융통성과 인내를 나타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1999년에 블라디캅카스에서 500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던 순회 대회를 열 경기장을 빌릴 수가 없었습니다. 즉각 형제들은 대회 프로그램을 즐길 대안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블라디캅카스에 있는 한 영화관을 임대하여 하루로 단축한 프로그램을 다섯 차례 진행하였습니다. 그 후 주말 동안에는 날치크 시에 있는, 서로 2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두 장소에서 전체 순회 대회 프로그램이 이틀간 진행되었습니다. 한 강당에서 열린 대회는 다른 장소에서 열린 대회보다 두 시간 늦게 시작되었는데, 먼저 시작한 대회의 연사들이 그다음 대회로 이동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부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그 대회들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가 쉬는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한 형제는 어림잡아 계산해 보니 자신이 그 주에 연설을 무려 35회나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가 싶더니, 토요일 늦은 아침에 한 강당에서 프로그램이 방해를 받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강당에 들어와서는 기술적인 문제가 있으니 모두 즉시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강당을 나갔고, 건물 밖에서 점심을 먹으며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광신자가 당국에 전화를 걸어 건물에 폭탄이 있다고 신고했던 것입니다. 강당을 검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고, 형제들은 대회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을 약간 조정한 후에 대회를 성공리에 마쳤고 모두가 프로그램에서 유익을 얻었습니다.

돌과 방패와 칼

진리의 씨는 나라 전역에 신속히 뿌려졌습니다. 에이여 탄니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1998년에 우리는 한 지역 대회에서 다른 지역 대회로 가기 위해 열다섯 시간의 기차 여행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요. 형제들은 우리에게 그 대회 드라마에서 사용할 상당량의 소품을 가지고 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것은 다소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는데, 우리가 알기로 대개 기차 승무원들은 짐이 많은 승객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었고,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의상을 가득 넣은 가방과 돌과 방패와 칼을 4인용 객실에 실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짐을 가지고 다른 두 승객과 함께 그 객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기차 승무원이 검표를 하러 와서는 짐이 왜 이렇게 많냐고 묻더군요.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 지역 대회에서 제공되는 드라마에 사용할 소품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승무원은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면서 얼마 전에 우리 남편이 자신의 고향에 있는 한 회중을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할 때 자신도 참석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도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연구 참관자

자매들은 서로에게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에이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러시아에서 봉사를 시작했을 당시 나는 말이 서툴렀기 때문에 우리 자매들에게 참을성과 겸손이 얼마나 많이 필요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나는 자매들이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얼마나 열망하는지를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금지령 아래서 봉사해 온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는 여호와의 조직으로부터 교훈을 항상 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1995년부터 1996년까지 볼시스키 시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어떤 자매가 나에게 성서 연구에 같이 가자고 하면 종종 다른 여러 자매들이 자신들도 함께 갈 수 있느냐고 묻곤 하였습니다. 처음에 내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자 자매들은 성서 연구를 어떻게 사회하는지 보면서 배우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성서 연구생들이 괜찮다고 하고 자매들과 함께 있어도 수줍어하지 않는다면 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성서 연구생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따라오는 자매들이 대개 여섯 명 내지 열 명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방해가 되지 않더군요. 몇 달이 지나자 많은 성서 연구생들이 직접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볼시스키에는 회중이 두 개밖에 없었지만 10년 후에는 열한 개의 회중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다

신권적 지침은 진리 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형제 자매들뿐 아니라 금지령 아래서 여러 해 동안 여호와를 섬겨 온 형제 자매들에게도 분명히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한누 탄니넨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천사가 인도하고 있음을 느꼈고 깊은 감명을 주는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1994년에 지금은 벨리키노브고로드라고도 불리는 노브고로드에 있는 새로운 회중에 도착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주간에 머물게 될 아파트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아파트에는 특별히 그 방문을 위해 약 50킬로미터를 여행한 마리야라는 연로한 자매가 와 있었습니다. 그 자매는 50년 동안 진리 안에 있었는데, 금지령이 해제되고 나서 첫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는 형제를 만나 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자매에게 어떻게 진리를 배우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독일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기름부음받은 자매에게 수용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결국 마리야는 석방되었고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러시아로 돌아왔습니다. 얼마 후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투옥을 당하였으며, 소련의 노동 수용소에서 여러 해 동안 복역하였습니다.

이 겸손한 자매가 이야기를 끝맺으면서 자신이 여호와를 숭배하는 데 무언가 잘못된 부면이 있다면 알려 달라고 지난 몇 주 동안 그분에게 기도해 왔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우리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에 「파수대」 “독자로부터의 질문” 기사에서 오래전에 다룬 한 가지 점을 그 자매에게 언급했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침례가 유효하려면 그리스도인 형제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였습니다. 마리야는 깊은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욕조에서 침례를 받으며 기뻐하였지요. 1944년에 헌신한 후 50년이 지난 뒤에 받은 침례였습니다.”

열한 개의 시간대를 넘나들며 배달되는 영적 양식

1991년 초부터 출판물이 작은 소포로 독일과 핀란드에서 러시아로 우송되었습니다. 1993년 7월에는 20톤의 출판물을 실은 트럭이 처음으로 독일을 출발하여 솔네치노예에 도착하였습니다. 러시아 지부에서 출발한 트럭들은 모스크바와 벨로루시와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배달 노선들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도전이 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형제들은 카자흐스탄에 출판물을 배달하기 위해 편도 500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하였습니다. 국경에서 지체되기도 했고 겨울에는 트럭이 눈 속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매달 약 200톤의 출판물이 솔네치노예에 배달됩니다. 베델 운전자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경 경비대원들이나 세관원들에게 증거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성서 출판물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경찰은 검문을 하다가 베델 트럭이 종교 단체의 소유임을 알게 되자 큰 소리로 종교 전체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교통 법규를 심하게 위반한 어떤 사제를 멈춰 세웠더니 자신에게 욕설을 퍼붓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그에게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땅과 인류에 대해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경찰관은 음색이 달라졌고 좀 더 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더니 질문까지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형제들은 성서를 꺼내어 그와 격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찰관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런 대화를 계속할 수 있도록 증인들을 찾아봐야겠군요”라고 말했습니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 지부는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회중들에 출판물을 배달하는 일을 돌보았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형제들은 선편으로 캄차카에 있는 회중들에 출판물을 보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형제들은 캄차카로 가는 배의 선장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선장은 자신의 선실에 출판물을 실어 무료로 운송해 주기로 하였고 심지어는 출판물을 배에 싣는 일을 도와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좋아하고 여러분의 조직 체계도 좋아합니다. 운송 지점에 도착하면 출판물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마치 새 같거든요. 순식간에 와서 출판물이 담긴 상자를 금세 가져가 버리지요.”

성장으로 인해 필요가 생기다

여러 해 동안 러시아어판 「파수대」는 현재 사용되는 것보다 조금 더 큰 종이에 인쇄된 월 1회 발행의 16면 잡지였습니다. 연구 기사들이 모두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소련에 있는 형제들이 볼 수 있기는 하였지만, 영어판보다는 훨씬 늦게 나왔습니다. 연구 기사들은 6개월에서 2년 정도 늦었으며, 부기사들의 경우에는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걸렸습니다. 1981년부터 러시아어판 「파수대」는 24면으로 구성되어 월 1회 발행되었고, 1985년 이후로는 월 2회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6월 1일호부터는 4색으로 인쇄된 32면 잡지가 영어판과 동시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인 타냐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되돌아보면 우리가 당시에 번역하고 인쇄한 다수의 출판물이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이라는 요구 조건에 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도 그것이 당시 여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지요. 그리고 그것은 영적으로 굶주린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양식이었습니다.”

구소련 지역에서 활동의 문이 열리면서 우리의 출판물이 널리 배부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에서 일하던 러시아어 번역자들은 도움을 받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번역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두 가지 면에서 새로운 진전이 있었습니다. 먼저 크게 기뻐할 만한 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몇몇 형제 자매들이 번역 훈련을 받기 위해 독일 지부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중 다섯 명은 1991년 9월 27일에 도착하였고, 후에 다른 사람들이 합류하였습니다. 따라서 러시아어 번역 팀이 재구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나무와 돌’이 즉각 “금”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이사야 60:17에 언급된 모든 과정을 겪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러시아어 번역자들은 당시에 막 생긴 번역 봉사부의 활동으로부터 유익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러시아에서 독일의 젤터스로 처음 왔을 즈음에 번역자들을 위한 세미나가 독일 지부에서 열렸습니다.

번역은 번역하는 언어가 사용되는 나라에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따라서 1994년 1월에 러시아어 번역 팀이 당시 솔네치노예에 건축 중이던 베델에 거주하기 위해 독일 지부를 떠나게 된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어 번역자들은, 철의 장막 뒤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수십 년간 묵묵히 번역을 해 왔지만 상황상 함께 갈 수 없는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어 몹시 섭섭해하였습니다. 1994년 1월 23일 일요일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할 다른 두 명의 형제와 함께 열일곱 명의 형제 자매들은 눈물바다 속에서 포옹을 나누고 젤터스를 떠났습니다.

“환자에게는 내가 하느님이란 말이오”

수십 년간 러시아의 의사들과 의료진들이 환자들의 종교적 신념을 바라보던 시각은 무신론적 교육과 소련 의료계에 만연한 혈액 사용에 기초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증인들이 무수혈 치료를 요청할 때면, 의사들은 어리둥절해하거나 심지어 무례한 반응을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의사들은 자주 이렇게까지 말하곤 하였습니다. “이봐요, 환자에게는 내가 하느님이란 말이오!” 환자가 의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즉각 병원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습니다. 더욱이 수혈에 관한 성서에 근거한 증인들의 입장은 러시아에서 우리의 활동을 금지시키려는 반대자들에 의해 종종 악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95년부터 러시아 지부에서 병원 안내부가 업무를 수행하면서 의료인들에게 여호와의 증인들의 입장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미나가 여러 차례 개최되어 60여 개의 병원 교섭 위원회에서 일하는 장로들이 증인 환자들에게 무수혈 치료를 해 주는 의사들을 찾는 방법뿐 아니라 의사와 의료인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 모스크바에서는 러시아 의사들과 외국인 의료인들이 “수술 시 수혈 대체 치료법”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회의를 열었는데, 러시아에서는 그런 종류의 모임이 처음이었습니다.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온 500여 명의 의사들이 그 학술회의에 참석하였습니다. 충분한 경험을 얻은 러시아 의사들은 러시아의 여러 주요 도시에서 1998년부터 2002년 사이에 그러한 학술회의들을 많이 열 수 있었습니다. 그 학술회의들은 훌륭한 결과를 산출하였습니다.

전 보건부 장관이자 러시아 연방의 수석 혈액 학자인 A. I. 보로비예프 박사는 증인 환자들의 권리를 변호하는 변호사들에게 보내는 공식 서한에서, 의사들이 수혈에 대한 자신들의 접근 방식을 다시 검토한 결과 “러시아의 산모 사망률이 34퍼센트 떨어졌다”고 기술하였습니다. 보로비예프 박사는 또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 이전에 러시아 의료계가 보고한 산모 사망률은 유럽보다 여덟 배나 높았는데, 이는 러시아 산파들이 산모들에게 불필요한 수혈을 하였기 때문이다.”

2001년에 러시아 연방 보건부는 전국에 있는 의료 기관에 일련의 지침을 전달하였습니다. 그 지침에서는 환자가 종교적인 이유로 수혈을 거부할 경우 의사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언명하였습니다. 2002년에 러시아 보건부는 「혈액 성분의 사용에 관한 지침」(Instructions on the Use of Blood Components)을 발행하였습니다. 이 규정에는 환자가 동의서를 제출한 경우에만 수혈을 할 수 있다고 명기되어 있습니다. 그에 더해 환자가 종교적인 이유로 혈액 성분의 사용을 거부한다면 대체 치료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많은 의사들이 병원 안내부 대표자들과 일한 이후로 수혈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한 외과 의사는 병원 안내부 대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증인] 환자들과 여러분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이 수혈을 거부하는 것은 단지 충동적인 이유가 아니라 성서의 계명에 따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점을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여러분이 준 자료에 나와 있는 참조 성구들을 모두 읽어 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나니 여러분이 실제로 성서에 근거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제들은 왜 이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입니까? 나는 이제 이 문제가 제기될 때면, 다른 의사들에게 증인들은 성서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현재는 러시아에서 2000명이 넘는 의사들이 수혈 없이 증인 환자들을 치료해 줍니다.

기쁜 마음으로 임지에서 봉사하다

독일에서 길르앗 분교를 졸업한 아르노 튕글러와 조냐 튕글러 부부는 1993년 10월 이래로 러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봉사한 지역들에서 여호와의 일은 어떻게 진척되어 왔습니까? 그들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아르노: “우리는 모스크바에 있는 임지에 왔습니다. 몇 주 후에 우리는 신권 전도 학교에서 첫 연설을 했고, 러시아에 도착한 지 6주 후에 나는 처음으로 대회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침례받은 전도인이 140명가량 되는 회중에 배정되었는데, 회중 구역이 무려 독일에 있는 한 순회구의 구역 크기만 했습니다! 첫 구역은 우리의 파이오니아 집에서 가까웠습니다. 그곳에서 최초로 호별 방문 봉사를 하는 증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일이었습니다!”

조냐: “우리는 러시아어를 거의 몰랐지만, 때때로 단둘이 가두 증거를 하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전도지와 출판물을 전했지요. 현지 형제 자매들은 우리를 많이 지원해 주었으며, 함께 야외 봉사에 나갈 약속도 흔쾌히 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대단히 친절하였고 참을성이 많았으며 우리가 러시아어를 서툴게 해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집주인들도 참을성이 아주 많았습니다. 소련은 붕괴되었고, 사람들은 종교에 관심이 아주 많았지요.”

아르노: “호별 방문 봉사에 참여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이 러시아어를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에 도착한 지 4개월 만인 1994년 1월에 이미 22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쓰는 러시아어를 듣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크고 작은 대회에서 침례받는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는데, 참석자의 10퍼센트 이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장로와 봉사의 종으로 일할 자격을 갖춘 형제들이 부족한 회중들이 많았습니다. 한 장로는 무려 다섯 회중의 주임 감독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나에게 그중 한 회중에서 기념식 연설을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참석한 804명의 사람들은 연설이 끝난 후 곧바로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다른 회중도 그곳에서 모임을 가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모임의 연사가 회관으로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제시간에 올 수 없게 되어 내가 또 연설을 해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79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단 두 회중의 기념식 참석자 수가 1600명이나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 얼마나 큰 관심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지요.”

여호와께서 수확하는 일의 ‘속도를 더하시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보배로운 것”을 모으는 일의 “속도를 더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60:22; 학개 2:7) 198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던 65명의 전도인들은 KGB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주민들과 성서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90년 무렵에는 170명이 넘는 증인들이 도시 이곳저곳에서 비공식적으로 가두 증거를 하였습니다. 1991년 3월에 러시아에서 증인들의 활동을 등록할 수 있었고, 얼마 있지 않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다섯 개의 회중이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199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대회를 비롯한 여러 신권 행사들로 인해 급속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20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70여 개의 회중이 활동하였습니다.

카자흐스탄 국경에서 멀지 않은 아스트라한에는 1995년에 회중이 한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 회중에는 장로나 봉사의 종이 없었는데도 형제들은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을 개최하였습니다. 카바르디노발카리야에서 70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온 장로들이 대회 프로그램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이 형제들은 대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침례를 받을 것인지 사전에 알지 못했습니다. 로만 스키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다른 한 장로와 함께 대회가 열리기 2주 전에 도착했습니다. 회중과 함께 야외 봉사도 하고 침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과 질문들을 검토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봉사할 시간을 도무지 낼 수가 없었습니다. 20명의 침례 지원자와 토의하느라 시간을 다 써 버렸기 때문입니다!”

1999년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형제들은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 몇 사람을 기념식에 초대하였습니다. 상인들은 자기 친구들도 초대할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약 100명이 모임 장소에 나타났을 때 증인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임대한 강당이 꽤 컸는데도 일부 사람들은 서 있어야 했습니다.

50명이 함께하는 성서 연구

1991년 말에 파벨 디모비가 아내 아나스타시야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바노보 오블라스트로 이주해 옴으로 그 지역에서도 전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어떻게 시작하였습니까?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하였는데, 바로 출판물 진열대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의 중앙 광장에 진열대를 설치하고, 팜플렛과 잡지와 서적을 진열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멈추어 서곤 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진실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성서 연구 모임에 초대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임들을 가정 성서 연구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는데, 임대한 강당에서 50명까지 참석한 가운데 연구가 사회되었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집회와 비슷하였고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고려한 다음, 「파수대」에 실린 기사 하나를 연구하였습니다. 연구는 일주일에 세 번씩 열렸고, 한 번에 세 시간씩 진행되었습니다. 그러한 연구 모임 세 개가 도시의 여러 곳에서 열렸습니다. 파벨은 늘 세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대부분의 전도인들이 열 건 내지 스무 건의 연구를 사회하던 시기에 연구 건수가 그렇게 적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파벨에게 물어본 형제들은 각 연구에 50명가량의 관심자가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구에 참석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려는 열망을 나타낸 것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마련을 축복하고 계심이 분명하였습니다. 한번은 연구를 마친 후, 파벨이 전도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남아 있으라고 광고하였습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았고 모든 사람이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도시에 있는 출판물 진열대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얼마 있지 않아 도시의 광장과 공원에는 출판물로 가득 찬 진열대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또 다른 형태의 봉사인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할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봉사를 해 본 전도인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습니까? 호별 방문 봉사를 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디모비 부부가 봉사할 때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흔히, 배우려고 하는 전도인들의 수가 많았습니다. 때로는 열 명이나 되는 전도인이 한꺼번에 파벨을 따라 호별 방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집주인들은 그로 인해 위축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전도인들 모두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심지어는 찾아온 전도인들 전체를 자기가 사는 아파트로 초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전도인들은 이바노보 시 밖의 지역에서도 전파하기를 열망했고, 따라서 이바노보 오블라스트에 있는 다른 도시들로 가는 여행이 조직되었습니다. 흔히 50명씩 그룹을 이룬 전도인들은 목적지로 가는 기차 안에서부터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도착해서는 둘씩 짝을 지었습니다. 전도인들은 아파트 건물들에서 증거하면서 그날 저녁에 열릴 집회에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집회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제작한 비디오를 상영하였고, 연설도 하였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의하였고,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형제들에게 자신들의 주소를 주었습니다. 이러한 활동들 덕분에 이바노보 오블라스트의 여러 도시마다 많게는 다섯 개의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1994년에는 이바노보에서만 125명의 전도인이 있었고, 기념식에는 1008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열린 지역 대회에서는 62명이나 되는 이바노보 출신의 사람들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루 만에 새로운 회중 하나가 생긴 것입니다! 현재 이바노보 오블라스트에서는 1800명의 왕국 선포자가 주의 일을 분주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함께 모이다

몇몇 도시에서는 대회를 볼 경기장의 사용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보시비르스크에서는 교직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반대자들이 대회가 열리고 있는 경기장 입구 바로 앞에서 팻말을 들고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반대자들이 만든 한 팻말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주의하라”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팻말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그 팻말에 나오는 “주의하라”라는 단어의 마지막 두 글자가 흐릿하게 지워졌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고, 따라서 실제로는 그 팻말에 “여호와의 증인을 돌보아 주라”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998년에 옴스크에서 순회 대회를 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반대자들의 압력을 받은 지방 당국이 대회 직전에 건물 책임자에게 증인과 맺은 임대 계약을 취소하라고 강요하였던 것입니다. 대회를 보러 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물 옆에 모여들었습니다. 겁에 질린 책임자는 자신과 건물이 해를 입을까 두려운 나머지, 모여든 사람들이 폭력을 행사하지 않도록 잘 말해 달라고 형제들에게 간청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은 그를 진정시키면서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참석자들은 차분한 태도로 기념사진을 찍고는 돌아갔습니다. 책임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대회는 2주 후에 다른 건물에서 열렸습니다. 반대자들은 대회가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어 대회를 중지시키지 못했고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에 겨우 도착하였습니다.

“별빛 아래에서” 본 대회

수화 지역 대회 중 한 대회가 2003년 8월 22일부터 24일까지 코카시아의 스타브로폴 시에서 열릴 계획이었습니다. 러시아에 있는 70개의 도시에서 참석자들이 왔습니다. 하지만 시 행정 당국에서 격렬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대회가 취소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전날 건물 책임자는 임대 계약을 취소했습니다. 하지만 8월 22일 금요일에 형제들은 한 서커스 운영진과 계약을 맺어 서커스장을 대회장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대회는 오후 3시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휴회 시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그 건물에 전기가 나가 버렸습니다. 참석자들은 참을성 있게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한 시간 후에 전기가 다시 들어와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고, 결국 밤 9시 30분이 되어서야 마쳤습니다.

둘째 날에는 정전이 된 상태에서 오전 9시 30분에 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잠시 후에는 물 공급이 끊겼습니다. 형제들은 물과 조명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대회를 계속 진행할 수 있었습니까? 바깥 날씨가 아주 화창했기 때문에, 오전 10시 50분에 대회 위원회는 서커스장의 모든 문을 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형제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커다란 거울들을 바깥 거리에 내놓아 햇빛을 반사시켜서 건물 내부와 연사에게 비치게 하였습니다. 이제 청중은 연사를 잘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얼마 있지 않아 연사는 눈이 부셔서 원고를 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다른 거울들을 사용해서 서커스장의 둥근 천장에 매달려 있는, 작은 거울들로 둘러싸인 커다란 공 모양의 장식에 햇빛을 반사시켜 보냈습니다. 서커스장에는 반짝이는 빛이 가득 차게 되었고, 이제 연사와 모든 참석자들은 프로그램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별빛 아래에서” 독특한 대회를 보게 되었는데, 참석자들은 어두컴컴한 서커스장 이곳저곳을 반짝이며 비추는 많은 빛을 그렇게 묘사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시장과 몇몇 관리들이 차를 타고 서커스장에 왔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이 계속 대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대회 참석자들의 행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항의하거나 불평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연단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증인들에게 호전적인 태도를 나타냈던 경찰서장은 자신이 본 것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마음으로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러분을 좋아하지 않지요.”

관리들은 떠났고, 서커스장에 곧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처음 이틀 동안 대회가 늦게 끝났는데도 참석자들은 마지막 기도가 있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반대가 있었음에도 참석자 수는 매일 증가하여, 금요일에는 494명, 토요일에는 535명, 일요일에는 611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마치는 기도를 하면서 이토록 놀라운 대회를 열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특별히 감사를 드렸습니다. 참석자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섬기고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겠다는 결의를 더욱 확고히 다지며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청각 장애인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다

1990년에 폴란드에서 열린 특별 대회에 참석한 수천 명의 소련 대표자들 가운데는 청각 장애인들도 있었습니다. 대회를 통해 영적으로 격려를 받은 이들은 최초의 “씨 뿌리는 사람들”로서 전파하는 일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일찍이 1992년에 이 밭 역시 수확할 때가 무르익었고 ‘수확할 것이 많’았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 9:37) 1997년에 최초의 수화 회중이 형성되었고, 러시아 도처에 수화 집단이 아주 많이 생겼습니다. 2002년에는 한 개의 수화 순회구가 형성되었는데, 면적으로 보면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순회구입니다. 2006년에 러시아에 있는 청각 장애인의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1 대 300이었는 데 반해, 청각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은 그 비율이 1 대 1000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출판물을 수화로 질 높게 번역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 러시아 지부에서는 수화 번역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수화 번역 팀에서 일하는 청각 장애인 자매 가운데 한 명인 예브도키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베델에서 봉사하며 출판물을 수화로 번역하는 일을 하는 것을 특별한 축복으로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청각 장애인을 신뢰하지 않고 열등하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조직은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청각 장애인인 우리를 신뢰하시어 우리의 언어로 진리를 전달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서 자신감을 느끼며 이러한 대가족의 일원이 된 것을 진정 기뻐합니다.”

모든 언어로 전해지는 좋은 소식

소련에서는 상업과 교육 분야에서 러시아어가 주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외에도 약 150개의 언어가 사용되었습니다. 1991년에 소련이 열다섯 개 나라로 해체된 후 그런 언어들을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특히 신생 독립국들의 경우에 그러했습니다. 계시록 14:6과 일치하게, 이 광대한 구역 내에 있는 “모든 나라와 부족과 언어와 백성”에 속한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이 기울여졌습니다. 그로 인해 수만 명의 새로운 제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하기 위해 러시아 지부가 관할하는 지역에서 사용되는 열네 개의 새로운 언어로 「파수대」를 발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을 촉진하기 위해 러시아 지부 사무실에서는 40개가 넘는 언어로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을 감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서 진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신속하게 그리고 더 깊이 감동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언어들은 대부분 러시아 연방에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베슬란과 블라디캅카스의 거리에서는 오세트어를, 바이칼 호 주변 지역에서는 몽골 어군에 속하는 부랴트어를, 순록 사육 부족과 극동의 다른 주민들에게서는 알타이 어족 터키 어파에 속하는 야쿠트어를, 코카시아에서는 약 30개의 다른 언어를 들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러시아어 다음으로 큰 언어 집단은 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타타르어인데, 특히 타타르스탄으로 알려진 지역에서 사용됩니다.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러시아어 출판물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타타르어 출판물은 기꺼이 읽어 보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왕국 소식」 35호 배부 운동 기간에, 시골 지역에 사는 한 여자는 「왕국 소식」 한 부를 받고서 타타르어 「요구」 팜플렛을 신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 자매가 팜플렛과 함께 편지를 보내자, 이 여자는 여덟 페이지에 달하는 열정적인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곧 타타르어로 된 출판물을 사용하여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남자는 타타르어로 나온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팜플렛을 받아 보고서 세상 상태를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타타르어로 된 출판물이 없었다면 이러한 결과들을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어를 사용하는 한 여자는 「왕국 소식」 35호를 받았습니다. 그는 「왕국 소식」을 다 읽고 난 뒤 더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가 살고 있던 시골 지역에는 증인들이 없었습니다. 그는 도시에 나갔다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락을 취하였고 러시아어로 된 「지식」 책과 다른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이 출판물들을 혼자 연구하고 나서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에는 관심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젭스크에서 있을 특별 대회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침례를 받으려는 마음으로 그리로 갔습니다. 하지만 침례받기를 원한다면 성서를 철저히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대회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그 여자를 영적으로 돕는 마련을 하였습니다. 모국어로 된 「왕국 소식」을 읽었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블라디캅카스에는 오세트어 회중이 하나밖에 없었고, 순회 대회나 지역 대회에서 연설을 오세트어로 통역하는 마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2002년에 처음으로 연설을 통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오세트어를 사용하는 형제들은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러시아어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모국어로 성서 소식을 듣게 되니 마음이 감동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회중이 영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많은 오세트인들이 진리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오세트어 순회구가 조직되었고, 오세트어 순회 대회가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알타이의 악타시라는 외딴 마을에 있는 집단을 방문했을 때, 그 집단에는 전도인이 몇 명 안 되었지만 약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아파트에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공개 강연을 들었는데, 지역 감독자가 봉사 강연을 하는 동안 참석자의 절반가량이 자리를 뜨는 것이었습니다. 지역 감독자는 집회가 끝난 뒤 현지 형제들에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한 연로한 알타이족 여자가 서툰 러시아어로 “당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시긴 하는데, 나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 하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다음번에 순회 감독자가 방문했을 때는 연설이 통역되었고, 자리를 뜨는 사람 없이 모두가 전체 프로그램을 즐겼습니다.

보로네시 시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000년에 중국어를 사용하는 한 봉사의 종이 비공식적으로 몇 개의 중국어 학습반을 조직했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필요를 깨닫고 중국어를 배웠으며 중국인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어는 아주 어려운 언어인데도 형제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4년 2월에 처음으로 그 도시에서 중국어 서적 연구가 조직되었습니다. 그해 4월에 처음으로 중국인 성서 연구생이 침례를 받았고, 두 달 후에 또 다른 연구생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이 서적 연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으며, 약 열다섯 건의 성서 연구가 중국어로 사회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 이 광대한 밭 전역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러시아 지부는 출판물을 더 많은 언어로 더 많이 보내 달라는 요청에 계속해서 호응하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훈련을 받다

여러 해 동안 러시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가 열리고 있습니다. 각 학급은 20명 내지 30명으로 구성되며, 대개 현지 파이오니아들은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먼 거리를 여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학교가 처음으로 개설되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로만 스키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996년에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열렸던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4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참석했지요. 많은 학생들은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고 거의 100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1997년 이래로 수화 밭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스베틀라나는 2000년 1월에 수화로 진행되는 파이오니아 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학교를 마친 후에 스베틀라나는 자신의 봉사의 질을 높이는 데 그리고 가정과 회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는 데 그 학교가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과 협조하는 일의 가치도 깨달았으며, 이제는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내가 사회하는 성서 연구의 질도 현저히 향상되었는데, 가르칠 때 예를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알료나는 극동에 있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청각 장애인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돕고 있습니다. 알료나는 이 일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수화로 진행되는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에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알료나는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열리는 수화 파이오니아 학교는 하바롭스크에서 9000킬로미터나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학교였습니다. 학교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데 8일이 걸렸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8일이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화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돕기 위한 학교 외에도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러시아에서는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가 수백 차례 열렸습니다. 파이오니아가 받은 훈련은 전파 활동과 회중에 전반적인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현재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는 마르친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1995년에 모스크바에 있는 쿤체보 회중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었습니다.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보러 갔는데, 마치 순회 대회가 열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회관에 400명쯤 되는 사람이 참석해 있었거든요. 당시 회중에는 30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10년도 채 안 되어 원래 있던 그 회중에서 열 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1996년과 1997년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순회구에서 놀라운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나는 볼고그라드 오블라스트에 있는 볼시스키 시의 한 회중을 방문하고 나서 여섯 달 뒤에 다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그사이에 그 회중에서 75명이 새로운 전도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회중이 하나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새로운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나타낸 열정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최고 80명의 사람이 고층 아파트의 한 집에서 열리는 야외 봉사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갈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계단통과 층계참에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청소년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다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국 소식에 관심을 보입니다. 스무 살 된 한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95년에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여호와의 증인들이 부모님에게 전파했지만, 부모님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더 알고 싶었습니다. 기쁘게도 친하게 지내던 급우 한 명이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나도 연구에 동참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내가 증인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였지요. 어떤 때는 연구를 못 가게 하려고 아파트에 나만 혼자 가둬 두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나는 다른 도시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집을 떠났는데 거기서 증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성서 연구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나는 마음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기 시작하였고 2005년에 지역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 즉각 보조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현재 부모님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아주 소중히 여겨 왔던 것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인 1997년에 증인들이 나에게 「깨어라!」를 한 부 주었습니다. 잡지의 이름과 내용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고 정기적으로 받아 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그 잡지를 읽는 것을 알고는 증인들이 우리 집에 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얼마 후에 사촌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했고, 2002년 초에 나는 사촌과 함께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선교인으로 봉사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에 관해 배우도록 도우려는 강한 열망을 길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촌이 설명해 주기를, 먼저 내가 담배를 끊고 생활을 하느님의 뜻과 일치시키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조언을 받아들였고 6개월 후 침례를 받았으며 즉시 보조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찾게 되어 행복합니다.”

사하의 “보배로운 것”을 찾아서

한 순회구의 구역은 아무르 오블라스트와 사하 전역을 포함합니다. 2005 봉사 연도 중에 사하의 수도인 야쿠츠크에서 처음으로 순회 대회와 특별 대회일이 열렸습니다. 그 대회들에 원주민들이 참석하는 것을 보는 것은 특히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형제들의 편의를 고려하여 순회구를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대회를 열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한 대회에서 다른 대회로 가기 위해 기차를 스물네 시간 탄 다음 차를 열다섯 시간 타고 비행기도 세 시간 타야 했습니다.

이 지역은 겨울에 몹시 추운데, 기온이 섭씨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지의 전도인들은 고층 아파트 건물에서뿐 아니라 집집으로도 전파합니다.

2005년 초에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두 개의 집단이 형성되었습니다. 한 집단은 하이르라는 마을에 있는데, 이곳은 북극권 위쪽에 있는 랍테프 해 연안에서 내륙으로 80킬로미터 들어간 곳에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500명이 살고 있으며, 그중 네 명이 증인입니다. 2004년에 그 마을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76명이 참석했습니다. 순회 감독자는 그 마을에 있는 집단을 방문하기 위해 먼저 약 900킬로미터를 비행기로 이동한 뒤, 눈 덮인 길을 따라 45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차로 여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다른 집단은 오이먀콘 마을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우스티네라라는 외딴 마을에 형성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겨울에 기온이 때때로 섭씨 영하 60도까지 내려갑니다. 이 집단의 전도인들은 지난해에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두 대의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편도로 약 20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여행해야 했는데, 그들이 통과한 대부분의 지역은 섭씨 영하 50도의 기온에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지역이었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고도 4000미터 상공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경험에 대해 보고하였습니다. “「깨어 있으십시오!」 팜플렛을 배부하는 운동 기간에 우리 순회구에서 일련의 대회가 열렸습니다. 나는 지역 감독자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다음 대회로 가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깨어 있으십시오!」 팜플렛이 다 떨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승무원에게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팜플렛을 전했습니다. 그 여승무원은 이미 얼마의 성서 출판물을 받았다고 하면서, 놀랍게도 「깨어 있으십시오!」 팜플렛 한 부를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부지런히 전파 활동을 수행한 것을 보고 참으로 기뻤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부조종사가 지나갔습니다. 그는 관심을 보이면서 대화에 참여하였는데, 우리는 거의 비행하는 내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대화에 흡족해하며 조종실에 있는 운항 승무원에게 주려고 몇 부의 잡지를 받아 갔습니다.”

사할린에서 전해지는 좋은 소식

일본의 최북단 섬 홋카이도 북쪽에 있는 사할린 섬에 증인이 처음으로 도착한 때는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사할린 지역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블라디보스토크 형제들은 세르게이 사긴에게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여 그 섬으로 이주해서 그곳 주민들에게 전파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세르게이는 항구에서 일하면서 다른 노동자들과 성서적인 주제로 대화를 시작하려고 노력을 기울였고, 금세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어쩔 수 없이 그 섬을 떠나야 했지만, 진리의 씨는 결국 결실을 맺었습니다.

1989년과 1990년에 폴란드에서 열린 대회들에서는 러시아에 있는 많은 증인들이 자신의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여 더 크게 필요한 곳으로 이주하도록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1990년에 세르게이 아베리니는 아내 갈리나와 함께 극동에 있는 하바롭스크에서 사할린의 코르사코프로 이주하였습니다. 몇 달 뒤에 두 명의 파이오니아와 몇몇 전도인들이 유즈노사할린스크로 이주하였는데, 그곳에는 증인이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파벨 시불스키의 아들인 파벨 시불스키는 이주한 두 명의 파이오니아 중 한 명입니다. 현재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는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 도착해서 나는 한 형제와 함께 호텔에 머물렀습니다. 기거할 곳을 바로 찾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호텔 옆에 있는 집에서부터 호별 방문 봉사를 시작했는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셋방을 놓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성서 토의를 어디서 계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 사람들도 만났지만, 우리가 호텔에서 지내고 있어서 숙소를 구하는 대로 초대하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일자리와 살 곳을 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자리와 아파트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집주인이 우리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머물라고 하였습니다. 방세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는 요리까지 해 주어서 우리는 봉사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곧 우리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고 서적 연구 집단들도 조직했습니다. 두 달 후에는 셋집을 얻어 그곳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회중이 커짐에 따라 많은 새로운 전도인들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파이오니아 정신을 나타내어 섬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여 그곳 주민들에게 진리를 널리 전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빠르게 성장하는 회중이 열심히 수행하는 봉사를 풍성하게 축복하셨고, 1993년까지 3년 동안 원래의 한 회중에서 여덟 개의 새로운 회중이 생겼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전도인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또는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고자 이 섬을 떠났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사할린에서 기울인 노력에는 성장이 뒤따랐습니다. 현재 멋진 왕국회관이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섬에는 아홉 개의 회중과 네 개의 집단이 한 순회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반대자들이 많은데도 문이 열리다

1세기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활동으로 인도하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반대자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첫째 16:9)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났는데도 반대자들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모스크바 검찰청은 네 차례나 증인에 대한 형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종교적 편협을 조장하고, 가정을 파괴하며, 반국가 활동에 참여하고, 다른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혐의로 고발당했습니다. 그러한 고발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자, 1998년에는 사실무근인 동일한 고발을 근거로 증인들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약 1년 후에 법무부는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이 발행하는 출판물이 사람들에게 종교적 증오심을 부추기거나 가정을 파괴하거나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하였으며, 러시아 여호와의 증인 운영 본부를 재등록해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청에서는 또다시 동일한 혐의로 고소하였습니다!

일부 종교학 교수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앙이 전적으로 성서에 근거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헤르젠 국립 교육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인 N. S. 고르디옌코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문가들이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를 가지고 증인들을 비난할 때 그들이 실은 성서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시 법원은 여호와의 증인 모스크바 공동체의 법적 지위를 박탈한다고 판결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판결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라는 성서의 명령을 이행하는 우리 형제들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스크바 시민들이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모든 모스크바 주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것입니다. 따라서 모스크바에 있는 증인들은 전파하고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계속 이행할 것입니다. (마태 28:19, 20) 현재 유럽 인권 재판소에서 모스크바 시 법원이 내린 판결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1998년 9월에 여호와의 증인 모스크바 공동체를 와해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심리가 시작되었을 때, 모스크바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이 43개 있었습니다. 8년 후에는 93개의 회중이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54:17) 2007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한때 올림픽이 열렸던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지역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대회에 2만 9040명이 참석하였고 65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러시아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크게 되다

말라기 1:11에 기록되어 있듯이 여호와께서는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 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일 새로이 해가 뜨면 이 광대한 나라에서 양 같은 사람을 더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됩니다. 러시아에서는 지난 봉사 연도에만 7000명이 넘는 사람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러시아어 성서에서 “차르들의 차르”로 묘사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 자신의 신민들과 함께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마태 24:14; 계시 19:16.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 둘째 3:10) 따라서 러시아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은 남아 있는 시간을 활용하여 모든 나라와 부족과 언어와 백성 가운데서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있습니다.

[각주]

^ 44항 오블라스트는 행정 구역 단위이다.

^ 353항 「깨어라!」 1999년 6월 22일호에 실린 “알타이족—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들” 기사 참조.

[110면 삽입]

“당신들의 기록에 조금이라도 책잡힐 것이 있었다면, 만약 단 한 방울이라도 피를 흘렸다면, 당신들을 모두 쏴 죽였을 거요”

[128면 삽입]

“우리가 당신들을 풀어 주면 많은 소련 국민이 당신들 편이 될 거요. 그러니 당신들이 국가에 큰 위협이 된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소”

[219면 삽입]

“여러분은 마치 새 같거든요. 순식간에 와서 출판물이 담긴 상자를 금세 가져가 버리지요”

[69면 네모와 삽화]

시베리아는 어떤 곳인가?

시베리아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겨울에는 몹시 추운 황량하고 거친 미개척지가 떠오르는가? 소련 정부와 마찰을 일으킨 사람들이 유배되는 삭막한 땅이 연상되는가?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시베리아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시베리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나라인 캐나다보다도 넓은 거대한 지역이다. 면적이 13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오늘날의 시베리아는 우랄 산맥에서부터 동쪽으로 태평양까지 그리고 몽골과 중국에서부터 북쪽으로 북극해까지 걸쳐 있다. 이 지역에는 목재, 석유, 천연가스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시베리아에는 산맥, 평원, 습지, 호수, 큰 강들이 있다.

약 150년 동안 시베리아는 투옥과 강제 노동과 유배의 장소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곳에 있는 수용소들로 보내어 노동을 하게 하였다. 1949년과 1951년에는 몰도바와 발트 해 연안국들과 우크라이나에서 약 900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72, 73면 네모와 삽화]

개요

국토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는 동서간 길이가 7700킬로미터, 남북간 길이가 3000킬로미터이며, 총면적은 1707만 54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열한 개의 시간대가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넓은 러시아는 북반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러시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과 가장 긴 강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가 있다.

주민

인구의 80퍼센트가 러시아인이다. 하지만 러시아에 사는 다른 민족 집단도 70개가 넘는다. 그중에는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있고 100만 명이 넘는 민족도 있다.

언어

러시아어가 공용어이며 거의 모든 국민이 러시아어를 한다. 그 외에도 100여 가지 언어가 사용되는데, 그중에는 약 100만 명이 모국어로 사용하는 언어들도 있다.

경제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 및 천연가스 생산국 중 하나이다. 그 외의 주요 산업으로는 임업, 광업, 각종 제조업 등이 있다.

식품

고기, 생선, 양배추 또는 커드(응고된 우유)를 재료로 만든 영양가 높은 요리를 호밀 흑빵, 감자, 메밀과 함께 먹는다. 러시아 요리에는 지방과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 있는데, 이러한 음식으로 길고 추운 겨울을 견디는 데 필요한 열량을 얻는다. 전형적인 식사에는 수프에 넣거나 사워크림을 얹은 펠메니(고기만두)나 양배추, 고기, 치즈 또는 감자로 속을 채운 피로시키(작은 만두)가 포함될 수 있다. 보르시라고 하는 비트 수프와 라고 하는 양배추 수프가 유명하다.

기후

여름은 덥고 겨울은 어둡고 춥다. 봄가을이 금세 지나가 버려 여름과 겨울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러시아 지도를 보려면 116면과 167면 참조)

[삽화]

크렘린

엘브루스 산, 카바르디노발카리야

큰곰, 캄차카 반도

[92, 93면 네모]

마음과 정신을 빼앗기 위한 공격

소련 정부가 증인을 몰살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정부의 목표는 설득을 하든 강제로 하든 증인들을 전향시켜 소비에트 이념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목표 달성을 위해 첩보 활동과 대내 안보를 담당하는 조직인 KGB를 이용하였다. KGB가 사용한 일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수색: 증인 가정들은 수색을 당하였는데, 심지어 한밤중에도 그러하였다. 잦은 수색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거주지를 옮겨야 했던 가족들도 있다.

염탐: 전화를 도청하고 편지를 중간에 가로챘으며, 심지어 형제들의 집에 도청 장치를 몰래 설치하기도 하였다.

벌금 및 집회 방해: 나라 전역에서 지방 당국자들은 형제들이 집회를 보는 장소를 추적하였다. 참석자 전원에게 벌금이 부과되었다. 흔히 벌금은 평균 월급의 절반이 넘었다.

매수 및 협박: KGB는 협조하는 대가로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아파트와 자동차를 주겠다고 일부 증인들에게 약속하였다. 많은 경우, 형제들은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면 노동 수용소에서 여러 해 동안 형을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선전: 영화와 텔레비전과 신문은 증인을 사회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로 묘사하였다. 교도소와 노동 수용소에서 열린 강연회들에서는 형제들이 성서를 정치 운동을 위한 구실로 삼고 있을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한 선전으로 인해 차별을 받게 되었다. 교사들은 어린 증인 학생들에게 낮은 점수를 주었고, 고용주들은 형제들이 마땅히 받게 되어 있는 혜택이나 휴가를 주지 않았다.

잠입: KGB 요원들은 왕국 소식에 관심이 있는 척하면서 연구를 하고 침례를 받았다. 그중 일부는 조직 내에서 책임 있는 위치를 맡기도 하였다. 그들의 목표는 증인들 사이에 의심과 분열을 일으켜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는 것이었다.

유배: 그 나라의 외딴 지역으로 증인들을 보냈다. 그곳에서 형제들은 하루 열두 시간씩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 연명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겨울에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여름에는 모기와 등에를 견뎌야 하였다.

몰수 및 격리: 재산, 집, 소유물이 몰수되었다. 자녀들을 데려가 증인 부모와 떼어 놓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조롱 및 구타: 자매들을 비롯하여 많은 증인들이 모욕과 조롱을 당하였다. 극도로 잔인하게 구타를 당한 증인들도 있었다.

투옥: 증인들이 믿음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증인들을 형제들과 격리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노동 수용소: 증인들은 수용소에서 체력이 완전히 소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종종 어마어마하게 큰 나무의 그루터기를 파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제들은 탄광에서 일하기도 하고 길을 내거나 철로를 놓는 일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수용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족과 격리되어 막사에서 생활하였다.

[96, 97면 네모와 삽화]

나는 사형 선고를 두 번 받았다

표트르 크리보쿨스키

출생 1922년

침례 1956년

약력 진리를 배우기 전에 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교도소와 수용소에서 22년간 복역하였고 1998년에 사망하였다.

폴란드 증인들이 1940년에 우크라이나의 내가 살던 지역에서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름부음받은 형제인 코르네이가 나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그가 말해 준 내용이 하느님에 관한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1942년에 독일군이 진군해 들어오면서 소련군은 내가 살던 지역에서 철수하였습니다. 무정부 상태가 된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나에게 독일과 소련을 대항하는 싸움에 가담하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내가 거절하자 그들은 의식을 잃을 때까지 나를 구타하고는 길거리에 버려두었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다시 와서 미사 의식을 행하는 곳으로 나를 데려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위해 싸우겠느냐고 또다시 물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큰 소리로 “나는 오로지 여호와 하느님만 섬길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군인들 중 한 명이 나를 쏘라고 명령하자, 다른 사람이 총을 붙잡으면서 “쏘지 마! 아직 쓸모가 있을 거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또 다른 남자는 화가 나서 나를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일주일 내에 자신이 직접 나를 쏴 죽이겠다고 하였지만, 며칠 후에 정작 목숨을 잃은 것은 그 남자였습니다.

1944년 3월에 소련군이 우리 지역으로 다시 돌아왔고, 군인들은 나를 포함하여 모든 남자를 붙잡아 갔습니다. 이번에는 소련군에 군인들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집결시켜 놓은 장소에서, 나는 내게 진리를 전해 주었던 형제인 코르네이를 만났습니다. 그곳에는 70명의 형제들이 더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과 떨어져 서서 서로를 격려하였습니다. 한 장교가 우리에게 와서 다른 모든 사람과 떨어져 서 있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코르네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며 무기를 들 수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군인들은 즉시 그를 끌고 갔으며 그가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로는 그를 결코 다시 보지 못했습니다. 군인들은 우리도 코르네이처럼 모두 총살을 당할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협박하기 시작하였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군대에서 복무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자 사병 세 명과 장교 한 명이 나를 숲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지휘관은 군사 법정에서 받은 선고문을 낭독하였습니다. “군복을 입고 무기 들기를 거부하였으므로 총살형에 처한다.” 나는 여호와께 진지하게 기도를 드렸으며, 내가 침례를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그분이 나의 봉사를 받아 주실지 궁금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갑자기 “적을 향해 쏴!” 하는 명령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허공에 총을 쐈습니다. 그러고는 그 장교가 나를 구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10년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고 러시아 한가운데 있는 고르키 오블라스트의 노동 수용소 중 한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1956년에 석방되었고 후에 충실한 증인인 레기나와 결혼하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지낸 지 6개월 되었을 때, 나는 예기치 않게 체포되어 또다시 10년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마침내 석방되었을 때, 한 장교는 내게 “소련 땅에 당신이 발붙일 곳은 없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렸습니다. 땅은 여호와께 속해 있으며 그분이 땅에서 누가 영원히 살 것인지를 결정하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참으로 행복합니다!—시 37:18.

[104, 105면 네모와 삽화]

“아가씨들, 여기 혹시 여호와의 증인이 있나요?”

예브게니야 리바크

출생 1928년

침례 1946년

약력 우크라이나에서 출생하였으며, 강제로 독일에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진리를 배웠다. 러시아에서 여전히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다.

어느 일요일 날, 창문으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렸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나는 증인들의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나는 독일인들이 신앙 때문에 같은 독일인들을 박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함께 독일에 보내졌던 우크라이나인 친구들은 내가 독일인들과 어울린다며 나를 미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번은 친구 한 명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때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전에 친구였던 여자 아이들은 나를 비웃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1945년에 자유롭게 되어 우크라이나로 돌아왔습니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제정신이 아니란다. 성상을 버리더니만 이제는 다른 신을 믿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둘만 있게 되자 성서를 꺼내어 하느님께서 우상 숭배를 미워하신다는 부분을 읽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저도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엄마!”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둘 다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머니는 봉사에 매우 열심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형제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집단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열심에 나 역시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는 1950년에 종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재판에서 10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우리 다섯 명의 자매들은 시베리아의 우솔리예시비르스코예 시로 보내졌습니다. 우리는 1951년 4월부터 철도를 놓는 일을 하였습니다. 무거운 철도 침목을 어깨에 메고 날랐는데, 두 사람이 하나씩 날랐습니다. 또한 한 개에 320킬로그램이 나가는 10미터짜리 철제 레일들을 우리 손으로 직접 날라 설치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진맥진하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에 가고 있는데 수감자를 가득 태운 열차가 우리 곁에 멈추어 섰습니다. 한 남자가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아가씨들, 여기 혹시 여호와의 증인이 있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자매 다섯 명이 있어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 수감자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배되어 가는 우리의 소중한 형제 자매들이었던 것입니다. 열차가 정차해 있는 동안, 그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떻게 해서 유배되었는지를 흥분된 어조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형제들이 직접 지은 시들을 아이들이 읊어 주었습니다. 군인들조차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서로 교제를 나누고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솔리예시비르스코예에서 안가르스크 근처의 큰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는 22명의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 자매들은 전파할 구역을 비롯하여 모든 것을 이미 조직해 놓았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영적으로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108, 109면 네모와 삽화]

나는 여러 번 “제5구역”에 갔다

니콜라이 칼리바바

출생 1935년

침례 1957년

약력 1949년에 시베리아의 쿠르간 오블라스트로 유배되었다.

우리는 소련에 있는 모든 증인들이 감시를 당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생활하기가 힘들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1959년 4월에 종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어떤 형제들에 대한 정보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모든 것을 부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수사관은 형제들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그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아무도 알아볼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남동생 사진을 보여 주면서 “자네 동생이 맞지?”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 애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뭐라 말하기가 어렵네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사관은 내 사진을 보여 주면서 “이건 자네 맞나?”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저 같기는 한데, 저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하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한 감방에서 두 달 넘게 갇혀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여호와의 사랑의 친절에 대해 감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구 하나를 기억해 낸 다음 혼자서 그 성구를 검토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소리를 내지 않고 왕국 노래를 하나 불렀는데, 감방에서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성서 주제에 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이송된 수용소에는 이미 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수용소 환경이 아주 좋지 않았고 이야기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매우 자주 격리 수용동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형제들이 제5구역이라고 부르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제5구역에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수감자들은 하루에 고작 빵 200그램을 배급받았습니다. 나는 두꺼운 철판을 덧대어 놓은 널빤지 위에서 잠을 잤습니다. 창유리는 깨어져 있었고 모기도 많았습니다. 나는 내 신발을 베개로 사용하였습니다.

대개의 경우, 형제들은 각자 나름대로 출판물을 숨길 곳을 마련하였습니다. 나는 바닥을 쓸 때 사용하던 빗자루에 출판물을 숨기기로 하였습니다. 수색을 하는 담당관은 주의 깊이 작은 것까지 샅샅이 확인했지만 빗자루 속까지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출판물을 벽에 숨기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조직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시며 자신의 충실한 종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1949년에 우리 가족이 유배되기 전부터, 아버지는 여호와께서 상황을 조정하셔서 머나먼 시베리아에 있는 사람들도 진리를 듣게 할 수 있으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 당국자들 스스로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진실한 사람들이 진리를 알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변화의 물결이 나라를 휩쓸던 시기에 형제들은 그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1989년에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폴란드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는 기도가 끝난 후에도 우리는 계속 서서 한참 동안 박수를 쳤습니다. 참으로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어려움과 문제를 겪는 데 익숙해져 있었지만, 우리는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폴란드에서 소중한 형제들과 헤어지려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졌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도 없었지만, 멈추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112, 113면 네모와 삽화]

좋은 소식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함

표트르 파르체이

출생 1926년

침례 1946년

약력 1943년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으며 나치 강제 수용소 두 곳과 러시아의 노동 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 후에 금지령 기간에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다.

나치 독일에 있을 때 성서의 기본 가르침들을 배우게 된 나는 곧바로 내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그러한 점들을 알려 주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순결한 숭배에 참여하였습니다. 1943년에 어떤 사제가 나를 게슈타포에 고발하였고, 게슈타포는 나를 체포하여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나는 폴란드의 마이다네크 말살 수용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과의 교제는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수용소에 있을 때, 전파하려는 우리의 결의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나타냈고 우리는 여호와의 왕국에 관해 증거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한번은 두 줄짜리 채찍으로 스물다섯 대를 맞은 적도 있었습니다. 나는 일어서서 독일어로 “당케 쇤!”(“감사합니다!”)이라고 큰 소리로 말하였습니다. 한 독일인은 “거 참, 질긴 친구로구먼! 때리니까 도리어 고맙다고 하잖아!” 하고 소리쳤습니다. 채찍으로 맞은 탓에 등이 시퍼렇게 멍들었습니다.

일이 무척 고되어서 우리는 탈진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화장터에서 시체를 소각하였는데, 밤이고 낮이고 화장터가 가동되었습니다. 머지않아 나도 화장터 철판 위에서 소각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코 수용소에서 살아 나가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부상을 입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교적 건강한 모든 사람은 강제 노동을 해야 하였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수용소들로 가게 된 것입니다. 2주 뒤에 나는 라벤스브뤼크에 있는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독일인들이 우리 모두를 곧 총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그 후 우리는 경비병들이 도망가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수감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나는 오스트리아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군대에 입대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나는 즉시 거절하면서 내가 신앙 때문에 강제 수용소에서 복역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나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당시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속해 있었습니다. 나는 1949년에 예카테리나와 결혼하였고 아내는 충실한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나는 1958년에 체포되어 모르도바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석방된 후에는 성서 출판물을 인쇄하는 일에 참여하였습니다. 1986년에 한번은 1200페이지 분량을 인쇄하느라 밤새도록 일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쇄한 출판물을 마루며 침대며 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KGB 요원 한 명이 찾아와서는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아내는 그가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어디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느냐고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옥외에 있는 부엌에서 이야기하자고 하였습니다. 그가 집에 들어왔더라면 우리는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우리가 한 헌신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좋은 소식을 위하여 모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녀 여섯 명과 손자 손녀 23명 그리고 증손녀 두 명이 여호와를 충실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계속 걷고 있는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122면 네모]

독방 감금

소련의 형 집행 방법 중에서, 종교 서적을 자발적으로 넘겨주기를 거부하는 등의 위법 행위를 처벌하는 데 흔히 사용된 방법은 독방에 감금하는 것이었다. 수감자들은 면으로 된 해진 옷을 지급받고 감방에 감금되었다.

전형적인 감방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크기는 약 3제곱미터로 작았다. 어둡고 축축하고 지저분한 데다가 몹시 추웠는데, 겨울에 특히 그러하였다. 콘크리트 벽은 표면이 매우 거칠었다. 1미터 두께의 벽에 파묻혀 있다시피 한 작은 창문이 한 개 있었다. 창유리는 더러 깨져 있었다. 어느 정도 빛을 비춰 주는 전등이 있기는 하였지만 벽의 움푹 파인 곳에 설치되었고 작은 구멍들을 뚫어 놓은 철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콘크리트 바닥을 제외하면 앉을 수 있는 곳이라고는 벽에 벤치처럼 튀어나와 있는 좁다란 부분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도저히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리와 등 근육이 얼마 안 있어 피로와 통증을 느끼게 되고 울퉁불퉁한 벽 때문에 등에 상처가 나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교도관들은 깔고 자도록 납작한 나무 상자를 넣어 주곤 하였다. 상자는 쇳조각으로 보강되어 있었다. 금속과 나무판자로 된 그런 상자 위에 누울 수는 있었지만 한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담요도 없었다. 대개 독방에 있는 수감자들은 하루에 한 번씩 300그램의 빵을 배급받았고 사흘에 한 번씩 멀건 수프를 받았다.

변기라고 해 봐야 바닥에 묻어 둔 파이프가 고작이었는데, 거기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났다. 일부 감방들에는 하수도에서 나는 악취를 감방으로 불어 넣는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수감자의 사기를 꺾고 처벌 수위를 높이고자 담당관들이 송풍기를 트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24, 125면 네모와 삽화]

모르도바 제1수용소

총 600명이 수감되어 있던 이 수용소에서 1959년부터 1966년 사이에 얼마간 복역한 형제들의 수는 450명이 넘는다. 모르도바 지역의 열아홉 개 강제 노동 수용소 중 한 곳인 이 수용소에는 높이가 거의 3미터나 되는 전기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 주위로 철조망이 열세 개나 더 둘러쳐져 있었다. 수용소 지역 주변의 땅은 늘 잘 골라 놓아 도망하는 사람의 발자국이 드러나게끔 하였다.

당국자들은 증인들을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시켜서 신체적으로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복종시키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수용소 내에서 신권 활동들을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수용소 자체가 하나의 순회구가 되었으며, 순회 감독자도 있었다. 순회구는 28개 서적 연구 집단으로 구성된 네 회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모두가 영적으로 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돕기 위해 형제들은 집회를 일주일에 일곱 번 보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성서가 한 권밖에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회중별 성서 읽기 계획을 짰다. 형제들은 처음으로 기회가 생기자마자 성서를 복사하기 시작하였다. 성서의 책 하나하나를 각각의 공책에 베껴 써서 가지고 있었고, 원본은 안전한 장소에 조심스럽게 숨겨 두었다. 이렇게 하여 형제들은 계획에 따라 성서 읽기를 할 수 있었다. 「파수대」 연구도 조직되었다. 남편을 보러 오는 자매들이 축소 복사한 잡지를 수용소로 가져왔는데, 잡지를 입속이나 구두 굽 속에 넣거나 머리카락을 땋을 때 얇은 종이를 넣어서 가져왔다. 많은 형제들은 출판물을 베꼈다는 이유로 하루 내지 15일 동안 독방에 감금되었다.

독방은 다른 수감자들과 격리되어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책임자들은 증인들이 그곳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읽지 못하도록 주의 깊이 감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형제들은 독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공급할 방법들을 생각해 냈다. 한 형제가 건물 지붕 위로 기어올라 가곤 하였는데, 거기서는 독방에 감금된 사람들이 걷기 운동을 하는 마당이 내려다보였다. 그 형제는 성구들을 적어 둔 작은 종이들을 미리 준비하여 그 종이들을 구겨서 지름이 1센티미터쯤 되는 작은 공 모양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기다란 관의 한쪽 끝에 넣고 아래쪽에서 걷기 운동을 하는 증인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불었다. 그러면 그 증인은 몸을 구부려 신발 끈을 매는 척하면서 들키지 않고 영적 양식을 줍곤 하였다.

수감자들의 아침과 저녁 식사는 면실유를 조금 섞은 죽이었다. 점심은 멀건 보르시나 다른 수프와 함께 간단한 식사가 나왔다. 수감자들이 먹은 빵은 부츠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천인 펠트처럼 생겼다! 이반 미킷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그 수용소에서 7년을 지냈는데, 우리는 거의 항상 심한 위통에 시달렸습니다.”

형제들은 믿음 안에 굳건히 머물렀다. 하느님의 충성스러운 종들을 격리시킨다 해도 그들이 영적 균형을 잃게 만들 수는 없었으며,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계속 나타냈다.—마태 22:37-39.

[131, 132면 네모와 삽화]

“왜 우시나요?” 하고 내게 물었다

폴리나 굿시미트

출생 1922년

침례 1962년

약력 빅토르 굿시미트와 결혼하였다. 수감 중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얼마나 친절한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충성을 다해 공산주의 이념을 믿고 지지하였습니다. 그런데 1944년 5월에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체포하여 보르쿠타에 있는 노동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체포된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3년을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착오가 있었으려니 생각하고는 풀려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소비에트 체제를 반대하는 말을 하였다는 혐의로 수용소에서 10년을 복역하라는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의료 분야에 경력이 있었던 나는 수감되어 있던 처음 몇 년간 수용소 병원에서 일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인타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은 규율이 훨씬 엄격하였습니다. 분노, 무례, 부도덕, 냉담, 절망 등이 수감자들의 분위기를 지배하였습니다. 그 수용소의 모든 수감자들이 전부 총살형을 당하거나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가뜩이나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더 나빠졌습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이 이상해진 수감자들도 있었습니다. 수감자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증오하였는데, 수용소에 밀고자가 대단히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외시켰으며 각자 나름대로 적응해 나갔습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태도가 만연하였습니다.

40명가량 되는 여자 수감자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은 나머지 사람들과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들은 늘 함께 모여 있었고 어찌나 예쁘고 깔끔하며 친절하고 우호적인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심지어 나이가 어린 여자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여호와의 증인 신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감자들이 그들을 대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비열하고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증인들의 행실에 탄복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특히 그들이 서로에게 사랑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탄복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증인이 병이 들면 다른 증인들은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수용소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집단이 매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놀랐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서로 정겨운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한번은 너무 침울해진 나머지 자리에 앉아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젊은 증인이 내게 와서 “폴리나, 왜 우시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살고 싶지가 않아서 그래요” 하고 내가 대답했습니다.

리디야 니쿨리나라는 그 증인은 나를 위로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내게 인생의 목적과 하느님께서 인간이 겪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방법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나는 1954년 7월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여호와의 증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나는 행복한 마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140, 141면 네모와 삽화]

군사 공학자에서 좋은 소식의 전파자로

블라디미르 니콜라옙스키

출생 1907년

침례 1955년

약력 여러 수용소와 교도소로 256번이나 이송되었다. 1999년에 사망하였다.

나는 1932년에 모스크바 통신 공학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1941년까지 모스크바의 한 대학에서 공학자이자 수석 설계사로 일하였습니다. 군함용 특별 장비들도 직접 설계하였지요. 전쟁 기간 중에 수감되어 결국 카자흐스탄 중부의 켄기르라는 마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 있던 일단의 증인들이 내 주의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과 달랐습니다. 세 개의 수용동에 1만 4000명 정도의 수감자들이 있었는데 증인들은 80명가량 되었습니다. 1954년에 켄기르에서 소요가 일어났을 때 증인들과 다른 수감자들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폭동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더러 폭동을 준비하는 일에 참여하기조차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우리만큼 침착했으며 다른 수감자들에게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러한 행실에 깊은 인상을 받은 나는 그들의 신앙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얼마 후, 나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수용소에서 믿음의 시험에 직면했는데, 특히 군인들이 탱크를 몰고 소요를 진압했을 때 그러하였습니다.

한번은 나와 면담을 하려고 모스크바에서 장군 두 사람이 특별히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하게나, 블라디미르. 자네는 군사 공학자이자 설계사가 아닌가. 조국이 자네를 필요로 하고 있네. 예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해 주게나.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려서 뭘 하자는 겐가?”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인간이 지닌 재능은 모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지요. 그분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에 의한 천년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인류는 완전해지고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그 장군들과 진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그들은 내게 이전에 하던 일을 다시 해 달라고 여러 번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적 형제들과 함께 수용소에 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1955년에 내가 받은 선고가 무효 처리되었습니다. 나는 군대와 관련되어 있지 않은 건축 사무소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의 씨를 많이 뿌리기 위해 노력하던 중에 어떤 공학자의 가족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를 비롯한 그의 가족 모두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열심 있는 전파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KGB가 나를 감시하고 있었고, 그들은 내가 살던 아파트를 수색하여 성서 출판물을 찾아냈습니다. 나는 법정에서 25년 형을 선고받은 뒤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 시에 있는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나는 여러 수용소와 교도소로 매우 자주 이송되었습니다. 한번은 살면서 얼마나 많이 이송을 다녔는지 계산해 보니 256번이나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7, 148면 네모와 삽화]

큰 짐 가방들이 필요했다

나데즈다 야로시

출생 1926년

침례 1957년

약력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에서 진리를 배웠다. 소련으로 돌아온 후, 여러 해 동안 출판물 연락원으로 일하였다. 현재 코카시아에 살고 있다.

강제 수용소에 가게 되었던 1943년 당시, 나는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상 낙원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확고한 희망을 품고 고향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게 되어 너무나 행복했지요! 나는 영적으로 힘을 얻기 위해 자매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KGB가 편지를 가로챘고, 얼마 있지 않아 나는 15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47년 11월에 콜리마에 있는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지내는 동안 다른 증인들은 만나 보지 못하였지요. 여호와께서 도와주신 덕분에 전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수감자 중 한 사람이었던 예브도키야가 성서에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영적인 면에서뿐 아니라 감정적인 면에서도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지요. 나는 성서 지식이 매우 부족했지만, 여호와께 계속 충절을 지키는 데에는 이미 배운 내용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나는 석방된 지 1년 후인 1957년 초에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의 수예티하로 이주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고 후대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일자리와 아파트도 구할 수 있게 도와주었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은 내게 신권적인 활동들을 수행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던 나는 커다란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조직에서 책임들을 이행할 준비가 된 것이었지요. 내가 맡은 책임 가운데는 성서 출판물과 서신을 배달하는 일이 포함되었습니다.

출판물은 시베리아와 러시아 중부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서부 전역으로 배달되어야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서부로 출판물을 배달하려면 큰 짐 가방들이 필요하였지요. 한번은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역에서 가방의 잠금장치가 갑자기 열리는 바람에 출판물이 몽땅 쏟아져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허둥대지 않고 침착한 태도로 출판물을 주워 담으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무튼 모든 것을 다 챙겨 넣고는 황급히 역을 빠져나왔습니다. 다행히도 눈치 챈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출판물을 잔뜩 넣은 가방 두 개를 가지고 우크라이나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시베리아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열차 객실의 아래층 침대 밑에 가방 하나를 놓아 두었지요. 얼마 후에 KGB 요원인 남자 승객 두 명이 그 객실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증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증인들이 “출판물을 배부하고 소련을 반대하는 활동을 선동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실, 그들은 출판물 위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출판물을 배달하는 일을 하든 다른 임무들을 수행하든, 나는 언제고 체포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상황들을 겪으면서 모든 일에서 여호와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158, 159면 네모와 삽화]

‘너희네 사람들은 전혀 다르더구나’

지나이다 코지레바

출생 1919년

침례 1958년

약력 여러 수용소에서 장기간 복역했으며 2002년에 사망하였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하느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내게 진실한 관심을 나타내 주던 여자 친구가 1942년에 나를 러시아 정교회에 속한 교회로 데려갔는데, 그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지옥에 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오세트인이라는 말을 들은 사제는 내게 세례를 주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돈을 좀 주자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의식을 거행해 주었습니다. 나는 진리를 찾고 싶어서 재림교와 오순절교에도 가 보고 침례교에도 다녀 보았습니다. 당국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내게 강제 노동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나는 노동 수용소에서 증인들을 만났고 금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1952년에 석방된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8년 12월의 어느 이른 아침, 요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군인들이 갑자기 밀려들어 와서는 집을 수색하기 시작하였고 그러는 동안 군인 두 사람이 나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감시하였습니다. 잠이 깬 아버지는 가족에게 특히 아들들에게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 집에는 아들이 다섯 있었고 나는 외동딸이었습니다. 군인들이 모든 방과 다락을 샅샅이 뒤지는 것을 본 아버지는 내 종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소총을 집어 들고는 “미국의 첩자 같으니라고!”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버지는 내게 총을 쏘려고 하였지만 군인들이 총을 빼앗았습니다. 친아버지가 내게 총을 겨누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요. 수색을 마친 군인들은 나를 덮개가 씌워진 트럭에 태워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하였습니다. 나는 종교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는 형기를 다 채우기 전인 1965년 12월에 석방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나를 보고 반가워하였지만 아버지는 내가 집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KGB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억지로 나를 그 집에 거주자로 등록시키게 하고 심지어는 내가 일자리를 구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전과 다름없이 나를 냉랭하게 대했지만, 얼마 후에 태도가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보러 온 형제 자매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친형제들은 일을 하지 않았으며 술을 많이 마셨고 호전적이었습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너희네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더구나. 집회를 볼 수 있도록 네게 방을 주마”라고 말하였습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커다란 방을 마련해 주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염려 말거라. 너희들이 모두 함께 모여 있는 동안에 내가 망을 보면서 아무도 들여보내지 않으마.” 그리고 정말 그 말대로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가 대쪽 같은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바로 우리 집에서 여호와와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그리스도인 집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많게는 30명까지 집회에 참석했는데, 당시 오세티아에 증인들이 그만큼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거리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망을 보고 있는 모습을 창문으로 지켜보노라면 기쁨이 샘솟았습니다. 현재 오세티아에서는 약 2600명의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여호와의 왕국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이사야 60:22.

[162, 163면 네모와 삽화]

수용소에 있는 유일한 증인이 되다

콘스탄틴 스크립추크

출생 1922년

침례 1956년

약력 1953년에 노동 수용소에서 진리를 배웠고 1956년에 그곳에서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의 증인으로 25년간 계속 수감 생활을 하였다. 2003년에 사망하였다.

나는 1953년 초에 수용소에서 바실리라고 하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그곳에 오게 되었다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신앙 때문에 수감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 문제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 날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점차 성서가 하느님이 주신 책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195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해 말에 담당관들이 수색을 하였고 우리가 다량의 성서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의 1년간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나는 종교 활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1958년에 법정에서 2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수용소에서 이미 5년 반을 지낸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단 한 번도 자유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도합 28년 6개월을 복역했습니다.

1962년 4월에 법정에서는 내가 “극히 위험한 범죄자”라고 선언하였고, 나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1년을 보냈습니다. 그런 수용소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고 할 만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인당 하루 식품 배급액은 11코페이카였는데, 이것은 당시에 빵 한 개를 사기에도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나는 키가 192센티미터나 되었지만 몸무게는 겨우 59킬로그램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허물이 벗겨졌습니다.

나는 건축 기술이 좋았기 때문에 종종 관리들이 사는 아파트에 수리를 하러 갔습니다. 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굳이 귀중품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관리의 아내는 자기가 사는 아파트로 내가 일하러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여섯 살 된 자기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가지 않았습니다. “극히 위험한 범죄자”가 여섯 살짜리 꼬마와 단둘이서 하루 종일 아파트에 있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극히 위험한” 사람이기는커녕 범죄자로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있는 수용소에 있던 형제들이 모두 석방되었습니다. 1974년에 그 수용소에는 증인이 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1981년 8월에 석방될 때까지 7년을 거기에서 더 보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 내게 영적 힘을 주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7년 동안 나는 편지를 통해 「파수대」지를 받아 보았습니다. 한 형제가 그런 편지를 정기적으로 보내 주었는데, 그 편지에는 새로 나온 잡지의 기사들을 깔끔하게 베껴 쓴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수용소 검열관이 내게 건네준 편지는 늘 이미 개봉된 상태였습니다. 우리 두 사람 다 그 편지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 때문에 그런 위험을 무릅썼는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지만, 그가 7년 내내 거기에서 근무하였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따름입니다. 무엇보다 나는 여호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모든 세월 동안 나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그분은 내게 힘을 주셨습니다.—베드로 첫째 5:7.

[168, 169면 네모와 삽화]

나는 전쟁이 끝난 뒤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알렉세이 네포차토프

출생 1921년

침례 1956년

약력 1943년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서 진리를 배웠고 러시아에서 19년간 수감 생활을 하였다. 30년 넘게, 그것도 대부분은 금지령하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다.

알렉세이는 스무 살에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후에 그는 부헨발트 수용소로 이송되었으며, 그곳에서 진리를 배웠다. 그가 석방되기 얼마 전에 기름부음받은 증인 두 사람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렉세이, 전쟁이 끝난 뒤에 당신이 러시아로 돌아가면 좋겠군요. 수확하는 일을 할 사람들이 특히 필요한 광대한 나라니까요. 그곳 상황은 쉽지 않을 테니 온갖 시련에 맞설 수 있도록 준비해 두세요. 당신과 당신 말에 귀 기울일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영국인들은 1945년에 알렉세이를 석방시켜 주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갔으며, 투표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그 즉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처음에는 교도소에 증인이 나 혼자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양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고 여호와께 청하였고, 얼마 있지 않아 증인 수는 열세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우리에게는 성서 출판물이 없었지요. 우리는 교도소 도서실에서 빌려 온 소설책에 나오는 성구들을 베끼곤 하였습니다.”

알렉세이는 10년 형기를 꼬박 채웠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자신이 알기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지역으로 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밤낮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아이들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들은 내용을 전부 성서로 확인해 보더군요.”

그 후 여러 해 동안, 알렉세이는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침례를 받도록 도왔다. 그중에는 후에 그와 결혼한 마리야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KGB는 나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체포되어 25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마리야도 체포하였습니다. 재판이 있기 전에 마리야는 독방에 일곱 달 동안 감금되었습니다. 수사관은 아내에게 여호와를 부인한다면 즉각 석방시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마리야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법정에서는 아내에게 7년간의 노동 수용소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한 자매가 우리 딸아이를 데려다가 돌봐 주었습니다.”

알렉세이와 마리야는 형기를 다 마치기 전에 석방되었다. 그들은 트베리 오블라스트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당국자들과 주민들에게 거센 반대를 받았는데, 어떤 이웃 사람은 그들의 집에 불을 지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그 후로 여러 차례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가는 곳마다 새로운 제자들을 삼았다.

알렉세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수가 없었지요. 그 이후로는 매일 성서를 읽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아내와 나는 지금까지 40번이 넘게 성서를 통독하였지요. 하느님의 말씀이야말로 우리에게 힘을 주고 봉사에서 열심을 내게 해 줍니다.”

전부 합해 보면, 알렉세이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4년을 러시아의 교도소와 수용소들에서 19년을 보냈다. 그는 30년 동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아내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고 사랑하도록 도왔다.

[177, 178면 네모와 삽화]

그 군인의 말이 옳았다

레기나 쿠쿠시키나

출생 1914년

침례 1947년

약력 여러 해 동안 회중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도 계속 충실하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였다.

나는 1947년에 시장에 갔다가 한 증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그의 집을 방문해서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나는 즉시, 그 자매처럼 여호와를 열심히 섬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당신이 전파하는 것처럼 나도 하겠어요”라고 나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전파를 하였다는 이유로 1949년에 우크라이나 리비프에서 체포되어 남편과 어린 두 딸에게서 격리되었습니다. 세 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이른바 트로이카라고 불리던 비공개 재판에서 내게 총살형이 선고되었습니다. 세 명의 재판관 중 판결문을 읽어 주던 여자 재판관은 이렇게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두 자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사형에서 25년 형으로 감형을 결정한다.”

나는 남자들만 있는 감방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25년 형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떻게 그토록 침착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는지 놀라워하였습니다. 그 교도소를 떠나게 되었을 때, 한 젊은 군인이 내게 음식 꾸러미를 건네주면서 친절하게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될 겁니다.”

나는 1953년까지 러시아 북부에 있는 수용소에서 형을 살았습니다. 그 수용소에는 소련에 속한 여러 공화국에서 온 많은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가족처럼 아꼈습니다.

우리 자매들은 행실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를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로 인해 사람들이 하느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 시간 고된 일을 해야 하였습니다. 나는 형기를 다 마치기 전에 수용소에서 석방되기는 하였지만 또 다른 형태로 고립되었습니다. 5년이 넘도록 회중과 연락이 두절된 것입니다. 그것이 수감되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힘을 주시고 변함없이 사랑을 나타내 주시는 것을 항상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성서를 많이 읽었고 읽은 내용을 묵상하였으며, 그로 인해 영적인 힘을 얻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증인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방법으로 도와주셨습니다. 나는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신문에,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오세티아의 우리 형제들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가 실린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에서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소련 사회에 해가 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형제 자매들의 정확한 이름과 함께 그들의 주소를 공개하였습니다. 기뻐서 날아갈 듯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만나게 되었을 때, 형제들은 내게 큰 힘을 주었고 내가 여호와의 백성과 연락할 수 있도록 그분이 그 기사가 발행되게 해 주신 거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나는 92세입니다. 실로, 친절한 그 군인의 말이 옳았습니다. 일평생 여러 어려움을 겪기는 했어도 다 잘되었기 때문입니다.

[188, 189면 네모와 삽화]

우리의 “천막 말뚝”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드미트리 리비

출생 1921년

침례 1943년

약력 20년 이상 러시아 전국 위원회 위원으로 봉사하였으며, 현재는 시베리아에 있는 한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6개월 전인 1944년이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군 재판관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총살형을 선고받았지만,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10년간 복역하는 것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945년 1월에 나는 러시아 북부의 코미 공화국에 있는 페초라 시의 한 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재소자들이 있던 그 수용소에는 열 명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파수대」를 압수당하는 바람에 우리에게는 영적 양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체력이 소진되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목욕탕에서 목욕할 때, 한 형제는 나에게 뼈만 남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불쌍해 보였던 나는 보르쿠타에 있는 환자 수용소로 옮겨졌습니다.

얼마 후 건강이 약간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모래 채석장에 일을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앙상한 뼈만 남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내가 음식을 담배와 바꾼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 수용소에서 2년 이상을 보냈습니다. 증인은 나밖에 없었지만, 진리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고 그중 일부는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한번은 친척들이 「파수대」를 베껴 써서 보내 주었습니다. 담당관이 모든 소포를 철저히 검사하였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아 볼 수 있었습니까? 종이를 두 번 접어서 바닥이 이중인 깡통의 밑바닥에 넣은 뒤 기름을 잔뜩 넣어 보내 주었던 것입니다. 교도소 담당관은 캔을 뚫어 보고는 미심쩍은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나에게 주었습니다. 나는 이 “생수”의 근원 덕분에 한동안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요한 4:10.

나는 형기를 마치기 전인 1949년 10월에 석방되었고, 11월에 우크라이나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우리의 활동을 등록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당국은 소련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을 인가해 줄 용의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1951년 4월 8일 밤에, 우리는 다른 여호와의 증인 가족들과 함께 열차에 실려 시베리아로 보내졌습니다. 2주 후에 우리는 시베리아의 한복판인, 이르쿠츠크 오블라스트의 하잔이라는 마을에 있게 되었습니다.

“너의 천막 줄을 길게 늘이고, 너의 천막 말뚝을 튼튼하게 하여라”라는 이사야 54:2의 성구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이 예언을 성취시키고 있는 것 같았지요. 우리 가운데 시베리아로 자진해서 이주할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나는 천막 말뚝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55년이 넘는 세월을 시베리아에서 살았습니다.

[191, 192면 네모와 삽화]

나에게는 거처가 있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발렌티나 가르놉스카야

출생 1924년

침례 1967년

약력 교도소와 수용소에서 21년을 보냈으며 그중 18년간은 침례를 받기 전에 복역하였다. 2001년에 사망할 때까지 44명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다.

어머니와 나는 벨로루시 서부에 살았습니다. 나는 1945년 2월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습니다. 우리 집을 딱 세 번 방문했던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와서 성서의 내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그를 결코 다시 보지 못했지만, 이웃과 아는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당국에 체포되어 8년간의 수용소 형을 선고받았고, 울리야놉스크 오블라스트로 보내졌습니다.

나는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다른 수감자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1948년에 한 여자 수감자가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샤라는 이름의 자매였는데, 나는 그와 영적인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되어 너무나 기뻤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자매들이 수용소에 더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출판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많이 함께 교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1953년에 석방되었지만,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3년 반 만에 다시 유죄 판결을 받고 10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957년에 케메로보에 있는 수용소로 이감되었는데, 그곳에는 180명가량의 자매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늘 성서 출판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울에는 눈 속에, 여름에는 수풀이나 땅속에 출판물을 숨겼습니다. 교도관들이 검열할 때는 양손에 출판물 사본들을 숨기고는 어깨에 걸친 큰 숄 끝을 손으로 꼭 잡고 있었습니다. 다른 수용소로 이송될 경우에는 내가 손수 만든 모자 안에 「파수대」 몇 부를 넣고서, 그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모르도바의 한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는 안전한 장소에 숨겨 둔 성서가 한 권 있었는데, 그 성서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책임을 맡은 자매가 함께 있을 경우에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면 내가 본 유일한 성서는 1945년에 처음으로 나에게 진리를 알려 준 형제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1967년에 풀려나 우즈베키스탄의 안그렌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자 노동 수용소에서만 복역하였던 터라 처음에 나를 방문한 형제 말고 다른 형제들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요. 회중의 모든 형제 자매들은 봉사의 직무에서 열심을 나타냈으며, 나는 이내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1969년 1월에 우리 회중의 형제 여덟 명과 자매 다섯 명이 전파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나 역시 체포되었고, “극히 위험한 범죄자”로 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는 전파한다는 이유로 여러 번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나는 담요를 뒤집어쓰고서 관심자들과 성서 연구를 사회했습니다. 걷는 동안 서로 대화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대화하다 발각될 경우 벌로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우리는 베껴 쓴 출판물만 사용했는데, 그 출판물을 베끼고 또 베꼈지요.

나에게는 거처가 있었던 적이 결코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소유물이라고는 옷 가방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나는 여호와를 섬기면서 행복하고 만족스러웠습니다.

[200, 201면 네모와 삽화]

수사관이 영적으로 강화시켜 주다

파벨 시불스키

출생 1933년

침례 1948년

약력 반복적으로 사상 재교육에 시달렸지만, 현재 러시아의 한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

나는 종교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1958년에 체포되었습니다. 기차까지 나를 호송한 장교는 “마지막으로 아내를 잘 봐 둬. 절대로 다시 볼 수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르쿠츠크에서 나는 서 있을 공간밖에 없는 특수한 감방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재판이 있기까지 6개월 동안 독방에 있었습니다. 수사관은 밤중에 심문을 하면서, 내가 가진 성서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의 조직에 대한 신뢰를 침식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불법적인 행동에 가담했다는 고발을 당했습니다. 이따금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된 방법은 대개 이념을 주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확고함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여호와께 간청했으며, 그분은 늘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심문을 받고 있었는데, 수사관이 나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르더니 “지금부터 당신네 조직이 하고 있는 일을 보여 주지. 그러면 그게 하느님이 하는 일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해 뉴욕에 있는 두 개의 경기장에서 당신네들 대회가 열렸는데 25만 3000명이 참석했지. 그런 규모의 행사를 CIA의 지원 없이 치러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당신도 잘 알겠지. 대회는 8일 동안 열렸어. 여러 나라의 대표자들이 비행기와 기차와 배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참석했네. 당국의 도움 없이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겠나? 이렇게 큰 경기장에서 8일간이나 대회가 열리는데 누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나?”

수사관은 탁자 위에 사진들을 흩어 놓았습니다. 그중에는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대표자들이 행복한 모습으로 서로 포옹하는 사진이 있었습니다. 노어 형제가 연설을 하는 사진도 있었고, 침례를 받는 장면과 노어 형제가 침례받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이다”」(“Your Will Be Done on Earth”) 책을 주고 있는 사진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을 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파수대」를 통해 그 책에 관해 알게 되었습니다. 수사관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이 뭔지 아나? 북방 왕과 그에게 일어날 일이 나와 있지. 여호와의 증인들이 과연 이런 일을 독자적으로 조직할 수 있을까? 당신들을 보고 군사 행동을 조직하는 법을 배우려고 이 행사에 미군들이 참석했다는 정보도 입수했지. 또한 한 갑부가 이 대회를 개최하는 데 거액을 기부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갑부들은 아무 이유 없이 돈을 낭비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 수사관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교도소를 떠나지 않고도 대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새 힘이 샘솟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그렇게 여호와께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나를 관대히 축복해 주셨습니다. 나는 인내할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되었습니다.

[214, 215면 네모와 삽화]

영화관이 여호와의 증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베네라 그리고리예바

출생 1936년

침례 1994년

약력 1960년대에 여배우로 활동했으며, 소련의 선전용 영화에 출연하였다. 1995년 이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연기자 생활을 막 시작한 때인 1960년에 나는 소련의 영화관에서 개봉된 「하느님의 증인」(God’s Witnesses)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연을 맡았습니다. 그 영화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무시무시한 분파”를 묘사하였는데, 그 “분파” 때문에 내가 연기한 타냐라는 여주인공이 죽게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대본에 의하면, 타냐는 밤에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그 “분파”에게서 도망하여 심한 눈보라 속으로 달려갑니다. 그가 눈 속으로 사라지면 해설자는 슬픈 목소리로 “이것이 타냐 베셀로바의 마지막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에 대해서는 대본에서 본 것이 다였지만, 나는 대본이 마음에 들었고 증인들과 맞서 싸우는 일에 동참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영화는 소련의 여러 도시에 있는 영화관과 클럽에서 상영되었습니다. 나는 영화가 개봉되는 곳마다 방문하였고, 영화가 끝나면 무대에 올라갔습니다. 당시 소련 사람들은 화면으로 본 내용을 무조건 다 믿었기 때문에, 내가 무대에 오르면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살아 있다!” 하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영화가 어떻게 촬영되었으며, 영화감독과 특수 효과 담당자들이 어떻게 눈보라 장면을 연출하여 내가 골짜기에 휩쓸려 가 눈에 묻혀 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이게 했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번은 칼리닌(지금의 트베리) 오블라스트의 비시니볼로체크에서 극장이 만원을 이룬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은 왠지 좀 달랐습니다. 영화가 끝나자 한 연로한 남자가 나에게 종교와 관련된 질문만 하였고, 나는 지상 생명의 기원에 대해 무신론적인 견해를 옹호하였습니다. 영화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무대 뒤로 가서 행사를 조직하는 사람에게 “내가 방금 대화한 사람이 누구죠?”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 분파의 우두머리입니다. 영화관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전부 증인들이랍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미처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성서가 읽고 싶어졌지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폴란드 사람과 결혼하였고 함께 폴란드로 이주하였습니다. 1977년에 두 자매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고, 곧 나는 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성서를 사랑하게 되었고, 남편과 나는 증인들과 벗이 되었습니다. 1985년에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나는 남편과 함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아버지와 머물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연락이 닿게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드렸습니다.

결국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12년간 정규 파이오니아로 섬기고 있으며, 남편 즈지스와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영화 산업이 “잘못된 일을 꾀하는 교활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개인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에베소 4:14) 그 소련의 선전용 영화에 출연했을 때는 30년 후에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237면 네모]

러시아어 「신세계역」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다양한 러시아어 성서 번역판들을 잘 활용했습니다. 「성무 의회역」이 그중 한 가지입니다. 고어가 사용되었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이 번역판은 수많은 러시아 독자들이 하느님의 목적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약 3000번 나오는 「마카리오스 역」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증인들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정확하고 명료하며 현대어로 된 성서 번역판의 필요성도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통치체는 러시아어로 「신세계역」을 번역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러시아 지부에서는 10년이 넘게 이 중요한 번역 작업을 수행하였습니다.

2001년에 러시아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발표되었습니다. 2007년에는 러시아어 「신세계역 성경」 전역이 발표되어 세계 전역의 러시아어 독자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였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시어도어 재라스와 스티븐 레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각각 이 새로운 출판물을 처음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즉각적으로 열렬한 호응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명료하고, 이해하기 쉬우며, 생생한 문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성경을 읽는 것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되었어요”라고 한 자매는 편지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께서 주신 참으로 귀중한 선물입니다!” 혹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와 같은 말로 조직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러시아어 「신세계역」은 세계 도처에 있는 진리를 사랑하는 러시아어 사용자들에게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44, 245면 네모와 삽화]

문제가 하루 만에 해결되었다

이반 슬라바와 아내 나탈리야

출생 남편은 1966년, 아내는 1969년

침례 1989년

약력 파이오니아로서 더 크게 필요한 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반은 현재 러시아 지부 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탈리야와 나는 1990년대 초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였습니다. 인구가 거의 150만 명이나 되었던 벨고로드 오블라스트에 전도인은 채 열 명도 안 되었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곳이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마태 9:37.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식품을 구할 수 있도록 식품 구입권을 발행하였는데, 직장에서 그러한 식품 구입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직업이 없어서 식품 구입권을 받을 수 없었고, 그래서 시장에서 비싼 값에 식품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숙소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 호텔에서 머물러야 했습니다. 20일 치 숙박료를 지불하고 나니 거의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자리와 저렴한 숙소를 구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그동안 내내 우리는 부지런히 전파하면서 진실한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호텔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남은 돈으로 롤빵 하나와 우유 한 통을 샀습니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면서, 내일 아침에는 방을 비워 줘야 하기 때문에 일자리와 숙소를 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다시 간구를 드렸습니다.

아침에 우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호텔 지배인의 전화였는데, 놀랍게도 사촌이 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촌은 최근에 상여금을 많이 받아서 그 일부를 나에게 주고 싶다고 하면서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몇 분 후에는 한 형제에게서 우리가 지낼 만한 저렴한 아파트를 찾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게다가 바로 그날 우리는 유치원 부지 관리인으로 채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문제는 하루 만에 해결되었습니다. 얼마의 돈과 거처와 일자리가 생겼으니까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점이 자명하였습니다.

벨고로드에서는 1991년에 55명이 기념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듬해에는 참석자 수가 150명이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35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2006년에 이 도시에는 여섯 개의 회중이 있었으며 벨고로드 오블라스트에는 2200명이 넘는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250면 네모]

최근의 법적 진척 상황

2007년 1월에 유럽 인권 재판소(ECHR)가 만장일치로 우리에게 승소 판결을 내림으로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숭배할 수 있는 우리의 권리가 확증되었습니다. 그 재판소는 “여호와의 증인 종교 단체의 성원들이 함께 모여서 종교 교재를 연구하고 토의하는 것은 숭배와 설교 측면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실천하는 용인된 방법이다”라고 언명하였습니다.

2004년에 모스크바 시에서 증인들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제한되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계속해서 숭배를 위해 공개적으로 함께 모이고 전파 활동에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고 있습니다. 2007년에 형제들은 기념식을 거행할 수 있어서 매우 기뻤으며, 러시아 전역에서 대체로 그러하였듯이 모스크바에서도 아무런 방해 없이 지역 대회를 열 수 있었습니다.

법적인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우리 형제들은 용기 있게 반대에 계속 맞서 나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류블리노 경찰서가 2006년 4월 12일에 기념식을 방해한 일과 관련된 새로운 소송을 유럽 인권 재판소에 제기하였습니다. 경찰은 열네 명의 형제들을 가두었고 형제들의 변호사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위협했습니다. 지방 법원에서는 형제들에게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상소심에서 판결이 번복되었고 패소하였습니다. 그에 더해 2007년 7월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우리의 종교 활동에 대해 오랜 기간 부당하게 수사를 실시한 여러 정부 관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228-230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러시아

1890

1891년 세묜 코즐리츠키가 담대히 전파한다는 이유로 러시아 제국의 동부 지역으로 유배되다.

1904년 독일 지부가 성서 출판물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다.

1910

1913년 러시아 정부가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핀란드에 성경 연구생 사무실이 있음을 알게 되다.

1923년 워치 타워 협회가 러시아로 성서 출판물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많은 편지를 받기 시작하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조지 영이 러시아에 있는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허락해 달라고 당국에 요청하다. 당국에서 그의 비자를 연장해 주기를 거부하다.

1929년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과 계약을 체결하다. 성서 강연이 중계되어 레닌그라드와 다른 도시들에서 듣게 되다.

1930

1939-1940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우크라이나, 몰도바, 발트 해 연안국들을 합병하다. 그로 인해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소련에 속하게 되다.

1944년 수백 명의 증인들이 러시아 전역에 있는 교도소와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다.

1949년 여호와의 증인들이 몰도바에서 시베리아와 극동으로 유배되다.

1950

1951년 우크라이나 서부, 벨로루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에서 8500명이 넘는 증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되다.

1956/1957년 세계 전역에서 열린 199개 지역 대회 대표자들이 소련 정부에 종교의 자유를 허용해 줄 것을 탄원하다.

1950년대 600명 이상의 증인들이 모르도바에 있는 특수 노동 수용소에 철저히 격리 수용되다.

1965년 소련 정부가 거주지 제한을 철폐하는 특별 사면령을 내리다.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던 증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정착하다.

1970

1989-1990년 통치체 성원들이 러시아에 있는 형제들과 처음으로 만나다. 소련의 증인들이 폴란드로 가서 특별 대회를 보다.

1990

1991년 3월 27일에 여호와의 증인이 러시아에서 법적 인가를 받다.

1992/199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다.

199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방의 솔네치노예에 있는 러시아 지부가 봉헌되다.

199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 최초의 대회 회관이 봉헌되다.

2000

2003년 지부 확장 공사가 완공되다.

2007년 러시아의 2100개가 넘는 회중과 격지 집단에서 전도인들이 활동적으로 일하다.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구소련에 속했던 15개 나라의 전도인 총수

360,000

300,000

240,000

180,000

120,000

60,000

40,000

20,000

1890 1910 1930 1950 1970 1990 1990 2000

[218면 도해와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다른 지부들이 러시아 전역에 출판물을 운송하는 일을 도와 왔다

독일 핀란드

↓ ↓

솔네치노예

↓ ↓ ↓ ↓

벨로루시 카자흐스탄 모스크바 러시아

일본

블라디보스토크

캄차카

[116, 11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북극권

북극해

북극

바렌츠 해

카라 해

랍테프 해

동시베리아 해

축치 해

베링 해협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코펜하겐

독일

폴란드

우치

바르샤바

발트 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로루시

브레스트

우크라이나

리비프

몰도바

카스피 해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켄기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안그렌

중국

몽골

울란바토르

중국

동해

일본

도쿄

홋카이도

오호츠크 해

베링 해

러시아

페트로자보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솔네치노예

칼리닌그라드

노브고로드

비시니볼로체크

모스크바

툴라

오렐

쿠르스크

보로네시

블라디미르

이바노보

니즈니노브고로드

식팁카르

우흐타

페초라

인타

노바야제믈랴

보르쿠타

우랄 산맥

시베리아

예카테린부르크

나베레즈니예첼니

이젭스크

사라토프

볼시스키

우다르니

스타브로폴

퍄티고르스크

엘브루스 산

날치크

나릇칼라

베슬란

블라디캅카스

코카서스 산맥

아스트라한

볼가 강

톰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케메로보

크라스노야르스크

노보쿠즈네츠크

우스티칸

악타시

비류신스크

옥탸브리스키

브라츠크

비호렙카

툴룬

중앙 하잔

지마

잘라리

우솔리예시비르스코예

키토이

안가르스크

이르쿠츠크

바이칼 호

키렌스크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사코프

유즈노사할린스크

사할린

야쿠츠크

오이먀콘

우스티네라

캄차카

축치 반도

콜리마 강

하이르

노릴스크

[16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카스피 해

발트 해

바렌츠 해

카라 해

북극해

북극

랍테프 해

동시베리아 해

축치 해

베링 해협

오호츠크 해

동해

카자흐스탄

중국

몽골

무르만스크

프스코프

트베리

모스크바

벨고로드

보로네시

로스토프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알라니아

이바노보

니제고로드

모르도바

울리야놉스크

볼고그라드

타타르스탄

페름

코미 공화국

우랄 산맥

시베리아

스베르들롭스크

첼랴빈스크

쿠르간

튜멘

옴스크

톰스크

노보시비르스크

알타이

알타이 공화국

케메로보

하카시아 공화국

크라스노야르스크

투바 공화국

이르쿠츠크

부랴티아

치타

사하 공화국

아무르

하바롭스크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사할린

캄차카

[66면 삽화]

축치 반도의 일출

[68면 삽화]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로 되어 있는 이 표지판은 세묜 코즐리츠키가 유배되었던 부흐타르마라는 시베리아의 마을을 가리키고 있다

[71면 삽화]

헤르켄델 부부는 러시아에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신혼여행 기간을 보냈다

[74면 삽화]

카를로 하르테바(오른쪽)가 받은 위임장에는 뉴욕 주재 러시아 제국 영사가 찍은 관인이 있다

[80면 삽화]

1925년 5월에 펜실베이니아 주 카네기에서 열린 이 러시아어 대회에는 250명이 참석하고 29명이 침례를 받았다

[81면 삽화]

이 잡지에서는 “보로네시 오블라스트에 분파들이 득실대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82면 삽화]

조지 영

[84면 삽화]

알렉산드르 포르스트만은 거의 10년간 전도지와 소책자와 서적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였다

[90면 삽화]

표트르 크리보쿨스키와 그의 아내 레기나, 1997년

[95면 삽화]

표트르의 ‘돌을 매단 편지’ 덕분에 올가 세브류기나는 여호와의 종이 되었다

[100면 삽화]

이반 크릴로프

[101면 삽화]

시베리아에 유배된 증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집을 지었다

[102면 삽화]

마그달리나 벨로시츠카야는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110면 삽화]

빅토르 굿시미트

[115면 삽화]

알라, 1964년

[118면 삽화]

세묜 코스틸레프, 현재

[120면 삽화]

블라디슬라프 아파뉴크가 받은 성서에 근거한 훈련은 그가 믿음의 시험을 이겨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121면 삽화]

경찰은 나데즈다 비시냐크의 집을 수색하여 「아마겟돈 후—하느님의 신세계」 소책자를 찾아냈다

[126면 삽화]

보리스 크릴초프

[129면 삽화]

빅토르 굿시미트가 1957년에 체포되기 약 한 달 전에 누이(위)와 딸들과 아내 폴리나와 함께한 모습

[134면 삽화]

이반 파시콥스키

[136면 삽화]

1959년에 「크로코딜」지에는 건초 더미에서 발견된 출판물들의 사진이 실렸다

[139면 삽화]

1959년에 KGB가 찾아낸, 지하 인쇄 시설이 있던 집 중 하나

[142면 삽화]

알렉세이 가부랴크는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다시 연합시키는 일에 기여하였다

[150면 삽화]

수제 인쇄 장비

윤전 인쇄기

종이 압축기

재단기

제본기

[151면 삽화]

전차 운전기사였던 스테판 레비츠키는 용감하게도 한 인쇄업자에게 접근하였다

[153면 삽화]

그리고리 가틸로프는 함께 수감된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157면 삽화]

키가 큰 꽃들은 성서 연구와 토의를 하기에 알맞은 가리개 역할을 해 주었다

[161면 삽화]

작은 책자 형태로 된, 실물 크기의 「파수대」지

[164면 삽화]

“소연방 최고 회의 간부 회의에서 발행한 명령서”

[170면 삽화]

형제들은 이중으로 된 짐 가방이나 부츠의 깔창 밑에 “보물”을 숨기곤 하였다

[173면 삽화]

이반 클림코

[175면 삽화]

거미줄 같이 가느다란 글씨로 베껴 쓴 「파수대」 다섯 부 내지 여섯 부가 성냥갑 한 개에 들어갔다

[184, 185면 삽화]

모르도바의 한 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내내, 단 한 명의 형제도 기념식에 빠지지 않았다

[194면 삽화]

니콜라이 구출랴크는 수용소장의 아내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였다

[199면 삽화]

국제 대회들

1989년에 러시아 대표자들은 폴란드에서 열린 세 개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다

바르샤바

호주프

포즈난

[202면 삽화]

공식 인가를 받은 후 촬영한 사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어도어 재라스, 미하일 다세비치, 드미트리 리비, 밀턴 헨첼, 법무부 직원, 아나니 그로굴, 알렉세이 베르즈비츠키, 빌리 폴

[205면 삽화]

199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키로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빛 비추는 자” 국제 대회에서 연설하는 밀턴 헨첼

[206면 삽화]

러시아 솔네치노예에 있는 매입한 부지

[207면 삽화]

아우리스 베르그달과 아내 에바 리사는 솔네치노예에 처음으로 온 자원 봉사자들이었다

[208면 삽화]

한누 탄니넨은 아내 에이여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임명되었다

[210면 삽화]

로만 스키바는 아내인 류드밀라와 함께 지역 활동을 하면서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였다

[220면 삽화]

블라디보스토크의 부두에서 출판물을 취급하고 있는 형제들

[224면 삽화]

아르노 튕글러는 아내 조냐와 함께 러시아의 임지에서 여러 가지 소중한 임무들을 수행해 왔다

[226, 227면 삽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의 숲에서 열렸던 회중 집회, 1989년

[238면 삽화]

러시아 지부 사무실에서는 40개가 넘는 언어로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을 감독한다

[243면 삽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열린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 1996년 6월

[246면 삽화]

러시아에서의 전파 활동

페름 오블라스트와 나릇칼라의 들판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에서

야쿠츠크에서의 호별 방문 봉사

사라토프의 시장에서

[252, 253면 삽화]

러시아 지부

공중에서 본 숙소 건물 및 주변 경관

[254면 삽화]

모스크바에서 열린 2006 지역 대회에 2만 3537명이 참석했다

[254면 삽화]

루즈니키 스타디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