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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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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카탄 반도에는 멕시코와 과테말라와 국경을 맞대고 카리브 해와 인접해 있는 열대의 보석이라 할 만한 벨리즈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영국령 온두라스로 알려져 있던 이 작은 나라는 다양한 문화, 언어, 관습, 음식, 종교가 한데 섞여 있는 나라입니다.

벨리즈의 인구는 약 30만 명으로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인구 밀도가 낮은 편입니다. 울창한 열대 정글에는 화려한 새들과 흥미를 자아내는 동물들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재규어도 있습니다. 중앙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이 나라에서도 고대 마야족의 유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높이 솟은 야자나무와 쏟아져 내리는 폭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는 산들을 볼 수 있습니다. 벨리즈의 매혹적인 한 가지 특징은 거대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는 동굴들인데, 그중 일부는 굽이굽이 흐르는 깨끗한 강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해안선 전체를 따라 뻗어 있는 벨리즈 보초(堡礁)에는 산호들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백사장과 야자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습니다.

초기 역사

초기에 벨리즈에 정착한 사람들은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 온 아라와크족과 카리브족입니다. 신세계라고 불리던 곳에 유럽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기 여러 세기 전부터, 벨리즈는 번영하는 의식의 중심지들과 웅장한 신전들이 있는 마야 문명의 심장부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초창기에 유럽 사람들이 벨리즈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스페인이 마야족을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1638년에는 영국 해적들이 벨리즈 해안 지방에 정착하였습니다. 17세기 중반에는 (값비싼 염료의 원료인) 로그우드나무를 벌목할 목적으로 정착지들이 세워졌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로그우드와 마호가니를 벌목할 노예들을 자메이카와 미국에 있는 노예 시장에서 구해 오거나 아프리카에서 직접 벨리즈로 데려오기도 하였습니다. 목재 산업의 경우, 채찍을 휘두르며 일을 시키는 노예 감독관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곳에서만큼 흔하지는 않았지만 노예들은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하였고 학대를 받는 일이 흔하였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자살을 하거나 탈출하여 벨리즈 내에 독립된 공동체들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1862년에 벨리즈는 영국의 식민지로 선포되었으며, 1981년에는 독립국이 되었습니다. *

진리의 씨가 뿌리를 내리다

당시 만국 성경 연구생으로 불리던 증인들 중 최초로 벨리즈에 온 사람들 가운데는 1918년에 자메이카에서 침례를 받은 제임스 고든이 있습니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젊은이로 1923년에 자메이카에서 벨리즈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마야족이 사는 외딴 마을인 봄바에 정착하였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 나갔습니다. 제임스는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벨리즈의 다른 지역들에는 왕국의 좋은 소식이 어떻게 전해지게 되었습니까? 미국 출신으로 체격이 작은 프리다 존슨 자매는 50대 후반이었던 1931년에 중앙아메리카 지역에서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말을 타기도 하며 혼자 여행을 한 프리다는 카리브 해 연안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 그리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바나나 농장에서 전파하였습니다.

1933년에 벨리즈시티에 도착한 프리다는 빅스 부인의 집에 작은 방을 세내어 머물렀습니다. 빅스 부인은 매일 아침마다 프리다가 집을 나서기 전에 성서를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프리다의 지칠 줄 모르는 열심은 많은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대부분의 열대 지방 사람들이 낮 시간에 으레 휴식을 취할 때도 프리다는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벨리즈에 육 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자메이카 출신의 제빵사인 새디어스 호지슨이 진리에 관심을 갖도록 도왔습니다. 프리다는 벨리즈시티에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시골 지역들도 일부 방문하였고 그럴 때에 봄바에 살고 있던 제임스 고든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프리다가 훌륭하게 활동을 수행한 덕분에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알게 되었으며 함께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다

당시에는 연락을 취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지만 제임스와 새디어스는 각자 자신이 있는 지역에서 전파 활동을 수행하면서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새디어스는 일찍이 1934년에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에 편지를 써서 축음기 한 대와 녹음된 성서 강연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토요일 밤이면 새디어스는 대법원 건물 앞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녹음된 연설을 틀었는데 그곳은 수비대 군인들이 운동장으로 사용했던 곳이었습니다. “전쟁터”로 통하던 그 공원은 그 명칭에 걸맞는 곳이 되었습니다. 공원 한편에서는 새디어스가 러더퍼드 형제의 연설을 틀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보몬트 보먼이 연주하는 큰북의 요란한 반주 소리에 맞추어 구세군 악대가 연주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보몬트라는 사람은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였으며 그 전쟁터에서 새디어스의 편에 가담하였습니다. 보몬트는 “내가 그 북을 내려놓게 만드신 나의 하느님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개적으로 전파하기에 좋은 또 다른 장소로 ‘노새 공원’으로 알려진 시장 앞의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도시 안팎으로 물자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는 노새가 끄는 짐수레들을 매어 두는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면 갈색 피부에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힘이 넘치는 연사로 알려진 새디어스의 목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국 교회들이 성서를 사랑하는 벨리즈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도, 자메이카 출신인 제임스 하이엇과 아서 랜들처럼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인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새디어스는 벨리즈시티 북쪽에 있는 자신의 빵 가게에서 집회를 사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카운터를 한쪽으로 치우고 의자들 위로 판자들을 얹어 사람들이 길게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도시 남쪽에서는 코라 브라운의 집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또한 노라 파야드는 자신이 어린 소녀였을 때 옆집에 사는 아서 랜들의 집 마당에서 그 지역의 몇몇 증인들이 모임을 가졌던 것을 기억합니다.

열정적으로 전파하여 결실을 맺다

많은 초창기 증인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지칠 줄 모르고 전파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짐지) 젱킨스는 맹인이었지만 지팡이로 길을 짚어 가며 벨리즈시티 전역을 걸어 다녔습니다. 몰리 틸럿은 두 구획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젱킨스 형제가 시장에서 전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젱킨스 형제는 집회 때 매우 주의 깊이 듣는 사람이었는데, 듣는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몸을 앞쪽으로 기울여 앉은 채 프로를 들었습니다. 그는 많은 성구를 암기하여 전파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한편 제임스 고든은 한 손에는 출판물을 넣은 마호가니 재질의 휴대용 상자를, 다른 한 손에는 축음기를 들고 봄바 주변 마을들을 다니며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전파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아직 어두운 새벽에,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카누를 타고 강 상류 지역으로 노를 저어 가 하루 종일 그 지역에서 먼 거리를 걸어 다녔습니다. 하루가 끝날 무렵에는 희미해져 가는 빛 사이로, 배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고든 형제는 저녁 식사를 한 뒤에는 여섯 자녀들과 성서 연구를 하였는데, 연구를 마칠 쯤에는 너무 피곤해서 책을 들고 있지 못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든 형제의 아내는 아직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아내는 어느 날 남편이 없는 사이에 다수의 성서 출판물을 태워 버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제임스는 돌아와 아내가 한 일을 보고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였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말아요!” 하고 말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자녀들은 어머니의 행동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뼈아픈 것이었는지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처럼 자신을 억제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호와의 영에 이끌리다

어느 일요일 아침, 제임스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인 더린 라이트번에게 전파하였고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전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부드러운 말씨를 가진 제임스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후에 더린이 벨리즈시티에 사는 이모인 알폰시나 로바토의 집에 머무르는 동안, 한 남자가 그 집을 방문하여 마당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더린은 이모에게 “제가 말했던 그 좋은 책을 가져다준 사람하고 꼭 닮았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제임스 고든이 아니라 제임스 하이엇이었습니다. 그는 두 여자에게 축음기를 틀어 주었고 알폰시나에게 「하나님의 거문고」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알폰시나와 그의 여동생 옥타벨 플라워스는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지만 전부터 진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알폰시나는 그날 들은 내용에 감동하여 동생 옥타벨에게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있잖니, 어떤 남자가 와서는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했어. 우리가 찾던 걸 발견한 것 같아!” 하이엇 형제가 다시 방문하였을 때는 옥타벨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습니다. 알폰시나, 옥타벨, 더린 이 세 사람 모두가 진리를 받아들였고 1941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알폰시나와 옥타벨의 여동생인 에이미벨 앨런은 어머니가 얼마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자기도 죽어서 어머니와 함께 하늘에서 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옥타벨은 동생에게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연설을 같이 들어 보자고 권하였습니다. 에이미벨은 그렇게 하였고 그때 이후로 결코 집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더린의 딸인 올가 나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들은 출판물을 읽고 집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여호와의 영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알게 되어 너무나 기뻤기 때문에 배운 내용을 곧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지요.”

예를 들어, 올가의 아버지인 허먼 라이트번은 병원에 있는 동안 「어린이들」이라는 책을 읽고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배우는 내용에 대해 매우 열정적인 태도를 나타내어 매주 금요일마다 트럭을 빌려 몇몇 전도인들을 태우고 인근 마을들로 가서 증거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농장이 있던 블랙크리크의 시골 지역에서 광범위한 전파 활동을 수행하였습니다.

올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부모님은 벨리즈 강을 따라가면서 전파하셨고 사람들은 저녁에 랜턴을 들고 좋은 소식을 들으러 오곤 하였지요. 농장에서 휴가를 보낼 때면 매일 아침마다 부모님, 이모할머니인 에이미벨과 그의 딸인 몰리 틸럿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 아버지의 말을 타고 오솔길을 따라 크루키드트리까지 줄지어 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말들은 풀을 뜯도록 풀어 놓고, 우리는 관심을 가진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관심자 가족들 중 얼마의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1941년에 일단의 새로운 전도인들이 벨리즈시티의 카리브 해에서 최초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조지 롱스워스가 있는데, 그는 그해부터 1967년에 8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로 내륙 지방에서 전파하였는데, 말을 타고 크고 작은 마을로 먼 거리를 다니며 새로운 구역들을 개척하였습니다. 봉사에 대한 한결같은 그의 열심과 정기적인 집회 참석은 새로운 사람들에게 특히 격려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처럼 열심 있고 충실한 종들을 놀라운 방법으로 사용하셔서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그분의 조직으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최초의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5년 10월 5일에 길르앗 제1기 졸업생들인 엘머 어리그와 찰스 헤이언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전날 허리케인이 벨리즈시티에서 남쪽으로 16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역을 강타하였습니다. 공항에서 도심으로 뻗어 있는 16킬로미터의 도로 구간이 침수되었기 때문에 두 선교인은 큰 군용 트럭을 타고 이동하였습니다. 새디어스 호지슨은 자기 집 앞의 침수된 부분에 시멘트 벽돌과 나무 상자들을 놓아, 두 선교인이 도착했을 때 발이 젖지 않고 집에 들어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벨리즈의 형제들은 첫 선교인들이 도착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고든, 레온 레케냐, 라파엘 메디나는 새로운 선교인들을 만나기 위해 기꺼이 벨리즈 북부 지역에서 벨리즈시티까지 가려고 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라파엘의 손자인 이스마엘 메디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는 벨리즈 북부 지역과 벨리즈시티를 연결하는 도로가 닦여 있지 않았습니다. 노새가 끄는 짐수레가 다니는 피카도스라는 좁은 길밖에 없었지요. 길가에 집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분들은 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밤이 되면 아무 데서나 잠을 잤습니다. 그 세 형제는 선교인들을 만나 지침을 얻고 출판물을 받은 뒤에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여러 날이 걸렸습니다!”

선교인들은 ‘노새 공원’에서 매우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제임스 하이엇이 교직자들의 거짓 가르침에 대한 통렬한 비난으로 연설을 시작하자, 일부 구경꾼들로부터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연설을 끝마치면서 갑자기 새로운 두 선교인을 가리키며 “여러분, 여기 이 두 사람을 보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새로운 두 형제를 사람들에게 소개한 말은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의문의 여지없이, 그 초창기 형제들은 여호와와 성서 진리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갖고 있었으며 반면에 거짓 교리는 한결같이 미워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선교인들의 값진 경험이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더 효과적인 전파자가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두 선교인은 당시 인구가 약 2만 6700명이던 벨리즈시티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도시는 흙이나 돌 등을 쌓아 해수면보다 겨우 30센티미터 높게 만든 지대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배수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날씨도 덥고 습하였습니다. 가정집에는 수도 시설이 없었고, 그 대신 거의 모든 집 마당에 우기에 빗물을 모아 두는 나무로 된 커다란 통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는데, 일례로 1931년에 허리케인으로 도시가 파괴되고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제한을 받으면서도 발전하다

벨리즈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얼마 동안 우리 출판물을 금지시켰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이 도착하기 불과 얼마 전에 그러한 제한 조처가 풀렸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파수대」(영문) 1946년 7월 15일호에서는 벨리즈에서 일하는 두 명의 선교인의 활동에 관해 보고하면서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내륙 지방에서 한 로마 가톨릭 사제는 우편을 통해 전달되는 출판물에 금지령이 내려지게 하려고 여전히 시도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교직자들은 두 명의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분개하고 있으며, 한 아일랜드계 미국인 사제는 ··· 영국 식민 정부가 그들을 이 나라로 들어오도록 해 준 것에 대해 격분했다. ··· 두 [선교인은] 그 사제에게 본인이 미국인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상기시킨 다음, 미국의 교도소 통계를 들어 로마 가톨릭교가 미국 국민의 도덕성을 지켜 주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 주자 그는 당황해 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벨리즈의 전도인 보고가 처음으로 정확히 집계된 해는 1944년이었으며, 그때 7명의 전도인이 보고를 냈습니다. 전도인들은 좀 더 효과적으로 증거하기 위해 호별 방문 봉사에서 증거 카드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인들이 도착한 지 일 년 내에 전도인 수는 16명으로 늘어났습니다.

1946년에 세계 본부에서 네이선 H. 노어와 프레더릭 W. 프랜즈가 벨리즈를 방문하였고 이곳에 지부 사무실을 개설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조직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마련된 양식을 사용하여 야외 봉사 보고를 제출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했습니다. 프랜즈 형제는 왕국 소식을 계속 전파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도록 회중에 강력히 권하였습니다. 방문 주간의 후반부에 노어 형제는 관심 가진 많은 사람이 포함된 102명의 청중에게 관심자들이 여호와의 백성과 기꺼이 함께하고자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관심자들에게 증인들과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할 것을 따뜻이 권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찰스 루스 패리시와 애니 루스 패리시 그리고 코르디스 소렐과 밀드러드 소렐이 도착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트루먼 브루배커 그리고 찰스 호몰카와 플로렌스 호몰카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큰 환영을 받았는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해야 할 많은 일

엘머 어리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당시에는 한 개의 작은 회중밖에 없었고 외곽 지역에는 회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런 지역들에 가서 한 번에 몇 주씩 머물면서 서적을 전하고 출판물 예약을 받고 연설을 하며 씨 뿌리는 일을 하였습니다.” 찰스 헤이언은 벨리즈에 도착한 그 첫해에 트럭을 타고 오렌지워크로 가서 구역에서 봉사하면서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도록 격려하였습니다.

남부 지역에 있는 도시들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머와 찰스는 전파 활동을 개척할 목적으로 헤론 H 호를 타고 가리푸나족의 두 정착지인 스탠크리크(지금의 당그리가)와 펀타고다의 해안가에 있는 도시들로 여행하였습니다. 당시에는 벨리즈시티에서 배를 타고 30시간을 가야만 펀타고다에 갈 수 있었습니다. 엘머는 그렇게 여행을 한 뒤에 자신이 머무는 호텔 로비에서 약 20명의 사람들에게 공개 강연을 하였습니다.

올가 나이트는 그의 가족이 엘머와 함께 크루키드트리의 외딴 마을로 갔던 일을 기억하는데, 그곳에서 올가의 아버지는 나무들이 늘어선 강가에서 집회를 사회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지방 형제들은 선교인들의 노고와 겸손한 태도에 대해 고마워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가 38명이었으며, 벨리즈시티 외곽에 네 개의 새로운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이 작은 회중들은 시골 지역에 사는 소수의 전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블랙크리크에 사는 라이트번 가족, 봄바에 사는 고든 가족, 산타나에 사는 훔즈 가족과 알다나 가족, 오렌지워크에 사는 레케냐 형제와 메디나 형제가 있었습니다. 선교인들과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권고를 받은 대로 벨리즈시티에서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부지런히 노력하는 그들을 축복하셨고 그리하여 점점 더 많은 수의 진실한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1949년 12월에 있은 노어 형제의 두 번째 방문은 시기적절하면서도 격려적이었습니다. 그는 선교인 집에서 하루 저녁을 묵으면서 선교 봉사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새로운 전도인들 중 다수가 여호와를 섬기고 싶어 하면서도 그분에게 헌신하고 그 상징으로 침례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어 형제는 선교인들에게 참을성과 인내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필요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또한 선교인들이 이미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는 점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상 선교인들의 입국 허가가 나지 않다

1957년 무렵에 형제들은 정부가 벨리즈에서 수행되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계속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협회에서 제작한 영화를 오렌지워크에서 상영할 때 한 경찰관은 지부에서 온 형제들에게 그 마을에 도착한 시간과 떠날 시간이 언제인지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경찰서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최근에 열린 한 대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보고를 하기 위해 사복 경찰관이 참석해 있었다는 점을 알려 주었습니다.

1951년부터 1957년 사이에 열 명의 선교인들이 추가로 벨리즈 입국 허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도 1957년 6월에 형제들은 경찰 및 출입국 본부에서 온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국령 온두라스[지금의 벨리즈] 정부는 귀 협회 소속 성직자들이 해외에서 영국령 온두라스로 입국하는 것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이 결정은 즉각적인 효력을 갖습니다.” 그러한 결정이 내려진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총독과의 면담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일부 다른 종교 집단들도 새로운 선교인들을 입국시킬 수 없게 되었지만, 그들의 경우, 이미 와 있는 선교인들을 교체하는 것은 허락되었습니다. 그러한 마련이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는데, 증인들은 기존의 두 선교인을 교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960년에 형제들은 벨리즈와 런던의 관계 당국에 편지하여 자신들이 새로운 선교인들을 신청하는 것이 아니라 교체 신청을 하는 것임을 지적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짤막한 답신이 왔습니다. “총독께서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소속 선교인들이 영국령 온두라스에 입국하는 것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기로 분명히 결정하셨습니다.”

형제들은 면담을 요청하였지만 다음과 같은 답변을 받았습니다. “총독께서는 1957년에 귀 협회 소속 선교인들이 영국령 온두라스에 입국하는 것을 더 이상 허가하지 않기로 분명히 결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총독께서는 지금 상황에서 이 문제로 여러분과 면담하는 것은 유용한 목적에 기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다.” 상황은 요지부동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거의 오 년간 계속 요청한 결과, 지부는 마침내 1961년 10월에 벨리즈 정부 비서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최근에 진정한 내용을 영국령 온두라스 정부가 검토한 바, 이미 본국에 와 있는 기존의 외국 선교인들과 교체할 목적인 경우에는 외국 선교인들의 추가 입국을 당분간 허가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 결과, 1962년에 자메이카에서 마틴 톰슨과 앨리슨 톰슨이 선교인으로 벨리즈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활동이 방해받지 않다

종교계의 반대자들이 우리의 활동을 방해하려 했던 것임이 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1957 봉사 연도에는 일곱 개 회중에서 도합 176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보고하였습니다. 당시 벨리즈의 인구가 7만 5000명이었으므로,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1대 400 정도였습니다. 1961 봉사 연도에는 그보다 34퍼센트 증가한 수인 236명의 전도인이 활동하였으며,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은 1대 383이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하신 이러한 약속이 참됨이 증명된 것입니다.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며, 재판에서 너를 거슬러 일어나는 혀는 모두 네가 정죄할 것이다.” (이사야 54:17) 전파 활동은 방해받는 일 없이 진척되었습니다.

성서 연구를 하던 많은 부부가 합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동거하고 있었고, 일부 사람들은 이 사람 저 사람과 함께 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높은 표준에 대해 배우게 되자 그들 중 많은 수가 신속히 결혼 관계를 합법화하기 위해 노력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80세가 넘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국회관이 필요하게 되다

형제들은 1950년 1월에 있을 일련의 네 가지 특별 강연을 위해 벨리즈시티의 리버티 홀을 사용하기로 하고 1949년 12월에 미리 비용을 지불하였습니다. 마지막 강연이 있기 바로 전날, 라디오 방송에서 한 유명 인사의 장례식이 리버티 홀에서 있을 것이라는 광고가 나왔습니다. 형제들이 홀 소유주들에게 여러 차례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사람들이 홀 안으로 들어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례식 준비를 하는 바람에 특별 강연은 중단되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은 경찰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자체 소유의 왕국회관이 필요함이 분명하였습니다. 이용할 수 있는 홀들은 모두 클럽 모임을 위한 장소나 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임차료도 비쌌습니다.

당시 지부 감독자로 일한 도널드 스나이더는 이렇게 기술하였습니다. “지난 일요일 저녁 「파수대」 연구에는 174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수를 수용하기에는 홀이 너무 비좁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홀이 사람으로 꽉 차 있다 보니 너무나 덥습니다.”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을 임차한 이런저런 장소들로 여러 차례 옮겨야 하였습니다.

1958년 9월에 이층 건물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층에는 소규모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이, 2층 전체에는 강당이 자리하였습니다. 1959년에 공사가 끝났고 벨리즈시티 회중은 마침내 자체 왕국회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어 밭의 성장

벨리즈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스페인어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두드러진 영적 성장을 이루어 왔습니다. 1949년 당시 스페인어가 사용되는 곳들이 있긴 하였지만, 선교인들 가운데는 스페인어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후에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벨리즈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1955년에 온 레슬리 피처가 있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와 접해 있는 벨리즈 서부의 벤케비에호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곳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레슬리가 도착해 보니, 일부 주민들은 벌써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로부터 일 년 전쯤에 과테말라 서쪽 멀리 있는 산베니토에서 나탈리아 콘트레라스라는 여자가 진리를 알게 되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벤케비에호에 사는 친족들에게 증거하려고 국경을 건너 벨리즈로 왔습니다. 친족들 중 한 명인 세르빌리아노 콘트레라스는 나탈리아가 성서를 사용하여 우상 숭배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을 특히 유심히 들었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1998년에 10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충실한 증인이었습니다. 그의 자녀들과 손자녀들 가운데 많은 수가 증인입니다. 그 초창기 시절에 벤케비에호에 있던 소수의 전도인들이 돌보던 구역은 과테말라 국경 너머로 멜초르데멘코스까지 확장되었고 그곳에서도 집회가 열렸습니다. 결국 멜초르데멘코스에 회중이 하나 설립되었습니다. 벤케비에호 회중 성원들의 열심 있는 태도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일찍이 1956년에, 지역 대회와 순회 대회 프로그램 일부분이 스페인어로 제공되었습니다. 하지만 1968년 2월이 되어서야 오렌지워크에 있는 왕국회관에서 순회 대회 프로그램 전체가 스페인어로 제공되었습니다. 85명이 참석하였으며 네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스페인어를 말하는 마르셀로 도밍게스와 라파엘 메디나 형제는 디오니시오 테크와 카탈리나 테크와 같은 스페인어를 말하는 다른 증인들과 함께 영어 집회와 대회에 충실하게 참석하였습니다. 영어에 대한 이해가 제한되어 있었음에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1964년 10월이 되어서야 20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스페인어 회중이 오렌지워크에 설립되었는데, 그들은 이전까지는 영어 회중과 연합해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인접국들인 엘살바도르와 과테말라에서 내전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벨리즈로 피난을 왔습니다. 피난 온 사람들 중에는 스페인어를 말하는 몇몇 증인 가족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장로와 봉사의 종과 파이오니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들에서 온, 두 언어를 구사하는 일부 선교인들처럼 스페인어 밭의 확장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참그리스도인들은 집집으로 전파한다”

하루는 낯선 사람 두 명이 오렌지워크에 있는 마르가리타 살라사르의 집 문을 두드리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마르가리타 살라사르라는 여호와의 증인을 아시나요?” 이 두 방문객은 오렌지워크에서 남서쪽으로 3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마을인 오거스트파인리지에서 온 테오필라 마이라는 23세 된 여자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모녀가 마르가리타를 찾고 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테오필라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 년 전쯤에 아홉 달 된 아들이 많이 아팠던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아들이 고침을 받도록 보테스라는 마을에 있는 산타클라라라는 성스러운 동정녀에게 아이를 데려갔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운전사가 모는 트럭 앞자리에 타고 갔는데 운전사는 나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지요. 그는 아기를 보테스에 데려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후에 성서는 형상을 숭배하는 것을 승인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정말 관심이 갔지요. 한동안 그 운전사는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배운 여러 가지 성경 진리를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계속되는 테오필라의 말입니다. “한번은 차를 타고 가는 중에 그 트럭 운전사가 참그리스도인들은 집집으로 전파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그렇게 한다면서 증인들은 사람들에게 스바냐 1:14과 2:2, 3과 같은 성구들을 읽어 준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아기는 팔로 안은 채 오거스트파인리지에서 집집으로 다니면서 그 성구들을 이웃 사람들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후에 그 운전사는 정말 진리를 알고 싶다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해 보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는 살라사르 가족에 관해 말해 주었고 오렌지워크 어디에 가면 그들을 찾을 수 있는지도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오렌지워크에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르가리타는 테오필라와 그의 어머니가 아침에 처음으로 자신을 찾아왔을 때를 기억합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마르가리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 모녀는 성서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하였고 우리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두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은 사람들이 성서를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가서 가르쳐 준다는 말이 정말인지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나는 정말 그렇다고 확신시켜 주면서 그들이 사는 마을로 2주에 한 번씩 가서 성서 연구를 같이 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마르가리타와 그의 남편인 라몬이 오거스트파인리지에 도착해 보니, 테오필라는 성서 연구를 하려고 자신의 가족 중 성인 여섯 명을 모아 놓고 있었습니다. 후에 오렌지워크의 파이오니아들은 살라사르 가족과 함께 비좁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따라 34킬로미터를 정기적으로 여행하여, 테오필라와 그의 가족이 성서 연구를 하는 동안 그 마을에서 전파하였습니다. 에이미벨 앨런은 여러 성서 연구를 사회하느라 종종 그 마을에서 밤을 묵기도 하였습니다. 테오필라는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다섯 달 뒤인 1972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1980년에 오거스트파인리지에 회중이 설립되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테오필라의 가족 중 37명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오지 여행을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두다

벨리즈시티를 비롯한 큰 도시들에서는 구역을 철저하게 돌고 있는 데 반해, 시골 구역에서는 정기적인 봉사가 수행되지 못하였습니다. 초창기에 선교인들은 남부 지역에 있는 마을들로 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남쪽에 있는 스탠크리크 주와 털리도 주를 다른 지역과 연결하는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그 후 1971년 초에 지부는 벨리즈 강우림 지대의 외딴곳들에 사는 마야족인 모판족과 켁치족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오지 여행이라고 불린 연례 격지 봉사 마련을 조직하였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차량과 통나무배를 세내어 당그리가에서 펀타고다에 이르는 지역에 있는 크고 작은 마을들과 더 남쪽으로 과테말라 국경 근처에 있는 바랑코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한 그룹은 트럭을, 두 명 내지 네 명은 오토바이를 타고 함께 격지 봉사를 갔습니다. 밤에는 매번 다른 마을에서 묵었고, 낮에는 트럭에 타고 온 다수의 사람들이 마을에서 봉사하는 동안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은 짝을 지어 오솔길을 따라 외딴곳에 있는 농장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펀타고다 지역에서 형제들은 배낭을 메고 마을에서 마을로 다녔습니다. 그들은 종종 마을 주민에게 전파하기 전에 마을의 연로자들이 모이는 장소인 카빌도에 있는 알칼데(추장)에게 말해야 하였습니다.

선교인인 라이너 톰슨의 말입니다. “형제들이 한 마을에 도착해 보니, 마을 연로자들이 카빌도에 모여 옥수수 수확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지요. 모임이 끝나자 그들은 형제들에게 왕국 노래를 한 곡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피곤하고 배도 고픈 데다가 노래 책도 없었지요.” 톰슨 형제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마음을 다해 노래를 불렀고 연로자들은 아주 좋아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망고크리크에 그리고 후에는 마야족이 사는 아주 큰 마을인 산안토니오에 회중들이 생겼습니다.

산티아고 소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 밤에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걸어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길 가장자리로 걷지 않고 한 줄로 서서 길 중앙으로 걸어가는 요령을 익혔는데, 길가 덤불에는 틀림없이 뱀이 숨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지요. 또한 물이 떨어졌을 때는 수분을 머금은 덩굴 식물에서 물을 얻는 법도 터득했습니다.”

때로는 봉사를 간 사람들이 두 명이나 네 명씩 짝을 이루어 마을 이곳저곳에서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모두 다시 모였습니다. 보통 두 사람은 요리를 하기 위해 남아 있곤 하였습니다. 산티아고는 씩 웃으며 이렇게 회상합니다. “식사 시간이 정말 괴로울 때도 있었어요. 요리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한번은 차려 놓은 음식을 보고 ‘이게 뭔가요?’ 하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요리를 한 사람은 ‘글쎄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음식인 거는 확실해요’ 하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직접 요리를 한 사람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이라면, 주위를 배회하던 삐쩍 마른 개에게 먼저 맛을 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굶주린 그 개조차도 먹을 생각을 안 하더군요!”

켁치족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로돌포 코콤과 그의 아내 오펠리아는 코로잘에서 남부 지역에 있는 켁치족의 외딴 마을인 크리크사코로 이사하였습니다. 오펠리아는 이 마을에서 성장하였는데, 증인들은 연례 격지 봉사를 올 때에만 이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오펠리아는 열네 살쯤 되었을 때 오렌지나무 밑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발견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지만, 나중에 결혼해서 코로잘에 살게 된 뒤에야 남편 로돌포와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들인 마르샬 케이 그리고 마누엘라 케이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1981년에 크리크사코로 이사한 이 부부는 증인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로돌포는 증인들을 찾으러 펀타고다로 갔는데, 그곳까지는 걷기도 하고 배를 타고 강과 바다를 건너기도 하면서 최소 여섯 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로돌포는 펀타고다에서 도널드 니브루지라는 파이오니아를 만났고, 도널드는 로돌포 부부와 편지로 연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크리크사코에는 우체국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널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펀타고다에 있는 우체국에 가서 크리크사코로 편지를 부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더니 어떤 사제가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사제는 자신이 여호와의 증인을 위해 배달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약 여섯 달 동안 성서 연구를 위해 오가는 편지를 배달하였습니다.

“사제는 자신이 배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상당히 화가 났고 더 이상 편지를 전해 주지 않았지요.” 도널드의 말입니다.

사제가 편지를 배달해 준 몇 달 동안, 도널드는 로돌포 부부와 연구를 하기 위해 크리크사코로 여러 차례 여행하였습니다. 다음번 연례 격지 봉사 때가 되자 로돌포는 야외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널드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나흘 동안 로돌포를 데리고 여러 마을에서 전파하였고, 봉사를 하면서 형제들과 나눈 교제는 그가 진보하는 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지요.”

로돌포의 말은 이러합니다. “아내와 나는 우리 마을에서 전파하곤 하였는데, 배운 내용을 가지고 단지 우리 둘이서만 그렇게 한 것이지요. 나와 연구한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심한 반대를 받았습니다. 어떤 연구생들은 마을에 기부된 약품과 식품과 의복을 지급받지 못했지요. 장모님도 우리의 활동을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아내와 나는 크리크사코에서는 영적으로 진보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우리는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펀타고다로 이사하여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잘 발전하여 1985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이 부부는 레이디빌 회중과 연합하고 있으며, 로돌포는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바다를 다니며 영적 고기잡이를 하다

작은 섬들과 해안가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전파하기 위해 매년 바다를 여행하며 격지 봉사를 할 마련을 하였습니다. 그러한 마을로는 홉킨스, 세인바이트, 플라센시아, 펀타네그라, 몽키리버타운 등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육로를 통해 그런 곳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폴리토 베번스는 비수기가 되면 자신의 바닷가재잡이 배를 이끌고 파이오니아와 선교인들 총 네 명과 함께 두 주 동안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하면서, 거쳐 가는 모든 곳에 들렀습니다.

매년 오지와 바다로 가는 격지 봉사 마련에 자주 참여했던 도널드 니브루지는 암브론쇼 에르난데스의 돛단배를 빌려 봉사를 갔던 좋은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 일 덕분에, 보초라는 애칭으로 알려져 있던 암브론쇼가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도널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이듬해에 우리 네 사람은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두 주 동안 봉사할 계획을 했는데, 그 무렵에는 보초의 배가 팔리고 없었지요. 보초는 다른 어부를 소개시켜 주었고 그는 자신의 동료 그리고 보초와 함께 기꺼이 우리도 태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 두 쌍과 어부 세 사람이 그 배에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때 보초는 야외 봉사를 시작했지요. 플라센시아 항구에 갔을 때는 요트가 아주 많이 정박해 있어서 요트들 사이를 오가며 전파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었던 두 어부는 두 주 동안 매우 협조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어느 마을에서 하루 종일 전파하고 돌아오자, 두 사람은 작은 석유곤로를 이용해서 미리 사 놓은 닭으로 요리를 해 주었습니다.” 다음 해에 바다로 격지 봉사를 떠날 무렵에 보초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지난 18년간 벨리즈시티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습니다.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훌륭한 결실을 맺다

벨리즈 남부의 털리도 주는 완만한 구릉지와 울창한 강우림이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에 흩어져 있는 마야족 마을들에는 바닥이 흙으로 된 초가집에서 사는 모판족과 켁치족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그저 괭이 하나로 농장에서 고되게 일하며 힘들게 살아갑니다. 가뭄이 지속되는 기간에는 옥수수, 콩, 카카오 재배를 위해 밭으로 손수 물을 퍼 날라야 합니다. 많은 마을 여자들은 벨리즈 전역의 기념품 가게로 갈 전통 자수 공예품과 바구니를 만듭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젊은 사람이 인구가 더 많은 중심지에서 공부나 일을 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고 있습니다.

1995년에 프랭크 카르도자와 앨리스 카르도자는 털리도 주에서 「왕국 소식」 34호 “생활이 왜 이토록 문제들로 가득 차 있는가?”를 배부하는 일을 돕기 위해 4월과 5월에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프랭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예전에 그 지역으로 연례 격지 봉사를 가 본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곳으로 이사하여 마야족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배우도록 돕는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지요. 지부에서는 내게 머물 곳을 세내어 성서 연구 집단을 구성하고 산안토니오에서 특별 강연을 할 것을 권했습니다. 우리는 산안토니오를 비롯한 다른 여덟 개 마을에서 「왕국 소식」을 배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카르도자 부부는 지하 단칸방을 세내어 매주 집단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고 몇 주가 지나지 않아 서너 가족이 연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 관심자들도 카르도자 부부와 함께 낡은 픽업트럭을 타고 바퀴 자국이 나 있는 비포장 도로로 펀타고다까지 한 시간을 가서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 집회를 보았습니다. 첫 달에 프랭크는 산안토니오에서 특별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참석한 사람들 중 한 명인 하수스 이츠는 깊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나사렛 교회 성원이었던 그는 특히 지옥불 교리가 이교에서 기원한 것이며 성서에서 말하는 지옥은 인류의 공통 무덤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모임이 끝나자 프랭크를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그 점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그는 일 년 뒤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카르도자 부부는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기로 했던 두 달이 다 되었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 돌볼 수가 없을 만큼 연구가 많이 생겼지요. 레이디빌에 있는 안락한 집으로 돌아가자니 마음과 양심이 괴로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산안토니오에 머물기로 할 경우, 우리가 있던 집의 지하 단칸방 대신 위층을 세내어 더 나은 여건에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일단 작은 싱크대와 빗물을 모아 둘 수 있는 홈통을 설치하고, 살면서 수세식 변기를 달고 전기도 들어오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지요. 우리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다면 이 지역에 회중이 생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 문제에 관해 기도했습니다. 그런 다음 지부에 편지를 써서 산안토니오에 살면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싶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부부가 내린 결정을 축복하고 계심이 이내 분명해졌습니다. 불과 여섯 달이 채 안된 11월에 카르도자 부부가 세 들어 살던 집에서 첫 공개 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4월부터는 산안토니오에서 신권 전도 학교와 봉사회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산안토니오의 이 작은 집단 성원들은 매주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펀타고다까지 왕복 65킬로미터를 여행할 필요가 없게 되어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아버지의 위협도 나를 막을 없었지요’

산안토니오의 진실한 성서 연구생들은 신속히 발전하기 시작했고, 진리에 대해 그들이 나타낸 사랑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프랭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야족이 사는 마을에서 특히 여자들은 부끄러움을 아주 많이 타고, 전통에 따라 아버지와 남편에게 복종하지요. 여자들은 보통 낯선 사람들과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자들이 호별 방문 봉사에 참여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었지요.”

당시 스무 살이었던 프리실리안 쇼는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으로서 그 지역에 사는 이웃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습니다. 한번은 프리실리안이 올케인 아말리아 쇼와 재방문을 하던 중에 갑자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프리실리안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에게 공개 전파 활동을 하러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그 일을 못하게 한 데다가 아버지가 무서웠기 때문이었지요. 봉사하러 나간 그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아버지가 자신이 다니는 침례교회 앞에 있는 걸 뜻하지 않게 보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풀밭에서 몸을 숙이고 있었지요. 하지만 나는 조금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올케도 알다시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고 계시잖아요.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에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여호와이시죠.’”

프리실리안의 아버지는 노발대발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놓여 있었는데 아버지가 프리실리안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였던 것입니다. 프리실리안은 자신이 침례를 받게 될 대회가 있기 바로 전날까지 그 문제에 관해 기도한 뒤, 마침내 용기를 내어 아버지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내일 벨리즈시티에 가요” 하고 프리실리안이 말했습니다.

“뭐 하러 가는데?”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프리실리안이 대답했습니다. “침례를 받을 거예요.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요. 전 아버지를 사랑해요. 하지만 여호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버지는 화를 내며 “정말 그러겠다는 거냐?” 하고 물었습니다.

프리실리안은 “네, 사도행전 5:29에서는 사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알려 주거든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격노한 아버지는 자리를 박차고 가 버렸습니다. 프리실리안은 그때의 기억을 이렇게 떠올립니다. “대회로 가는 트럭에 타자 그제야 안심이 되었어요. 대회가 끝나고 집에 오면 아버지가 어떻게 하실지 알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그때가 되면 나는 이미 침례를 받았을 것이고 따라서 심지어 아버지가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옳은 일을 한 것임을 알고 있었지요.”

아버지는 프리실리안이 집에 돌아왔을 때 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후에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프리실리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위협을 해도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고는 그 이후로 태도가 누그러지셨습니다.”

반대자가 여호와의 편에 서다

산안토니오에 새로 형성된, 열심 있는 전도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이 영적으로 잘 발전하고 있었을 때, 카르도자 부부는 갑작스럽게 마을 의회로부터 산안토니오를 떠나라는 서면 통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프랭크는 예전에 신청료를 지불하였을 때, 마을 의회로부터 거주 허가를 이미 취득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을의 한 유력한 인사가 카르도자 부부를 쫓아내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의회가 소집되었을 때 프랭크의 성서 연구생 세 명이 그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프랭크의 집주인도 카르도자 부부를 거들면서 그들을 쫓아낸다면 그 부부가 내던 방세를 마을 의회가 지불해야 한다고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프랭크 자신도 사유 재산을 임차한 사람에게 떠나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고 명시한 국토부에서 보내온 편지를 제출하였습니다. 결국 마을 의회는 카르도자 부부에게 거주 허가를 내 주었습니다.

카르도자 부부를 쫓아내고 싶어 했던 사람인 바실리오 아는 전직 알칼데(추장)로서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산안토니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반대하였습니다. 이 작은 집단 성원들이 왕국회관을 건축할 부지를 구하려고 하자, 그는 “이 마을에선 절대 왕국회관을 못 지을 줄 아시오!” 하고 경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부지를 구했고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놀랍게도, 1998년 12월에 있었던 왕국회관 봉헌식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바실리오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바실리오의 결혼한 두 아들은 가정생활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바실리오는 아들들을 도와 달라고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 두 차례나 요청하였지만, 두 번 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실리오의 아내인 마리아는 아들들이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고 가정생활도 개선되고 있음에 유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느님에 관해 정말 알고 싶었고, 하느님에 관해 더 배우려면 왕국회관에 가야 한다고 남편에게 이야기했지요.” 바실리오는 자신이 “그 외국인”이라고 부르던 프랭크 카르도자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강한 반감을 쉽게 떨쳐 버리지는 못했지만, 아들들이 성서 진리를 생활에 적용함에 따라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바실리오는 직접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몇 번 대화를 나눈 후에 그가 함께 성서 연구를 하기로 한 사회자가 누구였을까요? 다름 아닌 “그 외국인”, 바로 프랭크 카르도자였습니다!

바실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에서 읽은 내용은 내 정신을 변화시켰습니다. 나는 60년간 가톨릭교를 믿으면서 성당에서 우상들 앞에 향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와에 관해 그분의 말씀인 성서를 통해 배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형제가 된 프랭크 카르도자에게 했던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었다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마을과 내 종교와 관련해서 옳다고 믿었던 것들에 열심이었지요. 그랬던 내가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매술 치료와 관련된 마야족의 전통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였습니다. 또한 마야족의 정치 운동에 관여하는 일도 그만두었지요.” 현재 바실리오 아와 마리아 아는 침례 받은 전도인으로서 행복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들은 사랑 많고 기쁨에 넘치며 열정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벨리즈의 외딴 지역에서는 많은 전도인이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리며 세 시간 이상을 걸어 집주인을 찾아갑니다. 또한 그들은 집회에도 빠지려 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안드레이아 이츠는 어느 날 저녁 신권 전도 학교에서 집주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안드레이아는 아들들과 함께 아보카도 열매를 따느라 정글 속으로 3 내지 5킬로미터가량을 걸었습니다. 그 와중에 벌에게 스물세 방을 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아는 집으로 가서 가족을 위해 식사를 차리고 집회에 와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안드레이아의 얼굴은 벌에 쏘여 퉁퉁 부어 있었지만 행복해 보였습니다. 크고 작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트럭이나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여행을 하고도, 연합하여 참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할 수 있기에 기쁨에 넘쳐 있는 우리 마야족 형제 자매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격려가 됩니다.

허리케인이 벨리즈를 강타하다

지난 115년간, 51개의 허리케인과 열대성 폭풍이 벨리즈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1930년 이래로, 벨리즈를 관통했거나, 큰 피해를 입히고 인명을 앗아 갈 정도로 근접한 허리케인이 열두 개나 있었습니다. 그중 피해가 아주 컸던 허리케인으로 1961년 10월 31일 이른 아침에 벨리즈를 강타한 허리케인 해티가 있는데, 시속 300킬로미터의 강풍과 해일을 동반한 해티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망하였습니다. 해수면 위로 겨우 30센티미터 높이에 자리한 벨리즈시티에 진흙이 30센티미터나 쌓였습니다. 지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습니다. “[벨리즈시티에 있는] 형제들의 집 대부분이 심하게 파손되거나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형제들의 의복은 분실되거나 물에 젖어 못 쓰게 되었습니다.

불도저가 거리를 치우고 있고 파괴된 집들의 잔해를 태우느라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곳 [선교인] 집에는 물이 약 60센티미터나 찼기 때문에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밖에는 3미터가량 물이 찼지만, ··· 다행히 선교인 집은 길거리보다 높은 지대에 지어져서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 살 수 있는 식품이 거의 없고, ··· 아직도 시신 발굴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열흘 뒤에 지부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당그리가의] 상황은 이곳 [벨리즈시티]보다 더 심각합니다. 사람들은 뭐라도 사려면 쿠폰을 얻기 위해 하루에 여덟 시간씩 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군대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으며 돈으로는 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두 소년이 사망하였고 아이들의 아버지는 집이 무너질 때 두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두 소년 모두 활동적인 전도인이었으며, 그중 열두 살 된 소년은 교사에게 증거하여 훌륭한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허리케인의 중심부가 벨리즈시티와 당그리가 사이를 지나갔기 때문에 두 곳에 사는 대부분의 형제들은 집과 소유물의 일부 혹은 전부를 잃었습니다. 허리케인이 물러간 뒤, 총독은 비상 지휘권을 발동하고 통행금지를 시행하였으며 그러한 조처들을 시행하고 약탈자들을 사살하기 위해 영국 군대를 소집했습니다. 통행금지 시간을 어기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철창 안에서 밤을 보내게 했습니다.

그처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정기적인 회중 집회와 야외 봉사 활동이 가능한 신속히 재개되었습니다. 대피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 데다 땅바닥도 온통 진흙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왕국의 좋은 소식에 담긴 위로가 필요하였고, 여호와의 증인은 그러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지만, 벨리즈 형제들은 다른 나라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낸 사랑과 관대함에 힘입어 기운을 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지부들에서 25개 박스 분량의 의복과 기타 물품을 보내왔고 이것을 증인들뿐만 아니라 증인이 아닌 많은 이웃들에게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맹렬한 허리케인의 공격을 견디어 낸 몇 안 되는 건물들 가운데는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허리케인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공 대피소로 왕국회관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고, 형제들은 기꺼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

“프랫 부인,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겠습니까?”

2000년 10월에 시속 205킬로미터의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허리케인 키스가 앰버그리스 섬의 산페드로를 사흘간 강타하였습니다. 벨리즈시티에서 북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레이디빌에는 사흘 동안 약 80센티미터의 비가 내려 홍수가 났습니다. 42명의 형제들이 레이디빌에 있는 대회 회관으로 대피하였습니다. 코커 섬에 있는 거의 모든 집들이 파괴되었습니다. 앰버그리스 섬과 코커 섬에 살던 57명의 전도인들은 소유물을 거의 혹은 전부 잃었으며, 그 두 섬에는 몇 주 동안 전기와 물이 공급되지 않았고 전화도 끊겼습니다. 수상은 벨리즈 주, 오렌지워크 주, 코로잘 주 그리고 앰버그리스 섬과 코커 섬을 재해 지역으로 선포하였습니다. 약탈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피해 지역 전체에 의무적인 통행금지가 시행되었습니다.

코커 섬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던 시실리아 프랫은 허리케인에 대한 경고를 듣고 몸을 피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가방 하나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날, 열두 명의 자매의 야외 봉사 보고를 막 걷은 시실리아는 오후에 배를 타고 본토로 가 지부에 보고를 제출할 생각이었습니다. 시실리아는 집단의 야외 봉사 보고를 비닐로 조심스럽게 싸서 비상시를 대비하여 준비해 둔 가방에 넣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그날 밤중에 시실리아를 비롯한 몇몇 자매들은 콘크리트로 된 학교 건물로 대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나머지 집단 사람들은 시민 회관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시실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대피해 있던 첫 번째 교실의 함석지붕이 바람 때문에 떨어져 나가 버렸습니다. 모두들 소지품을 황급히 챙겨 다른 교실로 달려갔지요. 콘크리트 건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바람 때문에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바깥을 흘깃 내다보니, 땅은 보이지 않고 주위가 온통 바다로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어요. 몇 안 되는 우리 집단 성원들은 함께 모여 열렬히 기도했습니다. 교실 안에 있던 40명은 모두 종교가 서로 달랐고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이건 하느님이 일으키신 거야’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한 가톨릭교 평신도 전도사는 내게 오더니 ‘프랫 부인,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안 돼요. 나는 여자이고 머리에 쓸 것도 없는 걸요’라고 말하자 그 남자는 ‘그럼, 여기 내 모자를 쓰세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모두를 위해 기도해도 될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허리케인을 일으키신 분이 여호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몇 안 되는 우리 집단 성원들과 함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기도했지요. 내가 기도를 끝마치고 교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아멘’ 하고 말하자 바람이 잠잠해졌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허리케인의 중심부에 들어와 있었던 거지요. 가톨릭 전도사는 ‘훌륭한 기도였어요. 당신의 하느님이 참하느님이십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우리 다섯 명의 증인들이 대피 장소에 계속 머무르기를 바랐고, 사흘 동안 우리에게 음식과 커피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전도인들이 염려되었어요. 다음 날 아침 바람이 잠잠해졌을 때, 대피해 있던 곳을 떠나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쓰러진 나무들과 잔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지요. 바람에 밀려 원래 있던 자리에서 10 내지 15미터를 옮겨 간 집들도 있더군요. 먼저 시민 회관에 가 보았고 자매 두 명과 그들의 자녀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한 자매는 집은 없어져 버렸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습니다.”

허리케인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지부는 폭풍 때문에 피해를 입은 회중들의 야외 봉사 보고를 걷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코커 섬에서 온 보고는 제일 먼저 도착하였습니다. 시실리아가 보고를 비상용 가방에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그들이 잘 있는지 보려고 지부에서 온 형제들에게 직접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몇 주간, 허리케인으로 황폐된 섬들에 있는 형제들은 구호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자원 봉사자들로부터 실제적인 도움도 받았는데, 자원 봉사자들이 형제들의 집과 앰버그리스 섬에 있는 왕국회관을 청소하고 수리해 준 것입니다.

코커 섬에서 자원 봉사자 팀과 함께 일한 머를 리처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먼저 임시 숙소를 세우고 구호품을 나누어 줄 마련을 하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전도인들의 집을 수리하기 시작했지요. 일요일 오전에는 모두 함께 야외 봉사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자매의 집 마당에 집회 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청중이 앉을 긴 의자들과 오래된 코코넛 나무 그루터기로 연단을 만들었지요. 우리는 통행금지 시간인 오후 8시를 감안하여 집회 일정을 조정하였고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에 43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가르침 받기 위해 모임

1960년대 말에는 천막을 이용하여 이 나라의 여러 곳에서 대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천막을 세우려면 여러 날 고된 작업을 해야 하였습니다. 산티아고 소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주초에 작업을 시작하여 천막을 치고 긴 의자들은 왕국회관에서 가져오고 다른 의자들은 빌려 왔습니다. 당시에는 대회 때 간이식당 마련이 있었기 때문에 냄비와 접시를 빌리고 요리를 하고 일을 다 마치느라 종종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지요. 어떤 때는 설치 작업을 다 끝내 놓았는데 밤중에 맹렬한 돌풍이 불어 모든 것이 주저앉아 버린 때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 전부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지니 톰슨은 벨리즈시티와 오렌지워크 사이의 시골 지역에서 열린 한 대회에 갔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형제들은 천막을 세우고 긴 의자들을 들여놓기 전에 왕국회관 옆의 덤불을 잘라 내야 하였습니다. 지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역 대회 기간 내내 비가 내렸고 천막 아래에는 물이 흥건하였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에 있는 의자에 발을 걸치고 앉았습니다. 그 지역에 산호뱀들이 우글거린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요. 비가 왔기 때문에 천막 안이나 왕국회관 근처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덤불 속을 다녔다면 위험했을 거예요.”

1970년대에 벨리즈시티 남동쪽 끝 부분에서 약 120미터 떨어져 있는 작은 열대 섬인 버즈아일에서 대회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섬 소유주가 위락 시설로 사용할 생각으로 전기와 물이 공급되며 화장실 설비를 갖춘, 초가지붕을 얹은 강당을 그곳에 지어 놓았던 것입니다. 형제들은 본토에서 섬으로 오기가 용이하도록 나무다리를 놓았고, 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에서 여러 차례 대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1983년 3월에 레이디빌에 대회 회관을 짓기 위해 정부로부터 부지를 임차하였습니다. 처음에 형제들은 순회 대회와 특별 모임과 지역 대회를 열 임시 건물을 지었습니다. 그 후 1988년에 레이디빌 부지에 설치하여 영구적인 대회 회관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철골 구조물을 과테말라에서 매입하였습니다.

중국어 밭의 성장

1920년대 이후로 중국인 이민자들이 벨리즈에 정착해 왔는데, 그중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된 우리 출판물을 즐겨 읽습니다. 예를 들어, 로버타 곤살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빵집을 운영하는 우호적인 대만 여자에게 증거하고 싶었지요. 하지만 그 여자는 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데다가 늘 매우 바빴습니다. 그래도 나는 그 여자에게 두 명의 십 대 자녀가 있다는 걸 알았기에, 하루는 빵집에 갔을 때 중국어로 된 「청소년은 묻는다」 책을 한 권 주면서 다음에 그 책에 대한 소감을 듣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뒤, 차를 타고 빵집 옆을 지나가는데 그 여자가 나를 향해 황급히 손짓을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멈추어 보니 그 여자는 책을 받은 뒤로 내가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며 흥분된 어조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벨리즈로 이민 온 대만 가정의 십 대 청소년들 대부분이 이런저런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 여자는 그런 청소년들 모두가 「청소년은 묻는다」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아들을 시켜 자신이 사는 지역에 십 대 자녀가 있는 대만 가정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게 한 다음 「청소년은 묻는다」 책을 열여섯 권 갖다 달라고 했는데, 한 가족당 한 권씩 선물로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000년 10월에 지부는 구역 내의 중국인들을 돌보는 일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파이오니아와 전도인들을 위해 3개월 과정의 표준 중국어 언어 강습을 마련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떠하였습니까? 몇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포함된 중국어 집단이 형성되었고, 후에 발전하여 회중이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심한 반대를 받으면서도 좋은 소식과 회중을 통해 받은 사랑에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예를 들어, 몬제 첸은 2006년에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협조적이었던 그의 가족은 얼마 안 있어 몬제를 비웃고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족은 몬제가 운영하던 가게를 포함하여 전 재산을 갑자기 팔아 버리고는, 한 시간의 여유를 줄 테니 새로운 종교를 포기하고 가족과 함께 다른 나라로 이주하자고 했습니다. 몬제가 새로 갖게 된 믿음을 포기하기를 거절하자 가족은 그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몬제는 한 형제의 집에서 같이 살면서 성서 연구를 계속하고 집회에도 정기적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와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분은 나를 돌봐 주셨지요. 성서 연구와 묵상 그리고 형제들의 격려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몬제는 2008년 11월에 침례를 받았고, 가족은 몬제의 말과 행실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더 나은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순종했기 때문에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정말 행복해졌어요. 여호와께서는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사랑 넘치는 연합된 형제 관계를 누리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멕시코 지부가 벨리즈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다

통치체는 벨리즈 및 멕시코 지부 위원회와 함께 왕국 활동으로 인한 필요를 주의 깊이 검토한 끝에 멕시코 지부가 벨리즈의 활동을 감독하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련은 200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으며, 벨리즈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많은 유익과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멕시코 지부는 벨리즈에서 왕국회관 건축을 감독하는 일을 도와 왔고, 그렇게 하여 다수의 왕국회관이 완공되었습니다. 2002년 3월 16일에 벨리즈시티에 왕국회관 두 개가 함께 있는 아담한 복합 건물이 봉헌되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아름답게 지어진 새로운 선교인 집과 개축한 레이디빌 대회 회관의 봉헌식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의 봉헌사를 들은 사람들 가운데는 50년 내지 60년간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겨 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왕국회관 건축 팀이 구성된 이후로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건축 팀은 벨리즈 전역에 20채의 왕국회관을 건축하는 일을 도와 왔습니다.

자주 돌지 못하는 구역에서 전파하는 일을 지원하기 위해, 2007년에 325명의 파이오니아가 멕시코에서 벨리즈로 왔습니다. 그러한 지원은 벨리즈에서 복음 전파의 영을 고취시키는 훌륭한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파이오니아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벨리즈를 허리케인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매년 기도하는 교회 지도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여호와의 증인은 2007년에 허리케인에 대비하여 비상시에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실용적인 지침을 받았습니다. 5등급 허리케인 딘이 8월에 벨리즈를 강타했을 때 증인들은 그러한 지침에 대해 참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위험에 처한 형제들 모두가 대피하여 더 안전한 지역에 있는 형제들의 집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뒤에, 벨리즈 전역에서 온 증인들이 집과 왕국회관을 수리하는 일을 도왔으며, 그로 인해 한 지방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을 연합시키다

여호와의 축복 덕분에 현재 벨리즈에는 1800명이 넘는 전도인이 있으며, 이것은 인구 149명당 1명의 전도인이 있는 꼴입니다. 벨리즈 국민 39명 중 한 명이 2009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볼 때 성장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벨리즈에서 지난 80년간 제자를 삼는 활동이 수행된 결과 다양한 배경에서 나온 영적인 사람들이 모아졌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하느님과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인 “순결한 언어”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벨리즈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 세계에 있는 영적 형제 자매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리의 사랑 많으신 하느님 여호와께 영예를 돌리는 공개적 증거를 하기 위해 순결한 언어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스바냐 3:9.

[각주]

^ 7항 1973년까지는 벨리즈를 영국령 온두라스라고 불렀지만, 이 책에서는 문맥에 따라 달리 지칭해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벨리즈라는 국명을 사용한다.

^ 123항 이 허리케인으로 인해, 수도가 벨리즈시티에서 내륙 지역인 벨모판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224면 삽입]

“그 트럭 운전사가 참그리스도인들은 집집으로 전파한다고 이야기하더군요”

[234면 삽입]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에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여호와이시죠”

[208면 네모]

벨리즈 개요

국토

해안가의 저지대 평원은 남부 지역에 있는 마야 산맥 쪽으로 갈수록 높아진다. 삼림에는 재규어, 퓨마, 검정울음원숭이, 돼지의 일종인 페커리, 녹색이구아나, 악어 그리고 60종에 이르는 뱀이 서식하는데, 그중에는 노란 턱을 가진 맹독성의 풀살모사도 있다. 또한 멸종 위기에 처한 금강앵무와 화려한 무지개왕부리를 포함하여 거의 600종에 달하는 조류가 있다. 산호, 해면동물, 비늘돔에서부터 매너티, 꼬치고기, 고래상어에 이르기까지 해양 생물들도 매우 다양하다.

주민

주민들 중에는 마야족(켁치족, 모판족, 유카텍족), 크레올족(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의 후손인 혼혈 인종), 메스티소족(스페인인과 마야족의 혼혈 인종), 가리나구족(아프리카인과 카리브족의 혼혈 인종), 동인도인, 레바논인, 중국인, 독일과 네덜란드 출신의 메노파 교도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있다.

언어

공식 언어는 영어이지만, 벨리즈 크레올어, 스페인어, 가리푸나어, 켁치어, 마야어, 독일어, 표준 중국어도 쓰인다.

직업

많은 주민들이 사탕수수와 열대 과일을 재배하고 수출하는 일에 고용되어 일한다. 고기잡이와 관광 산업도 많은 사람의 수입원이다.

식품

여러 문화가 공존하다 보니 맛있는 다양한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전통적으로 인기 있는 음식은 코코넛 밀크에 쌀과 콩을 넣고 익힌 요리로, 여기에 튀기거나 약한 불로 끓인 닭고기나 쇠고기나 생선 그리고 튀긴 플랜틴 바나나를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다. 맛 좋은 해산물이 풍부하며 사람들도 즐겨 찾는다.

기후

중앙아메리카의 카리브 해 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덥고 습한 아열대성 기후이며 허리케인의 피해를 자주 입는다.

[215면 네모와 삽화]

가리나구족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을 보이다

베벌리 앤 플로레스

출생 1961년

침례 1993년

소개 가리푸나족 출신으로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현재는 동족이 여호와에 관해 배우도록 돕고 있다.

▪ 가리나구(가리푸나의 복수형)족은 17세기 초에 노예들과 카리브 토착민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후손입니다. 가리푸나어는 프랑스어와 스와힐리어의 특징을 지닌 아라와크어군에 속한 언어입니다.

가리나구족의 종교는 아프리카인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이 혼합되어 있으며 가톨릭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일례로 음식과 음료를 바쳐 죽은 조상들을 달래는 두구라고 하는 복잡한 의식이 있습니다. 베벌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는 두구 의식을 믿지 않으셨어요. 그 모든 음식을 죄다 묻어 버리는 행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좋게 여기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어 하셨지요. 어머니는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거지!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이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분들이 돌아와 우리에게 해를 끼칠 이유가 있겠니?’ 하고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베벌리는 자신이 진리를 배웠을 때 어떻게 했는지 계속 이렇게 설명합니다. “가리푸나족인 나는 당그리가에 가서 동족들에게 전파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대부분의 가리나구족 사람들이 동족이 하는 말에 더 잘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가리푸나어로 증거를 하면 많은 사람이 멈추어 내가 하는 말을 들었고, 몇몇 사람들은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고도 비성경적인 전통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지요.”

[218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봐 주셨답니다”

릴리 밀러

출생 1928년

침례 1960년

소개 혼자 여섯 자녀를 키웠으며 47년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해 오고 있다.

▪ 릴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회상합니다. “1959년에 에이미벨 앨런이 내게 성서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이미 교회에서는 집집으로 다니는 그런 모든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경고를 했었지요. 나는 성서만 사용하여 연구를 하기로 하였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침례를 받았지요.

처음에는 전파하기가 어려웠어요. 손이 어찌나 떨리던지 성서를 들고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죠. 하지만 배운 내용을 전해 주고 싶은 열망이 예레미야의 말처럼 ‘내 뼛속에 갇혀서 타오르는 불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든 듣지 않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예레미야 20:9.

릴리는 어떻게 혼자 여섯 자녀를 키우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수 있었습니까? 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고 그분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비스킷을 만들었지요. 딸들과 같이 나무 곤로에 비스킷을 구웠고, 사람들은 곤로에서 막 나온 따끈따끈한 비스킷을 사려고 줄을 섰습니다. 비스킷을 다 팔면, 아이들은 학교에 갔고 나는 야외 봉사를 하러 나갔지요.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봐 주셨답니다.”

릴리는 1969년 이후로 코로잘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해 오고 있습니다. 맏아들과 두 딸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으며, 릴리는 지금까지 69명이 침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227, 228면 네모와 삽화]

오지 여행—열대 강우림 속에서 전파하는 일

마사 사이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1991년 3월에 벨리즈 전역에서 온 23명의 형제 자매들은 열대 강우림의 깊숙한 곳에서 열흘간 전파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 펀타고다에 모였습니다. 옷과 담요와 해먹과 함께 영어와 스페인어와 켁치어 출판물을 준비하였지요. 그리고 다니면서 먹을 빵 200개를 포함하여 먹을 것도 챙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커다란 케이폭(솜털)나무의 속을 파내어 만든 카누를 타고 출렁이는 바다로 나섰습니다. 우리는 크리크사코 마을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고 야영 준비를 했습니다. 형제들이 해먹을 설치하는 동안, 자매들은 우리가 즐겨 먹는 음식 중 하나인 돼지 꼬리 스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카사바, 얌, 그린 플랜틴, 코코넛, 삶은 계란과 함께 돼지 꼬리를 넣고 걸쭉하게 끓인 요리이지요.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 안 있어 우리를 환영하려는 켁치족 마을 사람들의 방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두 시간 안에 마을 사람 전체에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 형제들은 경찰서 아래에 매단 해먹에서 잠을 잤는데, 그 경찰서는 버팀대 위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자매들은 초가지붕을 얹은 마을 연로자들의 모임 장소인 카빌도 안에서 잠을 잤지요.

다음 날 우리는 카누에 다시 짐을 싣고 지류를 따라 올라갔는데, 어떤 곳들은 맹그로브 뿌리가 아주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어둡고 음산하였습니다. 그렇게 약 30분을 간 뒤에 배에서 내려 또다시 한 시간 반 동안 숲 속을 걸어 선데이우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체구가 작고 짙은 올리브색의 피부에 머리털이 곧고 검었습니다. 대부분 맨발이었으며, 여자들은 마을 고유 의상인 치마를 입고 구슬 장신구를 달고 있었지요. 초가지붕에 흙바닥인 집들은 내부에 칸막이도 없었고 해먹 외에는 가구도 전혀 없었습니다. 집들 근처에는 공용으로 사용하는 요리용 화덕이 있었죠.

사람들은 매우 우호적이었고 우리는 관심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켁치어로 된 출판물을 가지고 있으며 켁치어 성서를 사용하여 성구를 보여 줄 수 있다는 사실에 특히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수탉과 숲 속의 새들과 울음원숭이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습니다. 아침 식사를 든든하게 하고서 전날 관심을 나타낸 모든 사람을 재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내년에 다시 연구를 하러 올 때까지 혼자서 연구를 계속하도록 그들 모두를 격려하였습니다. 남은 여정도 강우림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외딴 마을들을 방문하면서 비슷한 방식으로 보냈습니다.

숲 속에서 열흘간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우리가 거쳐 왔던 긴 여정과 방문했던 많은 마을이며, 만났던 모든 사람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다음 해에 다시 올 때까지 뿌려 놓은 진리의 씨들을 지켜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드렸지요. 발도 아프고 몸도 피곤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해의 오지 여행에 참여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 여호와에 대한 감사로 벅차올랐습니다.”

[235, 236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야족 사람들

호르헤 쇼와 니콜라스 쇼 (함께 있는 사람은 여동생인 프리실리안)

출생 1969년과 1971년

침례 1997년

소개 마야족은 전통적으로 부모에 대한 존경과 절대적인 복종을 매우 중요시하며, 심지어 결혼한 성인이라도 그러할 것이 기대된다.

▪ 니콜라스와 호르헤가 여호와를 알고 사랑하게 되자, 아버지는 그들이 그리스도인 활동을 하는 것을 완고하게 반대하였습니다.

니콜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유익한 내용을 배우고 있다고 아버지께 설명을 드렸지만, 침례교인인 아버지는 내 마음을 몰라주셨어요. 아버지를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가 않아서 성서 연구를 몇 차례 그만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내가 자녀들에게 좋은 본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요. 아내와 자녀들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웃는 법이 없었습니다.

성서를 연구하고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자, 진리의 도움으로 나쁜 행실을 중단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고 버는 돈을 낭비하는 일 없이 가족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현재 우리 가족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바쁘며, 우리 집에는 행복과 웃음이 가득합니다.”

호르헤의 상황도 매우 비슷하였습니다. 호르헤는 자주 술에 취하고 상스러운 말을 썼기 때문에 가정 문제가 있었으며, 주말이면 집에 있는 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성서를 연구하면서 행실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호르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발전해 감에 따라 아버지의 반대는 더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족을 거짓 예언자들이라고 불렀지요. 벌채용 칼로 우리를 위협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성서 연구 사회자였던 카르도자 형제는 아주 일찍부터 우리를 박해에 대비시켜 주려고 했지요. 그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만약 가산을 포기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버지는 저를 사랑하세요. 그러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버지는 바로 그렇게 하였지요.”

호르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배우고 있는 내용이 정말 좋았고 내 생활도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 새 인간성을 나타냄에 따라 우리 가족도 유익을 얻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서로를 존중하였고 행복하게 함께 지냈지요. 현재 나는 전파 활동을 하면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으며 여호와 덕분에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삽화]

프랭크 카르도자는 호르헤에게 증거하였습니다

[238, 239면 네모와 삽화]

크게 필요한 곳에서 기쁘게 섬기다

왕국 선포자들이 더 필요한 나라로 이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도전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외국 밭에서 해를 거듭하며 계속 머물러 있는 데는 종종 더 많은 노력과 자기희생이 요구됩니다. 많은 우리 형제 자매들은 굳건한 태도로 기쁨 가운데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아서 곤살레스와 로버타 곤살레스는 1989년에 세 살 된 아들인 돌턴을 데리고 벨리즈에서 봉사하기 위해 미국에서 왔습니다. 로버타는 이렇게 인정합니다. “안정적이고 보수가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실직자가 아주 많은 나라로 이주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웠지요.”

아서도 그 말에 동감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반드시 신뢰해야 하지요. 성서에서 아브라함에 관해 읽을 때면 그가 어떻게 집과 친족과 익숙한 모든 것을 두고 떠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잘 돌봐 주셨지요. 우리가 겪은 어려움 중 하나는 벨리즈 크레올어에 익숙해지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호와께 의지하였고, 그분은 우리를 돌봐 주셨습니다.”

프랭크 카르도자와 앨리스 카르도자는 1991년에 벨리즈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왔습니다. 프랭크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선교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요. 하지만 자녀가 넷 있는 우리가 길르앗 학교에는 결코 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내딸이 학업을 마쳤을 때, 우리는 다른 나라로 이주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지요. 우리는 「파수대」에서 벨리즈에 관한 내용을 읽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앨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단 3년간 있어 보기로 했었는데, 이제 이곳에 온 지도 18년이 흘렀네요. 이곳이 정말 좋아요!”

프랭크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일하는 것도 좋아하지요. 그래서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습니다. 다 돌볼 수 없을 만큼 많은 연구가 생기고 사람들이 진리에 반응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생애 최고의 시기를 즐겨 왔습니다. 세상의 금은보화를 다 준다 해도 이 소중한 특권과 바꾸지 않을 겁니다.”

칼 사이먼스와 마사 사이먼스는 1988년에 텍사스에서 벨리즈로 이주하였습니다. 마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주할 당시 열 살과 여덟 살 된 두 자녀가 있었어요. 벨리즈에서 우리는 회중과 함께 오지에 있는 마을들을 다니며 온종일 전파 활동을 했습니다. 또한 우리 가족은 대회 회관을 건축하는 일도 함께하였으며, 대회 기간이면 같이 지내는 형제 자매들로 늘 집 안이 북적거렸죠. 우리는 이곳에서 자녀들을 양육할 수 있어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특별 파이오니아와 선교인들과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 물론, 전기도, 수도 시설도, 건전지도 없고 전화도 못할 때면 그냥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었던 이 생활을 다시 하겠냐고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렇게 할 거예요.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섬김으로 우리의 삶은 참으로 풍요로워졌습니다.”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턴, 로버타, 아서와 그의 어머니 마사 곤살레스

앨리스 카르도자와 프랭크 카르도자

칼 사이먼스와 마사 사이먼스

[250면 네모]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있답니다!”

알레한드로 라카요와 리베카(베키) 라카요

출생 1950년과 1949년

침례 1966년과 1959년

소개 1972년에 길르앗을 졸업한 뒤, 엘살바도르, 벨리즈, 니카라과, 멕시코, 온두라스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였다. 현재 미국에서 순회 활동을 하고 있지만 벨리즈에서 구호 활동을 했던 때를 결코 잊지 못한다.

▪ 베키는 2000년 10월 2일 월요일에 이렇게 썼습니다. “허리케인 키스가 우리를 덮쳤다! 약 이틀 반 동안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있다.”

다음 날 비바람이 잦아든 뒤에, 알레한드로와 특별 파이오니아인 도널드 니브루지는 앰버그리스 섬으로 얼마의 식량을 가져다줄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과 지방 장로 두 명은 두 회중의 모든 전도인을 방문하여 그들이 잘 있는지 확인하였습니다.

베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수요일에 벨리즈 각지에서 온 형제들이 섬들에 있는 형제들을 위해 식품과 물과 의복을 지부 사무실로 가져왔어요. 얼마 안 있어 로비와 도서실은 구호품으로 가득 차게 되었지요.”

한편, 알레한드로와 다른 세 사람은 코커 섬에 식량을 가져다주면서 시기적절한 격려를 베풀고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증인들뿐만 아니라 증인이 아닌 사람들도 형제들이 나타낸 사랑과 관심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 여자는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수 년 동안 교회에 헌금을 내 왔는데, 우리 교회에서는 내가 잘 있는지 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군요.”

한 자매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우리를 한번 비교해 보세요! 우리에게는 관심을 가져 주는 사람이 있답니다!”

[244, 245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벨리즈

1923년 제임스 고든이 봄바에서 전파하다.

1930

1933년 프리다 존슨이 벨리즈시티에서 전파하다.

1934년 새디어스 호지슨이 자신이 운영하는 빵 가게에서 집회를 사회하다.

1940

1941년 벨리즈시티에서 전도인들이 최초로 침례를 받다.

1945년 최초의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46년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1950

1957년 더 이상 선교인들의 입국 허가가 나지 않다.

1959년 지부 사무실, 선교인 집, 왕국회관이 건축되다.

1960

1961년 선교인들의 입국이 다시 허가되다.

1961년 허리케인 해티로 벨리즈가 황폐되다.

1971년 버즈아일에서 처음으로 대회가 열리다.

1980

1988년 레이디빌에 대회 회관이 건축되다.

1990

2000

2000년 허리케인 키스가 벨리즈를 강타하다.

2001년 멕시코 지부가 벨리즈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다.

2002년 복합 왕국회관(왼쪽), 선교인 집, 개축된 대회 회관이 봉헌되다.

2010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1,800

1,200

400

1930 1940 1950 1960 1980 1990 2000 2010

[삽화]

대회를 보러 가기 위해 배에 가득 올라 탄 형제들

[209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멕시코

과테말라

멜초르데멘코스

카리브 해

벨리즈

앰버그리스 섬

산페드로

코커 섬

코로잘 주

코로잘

오렌지워크 주

오렌지워크

오거스트파인리지

벨리즈 주

봄바

산타나

크루키드트리

블랙크리크

레이디빌

벨리즈시티

케이오 주

벨모판

벤케비에호

스탠크리크 주

스탠크리크 계곡

당그리가

홉킨스

세인바이트

털리도 주

망고크리크

플라센시아

몽키리버타운

펀타네그라

산안토니오

펀타고다

선데이우드

바랑코

크리크사코

벨리즈 강

마야 산맥

[200면 전면 삽화]

[206면 삽화]

세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와 함께한 알폰시나 로바토와 에이미벨 앨런

[207면 삽화]

허먼 라이트번과 더린 라이트번, 아들 스티븐

[210면 삽화]

음향 장치를 실은 수레 옆에 서 있는 증인들, 1940년대에 벨리즈시티에서; (1) 새디어스 호지슨, (2) 조지 롱스워스

[213면 삽화]

엘머 어리그는 외곽 지역에까지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214면 삽화]

찰스 헤이언은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도록 격려하였습니다

[221면 삽화]

지부 사무실과 선교인 집과 왕국회관이 있던 벨리즈시티의 건물

[223면 삽화]

프로그램 전체가 스페인어로 제공된 최초의 순회 대회, 1968년에 오렌지워크 왕국회관에서

[229면 삽화]

특별 파이오니아인 마르샬 케이와 마누엘라 케이

[230면 삽화]

전형적인 마야족 마을의 모습, 털리도 주

[240면 삽화]

마리아 아와 바실리오 아

[246면 삽화]

시실리아 프랫

[249면 삽화]

천막 아래 앉아 순회 대회를 보는 모습, 펀타고다, 1960년대

[251면 삽화]

베키 라카요와 알레한드로 라카요

[252, 253면 삽화]

아래에 보이는 철골 구조물이 현재 대회 회관(오른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개축된 대회 회관

[254면 삽화]

복합 왕국회관 건축 현장에 모인 형제 자매들, 벨리즈시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