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우간다
여러 세기 동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의 절반을 굽이굽이 지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장대한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아 헤맸습니다. 마침내 일부 탐험가들은 빅토리아 호와 그 주위의 산들이 마르지 않는 나일 강의 주요 발원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은 더 귀중한 물 즉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수”의 근원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요한 4:10-14) 이제 ‘의에 목말랐던’ 우간다 사람들에게 있었던 일을 알아보겠습니다.—마태 5:6.
“아프리카의 진주”
우간다는 아프리카 중부의 적도에 걸쳐 있으며 기후가 온화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달의 산맥이라 불리는 웅장한 루웬조리 산맥의 높은 곳에는 빙하가 있는데, 빙하가 녹은 물이 은빛 물결을 이루며 수많은 강과 호수로 흘러듭니다. 우간다는 토양이 비옥하고 비가 많이 내리기 때문에 커피나 차나 목화를 재배하기에 유리합니다. 이곳에서는 요리를 해서 먹는 바나나인 플랜틴 바나나가 많이 재배되는데, 이 바나나는 우간다에서 가장 많이 먹는 요리 가운데 하나인 마투케를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또한 현지인들은 카사바, 옥수수 가루, 기장, 수수도 먹습니다.
열대 지방에 위치한 이 나라에는 사자, 코끼리, 하마, 악어, 표범, 기린, 영양, 침팬지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매혹적인 원숭이와 멸종 위기에 놓인 마운틴고릴라도 살고 있습니다. 또한 화려하게 치장한 새들은 듣기 좋은 노랫소리로 하늘을 가득 채웁니다. 우간다는 “아프리카의 진주”라는 칭송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우간다의 아름다운 사람들
우간다에는 대략 30개의 종족이 있으며, 인구는 약 3000만 명입니다. 많은 사람이 종교심이 있고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공식적인 숭배는 종종 전통 종교 관습과 뒤섞여 있습니다. 우간다 사람들은 대부분 정이 많고 후대하기를 좋아하며, 연장자에게 인사하거나 그들을 시중들 때 무릎을 꿇는 일도 흔히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름다운 “진주” 같은 이 나라에 사는 소중한 사람들은 정치적 격변으로 큰 비극을 겪었으며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에 더해, 에이즈가 불러온 참상은 우간다 사람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 우간다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진정한 파이오니아들
우간다의 왕국 전파 활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이 적도 이남의 아프리카 전역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대한 구역에서 전파 활동에 착수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 사무실은 현재의 케냐, 우간다 및 탄자니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전파하도록 두 명의 파이오니아인 로버트 니즈벗과 데이비드 노먼을 임명했습니다.
니즈벗 형제와 노먼 형제는 아프리카 내륙 깊은 곳까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1931년 8월 31일에 다르에스살람에서 출판물 200상자를 가지고 전파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잔지바르 섬으로 갔다가 항구 도시인 몸바사를 거쳐 케냐의 고지대로 갔습니다. 그들은 기차를 타고 철도 근처에 있는 여러 마을에서 봉사하면서 빅토리아 호의 동쪽 연안까지 갔습니다. 담대한 이 두 파이오니아는
증기선을 타고 빅토리아 호를 건너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에 도착하였습니다. 두 형제는 많은 출판물을 전하고 여러 건의 「황금 시대」지 예약 신청을 받은 다음, 차를 타고 더 깊은 내륙 지방으로 계속 여행하였습니다.그로부터 4년 후인 1935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네 명의 파이오니아가 또다시 동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 여행에 참여한 사람은 그레이 스미스와 그의 아내 올가 그리고 로버트 니즈벗과 그의 남동생 조지였습니다. 이 담대한 파이오니아들은 장비가 잘 갖추어진 운송용 차량 두 대를 이동 주택으로 개조하여 열악한 도로 위를 달렸으며, 키가 3미터나 되는 부들을 헤쳐 나가며 힘겹게 여행하였습니다. 그들의 여행에 관해 이러한 보고가 있습니다. “종종 그들은 차 밖에서 잤는데, 야생 동물로 가득 찬 아프리카의 고동치는 맥박을 눈과 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밤에는 사자가 울부짖었고, 얼룩말과 기린은 평화롭게 풀을 뜯었으며, 코뿔소와 코끼리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왕국 소식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도시와 마을들을 방문했습니다.
그레이 스미스와 올가 스미스 부부가 탕가니카(현재의 탄자니아)에 머무는 동안 로버트 니즈벗과 조지 니즈벗은 케냐의 나이로비로 갔습니다. 후에 스미스 부부는 식민지 당국으로부터 탕가니카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자 우간다의 캄팔라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곳의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았으며, 캄팔라 경찰이 계속해서 그 부부를 감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미스 부부는 단념하지 않고 두 달 만에 2122부의 서적과 소책자를 전했으며 여섯 차례 공개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국 총독이 추방 명령을 내리자 이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우간다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이로비로 가서 니즈벗 형제들을 만난 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돌아갔습니다.여호와의 축복으로 이러한 전파 활동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은 식민지 당국으로부터 종교적 반대와 심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3000여 권의 서적과 7000여 부의 소책자를 전하였고 여러 건의 예약 신청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파 활동이 있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우간다에서 전파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재개된 활동
1950년 4월에는 잉글랜드 출신의 젊은 킬민스터 형제 부부가 캄팔라로 이주했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했으며, 각각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온 두 가족이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이자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952년 12월에는 뉴욕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본부에서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가 케냐의 나이로비를 방문하였습니다. 킬민스터 형제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캄팔라에서 나이로비까지 먼 길을 여행했습니다.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는 나이로비에 있는 작은 집단에게 격려를 베풀었으며 캄팔라에 회중을 조직하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새로 형성된 그 회중은 얼마 되지 않아 좋은 결과를 거두기 시작하였으며, 1954 봉사 연도에는 최고 전도인 수인 10명이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남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 지부 사무실에서 온 에릭 쿡은 동아프리카를 방문하여 캄팔라에 새로 형성된 회중과 얼마 동안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회중 형제들은 주간 회중 「파수대」 연구는 즐겼지만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는 그다지 열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쿡 형제는 킬민스터 형제를 격려하여 주간 봉사회를 포함한 모든 회중 집회를 사회하게 하였습니다. 쿡 형제는 전파 활동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호별 방문 봉사를 강조하였으며 사랑으로 몇몇 전도인에게 개인적 훈련을 베풀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전파 활동은 우간다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에게 수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쿡 형제는 캄팔라에 사는 우간다 사람들 대부분이 루간다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에 유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지인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형제들에게 출판물을 루간다어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1958년에 전도인들은 새로 번역된 소책자인 「“이 천국의 기쁜 소식”」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책자는 참으로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활동이 점차 진척되면서 1961년에는
신기록인 19명의 왕국 선포자가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였습니다.킬민스터 형제는 세속 일을 하던 중에 조지 카두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40대 초반의 우간다 사람이었으며 모국어인 루간다어만 아니라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습니다. 조지는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성경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어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는 킬민스터 형제가 호별 방문을 할 때 따라다니면서 그가 하는 말을 통역해 주었습니다. 1956년에 엔테베 인근의 빅토리아 호에서 우간다 최초의 침례가 행해졌을 때, 조지는 여호와께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왕국 활동이 침체되었습니다. 몇몇 외국 형제들은 고용 계약이 만료되어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제명되었으며, 몇몇 사람들은 일부 회중 성원의 비성경적인 행실을 보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카두 형제는 여호와를 사랑했으며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는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진리에 고착했으며 1998년에 사망할 때까지 장로로 충실하게 섬겼습니다.—디모데 둘째 4:2.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함
동아프리카의 밭이 방대하였기 때문에 왕국 전파자들이 많이 필요하였습니다. 게다가 다른 어려움도 있었는데, 식민지 정부가 선교인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1957년에, 전 세계의 전도인들에게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라는 권고가 발해졌습니다. 영적으로 장성한 형제들은 왕국 전파자가 더 크게 필요한 곳으로 이사하도록 격려를 받았습니다. 사도 16:9, 10) 이러한 현대의 초대는 우간다의 왕국 전파 활동이 발전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쳤습니까?
그러한 초대는 사도 바울이 본 환상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청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이사야와 같은 영을 가진 프랭크 스미스와 메리 스미스 부부는 그러한 권고에 응하여 동아프리카로 이주하기 위해 곧바로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 (이사야 6:8) 1959년 7월에 그들은 배를 타고 뉴욕에서 케이프타운을 거쳐 몸바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기차를 타고 캄팔라로 갔으며, 그곳에서 프랭크는 지질 조사국에서 정부 소속의 화학자로 일하는 고용 계약을 맺었습니다. 스미스 부부는 캄팔라에서 남쪽으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엔테베에 정착했습니다. 빅토리아 호 연안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인 엔테베는 왕국 소식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구역이었습니다. 이 부부는 작지만 점점 커져 가는 캄팔라 회중의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습니다.
*라는 책을 받은 적이 있었지만, 바쁜 업무와 잦은 전근 때문에 그 책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습니다. 피터는 팽팽하게 대립된 두 부족 간의 복잡한 영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출장을 갔습니다. 그는 “하느님, 저를 도와주신다면 꼭 당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되자, 그는 자신이 한 기도가 생각나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읽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증인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프랭크 스미스를 만나게 되자 매우 기뻐하였으며, 프랭크는 그 부부와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에게 기쁨을 주는 이 부부는 침례를 받았으며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활동적인 왕국 선포자로 충실히 봉사하고 있습니다.
얼마 후 스미스 부부는 우간다의 공무원으로 상당한 책임을 맡고 있는 피터 자비와 그의 아내 에스터에게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피터는 예전에 「종교는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What Has Religion Done for Mankind?)다른 외국 형제들도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라는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일부 외국 형제들은 고용 계약을 맺고 이 나라에 왔는데, 그로 인해 캄팔라 회중의 몇 안 되는 전도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한 부부는 캄팔라에서 약 3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우간다 남서부의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한 소도시 음바라라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파수대」 연구와 서적 연구 집회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따뜻한 그리스도인 교제를 나누기 위해 캄팔라나 엔테베까지 먼 길을 여행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또한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의 루안샤에 있는 지부 사무실과 계속 연락을 취하였는데, 당시에는 그 지부 사무실이 동아프리카의
왕국 전파 활동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지부를 감독하던 해리 아넛은 지구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얼마 안 되는 우간다의 전도인을 격려하기 위해 캄팔라를 방문했습니다. 전도인들은 그가 나타낸 사랑과 관심에 깊이 감사하였습니다.잉글랜드 출신의 톰 쿡과 앤 쿡 부부도 왕국 전파자가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섬기려는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톰은 여러 나라에 고용 신청을 했고, 우간다의 교육부에서 교육 관료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직업상 처음에 그 부부는 네 살배기 딸인 사라와 함께 캄팔라에서 동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이강가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둘째 딸인 레이철이 태어나자 톰과 그의 가족은 흔히 나일 강의 발원지라고 불리는 장소에 위치한 도시인 진자로 이사하였습니다. 후에 그들은 캄팔라로 이사하였습니다.
희생과 축복
그 가족들은 모두 우간다의 왕국 전파 활동에 참으로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익숙한 생활 방식과 편안함을 뒤로하고 우간다에 왔습니다. 하지만 겸손한 사람들이 생활 방식을
바꾸고 왕국의 좋은 소식에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또한 숭배와 행복한 교제를 위해 함께 모이면서 자신들과 현지인 가족들 간에 두터운 그리스도인 사랑의 유대가 형성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톰 쿡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봉사를 하면서 사람들이 나타내는 따뜻함과 예절과 품위 있으면서도 겸허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회중의 성장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어서 참으로 큰 영광이었습니다.”
톰은 이주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족이 여호와를 섬기는 데 그보다 더 좋은 환경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본이 되는 형제 자매들과 사랑 넘치고 충성스러운 현지 형제들이 있었고 많은 봉사의 특권을 누렸으며 텔레비전 없이 살면서 아프리카 시골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누린 축복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섬긴 그 사람들이 순회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케냐까지 기꺼이 여행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 교제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순회 대회에 참석하려면 버스나 기차로 편도 750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습니다!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일례로, 1961년에 우간다와 케냐의 대표자들은 북로디지아(잠비아)의 키트웨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그 대회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대회에 참석하려면 탕가니카(탄자니아)에서 최악으로 꼽히는—대개는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얼마의 도로를 따라 1600킬로미터도 넘는 길을 나흘간 여행해야 하였습니다. 대회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오려면 푹푹 찌는 날씨 속에 먼지가 날리는 아프리카의
사바나를 또다시 나흘간 여행해야 하였습니다. 여행은 흥미진진한 모험이었으며, 많은 형제 자매들과 함께 나눈 행복한 교제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힘이 많이 드는 고생스러운 여행이었지만 그 덕분에 영적으로는 참으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선교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다
1962년에 우간다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습니다. 이듬해에 헨첼 형제는 케냐의 나이로비를 방문하여 우간다에 선교인을 보내는 것이 가능한지 논의하였습니다. 그곳으로 누구를 임명할 것입니까?
길르앗 제37기 졸업생인 톰 맥레인과 베델 맥레인은 봉사하기 위해 나이로비에 온 지 얼마 안 된 부부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캄팔라로 임명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우간다에서 활동한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이 되었습니다. 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케냐가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세 우간다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우호적이었으며 증거 활동에도 열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톰과 베델은 케냐에서 스와힐리어를 배웠지만, 이제는
새로운 언어인 루간다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굳은 결심과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과 독학을 위한 책 한 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간다에서 첫 달에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250시간을 바쳤고 둘째 달에는 150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야외 봉사에 100시간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점차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여 봉사의 직무에서 훌륭한 결과를 거두었습니다.1964년 1월에 길르앗 제38기 졸업생인 길버트 월터스와 조앤 월터스 부부가 톰 맥레인과 베델 맥레인 부부와 합류하였습니다. 역시 길르앗 제38기 졸업생인 스티븐 하디와 바버라 하디 부부와 론 빅넬과 제니 빅넬 부부는 원래 인접 국가인 부룬디에 임명되었지만 비자 문제 때문에 우간다로 임명되었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캄팔라에 또 다른 선교인 집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캄팔라의 회중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회중 성원 중에는 카두 형제와 그의 가족, 북로디지아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
부부인 존 브왈리와 유니스 브왈리와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마거릿 니엔데와 그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집회는 거의 야외나 다름없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길버트 월터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몇 명 되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보고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훤히 볼 수 있는 곳에서 브왈리 가족은 앞장서서 아무런 반주도 없이 화음을 넣으며 열정적으로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노래하면서 우리는 계속 선교 봉사를 할 용기를 얻었습니다.”얼마 지나지 않아 길버트 월터스와 조앤 월터스 부부는 진자에 선교인 집을 개설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곳은 아직까지 조직적인 전파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 후에 두 개의 선교인 집이 추가로 개설되었는데, 하나는 케냐 국경에서 가까운 음발레에, 다른 하나는 음바라라에 세워졌습니다. 선교인 집에 거주하는 선교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온 여러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밭은 분명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4:35)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수확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습니까?
조직하는 면에서 발전하다
우간다의 전 시간 종들은 자신들이 맡은 방대한 구역을 가능한 한 체계적으로 돌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주 중에
그들은 주택 단지에서 전파했는데, 단지에는 거리와 구획을 알아볼 수 있는 이름과 숫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도로명도 없고 집 주소도 없는 구역은 어떻게 조직적으로 돌 수 있었습니까?톰 맥레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언덕을 기준 삼아 구역을 나누었습니다. 두 사람이 언덕 한쪽을 돌면, 다른 두 사람은 언덕 반대쪽을 돌았지요. 넷이 만날 때까지 길을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며 전파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역을 잘 알고 현지 문화를 이해하고 있는 우간다 증인들이 늘어나면서 외국인 형제들은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현지 전도인들은 외국에서 온 형제 자매 덕분에 귀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예를 들어, 진자에서는 이미 우간다 형제들이 선교인들과 함께 야외 봉사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는 오전 8시부터 오전 10시까지 호별 방문을 하고 한 시간 동안 재방문을 하고 나서 정오까지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회중 성원들 모두는 봉사 기술과 지식을 함께 나누고 격려를 주고받음으로 유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우간다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진자에는 흔치 않은 수력 발전소가 있어서 산업 개발지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선교인들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택시 정류장과 버스 정류장에서 증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여행 중에 읽으려고 성서 출판물을 기꺼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국 씨가 주변의 시골 지역까지 멀리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형제들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라디오 방송을 활용하였습니다. 그들은 국영 라디오 방송을 통해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매주 방송하였습니다. 형제들은 “미스터 로빈”과 “미스터 리”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식으로 프로를 진행하면서 “가정생활의 위기에 대처하는 법”과 “범죄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법”과 같이 사람들의 생각을 자극하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프로를 진행했던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리카 라디오 방송에서 미국 사람과 스코틀랜드 사람이 서로 자기 고유의 억양으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접하는 것은 꽤 드문 일이었습니다. 야외 봉사에 나가면 사람들이 흔히 그 프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했죠. 그런 반응을 통해 우리 프로그램이 유용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새로운 전파자를 위한 도움
당시 진자에 있던 집단은 와루쿠바라는 주요 주택 단지 내의 복지 회관에서 집회를 가졌습니다. 톰 쿡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상당수의 형제들은 새로운 성원이었는데, 그들에게는 집회 과제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출판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교인들은 책을 한데 모아 주택 단지의 중심부에 사는 한 형제의 집에 도서실을 마련하였습니다. 과제를 받은 사람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에 그곳에 가서 도서실을 이용하고 연설 과제와 관련된 도움을 받았습니다.” 현재 진자 인근에는 여러 개의 회중이 있는데, 지금도 회중들은 나일 강의 주요 발원지인 그 지역에서 영적인 고기잡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들이 영적 성장을 촉진하다
1963년 9월에 우간다의 전파 활동은 새로 설립된 케냐 지부의 감독을 받게 되었습니다. 윌리엄 니즈벗과 뮤리얼 니즈벗 부부가 나이로비를 중심으로 하는 순회구를 방문하도록 임명되었는데, 그 순회구에는 우간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윌리엄은 그보다 약 30년 전 초창기에 우간다에서 친형들인 로버트와 조지가 전파하며 남긴 발자취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전도인들은 니즈벗 “제2조”가 기울이는 수고로부터 유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커져 갔고 더 많은 집단이 생겨났으며 전도인들은 넓은 지역으로 두루 퍼졌습니다. 따라서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외딴곳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훈련과 격려를 베풀고 “여호와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 위에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매우 중요한 봉사를 수행했습니다.—베드로 첫째 3:12.
1965년에 스티븐 하디와 바버라 하디는 우간다에서부터 세이셸에 이르는 순회구에 속한 회중들을 방문하였는데, 세이셸은 우간다에서 2600킬로미터 떨어진 인도양의 제도입니다.
그 부부는 한번은 파이오니아들이 최상의 결과를 거둘 수 있는 구역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우간다 전역을 샅샅이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동과 숙박을 위해 케냐 지부에서 빌려 준 폴크스바겐 콤비를 타고 6주 만에 거의 우간다 전역을 여행하면서, 마사카, 음바라라, 카발레, 마신디, 호이마, 포트포르탈, 아루아, 굴루, 리라, 소로티 같은 도시를 방문했습니다.하디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여행은 흥미진진했으며 전파 활동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지방 당국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도움을 베풀어 주었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많은 경우, 집주인과 대화하기 위해 집을 방문하면 이웃 주민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가 전하는 소식을 같이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방문은 어느새 ‘공개 강연’이 되어 버리곤 했습니다. 인적이 드물 거라고 생각한 곳에 멈춰도, 우리를 방문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어느새 웃는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전하려고 가져온
출판물이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우리는 서적을 500부 정도 전했고 「파수대」와 「깨어라!」 예약 신청도 많이 받았습니다.”우간다 사람들의 다정함과 호기심과 영적인 성향을 볼 때 영적으로 성장할 큰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하디 부부는 이 비옥한 밭에서 여호와께서 전파 활동을 축복하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신다
1965년 8월 12일은 우간다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의 역사에서 중대한 날이었습니다. 그날 만국 성경 연구회가 등록되어 제자를 삼는 우리의 활동이 법적 인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1960년대에 조지 마옌데, 피터 자비와 에스터 자비, 아이다 살리와 같이 마음이 정직한 우간다 사람들은 비록 수는 적었지만 굳센 증인들이었고 탄탄한 구심점을 이루었습니다. 1969년에 인구가 약 800만 명인 우간다는 75명의 전도인을 보고했으며, 따라서 증인 대 인구 비율이 1대 10만 명이 넘었습니다. 1970년에 왕국 선포자의 수는 97명으로 늘었으며, 1971년에는 128명으로 증가했습니다. 1972년에 우간다에는 162명의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성장은 격려적이었지만 형제들은 자신들의 힘이 수적 증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3:7) 하지만 그들은 1970년대에 자신들의 생활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극심한 믿음의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1971년에 이디 아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고 독재 정치를 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어려움을 겪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새로운 정치 체제에 반대하는 파벌들과 정부 간의 교전이 점점 더 잦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때때로 인접 국가와의 국경이 폐쇄되기도 했으며 통행금지가 시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정부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우간다의 형제 자매들은 이처럼 위협과 폭력이 난무하는 격변의 시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통치권”인가, 인간의 통치권인가?
그 시기에 캄팔라에서는 1972년 “하나님의 통치권” 지역 대회를 개최할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 대회는 우간다에서 처음 열리는 지역 대회가 될 것이었습니다. 케냐와 탄자니아 그리고 멀리 에티오피아에서 오는 대표단이 참석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긴장감이 고조되고 정치적·부족적 충돌이 증가하면서 국경을 건너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대회를 취소해야 하였습니까? 형제들은 대회 마련과 외국에서 올 대표단에 대해 여호와의 인도를 구하면서
대회를 위해 열렬히 기도하였습니다.나중에 대표단이 국경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해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우간다를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시민권이 없는 아시아인—주로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을 모두 추방하라는 정부 명령 때문에 나라를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인종 집단에게도 그와 비슷한 명령이 내려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외국인 교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도 그곳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회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도시에서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입니까?
의외로 캄팔라는 매우 평온했고, 형제들과 관심자들은 대회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표단은 당국이 캄팔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에 대회 일자와 장소를 광고하는 커다란 현수막을 걸도록 허락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전례 없이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그 현수막에는 굵은 글씨로 “하나님의 통치권—온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공개 강연의 주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프로그램은 아무런 방해 없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최고 참석자 수는 937명에 달했습니다. 그 대회는 우간다의 순결한 숭배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외국인 대표단이 국경을 거쳐 귀국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의 열심은 꺾이지 않았으며 모두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치적으로 점점 더 불안정해지는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백성은 주권을 가진 자신들의 통치자에게 충성한다는 것을 용기 있게 알렸습니다. 그 위급한 시기에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힘을 주어 담대해지게’ 하셨습니다.—대회에 참석한 우간다 사람들 중에는 조지 오촐라와 거트루드 오촐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거트루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전 처음 대회에 참석했는데 바로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지요!” 하지만 당시에 조지는 증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열렬한 축구 팬이어서 운동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훌륭한 행실을 보고 직접 성서 연구를 하면서 결국 마음이 감동되어 1975년에 케냐에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습니다.
거트루드는 자신이 우간다 북부 지역에서 진리를 배웠을 때 그 지역에 전도인이 얼마 없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1972년에 침례를 받았는데, 제가 사는 곳이 너무 외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왕국회관뿐만 아니라 선교인 집과 번역 사무실도 있습니다. 그래서 침례 받았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기쁩니다!”
“곤란한 시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1973년 6월 8일에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을 포함한 12개 종교 집단의 활동이 금지되었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사람들에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의심을 조장했으며 외국인은 첩자라는 디모데 둘째 4:2) 그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입니까?
잘못된 생각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선교인들이 공개 봉사에 참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우간다의 여호와의 증인은 매우 “곤란한 시기”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해에 이미 두 쌍의 선교인 부부가 거주 허가 연장 신청이 거부되어 그 나라를 떠났습니다. 7월 중순에 나머지 선교인 12명도 전부 추방당하였습니다.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기 위해 온 외국 형제들은 세속 직업이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오래 남아 있을 수 있었지만, 그들이 누리던 자유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이듬해에는 그들도 모두 우간다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확고하고 동요되지 않았다’
뒤에 남은 우간다의 전도인들이 사랑하는 외국 형제 자매들을 떠나보내고 슬퍼한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확고하고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 첫째 15:58) 연로한 형제인 어니스트 와말라가 한 말은 그곳 전도인들의 충성스러운 태도를 잘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외국인 장로들이 모두 떠난 상황에서 조지 카두와 피터 자비 같은 우간다의 장로들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그들이 소유한 강한 영성과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는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자비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간다에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여호와를 섬기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표준에 어긋나는 관습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자기 징계가 필요합니다.
당시에 책임 맡은 형제들은 여호와의 조직에서 나오는 기록된 지침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 징계가 특히 중요했습니다.” 현지 장로들은 개인 연구를 꼼꼼하게 함으로 잘못된 인간의 지혜에 이끌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 시련의 시기는 침체의 시기가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이 영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반면에 일반 대중의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괴롭힘에 시달렸으며, 일부 사람들은 군대에 대한 공포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부패가 극에 달해 경제가 붕괴되었으며, 아름다운 땅은 고난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우간다에서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그러한 시련의 때에도 계속 기쁨을 유지할 것입니까?
기쁨을 준 모임
정부는 가능한 방법을 총동원해서 자신들의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정치적인 모임을 모두 금지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엄정중립을 유지했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격려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일을 그만두지 말라는 성서의 교훈을 따랐습니다. (히브리 10:24, 25)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당국의 감시를 피해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와 재치가 필요했습니다. 하느님의 종들은 순수한 목적으로 모이는 자신들의 모임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그들은 대부분의 집회를 개인 집에서 소규모로 갖도록 조직하였습니다. 큰 규모로 모일 때에는 소풍을 즐기는 것으로 가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 번은 전체 회중이 연설과 「파수대」 연구를 위해 함께 모였습니다. 형제들은 공원이나 개인 정원에서 소풍을 갖도록 마련하였습니다. 여럿이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우간다 사람들은 벗이나 친족이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은 신명 16:15.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성서와 연구 서적을 조심스럽게 가져오면서도 대규모 소풍이나 야외에서 요리를 할 때 필요한 것들을 전부 챙겨 오는 데 매우 익숙했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모임을 통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 축제를 얼마나 즐겼을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금지령 기간 내내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단축된 순회 대회도 마련되었습니다. 정부는 형제들을 방해하려고 노력했지만, 형제들은 함께 모이는 일이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형제들은 나이로비에서 열린 대규모 대회에 참석하고 돌아와 가슴 뭉클한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십시오”
여러 정황을 근거로, 책임 있는 형제들은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행동한다면 금지령이 엄격하게 시행되지 않을 것이며 신권 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마태 10:16) 따라서 적절히 조심하는 가운데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변함없이 임명을 수행하였으며 전도인들도 계속 호별 방문 봉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의 방문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중반의 어느 날, 피터 자비는 십 대 청소년인 프레드 니엔데와 함께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드의 어머니가 1962년에 진리를 배웠을 당시 프레드는 어린 아기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얼마나 장성했는지 시험을 받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한 집주인은 형제들이 여호와의 증인임을 알아차렸는데, 그는 사복 차림의 보안 요원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형제들을 체포해서 강제로 자기 차에 태웠습니다. 당연히 형제들은 걱정이 되었는데, 그런 식으로 끌려간 수많은 사람이 행방불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구실을 둘러대거나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고문하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보안국으로 가는 동안 피터와 프레드는 침착성과 충실성을 유지할 힘을 잠언 25:15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다행히 그날 문자적인 뼈가 꺾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피터가 법을 준수하고 성서의 가르침에 고착하는 우리의 입장을 침착하게 설명하고 두 형제가 존중심 있는 태도로 대답하자, 보안국장의 편견이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보안 요원은 형제들을 보안국장에게 데려갔으며, 그들을 비난하면서 수많은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하지만 피터와 프레드는 “참을성을 보이면 명령자도 권유를 받아들이고, 온화한 혀는 뼈를 꺾을 수 있다”는보안국장은 피터와 청소년인 프레드를 풀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붙잡아 온 요원에게 두 사람을 봉사 구역까지 자동차로 데려다 주라고 명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굴욕감을 느낀 보안 요원은 마지못해 그 명령대로 형제들을 “호위”해 주었으며, 형제들은 위기를 모면하게 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렸습니다.
경찰과 맞닥뜨린 다른 경우에는 상황이 그 정도로 힘들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이매뉴얼 차미자와 그의 아내는 가족과 몇몇 관심자를 위해 엔테베의 자택에서 비밀리에 집회를 가졌습니다. 이매뉴얼은 사람들이 예측하지 못하도록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장소를 바꾸곤 하였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이매뉴얼은 자기가 경찰을 잘 따돌리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매뉴얼이 엔테베 식물원에서 성서 연구를 마쳤을 때, 경찰 한 명이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빨리 연구 자료를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물었습니다. “왜 책을 숨기려고 하는 거요? 우리는 당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알고 당신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소. 당신들이 어디서 모이는지도 다 안단 말이오. 우리가 마음만 먹었다면, 진작에 당신들을 체포했을 것이오. 하지만 당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해도 괜찮소.” 그 말대로 이매뉴얼은 그 일을 계속했으며, 그것도 매우 충실히 그렇게 했습니다!나중에 이매뉴얼은 직장에서 은퇴하여 친족들이 사는 마을로 돌아간 후 많은 반대와 조롱을 인내했습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 고향에서 존중받지 못했습니다.’ (마가 6:4) 그렇지만 이매뉴얼은 70세가 한참 넘은 “백발의 때에도 계속 번창”했으며 3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오가며 정기적으로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시 92:14) 현재 80대 후반인 그는 원하는 만큼 자전거를 타고 다니지는 못하지만, 봉사의 종으로 여전히 충실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끈기 있는 파이오니아들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언제나 소수의 사람들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당시에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 가운데 제임스 루웨레케라가 있었습니다. 정부의 측량사로 일하던 그는 197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침례 받은 지 얼마 후에 고향 마을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한동안 연구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제임스를 반대했습니다.
한번은 제임스와 몇몇 형제들이 나이로비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날이 밝기도 전에 길을 떠났습니다. 나중에 그들이 탄 차가 경찰 검문소에 멈추었을 때 형제들이 보니 제임스의 옷차림이 좀 이상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입은 옷이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데다 몸에 맞지도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어둠 속에서 급하게 옷을 입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농담조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더 묻자, 그는 자신이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아내가 자신의 정장을 숨겼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눈에 띄는 옷을 되는대로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임스와 함께 대회에 가던 형제들은 친절하게 자신들의 옷가지를 나눠 주었으며, 덕분에 그는 합당한 옷차림으로 대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때때로 제임스가 가족과 이웃에게서 받는 반대는 단지 불편을 초래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반대가 더 심해지기도 하였습니다. 반대는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제임스는 그 모든 일을 온화한 태도로 인내했으며 2005년에 사망하기까지 충실의 본을 남겼습니다. 아직까지도 형제들은 그의 믿음을 높이 사고 있으며, 틀림없이 여호와 하느님께서도 그의 믿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고난이 있을 때를 위하여 태어난 형제”
“참된 동무는 항상 사랑하니, 그는 고난이 있을 때를 위하여 태어난 형제이다.” (잠언 17:17) 케냐의 형제들은 1970년대에 우간다 증인들이 고난과 위험을 인내하는 동안 그들의 참된 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행하는 감독자와 지부 대표자들은 국경을 건너 사랑하는 우간다의 형제 자매들에게 지원과 격려를 베풀었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1978년에 우간다의 일부 군 세력이 탄자니아 영토를 침략하자 정치적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탄자니아 군대는 반격을 가해 1979년 4월에 우간다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은 도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민이 서둘러 도망하면서 우간다에는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민이 사라지자 금지령도 사라졌습니다.” 「우간다 타임스」지에는 “선교인들이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다시 한 번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해도 난 갈 거야”
정부에 변화가 있은 뒤 혼란에 빠진 우간다는 자유도 얻었지만 약탈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무정부 상태가 되자 도둑질과 극심한 폭력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케냐 지부의 형제들은 즉시 귄터 레슈케와 스탠리 마쿰바를 우간다로 파견하여 순회 대회를 열도록 마련하였습니다.
귄터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그곳을 방문하기 2주 전에, 우리는 케냐 산 인근의 메루에서 파이오니아 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캄팔라에서 특히 밤에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소리 내어 그 기사의 한 부분을 읽고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니 여긴 다음 주에 우리가 가게 되어 있는 곳이잖아!’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요나처럼 임명을 버리고 도망하려는 건가?’ 나는 즉시 불안감을 떨쳐 버리고 이렇게 다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해도 난 갈 거야. 요나처럼 도망하지 않겠어.’”
두 형제는 계획대로 그곳으로 갔습니다. 스탠리가 그 나라의 내륙 지방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는 동안, 귄터는 큰 도시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전쟁이
끝난 뒤라 다시 조직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우간다에는 활동적인 전도인이 113명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모두는 자유롭게 모여 야외에서 대회를 갖게 되어 행복했으며, 기쁘게도 대회에 241명이 참석했습니다.” 비록 진리의 씨가 심하게 짓밟히긴 했지만 아직도 열매를 맺을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위험한 시기
우간다 동쪽 국경에 가까운 음발레에서 귄터와 스탠리 형제는 자신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준 사람의 집 앞에 자동차를 하룻밤 주차해 두었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도둑들이 자동차에서 부품을 떼어 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귄터는 도둑들에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가, 그 주 초에 어떤 사람이 물건을 훔치던 강도들을 막으려다 그들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일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을 바꾼 귄터는 생명이 자동차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도둑들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습니다. 날이 밝은 후 자동차를 살펴보니 타이어 두 개와 앞 유리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들은 경찰에 도난 신고를 했는데, 경찰은 오히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둑들이 다시 와서 부품을 더 떼어 가기 전에 자동차를 치우는 게 좋을 겁니다!”
형제들은 가능한 대로 서둘러 캄팔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앞 유리가 없었기 때문에 귄터는 겨우 이불로 몸을 덮었고 스탠리는
몸을 가릴 것이 모자뿐이었는데, 물에 젖고 바람을 맞으며 캄팔라까지 250킬로미터를 가는 여행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둑맞은 타이어 한쪽을 스페어타이어로 교체하였고 다른 한쪽에는 바람이 새는 타이어를 빌려서 달았습니다. 게다가 빌린 타이어를 이틀 내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을 듣자 더욱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타이어가 버텨 주기를 바랐습니다.설상가상으로 귄터와 스탠리는 강도들이 우글거리는 삼림 지대에 나 있는 길을 지나가야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해 준 집주인은 “아무도 따라잡지 못하게 빨리 달리세요”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 형제들은 기록적인 속도로 캄팔라에 무사히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들은 빌린 타이어를 제시간에 음발레에 가져다줄 사람을 겨우 찾을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도전과 기회
1980년에 레슈케 형제는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세계 본부를 방문하던 중에 베델 가족에게 우간다의 상황에 관해 보고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 후 통치체 성원들은 우간다에 선교인을 다시 보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더 많은 선교인이 활동할 때가 된 것이 분명하다는 데 대해 아무도 이견이 없었습니다. 대규모 모임을 갖는 것이 다시 가능해졌으며, 1981년에는 우간다의 전도인 수가 이미 175명 선으로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사실상 그해 7월에 우간다는 206명의 전도인 신기록을 달성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지난 10년간 벌어진 분쟁 때문에 버려진 무기와 탄약이 많은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총기 난사와 강도질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자주 발생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처신한 좋은 소식의 전파자들은 위로가 되는 성서
출판물을 구역 전역에 전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임으로 7월에 전도인당 평균 12.5부의 잡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저물면 해를 당할 위험이 훨씬 컸기 때문에, 야외 봉사와 그 외의 활동을 낮 시간에만 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 가운데서도 성장 잠재력을 뚜렷이 볼 수 있었습니다.선교인들이 다시 환영받다
1982년 9월에 길르앗 졸업생인 제프리 웰치와 아리 팔비아이넨이 케냐에서 캄팔라에 왔습니다. 사람들에게 제프와 아리로 알려지게 된 이 두 형제는 처음부터 만족스러운 결과를 거두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제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호소력 있는 제목만 보고도 기꺼이 잡지를 받았습니다.”
12월에 독일 비스바덴의 길르앗 분교 출신인 하인츠 베르톨츠와 마리아네 베르톨츠 부부가 제프리, 아리와 합류하였습니다. 처음부터 베르톨츠 부부는 우간다 형제들이 많은 피해를 입은 위험한 사회 속에서도 잘 지내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인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수도와 통신 같은 많은 서비스가 끊어져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긴장이 계속되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날 거라는 소문이 여러 차례 있었으며, 군대는 도로의 여러 지점을 봉쇄하였습니다. 특히 밤이 되면 총격과 강도질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길거리에 나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집 안에 머물면서 밤새 침입당하는 일 없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하인츠와 마리아네는 선교인 집으로 사용할 집을 구하는 동안 샘 와이스와 가족의 권유로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샘은 교육자였지만 우간다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형편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베푼 후대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하인츠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한 지역에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결국 샘의 집에서 다섯 달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매우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대가족은 때때로 하루에 한 끼밖에 먹을 수 없었지만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자녀들은 순종적이고 예의가 발랐습니다.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 자녀들은 물이 가득 든 20리터들이 플라스틱 통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물을 날라야 했습니다. 우리가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깨끗한 물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껴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단지 몇 리터의 물로 목욕을 하였고 헹군 물은 대야에 담아 두었다가 변기의 물을 내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이 어쩔 수 없이 우간다를 떠난 지 약 10년이 지난
1983년 4월에, 네 명의 새로운 선교인은 비교적 안전한 지역에 집을 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불안하고 물자가 부족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현지 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은 그러한 불편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마리아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은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심이 있었으며, 대다수는 성서를 가지고 있었고 토론에 개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접근하기 쉬웠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그 밖의 고난이 있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행복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활동하기 원한 연로한 사람들
우간다 문화에서 연로한 사람들은 크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였으며 노령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전직 교사인 파울루 무카사는 89세 때 진리를 배워 알게 되었습니다. 파울루는 양차 세계 대전과 식민 통치와 난폭한 독재 정권과 그 외의 정치적 격변을 겪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배워 알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는 메시아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이와 괴로움당하는 자를 압제와 폭력으로부터 구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습니다.—시 72:12, 14.
2년 뒤에 파울루가 침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자, 형제들은 ‘이렇게 연로한 분이 정말 물속에 완전히 잠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염려는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한 젊은 침례 지원자는 걱정하면서 물에 들어가기를 주저했던 반면, 91세의 파울루는 침례를 받고 환한 미소로 물에서 올라왔습니다. 비록 봉사를 하는 데 다소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파울루는 몇 년 후에 사망할 때까지 자신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왕국의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로빈사 나카이마는 고령에 더해 좋지 않은 건강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그는 병 때문에 다리가 심하게 부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회중에서 기념식 철에 한 달간 보조 파이오니아를 해 보라는 권고를 듣자, 로빈사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회중 성원들은 관심자를 로빈사의 집으로 데려가서 성서 연구를 함으로 그가 파이오니아를 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선교인들은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법을 알려 주었는데, 그 덕분에 그는 편리한 때에 편지를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토요일에는 한 장로가 로빈사를 사람들이 붐비는 캄팔라의 공공장소로 데려갔습니다. 그러면 로빈사는 야트막한 담에 편하게 걸터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달 말에 로빈사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저도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는 그달만 아니라 회중의 친절한 지원에 힘입어 11개월 동안 연속으로 보조 파이오니아를 하였습니다!
‘이걸 루간다어로 뭐라고 하나요?’
1980년대에 열정적인 선교인들이 꾸준히 들어오자 우간다의 열심 있는 전도인들은 그들을 따뜻하게 환영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새로운 길르앗 졸업생들도 있었고, 자이르(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에서 봉사하다가 추방된 선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캄팔라와 진자에 선교인들이 늘어나자 인구 밀도가 높은 그 구역을 더욱 철저히 돌 수 있게 되었으며, 선교인들은 우간다의 밭이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사실 문제가 된 것은 관심
있는 사람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관심을 자라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몇 달간 길르앗 훈련을 받고 나서 활기가 넘쳤던 맛스 홀름크비스트는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자라게 하기 위해 현지 언어에 숙달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당시에 프레드 니엔데는 엔테베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번역과 통역 기술은 새로운 선교인들이 루간다어를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루간다어에는 혀가 꼬일 정도로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많았습니다. 맛스는 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맛스는 언어 수업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왕국’을 루간다어로 뭐라고 하나요?”
프레드는 리드미컬하게 “오브와카바카 브와 카톤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맛스는 ‘저렇게 발음하는 건 불가능해’ 하고 생각하면서 그 질문을 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스는 실력이 눈에 띄게 늘어 루간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모으는 일이 진척되다
우간다 사람들은 1980년대 내내 어려움을 겪었지만, 성서 진리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1986년에 328명이던 전도인 수가 1990년에는 766명으로 130퍼센트 이상 빠르게 증가하였습니다. 나라 전역에 새로운 집단이 생겨났습니다. 캄팔라의 회중 수는 두 배로 증가했습니다. 진자 회중은 전도인 수가 세 배 이상 증가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이강가에 있던 집단은 단기간에 어엿한 회중이 되었습니다.
진자의 한 장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성장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새로운 전도인이 다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거의 매주 일요일마다,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기 원하는 사람들과 모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더 큰 밭에서 수확하다
놀라운 성장에 도움이 된 한 가지 요인은 형제들이 가진 훌륭한 파이오니아 영이었습니다. 1세기 전파자인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처럼, 우간다의 전 시간 종들도 ‘그들 자신을 본받을 모범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 둘째 3:9) 야외의 필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열심 있는 많은 전도인들은 그처럼 훌륭한 모범을 보면서 봉사의 직무를 확장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독신과 기혼을 비롯하여 많은 남녀노소가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 대열에 동참했으며 일부 사람들은 부양할 가족이 있는데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전체 전도인의 평균 25퍼센트 이상이 어떤 식으로든 파이오니아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일부 전도인들은 여전히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흔히 마케도니아 활동이라고 부르던 특별 연례 전파 활동에 기꺼이 참여하였습니다. (사도 16:9, 10) 이러한 특별 활동은 여러 해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회중들은 임명되지 않았거나 거의 돌지 못한 구역에서 길게는 세 달 동안 전파합니다. 그에 더해, 더 크게 필요한 구역의 경우에는 일부 정규 파이오니아들이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되기도 합니다.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었습니다. 많은 진실한 사람들은 그러한 활동을 통해 진리를 알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였으며 그 덕분에 수많은 새로운 집단과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한 특별 활동 기간에 선교인인 피터 아브라모브와 마이클 라이스는 카발레라는 도시에서 전파하면서 예전에 성서 연구를
한 적이 있는 마거릿 토파요를 만났습니다.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였으며 이미 자신의 믿음을 비공식적으로 전하고 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를 돕고 싶었던 선교인들은 자신들에게 한 권밖에 없던 「성경을 사용하여 추리함」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마거릿을 방문했는데, 그가 형제들을 위해 특별한 식사를 준비한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그가 나타낸 친절하고 관대한 태도에 크게 감동하기는 했지만, 한 마리밖에 없던 닭을 요리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닭이 낳는 달걀이 그 가족의 빈약한 식사를 보충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대접하는 이 식사보다 그동안 여러분이 제게 준 것이 더 많으니까요.” 결국 그는 침례를 받았으며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열심 있는 전도인으로 활동했습니다.형제들이 양질의 출판물을 잘 활용한 것도 급속한 성장에 기여했습니다. 앞서 언급된 맛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기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생활을 변화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성서와 출판물입니다. 글을 잘 모르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도 우리의 실용적인 팜플렛을 보고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장애물을 극복함
1980년대 후반기에 엄청난 성장이 있었지만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85년 7월에 발생한 쿠데타를 통해 군대가 다시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치안이 이전처럼 악화되었으며 게릴라전은 더 격렬해졌습니다. 퇴각하던 군대는 난폭해져서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습니다. 한동안은 선교인들이 사는 진자의 한 지역 근처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 하루는 선교인 집에 군인들이 들이닥쳤는데, 선교인들의 신분을 알아보고는 아무것도 파손하지 않고 물건도 거의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1986년 1월에는 다른 정권이 권력을 잡아 나라에 어느 정도 안정을 회복시키려고 힘썼습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정부는 막강한 새로운 적과 싸워야 하였습니다. 그 적은 바로 에이즈였습니다. 1980년대에 이 유행병이 세계를 강타했을 때, 우간다는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00만 명에 달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숫자는 15년간의 정치 소요와 내전으로 발생한 사망자보다 더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병은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정규 파이오니아인 워싱턴 센통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부 새로운 형제 자매들은 진리 안에 들어왔을 때 열심과 활력이 넘쳤지만 에이즈를 앓다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진리를 배우기 전에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것입니다.” 믿지 않는 배우자 때문에 감염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알고 지내던 사랑하는 사람의 장례식에 대한 소식을 접하지 않고 넘어가는 달이 한 달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족 성원을 잃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이즈에 대한 여러 가지 미신이 퍼져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에이즈가 마법과 저주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지고 근거 없는 편견에 사로잡혔으며 상황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부활 희망으로 격려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랑을 확신시키면서 서로를 충성스럽게 위로하였습니다.
1980년대 말에 우간다 사람들은 미래를 매우 낙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치안과 국가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기반 시설이
개선되었으며 사회 복지 프로그램이 재개되거나 새롭게 시행되었습니다.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정치적 이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여호와의 증인은 중립 입장 때문에 종종 오해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당국이 일방적으로 왕국회관 건축을 중단시켰습니다. 일부 대회의 허가가 거부되었으며, 몇몇 선교인들은 체류 허가 기간이 만료되자 그 나라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1991년 말에는 선교인 형제가 단 두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떻게 하였습니까?
결국 형제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당국자들과 만나 우리의 중립 입장을 설명했습니다. 당국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자 선교인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활동은 아무런 방해 없이 진척되었으며, 1993년에 우간다는 기쁘게도 1000명의 전도인을 보고하였습니다. 그 후 왕국 선포자가 2000명이 되기까지 5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약 40명의 선교인이 이 나라 전역에서 훌륭한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번역으로 인해 모으는 일이 가속화되다
영어는 이 나라 전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입니다. 하지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현지 언어는 루간다어이며, 여러 민족 집단이 3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 들어 더 급속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번역 작업의 발전이었습니다.
프레드 니엔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충실한 증인이었지만, 제가 영어로 된 연구 기사를 루간다어로 번역해 드리자 집회에서 훨씬 더 많은 유익을 얻었습니다. 당시에는 그것이 앞으로 하게 될 더 큰 번역 작업을 위한 준비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프레드가 한 말은 무슨 뜻입니까?
프레드는 1984년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선교인들에게 루간다어를 가르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이듬해에 그는 루간다어 번역 팀에서 일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처음에 그와 다른 번역자들은 시간이 날 때 자기 집에서 번역을 했습니다. 후에 그들은 선교인 집에 딸린 작은 방에 함께 모여 전 시간 번역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1970년대 중반의 금지령 기간에 몇 개 호의 「파수대」가 루간다어로 번역되어 등사 인쇄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 활동은 중단되었습니다. 198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루간다어 「파수대」가 다시 발행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번역 팀의 규모가 커졌으며, 번역자들은 수가 점점 늘어나는 루간다어 회중을 위해 더 많은 출판물을 번역하려고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현재 이 나라에 있는 모든 회중의 거의 절반이 루간다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때가 되자 출판물은 다른 언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현재는 정규 번역 팀이 루니안코레어, 루콘조어, 아촐리어로 전 시간 번역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에 더해 루그바라어, 루토로어, 마디어, 아테소어로도 얼마의 출판물이 번역되었습니다.
아촐리어 팀과 루니안코레어 팀은 각각 그 언어가 주로 사용되는 지역인 굴루와 음바라라에 있는 번역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번역자가 자신의 모국어 실력을 유지하고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편 현지 회중들은 번역자들의 지원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습니다.
번역 작업에는 분명 많은 노력과 상당한 자원이 필요합니다. 부지런한 우간다 번역자들은 전 세계의 다른 번역 팀들과 마찬가지로 언어 이해와 번역 기술에 대한 질 높은 훈련으로부터 유익을 얻었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그만한 노력과 비용을 들일 가치가 충분히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양한 “부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우간다 사람들 가운데 자신의 언어로 성서 계시 7:9, 10) 그로 인해 2003년에는 우간다에서 3000명이 넘는 왕국 전파자들이 활동하였으며, 단지 3년 후인 2006년에는 그 수가 400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진리를 읽고 유익을 얻는 사람이 이전 어느 때보다 많습니다. (더 많은 숭배 장소가 필요하다
이전에 형제들은 개인 집이나 시민 회관이나 학교 교실에서 함께 모여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리스도인 집회만을 위해 지어진 초기의 건물들은 시골 지역인 나마인고와 루세세에 지어졌는데, 짚으로 지붕을 인 흙벽돌 건물이었습니다. 이 두 지역의 형제들이 솔선해서 기울인 노력은 분명 축복을 받았으며, 그곳의 회중들은 확고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제아무리 수수한 건물을 지으려 해도 비용이 많이 들었으며, 우간다의 경제 여건상 왕국회관을 짓는 소망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습니다. 1988년 3월이 되어서야 내구성 있는 최초의 왕국회관이 진자에서 봉헌되었습니다. 그 회관을 짓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들었습니다. 인근에 있는 숲에서 나무를 벤 다음 진창길을 따라 통나무를 트럭으로 실어 날라서 왕국회관을 건축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음발레와 캄팔라와 토로로에 있는 형제들도 솔선하여 자신들이 가진 기술을 사용해서 왕국회관을 건축했습니다.
1999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의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의 지원으로 건축 팀이 구성되면서 왕국회관 건축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부는 아홉 명을 팀원으로 임명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두 명의 국제 종과 그들의 아내도 있었습니다. 열심이 넘치는 이 팀은 작업 공정을 금세 익혔고 현지의 형제들을 훈련시킬 능력도 갖추었습니다. 건축 프로그램이 더욱 촉진되면서 67개의 회관이 완공되었는데, 각 회관을 짓는 데 평균 한 달 반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전동
공구도 거의 없고 물이 부족할 때도 많고 건축 자재 공급도 일정하지 않은 실정을 감안하면 참으로 놀라운 속도였습니다.현재 우간다의 회중들은 대부분 자체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고 있으며,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회관이 있을 때 어떤 유익이 있는지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관심자들은 학교 교실보다는 제대로 된 숭배 장소에 참석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집회 참석자 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회중들은 급속한 성장을 경험해 왔습니다.
빠른 확장에 대처함
하지만 회중이 놀라울 정도로 증가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대회를 볼 수 있는 한정된 장소들로는 필요를 감당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시골의 형제들이 먼 거리를 여행하지 않아도 될 만한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어떻게 할 것입니까? 확장이 가능하게 설계된 왕국회관을 지으라는 승인이 내려지면서 문제가 잘 해결되었습니다. 이 왕국회관은 일반 크기의 회관 외부에 커다란 지붕과 바닥이 연결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대회를 볼 때는 왕국회관의 뒤쪽 벽면을 열면 더 많은 청중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회관이 이미 카잔시와 루세세와 리라에 지어졌으며, 네 번째 회관이 세타에 건축되고 있습니다.
우간다는 여호와의 축복으로 영적인 성장을 하면서 조직상의 조정도 해야 하였습니다. 1994년 이전에는 나라 전역에 순회구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로, 점점 늘어나는 회중과 집단을 돌보고 다양한 언어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순회구가 생겼습니다. 현재 우간다에는 111개의 회중과 약 50개의 집단이 여덟 개의 순회구를 이루고 있는데, 그중 세 개의 순회구가 루간다어 순회구입니다.
우간다에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는 아폴로 무카사는 1972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등 교육을 추구하는 대신
1980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결정을 후회하고 있습니까?아폴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여행하는 감독자로 회중을—초창기에는 집단도—방문하면서 보람 있는 경험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특히 봉사 훈련 학교에서 영적인 문제와 조직적인 문제에 대해 수준 높은 훈련을 받게 되어 기뻤습니다.”
아폴로 외에도, 1994년에 케냐 지부에서 봉사 훈련 학교 첫 학급이 시작된 이래로 50명이 넘는 우간다 형제들이 그 학교에서 값진 교육을 받았습니다. 자원하는 태도를 가진 이 형제들 중 상당수는 작은 회중이나 집단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일하면서 많은 도움을 베풀고 있으며, 일부 형제들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형제 자매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1995년에는 우간다에 전국 위원회가 임명되어 케냐 지부의 인도 아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루간다어 번역 팀을 포함한 여덟 명의 전 시간 자원 봉사자가 캄팔라에 있는 선교인 집들 중 한 곳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2003년 9월에는 우간다에 지부가 설립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낙원에 와 있습니다”
한동안 전국 위원회는 증가하는 번역 팀과 보조를 맞추고 늘어나는 사무 업무를 돌보느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캄팔라 사무실 인근에 있는 두 군데의 부동산을 매입하였습니다. 하지만 계속되는 확장에 맞추어 일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더 큰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2001년에 통치체는 빅토리아 호에 인접한 캄팔라 외곽에 4헥타르에 달하는 새로운 지부 시설 부지를 매입하는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지부 건축에 가장 적격인 회사가 있었지만, 추가로 공사를 맡기에는 너무 바빠서 처음에는 우리의 요청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는 갑자기 생각을 바꾸었으며, 놀랍게도 새로운 지부 건축 공사에 최저 가격을 제시했습니다. 아마도 뜻밖에 큰 계약을 놓친 탓에 가능한 한 빨리 지부 건축 계약을 따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2006년 1월에 베델 가족은 방이 32개 있는 매력적인 2층짜리 신축 숙소로 이사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 복합 건물에는 사무실 건물과 주방과 세탁실과 넓은 식당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친환경적인 하수 처리 시설, 발송 및
서적 관련 부서들을 위한 창고, 영선 작업장 건물, 저수조, 발전기도 있습니다. 한 형제는 흥분에 휩싸여 “영원한 생명만 없을 뿐이지 우리는 지금 낙원에 와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07년 1월 20일 토요일에 통치체 성원인 앤서니 모리스가 봉헌사를 했습니다.참지식이 풍부하게 되다
혼란과 안정이 교차한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우간다의 여호와의 백성은 ‘순조로운 시기에도 곤란한 시기에도 말씀을 전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둘째 4:2) 2008년에 4766명의 전도인은 1만 1564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1만 6644명이 참석하도록 돕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수치와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1대 6276이라는 사실은 이 나라의 밭이 “희어져 수확”할 것이 아직도 많음을 알려 줍니다.—요한 4:35.
그와 동시에, 우간다의 형제 자매들은 상황이 갑자기 바뀔 수 있다는 것과 한순간에 믿음의 시험이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힘겨운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의 인도와 전 세계 형제들의 지원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한 천사는 충실함을 유지한 연로한 예언자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 참지식이 풍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니엘 12:4) 여호와의 축복으로 우간다에서는 실로 참지식이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나일 강의 발원지가 있는 이 지역에서 풍부한 진리의 물이 계속 샘솟아 영적 진리에 목마른 모든 사람의 갈증을 풀어 줄 것이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세계 전역에서 이 활동을 계속 축복하시는 가운데, 우리는 모든 사람이 연합하여 영원토록 여호와께 강력한 찬양의 함성을 발하게 될 때를 진심으로 고대합니다!
[각주]
^ 25항 프랭크 스미스의 생애에 관한 보고가 「파수대」 1995년 8월 1일호 20-24면에 실려 있다. 프랭크의 아버지인 프랭크 W. 스미스와 작은아버지인 그레이 스미스와 작은어머니 올가 스미스는 동아프리카에서 초창기에 전파한 사람들이었다. 프랭크의 아버지는 프랭크가 태어나기 불과 두 달 전에 케이프타운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다.
^ 26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했지만 지금은 절판됨.
[84면 삽입]
‘아프리카 라디오 방송에서 미국 사람과 스코틀랜드 사람이 서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접하는 것은 꽤 드문 일이었습니다’
[92면 삽입]
“그들이 어떻게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금지시킬 수 있단 말입니까?”
[111면 삽입]
“‘하느님의 왕국’을 루간다어로 뭐라고 하나요?” “오브와카바카 브와 카톤다”
[72면 네모와 삽화]
우간다 개요
국토
울창한 열대 강우림, 드넓게 펼쳐진 사바나, 수많은 강과 호수, 눈으로 덮인 웅장한 루웬조리 산맥이 있는 우간다는 놀라우리만큼 상반된 매력을 지닌 나라이다. 면적은 24만 1551제곱킬로미터이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호수인 빅토리아 호의 거의 절반이 이 나라의 국토에 포함되어 있다.
주민
약 30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진 인구의 85퍼센트 이상이 시골 지역에 거주한다.
언어
우간다에서 사용되는 32개가 넘는 언어 가운데 루간다어가 가장 널리 사용된다. 공용어는 영어와 스와힐리어이다.
직업
우간다는 커피, 차, 목화를 비롯한 환금 작물을 재배하는 농업국이다. 대부분의 우간다 사람들은 농업에 종사하며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자급자족한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어업이나 관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
식품
플랜틴 바나나를 쪄서 만드는 마투케(사진)는 이 나라 남부 지역 대부분에서 인기 있는 요리이다. 기장이나 카사바 가루로 만든 빵과 옥수수 가루와 고구마를 다양한 채소와 함께 먹는다.
기후
우간다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경사진 고원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의 높이는 약 1500미터이며 북쪽은 약 900미터이다. 열대에 있는 이 나라는 기후가 온화하며, 대부분의 지역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된다.
[77면 네모와 삽화]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랑에 감동받다
피터 자비
출생 1932년
침례 1965년
소개 금지령하에서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을 도운 장로. 그와 그의 아내인 에스터는 성장한 네 자녀를 둔 부모이다.
■ 우간다에 최초로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이 왔을 당시에는 이 나라에 인종 차별이 심했으며, 대부분의 백인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멀리했습니다. 우리는 선교인들이 나타낸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랑에 감동되었으며, 그들은 우리의 소중한 벗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 가족은 선교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전파하는 것을 즐겼는데, 그들은 6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음바라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곳으로 가던 길에 군인들이 우리의 차를 멈춰 세웠습니다. 군인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계속 길을 가다가는 죽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하시오.” 아무래도 차를 돌려 집에 가는 것이 좋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선교인들이 점점 더 걱정되었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선교인 집에 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보안이 철통같았지만, 나는 병원 마크가 있는 자동차를 몰고 병원 관리직에서 일하는 신분을 앞세워 봉쇄된 도로를 통과하였습니다. 선교인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말 마음이 놓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식품을 주었으며 그들과 함께 며칠간 지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선교인들이 캄팔라로 안전하게 이사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들을 매주 방문하였습니다.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사랑에 근거한 소중한 형제들과의 유대를 더욱더 깊이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82면 네모와 삽화]
“말을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마거릿 니엔데
출생 1926년
침례 1962년
소개 우간다에서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자매. 20년 이상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활동적인 전도인이다.
■ 남편은 킬민스터 형제가 사회하는 성서 연구를 좋아했습니다. 내가 성서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에 남편은 나도 연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존 브왈리의 아내인 유니스와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내용이 무척 좋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기가 두려웠습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소심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한마디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유니스는 참을성 있게 대해 주었고, 처음에는 내가 성구 한 구절만 읽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러고는 한 집에서 다음 집으로 가는 사이사이에 그 성구에 대해 간단히 설명할 준비를 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를 받기 얼마 전에 남편이 진리를 배척하고 나와 일곱 자녀를 버리고 떠나자 나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사랑 많은 형제 자매들은 나와 자녀들에게 실용적인 도움과 영적인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한 외국인 부부는 집회를 보러 캄팔라로 가는 길에 차를 멈추어 나와 자녀들을 태워 주곤 했습니다. 나는 자녀 넷과 그들의 가족이 여호와를 섬기기로 선택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중에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할 수 있었습니다. 관절염으로 움직이기가 힘들어지자, 집 밖에 출판물이 놓인 탁자를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98, 99면 네모와 삽화]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적 추수 활동을 축복하셨다
사무엘 무콰야
출생 1932년
침례 1974년
소개 여러 해 동안 사무엘은 법적 문제에서 조직의 대리인으로 활동했으며, 장로와 파이오니아로 섬겼다.
■ 나는 나이로비에 있는 케냐 지부 사무실을 견학했을 때 있었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우간다 지도를 살펴보다가 “여기 색깔 있는 핀들은 뭐죠?”라고 물었습니다.
“이곳들은 진리에 관심이 높은 지역들을 표시한 것입니다”라고 케냐 지부 위원인 로버트 하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고향인 이강가에 꽂혀 있는 밝은 색 핀을 가리키면서 “이곳에는 언제 파이오니아들을 보낼 생각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곳에는 아무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더니,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당신이 그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하트 형제의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파이오니아도 아닌 데다 고향에 살고 있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으며, 나는 공무원직을 은퇴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얼마 안 되던 전도인이 금세 자체 왕국회관을 가진 튼튼한 회중으로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패트릭 발리게야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이강가에 임명되자, 나와 같이 지내며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옥수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용할 성구를 토의하고 나서 옥수수 밭에서 몇 시간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9시쯤 되면 구역으로 가서 하루 종일 봉사를 즐겼습니다.옥수수나무가 자라자, 몇몇 이웃 사람들은 우리가 전파 활동 때문에 옥수수 밭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옥수수의 속이 익는 동안에는 원숭이로부터 옥수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원숭이를 쫓느라 영적 추수 활동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우리 밭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커다란 개 두 마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개들이 어디서 왔는지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 개들을 쫓아 버리지 않고 개들이 먹도록 날마다 얼마의 음식과 물을 내다 놓았습니다. 자연히 개들이 우리 밭에서 돌아다니는 동안에는 원숭이가 얼씬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4주가 지나자 그 개들은 처음에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옥수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지자마자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옥수수를 원숭이가 먹어 치우지 않고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풍작을 거두게 해 주신 여호와께 감사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적 추수 활동도 축복해 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101, 102면 네모와 삽화]
감금되어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힘을 주셨다
패트릭 발리게야
출생 1955년
침례 1983년
소개 침례를 받은 지 얼마 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다. 현재 아내인 심프로니아와 함께 여행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 1979년에 새로운 정부가 정권을 잡자, 이전 정권과 관련이 있던 사람은 모두 자발적으로 보호 수감에 응하라는 초대 아닌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마련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새로운 정부에 비우호적인 인물로 간주될 것이며,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나는 군 부대에서 음악가로 일했기 때문에 수감에 응해야 했습니다.
수감되기는 했지만 성서를 매일 읽으면서 정신을 계속 활발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실 나는 진리를 찾고 있었으며 수감된 사람들과 성서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같은 수감 시설에 존 문두아라는 여호와의 증인이 있었는데, 그는 예전에 공무원이었고 이전 정권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진 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존은 나에게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해 주었으며, 나는 그 소식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파수대」지 16부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좋은 소식」 * 책밖에 없었지만, 내가 배우는 내용이 진리라는 것을 곧 깨달았습니다. 3개월간 성서 연구를 하고 나자, 존은 내가 전도인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후에 존은 모든 혐의가 벗겨져 석방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관심을 가진 수감자들을 상대로 성서 연구를 계속 사회했습니다.
나는 1981년 10월에 석방되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는 증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친족들은 나에게 압력을 가하여 자신들의 종교 활동에 동참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섬기고 싶어 하는 나의 마음을 아시고 내게 힘을 주셨습니다. 나는 예수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혼자 전파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여러 건의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느 집주인이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 책을 가져오더니 “당신이 하는 말이 내가 이 책에서 읽은 내용이랑 비슷한데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남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나는 그 책과 그의 집에 쌓여 있는 「파수대」지가 너무나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는 오히려 집주인이 나에게 출판물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동료 숭배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진자에 증인이 있다고 문두아 형제가 말한 적이 있어서, 그곳에서 형제들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거의 밤새도록 기도한 후에, 이튿날 아침 일찍 식사도 거른 채 집을 나섰습니다. 길을 걷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났는데, 그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깨어라!」지가 있는 것을 보고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를 찾은 것입니다!
1984년에 나는 우간다에서 열리는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의 첫 학급에 참석하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같은 학급에 누가 참석했겠습니까? 내가 아끼는 벗인 존 문두아 형제였습니다. 현재 그는 74세의 나이에도 정규 파이오니아로 계속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각주]
^ 228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했지만 지금은 절판됨.
^ 229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했지만 지금은 절판됨.
[113면 네모와 삽화]
그는 마침내 참종교를 발견하였다
선교인인 맛스 홀름크비스트는 한 자매로부터 무테사아시라 야페시를 만나 보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무테사아시라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서 목회자로 활동했지만, 이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20개의 질문을 깔끔하게 적은 목록을 만든 다음 맛스를 만나자 그 목록을 내밀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성서를 토론하고 난 후에 무테사아시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침내 참종교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어서 우리 마을을 방문해 주십시오.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5일 후에 맛스와 또 한 명의 선교인은 칼랑갈로에 있는 무테사아시라를 방문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차 농장 사이로 난 진흙 길을 따라 110킬로미터에 걸친 힘든 여행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무테사아시라가 그들을 “왕국회관”이라는 간판이 있는 초가집으로 데려가자 깜짝 놀랐습니다. 성서 연구와 집회에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입니다!
무테사아시라 외에도 그가 진리를 전한 덕분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이 열 명 더 있었습니다. 성서 연구가 여러 건 시작되었으며, 맛스는 거리가 멀었지만 한 달에 두 번씩 그 연구들을 사회했습니다. 성서 연구는 잘 발전하였습니다. 칼랑갈로에서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도인이 되었으며, 가까운 도시 미티아나에 있는 회중은 번창하고 있습니다. 무테사아시라도 빠르게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일흔이 훨씬 넘은 그는 회중에서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108, 109면 도표와 그래프]
연대표—우간다
1930
1931년 로버트 니즈벗과 데이비드 노먼이 동아프리카에서 전파하다.
1940
1950
1950년 킬민스터 부부가 우간다로 이주하다.
1952년 최초로 회중이 형성되다.
1956년 최초로 침례가 행해지다.
1959년 외국 형제들이 영적인 도움을 베풀다.
1960
1963년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72년 최초로 지역 대회가 개최되다.
1973년 여호와의 증인에게 금지령이 내려지고 선교인들이 추방당하다.
1979년 금지령이 해제되다.
1980
1982년 선교인들의 입국이 다시 허가되다.
1987년 「파수대」가 루간다어로 정기적으로 번역되다.
1988년 최초로 내구성 있는 왕국회관이 봉헌되다.
1990
2000
2003년 지부 사무실이 설립되다.
2007년 새로운 지부 시설이 봉헌되다.
2010
[그래프]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5,000
3,000
1,000
1930 1940 1950 1960 1980 1990 2000 2010
[73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콩고 민주 공화국
수단
케냐
우간다
캄팔라
아루아
굴루
리라
소로티
키오가 호
마신디
호이마
음발레
토로로
나마인고
이강가
진자
세타
카잔시
엔테베
미티아나
칼랑갈로
포트포르탈
루세세
앨버트 호
루웬조리 산맥
적도
에드워드 호
마사카
음바라라
카발레
케냐
빅토리아 호
탄자니아
부룬디
르완다
우간다
캄팔라
케냐
나이로비
메루
케냐 산
몸바사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
잔지바르
[87면 지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우간다
캄팔라
아루아
굴루
리라
소로티
마신디
호이마
포트포르탈
마사카
음바라라
카발레
빅토리아 호
[삽화]
하디 형제 부부는 6주 만에 거의 우간다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66면 전면 사진]
[69면 삽화]
동아프리카에 좋은 소식을 전한 데이비드 노먼과 로버트 니즈벗
[71면 삽화]
조지 니즈벗과 로버트 니즈벗 그리고 그레이 스미스와 올가 스미스가 차를 실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려는 모습
[75면 삽화]
메리 스미스와 프랭크 스미스, 1956년에 결혼하기 직전의 모습
[78면 삽화]
앤 쿡과 그의 자녀가 마쿰바 형제 부부와 함께한 모습
[80면 삽화]
톰 맥레인과 베델 맥레인, 우간다에 최초로 임명된 길르앗 선교인
[81면 삽화]
진자에 설립된 최초의 선교인 집
[83면 삽화]
길르앗 선교인인 바버라 하디와 스티븐 하디
[85면 삽화]
메리 니즈벗(가운데)과 그의 아들들인 로버트(왼쪽), 조지(오른쪽), 윌리엄과 그의 아내 뮤리얼(뒷줄)
[89면 삽화]
캄팔라에서 열린 “하나님의 통치권” 지역 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톰 쿡
[90면 삽화]
조지 오촐라와 거트루드 오촐라
[94면 삽화]
금지령하에서도 형제들은 계속 함께 모였습니다
[95면 삽화]
프레드 니엔데
[96면 삽화]
이매뉴얼 차미자
[104면 삽화]
스탠리 마쿰바와 그의 아내인 에시날라 마쿰바, 1998년
[107면 삽화]
독일 길르앗 분교의 첫 번째 학급에 참석한 하인츠 베르톨츠와 마리아네 베르톨츠
[118면 삽화]
번역 팀
루간다어
아촐리어
루콘조어
루니안코레어
[123면 삽화]
이전 건물(왼쪽)과는 전혀 다른 현대식 왕국회관
[124면 삽화]
우간다 지부
지부 위원회: 맛스 홀름크비스트, 마틴 로우엄, 마이클 라이스, 프레드 니엔데; 사무실 건물(아래), 숙소 건물(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