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푸아뉴기니
파푸아뉴기니
오랜 옛날,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아시아를 지나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들은 말레이 제도 동쪽 끝에서 지형이 험한 열대 섬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인 뉴기니였습니다. * 이 섬의 무더운 해안 지대를 따라 이동하던 사람들은 넓은 늪지대와 빽빽한 밀림 지역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섬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산줄기를 타고 올라가 널찍한 계곡이 있고 토양이 비옥하고 기후가 온난한 고지대에 정착했습니다.
정착한 사람들은 연합된 하나의 나라를 이룬 것이 아니라 1000개가 넘는 작은 부족 단위로 살면서 툭하면 서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부족들은 제각기 나름의 관습을 따랐고, 고유의 옷을 입었으며, 80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의 부족은 바깥 세계와 완전히 단절된 채 방어를 단단히 한 지역에서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평선 너머에 악귀들과 죽은 조상들이 사는 영역이 있으며 그러한 영들이 좋게든 나쁘게든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습니다. 그 영들을 달래는 일이 사람들의 생활의 주된 부분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생김새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보편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1526년에 이 섬에 왔다가 그러한 특징에 유의한 포르투갈의 관리 조르즈 드 메네즈스는 이 섬에 “머리털이 곱슬곱슬한 사람들의 땅”을 뜻하는 일랴스 두스 파푸아스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스페인 탐험가 이니고 오르티스 데 레테스는 이곳 사람들이 서아프리카의 기니에 사는 사람들과 닮았다고
생각하여 이 섬을 누에바 기네아 즉 뉴기니라고 명명했습니다.19세기에 유럽의 강국들이 이 섬을 세 부분으로 분할했습니다. 가장 먼저 온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인도네시아에 속한 부분인 서쪽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동쪽 절반은 영국과 독일이 나누어 점령했는데, 남부는 영국령 뉴기니(후에 파푸아로 불린 지역), 북부는 독일령 뉴기니(후에 뉴기니로 불린 지역)가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두 지역 모두 오스트레일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파푸아와 뉴기니는 합쳐져서 1975년에 파푸아뉴기니라는 독립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
오늘날 파푸아뉴기니에서는 여전히 현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첨단 편의 시설을 갖춘 현대화된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구의 다섯 명 중 네 명은 오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삽니다. 그들의 생활 방식은 수백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이곳에서는 돼지를 가진 사람이 부자로 여겨지고 결혼할 때는 신붓값을 지불하는 일이 흔하며 영매술이 널리 퍼져 있고 부족에 대한 충성이 무엇보다도 중요시됩니다.
하지만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이 나라에 최근 수십 년간 더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모든 민족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그들이 여러모로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줍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에 들어 있는 진리를 연구하고 적용해서 생기는 영적인 변화입니다.—로마 12:2.
초기에 좋은 소식을 전한 사람들
성서 진리가 파푸아뉴기니에 처음으로 전해진 때는 1932년이었는데, 펙이라는 영국인 파이오니아가 말라야(지금의 말레이시아)로
가는 길에 이 섬에 들렀던 것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현지인들에게 몇 주 동안 전파했으며, 임지로 가기 전까지 수백 부의 성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3년 뒤, 라이트베어러호라는 모터가 달린 쌍돛대 배에 탄 일곱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배의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하기 위해 포트모르즈비 항에 들렀습니다. 그들은 한 달간 머물면서 포트모르즈비 전역과 인근 지역에서 열심히 전파했습니다. 그중에는 강인한 뉴질랜드 사람인 프랭크 듀어가 있었는데, 그는 책을 잔뜩 들고 해변에서 5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걸어 다니면서 그곳 주민들에게 성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그러한 출판물 일부가 코이아리 부족 출신의 주술사인 헤니 헤니 니오키라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헤니 헤니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성서 진리의 씨앗은 여호와의 증인이 다시 방문하여 물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고린도 첫째 3:6.
1930년대 후반에 또 한 명의 파이오니아가 뉴브리튼 섬, 뉴아일랜드 섬, 부건빌 섬을 포함하여 파푸아뉴기니의 주요 지역을
광범위하게 다니며 전파하면서 많은 성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전파 활동을 채 이어 나가기 전에 그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의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큰 마을”에서 전파하다
12년 후, 1951년 9월 22일에 키가 큰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한 명이 비행기에서 내려 포트모르즈비의 숨 막힐 듯한 무더위 속으로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47세의 증인 톰 키토였는데, 태평양의 섬들에서 왕국 활동을 시작할 자원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요청에 그가 응했던 것입니다. 그의 아내인 로위나도 6주 뒤에 합류했습니다. 그들의 전파 구역은 파푸아뉴기니 전역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키토 부부는 포트모르즈비에 사는 백인들 대부분이 왕국 소식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들은 같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 제프 버크넬을 만났는데, 그는 어린 시절에 진리에서 떠내려갔던 사람이었습니다. 제프는 연구를 하기로 했고, 나중에 그의 아내 아이린과 함께 충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에 키토 부부는 하누아바다라는 마을로 갔는데, 하누아바다는 현지어인 모투어로 “큰 마을”을 의미합니다. 포트모르즈비
항구까지 뻗어 있는 이 마을에는 말뚝 위에 세운 집들 수백 채가 해변에서부터 쭉 이어진 긴 나무다리들을 따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로위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들으려고 우리 주위로 모여들었지요.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아주 많아서 두 달 동안 이틀만 빼놓고 매일 저녁 성서 연구를 사회했어요.” 톰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지상 낙원에서의 삶과 부활에 대한 희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국 선교사들과 현지 경찰관으로부터 성서 연구를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아무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던 것이지요.”진리를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라호 라카타니와 코니오 라카타니 부부, 오다 시오니, 게우아 니오키와 그의 남편 헤니 헤니 니오키가 있었는데, 헤니 헤니는 16년 전 라이트베어러호에 탄 파이오니아로부터 출판물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심 가진 사람들 30명 정도가 헤니 헤니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린 소년이었던 오다 시오니는 다음과 같이 회상합니다. “방 양쪽으로 남자들과 여자들이 따로 떨어져 앉았습니다. 여자들은 윗옷 없이 풀로 엮은 치마만 입고 있었고, 끈이 달린 알록달록한 자루에 아기를 넣어
와서 그 자루를 지붕의 들보에 매달아 놓았지요. 젖을 먹인 다음에는 아기를 다시 자루 속에 넣고 부드럽게 흔들어 잠을 재웠습니다.”톰 키토는 집회를 사회할 때 통역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항상 집회가 매끄럽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3년에 이곳에 온 돈 필더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한번은 헤니 헤니의 친형제인 바두 헤니가 집회를 통역하고 있었습니다. 바두가 톰의 말을 통역하면서 몸짓까지 따라 하는 걸 보고 처음에는 집회가 잘 진행되는 줄 알았지요. 하지만 나중에 바두는 톰의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고 고백하더군요. 그는 그저 진리에 대해서 자신이 아는 내용을 말하면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톰의 몸짓을 흉내 냈던 것입니다.” 그러한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그 집단은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금세 두 번째 집단이 형성되어 같은 마을에 살던 라호 라카타니의 집에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와서 우리 부족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1952년 초, 코이아리 부족의 족장이자 이름난 주술사였던 보보기 나이오리가 완토크 즉 같은 부족 사람인 헤니 헤니를 방문했다가 그의 집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에 감명을 받은 그는 나중에 톰 키토에게 다가가 이렇게 간청했습니다. “부탁입니다. 와서 우리 부족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십시오!”
얼마 후 키토 부부는 낡은 소형 트럭을 몰고 흙탕길을 달려 보보기의 집으로 갔는데, 그의 집은 포트모르즈비에서 북쪽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하이마 마을에 있었습니다. 보보기가 통역하는
가운데, 톰 키토가 모여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약 30명이 성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같은 달 얼마 후에, 하이마 마을의 이 집단은 그리스도인 집회 장소로 사용할 작은 회관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그 회관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던 엘시에 호르스부르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그 회관의 골조는 숲에서 가져온 나무로 되어 있었고, 지붕은 풀로 덮여 있었으며, 대나무로 짜여진 벽이 허리 높이까지 왔지요. 내부는 나무 의자와 석유램프 그리고 작은 흑판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이 수수한 건물이 파푸아뉴기니 최초의 왕국회관이었습니다.
보보기는 이제 근처의 산악 지역에 사는 자기 완토크들에게도 좋은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톰과 함께 소게리 고원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얼마 안 있어 세 마을에서 90명이 넘는 사람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파 활동이 정부 당국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습니다. 이오아다부에서는 한 정부 관리가 모임 장소로 들이닥쳐 여호와의 증인이 무슨 권한으로 현지 주민들을 가르치는지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또한 경찰은 우리의 활동에 대해 알아내려고
관심자들 여러 명을 심문했습니다. 몇몇 마을 목회자와 농장주들은 형제들을 폭행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일부 관심자들은 그런 압력에 굴복하여 연구를 중단했습니다. 하지만 확고한 태도를 나타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54년, 하이마의 랄로키 강에서 13명의 성서 연구생들이 침례를 받았으며,
이것은 파푸아뉴기니에서 행해진 최초의 침례였습니다. 그때 침례 받은 사람 중 하나인 보보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코이아리 부족 사람 모두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난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 말과 일치하게 보보기는 1974년에 사망하기까지 하이마 회중에서 장로로 충실히 섬기며 충절을 지켰습니다.기억에 남는 모임들
1955년 7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봉사하던 캐나다 출신 선교인 존 컷포스가 최초의 순회 감독자로서 포트모르즈비에 도착했습니다. 존은 금세 열대 지방과 그곳의 생활 방식 그리고 겸손한 현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자신이 35년 넘게 봉사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존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적인 활동과 대회들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라는 기록 영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3주간의 방문 동안 이 영화를 14회 상영했으며, 매번 적게는 몇 백 명에서 많게는 거의 2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현지인들에게 실제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이들 중 다수는 전에 영화라고는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존의 방문은 하이마에서 열린
하루 동안의 순회 대회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톰 키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침례 지원자들에게 일어서 달라고 요청하자, ··· 70명이 일어났습니다! 40명의 형제들과 30명의 자매들이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기 위해 밀림 속 강가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듯 우러나왔습니다.”이듬해에 형제들은 하이마에서 두 번째 순회 대회를 열기 위해 계획했습니다. 촌장인 보보기는 필요한 시설을 짓는 일과 참석할 사람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대회가 열리기 사흘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새로운 순회 감독자인 존(테드) 수얼이 대회 준비와 관련해서 상의하기 위해 보보기를 만났습니다.
테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대회 시설은 어느 정도나 준비됐나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라고 보보기가 대답했습니다.
“보보기, 벌써 목요일이에요. 일요일이 대회라고요!” 하고 테드가 외쳤습니다.
그러자 보보기는 “형제, 걱정 마세요. 토요일에 다 할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테드는 이번 대회가 엉망진창으로 조직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포트모르즈비로 돌아갔습니다.
일요일이 되어, 테드는 대회 준비가 어떻게 되었을지 마음을 졸이며 하이마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 아래 튼튼해 보이는 나무 연대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깔끔하게 치워진 널찍한 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쪽에서는 뜨겁게 달궈진 돌을 넣은 구덩이에 돼지, 왈라비, 사슴, 비둘기,
생선, 얌, 고구마를 넣어 굽고 있었습니다. 모닥불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는 차가 끓고 있었습니다. 나무로 만든 간이식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이는 보보기가 서 있었습니다. 테드는 놀라서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보보기, 이렇게 준비하는 건 어떻게 다 알았나요?” 하고 그가 물었습니다.
보보기가 대답했습니다. “아, 작년에 존 컷포스 형제가 보여 주신 영화에서 봤어요.”
이 대회에 여덟 개 부족에서 온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석했고 7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이 대회는 보보기의 대회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림을 사용해 전파하다
1957년, 존 컷포스는 파푸아뉴기니로 이주하여 여행하는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이전에 이곳을 처음 방문했던 때부터, 그는 대부분이 문맹인 현지인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파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하고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터였습니다. 이제 그의 생각을 실행할 때가 되었습니다.
존은 회중이나 격지 집단 앞에서 연설할 때, 먼저 자신과 통역자의 이름을 칠판에 썼습니다. 그런 다음 하늘을 가리키면서 “하느님, 이름 무엇?”이라고 청중에게 질문했습니다. 청중이 대답하면 “여호와”와 “시편 83:18”을 칠판 맨 위에 썼습니다. 그 아래 왼쪽에는 “낡은 세상”이라는 제목을 쓰고, 싸우고 있는 두 사람과 우는 얼굴과 무덤을 선과 원으로 간단히 그리고는 “로마 5:12”이라고 썼습니다. 오른쪽에는 “신세계”라는 제목을 쓰고, 악수를 하는 두 사람과 웃는 얼굴과 무덤을 그린 다음 무덤에 가위표를 하고 “계시록 21:4”이라고 썼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그림을 설명하는 생동감 넘치는 연설을 한 뒤, 청중에게 앞으로 나와 자신이 연설한 대로 따라 해 보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내용을 온전히 익히고 나면, 종이에 그 그림을 똑같이 그려서 전파 활동을 할 때 사용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연설을 “그림 연설 1번”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수행되는 전파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다른 그림 연설들도 곧 만들어졌습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47년간 봉사한 리나 데이비슨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림이 포함된 이 교육 자료들을 공책에 베껴 쓰느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성서 연구생들은 이 베껴 쓴 공책을 각자 한 권씩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쓸 그림책을 직접 만들고 색칠하면서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이 회중 집회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40년 이상 봉사한 캐나다 출신의 파이오니아 조이스 윌리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파수대」 연구와 공개 집회 때 칠판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여러모로 활용했는데, 이 방식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림 연설을 캔버스에 그려 대회에서 가르칠 때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순회 활동을 한 마이크 피셔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 큼직한 그림들을 매우 좋아했고, 이 그림들을 보고 주요점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 그림들 중 다수가 격지에 사는 전도인들의 집에 걸리게 되었고, 그들은 자기 집에 오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랑스럽게 보여 주면서 증거했습니다.”수십 년 뒤, 삽화가 실린 출판물들이 널리 쓰이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됨에 따라, 그림 연설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확장하다
1950년대 후반, 열심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파푸아뉴기니로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또한 포트모르즈비에서 진리를 배운 많은 사람들도 자기가 살던 마을로 돌아가 왕국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 전역에 좋은 소식이 빠른 속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1957년, 당시 26세였던 데이비드 워커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형제가 포트모르즈비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근처의 마누마누 마을과 가바디 지역 사람들이 진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일을 그만두고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 시작하여 혼자 그 지역에서 1년간 전파했습니다. 후에 다른 사람들이 그가 기울인 노력을 기반으로 그곳에서 전파 활동을 이어 나갔으며, 현재 마누마누에는 회중 하나와 왕국회관 하나가 있습니다.한편 돈 필더는 포트모르즈비의 코키 시장에서 전파하다가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어부들을 여러 명 만났습니다. 이 어부들은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훌라라는 해안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돈 필더는 이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을 더 돕기 위해, 애슬(댑) 롭슨과 몇몇 관심 있는 훌라 사람들을 데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선체가 두 개인 8미터 길이의 새 카누를 타고 훌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훌라에 사흘간 머물렀고 그곳에는 작은 연구 집단 하나가 생겼습니다.
얼마 후, 돈은 특별 파이오니아로 훌라에 가게 되었으며, 아내인 셜리와 두 살 난 딸 데비도 함께 갔습니다. 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 지역에 있는 다섯 마을에서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려면 매일 총 12킬로미터가량을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몸이 힘들긴 했지만 영적으로는 새 힘을 얻었습니다. 성서 연구가 많이 생긴 데다가 이내 여덟 명의 새로운 전도인들이 우리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돈과 셜리의 전파 활동에 화가 난 현지 연합 교회의 교직자는 그들의 오두막이 있던 곳의 땅 주인에게 그들을 그 땅에서 내보내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와서 오두막을 옮기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마을에 속한 땅으로 오두막 전체를 기초까지 다 옮겼습니다.”
분노한 교직자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트모르즈비 당국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돈 필더의 가족이 그 지역 어디에도 오두막을 세우지 못하게 했습니다. 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임지를 떠나지 않고, 대신 솜씨 좋은 목수인 알프 그린에게 오두막을 허물 때 나온 목재를 가져다가 선체가 두 개인 우리 카누에 작은 방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는 강어귀의 맹그로브 늪지대에 카누를 정박시켰습니다. 모기떼가 들끓고 여기저기에 악어들이 숨어 있었지만, 우리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며 2년 반 동안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돈 필더 가족은 둘째 딸 비키가 태어나자 포트모르즈비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이들은 여행하는 봉사를 하게 되었으며, 돈은 지부 위원으로 일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소식을 듣다
그 무렵, 포트모르즈비에서는 랜스 가산과 다프네 가산이 여러 명의 젊은이와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이들은 서쪽으로 22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케레마라는 해안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휴가를 보내러 집으로 돌아가자, 랜스와 짐 챔블리스는
그들을 방문하여 2주 동안 케레마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랜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마을 전체가 우리 말을 들으려고 모여들었습니다. 연설을 하고 있는데, 그 지역의 런던 선교회 목사가 들이닥치더니 사람들이 막을 새도 없이 통역하는 사람을 공격하여 주먹으로 여러 번 때렸습니다. 목사는 우리가 그곳에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원치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기’ 구역에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식을 듣고 싶은 사람은 우리와 함께 마을 반대편으로 가고, 나머지는 목사와 함께 있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우리를 따라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일을 알리러 지역 행정관에게 가는 길에 몸이 몹시 아픈 한 여자를 만났습니다. 인근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그 여자는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한참을 설득한 후에 결국 그는 우리를 따라나섰습니다. 의사에게 그 여자를 데려다 주고 나서 지역 행정관을 만났는데 그는 우리의 방문을 전혀 반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의학적인 도움을 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병원에서 만났던 의사가 들어오다가 행정관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조금 전에 우리가 아픈 여자를 설득하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했다고 행정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행정관은 훌륭하게도 즉시 사과하면서, 현지 가톨릭 사제가 조금 전 자신을 찾아와 우리의 신앙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고는 또 문제가 생길 경우에 우리를 보호하도록 무장 경찰 두 명을 정해 주었습니다. 총을 찬 경찰관들이 앉아 있는 가운데 성서 연구를 하는 것은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얼마 후, 젊은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 짐 스미스와 라이오닐 딩글이 특별 파이오니아로 케레마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현지 언어인 타이루마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짐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모투어로 단어를 하나씩 말하면 성서 연구생들이 그에 해당하는 타이루마어 단어를 알려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 적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얼마의 어휘를 알게 되었으며 성서에 근거한 간단한 연설을 암기할 수 있었습니다. 현지 사람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다른 백인들 중에는 현지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석 달 뒤에는 케레마 만의 이쪽 편과 저쪽 편에서 타이루마어로 매주 집회를 사회하게 되었습니다.”후에,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젊은 파이오니아인 글렌 핀레이가 짐과 라이오닐의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18개월 동안 케레마에서 혼자 봉사했습니다. 글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성과 없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경험을 통해 나는 자신을 낮추고 견해를 바꾸게 되었습니다.
내 성서 연구생 중에 헤보코라는 이름을 가진 연로한 마을 제빵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혀 글을 읽을 줄 몰랐고 몇 달이 지났는데도 겨우 몇 가지 기본 진리밖에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계속 요한 6:44.
그를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내가 그의 집 쪽으로 다가가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것은 헤보코가 여호와께 기도를 드리는 소리였습니다. 그는 진지한 어조로 하느님의 이름과 왕국에 관한 진리를 배워 알게 된 것에 대해 감사드리고 있었습니다. 이 진실한 기도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지적 능력이 아니라 마음을 보신다는 점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잘 아십니다.”—화물 숭배자들에게 증거하다
1960년, 케레마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사바이비리에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스티븐 블런디와 앨런 호스킹이 도착했습니다. 스티븐과 앨런은 3개월을 천막에서 지낸 뒤, 광대한 늪지에 둘러싸인 코코넛 농장에 있는 작은 나무 집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사바이비리는 화물 숭배가 널리 퍼져 있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화물 숭배는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이곳 사람들은 외국 군인들이 가져온 엄청난 재물 즉 화물에 경탄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은 짐을 꾸려 떠났습니다. 일부 주민들은 그 화물이 영들의 세계인 수평선 너머에서 왔으므로 죽은 조상들이 보내 준
것임이 틀림없으며 군인들이 그것을 가로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필요한 것들을 보내 달라고 영들에게 기원하기 위해 군사 훈련을 흉내 내고 튼튼한 부두를 만들어서 엄청난 양의 새로운 화물이 도착할 영광스러운 날을 대비했습니다.스티븐과 앨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약 250명의 화물 숭배자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그중에는 그들의 지도자와 그의 “열두 사도”도 있었습니다. 스티븐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현지 당국의 순찰관은 우리의 전파 활동이 사바이비리에서 화물 숭배가 사라지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다
초기의 파이오니아들은 성서 출판물을 현지 언어로 번역하는 일의 가치를 금세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820개나 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출판물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한 첫 번째 단계로, 1954년에 톰 키토는 현지 형제들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 책의 한 장(章)을 포트모르즈비에서 쓰는 언어인 모투어로 번역하도록 마련했습니다. “‘새 땅’”이란 제목의 이 번역본이 200부 넘게 등사되어 팜플렛 형태로 배부되자 모투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기뻐했습니다.
새로운 지역들에서도 전파 활동이 시작되면서, 파이오니아들은 출판물을 다른 현지 언어들로도 번역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습니다. 짐 스미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타이루마어 사전과 문법 노트를 만들기 위해 새로운 단어와 표현들을 공들여 기록했고, 그것을 사용하여 「파수대」 연구 기사를 번역했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번역된 기사를 종이에 타자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한 적도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타이루마어로 전도지와 소책자도 각각 하나씩 번역했습니다. 이 초기
출판물들은 많은 케레마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훌라어와 토아리피어로도 출판물이 발행되었습니다. 모든 언어로 출판물을 인쇄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두 가지 상용어인 히리모투어와 토크피신어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히리모투어는 모투어를 단순화한 형태의 언어로서 파푸아의 해안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쓰는 언어입니다. 돈 필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언어의 문자 체계를 개량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사실, 히리모투어가 현재의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된 데는 「파수대」를 포함해서 이 언어로 발행된 우리 출판물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토크피신어는 영어와 독일어와 쿠아누아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들이 혼합된 언어인데, 섬들과 고지대와 해안 지역이 있는 파푸아뉴기니 북부에서 널리 사용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한 구역들이 있는 북부 지역에서 어떻게 전파 활동이 시작되었습니까?
좋은 소식이 북쪽으로 퍼지다
1956년 6월, 파푸아뉴기니 북동쪽의 비스마르크 제도에 위치한 뉴아일랜드 섬에 처음으로 증인이 이주해 왔습니다. 갓 결혼한 파이오니아 부부인 켄 프레임과 로지나 프레임이었습니다. 회계사인 켄은 그 섬의 중심 도시인 카비엥에 있는 큰 무역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켄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시드니에서
떠나올 때 들은 조언은 공개적으로 전파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익숙해지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로지나는 옷 만드는 일을 했는데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손님이 금세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손님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했고, 곧 몇몇 관심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그룹이 매주 한 번 우리 집에서 조심스럽게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18개월 뒤, 순회 감독자인 존 컷포스가 우리를 방문하면서 「신세계 사회의 행복」이라는 영화를 보여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현지 극장 주인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우리의 무료 ‘선교’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습니다. 극장 직원들이 이 영화에 대해 소문을 냈나 봅니다. 극장에 도착해 보니, 입구가 사람들로 꽉 차서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면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본 사람들을 제외하고도 23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우리는 좀 더 공개적으로 전파했습니다.”
1957년 7월,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회중 하나가 세워졌는데, 라바울은 두 개의 활화산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입니다. 라바울 회중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세낸 집의 뒤뜰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파이오니아인 노먼(놈) 샤레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매일 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하러 그 집에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약 20명씩으로 나누어 그룹을 만든 다음 나무 밑에서 등불을 켜 놓고 가르쳤습니다.”
그 회중이 연 첫 순회 대회 때 인근의 해변에서 일곱 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중 다섯 명은 곧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봉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은 어디였습니까? 오스트레일리아 지부 사무실에서 답을 주었습니다. 바로 마당(Madang)이었습니다!
요한 4:35) 그곳에 있는 소수의 전도인들로는 관심자들을 다 돌보기가 벅찼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파이오니아인 매슈 포프와 그의 가족이 도착하여 뒤뜰에 여러 개의 오두막이 딸린 집을 사자, 이제 그곳에 더 많은 파이오니아를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뉴기니 섬의 북동 해안에 있는 마당 시는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밭”이었습니다. (라바울에서 온 여덟 명의 파이오니아들이 마당 지역구 여기저기로 전파 활동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중 한 명인 타물 마룽은 자전거 한 대를 구한 다음 연안 여객선을 타고 마당에서 북쪽으로 48킬로미터 떨어진 자신의 고향 마을 바스켄으로 갔습니다. 그는 바스켄에서 전파한 뒤 자전거를 타고 증거를 하면서 마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바스켄에 다시 가서 회중을 세웠으며 그 후로도 25년간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결혼을 했고 자녀를 키웠습니다. 타물 마룽의 딸과 그의 조카의 딸은 나중에 베델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마당에서는 존 데이비슨과 리나 데이비슨이 칼리프 카나이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바스켄과 마당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 탈리디그에서 온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존과 리나는 탈리디그로 다니면서 칼리프를 비롯하여 그의 친족들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가톨릭교인인 그 지역 장학사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그 장학사는 칼리프와 그의 친족들을 집에서
쫓아내라고 경찰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이웃 마을인 바길디그로 옮겼고, 그곳에서 번창하는 회중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큰 왕국회관을 지어서 대회장으로도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마당 지역구에는 일곱 개의 회중과 두 개의 집단이 있습니다.마당에서 전파 활동이 진척되고 있을 무렵, 남동쪽으로 21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큰 해안 도시인 라에에서는 존 엔도르와 마그달렌 엔도르 그리고 짐 베어드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존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우리 집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연구를 했습니다. 6개월이 채 안 되어 성서 연구생들 중 열 명이 봉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활동하는 신세계 사회」 영화를 라에 극장에서 상영했을 때 1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왔습니다. 당시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는 계약 고용인이
많았는데 나중에 이들은 산골에 있는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면서 좋은 소식도 함께 가져갔습니다.라에에서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역에서도 열심 있는 전도인들이 꿋꿋하게 활동하여 좋은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와우에서는 매우 열심히 여호와를 섬기는 크고 둥근 얼굴의 남자 잭 아리페아에가 회중을 설립했고, 그 회중은 그의 집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잘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한때 식인 풍습으로 악명 높았던 쿠쿠쿠쿠 부족에서도 약 서른 명의 사람들이 성서 연구를 하면서 영적으로 진보해 나갔습니다.
한편 인근의 불롤로에서, 왈리 부스브리지와 조이 부스브리지가 열정적으로 전파하자 그곳을 자신들의 구역으로 여기던 새 부족 선교회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왈리의 고용주는 선교회의 압력 때문에 결국 왈리에게 “당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을 거면 다른 일자리를 찾으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왈리와 조이는 라에로 이사하여 계속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후에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고 여러 해 동안 여행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라에 남동쪽의 작은 도시인 포폰데타에서는 포트모르즈비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제롬 호토타와 라비니아 호토타가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제롬은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고 성경을 설득력 있게 사용했으며, 라비니아는 사람들에게 진실한 개인적 관심을 나타내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파 활동을 시작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성공회 주교와 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제롬과 라비니아의 집에 와서 전파 활동을 그만두라고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계속 전파했으며 작지만 열심 있는 회중을 세웠습니다.
1963년에는 좋은 소식이 파푸아뉴기니 북쪽 해안의 외딴 도시인
웨와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독일 출신 건축업자인 카를 테이노어와 오토 에버르하르트가 낮에는 웨와크 병원에서 일하면서 저녁과 주말에 100명이 넘는 관심자들과 함께 연구를 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그 지역의 가톨릭 사제는 폭도를 모아 카를과 오토가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들을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사제의 행동에 동참했던 사람 중에 저명한 마을 지도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 지도자는 아들의 행실이 변화한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마음이 누그러졌고 자신이 관할하는 마을에서 증인들이 전파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지부가 설립되다
교직자들이 증인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동안 형제들은 최고 기관을 통해 ‘좋은 소식을 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조처를 취했습니다. (빌립보 1:7) 그래서 1960년 5월 25일, 여러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사용하는 법인인 만국 성경 연구회가 공식적으로 정부에 등록되었습니다. 이제 왕국 활동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왕국회관과 그 밖의 시설을 짓기 위해 국유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해에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파푸아뉴기니에 개설되었습니다. 지부의 종으로는 존 컷포스가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빌려 쓸 만한 장소가 거의 없는데 어디를 사무실로 사용한단 말입니까?
파푸아뉴기니에 온 지 얼마 안 된 짐 다빈스와 플로런스 다빈스 부부 덕택에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짐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파푸아뉴기니에서 미군 해병으로 복무한 적이 있었습니다. 후에 그와 플로런스는 진리를 받게 되었고, 봉사의 직무를 확장할 목표를 세웠습니다. 짐은 이렇게 말합니다. “1958년, 우리가 오하이오에 살 때 포트모르즈비에서 온 한 형제가 우리를 방문하여 파푸아뉴기니의 모습이 담긴 슬라이드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 형제가 슬라이드 한 장을 실수로 두고 갔더군요. 그 슬라이드에 들어 있는 풍경은 정말로 아름다웠지요. 아내는 ‘우편으로 보내야겠어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러지 말고 우리가 직접 갖다 줍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1년 후에 다빈스 부부는 딸 셰리와 데버러를 데리고 포트모르즈비 근교의 식스마일에 있는 작은 콘크리트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짐과 존 컷포스는 지부 사무실로 쓸 장소를 구하는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포트모르즈비를 다 돌아다녀 봐도 지부 사무실로 쓸 만한 곳이 마땅찮아요.” 존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집은 어때요? 앞에 있는 방 세 칸은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고, 우리 가족은 뒤쪽에 있는 방에서 살면 되니까요”라고 짐이 대답했습니다.
곧 필요한 마련들이 모두 이루어졌고 1960년 9월 1일에 다빈스 가족의 집이 파푸아뉴기니 지부의 첫 번째 사무실로 공식 인가되었습니다.
‘증인들의 활동을 금지하라’
반대자들이 이러한 진전을 가만두고 볼 리가 없었습니다. 1960년부터 그리스도교국 교회들과 오스트레일리아 재향 군인회와 현지 보도 기관들은 힘을 모아 여호와의 증인을 비방하고 활동을 금지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운동을 벌였습니다.
의사, 교직자, 정부 관리들 일부에게 수혈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는 소책자를 배부했을 때 상황이 극에 달했습니다. 여느 때처럼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먼저 들고일어났습니다. 1960년 8월 30일, 「사우스 퍼시픽 포스트」지는 “수혈 문제에 교회가 노하다”라는 제목의 머리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교회 지도자들은 증인들을 “적그리스도[이자] 교회의 적대자”라고 비난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반정부 단체이며 학생들에게 무단결석을 부추기고 사람들 사이에 납세 거부와 화물 숭배를 조장하며 심지어 비위생적인 생활 방식을 가르친다고 거짓 주장을 펼쳤습니다. 또한 증인들이 가까워 오는 일식을 이용하여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순진한 원주민들의 정신을 조종”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이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한 사설은 심지어 증인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것”에 대해서도 흠을 잡았습니다. 「사우스 퍼시픽 포스트」지에서는 증인들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 증인들은 “공산주의자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고 주장했습니다.
마침내 1962년 3월 25일, 오스트레일리아 재향 군인회는 증인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식민지 당국에 정식으로 청원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그러한 요구를 공식적으로 거절했습니다. 돈 필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한 발표는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반대자들의 주장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고지대로 올라가다
그해 같은 달,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는 포트모르즈비를 출발해 여러 주가 걸리는 험난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구역인 험준한 뉴기니의 고지대에 좋은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 전, 금을 찾으러 온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이 고지대로 들어왔다가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채 살아가던 백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백인들을 보고 두려움을 느낀 고지대 주민들은 그들이 죽은 자의 세계에서 온 조상들의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을 찾는 사람들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로위나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곳에 있던 선교사들은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주민들에게 우리의 말을 듣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경고는 오히려 좋은 홍보가 되었지요.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은 그 고지대 사람들이 우리가 오기를 고대하게 된 것입니다.”
톰과 로위나는 마운트하겐에서 북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인 와바그에 작은 가게를 차렸습니다. 톰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직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와는 어떤 상거래도 하지 말고 말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게다가 우리가 사용하던 땅의 임대 계약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이 알던 백인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신들을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거든요. 사실, 그들은 종종 우리의 친절한 행동에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고, 우리가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참을성 있게 가르쳐서 결실을 거두다
1963년부터 다른 나라 출신의 많은 증인들이 전파 활동의 확장을 도우려고 고지대로 이주했습니다. 이 형제 자매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많은 지역에 집단과 회중을 세웠으며 결국 고지대 전역에 진리가 전해졌습니다.
이스턴하일랜즈 주의 고로카에 형성된 작은 회중은 처음에 개인 집에서 집회를 보았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숲에서 가져온 자재로 수수한 모임 장소를 지었습니다. 1967년에는 의자가 40개 있는 아름다운 왕국회관을 건축했습니다. 10년간 고지대에서 봉사한 조지 칵슨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아마겟돈이 올 즈음에나 그 의자를 다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었지요!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져서 1년도 안 되어 회중을 하나 더 만들어야 했습니다!”
고로카보다 더 동쪽에 있는 카이난투 근처에서는 노먼(놈) 샤레인이 매일 그의 오두막으로 찾아오는 50명이 넘는 마을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파이오니아인 베른트 안데르손과 에르나 안데르손이 2년 반 동안 이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에르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잘 씻지 않는 데다 옷을 거의 입지 않았습니다. 글도 전혀 몰랐고 악귀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지요. 하지만 참을성 있게 사랑으로 도운 결과 일부 사람들은 150개의 성구를 외워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베른트와 에르나는 이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에르나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임명을 받아 카비엥으로 가게 되자 마을 여자들은 내 주위로 몰려와 울었습니다, 아니 통곡했습니다! 그들은 번갈아 내 얼굴과 팔을 어루만지면서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지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서 여러 번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고 그동안 남편이 그들을 달랬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어요. 마침내 우리가 출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우리 차를 뒤따라 산을 달려 내려왔고 여자들도 엉엉 울면서 따라왔습니다. 그날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요. 아직도 그 느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소중한 사람들을 신세계에서 꼭 다시 만나고 싶어요!” 다른 파이오니아들이 베른트와 에르나의 뒤를 이었고, 카이난투에 훌륭한 회중이 세워졌습니다.
뿌려진 왕국 씨가 열매를 맺다
1970년대 초에는 고로카에서 서쪽으로 13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마운트하겐에 이미 증인들의 작은 집단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매주 서는 큰 장은 매우 유명해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주변 마을에서도 수천 명이 찾아왔습니다. 도러시 라이트라는
두려움을 모르는 파이오니아 자매는 “우리는 이 시장에서 수백 부의 출판물을 전했지요”라고 말합니다. 시장에서 왕국 소식을 들은 이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면서 그 소식을 함께 가져갔고, 그리하여 당시 전도인이 갈 수 없었던 오지의 마을까지 진리가 전해졌습니다.나중에 도러시의 아들인 짐 라이트와 그의 파이오니아 짝인 케리 케이스미스가 마운트하겐 동부의 반즈라는 곳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반즈는 차와 커피를 재배하는 지역으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와기 계곡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곳 선교회는 이들을 심하게 반대했는데, 돌을 던지도록 아이들을 부추겨서 이들을 마을에서 몰아내려 했습니다. 케리는 임지가 바뀌어 다른 곳으로 갔지만, 짐은 반즈에 홀로 남아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종종 나의 작은 초막집에 누워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여호와여, 제가 왜 여기 있는 건가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습니다.”
짐은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2007년에 지역 대회에 참석하려고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반즈로 여행을 했습니다. 멋진 새 왕국회관이 전에 내가 살던 초막집 근처에 서 있었는데, 필요하면 1000명이 앉는 대회 회관으로 넓혀 사용할 수도 있는 건물이었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자 한 형제가 달려와 나를 붙잡고는 내 어깨에 얼굴을 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폴 타이라는 그 형제는 겨우 울음을 그친 후에 그의 아버지가 나와 함께 36년 전에
연구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폴은 자신이 나중에 아버지의 연구용 서적을 읽고 진리를 받아들였으며 장로로 섬기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그 대회에서 나는 연단으로 초대되어 초창기에 반즈에서 진리를 전할 때 우리가 겪었던 박해에 대해 회견을 했습니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나자 형제들 여러 명이 다가와 나를 껴안으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한 채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전에 돌을 던지고 욕을 하면서 마을에서 나를 쫓아냈던 바로 그 소년들이었습니다. 그 형제들 중에는 현재 장로로 섬기고 있는 망게 삼가르가 있었는데 그는 당시 아이들을 부추긴 루터교 목회자였습니다! 정말 그 대회는 멋진 재회의 장이었습니다!”
오지에서 진리의 싹이 트다
파푸아뉴기니의 많은 사람들은 증인들을 직접 만나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인가 진리의 씨가 오지까지 전도 11:6) 예를 들어, 1970년 즈음부터 지부 사무실은 멀리 떨어진 세피크 강 인근의 확인되지 않은 마을에서 야외 봉사 보고들을 정기적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보고는 존재하지 않는 회중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순회 감독자인 마이크 피셔에게 조사해 보도록 요청했습니다.
흘러 들어가 진리를 접하게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 마을로 가기 위해 모터가 달린 카누를 타고 모기가 들끓는 밀림의 좁은 물길을 따라 열 시간을 여행했습니다. 해 질 녘에야 그곳에 도착해 드디어 그 편지를 보낸 수수께끼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러 해 전에 다른 지역에서 제명된 사람이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는 죄를 회개하고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마을 주민 중에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자처하는 성인이 30명이 넘었고, 침례를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회개한 그 사람은 곧 복귀되었고 지부에서는 그 집단을 공식적으로 승인해 주었습니다.”
1992년에 대릴 브라이언이라는 순회 감독자는 내륙에 있는 한 외딴 마을의 주민들이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80킬로미터를 운전하여 내륙 쪽으로 들어간 다음 한 시간 반 동안 울창한 밀림 속을 걷고, 또다시 카누를 타고 한 시간 동안 노를 저어 강 상류로 올라가 그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뚝 솟은 산들로 둘러싸인 강가에 새로 지은 건물 하나가 서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이라는 표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관심 있는 사람들 약 25명이 일요일마다 왕국회관에 모여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증인이라고 하기에 나는 그들에게 빈랑을 씹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럴 리가요. 1년 전에 진리를
받으면서 끊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 내가 순회 방문을 해야 할 곳에 그 집단을 포함시켜 주었을 때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더 많은 선교인이 들어오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파푸아뉴기니 밭으로 수많은 길르앗 학교 졸업생과 봉사 훈련 학교 졸업생과 특별 파이오니아가 오면서 전파 활동에 가속이 붙었습니다. 이들은 뉴질랜드, 독일, 미국, 스웨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캐나다, 핀란드, 필리핀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복음 전파자들 중 일부가 후에 결혼하여 동일한 열심을 가진 짝들을 데려오면서 이러한 축복은 종종 배가되었습니다.
새로 온 사람들 대부분은 도착하자마자 이삼 개월간 토크피신어나 히리모투어 언어 수업을 들었습니다. 학생들은 매일 오전에는
언어를 공부하고 오후에는 배운 내용을 사용하여 봉사했습니다. 이러한 훈련 덕분에 그들 중 상당수가 몇 개월도 안 되어 의미 깊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연설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그러한 과정은 그들이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참을성을 보이고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많은 관심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읽고 쓰기 능력을 습득하도록 도울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50:4) 그 결과 1989년에 2000명이던 전도인 수가 단지 9년 만에 50퍼센트 증가하여 1998년에는 약 3000명이 되었습니다!
이 복음 전파자들 중 다수는 나중에 건강 문제나 그 밖의 이유로 파푸아뉴기니를 떠났지만, 사라지지 않을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 소중한 전파자들의 충실하고 사랑에 찬 행동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히브리 6:10.
건축 활동으로 성장이 촉진되다
왕국 전도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왕국회관과 대회 회관이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고 더 넓은 지부 시설도 필요했습니다. 그러한 시설들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습니까?
1975년 이전에는 정부 산하의 국토부가 종교적인 목적을 위한 새로운 토지 구획들을 정기적으로 지정했습니다. 그러한 부지를 할당받으려는 교회들은 신청을 하고 정부가 임명한 국토 위원회 앞에서 심사를 받았습니다. 심사가 통과되면, 일정 기간 이내에 건물을 짓는 조건으로 사용료 없이 부지를 할당받았습니다.
1963년에 만국 성경 연구회는 그리스도교국 교직자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포트모르즈비에서 가장 좋은 부지를 확보했습니다. 언덕에 자리 잡은 그 부지는 코키 시장과 짙푸른 산호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아주 멋진 곳이었습니다. 후에 이 부지에 지부 사무실과 왕국회관으로 쓰인 2층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뒤이어
포트모르즈비의 사바마, 호홀라, 게레후, 고르돈에도 부지를 확보하여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고르돈 부지는 도심 근처에 있는 요지로서 원래 성공회에서 성당을 지을 곳으로 확보해 놓은 장소였습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25년간 봉사한 론 핀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공청회에서 토지 위원회 의장은 교회가 토지를 차지해 놓고 종종 상업적으로 남용하는 것을 위원회에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성공회 교직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성공회가 현재 할당된 토지를 원래 목적대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더 이상 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의장은 이 말을 하고 나서 내 쪽을 보더니 우리가 어떤 땅을 필요로 하는지 물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땅은 고르돈의 ‘성당’ 구획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공회 교직자가 이의를 제기하려고 벌떡 일어섰지만 의장은 앉으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 입장에 대한 설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참석한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결과가 나왔는데 위원회가 그 땅을 사용할 허가를 우리 회중에게 내준 것입니다.”
이 부지에는 왕국회관 한 채와 4층으로 된 지부 사무실이 지어졌습니다. 1987년 12월 12일에 이 새로운 지부 시설을 봉헌했으며, 먼저 있던 코키 부지는 처분되었습니다.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는 지부 시설에 4층짜리 숙소 건물과 왕국회관 한 채와 번역 사무실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2010년 5월 2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현재 파푸아뉴기니 전역에는 89채의 왕국회관과 그 밖의 모임 장소들이 있습니다. 많은 시골 지역에서는 여전히 현지에서 구한 나무로 모임 장소를 짓습니다. 하지만 큰 도시에서는 현대적인 건축 자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왕국회관 중 다수는 1999년부터 파푸아뉴기니에서 실시된,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을 위한 건축 프로그램을 통해 지어진 것입니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전파하다
파푸아뉴기니의 여러 종교들 사이에는 각각 전도 활동을 할 구역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교회 집단마다 자기 구역이 있었으며 다른 종교가 그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살든 관계없이 모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증인들의 이러한 전파 방식과 더불어 진리를 듣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많은 사람들 때문에 교직자들은 분노했습니다.
노먼(놈) 샤레인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웨스트뉴브리튼 주에 있는 쿠르말라크라는 작은 섬으로 이사했을 때 나를 처음 찾아온 사람들 중에는 성공회 교직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당신에게는 내 교구에서 전도할 권한이 없소. 이 사람들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단 말이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나와 성서 연구를 하는 한 사람이 통나무배를 타고 거친 바다를 헤치며 정신없이 노를 저어 해변으로 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실 그런 날씨에 바다에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지요. 그는 통나무배를 해변에 대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하기를, 교리 문답 교사를 필두로 가톨릭교인들이 배에 한가득 타고 오고 있는데 그들이 나를 때릴 거라고 했습니다. 도망갈 곳이 없던 나는 여호와께 지혜와 힘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배가 도착하자 열다섯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내렸습니다. 얼굴을 빨갛게 칠한 것을 보니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에게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겁이 났었는데 그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가까이 가자 그들은 욕을 하면서 내가 응수하면 그것을 꼬투리 잡아 싸움을 걸려고 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나와 성서 연구를 하는 할아버지도 한 분 계셨는데, 사실 그 섬은 그분의 소유였습니다. 그분은 나름대로 나를 도와주려는 의도에서 그 남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싸움을 안 해. 한번 쳐 봐! 내 말이 맞을 걸!’
나는 ‘도대체 누구 편을 드시는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그분이 그냥 가만히 계시길 바랐습니다.
몇 분간 그 남자들을 설득하고 나서 나는 그들에게 떠나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리를 이끌고 온 사람에게 잘 지내자는 뜻으로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와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더니 그 사람은 내가 내민 오른손을 잡고 악수를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긴장이 누그러졌고 모두가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떠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이더군요!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 절로 생각났습니다. ‘주의 종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에 대하여 부드럽고, ··· 고난 아래서도 자기를 제어[해야 합니다.]’”—디모데 둘째 2:24.
베른트 안데르손은 고지대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 루터교 목회자가 이 마을 증인들을 쫓아내고 왕국회관을 부수려고 다른 마을 사람들 약 70명으로 이루어진 폭도들과 함께 왔습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 베른트가 마을 밖으로 나오자 그들은 당황했습니다. 베른트는 목회자에게 가서 왜 루터교 선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국 선교사들 몇 명이 현지식으로 정한 아누투라는 이름을 하느님의 이름이라고 가르치는지 물었습니다. 성서에 그 이름이 나온다는 목회자의 말에 베른트는 어디에 나오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목회자가 성서를 펴서 찾아보려 했지만 끝내 실패하자 베른트는 시편 83:18을 읽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베른트의 도움으로 겨우 시편을 찾은 다음 그 구절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자 그는 성서를 덮더니 “이건 거짓말이야!” 하고 소리쳤습니다. 자기 입으로 자신의 성서를 모욕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그 목회자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전과는 다른 태도로 증인들을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재로 지은 왕국회관에 종교적 반대자들이 실제로 불을 지르기도 했는데, 밀른베이 주에 있는 아기(Agi)라는 마을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의 경우, 술 취한 채 방화에 동참했던 한 사람이 자신이 한 일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형제들을 찾아가 성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새로 지어진 왕국회관에 붙어 있는 파이오니아 집에서 살도록 제의를 받았습니다. 한때 회관에 불을 질렀던 사람이 이제는 바로 그 회관을 돌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종교적 박해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크레이그
스피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폭력이 또 다른 문젯거리가 되었는데, 주로 라스콜이라고 불리는 불량배와 도둑들이 그런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위험한 지역에서 증거 활동을 할 때 여럿이 무리를 지어 봉사하고 늘 서로가 보이는 곳에 있으려고 합니다.”“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져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선교인인 에이드리언 라일리와 앤드리아 라일리의 말입니다. 에이드리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쇼핑을 하든 봉사를 하든 언제나 출판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현명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물이 있어서 여호와의 봉사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도움이 될 수 있지요. 한번은 라에의 위험한 지역에서 차가 고장 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혼자였는데 좀 있으니 불량해 보이는 젊은이들 한 패가 나를 둘러싸는 겁니다. 그런데 그중에는 그 일이 있기 얼마 전에 나와 성서 토의를 했던 두 명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내 편을 들어 주었지요. 결국 나는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고 해를 입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젊은이들 모두가 고장 난 내 차를 선교인 집까지 400미터나 밀어다 주었어요. 나는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자매가 시장에서 칼을 든 라스콜의 위협을 받았는데 그들은 자매에게 “가방을 내놔” 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자매는 즉시 가방을 건네주었고 그들은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몇 분 뒤 그들이 다시 돌아와 사과하며 물건이 그대로 들어 있는 가방을 돌려주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가방을 열어 성서와 「추리」 책을 발견하고는 자신들이 한 일로 인해 양심이 찔린 것입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전파하다
1958년부터 1966년까지 남편 빌 슈와 함께 파푸아뉴기니에서 봉사했던 엘시 슈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전파했습니다. 마을이나 집, 정원, 시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했고 숲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파했어요. 해변이나 강둑에서는 어부들에게 증거했지요. 초창기에는 더 외진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보여 주기 위해 세계 지도도 가지고 다녔어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바깥세상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마을 사람들이 우리가 비행기로 온 것을 보고 하늘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우리 역시 그들과 같은 세계에 사는 사람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왔을 뿐임을 알려 줘야 했지요.”
파푸아뉴기니의 긴 해안선과 수많은 강줄기를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을 중 상당수는 배나 카누를 이용해야만 갈 수 있습니다.
스티브 블런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포트모르즈비 하누아바다 출신인 다에라 구바는 배와 관련해서 일가견이 있는 연로한 형제였지요. 그의 집 밑에 속을 파낸 통나무 두 개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 파이오니아 짝과 함께 그를 도와 푸아푸아라 불리는 현지식 쌍동선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를 구해 왔습니다. 돛은 캔버스 천으로 만들었지요. 우리는 다에라를 선장으로, 하누아바다 출신 형제 두세 명을 선원으로 하여 포트모르즈비 근처의 해안가 마을들을 여러 번 방문했습니다.”1960년대 후반에 베른트 안데르손은 본토에서 북동쪽으로 650킬로미터 떨어진 아름다운 섬인 뉴아일랜드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인근의 작은 섬들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도 방문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하지만 그러려면 배가 필요했는데 우리가 매달 실비로 받는 적은 돈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요. 헛간에 판자가 몇 개 있긴 했지만 배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에에 사는 한 형제가 우리에게 인근 섬들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며 200달러를 보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 돈으로 배를 만들어서 파이오니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엔진을 달 여유는 안 되더군요. 또다시 그 고마운 형제가 자금을 지원해 주어 선체 밖에 다는 작은 엔진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그림같이 아름다운 섬들을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1990년 즈음, 순회 감독자인 짐 데이비스는 다른 형제 세 명과 함께 플라이 강 상류에 있는 인도네시아 국경 근처의 난민 수용소에 가서 증거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형제들은 한 관심자의 집에 묵기로 미리 마련해 두었는데, 이 관심자의 남편은 수용소 관리자 중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짐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터를 단 통나무배를 타고 두 시간 가까이 플라이 강 상류로 올라갔습니다. 오전 9시경에 밀림 속에 있는 한 공터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멀리 수용소까지 이어진 비포장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우리를 태워 갈 자동차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차 한 대가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물건들을 싣고 차에 올라탔는데, 차는 100미터 정도밖에 못 가서 조향 장치에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운전자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더니 울타리용 철사를 구해 와서는 차 밑으로 들어가 떨어진 부분을 동여맸습니다. 나는 ‘그래 가지고는 오래 못 버틸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도로 상태 때문에 다섯 시간 내내 4륜구동으로 운전해야 했지만 철사는 잘 버텨 주었습니다. 사실, 여러 차례 차가 진흙탕에 빠지는 바람에 직접 밀어서 빼내기도 했습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진흙을 뒤집어쓴 지친 몸으로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3일간 밀림 속 여기저기에 넓게 흩어져 있는 수용소에서 증거하면서 가져간 출판물을 모두 전했습니다. 또한 이전에 제명되었지만 여호와께 다시 돌아오기를 원하는 한 남자도 만났습니다. 후에 그가 복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 여러 명도 현재 진리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기꺼이 숙소를 제공해 주었던 관심자와 그의 남편도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세피크 강에서의 순회 활동
세피크 강은 고지대에서 바다까지 1100킬로미터 이상을 구불구불 흘러가는 한 마리의 거대한 갈색 뱀처럼 보입니다. 강의 몇몇 지점은 폭이 매우 넓어서 한쪽 강기슭에서 반대쪽 기슭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강은 여행하는 감독자 부부를 포함해 형제들이 정기적으로 이용하는 멋진 고속도로입니다. 이 거대한 물길을 따라 회중들을 방문하는 한 순회 감독자 부부와 함께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워런 레이놀즈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른 아침, 아내인 리앤과 나는 자동차 지붕 위 짐받이에 3.5미터 길이의 알루미늄 배를 묶어 싣고는 웨와크 시내를 벗어납니다. 대부분의 구간을 4륜구동으로 운전하여 세 시간을 달린 후, 강가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차를 이곳에 주차해 두고, 세피크 강 상류로 올라가 강의 지류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네 개의 마을에서 약 30명의 전도인을 방문할 것입니다.
바닥이 평평한 우리 배에 필요한 것들을 싣고는 배 외부에 장착된 25마력짜리 모터에 시동을 걸어 상류로 향합니다. 그렇게 한 시간을 가니 세피크 강의 지류 중 하나인 유아트 강에 접어듭니다. 이제 두 시간을 더 가면 비와트 마을입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형제들과 성서 연구생들이 따뜻하게 우리를 맞이해 주고 몇몇은 우리 배를 끌어올려 그중 한 사람의 집에 보관해 둡니다. 우리는 플랜틴 바나나와 코코넛 밀크로 식사를 한 후에 다시 길을 떠납니다.
모두 함께 질척질척한 밀림을 두 시간가량 걸어가는데, 전도인들이 우리 짐을 나눠 들고 앞장섭니다. 드디어 우리는 디미리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합니다. 코코넛 밀크로 갈증을 푼 다음, 말뚝 위에 지어진 나무 집에 모기장을 치고 잠자리를 준비합니다. 얌을 요리해 저녁을 먹고는 잠자리에 듭니다.이 지역에는 열네 명의 전도인이 세 개의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며칠 동안 우리는 각 마을에서 증거하면서 관심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또한 성서 연구생 두 명이 결혼을 법적으로 등록하고 왕국 전도인으로 봉사하도록 승인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습니다. 다른 전도인들이 얌과 사고 야자나무 녹말과 식용 잎사귀와 닭 두 마리로 간단한 결혼 만찬을 준비합니다.
일요일 공개 강연 집회에 93명이 참석한 것을 보니 가슴이 벅찹니다!
집회가 끝난 뒤 우리는 배낭을 챙겨 한낮의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비와트로 돌아가려고 길을 떠납니다. 비와트에 도착하여 한 성서 연구생의 집에 짐을 내려놓고 봉사를 나갑니다. 출판물을 받는 사람도 여러 명 있고 성서 연구를 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밤이 되자 우리는 어느 성서 연구생의 집에 모여 모닥불 주위에 앉아 연기로 모기떼를 쫓으면서 식사를 합니다.날이 밝자 우리는 일찍부터 배를 찾아와서 강에 띄우고는 아침 안개를 가르며 나아갑니다. 온갖 새들과 물에서 첨벙대는 물고기들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대나무 뗏목을 탄 가족들이 인근의 시장에서 팔 물건들을 싣고 조용히 반대 방향으로 지나갑니다.
자동차가 있는 곳에 도착한 우리는 배에 연료를 채우고 마실 물과 다른 필요한 물품을 보충합니다. 그러고는 열네 명의 전도인들이 살고 있는 캄보트를 방문하기 위해 다시 배를 탑니다. 두
시간 뒤에 우리는 도중에 내린 열대성 폭우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캄보트에 도착합니다. 이제 배에 전도인들을 가득 태우고 상류로 올라가 강 양편에 자리 잡고 있는 큰 마을로 갑니다. 이곳에 사는 인식 깊은 사람들에게 증거하다 보니 벌써 늦은 오후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강에 떠 있는 대나무 선착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그들은 아침에 우리가 상류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딴 지역에는 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가 와 준 것과 책자를 전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코코넛, 호박, 훈제 생선, 바나나 등의 식품을 챙겨 줍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우리는 캄보트로 돌아와 그들에게서 받은 식품으로 요리를 합니다.캄보트의 집회 장소는 이 지역의 다른 집들과 마찬가지로 말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기가 되어 온 지역이 물에 잠기면, 사람들은 집회 장소의 계단까지 카누를 타고 옵니다. 공개 강연에 72명이 참석했는데, 그중에는 다섯 시간을 걸어서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공개 강연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방문도 끝납니다.
우리는 순회 방문용 자동차로 돌아와 배를 차 지붕 위에 싣고 집을 향해 세 시간을 달립니다. 돌아오는 길에 세피크 강 주변에 살고 있는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떠올려 봅니다. 또한 그들을 영적으로 잘 먹이기 위해 여호와의 조직이 기울이는 노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그 노력에는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멋진 가족에 속해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축복입니다!”
악한 영들과 씨름하다
파푸아뉴기니 사람들 중 다수가 그리스도교를 믿는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상을 숭배하고 악귀들을 두려워하는 등 전통 신앙도 고수합니다. 한 여행 안내서에 따르면, 이곳에는 최근 몇 년 사이 “마법과 주술이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는 것이 조상들의 영이나 주술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성서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맛보고 있습니다. 주술사였던 몇몇 사람들까지 하느님의 말씀의 힘을 깨달은 뒤 주술을 그만두고 참숭배를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의 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소아레 마이가는 포트모르즈비에서 5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마을에 살았는데, 그가 강력한 주술을 행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신앙에 호기심이 생겨 집단 성서 연구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오래지 않아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옛 생활 방식을 버렸습니다. 그런데 소아레가 영매술과 관련된 물건들을 버리기만 하면 그 물건들이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자꾸만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마귀를 대적’하기로 결심한 소아레는 어느 날 그 물건들을 모두 가방에 넣고 돌을 매단 뒤 포트모르즈비 앞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야고보 4:7) 이번에는 그 물건들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용감한 남자는 참하느님이신 여호와의 열심 있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코라 레케는 주술과 약초를 사용해 병을 치료해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성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이제껏 마법을 행하도록 그를 돕던 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소아레처럼 코라도 더 이상 악귀와 관련을 맺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으며 여호와의 도움을 받아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고, 특별 파이오니아로도 섬겼습니다. 연로해져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 충실한 형제는 계속 이웃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코라는 자신이 자주 가는 봉사 장소로 어떻게 이동했습니까? 당장 구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수단이 손수레였으므로 형제들이 그를 손수레에 실어서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중에 지부에서 일하는 한 재치 있는 형제가 친절하게도 휠체어를 제작해 주었는데, 일반 의자의 철제 뼈대에 자전거 바퀴를 단 다음 앉는 부분에 캔버스 천을 대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이동 수단은 코라가 혼자서 활동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고, 그는 이것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연로한 사람들의 본은 정말 우리에게 격려가 되며, 분명 여호와께서도 그들을 보며 행복해하실 것입니다!—잠언 27:11.
사람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치다
로마 15:4에서는 “전에 기록된 모든 것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분명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읽고 쓸 줄 알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푸아뉴기니의 여호와의 증인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물론 읽고 쓰는 법을 배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며, 특히 연로한 사람들에게 그러합니다. 하지만 배우려는 열의가 있다면 대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가장 낮은 자와 전혀 배우지 못한 사람에게도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세피크 강 상류에 살던 사베 난펜이라는 젊은 남자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라에로 이사하여 처음으로 서방 세계의 문물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왕국 희망에 관해 듣게 되었습니다. 사베는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자격을 갖추어 침례 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다음 단계인 침례 받기를 주저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된 다음에 침례를 받겠다고 여호와께 약속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자신의 영적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문맹이 아직도 널리 퍼져 있지만, 이제 많은 지역에는 학교가 있으며 증인 자녀들도 그러한 학교에 다닙니다. 사실 우리의 청소년들이 읽고 쓰는 일에 모범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주된 이유는 그들이 부모로부터 교육을 잘 받고 신권 전도 학교를 비롯한 회중 집회를 통해 훈련받기 때문입니다.
성서 진리가 생활을 변화시키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의 싸움의 무기는 육적인 것이 아니라, 강하게 방비된 것들을 무너뜨리도록 하느님에 의해 강력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 둘째 10:4) 어떤 경우에는 단지 성서 한 구절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엘프리다라는 여자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엘프리다는 웨다우어로 된 자신의 성서로 하느님의 이름을 보게 되자 백과사전을 찾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성서에서 읽은 것과 일치한 내용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은 진리를 가르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아미티지는 증인들과 아무런 관련도 맺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술꾼인 데다가 빈랑을 씹었고 담배를 피웠으며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미티지는 라에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뒤 아내인 엘프리다와 함께 밀른베이 주의 알로타우로 이사했습니다. 그곳에는 증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프리다는 「파수대」와 「깨어라!」지를 구독했으며 파이오니아인 케일린 닐슨과 편지로 연구했습니다. “엘프리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써서 매주 성실히 편지를 보내 주었지요”라고 케일린은 말합니다.
그 후, 길르앗 졸업생인 조르디 라일과 조앤 라일이 밀른베이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엘프리다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봉사도 함께했습니다. 조르디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미티지가 나에게 성서 연구를 요청하더군요. 그에 대한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요. 하지만 연구를 한 달 정도 해 보니 그의 동기가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침례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봉사의 종이 되었지요.” 현재 아미티지의 가족 삼대가 진리 안에 있으며 앞서 언급된 그의 손자인 케가왈레 비야마는 포트모르즈비에서 지부 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훌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돈 필더와 셜리 필더는 알로기 팔라와 레나기 팔라 부부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돈은 이렇게 썼습니다. “알로기는 도둑질을 일삼았고 사람들과 싸움을 벌이기 일쑤였습니다. 그는 열대병을 앓고 있어서 피부가 보기 흉했으며 열대성 궤양 때문에 입의 일부가 뭉그러져 있었습니다. 부부가 다 빈랑을 씹었기 때문에 그들의 검은 치아 사이사이는 종종 빨간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알로기는 정말 진리를 받아들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부는 진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집회에도 와서 뒷자리에 앉아 조용히 내용을 들었습니다.”돈은 계속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알로기는 6개월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도둑질을 하거나 싸우거나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와 그의 아내는 신체적으로 깨끗해졌고 집회 때 참여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훌라 지역 최초의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뉴아일랜드에 사는 아벨 와라크라는 사람은 나병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손과 발에 감각을 잃었습니다. 진리를 처음 접했을 때는 거의 걸을 수 없었고 인생에 흥미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그의 태도와 인생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그의 삶은 다시 기쁨과 활력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는 파이오니아 봉사도 시작했습니다. 아벨은 식사 때 먹을 생선을 낚시로 잡곤 했는데, 발에 감각을 상실한 후로는 모래톱이나 갯바위 위로 걷는 것이 매우 위험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그에게 무릎까지 오는 고무장화를 사 주었습니다. 그는 자전거 타는 법도 배워서 좋은 소식을 전하러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번 1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달려 재방문을 하기도 했고, 관심자를 기념식에 초대하기 위해 자전거로 편도 145킬로미터를 간 적도 있었습니다.
때때로 “여호와에 관한 지식”은 이사야 11:6, 9) 일례로, 1986년에 라에에서 열린 지역 대회 때 청중석의 앞쪽에 앉았던 60명가량은 반즈 인근의 두 마을에서 함께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지대에 있는 이 두 마을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툭하면 싸움을 벌이던 원수지간이었습니다. 하지만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전하는 좋은 소식을 듣고는 평화롭게 살기로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스가랴 4:6에 나오는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군대로도 되지 않고, 힘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 바로 그 영이 진실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켜 성서의 도덕 표준과 일치하게 살도록 해 왔습니다.
야수와 같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크게 변화시킵니다. (하느님의 선물인 결혼 마련을 존중하다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은 흔히 성서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그 지방의 결혼 관습을 따르며, 그 점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 19:5; 로마 13:1) 파푸아뉴기니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거나 일부다처의 관습을 따랐던 많은 남녀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중대한 변화를 했습니다. 프랜시스와 크리스틴 부부의 경우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프랜시스는 군인 생활을 그만두면서 아내와 별거했습니다. 아내인 크리스틴은 두 자녀를 데리고 밀른베이 주 구디너프 섬에 있는 자신의 고향 마을로 갔고, 프랜시스는 마운트하겐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그는 그곳에서 다른 여자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하느님의 성회 교회에 나갔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여자는 증인을 만나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프랜시스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프랜시스는 왕국 전도인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결혼과 관련된 문제를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 기도하면서 깊이 생각한 뒤 함께 사는 여자와 상의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와 자녀들은 다른 집으로 이사했으며 프랜시스는 6년간 떨어져 살았던 아내 크리스틴을 만나러 갔습니다. 아내를 찾아온 프랜시스를 보고 크리스틴과 그의 친족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랜시스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열망을 성경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친절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내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마운트하겐으로 돌아가서 함께 살자고 말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변화에 모두가 크게 놀랐습니다. 크리스틴은 남편의 말을 따르기로 했으며 프랜시스는 아내의 친족들이 지난 6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해 준 모든 것에 대해 물질적으로 보상해 주었습니다.
마운트하겐에 돌아온 크리스틴은 남편을 따라 성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러기 위해 읽는 법도 배웠습니다. 또한 담배를 피우고 빈랑을 씹던 습관도 버렸습니다. 이 부부는 현재 헌신한 여호와의 종입니다.
창조주께 영예를 돌리는 어린이들
파푸아뉴기니에는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에 따라 용기 있게 행동하여 좋은 증거를 해 온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1966년 초에 한 초등학교에서는 교사가 증인 자녀 일곱 명에게 그다음 주에 있을 학교 의식에서 기 경례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이 되었고 300명가량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일곱 명의 증인 자녀 모두 기 경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 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부모들이 사전에 편지로 자녀들을 그 의식에서 제외시켜 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말입니다. 그곳 회중의 장로가
파푸아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 당국에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했습니다.3월 23일, 파푸아뉴기니의 오스트레일리아 행정관은 학교 측에 전화하여 그 어린이들을 당장 학교로 돌아오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참숭배가 작은 법적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양심상의 이유로 기 경례를 하지 않는 어린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기들과 젖먹이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마태 21:16) 고지대에 사는 나오미의 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나오미의 부모인 조와 헬렌은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세 살 무렵에 라에에 있는 이모 집에서 1년 정도 살았습니다. 열심 있는 증인인 이모는 정기적으로 나오미를 봉사에 데려갔는데 종종 나오미를 어깨에 걸치는 자루에 넣어서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왕국 희망에 대해 잘 알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모가 「나의 성서 이야기 책」에 나오는 삽화를 사용해 가르쳤기 때문에 왕국 소식에 더욱 친숙해졌습니다.
다시 부모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나오미는 증인 출판물을 들고 집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부모는 “이리 들어와”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안으로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성서에 관해서 이야기해 드리려고 왔어요.” 조와 헬렌이 놀라서 보고 있는 가운데 나오미가 말을 이었습니다. “성서는 이 땅이 낙원이 될 것이고 예수라는 한 왕이 우리를 다스릴 거라고 알려 줘요.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거예요.”
조와 헬렌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조는 “옆집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내일은 애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해” 하고 아내에게 소리쳤습니다.
이튿날 조와 헬렌이 집 밖에 앉아 있는데 나오미가 침실 벽을 큰 소리로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밖으로 나와” 하고 조가 말했습니다. 나오미는 나오더니 또 제공 연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호와의 증인이에요. 전도하러 왔어요. 착한 사람들은 땅에서 영원히 살 거예요. 하지만 화를 내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낙원에 없을 거예요.” 너무나 당혹스러운 나머지 헬렌은 울음을 터뜨렸고 조는 침실로 획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날 밤 호기심이 생긴 조는 갖고 있던 오래된 킹 제임스 성경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여호와라는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다음 날 그는 일하러 가지 않고 증인들에게 편지 한 통을 쓴 뒤
마운트하겐까지 40킬로미터를 운전하여 왕국회관으로 가서 그 편지를 남겨 두고 왔습니다.형제들이 조와 헬렌의 집을 방문했으며 정기적인 성서 연구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들은 헬렌에게 읽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침내 조와 헬렌 모두 침례를 받았으며 헬렌은 다른 성서 연구생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한 어린 소녀의 마음이 여호와에 대한 찬양으로 넘쳐흘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애쓰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리스도인 집회나 대회에 갈 때 오염이 심하고 혼잡한 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타야 합니다. 하지만 파푸아뉴기니에 사는 형제들은 잘 닦인 도로나 교통수단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가족들은 집회나 대회에 참석하러 갈 때 적어도 일부 구간은 걷거나 카누를 타거나 혹은 두 방법 다 사용해서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전도인들은 매년 포트모르즈비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자녀들을 데리고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진 미끄러운 산길을 160킬로미터 이상 걸어갑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혹한 전투가 많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한 코코다 길을 따라 1주일을 걷습니다. 이 힘든 도보 여행을 하는 동안 그들은 대회를 보는 데 필요한 식량과 조리 도구와 옷가지와 그 밖의 물건들도 가지고 다닙니다.
외딴 누쿠마누 환초에 사는 형제들은 주로 서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라바울에 가서 매년 대회를 봅니다. 짐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배를 타면 여행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기 때문에 형제들은 시간 내에 대회장에 도착하기 위해 6주 전에 출발하기도 합니다. 돌아오는 여정도 종잡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지요.
한번은 누쿠마누로 가는 유일한 배가 수리를 위해 오스트레일리아에 들렀는데 거기서 선주들에게 자금 문제가 생긴 겁니다. 결국 형제들이 집에 돌아오는 데 6개월 이상이 걸렸지요!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몇 주가 늦어지는 일은 예사여서, 발이 묶인 전도인들은 동료 증인들이나 친족들의 집에서 신세를 질 수밖에 없습니다.”선교인들의 훌륭한 본
선교인들은 자신이 살던 곳보다 생활수준이 낮은 나라로 임명되기도 하며 그러한 외국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조정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선교인들은 그러한 조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며 많은 현지인들이 그들의 노력에 대해 고마워합니다. 파푸아뉴기니의 한 여자는 자신에게 성서를 가르쳐 주는 두 명의 선교인 자매들에 대해 “피부는 하얗지만 마음은 우리와 똑같아요” 하고 말했습니다.
여행하는 봉사를 하는 선교인들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회중을 방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에드가르 망고마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그가 방문하는 순회구들에는 플라이 강과 머리 호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머리 호 인근의 두 회중을 방문할 때는 카누를 타고 갔어요. 모터가 달린 카누를 탈 때도 있고 모터가 없는 카누를 탈 때도 있었지요. 모터가 없는 카누를 타면 이 회중에서 저 회중으로 가는 데 길게는 여덟 시간이 걸렸습니다. 보통 서너 명의 형제들이 동행했는데, 나를 내려 주고는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노를 저어 가야 하는 걸 아는데도 말이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선교인들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겸손을 나타냈고 그 밖의
부면들에서도 좋은 본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관심자들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고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람이군요. 우리 목사는 당신이 하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아요.’”외국에서 온 자매들은 파푸아뉴기니의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남편인 데이비드 볼란드와 함께 여행하는 활동을 하는 루스 볼란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정말 힘들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를 잘했다고 생각해요. 이곳의 형제 자매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남편과 나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점점 덜 생각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지요. 우리는 정말 비길 데 없는 기쁨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없었지만 영적으로는 부유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좋은 소식이 널리 전파되는 일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에도 여호와의 손이 작용하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을 때, 바로 그때 진정으로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지요.”
부건빌에서 내전이 벌어지다
1989년, 부건빌 섬에서는 오랜 기간 문제가 되어 오던 분리주의 운동의 불씨가 결국 전면적인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이 내전이 12년간 계속되면서 약 6만 명이 집을 잃었고 1만 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많은 전도인들도 집을 잃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파이오니아인 댄 어니스트는 부건빌 섬을 떠나기 얼마 전에 부건빌 혁명군(BRA)의 군인들에게 붙잡혀 대형 창고로 끌려갔습니다.
댄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안에는 훈장이 여러 개 달린 제복을 입고 옆구리에 칼을 찬 혁명군 장교가 있었습니다.그는 ‘당신이 댄 어니스트인가?’ 하고 묻더군요.
나는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당신이 파푸아뉴기니 방위군에서 보낸 첩자라는 걸 알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은 어떤 나라의 분쟁에도 가담하지 않는다고 설명하자 그는 내 말을 끊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알아! 다 보고 있었어. 다른 종교들은 이길 것 같은 쪽을 지지했지. 완전히 중립을 지킨 종교는 당신 종교뿐이야.’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국민들은 이 전쟁 때문에 몹시 불안해하고 있으니까 당신들이 전하는 위안을 주는 소식이 필요해. 부건빌에 있으면서 계속 전도 활동을 해 주면 좋겠어. 하지만 꼭 떠나야 한다면 아무 탈 없이 당신 물건들을 전부 가져갈 수 있도록 해 주지.’ 2주 뒤에 아내와 내가 새로운 파이오니아 임지인 마누스 섬으로 떠날 때 장교는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내전의 영향을 받는 지역에 사는 전도인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으며, 해군이 섬을 봉쇄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의 식량과 의약품과 출판물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 섬을 방문한 순회 감독자 한 명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어느 곳에나 전쟁이 할퀴고 간 흔적이 남아 있지만 형제 자매들은 전파하고 집회를 마련하면서 계속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 연구도 많이 사회하고 있습니다.”
2001년, 전쟁을 벌이던 양측이 마침내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부건빌과 인근의 섬들은 자치령이 되었습니다. 현재 부건빌 섬에 거주하고 있는 증인은 한 명도 없지만 가까운 부카 섬에는 39명의 전도인으로 구성된 훌륭한 회중이 있습니다.
화산 폭발로 라바울이 파괴되다
라바울에 있는 큰 항구는 사실 오래된 화산의 분화구가 무너지면서 생긴 칼데라입니다. 1994년 9월, 항구의 양옆에 위치한 화산 활동 중이던 분화구들이 폭발하여 라바울은 황폐되었고 주민들의 삶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화산 폭발로 인해 왕국회관과 그에 딸린 선교인 집도 파괴되었지만 사망한 전도인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심장에 문제가 있던 한 형제가 대피하던 도중 사망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여러 해 전부터 왕국회관 게시판에 붙어 있던 대피 요령에 따라 수 킬로미터 밖에 미리 마련된 장소로 갔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이재민들을 돕고 구호품 공급을 조직하기 위해 즉각적인 조처를 취했습니다. 기부받은 옷과 모기장, 의약품, 휘발유, 디젤 연료와 그 밖의 물품들을 인근 회중에서 기증한 쌀과 토란과 함께 보냈습니다. 구호 작업이 매우 잘 진행되는 것을 보고 현지 관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증인들을 칭찬했습니다.
결국 라바울 회중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화산이 폭발한 지 히브리 10:24, 25) 그 형제들 대부분이 인근의 집단들로 옮겼으며, 그 결과 그중 한 집단은 회중이 되었습니다.
이틀 뒤, 약 70명의 전도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직업학교에 모였습니다. 장로들이 도착하자 전도인들은 “서적 연구는 몇 시에 시작하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재난을 겪는 와중에도 집회 참석과 증거 활동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 정부는 재산 피해를 입은 모든 종교에게 라바울에서 약 24킬로미터 떨어진 코코포에 있는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은 모두 땅을 받은 반면 증인들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화산 폭발이 있은 지 약 7년 후에 아프리카 출신의 한 형제가 도시 계획부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증인들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 형제는 즉시 코코포에서 적합한 부지를 찾아내어 형제들이 신청하도록 도와주었으며, 정부는 이 신청을 허가해 주었습니다. 자원 봉사자들이 건축 팀을 구성하여 왕국회관과 선교인 집을 짓는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사실 처음에 증인들이 받은 불공정한 대우는 도리어 축복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처음에 교회들이 받은 땅은 가파른 언덕에 있지만 형제들이 받은 땅은 중심가에 있어 위치가 훨씬 좋습니다.
번역 작업이 진척되다
지부 위원이자 번역부 감독자인 티모 라잘레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80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공용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토크피신어나 히리모투어 같은 단순한 상용어가 그러한 용도에 적격이지요. 그러한 언어는 제2의 언어로 배우기에 비교적 쉬울뿐더러 일상생활에서 의사소통을 할 때에도 사용하기 좋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개념을 전달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번역자들이 특정한 용어들을 놓고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토크피신어에는 ‘원칙’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번역자들은 ‘인도하다’와 ‘말’에 해당하는 토크피신어 단어들을 조합하여 스티아토크라는 단어를 만들었는데, 원칙이 어떻게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는지를 표현한 것이지요. 이 단어는 대중 매체에서도 쓰이기 시작했으며 현재 토크피신어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투어 「파수대」는 1958년부터, 토크피신어 「파수대」는 1960년부터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연구용 기사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낱장의 종이에 인쇄하고 철한 뒤 포트모르즈비로 보내 주었습니다. 1970년에는 잡지 면수가 24면으로 늘어났으며 발행 부수는 3500부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24면으로 된 토크피신어 「깨어라!」가 1972년 1월에 처음으로 발행되었습니다. 현재 지부에서는 토크피신어로 「파수대」를 월 2회, 「깨어라!」를 연 4회 발행하기 위해 준비 중이며, 히리모투어 「파수대」도 연구용은 매월, 배부용은 연 4회 발행할 예정입니다.
티모 라잘레토는 이렇게 말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전에 번역된 적이 없던 멜파어, 엥가어, 오로카이바어, 지와카어, 쿠아누아어 등 여러 가지 언어로 몇몇 전도지를 번역했습니다. 이 언어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토크피신어나 영어 중 적어도 하나는 할
줄 아는데 그들의 언어로 전도지를 번역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모국어로 왕국 소식을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모국어로 된 소식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증인들에 대한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것입니까?그 대답은 분명히 ‘그렇다!’입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성서 연구가 여러 건 시작되었고 이전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증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이 모국어로 출판물을 읽을 때 그 효과는 대단합니다.”
현재 번역부에는 히리모투어 번역 팀과 토크피신어 번역 팀을 포함하여 31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2009년 12월에 번역 사무실이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게 되어 모두가 매우 기뻐했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다
많은 여호와의 종들은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에 참석했던 때를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순간으로 여깁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이 학교를 통해 영적으로 더욱 발전하고 더 훌륭한 파이오니아가 되도록 도움을 받습니다. 이 학교에 참석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루시 코임브: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는 것이 내가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라는 것을 학교를 통해 배웠어요.”
마이클 카라프: “학교에 참석하기 전에는 재방문은 많았지만 성서 연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연구도 많아졌어요!”
벤 쿠나: “학교를 통해 나는 여호와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시폰 포포: “살면서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게다가 공부할 때는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줄리 키네: “학교를 통해 나는 물질에 대해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점을 배웠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것이 필요하진 않지요.”
지부 위원으로 섬기고 있는 댄 버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파이오니아가 더 생산적인 봉사를 하게 되면 더 행복해지고 더 열심을 보이게 됩니다. 분명히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는 이 나라에 있는 수백 명의 파이오니아들에게 앞으로도 계속 유익을 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유익을 통해 구역 내의 전도인들과 관심자들도 좋은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함께 자라감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요한 13:35) 파푸아뉴기니에서 그리스도인 사랑은 언어와 인종의 다양성, 부족간의 문화 차이, 경제적 격차와 같은 모든 종류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을 보고 감동되어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다”라고 말합니다.
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망게 삼가르도 그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반즈 사람으로 여러 대의 버스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전 루터교 목회자였습니다. 어떻게 그는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까? 현지 회중이 라에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망게의 버스 한 대를 빌렸습니다. 버스가 대회장에 도착했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스티브 더월과 캐스린 더월은 이렇게 말합니다. “증인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던 망게가 함께 왔더군요. 그는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 존재하는 인종과 부족을 뛰어넘은 연합과 우리의 조직을 보고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증인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갈 즈음에는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와 그의 아들은 나중에 그리스도인 장로가 되었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홀어머니를 돌보면서 정규 파이오니아를 하는 호엘라 포로바라는 젊은 자매는 급히 새집이 필요했습니다. 간신히 돈을 구해 두 번이나 친척에게 주면서 목재를 사 달라고 했지만 깜깜무소식이었습니다. 호엘라의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인근의 증인들은 사흘 만에 집을 새로 지어 주었습니다. 집을 짓는 사흘 동안 호엘라는 형제들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한 이 공사는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 집사는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금도 하지 않고 가방만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사흘 만에 집 한 채를 짓다니요!”
사도 요한은 이렇게 썼습니다. “어린 자녀들이여, 말이나 혀로가 아니라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 첫째 3:18) 그러한 사랑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된 결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수행되는 우리의 활동은 계속 진보하고 있습니다. 3672명의 전도인들이 4908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며, 2010년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2만 5875명이 참석했습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 계속 축복하신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고린도 첫째 3:6.
약 70년 전, 소수의 용기 있는 형제 자매들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 이 놀랍고 신비한 나라로 담대하게 발을 내디뎠습니다. (요한 8:32) 그 후로 수십 년간 외지에서 온 많은 증인들과 현지 증인들이 전파 활동에 합류했습니다. 그들 앞에는 넘을 수 없는 산처럼 보이는 장애물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정글과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늪지대가 그들을 막아섰고, 도로 사정은 열악했으며 도로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난, 부족간의 폭력, 만연한 영매술과 같은 장애물도 넘어야 했고 때때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과 그 지지자들의 난폭한 반대에도 직면했습니다. 또한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과 800개가 넘는 언어를 사용하는 수천 개의 부족 공동체에 전파하는 일도 만만찮은 도전이었습니다! 이 형제들의 희생적인 노력 덕택에 왕국 전파 활동을 위한 기초가 놓였으며 그들의 뒤를 이어 이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수고에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장애물 중 다수는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여호와의 종들이 지금도 겪고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마가 10:27) 그러므로 이 다채로운 나라에서 온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은 그분이 의로운 성향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순결한 언어로 바꾸어 주는 일을 해서,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스바냐 3:9.
[각주]
^ 2항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은 그린란드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섬이 아니라 대륙으로 간주된다.
^ 5항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이전 명칭 대신 파푸아뉴기니라는 현재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 66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했지만 지금은 절판됨.
[88면 삽입]
“보보기, 이렇게 준비하는 건 어떻게 다 알았나요?”
[100면 삽입]
‘그는 비용을 청구하지 않고 우리의 영화를 상영하기로 했습니다’
[104면 삽입]
“당신의 종교를 포기하지 않을 거면 다른 일자리를 찾으시오”
[124면 삽입]
그들은 가방을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보고는 자신들이 한 일로 인해 양심이 찔렸습니다
[149면 삽입]
“피부는 하얗지만 마음은 우리와 똑같아요”
[80면 네모와 삽화]
파푸아뉴기니 개요
국토
파푸아뉴기니는 뉴기니 섬의 동쪽 절반과 그 섬보다 작은 15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면적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보다 조금 더 크다. 내륙에는 험준한 산이 많고 해안을 따라 울창한 강우림과 늪지대가 펼쳐져 있다.
주민
670만 명의 인구 중 99퍼센트는 파푸아인과 멜라네시아인이다. 나머지는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유럽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한다.
언어
파푸아뉴기니는 전 세계에서 가장 언어가 복잡한 나라이다. 820개의 언어가 사용되며 이것은 전 세계 언어의 12퍼센트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토착어 외에도 토크피신어, 히리모투어, 영어를 사용한다.
직업
인구의 약 85퍼센트가 작은 마을에서 소규모로 채소를 재배하며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간다. 고지대에서는 환금 작물로 커피와 차를 재배한다. 광물, 가스, 원유, 산림 자원을 기반으로 한 경제 활동도 이루어진다.
식품
주식에는 고구마, 토란, 카사바, 사고 야자나무 녹말, 바나나 등이 있으며 생으로 먹거나 조리해서 먹는다. 채소, 열대 과일, 통조림으로 만든 고기나 생선도 즐겨 먹는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돼지고기를 먹는다.
기후
우기와 조금 덜한 우기의 두 계절이 있다. 파푸아뉴기니는 적도 근처에 있으므로 해안 쪽은 열대 기후이지만, 고지대는 그보다 시원하다.
[83, 84면 네모와 삽화]
“나는 수줍음을 극복했습니다”
오다 시오니
출생 1939년
침례 1956년
소개 파푸아뉴기니 최초의 현지 파이오니아. 현재 포트모르즈비에 있는 호홀라모투 회중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섬기고 있다.
■ 하누아바다 마을에서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가 나무다리를 따라 걸어가면서 전파하는 것을 보고, 누나는 나에게 그들의 모임에 참석해서 이 “새로운 종교”에 대해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당시 모임이 열리던 곳은 그 마을의 성서 연구생인 헤니 헤니 니오키의 집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었고 수줍음을 많이 탔습니다. 헤니 헤니의 집에 갔더니 마을 사람들이 40명 정도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뒤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 모임에서 들은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그 후로도 계속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얼마 뒤에 헤니 헤니는 톰 키토가 영어로 하는 말을 참석한 대다수가 사용하는 언어인 모투어로 통역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했습니다.
몇 년이 흘러 의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으려고 인근의 한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존 컷포스가 나를 따로 부르더니 친절하게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의사가 되면 사람들을 신체적으로 도울 수 있겠지요. 하지만 영적인 ‘의사’가 되면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도울 수 있어요.” 바로 그 주에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임지는 와우였습니다. 그보다 얼마 전에 나는 그 도시를 방문해서 진리에 관심을 가진 사람 몇 명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중 잭 아리페아에라는 사람이 나에게 인근의 루터 교회에서 연설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피에 관한 하느님의 법을 주제로 하여 연설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600명의 사람들은 열중하여 내 말을 들었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사람의 피를 먹으면 그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지배하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격분한 교직자는 모인 사람들에게 나와는 아무 관련도 맺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내가 연설한 내용을 좋아했고 영적으로 더 발전해 나갔습니다.약 1년 뒤, 포트모르즈비에서 북서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마누마누로 임지가 바뀌었습니다. 그곳에서 촌장인 톰 수라우를 만났는데, 그는 나에게 자기 마을에 와서 전파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연구한 지 3일이 되었을 때, 나무로 만든 성모 마리아 상을 부수어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강 하류에 사는 사람들이 그 조각들을 주워서는 자기네 마을의 가톨릭 사제에게 보여 주면서 “윗마을에서 성모님을 죽였어요!” 하고 소리쳤습니다. 두 명의 사제가 씩씩대며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중 한 명이 곧장 내게 오더니 주먹으로 내 얼굴을 쳤고 그가 끼고 있던 반지 때문에 내 뺨은 심하게 베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막으러 달려오자 사제들은 도망쳤습니다.
나는 포트모르즈비에 가서 베인 상처를 꿰맸고, 있었던 일을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 사제들은 나중에 벌금을 물었고 사제직도 박탈당했습니다. 한편 나는 마을로 다시 돌아갔고 그곳에 격지 집단이 생기도록 도왔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나는 수줍음을 극복했습니다.
[삽화]
초기에는 헤니 헤니의 집에서 집회가 열렸습니다
[86면 네모]
완토크 제도
토크피신어로 “같은 말”을 의미하는 완토크는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부족 사람들을 결속시켜 주는 강한 문화적 유대와 관련 있는 표현입니다. 이 유대에는 일정한 의무와 특권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완토크(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가 연로하거나 직장을 잃었거나 일할 수 없으면 물질적으로 돌봐 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회 복지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됩니다.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서 연구생이 진리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면 가족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 새로운 사람은 실직하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에 물질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여호와의 도움에 의지해야만 합니다. (시 27:10; 마태 6:33) 지부 위원인 케가왈레 비야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완토크 문화로 인해 형제들은 증인이 아닌 친족과 필요 이상으로 어울려야 한다는 강한 압박을 받는데, 친족들 중에는 제명당한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게다가 선거 기간이 되면, 친족 중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 있는 증인들은 종종 그리스도인 중립을 타협하도록 압력을 받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그런 압력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91면 네모와 삽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사람
존 컷포스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형제에 대해 동료 선교인들을 비롯하여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잠언 27:2.
에르나 안데르손: “존은 이런 말을 했어요. ‘진정한 선교인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하면 앉으세요. 그들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의자를 준 겁니다. 투박해 보이는 침대를 마련해 주거든 거기서 주무세요. 거기엔 그 사람들의 친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생소한 음식을 주거든 드세요. 사랑으로 준비한 음식입니다.’ 존은 참으로 본이 되는 자기희생적인 선교인이었습니다.”
아와크 두분: “식민 통치 기간이었지만, 존은 흑인과 백인 사이의 편견을 깨뜨렸을 뿐 아니라 아예 없애 버렸습니다! 그는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 같은 사람이에요!’ 하고 공개적으로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한 형제였지요.”
피터 린키: “어느 날 오후에 존이 고로카에 있는 우리 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침부터 내내 여행을 했기 때문에 먼지를 뒤집어쓴 데다가 지쳐 있었지요. 하지만 그는 저녁 식사 후에 ‘오늘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일이 아무것도 없네요’라고 말하더니, 날이 어둑어둑해졌는데도 근처에 사는 가족을 격려해야겠다며 지친 몸을 이끌고 나섰습니다. 존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생각했지요. 우리 모두 그를 매우 좋아했습니다.”
짐 다빈스: “존은 우리에게 단순하게 살고 단순하게 가르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이해하기 쉬운 예를 사용해서 가르치라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101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절대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거요”
칼리프 카나이
출생 1922년
침례 1962년
소개 마당 지역에서 최초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 한 명. 그의 아들인 울페프 칼리프가 전한 내용.
■ 아버지는 겸손하고 생각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자초지종을 주의 깊이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본 뒤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셨습니다.
내가 열다섯 살 때, 무릎 아래를 상어에게 물어뜯기는 바람에 마당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날 보러 병원에 왔다가 존 데이비슨을 만났습니다. 존은 아버지에게 “신세계에서는 여호와께서 아드님에게 새로운 다리를 주실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말에 관심이 생겨 성서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곧 강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친족들이 가톨릭 교회를 떠나자, 부추김을 받은 경찰은 우리를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우리들이 살던 집 열두 채는 꽃이 핀 푸른 정원에 둘러싸인, 지은 지 1년도 안 된 집이었습니다. 풀로 이은 지붕 위로 경찰이 횃불을 던지자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물건이라도 몇 개 건져 보려고 뛰어들었지만 불똥이 떨어지고 연기가 심해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잿더미가 되어 가는 집들을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는 몹시 슬퍼하면서 이웃 마을인 바길디그로 걸어갔습니다. 그곳의 촌장은 친절하게도 우리가 방 한 칸짜리 작은 오두막에서 살도록 해 주었습니다. 거기서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박해를 받으셨으니까 우리도 박해를 받을 것으로 예상해야 하오. 그래도 우리는 절대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거요!”
[107, 108면 네모와 삽화]
“학교를 ‘잘못’ 찾아가길 잘했습니다”
마이클 사웅가
출생 1936년
침례 1962년
소개 1964년 9월부터 지금까지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가장 오랫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를 했다.
■ 1959년에 나는 교육을 더 받으려고 라바울로 이사했습니다. 증인들이 학교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직업학교로 생각한 나는 “선생님”인 랜스 가산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랜스는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성서 연구에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내가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의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배우는 내용은 마음에 깊이 와 닿았는데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 특히 좋았습니다. (베드로 둘째 3:13) 학교를 “잘못” 찾아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1962년 7월 7일 오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같은 날,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지역 감독자였던 존 컷포스가 그 모임을 사회했는데, 그는 밭이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으며 더 많은 일꾼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마태 9:37)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게 되자마자 나는 현재의 보조 파이오니아인 임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1964년 5월에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으며 9월에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라바울 근처에서 봉사할 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한 톨라이 부족 남자가 성서 한 구절을 읽어 보고 싶다며 내 성서를 달라고
했습니다. 성서를 주자 그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서 바닥에 던져 버렸습니다. 나는 화를 내지 않고 경찰서장에게 그 일을 신고했습니다. 경찰서장은 즉시 순경 한 명을 보내 그 남자를 체포한 뒤 그에게 말했습니다. “참 나쁜 사람이군. 당신은 하느님의 법과 정부 법을 다 어긴 거요. 이분께 내일 새 성경을 사 드리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게 될 거요.” 그러고 나서 서장은 나에게 다음 날 오전 10시에 경찰서로 와서 성서를 살 돈을 찾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그곳에 가 보니 돈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톨라이 부족에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또 한번은, 웨와크 서부의 한 지역에서 여러 명의 증인들과 함께 「왕국 소식」을 배부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앞서 가면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을 지도자가 형제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는 배부된 「왕국 소식」 전도지를 도로 걷어서 한 손에 쥔 채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길 한가운데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나는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도지를 내밀더니 말했습니다. “내가 이곳 책임자요. 이것을 전하지 마시오.”
나는 전도지를 건네받았습니다.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정원을 가꾸거나 낚시하러 가고 싶으면 정식 허가를 받아야 하나요?”
“아뇨!” 하고 한 여자가 대답했습니다.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이걸 읽고 싶으신가요?”
그들은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반대 없이 「왕국 소식」 전도지를 다시 전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약 20명의 마을 지도자 앞에서 내 입장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우리의 전파 활동에 찬성했습니다.
[112면 네모와 삽화]
“그들이 당신 심장을 먹어 버린 건가요?”
아이오코완
출생 1940년
침례 1975년
소개 엥가 부족에서 최초로 진리를 배운 사람들 가운데 한 명.
■ 엥가 주의 와바그에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가 도착하자 그곳의 다른 종교들에서 키토 부부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러한 거짓말 중 하나는 톰과 로위나가 시체를 파내어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고 나는 몹시 겁이 났습니다.
하루는 톰이 나의 아버지에게 로위나의 집안일을 도울 만한 젊은 여자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가리켰습니다. 나는 너무나도 겁이 났지만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그 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톰과 로위나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고 생각해요?”
“착한 사람이라면 천당에 가겠죠” 하고 내가 대답했습니다.
“성서에서 그런 말을 읽었어요?”라고 그들이 물었습니다.
나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서 읽을 줄을 몰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읽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서서히 성서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가톨릭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자 교회 활동에 열심인 사람 하나가 나에게 물었습니다. “왜 교회에 안 나오죠? 그 백인 부부가 당신 심장을 먹어 버린 건가요?”
나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맞아요, 내 상징적 심장은 이제 그 사람들이 갖고 있어요. 그들이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117면 네모와 삽화]
“닭 한 마리 주면 책을 줄게”
아와이와 사레
출생 1950년
침례 1993년
소개 외딴 지역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다. 현재 문디프 회중에서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다.
■ 나는 친구 집에 갔다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보았습니다. 몇 장을 읽고 나서 그 책을 가져도 되냐고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닭 한 마리 주면 책을 줄게”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물물 교환이 이루어졌고 나는 그 책을 집에 가져가서 꼼꼼히 읽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에게 내가 알게 된 놀라운 것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앞에 두 번이나 불려 나가 전파하는 일을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말입니다!
얼마 후 나는 지부 사무실에 편지하여 인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과 연락을 취할 방법을 물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내가 알프레도 데 구스만과 연락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알프레도는 마당(Madang)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나를 초대했습니다.
나는 오지에서 입고 다니던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얼굴에 검은 수염이 덥수룩한 채로 대회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이 나를 친절하게 대하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연설을 듣다가 내용이 감동적이어서 울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대회장에 갔습니다.
대회가 끝나고 알프레도가 우리 마을에 왔습니다. 마당에서 두 시간 동안 트럭을 타고 간 다음 다섯 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우리 가족과 친구들이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고 그는 모든 질문에 성서를 사용하여 대답해 주었습니다.
현재 문디프 회중에는 23명의 전도인이 있으며 60명 이상이 집회에 참석합니다.
[125, 126면 네모와 삽화]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마쿠이 마레그
출생 1954년
침례 1986년
소개 증인이 없는 섬에서 여러 해 동안 홀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다.
■ 1980년, 나는 마당(Madang)에서 한 파이오니아로부터 전도지를 받았습니다. 그 전도지를 가지고 배로 여섯 시간 걸리는 바가바그 섬에 있는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전도지의 내용이 좋아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고 지부 사무실에 편지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마당에서 봉사하는 바담 두분이라는 파이오니아가 지역 대회에 나를 초대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그 자매를 방문하여 2주간 그곳에 머물면서 성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 지역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편지로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가바그 섬에서 열두 가족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내가 마당에서 보았던 집단 성서 연구 방식대로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습니다. 루터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화가 나서 “내가 야훼는 알아도 여호와는 모른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가지고 있던 토크피신어 성서로 탈출기 3:15을 펴서 각주에 나와 있는 하느님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 의해 세 번이나 교회 지도자들 앞으로 불려 나가 믿음을 변호해야 했습니다. 한번은 바가바그 섬의 가장 큰 교회에서 마태 6:33의 말씀에 따라 하느님의 왕국을 첫째로 구하고 싶은 것뿐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더니 “지금 네가 우리를 가르치려 드는 거냐?” 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삼촌 한 명이 나를 때리려고 일어섰지만 다른 친척이 얼른 막아 주었습니다. 모임은 엉망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나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교회에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내 성서를 손에 꼭 쥐고는 “저는하지만 내가 겪은 문제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모임에 참석하던 한 여자의 아기가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어떤 마을 사람들은 내가 그 여자에게 새로운 종교를 가르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며 아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아버지는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나를 집에서 쫓아냈습니다. 나는 진리를 받아들인 고모 라미트 마레그와 함께 마당으로 도망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우리 둘 다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아버지는 몸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마당에 있는 나의 집에 아버지를 모셔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아 드렸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동안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많이 누그러졌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바가바그 섬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에게 전파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1987년에 아버지의 말대로 했습니다. 친척들은 친절하게도 나를 위해 작은 집 한 채를 지어 주었고 나는 14년간 그곳의 유일한 증인으로 봉사했습니다. 그 기간 중 12년은 정규 파이오니아로 일했습니다.
나중에 나는 마당으로 돌아와 라미트 고모와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습니다. 2009년, 마당에서 열린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례 기념식에 바가바그 섬에서 온 여섯 명이 참석했습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여호와를 온전히 섬길 수 있어서 매우 기쁩니다.
[141, 142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 주셨다
도라 닝기
출생 1977년
침례 1998년
소개 소녀 시절에 진리를 배웠고 가족들에게서 버림받았다. 후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했고 지금은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 열일곱 살 때, 나는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 한 권을 보게 되었습니다. 금세 나는 이 책이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의 책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는데, 네 살 때 두 명의 증인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지상 낙원에 대해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보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내 양부모는 자신들에게는 친자녀가 다섯 명이나 있으니까 나는 내 친족들이 있는 해안 도시인 웨와크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웨와크에 돌아와서 처음에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증인을 만나고 싶어서 왕국회관을 찾아 나섰는데 회관에 도착했을 때는 한 형제가 마치는 노래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집회는 보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온 팸이라는 선교인과 성서 연구를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배우는 내용을 매우 좋아했지만, 연구를 세 번밖에 하지 않았을 때 작은아버지의 반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일요일 집회가 끝나고 돌아오는데, 작은아버지 집의 앞마당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습니다. 작은아버지가 성서 연구용 책들을 포함해 내 물건들을 모조리 태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를 보더니
“그 사람들과 같은 종교를 믿으려거든 그 사람들한테나 가서 돌보아 달라고 해라” 하고 소리쳤습니다. 작은아버지 집에서는 더 이상 나를 받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웨와크에서 차로 두 시간 걸리는 마을에 사는 나의 친부모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내가 아버지를 보고 그쪽으로 가고 있는데 아버지가 내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쟤는 누구냐?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저 아이를 세 살 때 버렸어.” 아버지도 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곳을 떠나 어디서든 내가 머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약 2년 후, 나는 부모님이 사는 마을에서 두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팸에게 연락해서, 자매가 가르쳐 준 것들을 잊지 않고 있지만 자매를 만날 방법이 없다고 꼭 말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나는 웨와크에서 팸을 만날 수 있었고 연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세 집을 전전했는데 세 번 다 증인들과 어울린다는 이유로 쫓겨났습니다. 팸은 친절하게도 웨와크에 있는 한 증인 가족과 함께 살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나는 1998년에 침례를 받고 1999년 9월에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 베델에 초대받았고 현재 토크피신어 번역팀에서 일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내 친가족은 나를 버리고 깊은 상처를 주었지만, 내 영적 가족은 내가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구인 시편 27:10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는 나를 버린다 해도, 여호와께서는 나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삽화]
토크피신어 출판물
[147, 148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시란다”
존 타보이사
출생 1964년
침례 1979년
소개 어릴 때 학교에서 선생님과 학생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고 2년 만에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현재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다.
■ 나는 밀른베이 주의 고비고비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는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고 배우는 내용을 나에게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공립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성공회 신자인 두 선생님이 내가 증인들과 연합한다는 것을 알고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도 박해에 가담했고 심지어 막대기로 나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나는 2년 만에 학교를 떠나야 했습니다.
1년 정도 지난 후, 나를 박해했던 선생님 한 명을 시장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영리한 아이라서 학교를 계속 다녔다면 공부를 잘했을 텐데. 하지만 네가 믿는 종교 때문에 결국은 네 친구들의 하인 노릇이나 하며 살게 될 거다.” 선생님이 한 말에 대해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더니 아버지는 나를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 세상이 너를 가르치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너를 가르치실 거야.”
아버지와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 한 명의 도움으로 나는 가장 가치 있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배운 것입니다. (요한 17:3) 내 모국어는 다와와어였지만 그들이 히리 모투어와 토크피신어로 성서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에 히리모투어는 나에게 두 번째 언어, 토크피신어는 세 번째 언어가 되었습니다. 나는 열다섯 살에 침례를 받았으며 2년 후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습니다.
1998년, 나는 봉사 훈련 학교에 초대받았습니다. 당시에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지부에서는 나를 포트모르즈비에 있는 영어 회중에서 봉사하도록 임명하여 봉사 훈련 학교에 갈 준비를 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어가 나의 네 번째 언어가 되었습니다.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밀른베이 주의 알로타우 회중에서 섬기도록 임명되었습니다. 6개월 후에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자 나는 매우 놀라면서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첫 순회구에는 뉴브리튼, 뉴아일랜드, 마누스 섬 및 인근의 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06년에는 사랑하는 아내 주디와 결혼했고, 1년간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가 함께 순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회중을 방문할 때면, 나는 청소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시란다. 그러니까 그분에게서 배우렴. 그렇게 하면 그분이 네가 인생에서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게 해 주실 거야.” 바로 이것이 내가 배운 중요한 교훈입니다.
[삽화]
아내 주디와 함께
[156, 157면 도표와 삽화]
연대표—파푸아뉴기니
1930
1935 협회 소유의 쌍돛대 배 라이트베어러호에 탄 파이오니아들이 포트모르즈비에서 전파하다.
1940
1950
1951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가 포트모르즈비에 도착하다.
1956 파이오니아들이 뉴아일랜드와 뉴브리튼으로 이주하다.
1957 존 컷포스가 그림 연설을 만들다.
1960
1960 만국 성경 연구회가 공식적으로 등록되다.
1962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가 뉴기니고지대로 이사하다.
1965 포트모르즈비의 코키에 지부 사무실을 짓다.
1969 파푸아의 하이마에서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가 개최되다.
1970
1975 파푸아와 뉴기니가 합쳐져서 파푸아뉴기니가 되다.
1977-1979 폭도들이 밀른베이 주에 있는 왕국회관들을 파괴하다.
1980
1987 새 지부 사무실이 봉헌되다.
1989 부건빌 섬에서 내전이 일어나다.
1990
1991 토크피신어와 히리모투어 「파수대」가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되다.
1994 병원 교섭 위원회가 운영되기 시작하다.
1994 화산 폭발로 뉴브리튼의 라바울이 파괴되다.
1999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가 지부에 설치되다.
2000
2002 포트모르즈비 게레후에 대회 회관을 짓다.
2010
2010 확장된 새 지부 사무실이 봉헌되다.
2020
[118면 그래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3,500
2,500
1,500
500
1955 1965 1975 1985 1995 2005
[8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파푸아뉴기니
포트모르즈비
웨와크
세피크 강
캄보트
디미리
비와트
유아트 강
와바그
마운트하겐
반즈
와기 계곡
뉴기니 고지대
머리 호
플라이 강
바스켄
탈리디그
바길디그
마당
고로카
카이난투
라에
불롤로
와우
케레마
사바이비리
파푸아 만
포폰데타
코코다 길
훌라
아기
고비고비
알로타우
산호해
마누스 섬
비스마르크 제도
비스마르크 해
바가바그 섬
뉴브리튼
라바울
코코포
쿠르말라크 섬
뉴아일랜드
카비엥
솔로몬 해
구디너프 섬
부카 섬
부건빌 섬
누쿠마누 환초
적도
하이마
식스마일
하누아바다
포트모르즈비 항
코키 시장
소게리 고원
이오아다부
[74면 전면 삽화]
[77면 삽화]
“라이트베어러”호
[78면 삽화]
최초의 현지 전도인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보기 나이오리, 헤니 헤니 니오키, 라호 라카타니, 오다 시오니
[79면 삽화]
뒤로 포트모르즈비 시내가 보이는 하누아바다 마을의 전경
[82면 삽화]
도착하기 직전의 셜리 필더와 돈 필더
[85면 삽화]
포트모르즈비의 하이마에 세워진 파푸아뉴기니 최초의 왕국회관
[87면 삽화]
존 컷포스
[89면 삽화]
그림 연설의 사본
[90면 삽화]
오른쪽: 그림을 사용해서 가르치고 있는 존 컷포스; 아래: 오지 마을에서 전파하기 위해 그림판을 들고 가는 한 형제
[92면 삽화]
알프 그린, 데이비드 워커, 짐 스미스
[93면 삽화]
왼쪽: 셜리 필더, 데비 필더, 돈 필더; 오른쪽: 돈과 그의 카누
[96면 삽화]
짐 스미스와 글렌 핀레이
[97면 삽화]
케레마 만을 건너는 스티븐 블런디
[99면 삽화]
로지나 프레임과 켄 프레임
[102면 삽화]
매슈 포프와 도리스 포프
[103면 삽화]
마그달렌 엔도르와 존 엔도르의 집은 라에 최초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109면 삽화]
고지대
[110면 삽화]
톰 키토와 로위나 키토, 와바그에 있는 그들의 작은 가게와 집 앞에서
[113면 삽화]
에르나 안데르손과 베른트 안데르손
[114면 삽화]
케리 케이스미스와 짐 라이트
[115면 삽화]
마이크 피셔, 세피크 강에서
[123면 삽화]
아기에 있는 왕국회관이 불에 탔지만 다시 회관을 짓고 확장했습니다
[127면 삽화]
엘시 슈와 빌 슈
[128면 삽화]
돛을 활짝 펴고 달리는 “푸아푸아”
[128면 삽화]
베른트 안데르손이 만든 “파이오니아”호
[131면 삽화]
세피크 강을 따라가는 여행
[132, 133면 삽화]
왼쪽: 비와트 마을을 방문한 순회 감독자 워런 레이놀즈와 그의 아내 리앤 레이놀즈; 위: 디미리 마을을 방문하여 공개 강연을 할 때
[135면 삽화]
소아레 마이가
[135면 삽화]
코라 레케
[136면 삽화]
사베 난펜
[139면 삽화]
조르디 라일과 조앤 라일
[145면 삽화]
이 어린이들 중 일부가 기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152, 153면 삽화]
왼쪽: 멀리 타부르부르 화산이 보이는 라바울의 전경; 아래: 1994년에 파괴된 라바울 왕국회관
[155면 삽화]
번역 팀, 2010년
[161면 삽화]
파푸아뉴기니 지부
지부 위원회: 댄 버크스, 티모 라잘레토, 케가왈레 비야마, 크레이그 스피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