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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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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한 젊은 남자가 갑판 위에서 노르웨이의 해안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크누 페데르손 함메르였습니다. 미국 노스다코타 주에 있는 한 침례교회에서 교역자로 일하던 크누는 1년 전에 성경 연구생(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벗들과 친척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200만에 달하는 노르웨이 국민 대다수는 루터 국립 교회 신자들이었습니다. 크누는 진실한 노르웨이인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참하느님 여호와에 대해 알려 주고, 사랑의 하느님은 죄인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하지 않으신다는 점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 기간에 땅이 낙원이 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 주고 싶었습니다.

배가 육지로 가까이 가는 동안, 크누는 이 아름다운 땅의 모습을 주의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길고 좁다란 지형의 이 나라에는 눈 덮인 산들이 높이 솟아 있었으며, 협만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고, 장대한 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크누는 도로나 다리도 거의 없는 지역들에 드문드문 흩어져 사는 사람들을 찾아가 소식을 전하기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르웨이인들 중 많은 수가 갈수록 커져 가는 도시들에 살고 있었지만,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과 시골 지역과 어촌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크누의 전파 활동으로 어떤 결과가 있었으며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참숭배가 노르웨이에서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살펴본다면, 전 세계 하느님의 백성은 믿음이 강화되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국 씨가 열매를 맺다

크누의 고향인 시엔에서 몇몇 사람이 그가 전하는 소식에 관심을 보였지만 크누는 계속 그곳에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감독하던 찰스 T. 러셀의 요청에 따라 그는 1899년에 다시 노르웨이에 왔습니다. 러셀 형제는 크누가 노르웨이에 회중을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크누는 「천년기 새벽」(Millennial Dawn) 시리즈(나중에는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라고 불림)의 1권과 2권을 여러 부 가져왔는데, 이 책들은 덴마크-노르웨이어로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문어로 된 노르웨이어는 덴마크어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 출판물들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사람들이 모두 읽을 수 있었다.) 크누는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고 얼마의 서적을 전했지만 오래지 않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이듬해에, 시엔 근교에 살던 잉에브레트 안데르센은 당시 「시대에 관한 경륜」이라고 불리던 책을 구하게 되었는데, 그 책은 이전에 크누가 노르웨이에 가져온 서적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잉에브레트는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아내 베르테는 그 책의 내용에 푹 빠져들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잉에브레트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종교 모임들에 가서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관심을 보인 사람들을 방문했고, 얼마 후 시엔에는 적어도 10명의 성경 연구생으로 이루어진 활동적인 회중이 생겼습니다.

한 친척에게서 시엔에 작은 회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크누는 1904년에 잉에브레트를 찾으러 다시 노르웨이로 왔습니다. 그는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한 남자에게 “이 동네에 잉에브레트 안데르센 씨라고 계시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네, 바로 전데요”라고 말했습니다. 크누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길 한복판에서 바로 가방을 열어 자신이 가져온 책들을 잉에브레트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크누를 만나 그 많은 서적을 보게 된 잉에브레트 역시 정말 기뻐했습니다.

크누는 노르웨이의 동료 신자들에게 조직과 전파 활동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시엔 회중은 크누에게 큰 격려를 받았으며 그가 당시 캐나다에 살던 가족에게 돌아갈 무렵에는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노르웨이의 다른 지역들에 진리가 전해지다

기쁘게도 1903년에는 노르웨이의 전파 활동에 더욱 박차가 가해졌습니다. 열심 있는 콜포처(전 시간 전파자)들인 프리티오프 린크비스트, 빅토르 펠드트, E. R. 군데르센이 온 것입니다. 프리티오프는 수도인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에 정착했습니다. 1904년에는 그의 집을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출판물 주문과 「시온의 파수대」(Zion’s Watch Tower) 예약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1903년 말, 군데르센 형제는 노르웨이 중부의 트론헤임에서 전파하던 중에 로테 홀름이라는 여자를 만나 얼마의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그 후 로테는 북극권 위쪽 나르비크 지역에 있는 집으로 갔으며 노르웨이 북부 최초의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빅토르 펠드트가 나르비크로 갔고 그곳에서 두 쌍의 부부가 성경 연구생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이 두 부부는 로테와 연락을 취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은 집단은 정기적으로 모여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로테의 여동생인 할례르드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후에 이 두 자매는 노르웨이의 여러 지역에서 파이오니아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펠드트 형제와 군데르센 형제는 1904년과 1905년에 베르겐에서 전파하면서 특히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시온의 파수대」 1905년 3월 1일호에는 이런 보고가 실렸습니다. “[베르겐] 자유 선교단 교회의 저명한 목회자 한 사람이 밝은 빛을 통해 분명한 이해를 얻게 되었으며, 그의 설교를 늘 들으러 오는 많은 청중에게 이제는 온전하고 참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목회자는 테오도르 시몬센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출판물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놀라운 진리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나중에 자유 선교단 교회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교회 쪽에는 큰 손실이었지만 성경 연구생들에게는 정말 잘된 일이었습니다. 훌륭한 형제이자 연사였던 테오도르는 여호와의 백성 가운데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후에 그는 성경 연구생들로 이루어진 잘 발전하는 회중이 있는 크리스티아니아에 정착했습니다.

초창기 파이오니아들

1905년경에는 시엔, 크리스티아니아, 베르겐, 나르비크, 이렇게 네 도시에 성경 연구생들의 회중이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열심 있는 전도인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노르웨이의 다른 여러 지역에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 초창기 파이오니아들은 저마다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노르웨이 최초의 파이오니아 자매는 헬가 헤스였습니다. 고아였던 헬가는 베르겐에 살았고 열일곱 살 때 주일 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유 선교단 교회에서 테오도르 시몬센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테오도르는 성경 연구생의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관심이 생긴 헬가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고, 1905년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하마르와 예비크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어느 날, 안레아스 외이세트는 콩스빙에르 근처에 있는 자기 가족 소유의 농장에서 장작을 패고 있었는데, 한 파이오니아가 방문해서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20대 초였던 안레아스는 책의 내용이 정말 좋아서 더 많은 출판물을 요청했습니다. 몇 달 뒤에는 남동생에게 농장 일을 넘기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8년 동안 안레아스는 노르웨이 전역을 거의 다 다니면서 전파했습니다. 처음에는 북쪽으로 가면서 내륙 지방을 여행했는데, 여름에는 자전거를 겨울에는 한 발로 밀고 다니는 썰매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트롬쇠까지 간 다음에는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해안가에 있는 모든 지역을 방문하면서 크리스티아니아까지 내려갔습니다.

초창기 파이오니아 중에는 모스 근처의 뤼게 출신인 안나 안데르센 자매도 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구세군 장교로 일했으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도왔습니다. 안나는 1907년경에 우리 출판물을 읽고는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순에서 또 다른 구세군 장교인 훌다 안데르센(결혼 후에는 훌다 외이세트)에게 연락했고 그 역시 성서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얼마 후 이 두 여자는 해안가를 따라 운항하는 증기선을 타고 장기간 북쪽으로 여행하면서 러시아 국경 근처의 시르케네스까지 갔습니다. 이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내려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안나는 1912년경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나 자전거를 타고 수십 년간 노르웨이 전역을 여행했고 거의 모든 마을에 성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안나는 남쪽에 있는 크리스티안산에 꽤 오래 머무르면서 성장하고 있던 그곳 회중에 값진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칼 군베르그는 성경 연구생이 되기 전에 해군 장교였습니다. 그는 1911년경에 30대 중반의 나이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항해 지도사 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다소 엄해 보였지만 칼은 유쾌하고 유머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이 들어서까지도 노르웨이 전역을 다니며 전파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전직 해군 장교이자 항해 지도사라는 그의 경력은 좋은 소식이 널리 전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이 힘을 얻다

1905년 10월에 매우 가슴 설레는 일이 있었는데,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최초의 대회가 열린 것입니다. 약 15명이 참석했으며 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1906년에는 베르겐에서 대회가 열렸고 1909년부터는 매년 대회가 마련되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에서 연사들이 왔는데, 그중 일부 형제들은 오늘날 여행하는 감독자에 해당하는 순례자로서 회중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있었던 인상적인 일로 러셀 형제의 방문이 있습니다. 그는 1909년에 베르겐과 크리스티아니아를 방문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러셀을 직접 만나 연설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1911년에 그가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러셀 형제의 공개 강연을 들으러 온 61명의 형제 자매는 그곳에 도합 1200명가량이 참석하자 기쁨에 넘쳤습니다!

3년 후에 러셀 형제는 헨뤼 비에르네스타를 노르웨이 최초의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하여 노르웨이와 스웨덴의 형제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했습니다.

1914년 이전의 증가된 활동

1910년에는 「만민의 설교단」(Peoples Pulpit)이라는 일련의 전도지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에 유용한 이 도구 덕분에 더 많은 성경 연구생이 전파하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종교적 오류를 폭로하고 성서 진리를 설명해 주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라 많은 전도지를 무료로 배부했는데, 흔히 신문에 동봉하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성경 연구생들은 1914년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몹시 궁금해했습니다. 「때는 가까웠다」(The Time Is at Hand) 책(「천년기 새벽」 시리즈 제2권)에서는 이방인의 때가 1914년에 끝날 것이며, 문제와 혼란이 그해의 주된 특징을 이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하느님의 왕국이 통치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성경 연구생들은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들이 그때에 하늘의 상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흔히 대화의 소재가 되곤 했습니다. 일례로 1914년 7월의 어느 저녁, 시엔 시립 교향악단에서 연주를 하던 칼 크리스티안센은 중간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몇 주 안에 엄청난 일이 있을 겁니다. 먼저 전쟁이 일어나고 격변이 있은 다음, 혼란이 뒤따를 거예요. 그러고 나서 하느님의 왕국이 올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사람들은 칼에게 와서 더 많은 점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시엔에서 해안을 따라 더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 아레날에는 1914년에 성경 연구생이 자매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는 이 자매가 길에서 미아 아페슬란이라는 여자를 만나, 성서에 따르면 1914년 가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미아는 “진짜 그렇게 되면 나도 당신 종교를 믿겠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 자매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본 미아는 약속대로 참종교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아에게 소식을 전해 준 자매와 미아 그리고 그 외 몇몇 사람들은 아레날 회중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발전하던 중에 문제가 생기다

1914년에 대한 성경 연구생들의 기대가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형제들은 활동사진과 슬라이드로 구성된 “창조 사진극”을 1914년 12월부터 상영하기 시작하여 1915년이 되어서도 한참 동안 계속 상영했습니다. 이 인상적인 사진극 덕분에 크리스티아니아, 베르겐, 트론헤임, 시엔, 아레날, 크리스티안산에서 많은 사람에게 훌륭한 증거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몇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약 10년 동안 노르웨이의 활동을 감독했던 프리티오프 린크비스트가 자기 뜻대로 행동하기 시작했고 1916년에 조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 후 몇 년 동안은 스웨덴과 덴마크의 책임 맡은 형제들이 노르웨이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습니다. 1921년에는 에노크 외만이 노르웨이의 활동을 돌보도록 임명되어 1945년까지 그 일을 했습니다.

또한 1916년에 C. T. 러셀이 사망하고 J. F. 러더퍼드가 성경 연구생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자 얼마의 동요가 있었습니다. 1914년에 대한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은 데다 조직상의 변화가 생기자 많은 사람이 조직을 떠났습니다. 베르겐의 상황이 특히 심각했는데, 1918년에는 회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 형제 한 명과 자매 일곱 명뿐이었습니다. 트론헤임에서도 상당수가 회중을 떠났고 크리스티아니아에서는 집단 하나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충성스럽게 조직을 지원한 사람들은 곧 여호와로부터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다시 박차를 가하다

1918년에 러더퍼드 형제는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흥미로운 주제로 연설했습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이 감동적인 연설이 세계 전역에서 제공되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세계 본부에서 일하는 A. H. 맥밀런이 노르웨이의 여러 도시에서 이 연설을 했습니다. 크리스티아니아의 한 대학교에서는 강당이 만원을 이루는 바람에 연설을 들으러 온 많은 사람이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외만 형제가 입구에 있는 상자에 올라가 “한 시간 반 뒤에 다시 오시면 맥밀런 씨의 연설을 또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실제로 강당은 맥밀런 형제의 두 번째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들로 또 다시 가득 찼습니다. 그 후 몇 년간 노르웨이 형제들은 나라 전역의 다른 곳에서 동일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에서는 많은 사람이 아마겟돈을 생존할 것이며 낙원이 된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강력한 성경적 증거가 제시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또한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소책자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에게 그러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성경 연구생들은 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이 실린 전도지를 아주 많이 배부했습니다. 「세계 지도자들에 대한 도전」(A Challenge to World Leaders),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경고」(A Warning to All Christians), 「교직자들을 고발함」(Ecclesiastics Indicted)과 같은 전도지들이었습니다. 많은 성경 연구생은 이 전도지들을 배부하는 일을 하면서 전파 활동에 처음으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성장은 다소 더뎠습니다. 파이오니아들과 열심 있는 전도인들은 끈기 있게 전파하고 있었지만, 전파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출판물은 아직도 노르웨이어가 아니라 주로 덴마크어와 덴마크-노르웨이어, 스웨덴어로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활동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습니까?

1925년 4월에 노르웨이어로 된 「회보」(지금의 「우리의 왕국 봉사」)에는 이러한 가슴 설레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노르웨이어로 된 「황금시대」 첫 호를 보내 드리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예약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첫 호는 「황금시대」(지금의 「깨어라!」) 1925년 3월호였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노르웨이뿐 아니라 덴마크에서도 노르웨이어 「황금시대」가 널리 배부되었습니다. 1936년에는 노르웨이어 「황금시대」의 명칭이 「뉘 베르덴」(신세계)으로 바뀌었고 노르웨이에서 예약자 수가 6190명에 달했습니다.

조직상의 발전과 새로운 시설

1925년 5월, 스칸디나비아의 여러 지역에서 온 500명이 넘는 성경 연구생들이 스웨덴 외레브로에서 열린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러더퍼드 형제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북유럽 사무소가 개설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런던에 있는 윌리엄 데이가 와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발트 해 연안의 나라들에 있는 하느님의 백성의 활동을 감독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전과 같이 각 나라마다 활동을 돌보는 감독자가 있을 것이며, 노르웨이의 활동은 에노크 외만이 계속해서 감독할 것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리엄 데이 형제는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고 전파 활동을 진척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유능한 조직자였던 그는 성품이 서글서글하고 야외 봉사에서 훌륭한 본을 보였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1925년 9월과 10월에 그는 노르웨이 전역을 여행하면서 본부의 지침에 따라 회중 활동을 조직하는 일을 했는데, 영어를 사용했으므로 통역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데이 형제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북유럽 사무소의 감독자로 섬겼습니다.

형제들은 노르웨이 사무실로 사용할 더 적합한 장소를 한동안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얼마의 돈을 상속받은 한 형제가 1925년에 오슬로에 있는 3층 건물을 사들여 절반 정도의 가격으로 조직에 매각했습니다. 정말 딱 맞는 시점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1983년까지 우리의 필요를 돌보는 데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활동적인 증인들로 이루어진 조직

1931년에는 전 세계에 있는 하느님의 종들의 역사에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채택한 것입니다. 외만 형제는 이렇게 썼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채택할 때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열의에 찬 목소리로 ‘야’[예] 하고 외쳤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성경적인 이름을 갖게 되어 대단히 기뻤으며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노르웨이에서 수행되는 열정적인 전파 활동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1918년에 15명이었던 평균 전도인 수가 1938년에는 328명으로 증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백성은 단순한 성경 연구생이 아니라 활동적인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 가운데 에벤 군데르스루드가 있습니다. 그는 1917년에 침례를 받고 시엔 회중과 연합했습니다. 처음에 그의 아내는 남편이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고 구두를 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에벤이 그냥 맨발로 집회에 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에벤이 침실에 있을 때 밖에서 문을 잠가 버린 적도 있었는데, 에벤은 그때 창문으로 뛰어내려 집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내가 무슨 수를 써도 그는 꼭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아내를 계속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시내를 맨발로 다니는 것이 창피하게 느껴졌습니다. 남편이 집회를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에 그를 따라 집회에 가 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에벤의 아내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회중들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시엔 회중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의 형제들은 인근 도시와 마을과 시골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전파했습니다. 주말에는 트럭이나 배를 타고 야외에 나가 전파 활동을 하고 집회를 마련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지역에 새로운 집단과 회중들이 생겼습니다. 시엔 회중과 마찬가지로 다른 회중들도 신권 활동이 분주하게 이루어지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베르겐 회중이 잘 발전하다

베르겐 지역에서 활동적으로 일한 전도인 가운데는 토르셸 링에레이데 형제가 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팜플렛을 보게 되었고 달 형제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시기에 베르겐 회중의 유일한 형제였던 달은 회중의 나머지 전도인인 일곱 명의 자매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 자매들 중에는 앞서 언급된 헬가 헤스도 있었는데, 당시 그는 베르겐에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토르셸은 이 작은 회중과 연합하기 시작했으며 1919년에는 헬가와 결혼했습니다.

토르셸은 목소리가 우렁차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회중의 유일한 공개 연사였습니다. 대개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강연을 하면서 교직자들의 위선과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폭로했습니다. 연설을 광고하는 내용이 신문에 자주 실렸으며, 집회에는 그 지역 성경 연구생들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관심자들이 참석했습니다.

토르셸은 진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 주도록 청중을 격려했습니다. 1932년에 닐스 로에도 그러한 격려를 받았습니다. 진리를 안 지 1년이 되었지만 닐스는 전파 활동을 시작하기를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회중이 「천국—세계의 희망」 소책자를 전하는 대대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던 시점에, 봉사의 직무에 참여해야 할 필요성을 다루는 토르셸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닐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훌륭한 연설이었습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더군요.” 연설을 끝맺으면서 토르셸은 이사야 6:8에 나오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까?”라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한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사야처럼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대답하길 바랍니다!” 닐스와 그의 아내에게 꼭 필요한 권고였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전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토르셸과 헬가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렇게 모여 항상 진리에 대해 이야기했고 새로운 전도인과 어린 전도인들은 크게 격려를 받았습니다. 베르겐의 전도인들은 배나 트럭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자주 봉사를 갔습니다. 봉사를 마치면 함께 모여 어떤 경험을 했는지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오슬로의 열심 있는 전파자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오슬로 지역에서도 전파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전도인 중에는 1923년에 침례받은 올라프 스케우가 있습니다. 그는 1927년에 회중의 봉사 지휘자로 임명되었으며 수십 년간 진취적이고 사랑 많은 감독자로 일했습니다. 올라프는 오슬로에서의 전파 활동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수도 인근 지역으로 버스나 트럭을 타고 봉사하러 가는 주말 여행도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밤늦도록 자지 않고 지도를 그리거나 봉사 여행을 계획하곤 했습니다.

오슬로의 전도인들은 오슬로 남쪽 할렌과 프레드릭스타드에서부터 북쪽의 하마르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동쪽의 콩스빙에르에서부터 서쪽의 드람멘과 회네포스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시골 지역을 다니며 봉사했습니다. 오전 9시쯤 구역에 도착하여 하루 종일 호별 방문을 했습니다. 그러한 방문 중에 공개 집회도 자주 마련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새로운 집단과 회중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이 되었고, 해당 지역에 있는 소수의 형제 자매들은 그러한 방문을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1935년에 있었던 한 전파 여행 중에는 오슬로의 전도인 76명이 9일간 전파하면서 총 1만 3313부의 소책자를 전했는데, 전도인 한 명당 평균 175부 이상을 전한 것입니다!

올라프의 아내인 에스테르는 관절염을 앓고 있어서 휠체어 없이는 거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부부의 집은 형제 자매들이 자주 이용하는 모임 장소였습니다. 올라프가 주로 요리를 했는데 주 메뉴는 자신의 특기인 맛있는 닭 날개 요리였습니다. 하지만 많은 연로한 증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집에서 즐겼던 영적으로 힘을 주는 모임과 흥미로운 성구 토의와 성서 퀴즈입니다. 랑힐 시몬센은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케우 형제의 집에 갔다 오면 항상 마음이 풍요로워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예전에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종교심이 많고 성서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1세기와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사도 13:48.

그런 사람 중 하나로 두르데이 함레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두르데이는 1924년에 소책자 한 부를 받고는 그날 저녁부터 읽기 시작해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오순절교인이었는데 아침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있었지요.”

1920년대 중반에 피엘트베트 집안의 여덟 형제 중 한 명이 지옥불에 관한 공개 강연을 듣고 그 점에 대해 다루는 소책자를 받았습니다. 그는 소책자를 읽고 지옥불 교리가 거짓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식구들이 가족 소유의 농장에 모였을 때 그는 자신이 알게 된 점을 남자 형제 일곱과 여자 형제 셋에게 신이 나서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그 소책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곧 그의 형제자매 모두와 그들의 배우자 중 많은 수가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자녀와 손자·손녀 중 다수가 열심 있는 전도인이 되었으며 다른 지역에 진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1936년에 뉴욕 세계 본부에서 온 M. A. 하울렛이 베르겐과 오슬로에서 열린 대회에서 연설했을 때, 영적인 것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베르겐에서는 교직자 몇 명과 주교 한 명을 포함하여 810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했는데, 그중 125명만이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오슬로에서는 증인 140명을 포함하여 무려 1014명이나 되는 사람이 공개 강연에 참석했습니다!

“모여들기 시작하는구나!”

1935년에 계시록 7:9-17에 언급된 “큰 무리”의 신분이 명확히 밝혀지자 여호와의 증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낙원이 된 땅에서 살 희망을 가진 숭배자들이 기름부음받은 남은 자들과 함께 여호와의 헌신한 종으로 섬길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은 참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때부터는 “큰 환난”을 살아남을 큰 무리를 모으는 일에 전파 활동의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이 일은 참숭배자들을 모으기 위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활동이었습니다.

하늘 희망을 가진 파이오니아 몇 명이 1935년에 릴레함메르 인근의 시골 지역에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열 살이던 욘 요한센은 자기 가족에게 파이오니아들이 와서 지상 낙원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는 자신이 알게 된 행복한 희망을 다른 사람에게도 꼭 전해 주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가방을 빌려 이웃 사람들에게 전파하러 나갔습니다. 혼자서 말입니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욘은 아내 에디트와 함께 열심히 봉사하고 있으며, 지난 세월 동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진리 안에 들어오도록 돕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을 가슴 뿌듯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937년 어느 날, 올라프 뢰드는 자기 집에서 한 형제와 함께 큰 무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헤우게순에는 증인이 그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엄청난 규모의 모아들이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올라프가 문을 열어 보니 알프레드 트렝에레이드가 문 앞에 서 있었습니다. 알프레드는 「파수대」 한 부를 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 즉시 자기 배를 타고 노를 저어 헤우게순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올라프가 증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서 출판물을 더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깜짝 놀란 올라프는 ‘이제 모여들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모여든 것은 아니지만 큰 무리가 모아지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드는 형제가 되었으며 그 지역의 다른 많은 사람들도 왕국의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여 증인이 되었습니다.

배를 이용하여 큰 무리를 모아들이다

노르웨이에서 전파 활동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에는, 수많은 섬과 먼 해안 지역들에 외따로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게 전파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1928년에 지부 사무실에서는 모터가 달린 배 한 척을 구입했습니다. 두세 명의 파이오니아가 탈 수 있고 노르웨이의 들쭉날쭉한 해안가를 항해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배였습니다. 그런데 배의 선장이 될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경험 많은 파이오니아인 칼 군베르그가 자원했습니다. 해군 생활을 해 본 데다 항해 지도사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매우 유용한 일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구입한 배인 엘리후호는 오슬로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항해하면서 해안가에 있는 항구들에 들렀습니다. 하지만 그 배는 폭풍우가 몰아치던 1929년의 어느 겨울밤에 스타방에르 부근에서 파선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배에 타고 있던 형제들은 무사히 해안가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931년에 형제들은 또 다른 배를 구입했는데 이번에는 에스테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칼이 다시 한번 항해에 나섰고 두 명의 형제가 그를 도왔습니다. 에스테르호는 7년간 노르웨이 서부와 북부 지역을 항해했습니다. 1932년에 칼은 자신이 “배를 타고 모험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배 타는 일을 그만두고 노르웨이 동부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했으며, 선장 역할은 요한네스 코르스타에게 넘겼습니다. 1938년에는 에스테르호를 루트호로 대치하여 1940년까지 사용했는데, 그 후로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더는 바다를 다니며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파이오니아들은 배를 타고 광대한 지역들을 항해하면서 많은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루트호를 타고 다니며 봉사한 안레아스 호페 형제와 망누스 란달 형제가 1939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들은 단 1년 만에 서책과 소책자와 잡지를 1만 6000부 이상 전했으며 축음기 연설을 총 2531명의 사람들에게 1072회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형제들은 배를 타고 다니면서 훌륭한 영적인 경험도 많이 했지만 놀라운 광경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안레아스 호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높이 솟아 있는 곶을 돌아 협만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매일 북쪽으로 항해했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웅장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지요.” 겨울철에는 북극권 북쪽 지역에서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북극광[오로라]”을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눈부신 백야 현상”이 연출하는 황홀한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파이오니아 자매의 열심

1930년대에는 파이오니아 수가 급속히 증가했습니다. 얼마 안 되는 필수품으로 살아가야 하는 형편이었지만, 이들은 방대한 지역을 다니면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성서 출판물을 배부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열심은 훗날의 성장을 위한 견고한 기초를 놓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파이오니아 중에는 오슬로 출신인 솔베이 뢰보스(결혼 후에는 솔베이 스토르뮈르) 자매가 있습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던 그는 여러 종교 모임에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해 보고는 성서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1933년에 침례를 받았고 2년 후에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려고 노르웨이 북부로 갔습니다. 솔베이는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를 약간 절었습니다. 하지만 6년 동안에 보되 남쪽에서부터 시르케네스까지 가는 길에 있는 도시와 어촌과 크고 작은 마을들 대부분을 다니면서 전파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서 출판물을 받았습니다. 솔베이는 단 1년 만에 1100건 이상의 잡지 예약을 맡았습니다!

솔베이가 전한 소식에 큰 관심을 보인 사람 중에는 베스테롤렌의 헨네스 마을에 사는 다그 옌센이라는 목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해 동안 다른 관심자들에게서 우리 출판물을 받아 보고 있었습니다. 다그를 만나게 된 솔베이는 잡지 예약을 해 준 뒤에 다른 구역들로 가서 계속 봉사했습니다. 다그는 혼자서 전파 활동을 시작했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출판물을 빌려 주었습니다.

솔베이는 아뇌위아 섬에서 봉사하다가 한 오두막에 모여 있는 건장한 어부들을 보고는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증거하면서 축음기 연설을 틀어 주었고 잡지도 예약해서 받아 보도록 권했습니다. 프릿스 마드센이라는 젊은 어부가 관심을 보였고 잡지를 예약했습니다. 솔베이는 그 구역을 다 돌고 나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당시 파이오니아들은 으레 그렇게 봉사했는데, 소식을 전하고 관심 있는 사람들을 찾은 뒤에 출판물을 전하고 예약을 맡고는 새로운 구역으로 계속 여행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면 관심을 보인 사람 모두를 어떻게 계속 돌볼 수 있었습니까?

하느님의 양들을 돌보다

1939년 1월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를 위한 새로운 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노르웨이는 네 개의 지구 즉 순회구로 나뉘었습니다. 순회 감독자(당시에는 지구의 종이라고 불림)들은 각 지역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회중들을 지원하고 새로운 회중을 조직하고 관심자들이 봉사를 시작하도록 돕는 데 더욱더 역점을 두었습니다. 안레아스 크빙에는 4순회구의 감독자로 섬기도록 임명되었는데, 그 순회구에는 플로뢰에서 시르케네스까지 2600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방대한 지역에 회중이라고는 트론헤임, 남소스, 나르비크에 있는 세 회중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외따로 떨어져 있는 전도인과 집단들 그리고 잡지 예약자들도 방문해야 했습니다.

안레아스는 아내 시리와 함께 주로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여행했습니다. 그는 전도인과 관심자들이 진리 안에서 발전하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솔베이 뢰보스 같은 파이오니아들은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관심자들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안레아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솔베이는 헨네스에 사는 다그 옌센과 아뇌위아 섬에 사는 프릿스 마드센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안레아스는 1940년에 다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그는 면도를 하던 중이어서 얼굴에 온통 비누 거품이 묻어 있었어요. 하얀 거품이 잔뜩 묻은 채로 나를 강렬하게 쳐다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면도하던 중이란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지요.” 안레아스는 그가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다그는 곧 아내인 안나뿐 아니라 벗들과 친척 다수가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안레아스는 아뇌위아 섬의 블레이크라는 마을로 가서 젊은 어부인 프릿스 마드센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레아스의 도움을 받은 프릿스와 그의 아내는 훗날 그곳에 형성된 회중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 안레아스와 그의 아내는 다른 여러 지역도 다니면서 솔베이나 그 밖의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을 통해 처음으로 진리를 접했던 사람들을 방문했습니다. 안레아스를 비롯한 여러 순회 감독자들은 집회를 마련하고 새로운 회중들을 세웠습니다. 1세기 그리스도인 회중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에서도 어떤 이들은 심는 일을, 다른 이들은 물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계속 자라게 하셨습니다.”—고린도 첫째 3:6.

제2차 세계 대전이 노르웨이를 휩쓸다

1940년 4월, 독일군이 쳐들어오자 노르웨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교전이 시작된 지 단 62일 만에 노르웨이 전역은 나치 독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몇몇 도시는 이미 집중 포격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침공이 시작되고 며칠 후, 게슈타포는 지부 감독자인 에노크 외만을 체포하여 일주일간 구금했습니다. 그들은 간단한 심문을 한 뒤에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몇 주 후에 게슈타포는 외만 형제를 다시 체포해서 심문했습니다.

형제들은 나치가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을 강제 수용소에 보내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나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전도인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계속 열심히 전파했습니다. 사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더 잘 듣는 것 같았으며 많은 가정 성서 연구(당시에는 모범 연구라고 불림)가 시작되었습니다. 덴마크에서는 형제들에게 덴마크어로 된 「파수대」를 계속 보내 주었고, 노르웨이어로 된 「위안」(「뉘 베르덴」)지도 중단 없이 발행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집회와 대회도 계속 열었으며 놀랍게도 전도인 수가 증가했습니다.

압수, 체포, 금지령

하지만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 경찰은 다시 지부 사무실에 와서 출판물을 요구했으며 외만 형제를 심문했습니다. 1940년 후반에는 「적」(Enemies) 책을 압수해 갔는데, 파시즘과 나치즘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1941년 초에는 몇몇 파이오니아들을 체포하여 심문했습니다. 독일인 나치당원과 노르웨이인 나치당원들은 가끔씩 집회에 참석하여 회중을 몰래 살폈습니다. 후에 나치 당국은 지부 사무실에 와서 「파시즘 혹은 자유」(Fascism or Freedom) 소책자와 「정부와 평화」(Government and Peace) 소책자를 압수해 갔습니다.

1941년 7월에 갑자기 게슈타포는 노르웨이 전역에서 전파 활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의 독일 경찰이 베델에 와서 남아 있는 출판물을 모두 압수했으며 베델 가족을 경찰 본부로 데려가 심문했습니다. 외만 형제는 12주 동안 매일 경찰 당국에 출두해야 했습니다.

게슈타포는 매우 치밀하게 작전을 세워, 책임 맡은 형제들의 집을 급습하고 워치 타워 협회가 발행한 모든 출판물을 압수해 갔습니다. 그들은 형제들에게 전파 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강제 수용소에 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몇몇 형제 자매들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며칠 동안 구금되었습니다.

모스에서 경찰은 시구르 로오스의 집에 들이닥쳐 그가 가진 출판물을 압수하고, 시구르와 그의 아내와 다른 형제 한 명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은 그들에게 전파 활동을 중단하고 여호와라는 이름을 더는 사용하지 말라고 다그쳤습니다. 이 전도인들은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에 관해 전파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경찰은 “당신들의 믿음은 도저히 빼앗을 수 없군” 하고 인정했습니다. 흔들림 없는 태도를 나타낸 이 전도인들은 몇 시간 후에 풀려났습니다.

나치는 오슬로에 있는 올라프 스케우의 집에도 갔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을 샅샅이 뒤져 성서와 출판물과 축음기를 압수했으며 올라프의 책장은 쓰지 못하게 막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오븐에 숨겨져 있던 전도인 기록 카드는 찾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나치는 서책을 실을 트럭을 가지고 다시 왔습니다. 책임자는 친위대 소위인 클라우스 그로스만이었는데 그는 악명 높은 나치당원이었습니다. 올라프가 성서 출판물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그는 종이 펄프 재료로 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가 두렵지도 않나요?” 하고 스케우 형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로스만은 거만하게도 “여호와가 조심해야 할 걸!” 하고 대답했습니다. 4년 뒤에 나치가 항복했을 때 그로스만은 자살했습니다.

1941년 7월, 게슈타포는 보되에 있는 안레아스 크빙에를 체포했으며 노르웨이 북부 지역 증인들의 소재를 대라고 했습니다. 안레아스는 “다들 오늘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네요”라고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심문 도중 관리들이 안레아스의 가방에 들어 있던 문서들을 바닥에 온통 쏟아 놓았을 때 그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그 문서들에는 회중들, 회중에 있는 종들, 관심자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 문서를 들여다보려고는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레아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사실 게슈타포는 다른 데 더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전파하는 일을 비롯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문서에 안레아스가 서명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안레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활동이 금지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 점을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서명할 수 있지요. 하지만 집회를 보고 잡지와 책을 배부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성서를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알리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안레아스가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지자 게슈타포는 그를 풀어 주었습니다.

결국, 나치 당국은 형제들이 지부 사무실로 사용하던 집을 압류했습니다. 외만 형제 부부는 그곳에 계속 살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다른 베델 가족 성원들은 떠나야 했습니다.

금지령하에서 함께 모이다

나치가 여호와의 증인을 없애 버리려고 하자, 형제들은 신속히 활동을 조정하여 비밀리에 신권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몇몇 형제들은 다른 형제 자매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기 위해 여행하는 일을 했습니다. 베델에서 한동안 일했던 쇠렌 레우리센은 노르웨이 남부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북부 지역에서는 안레아스 크빙에가 자신의 순회구에 있는 증인들을 방문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임시로 이런저런 일을 구해서 하곤 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사용하던 배인 루트호를 타고 봉사했던 망누스 란달도 여행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1943년에 외만 형제에게서 주소를 받은 다음, 자전거를 타고 북쪽으로 1200킬로미터를 달려 보되까지 가서 형제 자매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당국이 집회를 금지했지만 형제 자매들은 서로 격려하기 위해 계속 함께 모였습니다. 보통 개인 집에서 소규모로 모였지만 이따금 비밀리에 큰 규모로 모이기도 했습니다. 1942년에 오슬로에 있는 두 장소에서 열린 기념식에 280명이 참석하고 그중 90명이 표상물을 취했을 때 형제들은 참으로 기뻐했습니다!

증인들은 외진 곳에 있는 농장이나 숲 속에서 비밀리에 대회를 열기까지 했습니다. 가장 큰 규모의 모임은 1943년에 시(Ski)라는 마을 외곽에 있는 숲에서 열렸습니다. 오슬로피오르 협만 인근에서 온 180명가량의 형제 자매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휴회 시간에 참석자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을 때, 말을 탄 독일 군인 세 명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독일어를 할 줄 아는 형제 한 명이 군인들에게 가서 말을 걸어 보니 그들은 수영하러 가던 중에 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가는 길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 군인들 중 한 명이 “저 사람들 모여서 뭐하는 거야?” 하고 다른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군인이 “무슨 합창단 같은데”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이 틀렸다고 알려 줄 형제 자매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말을 탄 군인들이 숲 속으로 사라지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지하 활동

많은 전도인은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 출판물을 숨겨 놓았습니다. 땅속에 출판물을 묻어 두었다가 필요할 때면 다시 파서 꺼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지하” 활동을 하는 셈이었습니다. 전기 기술자였던 스케우 형제는 책 한 상자를 작업장에 있는 변압기 뒤에 숨겨 놓았습니다. 외이세트 형제는 벌집에, 크빙에 형제는 감자를 보관해 두는 통 속에 출판물을 숨겼습니다.

로테 홀름 자매는 하르스타드에 있는 서적 보관소가 발각될까 봐 염려되어 그곳에 가서 출판물이 든 상자를 모두 챙겼습니다. 그리고 배에 올라탄 후 모든 상자를 갑판에 조심스럽게 쌓고는 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출발할 때 보니 독일 군인들이 많이 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그는 어떻게 하면 들키지 않고 출판물을 다 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안절부절못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배가 도착하자 군인들은 연로한 부인에게 짐이 많은 것을 보고는 안쓰러워하면서 상자를 다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심지어 로테의 집으로 날라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 예의 바른 군인들은 자신들이 베푼 친절이 당시 증인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금지령하에서도 형제들은 최신호 「파수대」를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노르웨이로 계속 비밀리에 들여왔습니다. 그들은 연구 기사를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뒤 타자하여 전국에 배부했습니다. 세밀한 조직망으로 연결된 연락원들이 기차나 자전거나 배를 타고 여행하면서 노르웨이 전역의 참숭배자들에게 시기적절한 영적 양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중단 없이 전파하다

전쟁 중에 노르웨이의 형제 자매들에게 시험이 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1941년 7월에 우리의 활동에 금지령이 내려지자 형제들은 나치 당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친구나 친척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거나 자신들이 이전에 진리를 전했던 사람들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하지만 일부 형제들은 이러한 방법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성서만 사용하여 호별 방문을 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다소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반대에 직면해서도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겠다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 중이라 뉴욕의 세계 본부와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신속히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은 의견 차이 때문에 믿음이 약해졌습니까? 아니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전파 활동을 계속하면서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기다렸습니까?

그들은 충실히 봉사했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노력을 축복하고 계시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전쟁이 있기 전 5년 동안 이룬 성장과 동일한 성장이 전쟁 기간 중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금지령 그리고 전파 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에 462명이었던 전도인 최고 수는 1945년에 689명으로 증가했습니다. 형제들에게 참으로 기쁨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연합하여 여호와를 섬기다

1945년에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7월과 8월에 윌리엄 데이가 노르웨이로 와서 형제들이 활동을 재조직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데이 형제는 오슬로, 시엔, 베르겐에서 모임을 마련하여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진실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그들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합되어야 한다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이 여호와의 축복을 이미 경험했고 증가를 보았으므로 이제 여호와의 인도를 확신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1945년 9월, 세계 본부의 네이선 H. 노어는 마빈 F. 앤더슨에게 연락했습니다. 당시 28세였던 그는 덴마크계 미국 형제로 뉴욕 베델에서 봉사하다가 미국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노어 형제는 앤더슨 형제에게 노르웨이로 가서 몇 가지 필요한 일들을 돌보면서 “꽤 여러 해 동안” 그곳에 머무를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앤더슨 형제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노르웨이에 가게 된 것은 몇 개월 뒤였습니다.

한편 노어 형제와 헨첼 형제는 1945년 12월에 노르웨이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이 사랑에 찬 인도를 베푼 덕택에 형제들은 끈끈한 사랑의 띠로 더욱 강한 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외만 형제를 대신하여 데이 형제가 지부 감독자로 일하게 될 것이라는 노어 형제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한 달 뒤에는 앤더슨 형제가 노르웨이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2월에 그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벗어난 노르웨이 전역의 여호와의 종들은 그분의 축복을 확신하면서 새로운 활력을 가지고 봉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다

마빈 앤더슨이 노르웨이에 도착했을 무렵, 지부에서는 매우 분주하게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1945년 9월에 한 개의 노르웨이어 소책자와 네 개의 스웨덴어 소책자가 발행되어 전도인들에게 공급되었습니다. 그다음 달인 1945년 10월 1일에는 「파수대」가 노르웨이어로 발행되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출판물이 생산되었습니다.

노르웨이어로 된 출판물이 필요했던 이유를 보여 주는 한 가지 재미있는 예가 있습니다. 스웨덴어로 나온 출판물 중에 제목이 「호프」인 소책자가 있었는데 그 말은 스웨덴어로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어로는 “호프”가 “점프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전도인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희망의 소식을 읽고 점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1946년에 앤더슨 형제가 지부 감독자가 되었을 때는 지부 사무실이 매우 협소했기 때문에 그는 다섯 명의 형제들과 한방에서 지냈습니다. 늘어나는 베델 가족을 위해 공간이 더 필요하게 되자, 증인은 아니지만 나치 시대부터 그 건물에 살았던 그 밖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 했습니다.

앤더슨 형제는 새로운 임명을 열정적으로 수행해 나갔습니다. 지부 사무실이 개수되었으며 페달을 밟아 가동하는 인쇄기를 포함하여 새로운 장비도 구입했습니다. 1946년에는 회중에서 신권 전도 학교라는 새롭고 흥미진진한 교육 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더 많은 형제들이 연설을 준비하고 제공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곧 많은 형제들이 공개 연사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46년 9월과 10월에는 오슬로, 베르겐, 트론헤임에서 전쟁 이후 최초로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세 도시에서 제공된 “평화의 군왕”이라는 주제의 공개 강연에 도합 3011명이 참석했으며 5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당시 노르웨이의 전도인 수가 766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수였습니다.

1946년 12월에는 5년 이상 중단되었던 순회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이전에 베델에서 일해 본 형제들을 포함하여 나이가 젊은 많은 형제들이 순회 감독자(당시에는 형제들의 종이라고 불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전도인들을 호별 방문 봉사에서 훈련시키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았으며, 각 회중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과 함께 봉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당시의 젊은 순회 감독자 중 한 명인 군나르 마르쿠센은 자신이 방문한 어떤 회중들에서는 일주일 동안 50명 내지 70명의 형제들과 봉사하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도인들은 왕국 소식을 더 능숙하게 전하게 되었고, 1930년대부터 사용해 온 증거 카드와 축음기를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재방문을 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일에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장려하다

전쟁은 끝났고 왕국 소식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었습니다. 전도인들은 그들을 돕기 위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라는 격려를 받았습니다. 1941년에 우리의 활동이 금지되었을 때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했던 일부 전도인들은 그러한 격려에 힘입어 다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경제 상황이 어려웠지만 1946년 말에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는 형제 자매들의 수가 47명에 달했습니다.

그러한 파이오니아 가운데 1946년에 북쪽의 핀마르크 주로 간 스반힐 네롤 자매가 있습니다. 그는 1941년에 솔베이 뢰보스와 함께 그곳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시르케네스와 바르되에 있을 때는 도시가 폭격당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스반힐은 그때 솔베이와 봉사하면서 만났던 관심자들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으로 황폐되어 버린 시르케네스로 다시 돌아갔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스반힐이 묵을 곳도 없이 그곳으로 가는 것을 보고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스반힐은 여호와를 신뢰했습니다. 첫 겨울에는 다섯 명이 사는 작은 집의 부엌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전후의 사정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 스반힐은 쏟아지는 눈이나 찬비를 맞으며 배를 기다리곤 했는데, 배는 예정 시간대로 오는 법이 없었고 아예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반힐은 사미족 사람들에게 증거하면서 흥미로운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모여 사는 외진 곳으로 버스를 타고 가기도 했고 그럴 수 없을 때에는 배나 자전거를 이용했습니다. 그는 종종 인심이 좋은 사미족의 초대를 받아 순록 가죽으로 만든 그들의 천막에 들어갔습니다. 증거할 때 그의 말을 누군가가 통역해 주면 사람들은 그 내용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식사 시간이 되면 함께 순록 고기를 먹자고 권하기도 했습니다. 스반힐을 통해 좋은 소식을 들은 일부 사람들은 후에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베델에서 일했던 셸 후스뷔의 말에 따르면, 지부에서는 스반힐이 보내오는 출판물 예약 신청자들의 주소만으로도 항상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핀마르크에 있었던 3년 동안 그는 2000건의 「파수대」 예약을 맡았으며 2500부의 서책을 전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전쟁이 끝난 후 회중 전도인들도 전파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앞서 언급된 다그 옌센은 전쟁 중에 베스테롤렌의 헨네스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벗들과 친척들에게 증거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고 우리 출판물을 사용하여 성서를 연구했습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 다그는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음 해에 헨네스에 회중이 생겼고 16명이 다그의 집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5년 뒤에는 회중 전도인이 약 50명이 되었습니다. 다그가 1971년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회중에서 20명이 넘는 사람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다그가 가진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대한 열심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되었습니다. 같은 회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오스힐 뢴닝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다그가 어느 집을 가든 누구나 그에게서 행복과 열정을 느꼈지요. 그가 있으면 집 안 가득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분위기가 환해졌어요.” 다그는 아이들을 항상 잘 격려해 주었는데, 예를 들어 아이들이 신권 전도 학교에서 과제를 수행하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오스힐은 “그분은 우리가 정말 중요한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게 해 주셨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친절한 격려 덕분에 오스힐은 1962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사람들에게 ‘행복하신 하느님 여호와의 영광스러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디모데 첫째 1:11.

이 지역에서 이렇게 열심 있는 증인들이 많이 나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작은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하느님과 성서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의 많은 증인 가장들은 충실한 아내의 지원을 받으면서 가족을 잘 돌보는 사람들로 평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장들 가운데 아르눌프 옌센이 있었습니다. 다그의 조카인 그는 1947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어부였던 아르눌프는 평일이면 바다에 나가 한 번에 여러 날을 고기잡이배에서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금요일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기가 잘 잡혀 다른 어부들은 바다에 남아 돈을 더 벌려고 할 때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는 아내와 여덟 자녀와 시간을 보내면서 함께 집회에 참석하고 전파 활동을 했으며, 그리하여 가족 모두가 진리 안에 확고히 머물렀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면 형제들은 종종 아르눌프의 배를 타고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갔고 그곳에서 영적인 고기잡이를 하면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임무를 수행했습니다.—마가 1:16-18.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요”

노르웨이의 형제들은 뉴욕의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서 베풀어지는 선교인 훈련을 통해 큰 유익을 얻었습니다. 한스 페테르 헴스타드와 군나르 마르쿠센은 1948년에 노르웨이 최초로 길르앗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들은 노르웨이에서 일하도록 임명을 받아 여행하는 봉사와 베델 봉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독신으로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봉사했습니다. 1948년부터 2010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약 45명이 길르앗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노르웨이에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아 전 시간 전파자나 여행하는 감독자나 베델 가족 성원으로 섬겨 왔습니다.

노르웨이로 임명받아 온 초창기 길르앗 선교인 중에는 덴마크 출신의 안드레아스 한센과 핀란드 출신의 칼레비 코르틸라가 있습니다. 1951년에 핀마르크 주 동부로 임명을 받은 그들은 배나 자전거나 스키를 타고 다니면서 광대한 구역을 돌보았습니다. 많은 경우, 스반힐 네롤 자매가 여러 해 전에 영적인 기반을 닦아 놓아서 그것을 토대로 활동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단 1년 만에 그 지역의 전도인 수가 3명에서 1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베스테롤렌의 헨네스 출신인 셸 마르틴센은 1953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여 노르웨이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22세의 나이에 베스트폴 주와 텔레마르크 주에서 여행하는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졌지만 경험 많은 형제들이 따뜻하게 환영해 주고 충성스럽게 지원해 주어서 그 시절은 그에게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셸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계속 일하다가 2001년에 아내 요룬과 함께 로포텐에 있는 스볼베르에 정착한 뒤 파이오니아로 봉사했습니다.

덴마크 출신의 카렌 크리스텐센은 1950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해 에게르순과 콩스빙에르로 왔는데, 당시 그곳에는 회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카렌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그 지역에서 봉사했습니다. 1954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콩스베르그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56년에는 마빈 앤더슨과 결혼했고 그 이후로 계속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60년 이상 즐겁게 전 시간 봉사를 해 온 카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요.”

법적 이정표가 세워지다

1948년부터 1951년 사이에 특히 큰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1951년에는 평균 전도인 수가 29퍼센트 증가하여 2066명이라는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여호와의 종들은 몇 가지 법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관심을 끈 문제는 「파수대」를 가지고 가두에서 증거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1949년 11월, 오슬로에서 가두 증거를 하던 전도인 몇 명이 경찰서로 연행되어 몇 시간 뒤에 풀려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증인들은 위축되지 않고 그다음 주말에도 가두 증거를 했습니다. 1949년 12월 6일에 경찰은 오슬로에서 가두 증거를 하던 모든 전도인을 체포했습니다. 경찰의 허가 없이 가두에서 잡지를 전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의 활동 때문에 거리가 혼잡해지고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전도인 일곱 명이 심문을 당한 뒤 법정으로 불려 갔으며 소액의 벌금을 내거나 3일간 구류되어야 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단지 경찰의 허가를 받는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믿음을 자유롭게 실천할 권리와 관련된 문제였기 때문에, 형제들은 노르웨이 대법원에 상소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보도 대표자인 욘 로오스는 「다그블라데트」라는 신문에서 우리의 가두 증거 활동이 결코 혼잡을 초래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통행에 방해가 되거나 혼잡을 초래하는 일 없이 포교 활동이 수행되는 경우에도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가? 종교의 자유는 시민들이 그러한 전파 활동을 할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닌가?”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증인들은 계속되는 체포와 늘어 가는 벌금에도 굴하지 않고 가두 증거를 계속했습니다. 어떤 전도인들은 열 번이나 체포되었습니다.

1950년 6월 17일, 대법원은 시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전도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건에서 호의적인 판결이 내려진 덕분에, 노르웨이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경찰의 허가 없이도 가두와 호별에서 성서 출판물을 전할 수 있는 권리가 확립되었습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대회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대회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로 인해 조직은 더욱 강화되고 증인들은 서로 더 가까워졌습니다. 1951년에 릴레함메르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는 세계 본부의 네이선 H. 노어와 밀턴 G. 헨첼이 연설을 했습니다. 나라 전역에서 온 많은 사람이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89명이 침례를 받고 2391명이 공개 강연에 참석하자 모두 참으로 기뻐했습니다! 그 후 몇 년간 노르웨이의 형제들은 런던과 뉴욕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하여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1955년에는 약 2000명의 노르웨이 증인들이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1965년에 오슬로의 울레볼 경기장에서 열린 “진리의 말씀” 국제 대회는 특히 의미 있는 모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대회 시작 예정일 전날 저녁에 경기장에서 노르웨이 국가 대표 축구팀과 다른 나라 대표팀의 경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축구 팬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자, 출입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많은 수의 증인들이 순식간에 경기장으로 들어가 대회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은 청소하고 쓰레기를 치우고 식품 봉사부에서 사용할 천막을 세우느라 밤을 새워 열심히 일했습니다. 또한 연단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를 위한 가설무대를 세우고, 경기장을 장식할 헛간 한 채와 오두막 세 채를 세웠는데 지붕은 모두 잔디로 덮었습니다. 「다그블라데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의 기적, 아름다운 전원 풍경으로 바뀐 울레볼 경기장 ··· 여호와의 증인들이 믿기 어려운 일을 해내다.”

7000명이 넘는 형제 자매들이 대회를 보러 외국에서 왔는데, 대부분 덴마크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이 따뜻한 노르웨이의 형제 자매들은 그들이 묵을 곳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도시 가까이에 있는 들판에 천막촌이 세워졌습니다. 날씨만 좋았다면 매우 이상적인 숙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에 묵었던 6000명은 쉽게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비가 내려 대회 초반에 땅이 진흙탕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마지막 이틀간은 날씨가 괜찮아져서 모두들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비록 좋은 날씨는 아니었지만, 현지 형제들과 외국에서 온 참석자들은 온정이 넘치는 그리스도인 교제를 즐기며 매우 행복해했습니다. 그리고 시기적절한 영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새 힘을 얻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199명이 침례를 받고 노어 형제의 공개 강연에 1만 2332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참석하자 모두들 기쁨에 넘쳤습니다!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생명이다”

많은 형제 자매들은 호별 방문과 가두 증거뿐 아니라 비공식 증거를 통해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배에서 화부(火夫)로 일하던 콘라드 플라퇴위는 1936년에 항해사인 페울 브루운에게 소책자 한 부를 전했습니다. 페울은 그날 밤에 그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진리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고, 소책자의 내용을 통해 참종교와 거짓 종교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페울은 더 많은 점을 알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시작했고, 전쟁 기간 중에는 진리에 관심을 보이는 한 선원과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 선원은 성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자 배에 장착된 기관총을 다루는 일을 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원의 그러한 입장을 알게 된 상부에서는 페울에게 더는 그와 성서 연구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페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고 배가 런던에 닿았을 때 두 사람은 그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한 달 뒤 그 배는 어뢰를 맞고 침몰했습니다. 선원은 그 후로 계속 발전하여 침례받은 형제가 되었고 페울은 길르앗 선교 학교에 초대받았습니다. 페울은 1954년에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필리핀에서 선교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노르웨이로 돌아와 아내인 그레테의 지원을 받으며 순회 감독자로 일했습니다.

1948년에 홀예르 아브라함센은 나르비크 항구의 거대한 준설기가 있는 곳으로 인부들이 출퇴근을 할 때 그들을 태워 주는 일을 했습니다. “증거하는 일은 우리의 생명이다. 그 일을 안 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다.” 이것이 홀예르의 좌우명이었습니다. 그는 좌우명과 일치하게 항상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객들에게 증거했습니다. 그러한 승객 중에 올바르 디우프비크가 있었는데, 그는 홀예르가 전하는 소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약혼녀인 안네 리세에게 낙원 희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침례를 받았고 후에는 아들 넷도 잘 양육하여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그중 한 명인 헤르만은 아내 라일라와 함께 선교인이 되어 볼리비아에서 봉사했습니다. 헤르만과 라일라는 노르웨이로 돌아와 지금은 여행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양 떼를 돌보는 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지부 사무실과 회중들에 조직상의 중요한 조정이 있었습니다. 마빈 앤더슨에 뒤이어 로아르 하옌이 지부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69년에 토르 사무엘센이 지부를 감독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지부 위원회가 임명되어 지부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고 토르 사무엘센, 코레 피엘트베이트, 닐스 페테르센이 노르웨이 최초의 지부 위원이 되었습니다.

1972년 10월에는 회중에서 영적 목자로 섬길 장로의 회가 임명되었습니다. 회중의 장성한 남자들은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돌볼 자격을 갖추도록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래로, 여호와의 백성은 그분의 사랑에 찬 감독을 받으며 충성스럽게 그분을 섬겨 왔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풍성히 축복해 오셨습니다.

사미족 사람들이 좋은 소식에 반응을 보이다

많은 파이오니아와 전도인들은 수십 년간 사미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왔는데, 핀마르크스비다 고원 깊숙한 곳에서 순록을 사육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파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미족이 노르웨이어를 할 줄 알지만 통역자의 도움을 받아 증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미족의 언어를 사용하여 먼 지역까지 전파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렇게 한 초기 증인들 가운데는 악셀 팔스네스가 있습니다. 사미족의 혈통을 일부 이어받은 그는 사미어와 노르웨이어와 핀란드어를 할 줄 알았습니다. 악셀에게는 노르웨이 남부에 사는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악셀보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인 여동생은 그에게 우리 출판물을 하나 보내 주었고 악셀은 그 출판물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는 트롬스 주의 한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증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1968년에 한 순회 감독자와 파이오니아 몇 명이 악셀을 방문하여 그가 영적으로 발전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악셀은 열심 있는 전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종종 아침 일찍 자전거를 자신의 배에 싣고서 노를 저어 협만을 건넜습니다. 그러고는 자전거를 타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사미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핀마르크의 외진 지역들에 사는 사미족 사람들에게 훌륭하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강인한 사람이었던 악셀은 외따로 떨어진 집들을 방문하기 위해 스키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한번은 어느 늦은 겨울에 스키를 타고 산악 고원 지대를 가로질러 카라쇼크에서 케우토세이노까지 간 다음 다시 알타로 향했습니다. 그는 개인 물품 몇 개와 얼마의 출판물만 간단히 챙겨 배낭 하나에 넣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몇 주를 여행하여 알타에 있는 친구들의 집에 도착했는데, 그가 스키를 타고 여행한 총거리는 무려 400킬로미터가량이나 되었습니다!

1970년대 초에 얼마의 사미족 사람들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함메르페스트에서는 한 사미족 여자와 그의 남편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알타에 있는 그 여자의 친척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알타에서 봉사하는 특별 파이오니아인 아르네 밀데와 마리 안 밀데가 이 진실한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했는데, 보통 10명 내지 12명이 함께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중 절반가량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알타에 사는 사미족 파이오니아인 하르트비 민나 형제는 스노모빌을 타고 다니며 외진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미족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데다가 그들 중에는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하지만 사미족은 인심이 후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몇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지요.”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는 전도인 수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1975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대가 일부 형제들에게 믿음의 시험이 되었습니다. 큰 환난이 1975년에 오지 않자 소수의 사람들이 조직을 떠났으며, 1976년과 1980년 사이에는 전도인 수가 약간 감소했습니다. 실망감 때문에 한동안 그리스도인 활동에 소극적이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대다수의 전도인들은 여호와를 계속 섬기는 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한스 야코브 릴레트베드트 형제는 이렇게 솔직히 말했습니다. “1975년에 대해 다들 어느 정도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던 건 사실이지요. 하지만 그런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제 믿음이 영향을 받진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충실히 봉사해 온 증인인 욘 요한센과 에디트 요한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린 특정한 날짜를 염두에 두고 여호와께 헌신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던 일을 변함없이 계속해 나갔습니다.”

레아 쇠렌센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영원히 여호와를 섬길 거예요. 끝이 1975년에 오는지 안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새로운 지부 사무실

1970년대 말이 되면서 지부 사무실의 업무가 많아지자, 베델 성원이 더 많이 필요해졌고 숙소와 작업 공간도 늘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1979년에 통치체는 오슬로 외곽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을 짓는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1980년 말에 형제들은 위트레에네바크에서 적합한 부지를 찾았는데, 오슬로 중심부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건축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복합 건물을 짓는 일에 참여할 자원봉사자들이 초대되었습니다. 건축 장비를 구하고, 거의 1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위해 음식과 숙박을 마련하고, 전체 공정을 조율하는 것은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도합 2000명이 넘는 현지와 해외의 형제 자매들이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습니다. (시 110:3) 많은 사람은 감자, 채소, 과일, 빵, 계란, 생선, 의류, 장비 등을 기부하여 공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건축 현장에 있는 작은 제재소에서 통나무를 잘라 판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이 자금을 빌려 주거나 헌금을 하여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기술을 가진 사람들 일부는 제한된 기간밖에 도움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작업의 많은 부분은 기술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해야 했습니다. 전기 설비와 관련된 모든 일을 감독했던 욘 욘손의 말에 따르면, 그를 비롯한 여러 건축부 감독자들은 자신들이 정말 역부족이라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욘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자원봉사자들은 작업 방법을 배워 멋지게 일을 해냈습니다. 문제들이 해결되고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사를 감독하는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요.”

자원봉사자들의 수고와 형제 자매들의 관대한 지원 그리고 여호와의 축복에 힘입어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1981년 초에 건축을 시작한 새로운 지부 사무실은 통치체 성원인 밀턴 헨첼이 방문해 있던 1984년 5월 1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건축 공사는 참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그 공사를 통해 노르웨이의 형제들은 서로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건축 공사가 끝난 뒤 몇 년 사이에, 공사에 참여했던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보조 파이오니아나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왕국회관을 빨리 짓게 되다

1928년에 피엘트베트 집안의 네 형제는 여호와의 숭배자들을 위해 베르겐 외곽에 최초의 회관을 지었습니다. 1980년대 초가 되었을 때는 몇몇 회중들이 자체 왕국회관을 짓거나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회중이 여전히 임대한 장소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장소들은 집회를 보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지부 건축 공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몇몇 형제들은 왕국회관을 더 빨리 지을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습니다. 그들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형제들이 팀을 이루어 속성으로 왕국회관을 짓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곳 형제들이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형제들 몇 명이 설계도 작업을 하고 세부 공정을 계획했으며, 1983년에 아심에서 시범적으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런 다음 1984년에 뢰르비크와 스타인셰르와 알타, 이 세 곳에 속성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까? 간단히 말해, 기초 공사를 미리 한 다음 기술이 있는 자원봉사자들과 기술이 없는 자원봉사자들이 할 일을 잘 조직하여 여러 공정이 며칠 만에 끝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 후로 10년 사이에 노르웨이에서 약 80채의 속성 왕국회관이 지어졌습니다. 나중에 노르웨이 형제들은 아이슬란드에 가서 왕국회관 세 채를 짓는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현재 노르웨이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회중이 자체 왕국회관을 소유하고 있지만, 아직도 할 일은 많습니다. 오래되어 보수해야 하는 회관이 있는가 하면 확장해야 하는 회관도 있고 새로 지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제 관계가 돈독해졌지요”

왕국회관 건축 공사 덕분에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숭배 장소들이 생겼을 뿐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에 형제 세 명은 왕국회관 건축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프레드릭스타드 시의 관리들을 만났습니다. 형제들이 3일 만에 회관을 완공하겠다고 하자 관리들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금요일이 되었을 때, 관리들은 왕국회관이 계획대로 완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겨우 공사 첫날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토요일에 관리 중 한 명은 자신이 이끄는 관악 연주단을 건축 현장에 데려와서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음악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이전에 비웃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사과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1990년에 아레날 왕국회관이 건축되는 것을 지켜본 한 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빨리 건물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네요.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모두가 환하게 미소 띤 얼굴로 행복하게 일한다는 거예요.”

현재 노르웨이에는 왕국회관 건축을 감독하는 두 개의 지역 건축 위원회가 있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규모가 더 크고 수고가 더 많이 드는 건축 공사에도 기꺼이 자원하여 일합니다. 예를 들어, 1991년과 1992년에 형제들은 지부 사무실을 확장하는 일을 했습니다. 1994년에는 오슬로에 멋진 대회 회관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2003년에는 일단의 건축 팀이 집회 장소와 대회 장소로 사용할 수 있는 큰 왕국회관을 베르겐에 건축했습니다.

이러한 건축 공사를 하면서 서로 협력하고 단결하여 일한 경험은 여호와의 종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3년부터 왕국회관 건축 공사에 참여한 한 형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사 덕분에 회중들이 훨씬 더 긴밀한 연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형제 관계가 돈독해졌지요. 형제들 사이에 끈끈한 우정이 생겼고 서로 더 잘 협력해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델에서 많은 일을 수행하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완공되자, 베델 성원의 수를 늘리고 노르웨이의 전파 활동을 더 많이 지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례로, 노르웨이어로 번역되는 출판물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1996년에는 이정표가 될 만한 일이 있었는데 「신세계역 성경」이 노르웨이어로 발행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은 1991년에 이미 발행되었다.) 현재는 참고 서적인 「성경 통찰」을 포함하여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하는 거의 모든 출판물을 노르웨이어로 받아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부 시설에는 그동안 절실히 필요했던 스튜디오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부터 대회 드라마 녹음은 이전 지부 건물의 창고와 지하실 또는 왕국회관에서 했는데 그러한 장소는 녹음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자동차 소음으로 인해 녹음을 잠시 중단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시설에 생긴 스튜디오 덕분에 드라마와 비디오와 왕국 노래 성악 앨범을 제작하는 일을 더 신속히 진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부에서는 또한 노르웨이어 「파수대」와 「깨어라!」를 녹음된 형태로 제작하며, 성서 전체와 일부 서적도 CD나 www.pr418.com 웹사이트를 통해 들을 수 있도록 마련하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에서 봉사하다

인근에 사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회중 전도인들도 있지만 임명되지 않은 구역으로 가서 봉사한 전도인과 파이오니아들도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북쪽 멀리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롱위에아르뷔엔까지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일부 전도인들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여러 지역으로 이사하여 좋은 소식을 전파했고, 가능한 경우에는 회중을 세우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핀 옌센과 토르디스 옌센은 1950년에 결혼했는데, 당시 그들은 세계 최북단에 있는 도시 중 하나인 함메르페스트에 전도인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진 돈은 많지 않았지만 두 사람에게는 힘과 강한 의지가 있었고 자전거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보되에서 함메르페스트까지 90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를 여행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길을 나섰습니다. 절반쯤 왔을 때 친구 몇 명이 친절하게도 돈을 보태 주었고 그래서 나머지 거리는 배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함메르페스트에 도착한 핀과 토르디스는 분주하게 전파 활동을 하면서 핀이 주말마다 하는 공개 강연에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부지런한 노력을 축복해 주셨고, 얼마 안 있어 그곳에 작은 회중이 생겼습니다.

1957년, 트론헤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한 연사는 전도인들을 격려하면서 전파할 사람을 필요로 하는 구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고려해 보라고 권했습니다. 스타방에르에 살고 있던 비고 마르쿠센과 카렌 마르쿠센은 연설을 주의 깊이 듣고 있었습니다. 비고가 카렌을 팔꿈치로 툭 치자, 카렌은 남편이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카렌은 속으로 ‘우리가 스타방에르를 떠나는 건 시간문제겠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11세에서 14세 사이의 세 딸이 있었습니다. 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대회가 끝나고 이 가족은 그 연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도움이 더 필요한 곳으로 이주하여 봉사하는 데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이들은 지부 사무실에 편지를 보냈고 회중이 하나도 없는 지역인 브루문달로 가도록 제안하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1958년에 비고와 카렌은 자신들이 살던 좋은 집과 비고의 가구점을 팔고는 딸들과 함께 브루문달 인근에 있는 소박한 통나무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희생적인 태도를 축복해 주셨으며, 그들이 그곳에서 봉사하는 동안 많은 연구생이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딸들이 집을 떠나고 비고와 카렌이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받았을 즈음, 브루문달에 형성된 작은 회중에서는 약 40명의 전도인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독신 형제들도 회중이 없는 지역들로 이주하여 왕국 권익을 증진시켰습니다. 1992년에 파이오니아 형제 몇 명이 진리에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노르피오르 협만의 몰뢰위로 이주했습니다. 대부분 나이가 19세 안팎이었던 그들은 부지런히 전파 활동을 했으며 자신들이 세 들어 사는 집에서 즉시 집회를 사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관심을 보여 연구를 시작했는데 인심이 매우 후했던 그 아주머니는 이 젊은 형제들을 자식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한 장로와 그의 아내가 몰뢰위로 이사를 왔으며 이곳에는 회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 형제들은 임지에서 매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했고 많은 회중 임명을 수행했으며 활기에 찬 이 새로운 회중을 강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형제들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흥미진진한 모험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장성할 수 있게 해 준 독특한 기회였지요.” 이들을 비롯하여 모두가 열심히 봉사한 결과, 현재 노르피오르 회중에는 30명가량의 전도인이 있으며 이들은 총 50건에서 6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습니다.

다른 언어로도 증거하다

지난 20여 년간, 노르웨이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의 수가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이에 따라 회중들은 그들의 모국어나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증거하기 위해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986년에는 노르웨이 최초의 외국어 회중이 생겼습니다. 이 회중은 오슬로 라틴 회중이라고 불렸는데,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참석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일부 전도인들은 오슬로 지역의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조직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관심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에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특히 많았습니다. 가두 증거를 하다가 만난 사람도 있고 난민 수용 센터에서 만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전도인들은 영어를 사용할 만한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번호부에서 외국 이름을 찾아보는 방법도 활용했습니다. 많은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에는 오슬로 영어 회중이 생겼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노르웨이 전도인들이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들과 외국 출신의 전도인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 러시아어, 세르보·크로아트어, 스페인어, 아랍어, 영어, 중국어, 타갈로그어, 타밀어, 티그리냐어, 펀자브어, 페르시아어, 폴란드어 집단과 회중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화 밭에서도 훌륭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수천 명의 청각 장애인이 노르웨이 수화를 사용하는데, 조직에서는 그들을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1970년대에 형제들은 일부 집회와 크고 작은 대회 프로그램을 수화로 통역하기 시작했고, 그때 이후로 얼마의 전도인들이 수화를 배웠습니다. 몇몇 회중에 수화 집단이 생겼고, 2008년에는 오슬로에 첫 수화 회중이 생겼습니다. 현재 노르웨이에는 약 25명의 청각 장애인 전도인이 있으며, 이들은 노르웨이 수화로 번역된 DVD 출판물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병원 교섭 위원회

여호와의 증인 환자들은 수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신들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필요한 치료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한 증인들을 지원하고 대체 치료법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조직에서는 1990년에 노르웨이에 병원 교섭 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1990년부터 2010년 사이에 오슬로 병원 교섭 위원회의 형제들은 그 지역 병원들의 의료진과 약 70차례 모임을 가졌으며, 환자에게 도움을 베푼 경우도 500건이 넘습니다. 형제들이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 환자들은 협조적인 의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병원 교섭 위원회가 제공한 의료 정보 덕분에 수혈 대체 치료법을 사용하는 의사의 수도 늘어났습니다. 환자 방문단 역시 귀중한 지원을 베풀어 환자와 가족들에게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헬렌이라는 젊은 파이오니아 자매의 경험은 병원 교섭 위원회 마련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잘 보여 줍니다. 2007년에 헬렌은 몸이 몹시 아파서 인근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혈액 수치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의료진은 수혈을 받으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그들은 헬렌이 수혈을 받지 않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한 병원 교섭 위원의 도움으로 헬렌은 시설이 좋은 더 큰 병원으로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헬렌과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해 보니 병원 교섭 위원회에 속한 형제 한 명이 이미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심시켜 주었고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병원에서는 헬렌에게 적혈구 생성을 촉진하는 치료법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불과 며칠 만에 혈액 수치가 호전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헬렌은 위험한 시기를 넘겼습니다. 헬렌은 이제 전처럼 건강을 되찾았으며 병원 측에서 자신의 굳은 신념을 존중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헬렌과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조직이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또 형제 자매들이 얼마나 많은 지원을 베풀고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언론의 악의적인 공격에 대처하다

노르웨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특히 1989년에서 1992년 사이에 조직적인 비방 운동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신문, 잡지, TV, 라디오에서는 증인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도하는 내용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반대를 받은 주된 이유 한 가지는 제명된 사람을 대하는 일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에 고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5:9-13; 요한 둘째 10) 부정적인 보도로 인해 증인들은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그리고 전파 활동을 하면서 힘든 상황을 겪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놀라운 일로 여기지는 않지만,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마태 5:11, 12.

한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힘든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지요. 내 믿음을 뒷받침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검토해 보게 되었거든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공급하는 훌륭한 영적 양식에 대해 묵상하니 믿음이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로, 믿음의 시험을 견뎌 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그 시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에 형제 자매들이 용기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가두 증거를 포함하여 야외 봉사에 더 전념하는 것이 최상의 대응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깨달았지요. 기쁘게도 많은 증인들이 반대에 잘 대처했습니다.”

이전에 제명되었던 프레드라는 사람의 생각은 언론이 부추겼던 비성경적인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제명 처분에 관한 성서의 지침에 대해 그가 어떻게 느꼈는지 들어 보십시오. “나는 스무 살 때 제명되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내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지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제명 처분을 받은 것은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마치 여호와께서 나에게 ‘아들아, 이제 정신 차려야지!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네가 해를 입게 된단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꼭 필요했던 그 교훈 덕분에 죄짓는 행로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일에만 몰두하는 대신 진리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영적으로 장성해 가는 몇몇 친구들의 모습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기쁘게도 프레드는 회개하고 생활 방식을 바꾸었으며 결국 복귀되었습니다. 현재 그는 장로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맞을 준비를 함’

물질주의가 널리 퍼져 있고 구역 내에서 사람들의 무관심한 태도도 심해져 가고 있지만, 여호와의 종들은 매일의 성서 읽기나 집회 참석과 같은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영적 활동을 계속 첫째 자리에 둡니다. 점점 더 많은 수의 전도인들이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봉사의 직무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는 많은 전도인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나 있습니다. “내일 여호와의 날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실제로 그날이 올 때에도 나는 준비가 안 돼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죠. 그날이 언젠가는 올 테니까요.” 이러한 태도는 2001년부터 꾸준하게 성장이 이루어지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회중을 고무시키고 많은 형제에게 훌륭한 신권 교육을 베풀어 온 영적 마련으로 봉사 훈련 학교(지금은 독신 형제 성서 학교라고 불림)가 있습니다. 한 학생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8주간 성서를 아주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진리를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훨씬 더 생생해지고 실제적으로 다가왔지요!” 지난 20년간 노르웨이에서 60명이 넘는 형제들이 이 학교를 졸업하여 회중이 더 튼튼해지고 더 많은 활동을 수행하게 하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여호와의 증인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

지난 여러 해 동안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 가운데는 부모에게 성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노르웨이의 전도인들 중에는 3대, 4대, 5대째 증인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반 고소덴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인데, 그는 시엔 최초의 성경 연구생이었던 잉에브레트 안데르센의 증손자입니다. 이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첫째 자리에 두는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얼마나 감사할 만한 일인지 종종 생각해 보곤 합니다. 개인 연구, 정기적인 성서 읽기,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좋은 친구들 덕분에 진리의 편에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지요.” 이반의 아들들인 안레와 리카르드도 자신들이 받은 영적 유산을 가장 귀중한 소유물 중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벤테 부 자매는 파이오니아들이 사용하던 배인 루트호에서 봉사한 망누스 란달의 손녀입니다. 현재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 덕분에 많은 문제를 피할 수 있었지요. 나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 내 인생을 바치고 싶어요.”

청소년 시절에 영적으로 약한 시기를 보내다가 성인이 된 후에 열심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 베르겐 출신인 토마스 페우스캉에르와 세리네 페우스캉에르 부부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어린 시절 그리스도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면서도 영적인 발전은 더뎠습니다. 여호와를 숭배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견해는 어떻게 해서 바뀌게 되었습니까?

토마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한 젊은 형제가 2002년에 우리 회중으로 왔습니다. 그는 내가 봉사에 참여하고 영적인 목표들을 추구하도록 도와주었지요.”

토마스는 25세에 세리네와 결혼했고, 2007년에는 핀마르크 주의 보트스피오르로 이사했습니다. 한 파이오니아 부부를 도와 그 구역에 있는 관심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스와 세리네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009년에는 셸레피오르라는 어촌의 임명되지 않은 구역에서 3개월간 봉사했는데, 같이 간 전도인들과 함께 총 30건 이상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토마스와 세리네는 관심을 나타낸 사람들을 계속 돕기 위해 셸레피오르 인근으로 이주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관심자들을 돕기 위해 편도 3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를 정기적으로 운전하여 다니고 있습니다. 정말 바쁜 생활이긴 하지만 세리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나는 단순하면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문제도 별로 없지요.”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봄

성경 연구생인 크누 P. 함메르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노르웨이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한 이래로 이곳 사람들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초창기에 이 종교 국가에서는 교회들이 주도권을 쥐고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서 진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여호와의 종들은 확연히 구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진실한 마음을 가진 많은 사람이 기꺼이 성서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고 곧 참숭배의 편에 섰습니다.

지금은 노르웨이의 종교적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참종교가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선적인 태도로 여겨집니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성서 지식을 얻고 하느님과 성서에 대한 믿음을 세워 나가려면 시간과 노력이 듭니다. 그리고 성서의 표준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데는 종종 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계속 이끌고 계십니다. 그들이 외딴 어촌에 살든지 복잡한 도시의 현대적인 고층 아파트에 살든지 말입니다.—요한 6:44.

전 세계 다른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형제 자매들도 주권자인 주 여호와께 “두려움 없이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특권”을 소중히 여깁니다. (누가 1:75) 의로운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이 광활한 구역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들은 창조주의 목적대로 온 땅이 아름답고 평온한 낙원이 되어 경외심을 불러일으킬 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전 세계의 충성스러운 형제 자매들과 더불어, 노르웨이에 있는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하느님의 왕국이 이 아름다운 지구 곳곳에 그분의 뜻을 성취시킬 날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습니다.—다니엘 2:44; 마태 6:10.

[106면 삽입]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에벤이 그냥 맨발로 집회에 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111면 삽입]

“잠자리에 들 때만 해도 오순절교인이었는데 아침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어 있었지요”

[122면 삽입]

“당신들의 믿음은 도저히 빼앗을 수 없군”

[157면 삽입]

‘아들아, 이제 정신 차려야지!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네가 해를 입게 된단다’

[90면 네모와 삽화]

노르웨이 개요

국토

노르웨이는 멋진 협만과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산과 수많은 섬으로 잘 알려져 있다. 노르웨이 본토와 북극 사이의 중간 지점에 있는 스발바르 제도를 포함하면, 국토의 면적은 일본보다 약간 더 크다. 노르웨이 대부분의 지역은 따뜻한 대서양 해류와 온풍의 영향으로 비슷한 위도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기후가 더 온화하다. 하지만 날씨가 매우 추운 경우도 있는데 북극에 가까운 북쪽 지방이 특히 그러하다.

주민

500만 명의 인구 중 대부분이 노르웨이인이며 약 10퍼센트는 이민자들이다. 사미족(이전에는 라프족으로 불림) 사람들 다수는 지금도 고기잡이, 수렵, 덫을 이용한 사냥, 순록 사육 등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언어

공용어인 노르웨이어에는 두 가지 형태의 문어인 보크몰(‘책 언어’라는 뜻)과 뉘노르스크(‘신노르웨이어’라는 뜻)가 있다. 국민 대다수는 덴마크어와 비슷한 점이 많은 보크몰을 사용한다.

직업

원유와 가스 생산 및 제조업이 주 수입원이며 주요 수출품은 생선이다. 국토의 약 3퍼센트만이 경작지로 사용된다.

식품

노르웨이인은 생선, 고기, 감자, 빵, 유제품을 주로 먹는다. 포리콜(양고기와 양배추를 넣은 스튜)이라는 전통 음식이 잘 알려져 있다. 최근 여러 해 동안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오면서 음식이 더욱 다양해졌다.

[95, 96면 네모와 삽화]

그는 여호와께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테오도르 시몬센

출생 1864년

성경 연구생이 된 해 1905년

소개 자유 선교단 교회의 목회자였다가 나중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했다.

■ 테오도르는 우리 출판물을 통해 지옥불 교리가 성서와 모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유 선교단 교회에서 설교할 때 이 거짓 가르침을 논박하기 시작하자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종이 쪽지 하나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이제 우리 교회에서 연설하지 마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1905년에 한 그 연설이 테오도르가 자유 선교단 교회에서 한 마지막 연설이었으며, 같은 해에 그는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는 인식 깊은 태도로 경청하는 많은 성경 연구생들에게 수없이 많은 연설을 했습니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의 집에 페인트칠을 해 주는 일로 가족을 부양했는데 그러면서도 주말에는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성서 지식이 아주 많은 데다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으로 말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노래 실력이 좋았던 그는 연설을 시작하고 마칠 때 치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1919년에는 가정 내의 상황이 달라져 그가 여행하는 감독자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테오도르는 1935년까지 여행하는 봉사를 하면서 노르웨이와 덴마크와 스웨덴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했습니다.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는데, 회중과 격지 집단들을 격려하는 데 더해 성경 연구생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연설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12개월 동안 남쪽의 크리스티안산에서 북쪽의 트롬쇠까지 여행하면서 190곳을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당시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대부분의 장소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만 머물렀고, 그런 뒤에 가능한 교통수단은 무엇이든 이용하여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그가 방문한 곳들에는 대부분 성경 연구생이 하나도 없었지만, 공개 강연을 할 때면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예를 들어 1922년에 보되라는 지역을 방문했을 때 파이오니아인 안나 안데르센도 마침 그곳에 와 있었는데, 두 사람은 전파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을 공개 강연에 초대했습니다. 그의 연설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에 요한 베른트센과 올레아 베른트센이 특히 관심을 보였습니다. 연설이 끝난 뒤 이 두 사람은 테오도르와 안나를 집에 초대하여 성서에 관해 궁금한 점들을 물어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 부부는 보되 최초의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테오도르는 녹음하는 일에도 참여했는데, 1930년대에 제작된 축음기 음반 강연의 대부분은 그가 녹음한 것입니다. 그는 1955년에 지상 행로를 마칠 때까지 하느님을 충실히 섬겼습니다.

[102면 네모와 삽화]

‘하느님과 함께 걸은’ 사람

에노크 외만

출생 1880년

침례 1911년

소개 1921년에서 1945년까지 지부 감독자로 일했다.

■ 에노크는 스웨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 “참하느님과 함께 계속 걸었”던 사람인 에녹에 대한 성서 이야기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창세 5:22) 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그 성서 인물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31세 때 「성경 연구」 제1권을 읽고 나서야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침례를 받고 성경 연구생이 되었으며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스웨덴 지부 사무실에서 일했습니다.

스웨덴에서 일하던 에노크는 1917년에 노르웨이로 보내져 그곳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으며, 1921년부터는 노르웨이의 활동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느 건물의 방 한 칸을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건물에는 마리아 드레위에르라는 자매의 집과 그 자매가 운영하는 발 관리 전문점도 있었습니다. 1922년에 에노크와 마리아가 결혼한 뒤에는 마리아의 집이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었습니다. 1944년에 마리아가 사망할 때까지 그들은 베델에서 함께 일했습니다. 1953년에 에노크는 재혼했고 다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에노크는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늘 하늘 희망에 초점을 맞추면서 충실히 ‘하느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110면 네모와 삽화]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분이었지요”

빌헬름 우레

출생 1901년

침례 1949년

소개 몸을 쇠약해지게 만드는 근육 질환이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전파했다.

■ 빌헬름은 근육 질환 때문에 다리가 마비되었고 말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1930년대 중반에 좋은 소식을 듣자마자 자신이 배운 놀라운 진리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모터가 달린 세 바퀴 자전거를 이용하여 전파 활동에 참여했고 베스테롤렌에 있는 소르틀란 항구에 정기적으로 가서 축음기로 성서 연설을 틀어 주고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빌헬름은 장애가 있고 고립되어 있어서 1949년이 되어서야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심 있는 전파자였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여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를 통해 진리를 알게 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빌헬름은 노년에 트롬쇠에 있는 요양원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전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 봉사를 하면서 계속 증거했습니다. 성품이 좋고 활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요양원 직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은 그를 통해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요양원 관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분의 방에 들어가면 항상 기분이 좋아졌어요. 믿음 때문에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는 분이었지요.”

[113면 네모와 삽화]

그는 약속을 지켰다

요한네스 코르스타

출생 1903년

침례 1931년

소개 파이오니아들이 사용하던 배에서 8년간 봉사했다.

■ 1929년에 요한네스는 결핵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성서를 읽기 시작한 그는 하느님께 약속을 했는데, 병이 다 나으면 그분을 섬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퇴원하기 얼마 전에 그는 성경 연구생이 발행한 책 몇 권을 매우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나중에는 책을 몇 권 더 구해서 네다섯 번씩 읽었고, 새로 알게 된 진리를 곧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습니다. 병이 다 낫자마자 그는 베르겐에 있는 링에레이데 형제를 찾아갔습니다. 링에레이데 형제는 그에게 파이오니아 봉사를 권했습니다. 봉사를 시작한 지 불과 얼마 안 되었는데도 요한네스는 주저하지 않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신청했습니다.

요한네스는 파이오니아들이 타고 다니던 에스테르호에서 1931년부터 1938년까지 봉사했고 그다음 1년가량은 루트호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다니며 북쪽의 트롬쇠까지 항해했습니다. 1939년에는 노르웨이 동부의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었고, 그 일을 하면서 한동안은 시간제로 베델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그는 시리와 결혼하여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했습니다. 요한네스는 1995년에 프레드릭스타드에서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132면 네모와 삽화]

평지에서 전파함

란디 후스뷔

출생 1922년

침례 1946년

소개 1946년부터 전 시간 봉사를 해 왔다.

■ 란디의 부모는 1938년에 침례를 받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으며, 후에 란디도 여호와를 섬기는 길을 택했습니다. 1946년에 란디는 베델에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아들였으며 그곳에서 셸 후스뷔라는 젊은 형제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교제를 하게 되었고 결혼하여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2010년에 셸이 사망할 때까지 두 사람은 다양한 형태의 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영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란디는 다리에 이상이 생겨 계단을 오르거나 가파른 곳을 걷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평지에서는 그런대로 잘 걸어 다닐 수 있기 때문에 트론헤임의 거리나 상점에서 자주 봉사하곤 합니다. 그는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적어도 여덟 가지 언어로 출판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또한 란디는 많은 사람에게 최근 호 잡지를 정기적으로 전해 주는데, 회중의 친구들이 란디를 그 사람들에게 태워다 줍니다.

이전만큼 많은 일을 할 힘은 없지만 란디는 영혼을 다한 봉사를 드리면서 계속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그분이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히브리 6:10.

[149, 150면 네모와 삽화]

그는 하느님의 말씀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했다

빅토르 우글레바셴

출생 1953년

침례 1981년

소개 범죄자였으며 악귀의 괴롭힘과 마약 남용에서 벗어났다.

■ 빅토르는 청소년 시절에 대마초를 비롯하여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범죄자의 길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9년에 자신의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혹시 하느님의 말씀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종교를 조사해 보아도 실망과 좌절감만 생길 뿐이었습니다.

결국 매우 낙심하게 된 빅토르는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베르겐에 있는 사촌에게서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빅토르는 베르겐으로 가서 연구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처음에는 증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항상 환경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땅을 파멸시키는 자들을 파멸”시키시고 우리가 사는 땅을 낙원으로 바꾸실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계시 11:18.

빅토르는 즉시 사촌과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증인들이 왕국회관과 집에서 친절과 후대를 나타내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해 그는 생활을 변화시키고 마약을 끊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꾸준히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린 결과, 빅토르는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했습니다.—누가 11:9, 13; 히브리 4:12.

침례를 받을 수 있게 되기까지 빅토르에게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이 없었다면, 악귀들의 괴롭힘에서 벗어나고 두 차례나 재발한 마약 중독을 이겨 내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한 장로 형제는 그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식에게 자비를 보이듯이 여호와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보이”신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는데, 그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시 103:13) 빅토르는 영적으로 계속 발전하여 1981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침례받은 뒤 이전에 저지른 범죄 때문에 수감 생활을 해야 했지만, 출소하고 나서 곧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돕는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특히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그와 성서를 연구한 수감자 두 명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빅토르는 믿음직한 가장이자 장로로서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 왔습니다. 또한 아내인 토네와 아들과 함께 파이오니아로 계속 봉사하고 있습니다. 빅토르는 이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변화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는 봉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귀중한 영적 보물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신 여호와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152면 네모와 삽화]

그는 나은 일을 하기 원했다

톰 프리스볼

출생 1962년

침례 1983년

소개 축구 선수였으며 여호와를 섬기기 원했다.

■ 톰은 20세 때 노르웨이 최고의 팀에서 장래가 유망한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하루는 한 젊은 파이오니아 형제가 톰의 어머니를 만나러 왔다가 톰에게 성서 연구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연구는 하겠지만 증인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톰은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을 따뜻하게 환영해 주는 사람들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집회 중에 모두가 성경을 직접 찾아보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톰은 ‘이 사람들이 이렇게 훌륭한 건 다 성서 때문일 거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진리를 발견했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고 여호와를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소속 팀에서 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데 그를 순순히 놓아주도록 어떻게 설득한단 말입니까? 놀랍게도, 톰이 축구보다 더 나은 일에 인생을 바치고 싶다고 팀 경영진에 이야기하자 그들은 계약을 해지해 주었습니다.

톰은 1983년에 침례를 받고 1985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1987년에는 도움이 필요한 구역에서 봉사하기 위해 빅토르 우글레바셴과 함께 함메르페스트로 이사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순회 감독자로 일했으며 지금은 아내인 크리스티나와 함께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162, 163면 도표와 삽화]

연대표—노르웨이

1890

1892 크누 페데르손 함메르가 노르웨이에서 전파 활동을 시작하다.

1900

1900 최초로 회중이 생기다.

1904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 사무실이 개설되다.

1905 크리스티아니아에서 최초로 대회가 열리다.

1909, 1911 C. T. 러셀이 노르웨이를 방문하다.

1910

1914 최초로 여행하는 감독자가 임명되다.

1914-1915 “창조 사진극”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들다.

1920

1920-1925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제의 강연이 전국에서 제공되다.

1925 「황금시대」(「깨어라!」)가 노르웨이어로 발행되다.

1928-1940 배를 사용하여 해안 지역에서 전파하다.

1930

1940

1940-1945 전쟁 기간 중에 박해를 받으면서도 증거 활동을 계속하다.

1945 「파수대」가 노르웨이어로 발행되다.

1948 길르앗 학교 출신의 선교인들이 최초로 도착하다.

1950

1950 출판물을 사용하여 증거할 권리를 대법원에서 인정해 주다.

1960

1965 오슬로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다.

1970

1980

1984 새로운 지부를 봉헌하다.

1990

1990 병원 교섭 위원회가 설립되다.

1994 오슬로에서 대회 회관을 봉헌하다.

1996 완역 「신세계역」이 노르웨이어로 발행되다.

2000

2010

2011 정규 및 보조 파이오니아 수, 전도인 수, 기념식 참석자 수에서 신기록을 달성하다.

[159면 그래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10,000

8,000

6,000

4,000

2,000

1920 1935 1950 1965 1980 1995 2010

[91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스웨덴

스톡홀름

외레브로

보트니아 만

핀란드

헬싱키

핀란드 만

발트 해

덴마크

코펜하겐

노르웨이

오슬로

셸레피오르

보트스피오르

바르되

시르케네스

카라쇼크

함메르페스트

알타

핀마르크스비다

케우토세이노

트롬쇠

하르스타드

나르비크

소르틀란

헨네스

스볼베르

보되

뢰르비크

남소스

스타인셰르

트론헤임

크리스티안순

몰뢰위

플로뢰

베르겐

헤우게순

스타방에르

에게르순

크리스티안산

아레날

시엔

콩스베르그

드람멘

회네포스

예비크

릴레함메르

브루문달

하마르

콩스빙에르

아심

모스

할렌

프레드릭스타드

오슬로피오르 협만

북해

노르웨이 해

아뇌위아 섬

블레이크

스발바르 제도

롱위에아르뷔엔

핀마르크

트롬스

텔레마르크

베스트폴

[88면 삽화]

크누 페데르손 함메르

[88, 89면 삽화]

레이네, 노르웨이 북부

[92면 삽화]

잉에브레트 안데르센과 베르테 안데르센을 비롯한 시엔 회중 성원들, 1911년

[93면 삽화]

빅토르 펠드트

[94면 삽화]

할례르드 홀름(1), 테오도르 시몬센(2), 로테 홀름(3)

[98면 삽화]

초창기 파이오니아들: (1) 헬가 헤스, (2) 안레아스 외이세트, (3) 칼 군베르그, (4) 훌다 안데르센, (5) 안나 안데르센

[100면 삽화]

「만민의 설교단」

[104면 삽화]

노르웨이어 「황금시대」

[106면 삽화]

에벤 군데르스루드

[107면 삽화]

시엔 회중 성원들은 트럭을 타고 인근 지역으로 자주 봉사를 다녔습니다

[108면 삽화]

토르셸 링에레이데

[109면 삽화]

올라프 스케우

[114면 삽화]

칼 군베르그가 “엘리후”호의 선장이었습니다

[115면 삽화]

요한네스 코르스타가 “에스테르”호의 책임자였습니다

[116면 삽화]

안레아스 호페와 망누스 란달은 “루트”호를 타고 다니며 봉사했습니다

[117면 삽화]

노르웨이 북부의 오로라

[118면 삽화]

솔베이 뢰보스

[119면 삽화]

안레아스 크빙에와 시리 크빙에

[124면 삽화]

시(Ski) 인근의 숲에서 비밀리에 열린 대회

[127면 삽화]

마빈 앤더슨과 아내인 카렌 앤더슨

[128면 삽화]

페달을 밟아 가동하는 인쇄기

[129면 삽화]

1946년에 베르겐에서 열린 대회

[130면 삽화]

스반힐 네롤, 1961년

[133면 삽화]

아르눌프의 배는 봉사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135면 삽화]

노르웨이 최초의 길르앗 졸업생인 군나르 마르쿠센(1)과 한스 페테르 헴스타드(2)

[138면 삽화]

“진리의 말씀” 국제 대회를 위해 세운 천막촌

[139면 삽화]

페울 브루운

[142면 삽화]

하르트비 민나와 다른 전도인들은 사미족에게 전파할 때 스노모빌을 사용했습니다

[144면 삽화]

1981년에 시작된 지부 건축

[145면 삽화]

현재의 지부 사무실

[147면 삽화]

오슬로 대회 회관

[160면 삽화]

가정에서의 성서 교육 덕분에 여러 세대가 여호와의 충실한 종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