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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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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속합니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꼽히기도 합니다. ‘천 개의 언덕이 있는 땅’으로 알려진 이곳에는 산과 숲과 호수와 폭포들이 있으며 셀 수 없이 다양해 보이는 동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콩고 민주 공화국 *과 북쪽으로는 우간다에 접하고 있는 산간 지역에는 장엄한 비룽가 산맥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이 산맥의 최고봉인 카리심비 산은 높이가 4480미터가량인 휴화산인데, 꼭대기가 눈과 우박으로 하얗게 덮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빽빽한 대나무 숲과 강우림이 산비탈을 따라 펼쳐져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인 황금원숭이가 나뭇가지와 덩굴에 매달려 가볍게 옮겨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울창한 지대에는 르완다 최고의 보물 중 하나인 마운틴고릴라도 살고 있습니다.

이국적인 식물들과 울창하게 우거진 초목들은 키부 호 연안과 니웅웨 삼림 지대까지 이어져 내려옵니다. 이 삼림 지대에는 침팬지와 흑백콜로부스 원숭이를 비롯하여 70종이 넘는 포유류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270종의 나무와 거의 300종에 달하는 새들도 있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비와 난초들도 이 보호 구역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 줍니다.

이 니웅웨 삼림 지대 깊숙한 곳에서 작은 물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조금씩 흐르기 시작합니다. 이 물줄기는 서서히 흘러가면서 다른 물줄기와 강을 만나 빅토리아 호에 다다릅니다. 이제 아래쪽으로 빠르게 흐르면서 힘과 속도가 붙은 이 물줄기는 북쪽으로 긴 여행을 계속합니다. 에티오피아를 지나 수단을 거쳐 드디어 이집트에 도착한 물은 지중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중앙아프리카의 울창한 언덕들에서 작은 물줄기로 시작하여 거의 6825킬로미터를 여행하는 이 강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긴 강 중 하나로 꼽히는 나일 강입니다.

참혹했던 시기

슬프게도 이 작은 나라 르완다에서 잔인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현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학살에 속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폭력이 자행되는 충격적인 장면들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은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저지르는 잔악한 행위에 몸서리를 쳤습니다.—전도 8:9.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은 그 끔찍했던 때와 그 이후의 힘든 시기를 어떻게 견뎌 냈습니까? 니웅웨 삼림 지대에서 시작된 미미해 보이는 물줄기가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고, 뜨겁게 내리쬐는 아프리카의 햇볕을 살아남아 장대한 강을 이루듯이, 르완다의 여호와의 백성은 끈기 있게 하느님을 섬겨 왔습니다. 극심한 박해와 많은 어려움을 이겨 낸 그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에게 힘과 격려를 줍니다. 당신은 르완다 형제들이 나타낸 사랑과 믿음과 충성에 대한 기록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당신이 여호와와 맺고 있는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고 그리스도인 형제 관계에 대해 더 깊은 인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빛이 비치기 시작하다

르완다에 좋은 소식이 전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1971 여호와의 증인 연감」(영문)에 최초로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올해[1970년] 3월에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르완다로 가서 수도인 키갈리에서 전파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마음씨가 따뜻하고 왕국 소식에도 좋은 반응을 보였으며, 관심자 한 명은 벌써 봉사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파이오니아들은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미 열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기 위해 키냐르완다어를 아주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이 보고에 나오는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는 탄자니아 출신의 오덴 므와이소바와 그의 아내 에네아였습니다. 이 부부는 현지어인 키냐르완다어를 몰랐기 때문에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부터 방문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콩고나 탄자니아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1971년 2월에는 네 명의 전도인이 봉사 보고를 냈습니다. 하지만 키냐르완다어로 된 출판물은 하나도 없었으며 언어 장벽으로 인해 성장이 더뎠습니다.

케냐에서 순회 감독자로 일하던 용감한 형제인 스탠리 마쿰바가 1974년에 처음으로 르완다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간다와 르완다 사이의 국경 초소에서는 르완다 루헹게리까지 가는 버스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트럭을 타고 서서 가야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고 있어서 발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요. 아내는 운전석 옆 자리에 앉았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내 얼굴과 머리카락이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아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여행하고 나니 허리가 너무 아파 그다음 주 내내 앉아서 연설을 해야 했지요. 그리고 그 주 주말에 소규모로 마련된 순회 대회에서도 앉아서 연설을 했습니다. 형제들을 방문할 때는 내가 언제 도착할지 알려 줄 수가 없었습니다. 뭘 타고 가게 될지 알 수가 없었거든요!”

고국으로 돌아오다

한편 르완다 출신인 가스파르드 르와카부부 형제는 콩고에 있는 구리 광산에서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974년에 나는 콜웨지에서 열린 왕국 전도 학교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강사 중 하나였던 마이클 포티지 형제가 킨샤사 지부 사무실에서 사람을 물색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르완다 출신 장로 형제 중에 기꺼이 본국으로 돌아가 전파 활동을 도울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는 아내 멜라니와 상의해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일하던 광산 회사의 사장은 바로 얼마 전에 내게 독일로 연수를 보내 주겠다는 제안을 했었지요. 나는 일도 잘했고 월급도 계속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부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포티지 형제에게 지부 사무실의 제안을 받아들여 르완다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지요. 사장은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냥 여기서 여호와의 증인 활동을 하면 안 되나? 꼭 르완다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고 묻더군요. 심지어 어떤 형제들도 걱정하는 마음에서 우리를 만류했습니다. ‘형제는 애가 넷이잖아요. 누가복음 14:28-30을 읽은 다음, 앉아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렇지만 우리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장은 르완다로 가는 비행기값을 다 대 주었습니다. 우리는 1975년 5월에 키갈리에 도착하여 집을 한 채 임대했습니다. 흙바닥에 흙벽돌로 된 집이었지요. 광산 회사에 다닐 때 살던 집과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맡은 일을 잘해 나가야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스와힐리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파이오니아들이 그 언어를 가르치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르와카부부 형제 가족이 오면서 그러한 생각은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가족은 키냐르완다어 성서를 사용하여 왕국 진리를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32면으로 된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를 키냐르완다어로 번역하는 일도 했습니다. 1976년에 이 소책자가 발행되자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버스에서나 거리에서나 사람들은 이 소책자를 읽었습니다. 이 책자에 사용된 여호와라는 이름 덕분에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르완다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당시에는 르완다에 전도인이 열한 명 정도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르완다인이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배운 최초의 르완다인 중에는 쥐스탱 르와가토레가 있습니다. 그는 탄자니아 출신의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들이 프랑스어나 키냐르완다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와힐리어로 연구했습니다. 활달하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던 르와가토레는 1976년에 침례를 받았고 사베에서 살았습니다. 사베는 1900년에 르완다 국왕이 가톨릭 선교사들에게 처음으로 선교단 설립 허가를 내준 곳이었습니다. 쥐스탱의 말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성서에서 실제로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교직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적대시했으며 신도들에게 증인들의 말을 듣거나 출판물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인 최초의 르완다인 가운데는 끈기 있는 사람이었던 페르디낭 무가루라 형제도 있습니다. 콩고 동부에 살던 그는 1969년에 스와힐리어로 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한 부 구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증인이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고, 매주 금요일이면 다른 두 사람과 함께 80킬로미터를 걸어가서 그곳에서 집회에 참석하고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월요일에는 걸어서 다시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페르디낭은 1975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그의 성서 연구생 중 한 명도 같은 날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1977년에 르완다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그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바로 그 전해에 르와카부부 형제 집 거실에서 순회 대회가 열렸는데 34명이 참석했고 세 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선교인들이 입국을 거부당하다

전 세계 밭의 필요를 늘 기민하게 살피는 통치체는 르완다에 이미 선교인을 임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1969년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47기 졸업생 네 명이 르완다에서 일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니컬러스 포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1월 말에 노어 형제가 학생들에게 임명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어 형제는 폴 에번스와 메럴린 에번스 부부에게 르완다로 임명되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우리 부부에게 ‘두 분도 같이 가는 겁니다!’ 하고 말하더군요. 마음이 들뜬 우리는 모임이 끝나자마자 길르앗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큰 지도책을 꺼내 르완다를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형제들은 우리가 르완다 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편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우리는 폴과 메럴린과 함께 콩고로 가라는 새로운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1976년에 길르앗 제60기 학급을 졸업한 두 쌍의 부부가 르완다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네 명의 선교인은 입국 허가를 받아 르완다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집을 한 채 임대했습니다. 그들은 용기 있게 전파 활동을 하면서 키냐르완다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3개월 뒤에 비자가 만료되었는데 이민국에서는 비자를 갱신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인들은 콩고 동부에 있는 부카부에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탄자니아와 콩고 출신의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르완다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르완다 형제들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여 전국 각지로 전파 활동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1978년에는 「진리」 책과 두 개의 전도지가 키냐르완다어로 번역되었습니다. 또한 「파수대」가 월간지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출판물들은 왕국 전파 활동을 진척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교인인 만프레트 토나크는 초창기 시절에 활동했던 르완다인 파이오니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많은 시간을 봉사에 바쳤지요. 새로운 사람들도 그들의 좋은 본을 따랐습니다.”

가스파르드 니용기라는 당시에 좋은 소식을 어떻게 전했는지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1978년에 침례를 받았는데, 당시 교직자들은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꼈지요. 대회 때는 수백 명이 참석했습니다. 봉사하러 나가면 우리는 마치 메뚜기 떼 같았어요! 많은 경우, 20명쯤 되는 전도인들이 키갈리 시내에서 출발하여 카놈베까지 약 9킬로미터를 걸어가면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잠깐 쉬면서 점심을 먹은 다음, 7킬로미터를 더 걸어 마사카까지 가면서 봉사를 계속하다가 저녁에 버스를 타고 키갈리로 돌아오곤 했지요. 다른 지역의 전도인들도 그와 비슷한 방법으로 봉사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봉사하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수천 명이나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를 비난하는 말들이 쏟아졌고 그로 인해 당국은 우리에게 법적 인가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르완다의 형제들은 다른 나라 형제들과 교제하는 기쁨을 맛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78년 12월에 어린이들을 포함한 37명가량이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승리의 믿음” 국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르완다에서 출발하여 우간다를 거쳐 총 1200킬로미터 이상을 여행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여행이었습니다. 교통수단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고 고장이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게다가 우간다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형제들이 마침내 케냐 국경에 도착했을 때, 우간다 국경을 지키는 관리들이 그들을 스파이로 몰아 체포했으며 우간다 캄팔라에 있는 군사령부로 데려갔습니다. 당시 우간다의 대통령이었던 이디 아민이 직접 형제들을 심문했습니다. 그는 대답을 듣고 만족스러워하면서 형제들을 풀어 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나이로비에 도착한 형제들은 대회 첫날 회기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형제들이 평화롭게 연합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기쁨에 넘쳤습니다.

법적 인가를 얻기 위한 노력

증인들이 가르치는 성서 진리와 높은 도덕 표준을 모든 사람이 달가워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교직자들은 매우 많은 사람이 진리에 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보고 위협을 느꼈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가톨릭교, 프로테스탄트교, 재림교를 열심히 믿던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다니던 교회에 탈퇴서를 냈습니다. 한 형제는 전파 활동이 마치 불처럼 기성 종교들을 맹렬하게 태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요. 키갈리 회중의 집회 참석자 수는 얼마 안 있어 200명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수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교직자들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수가 늘어나자 일부 교직자들은 우리가 국가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르완다 가톨릭교회의 대주교인 뱅상 은셍기윰바가 집권당 중앙 위원회 위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성장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법적 인가를 받을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선교인들을 데려오고 왕국회관을 건축하고 큰 대회들을 열 수가 있었지요. 케냐 지부에서는 벨기에 출신의 에르네스트 호이세가 정부 장관들을 만나 법적 인가를 요청해 보도록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가를 얻어 내지는 못했어요. 그 후 1982년에 케냐 지부 사무실에서는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앞으로 법적 인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 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나와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그 편지에 서명했지요. 하지만 아무런 답장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반대의 물결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조용하고 점잖은 성품의 앙투안 루그위자 형제는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내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방송에서 대통령은 “르완다인의 신앙”을 모욕하는 사람은 결코 관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을 염두에 둔 선언이었습니다. 그 방송이 있고 얼마 안 있어 집회가 금지되었고, 증인들을 곧 체포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했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국가 보안국에 두 차례 소환되어 심문을 당했습니다.

1982년 11월, 기세니, 부타레, 키갈리에서 열리는 순회 대회들을 감독하기 위해 키알라 므왕고가 아내인 일레인과 함께 나이로비에서 르완다로 왔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가 이 대회들에서 사회자로 일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키갈리 대회가 막 끝났을 때 그는 국가 보안국에 세 번째로 소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법적 인가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했던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도 나흘이 안 되어 체포되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재판도 거치지 않고 변호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체포되었습니다. 왕국회관은 폐쇄되었고 회관 출입구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굳게 잠겼습니다. 법무부 장관은 각 행정 구역에 편지를 보내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시켰습니다.

법적 인가를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한 세 형제에 대한 재판은 1983년 10월이 되어서야 열렸습니다. 법원에서는 그들에게 사취와 사기라는 전혀 근거 없는 혐의를 씌웠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인은 한 명도 출두하지 않았으며 증거 자료도 전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형제들은 2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살인범들이 특별 사면으로 풀려날 때에도 이 충실한 형제들은 아무런 특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기세니에서는 다섯 명의 증인들이 합법적인 법원 명령이나 선고도 없이 거의 2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의 생활

감옥에서의 생활은 참담했습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제공되었는데 카사바와 콩이 전부였습니다. 고기는 겨우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왔습니다. 침구에는 빈대가 기어 다녔고, 수감자가 넘쳐 나서 그마저도 없이 맨바닥에서 자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씻을 물도 귀했습니다. 형제들은 난폭한 죄수들과 한방에서 지내야 했고 간수들은 형제들을 거칠게 대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장 파타키라는 간수는 형제들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는 성서 연구를 시작했으며 나중에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고 지금까지 파이오니아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당시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대주교가 감옥에서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그는 청중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조심하라고 말했지요. 미사에 참석했던 가톨릭교인 몇 명이 왜 대주교가 그런 말을 했는지 나중에 우리에게 물어보더군요. 그들이 보기에 여호와의 증인은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는 사이, 로제 풀스와 노엘라 풀스가 벨기에에서 키갈리로 왔습니다. 로제는 고용 계약을 맺은 상태였습니다. 세 형제들이 아직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로제는 법무부 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고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중히 물어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장관은 다음과 같이 딱 잘라 말했습니다. “풀스 씨, 당신 말은 이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소! 브뤼셀로 가는 다음 비행기로 떠나시오. 당신을 우리 나라에서 추방하겠소!”

세 형제들은 위축되지 않고 계속 확고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2년 형기를 다 채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2년째 되던 해에는 환경이 훨씬 더 나은 감옥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1984년 11월에 풀려났습니다.

박해가 심해지다

반대는 계속되었습니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나쁜 사람들이며 극단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986년 3월경에는 증인들이 체포되는 일이 르완다 전역에서 이미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체포된 사람 중에는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 때문에 초등 및 중등 교육부 사무국장 자리에서 해고당한 오귀스탱 무라이가 있었습니다. 여러 신문에서 그를 비방했으며 특히 라디오에서는 그에게 더 심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형제 자매들이 전국 각지에서 체포되었는데 그중에는 어린 자녀를 둔 임신한 자매들도 있었습니다. 1986년 말에 형제 자매들은 키갈리의 중앙 교도소로 이송되어 재판을 기다렸습니다. 형제들은 애국주의적인 성격의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대통령을 지지한다는 표시로 배지를 달고 다니지 않았으며 당원증도 사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증인들이 정부에 반대하며 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포카스 하키줌와미는 밝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니아비신두 회중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남아 있는 우리도 결국 체포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봉사 구역이 감옥 밖에서 감옥 안으로 바뀌겠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먼저 ‘바깥’ 구역에서 대대적인 전파 활동을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는 장터로 가서 잡지와 서적을 많이 전했습니다. 감옥에 가기 전에 구역을 다 돌 수 있게 해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했지요.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1985년 10월 1일에 구역을 다 돌 수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7일 뒤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듬해에 팔라틴 은산주르위모와 아내인 파투마가 국가 보안 요원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8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고 그들의 집도 샅샅이 수색을 당했습니다. 그런 다음 이 부부는 세 명의 자녀와 함께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감옥으로 가는 도중에 팔라틴과 파투마는 자신들을 뒤따라오던 팔라틴의 남동생에게 다섯 살 난 아들과 네 살 난 딸을 맡겼습니다. 이 부부는 14개월 된 딸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파투마는 후에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어 9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한편 장 치테야라는 형제의 네 자녀가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하루는 치테야 형제가 집에 와 보니 집은 수색을 당했고 아내는 붙잡혀 가서 아이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곧 그도 체포되어 아내와 다른 형제들이 수감되어 있던 부타레의 교도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부타레에 있는 교도소들에 수감되어 있던 모든 증인들은 키갈리의 중앙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키갈리의 형제들이 치테야 형제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치테야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다른 지역의 교도소에 있던 형제 자매들이 키갈리의 중앙 교도소로 오면, ‘코메라!’ 하고 말하면서 서로 반갑게 인사하곤 했습니다. 그 말은 ‘힘내요!’라는 뜻이었지요. 간수 한 명은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서 ‘당신들 미쳤군! 감옥에서 힘내라는 게 말이 돼?’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렇게 체포되는 일이 있었지만 진리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실망하지 않았으며, 박해가 종종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체포된 많은 사람 가운데는 열정적이고 활달한 성품을 가진 오데트 무칸데케지 자매가 있는데,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박해를 받던 그 시기에 형제들은 체포되고 구타를 당했지요. 어느 날 우리는 길을 가다가 소 떼를 몰고 있는 조세핀이라는 어린 소녀를 만났어요. 성서를 가지고 있던 이 소녀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고 박해와 고통을 겪었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는 걸 성서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요. 이 소녀는 증인들이 박해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참종교를 믿는 게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성서 연구를 요청했습니다. 현재 그는 침례받은 자매입니다.”

우리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기간에 가스파르드 니용기라는 트럭 운전수 일을 했는데, 일 때문에 자주 케냐의 나이로비에 갔습니다. 그는 트럭에 맞게 특별히 제작한 상자에 출판물을 실어 르완다로 몰래 들여왔습니다. 그 안에는 출판물 여섯 상자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앙리 세뇽가도 우간다 서부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국경을 넘어 정기적으로 잡지를 가져다주었습니다.

회중 집회는 소규모로 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집회를 열고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되면 수색에 나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니용기라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 집과 연결되어 있는 별채가 있었는데, 거기서 비밀리에 집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출판물은 비닐 포대에 넣어 땅에 묻은 뒤 그 위를 숯으로 덮어 숨겨 두었지요.”

사람들이 체포되기 시작했을 무렵, 당시 침례받은 지 얼마 안 되었던 장마리 무테진타레는 1985년 12월에 나이로비에서 열린 “충절 고수자” 특별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그와 이사이 시보마나는 우간다 서부에 사는 형제들에게서 잡지를 구해 르완다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국경에서 관리들에게 잡지가 발각되었습니다. 관리들은 수갑을 채워 형제들을 체포한 뒤 끌고 가 심문했으며, 형제들은 추운 감방에서 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곧 그들은 키갈리의 중앙 교도소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 수감되어 있던 140명가량의 형제 자매들은 이 형제들로부터 나이로비에서 열린 대회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어 참으로 기뻐했습니다. 이 격려적인 이야기를 듣고 형제 자매들은 큰 힘을 얻었습니다!

수감된 형제들은 집회를 열고 체계적인 전파 활동을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전파하는 것에 더해 몇몇 수감자들에게 읽고 쓰는 법도 가르쳤습니다. 또한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과 성서 연구를 하고 많은 새로운 전도인들이 침례받을 자격을 갖추도록 도왔습니다. 그 가운데는 체포되기 전에 이미 연구를 하던 사람도 있었고 교도소 안에서 진리를 알게 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순회 감독자가 교도소를 “방문”하다

한 형제는 1986년에 키갈리 교도소에서 있었던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도소에는 형제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밖에 있는 형제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상의하려고 모임을 가졌지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편지에는 우리가 교도소 안에 있는 봉사 구역을 다 끝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썼지요. 우리는 마치 호별 방문을 하듯이 수감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파했고 성서 연구도 사회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순회 감독자가 밖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순회 방문을 받고 싶다고 여호와께 기도했지요.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순회 감독자인 르와카부부 형제가 교도소로 들어오더군요. 전에도 한 번 수감된 적이 있었는데 두 번째로 들어온 것이었지요. 우리를 방문하라고 일이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박해를 받던 그 기간에 타협한 사람은 형제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가 정당 배지를 달자 증인이 아닌 수감자들은 그를 겁쟁이라고 부르면서 때리고 발로 차고 욕했습니다. 성서 연구를 하고 있던 그의 아내는 그에게 왜 충실을 지키지 못했냐고 물었습니다. 후에 그는 판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한 행동은 실수였으며 자신은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알렸습니다. 케냐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도 사과하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현재 다시 여호와를 충실히 섬기고 있습니다.

밖에서도 전파 활동이 계속되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들도 전파 활동에서 식지 않는 열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한 달에 평균 20시간 정도를 봉사에 바쳤습니다. 당시에 교도소 밖에 있었던 알프레드 세말리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는 실제로 수감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수감될 걸 예상해서 늘 대비하고 있었지요. 왕국회관이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소규모로 모임을 가졌고 전파 활동도 계속해 나갔습니다. 나는 잡지를 넣은 카키색 봉투를 들고 시내에 가서 일자리를 찾는 척하다가 기회가 생기면 잡지를 전하고 성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1986년에 많은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지요. 성서 연구를 막 시작한 사람들까지도 잡혀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형제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도 놀라울 정도로 확고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사이에 다른 여러 나라의 증인들이 르완다 대통령에게 그러한 불공정한 처우에 대해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지요. 라디오 뉴스에 따르면 그런 편지가 매일 수백 통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좋은 결과가 있었는데 이듬해에 대통령의 명령으로 우리 형제 자매들과 관심자들이 석방된 것입니다. 모두가 기쁨에 넘쳤지요.” 그들이 풀려나자마자 키갈리에서 장로들은 침례를 받을 수 있는 마련을 조직했습니다. 36명이 침례를 받았고 그중 34명은 즉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를 신청했습니다!

반대가 극심했던 1986년에 르완다에는 교도소에 수감된 약 140명의 형제 자매를 포함하여 평균 435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이 증인들은 르완다의 여호와의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험받은 질”의 믿음이 있었습니다.—야고보 1:3.

1980년대의 험난했던 시기가 지나고 마침내 르완다의 회중들은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 접어들어 성장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 앞에는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의 경우는 어떠할 것입니까? 이 제자들 역시 자신들이 불을 견딜 수 있는 재료로 지어졌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까? (고린도 첫째 3:10-15) 그들의 믿음은 앞에 놓인 시련을 견뎌 낼 수 있을 것입니까? 시간만이 그 답을 알려 줄 것이었습니다.

내전과 정치적 불안

1990년에 르완다에는 거의 1000명의 활동적인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해지고 있었으며, 10월에는 이웃 나라인 우간다에서 르완다 애국 전선 군대가 르완다 북부로 쳐들어왔습니다.

믿음 때문에 두 차례 수감되었던 용감한 형제인 페르디낭 무가루라는 침공이 시작되었을 당시 루헹게리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증오와 부족주의가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들은 중립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정치 파벌들과 연관을 맺거나 인종적 편견을 갖지 않았지요. 중립 입장과 어긋나게 행동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일부 형제들은 집을 버리고 도망해야 했고 직업을 잃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혼자 세 자녀를 키우면서 학교 교사로 일하던 한 자매는 군대를 위해 돈을 기부하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교장이 이 자매를 군 당국에 신고하여 자매는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 수감된 데 이어 두 번째로 교도소에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도소가 있던 마을로 반군이 들이닥쳤고, 그들이 교도소 건물로 침입해 들어오면서 모든 수감자들이 그곳에서 탈출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는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치지 않고 교도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반군이 퇴각하자 자매는 다시 체포되었고 키갈리 중앙 교도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기념식 날짜를 알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기념식을 꼭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후에 이 자매는 석방되었는데 놀랍게도 그날이 바로 기념식 당일이었습니다! 중립 입장으로 인해 집과 교사직을 잃기는 했지만 대신에 그는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가 되었습니다.

국제 사회의 개입으로 인해, 우간다에서 온 반군의 공격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91년에는 르완다에 복수 정당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몇몇 주요 정당과 여러 소수 정당이 형성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역주의와 부족주의가 조장되었습니다. 온건한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들도 있었지만 그 밖의 정당들은 호전적이고 극단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중립 입장이 호의적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증인들이 정당이나 부족 내의 파벌 다툼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과 정부는 그들을 더 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1991년 9월, 형제들로 이루어진 국제 대표단이 르완다 사람인 가스파르드 르와카부부와 타르시스 세미네가와 함께 키갈리로 가서 정부 주요 부처의 장관들을 만났습니다. 형제들은 새로운 법무부 장관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호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긍정적인 조처들이 취해진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증인들이 종교적인 자유를 온전히 누릴 수 있도록 더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992년 1월, 아직 법적 인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형제들은 키갈리에서 지역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고드프리 빈트와 제니 빈트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우간다에서 봉사하고 있던 우리는 케냐 지부 사무실에서 온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르완다로 가서 3주간 머무르면서 대회 준비와 드라마 녹음 일을 도우라는 내용이었지요. 우리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자기 집에서 식사하자고 매일 우리를 초대해 주었지요. 우리가 르완다에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임대해 놓은 개인 소유의 축구 경기장에서 대회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비가 충분하지 않았는데도 형제들은 벌써 드라마 녹음 작업을 위한 계획을 세워 잘 진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르완다 북부에 사는 많은 형제들이 여행 허가를 받지 못했고 부룬디 쪽과 우간다 쪽 국경도 폐쇄되어 있었지만, 일요일 회기에 2079명이 참석했고 7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법적 인가를 받다!

몇 달 후인 1992년 4월 13일, 드디어 르완다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처음으로 법적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금지령과 박해와 투옥 가운데서도 좋은 소식을 선포하려는 형제들의 기나긴 투쟁이 마침내 끝난 것입니다. 이제 형제들은 신권적인 성장과 확장을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시기를 기대감을 갖고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통치체는 즉시 르완다에 선교인들을 임명했습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과 차드에서 봉사했던 헹크 판 뷔설과 자이르(지금의 콩고 민주 공화국)와 우간다에서 봉사했던 고드프리 빈트와 제니 빈트가 르완다 체류 비자를 받은 최초의 선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파 활동을 감독할 전국 위원회도 임명되었습니다.

빈트 형제는 헹크 판 뷔설과 함께 르완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 후 우리는 왕국회관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선교인 집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집을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키냐르완다어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1970년에 일했던 최초의 특별 파이오니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언어를 배우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보던 한 교재에는 글쎄 ‘CW가 합쳐지면 TCHKW로 발음한다!’라는 설명이 들어 있지 뭡니까. 그리고 아직도 기억나는 일이 있는데, 한 자매는 우리를 가르치면서 ‘“이시 은쉬아”[‘새 땅’이라는 뜻]에서 “쉬” 소리를 제대로 내려면 꼭 미소를 지으면서 발음해야 돼요!’ 하고 알려 주더라니까요.”

같은 해에 1665명의 새로운 전도인 신기록이 달성되었고 1993년 1월에는 키갈리에서 또 한번 지역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4498명이 참석했고 18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키알라 므왕고 형제가 케냐 지부를 대표해서 이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대회가 열린 경기장 바로 맞은편 부지가 2006년에 지부 사무실이 들어설 장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북부 지역에서 다시 한번 반군이 공격해 왔지만 전파 활동은 둔화되지 않았습니다. 1993년에 반군은 키갈리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안 되는 곳까지 진격해 들어왔습니다. 우간다와 접한 국경은 여전히 폐쇄되어 있었고 키갈리에서는 언덕 너머로 대포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미 100만 명가량의 사람들이 북부 지역을 떠나 피난했는데 그 가운데는 381명의 형제 자매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키갈리와 그 인근에 사는 형제들이 그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한편 탄자니아의 아루샤에서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완충 지대가 설정되었고, 정부는 반군을 비롯한 크고 작은 여러 정당들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는 데 동의했습니다.

정말 특별했던 특별 대회일!

같은 해에 키갈리 지역의 한 경기장에서는 특별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장 측에서 이중으로 예약을 받는 바람에, 같은 날 오후 3시에 축구 경기 일정도 잡히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경기장에서 오전 회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오후 회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람들이 축구를 보러 경기장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경찰도 그들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경기장 관리자는 오후 6시가 되어야 경기가 끝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경기장을 빠져나왔고 나머지 프로그램을 즐기기 위해 6시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소 염려가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통행금지가 시행되고 있어서 오후 6시 이후로는 차량이 다닐 수 없었고 9시 이후로는 밖에 돌아다니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오후 7시쯤에 통행금지 시간이 11시로 늦춰졌다는 라디오 방송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는데 조명 시설을 위한 전력 공급이 불안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키갈리 시의 시장이 경기장 임대 조건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여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는 대회 프로그램이 끝난 뒤 형제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차편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들은 대회 프로그램을 온전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회를 마치고 경기장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여러 대의 버스가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귄터 레슈케는 1993년 9월 말에 르완다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그때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케냐 지부의 요청으로 나는 르와카부부 형제와 함께 키갈리에서 열린 왕국 전도 학교의 강사로 일했습니다. 당시 르완다에는 장로가 63명뿐이었지요. 전도인 수는 1881명으로 증가했는데 말입니다. 르완다 내부에서는 이미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고 북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습니다. 물론, 곧 끔찍한 시기가 닥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왕국 전도 학교는 정말 적절한 때에 양식을 공급해 준 셈이었지요. 장로들은 그 학교를 통해 믿음이 강화되었고 목자로서의 자격을 더 잘 갖추게 되었습니다. 내전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꼭 필요한 교육이었지요.”

사무실을 설립하려는 계획

1994년 3월 말, 나이로비에 있던 레너드 엘리스와 낸시 엘리스가 르완다를 방문했습니다. 특별 대회에 참석하고 번역 사무실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보다 앞서 나이로비 지부에서는 르완다에 있는 선교인 집과 번역 사무실을 한장소로 합치도록 제안을 해 주었습니다. 4월 4일 월요일에는 전국 위원들과 선교인들 그리고 인원이 늘어난 번역 팀과 엘리스 형제 부부가 함께 「파수대」 연구를 즐겼습니다. 더 큰 확장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참으로 가슴 설레는 시기였습니다.

할 일을 마친 엘리스 형제 부부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 비행기를 마지막으로 그 후 여러 달 동안 키갈리에서는 단 한 대의 여객기도 뜨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오후, 르와카부부 형제는 선교인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전국 사무실 부지로 사용하고자 했던 땅에 대한 권리를 러시아 대사관 측에서 포기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여호와의 증인이 그 부지를 할당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튿날인 4월 7일 목요일 아침에 관리들을 만나 그 문제를 상의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대학살이 시작되다!

4월 6일 수요일 저녁, 비행기 한 대가 키갈리 근처에서 격추되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비행기에는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이 타고 있었으며 탑승한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그날 저녁 그 추락 사고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공영 라디오 방송에서도 그 일에 대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선교인으로 일하던 빈트 부부와 헹크는 뒤이어 벌어진 일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빈트 형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4월 7일 이른 아침, 우리는 총소리와 수류탄 터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특이한 일은 아니었어요. 몇 달 전부터 르완다의 정치적 상황이 몹시 불안정했거든요. 그런데 아침 식사를 준비하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번역 사무실에 있던 에마뉘엘 응기렌테의 전화였는데, 비행기 추락 사고로 대통령 두 명이 사망했다는 지방 라디오 방송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국방부 장관은 키갈리의 모든 주민에게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아침 9시경에 약탈자들이 이웃집에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들은 자동차를 빼앗고 그 집 아이들의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군인들과 약탈자들이 우리 집에도 왔습니다. 철로 된 우리 집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벨을 눌러 대더군요.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안에 그대로 있었지요.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우리 집 문은 부수려 하지 않고 그냥 다른 집으로 가 버렸습니다. 사방에서 기관총 소리와 폭발음이 계속 들려왔고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였어요. 총소리가 가까이에서 크게 들려왔기 때문에 우리는 집 중앙에 있는 방들 사이의 복도로 갔습니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총알을 피해 보려는 생각에서였지요. 상황이 금세 좋아질 것 같지 않아서 음식을 아껴야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하루에 한 끼만 준비해서 같이 먹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점심 식사를 막 마치고 라디오에서 국제 뉴스를 듣고 있는데 ‘그들이 담을 넘어 들어오고 있어요!’ 하고 헹크가 소리치더군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욕실로 가서 문을 잠그고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내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다 같이 여호와께 기도했지요. 기도를 채 마치기도 전에 민병대원들과 약탈자들이 창문과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곧 집 안으로 들이닥친 그들은 고함을 지르면서 가구를 뒤엎었습니다. 민병대원들과 함께 남자, 여자, 어린아이를 포함한 40명가량의 약탈자들이 들어온 것이었지요. 자신들이 찾아낸 물건들을 두고 서로 싸우면서 총을 쏘아 대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우리는 욕실에 40분 정도 숨어 있었는데 그 시간이 정말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이제 그들이 욕실 문을 열려고 하더군요. 잠겨 있어서 열리지 않자 문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남자들은 모두 광적으로 흥분한 상태였고 마약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벌채용 칼인 마체테와 작은 칼을 들고 우리를 협박했습니다. 아내는 여호와께 큰 소리로 부르짖었지요. 남자 하나가 마체테를 휘두르며 칼 옆면으로 헹크의 목 아래쪽을 쳤고 헹크는 욕조 안으로 넘어졌습니다. 내가 가까스로 돈을 찾아 그들에게 주자 그들은 그 돈을 서로 가지려고 싸웠지요.

그런데 우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한 젊은이가 갑자기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는 우리를 알아보더군요. 아마 봉사할 때 만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를 잡고 욕실 안으로 밀어 넣더니 문을 닫으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우리를 구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약탈자들이 집을 뒤지는 소리가 한 30분 정도 들리는가 싶더니 조용해졌습니다. 마침내 그 젊은이가 돌아와서 이제 나와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즉시 떠나야 한다고 하면서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더군요. 우리는 물건을 챙기려고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따라 나왔지요. 살해당한 이웃 사람들의 시체를 보니 정말 두려웠어요. 대통령 경호원 두 명이 우리를 근처에 있는 군 장교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장교는 우리를 밀 콜린 호텔로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피신해 있었지요. 우리는 불안한 마음으로 여러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호송하기 위한 군사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을 빠져나와 샛길로 공항 뒤편까지 돌아가는 아슬아슬한 작전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4월 11일에 마침내 케냐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차림도 엉망인 채로 나이로비 베델의 로비에 들어섰지요. 피신하는 과정에서 우리와 떨어져 있게 된 헹크도 몇 시간 뒤에 도착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베델 가족이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고 우리를 잘 돌봐 주었습니다.”

어린 소녀의 기도 덕분에 목숨을 건지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이 사망한 다음날, 정부군 여섯 명이 르와카부부 형제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며 마약에 취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들은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자신의 가족은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중립 입장을 지키는 여호와의 증인이 정부를 지지하거나 군대를 위해 기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르와카부부 형제와 아내 멜라니는 투치족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후투족 민병대인 인테라함웨는 투치족만 아니라 온건파 후투족도 죽이고 있었는데, 투치족을 감싸 주거나 반군에 협조한다는 의심이 가는 사람이 특히 표적이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곤봉으로 르와카부부 형제와 그의 아내를 때렸으며 이 부부와 그들의 다섯 자녀를 침실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고는 침대 시트를 벗기더니 이 가족을 그 시트로 뒤집어씌우기 시작했습니다. 군인들 몇 명이 손에 수류탄을 든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가 분명했습니다. 르와카부부 형제는 “기도를 좀 해도 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군인 중 한 사람이 경멸하는 투로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서로 상의하더니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좋아, 2분 안에 끝내” 하고 말했습니다.

다들 속으로 기도했지만 여섯 살인 데보라는 이렇게 소리 내서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 이 아저씨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재방문은 어떻게 하죠? 저번에 아빠랑 봉사하면서 잡지를 다섯 부 전했단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가서 진리를 전해 줘야 해요. 우리 가족을 살려 주시면 저는 꼭 전도인이 되고 침례도 받고 파이오니아도 할게요. 약속드려요! 여호와 하느님, 제발 우리를 구해 주세요!”

이 기도를 듣고 군인들은 감탄했습니다. 마침내 한 군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의 기도가 너희를 살렸어. 누가 또 오면 우리가 왔다 갔었다고 해.” *

상황이 악화되다

반군(르완다 애국 전선)이 수도인 키갈리로 더 진격해 들어오면서 내전은 점점 치열해졌습니다. 그러자 다급해진 인테라함웨 민병대원들은 더 많은 살육을 저질렀습니다.

모든 교차로와 도시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군인들과 무장한 인테라함웨 민병대원들과 지역 주민들이 그곳을 지켰습니다.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강제로 불려 가 인테라함웨와 함께 밤낮으로 바리케이드에서 보초를 서야 했습니다. 그러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목적은 투치족을 색출해서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르완다 전역에서 학살이 계속되면서 수많은 주민들이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중 다수는 인접한 나라인 콩고와 탄자니아로 피신했는데 그 가운데는 여호와의 증인들도 있었습니다.

전쟁과 죽음에 직면해서

이어지는 내용은 온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참혹한 일을 겪은 우리 형제 자매들의 이야기입니다. 기억하겠지만, 르완다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1980년대에 이미 불같은 시험을 겪었으며 그들의 믿음과 용기는 정련을 받아 강화되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선거와 정치 활동에 참여하거나 지역 방위군에 가담하기를 거부함으로 “세상의 일부가 아닌”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요한 15:19) 그리고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의 일부가 아니라는 이유로 겪게 되는 조롱과 투옥과 박해와 죽음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시험을 거친 그러한 특성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대학살에 가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 서로를 보호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겪은 많은 일들이 여기에 다 실려 있지는 않습니다. 복수하기를 원치 않는 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의 기록을 읽으면서 우리 모두 마음이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참제자임을 나타내 주는 표인 사랑을 더욱 온전히 나타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3:34, 35.

장과 샹탈의 이야기

성격이 밝고 자상한 사람인 장 드 디외 무가보 형제는 1982년에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여 세 차례 투옥되었으며 그 후 1984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내인 샹탈도 같은 해에 침례를 받았고 두 사람은 1987년에 결혼했습니다. 대학살이 시작되었을 당시 이 부부에게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다른 지역에 있는 외갓집에서 지내고 있었고 태어난 지 6개월 된 막내는 장과 샹탈이 데리고 있었습니다.

대학살이 벌어진 첫날인 1994년 4월 7일, 군인들과 인테라함웨가 모든 투치족의 집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은 체포되어 곤봉으로 구타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간신히 탈출하여 다른 한 형제와 함께 인근의 왕국회관으로 도망했습니다. 한편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샹탈은 아기를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와 다른 두 아이들을 만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장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왕국회관은 이전에 빵집으로 사용된 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굴뚝이 그대로 있었지요. 그 형제와 나는 한 주 동안 그 왕국회관 건물 안에 숨어 있었는데 어느 후투족 자매가 기회를 보아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후에는 지붕 속에 숨어 있어야 했지요. 철제 지붕과 천장 사이의 공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정말 뜨거워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다른 곳으로 옮겨야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굴뚝에서 벽돌 몇 장을 어렵사리 떼어 내어 그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몸을 웅크린 자세로 한 달 넘게 그 안에 숨어 있었지요.

근처에 바리케이드가 있었기 때문에 인테라함웨 민병대원들이 종종 왕국회관으로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비를 피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자매는 가능할 때마다 계속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우리는 인내할 힘을 달라고 계속 기도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5월 16일에 그 자매가 와서 르완다 애국 전선이 우리가 있는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이제 나와도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장의 아내인 샹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샹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4월 8일에 아기를 데리고 간신히 집을 빠져나왔어요. 그리고 자매 두 명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후투족 신분증을 가지고 있던 이마쿠엘레이였고 또 한 사람은 투치족인 수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5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부게세라로 갈 작정이었지요. 두 아이들이 친정 부모님과 함께 그 도시에 살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모든 길에 바리케이드가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키갈리 변두리에 있는 가까운 마을로 가기로 했습니다. 그곳에는 이마쿠엘레이의 친척인 가히지가 살고 있었는데 그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었어요. 후투족이었던 가히지는 우리를 따뜻이 맞아 주었고 이웃 사람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정부군과 인테라함웨는 가히지가 투치족을 보호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를 총살했습니다.

가히지를 살해한 군인들은 우리도 죽이려고 강으로 끌고 갔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서 이제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갑자기 군인들 사이에서 심한 말다툼이 벌어지더니 그중 한 명이 ‘여자는 죽이면 안 돼. 나중에 분명 안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지금은 남자만 죽여야 해’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형제들 몇 명이 우리를 뒤따라오고 있었지요. 그중에는 바로 전주에 침례를 받은 앙드레 트와히르와도 있었는데, 그는 이웃 사람들이 반대하는데도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앙드레는 우리와 함께 키갈리로 향했지요. 그곳에서 우리가 머물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아 보려고 했던 겁니다. 그는 우리가 매우 위험한 바리케이드 여러 곳을 통과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우리 아기는 이마쿠엘레이가 안고 갔지요. 그렇게 하면 우리가 붙잡히더라도 아기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니까요. 수잔과 나는 우리가 투치족인 걸 숨기려고 신분증을 미리 찢어 버렸습니다.

한 바리케이드에 이르렀을 때, 인테라함웨는 이마쿠엘레이를 때리면서 ‘이 투치족들하고 같이 다니는 이유가 뭐야?’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수잔과 나를 통과시켜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마쿠엘레이와 앙드레가 먼저 르와카부부 형제 집으로 갔지요. 앙드레는 시몽과 마티아스라는 다른 두 형제와 함께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덕택에 우리는 그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르와카부부 형제 집으로 데려다 주었고 수잔은 자기 친척 집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르와카부부 형제 집에 머무르기가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큰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나를 다른 증인들이 숨어 있는 왕국회관으로 데려다 주었지요. 그곳에 가 보니 열 명의 투치족 형제 자매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이미 와 있더군요. 이마쿠엘레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충실한 벗이었지요. 그는 ‘만약 당신이 죽고 내가 살아남으면 내가 당신 아기를 지켜 줄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

한편 왕국회관 인근에는 베이다스트 비메니이마나라는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투치족이었던 그는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뒤 다시 돌아와 왕국회관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들 모두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대학살이 끝난 뒤, 장과 샹탈은 외가에 있던 두 살배기 딸과 다섯 살배기 딸, 자신들의 부모 그리고 약 100명의 친척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참담한 일을 겪은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샹탈은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어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상태였지요.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아이들이 부활되면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걸 여호와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75일 동안 숨어 지내다!

타르시스 세미네가는 1983년에 콩고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대학살이 일어났을 당시 그는 르완다 부타레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은 키갈리에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키갈리에서 추락한 뒤, 투치족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형제 두 명이 부룬디를 통해 우리 가족을 탈출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모든 도로와 통행로는 인테라함웨 민병대가 지키고 있었지요.

집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군인 네 사람이 우리 집을 감시하고 있었고 180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는 그중 한 명이 설치한 기관총이 배치되어 있었지요. 나는 여호와께 열렬히 기도하면서 이렇게 탄원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당신만이 저희 목숨을 구해 주실 수 있습니다!’ 저녁이 되자 한 형제가 우리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우리가 죽었으면 어쩌나 하고 염려가 되었던 것이지요. 민병대는 그 형제가 집 안으로 들어와 몇 분간 있을 수 있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더군요. 그리고 우리 아이 중 두 명을 어떤 방법으로인가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고는 쥐스탱 르와가토레 형제와 조제프 은두와예주 형제에게 우리 가족이 집 안에 숨어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알렸습니다. 그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밤중에 우리에게 왔고,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가족을 쥐스탱의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지만 쥐스탱의 집에는 아주 잠깐밖에 머물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사람들이 우리가 그 집에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같은 날 뱅상이라는 남자가 찾아와서는 인테라함웨가 우리를 죽이려고 들이닥칠 테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지요. 그는 이전에 쥐스탱과 성서 연구를 했지만 진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사람이었어요. 뱅상은 우선 쥐스탱의 집 근처에 있는 덤불에 숨어 있는 게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지요. 그는 염소 우리로 사용하던 둥근 오두막에 우리를 숨겨 주었는데, 그 오두막은 초가지붕에 벽과 바닥이 진흙으로 되어 있고 창문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오두막에 숨어 있는 여러 날 동안 하루하루가 정말 길게 느껴졌습니다. 오두막은 사거리 근처에 있었는데 거기서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곳에는 그 지역에서 가장 붐비는 시장이 있었지요. 우리는 사람들이 길을 오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그들은 낮에 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고 다음 계획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더군요. 정말 소름 끼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점점 더 공포심을 느끼게 되었고, 살아남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를 드렸습니다.

뱅상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돌봐 주었어요. 우리는 그 오두막에서 한 달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5월 말에 인테라함웨 민병대가 키갈리에서 우리 지역으로 도망해 오면서 그 오두막에 있는 것이 너무 위험해졌습니다. 형제들은 우리를 한 형제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그 집 지하에는 조그마한 방이 있었지요. 그 형제는 이미 세 명의 증인들을 그곳에 숨겨 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집에 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네 시간 반을 걸어갔습니다. 그날 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는데 오히려 우리에겐 잘된 일이었지요. 살인자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새로운 은신처는 지하 약 1.5미터 깊이에 있었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널빤지로 덮여 있는 입구를 통과하여 사다리를 타고 내려간 다음 몸을 쭈그린 채로 굴 속을 계속 기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약 2제곱미터 크기의 방이 나왔지요. 방 안에서는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났고 벽에 난 틈 사이로 아주 희미한 빛만 들어올 뿐이었습니다. 우리 부부와 다섯 아이들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이 그 방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폐소 공포증이 생길 것만 같은 그 구덩이 속에서 우리 열 사람은 6주 동안 숨어 있었어요. 혹시나 들킬까 봐 겁이 나서 촛불도 켜지 못했지요.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그 기간 내내 우리를 돌봐 주셨습니다. 형제들은 우리에게 음식과 약품을 가져다주고 격려의 말을 해 주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가끔씩은 낮에 촛불 하나를 켤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성서나 「파수대」나 일용할 성구를 읽기도 했습니다.”

타르시스는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에는 다 끝이 있기 마련이지요. 그렇게 숨어 지내는 생활도 1994년 7월 5일에 마침내 끝이 났습니다. 뱅상은 반군이 부타레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어요. 우리가 지하에서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르완다 사람이 아닌 줄 알더군요. 햇빛을 받지 못해서 피부가 창백해져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는 소리 내어 말하는 법을 잊어버려 한동안은 속삭이듯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이전처럼 돌아가는 데는 여러 주가 걸렸지요.

우리가 겪은 모든 일은 아내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0년 동안 아내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지요. 그런데 성서 연구를 시작한 겁니다. 이유가 무엇이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아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 나타낸 사랑과 그들이 우리를 구해 주려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지요. 그분은 마체테를 휘두르는 살인자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셨습니다.’ 아내는 여호와께 헌신했고 내전 후 열린 첫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형제 자매들에게 정말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직접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고 우리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해 주기도 했지요. 우리는 부족 간의 장벽을 초월하는 그들의 깊고 진실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도움을 준 사람이 도움을 받다

타르시스 세미네가 형제 가족이 살아남도록 도움을 준 쥐스탱 르와가토레 형제는 후에 자신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6년에 정부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감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미네가 형제 가족을 구해 주고 나서 몇 년 뒤에, 쥐스탱과 몇몇 형제들은 중립 입장 때문에 또다시 체포되었습니다. 지방 당국자들에게 정치 활동에 대한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형제들이 파견되었고, 그 가운데는 세미네가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쥐스탱이 도움을 주었다고 당국자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형제들이 석방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대학살 기간에 형제들이 보인 훌륭한 본에 마음이 감동되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60대 중반의 가톨릭 신자였던 수잔 리진데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가 대학살을 지원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살 기간에 인근의 여호와의 증인들이 나타낸 행동과 서로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본 그는 깊은 감동을 받아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수잔은 1998년 1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회중 집회에 참석하려면 언덕들을 오르내리며 5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는데도 그는 한 번도 집회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잔은 가족들도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현재 그의 아들 중 한 명은 장로로 일하고 있으며 손자 한 명은 봉사의 종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도피하다

1992년부터 르완다에서 선교인으로 일하다가 1994년 4월에 케냐로 도피한 헹크 판 뷔설은 콩고 동부의 고마로 가서 르완다 난민을 위한 구호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콩고 쪽 형제들은 성서 출판물을 손에 들고 국경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왕국 노래를 소리 내어 부르거나 휘파람으로 불렀습니다. 르완다에서 건너오는 증인들이 형제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정부군과 르완다 애국 전선 간의 전쟁이 계속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콩고와 탄자니아로 도피했습니다. 고마로 도피한 형제들의 집결 장소는 그곳 왕국회관이었습니다. 후에 고마 외곽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자녀들과 관심자들만을 위한 난민 수용소가 세워졌는데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형제들은 콩고 동부의 다른 여러 지역에도 그와 비슷한 수용소들을 세웠습니다.

난민 대부분은 보복이 두려워 도망 온 후투족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후투족과 투치족이 함께 도망했습니다.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투치족 사람이 국경을 넘어 고마로 들어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한때는 투치족 형제를 르완다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해 주는 값이 한 사람당 100달러(미화)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콩고로 피신한 형제들은 계속 함께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국제 연합이 세운 난민 수용소에서는 인테라함웨가 활개 치고 있었고 형제들은 그들과 어떤 관련도 맺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증인이 아닌 난민들은 대다수가 당시 밀려나고 있던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여호와의 증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특히 인테라함웨는 증인들을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다른 사람들과 따로 지내기를 원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는데 투치족 형제들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르완다에서 피신해 온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왔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벨기에, 스위스, 케냐, 콩고, 프랑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돈과 의약품과 음식과 옷을 보내왔으며 의사와 간호사도 보내 주었습니다. 항공편으로 도착한 첫 구호품 가운데는 프랑스 지부에서 보내온 여러 개의 소형 천막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벨기에 지부에서는 온 가족이 사용할 수 있는 방갈로식 천막을 보내 주었습니다. 또한 구호품 가운데는 간이침대와 공기 주입식 침대도 있었습니다. 케냐 지부에서는 2톤이 넘는 의복과 2000장이 넘는 담요를 보내 주었습니다.

콜레라가 발생하다

르완다에서 피신해 온 1000명이 넘는 증인들과 관심자들은 고마의 왕국회관과 그곳에 인접해 있는 부지에 머물렀습니다. 고마에 난민이 많아지자 안타깝게도 콜레라가 발생했습니다. 콩고(킨샤사) 지부에서는 이 전염병을 처치하기 위해 신속히 의약품을 보냈으며, 나이로비에 있던 헹크 판 뷔설 형제는 의약품 60상자를 실은 비행기를 타고 고마로 왔습니다. 왕국회관은 임시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환자를 격리하기 위한 조처도 취해졌습니다. 의사인 로이크 도말렝 형제와 또 한 명의 의사 형제 그리고 르완다 출신의 간호조무사인 에마블 하비마나가 매우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아멜 형제 역시 이 어려운 시기에 큰 도움을 주었으며 의료 경험이 있는 많은 형제 자매들도 기꺼이 자원하여 환자들을 돌봐 주었습니다.

콜레라를 예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0명이 넘는 형제들과 관심자들이 그 병에 감염되었고 이 치사적인 질병의 확산을 채 막기도 전에 약 40명이 사망했습니다. 후에 형제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위한 난민 수용소를 세우기 위해 면적이 넓은 부지를 임대했습니다. 그곳에 수백 개의 소형 천막을 세웠으며 케냐에서 보내온 대형 천막은 병원으로 사용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미국 보건 요원들은 수용소가 질서 정연하고 청결하게 운영되는 것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1994년 8월 초에 고마의 구호 위원회는 증인들과 어린이들과 관심자들을 합하여 총 2274명의 난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또한 콩고 동부의 부카부와 우비라 그리고 부룬디에도 르완다에서 피난 온 많은 형제들이 있었으며 탄자니아의 난민 수용소에도 230명이 있었습니다.

키갈리의 번역 사무실에서 일하던 형제들 역시 고마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번역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집을 한 채 임대했습니다. 전쟁 때 간신히 지켜 낸 컴퓨터 한 대와 발전기 한 대를 키갈리에서 고마로 올 때 가져왔기 때문에 번역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고마에는 전화나 우편 서비스가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공항에서 근무하는 몇몇 증인들이 도와준 덕택에, 형제들은 고마에서 나이로비로 매주 운항하는 항공편을 통해 번역 자료나 그 밖의 서신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케냐 지부의 형제들도 같은 방법을 이용하여 답신을 보내 주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에마뉘엘 응기렌테와 다른 두 명의 번역자들은 최선을 다해 번역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파수대」 기사들은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기사들은 나중에 번역하여 특별 팜플렛으로 발행했으며 형제들은 회중 서적 연구에서 이 팜플렛들을 연구했습니다.

난민 수용소에서의 생활

사람들은 키갈리에서 계속 도피해 나오고 있었습니다. 프랑신이라는 자매는 남편인 아나니가 살해된 후 고마로 피신해 와 있다가 증인들이 세운 수용소 중 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난민 수용소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매일 형제 자매들 몇 명이 음식을 준비하도록 임명되었어요. 우리는 기장이나 옥수수로 죽을 만들어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점심 식사도 준비했지요. 맡은 일을 끝내고 나면 자유롭게 야외 봉사에 참여할 수 있었어요. 수용소에서 같이 지내는 가족 가운데 증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주로 증거했고 수용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증거했지요. 하지만 얼마 후, 다른 수용소에 있던 인테라함웨 민병대는 증인들이 다른 난민들과 따로 구별된 수용소에 있는 걸 보고 화를 냈고, 상황은 위험해졌습니다.”

1994년 11월에는 형제들이 르완다로 돌아가도 될 만큼 상황이 안전해졌습니다. 사실, 콩고의 난민 수용소 중 증인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수용소에서 위험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르완다로 돌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했습니다. 하지만 돌아가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인테라함웨는 군을 재편성하여 르완다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고 콩고를 떠나 르완다로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든지 탈영자로 간주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르완다 정부와 접촉하여, 전쟁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고 투치족 대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원한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본국 송환에 사용할 수 있는 차량을 소유하고 있는 국제 연합 난민 고등 판무관(UNHCR) 측과 상의해 보라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이 르완다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민병대가 막을 것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잘 세워야 했습니다.

형제들은 고마에서 특별 대회가 열릴 것이라고 광고하고 대회 현수막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비밀리에 증인들에게 르완다 귀국 계획을 알렸습니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형제들은 마치 대회에 가는 것처럼 모든 소지품은 수용소에 두고 성서와 노래책만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는 프랑신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 형제들은 여러 시간을 걸어간 뒤 마침내 자신들을 국경까지 태워 가려고 대기 중이던 트럭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국경을 넘어 르완다로 들어가자 국제 연합 난민 고등 판무관 측에서는 형제들을 키갈리로 이송해 주었고 그다음에는 그들의 집이 있는 지역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994년 12월에 대부분의 형제들은 가족과 관심자들과 함께 르완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르 수아르」지는 1994년 12월 3일자 신문에서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안전에 위협을 느낀 르완다 난민 1500명이 자이르[콩고]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카탈레 수용소 위쪽에 자신들만의 수용소를 세운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무기를 들거나 정치 집회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전 정권하에서 특히 박해를 받았다.”

르완다로 돌아온 뒤에 프랑신은 나이로비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그는 대회에서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면서 위로와 격려를 받았고, 키갈리에 다시 설립된 번역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나중에 그는 에마뉘엘 응기렌테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계속 지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 프랑신은 감정적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우리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바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우리는 당시 벌어지고 있던 끔찍한 일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쁨을 찾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하박국 3:17-19의 말씀에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나네요. 형제 자매들은 나를 많이 격려해 주었고 편지를 써 준 사람들도 있었지요. 덕분에 긍정적이고 영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었어요. 나는 사탄이 여러 가지 책략을 사용한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한 가지 문제에 계속 빠져 있다 보면 다른 문제의 희생양이 될 수 있지요. 깨어 있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약해질 수 있습니다.”

르완다로 돌아오다

헹크 판 뷔설 형제는 르완다로 돌아오는 형제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이 다시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새 출발’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도움을 받을 대상 가운데는 르완다를 떠나지는 않았지만 소유물을 거의 다 잃어버린 사람들도 포함시켰지요. 임명된 형제들이 각 회중을 방문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했습니다. 가족들과 개개인들에게 각자의 상황에 맞게 공급품을 전달했지요. 형제들은 3개월 뒤부터는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형제들의 영적 필요를 돌보는 일에도 주의가 기울여졌습니다. 번역 팀은 키갈리에 있는 원래의 작업 장소로 돌아왔습니다. 판 뷔설 형제의 기억에 따르면, 이전에 사무실로 사용했던 그 집은 총탄 때문에 온통 구멍이 나 있긴 했지만 보관소에 둔 서적들은 대부분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몇 개월 동안 서적 상자 속에서는 총알이 발견되었습니다. 번역자 중 한 명은 정원에서 수류탄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 10월경에 번역 팀은 키갈리의 다른 지역에 있는 훨씬 넓고 편리한 건물로 작업 장소를 옮겼습니다. 2006년에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이 임대한 건물이 사무실과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부활된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어요!”

1994년 12월경, 대부분의 형제들은 콩고에서 르완다로 돌아와 있었고 때마침 지역 대회가 마련되었습니다. 적절하게도 대회 주제는 “경건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키갈리에 있는 한 왕국회관의 뜰이 대회 장소로 정해졌으며 우간다와 케냐와 프랑스에서 형제들이 왔습니다. 금요일 오전이 되자 왕국회관 뜰이 형제들로 가득 찼습니다. 한 자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형제 자매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서로 끌어안는 모습을 보니 정말 가슴이 뭉클했어요.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서로를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지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된 겁니다!” 다른 자매는 “마치 부활된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았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케냐에서 온 형제들 중에는 귄터 레슈케도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힘든 시기가 다 지나간 뒤 다시 함께 모일 수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지요.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에 대해 당국에서 염려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후 일찍, 무장한 군인들이 오더니 안전 문제 때문에 대회가 취소되었다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즉시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얼마의 시간을 내어 친구들을 격려해 줄 수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나이로비로 돌아와야 했지요. 형제들이 대회 프로그램을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계속 믿음 안에 머무를 수 있도록 개인적으로 격려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우리는 형제들이 믿음 안에 꼭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르완다에 어느 정도 평화가 찾아오자, 외국에 살고 있던 많은 르완다인이 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또한 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도 왔는데, 그들의 부모는 1950년대 말과 1960년대의 부족적·정치적 혼란기에 르완다를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르완다로 돌아온 사람 중에는 다른 나라에 있을 때 진리를 배운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무니아부랑가와 그의 가족은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르완다의 새 정부는 자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관공서에서 일하게 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무니아부랑가 형제도 일자리를 제공받았습니다. 하지만 르완다로 돌아온 그는 그리스도인 원칙과 일치하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친척들과 직장 동료들로부터 반대와 조롱을 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조기 퇴직 신청을 했고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르완다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을 위해 법적인 도움을 베푸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응기라바쿤지 마샤리키는 콩고 동부에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투치족이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차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게 사는 진지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니 정말 기적과도 같았습니다. 증인들의 사랑은 1994년에 투치족 대학살이 있었을 때 더 분명히 드러났지요. 형제들은 우리 가족을 숨겨 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나는 1998년에 베델에 초대받았으며 지금은 아내 에메랑스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신세계가 정말 기다려집니다. 그곳에는 편견도 차별도 없을 것이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함께 연합하여 사는 사람들이 땅에 가득할 테니까요.”

활동이 다시 진척되다

내전이 있기 직전인 1994년 3월에 르완다 전역에는 2500명의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대학살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1995년 5월에는 2807명이라는 전도인 신기록이 세워졌습니다. 마음이 진실한 사람들이 여호와의 조직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일례로 한 특별 파이오니아 자매는 22건이 넘는 성서 연구를 사회했으며 그 외에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 순회 감독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은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요.”

1996년 1월에는 “기쁨이 충만한 찬양자” 지역 대회가 열렸습니다. 정말 기쁨이 충만한 대회였습니다! 전해에는 대회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이 대회가 전쟁이 있은 후 처음으로 열린 대회였습니다. 대회를 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지요. 후투족과 투치족 형제 자매들이 서로 부둥켜안던 모습이 특히 감동적이었어요.” 최고 참석자 수는 4424명이었으며 285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귄터 레슈케 형제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침례 지원자들이 두 가지 질문에 ‘예고!’(‘예’라는 뜻) 하고 큰 소리로 대답할 때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들은 침례를 받으려고 운동장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내렸기 때문에 흠뻑 젖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더군요. ‘좀 있으면 어차피 젖을 건데 뭐 어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헹크 판 뷔설은 르완다로 돌아왔고, 활동을 재개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와 있던 귄터 레슈케 형제도 르완다로 임지가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고드프리 빈트와 제니 빈트도 다시 돌아왔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다!

내전이 끝나고 여러 해 동안 사람들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가족들과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 오레스테 무린다가 있습니다. 1994년, 키갈리에서 양쪽 군대 간의 싸움이 격화되어 사람들이 일제히 도피하는 일이 있었을 때,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에서 오레스테는 아내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 살 반 된 아들을 데리고 기타라마로 도피했습니다. 그런데 오레스테가 먹을 것을 구하러 밖으로 나갔을 때 다시 전투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그는 아들과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오레스테는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아들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때, 증인이 아닌 한 남자가 시골에서 키갈리로 일하러 왔다가 형제들 몇 명을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형제들과 대화하던 중에 자기 이웃의 가족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세니에 사는 그 가족은 전쟁 기간에 자녀들을 잃고 지금은 고아 한 명을 맡아 기르고 있는데, 그 아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며 자기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듣고 누구 이야기인지 알아차리고는 아이의 친부모에게 연락했고, 연락을 받은 오레스테와 그의 아내는 아들 사진을 그 남자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아이는 바로 이 부부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레스테는 즉시 아이를 데리러 갔으며, 이 부부는 2년 반 만에 아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현재 침례받은 전도인입니다.

증인 부모가 사망하면서 고아가 된 아이들 모두를 형제들이 돌보아 주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주목할 만합니다. 고아원으로 보내진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떤 형제들은 가족이나 이웃 사람의 자녀 가운데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돌보아 주기도 했습니다. 한 부부는 자녀가 열 명이었는데 고아 열 명을 맡아 키웠습니다.

북부 지역이 다시 위험해지다

1996년 말에 콩고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난민 수용소 내의 안전을 유지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수용소 내에는 100만 명이 넘는 르완다 난민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11월이 되자 난민들은 르완다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콩고의 우림 지대 속으로 도망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난민들 대부분은 르완다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는데 그중에는 1994년 12월에 돌아가지 않았던 형제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흙으로 온통 더러워진 옷을 입고 머리에는 보따리를 인 사람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긴 행렬을 이루어 키갈리 시내를 통과하는 모습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모든 난민은 자신들이 원래 살던 언덕이나 마을로 가서 재등록을 해야 했습니다. 한동안은 경계가 매우 삼엄했습니다.

안타깝게도 난민들과 함께 온 사람들 가운데는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인테라함웨 민병대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르완다 북서부에서 활동을 계속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안전을 확립하기 위해 군대가 파견되었습니다. 그곳에는 형제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중립을 지키기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100명이 넘는 전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많은 경우 그리스도인 중립을 충성스럽게 지킨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지역은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순회 감독자가 정기적인 방문을 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었습니다.

용감한 부부

테오발드 무니암푼두는 위험한 지역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순회 감독자 중 하나입니다. 그와 아내인 베랑실은 위험한 상황을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테오발드는 1984년에 침례를 받았으며 2년 뒤 다른 여러 형제 자매들과 함께 투옥되어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또한 그와 그의 아내는 투치족 대학살 기간에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대학살로 어머니를 잃은 십 대 소년의 목숨을 구해 준 다음 가까스로 탄자니아로 넘어갔습니다. 그곳에서 테오발드는 베나코와 카라그웨에 있는 두 개의 난민 수용소를 방문하여 형제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 두 수용소 사이를 오가는 길에 강도가 있어서 매우 위험했는데도 그렇게 했습니다.

르완다로 돌아온 테오발드와 그의 아내는 상황이 불안정한 북서부 지역의 증인들을 방문하기 위해 다시 한번 죽음을 무릅썼습니다. 테오발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어떤 회중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안전 문제 때문에 방문한 지역에서는 묵을 수가 없었지요. 어느 방문 기간에는, 우기에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네 시간을 걸어 형제들을 방문한 다음 다시 네 시간을 걸어 저녁 때 숙소로 돌아오기를 매일같이 반복했습니다.”

테오발드는 그 지역에 있는 어느 격리된 집단을 방문했을 때 만난 한 형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피에르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권 전도 학교 때 성서 읽기를 하기 위해 일어서서는 지정된 부분을 다 외워서 낭독하더군요. 하나도 안 틀리는 데다가 끊어 읽기와 의미 강세도 정확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지요! 낭독을 잘하는 형제에게 미리 부탁해서 읽어 달라고 한 다음 그대로 암기했던 겁니다. 그의 굳은 의지에 정말 격려를 받았습니다.”

쉴 틈 없이 바빴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했던 당시의 생활을 떠올리며 테오발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힘들었던 그 기간 내내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했지요. 그리고 ‘여호와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히브리서 13:6의 말씀을 자주 떠올렸습니다.” 이 부부는 순회 활동과 지역 활동을 충실하게 수행했으며 현재는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대회 회관 건축 공사

증인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키갈리에서 적합한 대회 장소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일례로 1996년 12월에 한 경기장에서 열린 “경건한 평화의 사자” 지역 대회에서는, 인근의 교도소에서 나오는 오수가 하수구를 통해 뿜어져 나오는 바람에 참석자들이 불편을 겪었습니다. 형제들은 악취가 심하다고 이야기했고 부모들은 아이들의 건강에 영향이 있을까 봐 염려했습니다. 그처럼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전국 위원회는 앞으로 그 경기장에서는 대회를 열지 말자고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어디에서 대회를 연단 말입니까?

키갈리의 한 회중에는 왕국회관을 지을 용도로 국토부에서 할당받은 부지가 있었습니다. 그 부지는 회관을 짓는 데 필요한 면적보다 훨씬 넓었기 때문에, 형제들이 왕국회관 한 채만을 건축하겠다고 계획서를 제출하면 국토부에서 그 부지의 일부를 떼어 다른 사람에게 할당해 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여호와에 대한 신뢰심을 가지고 왕국회관과 간단한 구조의 대회 회관을 건축할 계획서를 제출했으며, 추후에 왕국회관을 한 채 더 지을 수도 있다는 내용을 계획서에 포함시켰습니다. 당국에서는 계획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땅을 평평하게 고르는 작업을 한 다음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수백 명의 자원 봉사자들이 덤불을 제거했으며 화장실로 사용할 깊은 구덩이도 팠습니다. 그렇게 작업을 마치자 경사가 완만한 그곳은 대회를 열기에 적합한 멋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 달 동안 형제들은 그 부지에서 두 차례의 대회와 한 차례의 특별 모임을 가졌는데, 바람이 강하게 불고 비가 오는 바람에 참석자들은 방수 천이나 우산을 써야 했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은 벽이 없는 단순한 구조의 대회 회관을 건축하고 싶다고 통치체에 제의했습니다.

1998년 3월에 통치체는 대회 회관 건축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곧 사전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형제 자매들이 가족 단위로 와서 건축 기간 내내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지지대의 기초를 놓기 위해 구멍을 파는 작업을 했습니다. 모두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마음으로 일했습니다. 1999년 3월 6일에 스위스 지부의 장쥘 기유가 새롭게 지어진 이 훌륭한 시설에 대해 봉헌사를 했습니다.

1999년에는 전국이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같은 해 2월에 새로운 선교인 부부인 랠프 존스와 제니퍼 존스가 르완다 전국 사무실에서 일하도록 임명되었으며 베델 가족은 21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르완다인 형제 가운데 두 명은 약 1600킬로미터 떨어진 콩고 킨샤사로 가서 봉사 훈련 학교(지금은 독신 형제 성서 학교라고 불림)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콩고에서 전쟁이 벌어져 르완다 사람들이 킨샤사로 여행하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통치체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키갈리에 봉사 훈련 학교를 개설하도록 승인했습니다. 부룬디와 르완다와 콩고 출신의 학생 28명이 첫 학급에 참석했으며 졸업식은 2000년 12월에 있었습니다.

2000년 5월에는 르완다에 지부가 개설되었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형제들은 급속도로 성장하는 활동을 돌보기 위해 지부 사무실을 세울 만한 적합한 부지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1년 4월에 면적이 2헥타르에 달하는 부지를 매입했습니다. 키갈리의 많은 형제들은 그 땅에 수년간 방치되어 있던 덤불을 제거하느라 고생했던 일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콩고 동부에서 화산이 폭발하다

2002년 1월 17일, 콩고 동부의 고마에서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니이라공고 화산이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지역 주민 대부분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대피해야 했습니다. 그곳에 살던 1600명의 전도인 중 다수가 자녀들과 관심자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가까운 곳에 있는 르완다의 기세니로 왔습니다. 그들은 인근의 왕국회관들로 인도되었습니다.

다음 날 르완다 지부 사무실의 형제들은 음식과 담요와 의약품을 포함한 기본 필수품을 3톤 트럭에 실었습니다. 그 물건들은 콩고 국경과 접한 지역에 있는 여섯 개의 왕국회관으로 신속히 보내졌습니다.

르완다 정부는 왕국회관에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이 머물게 되면 안전에 문제가 생길까 봐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난민 수용소로 보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르완다 지부 위원회의 대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고마로 가서, 콩고 지부 위원 두 명과 고마에 있는 회중의 장로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콩고 형제들은 동료 형제들을 르완다에 있는 난민 수용소로 보낼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1994년에 우리는 2000명이 넘는 르완다 형제들과 그들의 가족과 관심자들을 돌봐 주었지요. 그러니까 우리 형제들이 수용소에서 살게 하지 말고 고마로 돌아오게 합시다. 우리가 르완다 형제들을 돌보았던 것처럼 그들도 돌봐 주겠습니다.”

그리하여 콩고 형제들은 동료 형제들에게 참으로 사랑에 찬 후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을 세속 조직에서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살게 하는 대신 자국으로 다시 맞아들여 형제들의 집에서 살 수 있게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르완다로 피신했던 형제들은 가족과 함께 고마로 돌아와 숙소를 제공받았습니다. 형제들이 그 시기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후에 벨기에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는 비닐 방수 천을 포함하여 더 많은 구호품을 보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새로운 집이 지어질 때까지 고마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신권 역사의 이정표가 된 일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역 건축 기술 사무소는 새로운 르완다 지부를 위한 설계도를 작성했으며, 현지 건축업자도 고용되었습니다. 국제 자원봉사자들이 공사에 참여했으며 많은 현지 증인들도 기꺼이 자원하여 조경과 마감 작업을 도왔습니다. 장애와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2006년 3월에 베델 가족은 아름답게 지어진 새 지부 사무실로 이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006년 12월 2일에는 통치체 성원인 가이 피어스와 그의 아내가 참석한 가운데 봉헌식 특별 프로그램이 열렸습니다. 15개국에서 온 112명의 대표자들을 포함하여 약 553명의 형제 자매들이 이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건축 공사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는 캐나다 출신의 짐 홈스와 레이철 홈스가 있었습니다. 미국 수화를 할 줄 알았던 그들은 수화를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 베델 가족 성원이 있으면 월요일에 베델 가족 「파수대」 연구가 끝난 뒤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여섯 명이 관심을 보였으며, 그들이 수화를 매우 잘하게 되자 얼마 안 있어 수화 집단이 생겼습니다.

2007년 6월에는 스위스에서 봉사 훈련 학교를 졸업한 케빈 럽이 수화 밭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선교인으로 르완다에 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수화 봉사를 한 경험이 있는 캐나다 출신의 한 선교인 부부도 르완다로 왔습니다. 2008년 7월에는 수화 회중이 형성되었으며 곧이어 여러 집단들도 생겼습니다.

2007 지역 대회에 참석한 형제들은 키냐르완다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완성되었다는 발표를 듣고 참으로 기뻐했습니다! 세계 성서 공회 연합회에서는 이미 1956년에 키냐르완다어로 된 완역 성서를 발행한 바 있었습니다. 이 번역판에는 성서를 현지어로 번역하기 위한 진실한 노력이 담겨 있으며 히브리어 성경 부분에 예호바(여호와)라는 이름도 일곱 번이나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신세계역」은 누구나 더 쉽게 구할 수 있으며 특히 가진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도 구할 수 있는 성서입니다. 현지 번역자들이 뉴욕의 번역 봉사부와 협력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이 번역판은 정확하며 읽기 쉽습니다. 왕국회관에 참석한 대부분의 아이들이 개인용 성서를 가져와서는, 집회 중에 성구를 낭독해야 할 때면 서로 읽겠다고 손을 드는 모습은 정말 흐뭇한 장면입니다!

중립과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가 생기다

1992년에 법적 인가를 받은 뒤로 형제들은 종교의 자유를 누리긴 했지만 그리스도인 중립 문제로 인해 계속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군에서 관할하는 야간 순찰 업무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 15년간 수백 명의 형제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형제들로 이루어진 대표자들이 정부 장관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후 당국에서는 형제들이 대체 봉사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데 동의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215명의 학교 교사가 정치적 성격을 띤 세미나에 참석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실직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118명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했습니다. 지부 사무실의 대표자들이 당국에 가서 우리의 중립 입장을 설명했고, 여러 달이 지난 후 그 아이들 대부분이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르완다 증인들이 활동한 역사를 언급하면서, 1986년에 여호와의 증인은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투옥을 당했지만 그들이 1994년에 있었던 대학살에 참여하지 않은 주된 이유 한 가지도 중립 입장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요한 17:16.

여호와의 증인은 정부의 법을 준수하는 한편, 어떤 정부가 집권하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프랑수아그자비에 하키지마나는 중립 입장 때문에 18개월간 수감되었습니다. 대학살 이후 정권이 바뀌면서 그는 같은 이유로 1997년과 1998년에 또다시 수감되었습니다. 이러한 예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중립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 왔으며 특정 정부에 반대하여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인 중립은 전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원칙들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형제들은 주간 집회를 열고 대회를 개최할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많은 교도소에서는 전파 활동을 하고 집회를 보는 것이 허용되어 있으며, 상당수의 수감자들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2009 봉사 연도에는 여섯 건의 재판에서 르완다의 여호와의 증인에게 유리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미래가 밝다

르완다 이야기를 하면서, 왕국회관 건축 프로그램이 거둔 놀라운 성과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재원이 부족한 나라들에 왕국회관을 건축하기 위한 새로운 마련이 1999년에 시작된 이래로, 수수하지만 아름다운 왕국회관 약 290채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르완다에 지어졌습니다.

형제들은 현지 전도인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면서 대개 3개월 만에 왕국회관을 완성합니다. 나라 곳곳에서 왕국회관들이 갑자기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호와의 백성에게는 증거할 기회가 생기고 있습니다. 또한 키갈리의 대회 회관 외에도 더 작고 더 단순한 구조의 벽이 없는 대회 회관 열 채가 지어진 덕분에, 전도인들은 산을 넘어 다니면서 먼 길을 여행하지 않고도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확장이 가능하게 설계된 네 채의 왕국회관이 건축되어 이 장소들에서 대회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 처음 몇 달간, 모든 회중은 임명되지 않은 구역이나 자주 돌지 않는 구역을 돌보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합니다. 이러한 구역들에서 봉사하기 위해 전도인들은 때때로 자비를 들여 먼 거리를 여행합니다. 그리고 더 멀리 떨어진 구역의 경우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파견되어 3개월간 봉사합니다. 그 결과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어 앞으로 생길 회중들을 위한 기초를 이루게 됩니다. 예를 들어 2010년 1월부터 3월까지 있었던 특별 운동 기간을 통해 수백 건의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아홉 개의 집단이 새로 생겼습니다. 또한 같은 기간에 30명의 임시 특별 파이오니아들은 열다섯 개의 새로운 집단이 형성되도록 도왔습니다.

르완다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지다

2009 “깨어 있으십시오!” 지역 대회에 참석한 르완다 형제들은 새로운 노래책이 발행된다는 소식과 함께 키냐르완다어로 된 새 노래 몇 곡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새 노래책은 키냐르완다어로 신속히 번역되었습니다. 그리고 때맞게 회중에 공급되어 2010년 1월부터 르완다에서도 전 세계의 형제들과 동일하게 집회 때 새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듯이, 2007년에 키냐르완다어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발행된 후로 모두들 키냐르완다어로 된 완역 성서는 언제 받아 볼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2010 지역 대회가 가까워 오고 있을 무렵, 통치체 성원인 가이 피어스가 8월에 키갈리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것이라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대회는 지부 사무실 건너편에 있는 한 경기장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들떠 있었습니다. 피어스 형제가 키냐르완다어로 된 완역 「신세계역 성경」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금요일 오전 회기에 참석한 7149명은 새로운 성서를 각자 한 권씩 받았습니다. 일요일에는 르완다의 다른 지역에서 온 형제들이 참석하여 전체 참석자 수가 1만 1355명에 달했습니다. 대회 기간에 경기장 밖에서 행군하고 있던 군인들도 새로운 성서를 요청했으며 그들에게 180권이 전해졌습니다. 키갈리 시의 시장과 경찰청장과 체육부 관리들도 고마워하며 성서를 받았습니다.

1970년에 르완다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활동이 시작되었을 때 전도인 수는 세 명이었습니다. 이제 르완다에는 2만 명가량의 전도인들이 있으며 그들은 매월 약 5만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합니다. 2011년 4월에 있었던 기념식에는 8만 7010명이 참석했습니다. 르완다의 형제들은 지난 세월 동안 참으로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도인의 약 25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전 시간 봉사에 참여하고 있고 나머지 전도인들은 매월 평균 20시간을 봉사에 바칩니다. 우리 형제들은 “수확하는 ‘주인’”과 함께 이 비옥한 밭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으며, 손을 늦추겠다는 생각은 한시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활동을 계속 축복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천 개의 언덕이 있는 땅’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참숭배의 산으로 모여들 것인지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습니다.—마태 9:38; 미가 4:1, 2.

[각주]

^ 2항 이웃 나라인 콩고 인민 공화국(브라자빌)과 구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콩고 민주 공화국 또는 콩고(킨샤사)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는 콩고라는 국명을 사용할 것이다.

^ 95항 데보라는 약속대로 전도인이 되었고 열 살에 침례를 받았다. 현재는 어머니와 함께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다.

^ 111항 그 아기는 현재 침례받은 자매가 되었다.

[178면 삽입]

그는 청중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조심하라고 말했지요

[181면 삽입]

“코메라!” 하고 말하면서 서로 인사하곤 했습니다. 그 말은 “힘내요!”라는 뜻이었지요

[218면 삽입]

“여호와 하느님,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직 당신만이 저희 목숨을 구해 주실 수 있습니다!”

[166면 네모와 삽화]

르완다 개요

국토

동서 길이는 233킬로미터, 남북 길이는 177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인구는 110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며 아프리카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다. 수도는 키갈리이다.

주민

후투족, 투치족, 트와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시아인과 유럽인도 일부 살고 있다. 주민의 절반 이상은 로마 가톨릭교인이며, 다수의 재림교인을 포함하여 프로테스탄트교인이 4분의 1 이상을 차지한다. 나머지는 이슬람교나 그 외 다양한 토속 신앙을 믿는다.

언어

공용어는 키냐르완다어, 영어, 프랑스어이다. 이웃 나라들과의 교역에는 스와힐리어가 사용된다.

직업

대부분의 르완다인은 농업에 종사한다. 토질이 대체로 좋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은 자기 가족이 먹을 양밖에 재배하지 못한다. 차, 살충제로 쓰이는 국화, 커피를 재배하며 주된 수출품은 커피이다.

식품

감자, 바나나, 콩이 기본 식품이다.

기후

적도 가까이에 있지만 날씨가 온화한 편이다. 국토 안쪽에 있는 고지대의 평균 기온은 섭씨 21도이며, 연간 강수량은 약 1140밀리미터이다.

[185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가 우리를 쫓아 다닐 거야!”

에마뉘엘 응기렌테

출생 1955년

침례 1982년

소개 르완다 지부 위원이며 번역부 감독자로 일하고 있다.

■ 1989년에 나는 르완다 동부 지역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해 말에 번역 사무실에서 일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번역을 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터라 매우 놀랐고 과연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지만 나는 세 개의 출판물을 번역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집을 한 채 임대했고 사전도 몇 권 마련했어요. 어떤 때는 커피로 잠을 쫓아 가며 밤새 일하기도 했지요.

1990년 10월에 반군이 공격해 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비밀 요원들이 우리를 조사하기 시작했지요. 내가 집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업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 그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예고 없이 집을 수색한 적도 있었지요. 전날 밤새 타자를 치고 새벽 5시가 되어서야 잠을 청했는데, 갑자기 주민 봉사 활동에 참여하러 밖으로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당국에서 사람들이 들이닥쳐 우리 집을 뒤졌습니다. 집에 돌아왔더니 이웃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더군요. 경찰관 한 명과 현지 관리 한 명이 내가 번역한 원고를 한 시간 동안이나 읽었는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는 걸 보고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집에서 나가자. 안 그러면 여호와가 우리를 쫓아 다닐 거야!”

[194면 네모와 삽화]

100일 만에 100만 명이 목숨을 잃다

“1994년에 발생한 르완다 대학살은 현대 역사에서 가장 명명백백하게 대학살로 구분되는 사건 중 하나이다. 1994년 4월 초부터 7월 중순에 이르는 기간 동안, 중앙아프리카의 이 작은 나라에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은 소수인 투치족을 상대로 조직적인 살육을 저질렀다. 극단주의 성향의 후투족 정권은 민주화 움직임과 내전으로 인해 권력을 잃게 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제거 대상에는 투치족뿐만 아니라 온건파 후투족도 포함되었다. 대부분 투치족으로 구성된 반군이 르완다를 장악하고, 학살을 주도한 정권이 나라 밖으로 쫓겨난 뒤에야 대학살은 끝이 났다. 이 대학살과 내전으로 인해 불과 100일 만에 1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르완다에서 자행된 이 학살은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살상 행위 가운데 하나이다.”—「대학살 및 비인도적 범죄 백과사전」(Encyclopedia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이 대학살로 인해 약 400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살해당했습니다. 그중에는 투치족 형제 자매들을 보호해 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후투족 증인들도 포함됩니다. 하지만 동료 신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여호와의 증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삽화]

르완다를 떠나는 난민들

[197면 네모와 삽화]

“사형장”

“대학살을 주도한 사람들은 성역에 대한 역사적 통념을 이용했다. 보호해 주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수많은 투치족을 교회 건물로 유인한 것이다. 그런 다음, 피신처를 찾아 온 이 불쌍한 사람들을 후투족 민병대와 군인들이 조직적으로 살육했다. 교회와 학교 건물에 모여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며, 살아남은 사람이 있으면 마체테와 낫과 칼로 모조리 죽였다. ··· 하지만 교회는 단순히 교회 건물이 사형장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훨씬 더 깊이 관여했다. 일부 마을에서 교직자와 전도사와 교회 직원들은 지역 주민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사용하여 제거 대상인 투치족을 색출해 냈다. 어떤 경우에는 교회 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살육에 가담하기도 했다.”—「그리스도교와 르완다 대학살」(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가톨릭]교회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주된 비판에 따르면, 교회는 자신들이 원래 지지하던 투치족 지도층에 등을 돌리고 후투족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지지했으며, 그리하여 다수가 후투족인 이 나라에서 하비아리마나가 권력을 잡는 데 일조했다. 대학살과 관련해서도, 비평가들은 교회가 증오를 부추기고 가해자들을 비호한 것과 교회로 피신해 들어온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르완다 국민 다수를 영적으로 지도해야 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학살을 중단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대학살 및 비인도적 범죄 백과사전」.

[201-203면 네모와 삽화]

“다들 이 사람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어떻게 죽일 있겠나?”

장마리 무테진타레

출생 1959년

침례 1985년

소개 건축업자로 일하고 있으며 밝은 미소를 지닌 충실한 형제이다. 침례받고 얼마 안 된 시점인 1986년에 8개월간 수감되었다. 1993년에 잔과 결혼했고 현재 키갈리 대회 회관 위원회의 사회자로 일하고 있다.

■ 4월 7일, 우리 부부는 총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태어난 지 한 달 된 우리 딸 제미마도 잠에서 깼지요. 처음에는 그저 정치적인 문제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인테라함웨 민병대가 모든 투치족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우리 가족은 투치족이었기 때문에 밖에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지요. 우리가 집에 숨어 있는 동안, 용감한 후투족 형제들인 아타나스와 샤를과 에마뉘엘이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각자 다른 형제의 집에서 한 달 정도를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투치족을 색출해 내는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민병대가 내가 숨어 있던 곳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칼과 창과 마체테를 들고 있었지요. 나는 그들을 보자마자 있는 힘껏 달려 덤불 속에 숨었지만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무기를 든 남자들이 나를 에워쌌지요.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탄원하듯 말하자 그들은 “이런 반역자 같으니!”라고 하더군요. 그러고는 나를 발로 차 넘어뜨렸고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때렸습니다. 주위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있었는데 그중에는 내가 전에 증거했던 남자도 있었지요. 그는 용감하게도 “이 사람을 살려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후투족 형제인 샤를이 나타났습니다. 샤를의 아내와 아이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울부짖기 시작했지요. 그 살인자들은 마음이 동요되어 “다들 이 사람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어떻게 죽일 수 있겠나?” 하고 말하며 나를 보내 주었습니다. 샤를은 자신의 집으로 나를 데려가 상처를 돌봐 주었어요. 민병대는 내가 도망가면 나 대신 샤를을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시 아내와 우리 아기는 나와 계속 떨어져 지내고 있었지요. 무시무시한 공격이 있던 와중에 아내 역시 구타를 당했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아내에게 내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천을 구해 와서 시신을 감싸라고 말하기까지 했지요.

아타나스의 집에서 다시 만나게 된 우리 부부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지만 내일이면 우리도 죽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날도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에 떨면서 여기저기 숨을 곳을 찾아다녀야 했습니다.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이렇게 간절히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 당신은 저희를 도와주셨습니다. 제발 다시 한번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아이를 키우면서 당신을 계속 섬기고 싶습니다!” 저녁이 되자 세 명의 후투족 형제들이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 힘든 일을 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포함해 30명쯤 되는 투치족을 이끌고 위험천만한 바리케이드를 여러 번 통과하여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준 것이지요. 그때 함께 간 사람 가운데 여섯 명이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샤를과 다른 형제들이 그 후로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수십 명의 투치족을 도와 도망치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인테라함웨 민병대는 매우 분노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샤를과 또 다른 후투족 전도인인 레오나르를 붙잡았지요. 샤를의 아내는 민병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투치족이 도망치게 도와주었으니 너희는 죽어 마땅해.” 그들은 결국 샤를과 레오나르를 죽였습니다. 이 일을 생각하면 예수의 이러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요한 15:13.

내전이 있기 전에 결혼 준비를 할 당시 우리 부부는 둘 중 한 명은 꼭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자고 했었지요.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많은 친척이 죽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여섯 명의 고아를 맡아 키워야 했습니다. 그땐 우리에게도 이미 두 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아내는 내전이 끝난 뒤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할 수 있었으며, 지금까지 12년간 계속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맡아 기른 여섯 명의 아이들은 부모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이 아이들 모두 지금은 침례받은 전도인입니다. 남자 아이 세 명은 봉사의 종이 되었고 여자 아이들 중 한 명은 남편과 함께 베델에서 섬기고 있지요. 우리에게는 현재 네 명의 자녀가 있으며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침례받은 전도인입니다.

[삽화]

무테진타레 형제 부부 그리고 두 명의 자녀와 다섯 명의 고아들

[204, 205면 네모와 삽화]

“우리는 진리 덕분에 균형을 잃지 않을 있었습니다”

발레리 무사비마나와 앙젤린 무사브웨는 친자매간입니다. 이들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는데 아버지는 교구 위원회의 위원장이었습니다. 발레리는 수녀가 되려고 4년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한 교직자의 행실에 실망하여 1974년에 공부를 그만두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여 침례를 받았고 1979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동생인 앙젤린도 성서를 연구하여 침례를 받았습니다. 이 두 자매는 함께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와 왔습니다.

대학살이 일어났을 당시에 키갈리에 살고 있던 앙젤린과 발레리는 자신들의 집에 아홉 명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임신한 여자 두 명도 있었는데 그중 한 여자는 남편이 죽임을 당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습니다. 얼마 후 그 여자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기는 매우 위험했기 때문에 이 두 자매가 출산을 도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웃 사람들은 음식과 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인테라함웨는 앙젤린과 발레리가 투치족을 숨겨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자매들의 집에 와서 “투치족 여호와의 증인들을 죽이러 왔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매들이 세 들어 사는 집이 한 군대 장교의 집이었기 때문에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 그리하여 집 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살아남았습니다.

내전이 심해지고 총탄이 비 오듯 계속 쏟아지자 앙젤린과 발레리는 결국 그 지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증인들과 함께 고마로 도피했으며 콩고 형제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도 계속 전파 활동을 했고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했습니다.

이들은 대학살로 인한 감정적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발레리는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외젠 은타바나와 그의 가족을 비롯하여 많은 영적 자녀를 잃었어요. 하지만 우리는 진리 덕분에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행악자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고 있지요.”

[각주]

^ 265항 내전이 끝난 뒤 그 집의 주인은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아내와 두 자녀는 증인이 되었다.

[206, 207면 네모와 삽화]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세말리

출생 1964년

침례 1981년

소개 아내인 조젯과 함께 키갈리 외곽에 살았다. 자상한 아버지이자 남편이며 현재 키갈리의 병원 교섭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대학살이 시작되자 우리 집 인근에 살던 후투족 형제인 아타나스가 “그들이 투치족을 전부 다 죽이고 있어요. 당신도 죽일 거예요”라는 경고를 전해 왔습니다. 그는 자기 집으로 오라고 강권했지요. 내전이 있기 전에 지하 약 3.5미터 아래에 방을 파 놓았는데 그곳에 우리를 숨겨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들어 둔 사다리를 타고 내가 제일 먼저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아타나스는 그곳에 있는 우리가 음식과 깔개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지요. 그사이 도처에서는 살육이 계속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숨어 있다고 의심한 이웃 사람들이 아타나스와 그의 가족에게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고 위협했지만 그들은 우리를 계속 숨겨 주었습니다. 정말 그들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3일 뒤에 그 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지자 아타나스의 가족도 지하로 내려와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총 열여섯 명이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겁이 나서 불빛을 사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생활했지요. 우리는 설탕물에 담근 생쌀을 한 사람당 한 숟가락씩 먹었는데 그게 하루 식사였습니다. 열흘이 지나자 그것마저도 바닥이 나더군요. 13일째가 되니 정말 배가 고팠지요! 이제 어쩌나 싶었습니다. 사다리 위에 올라서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간신히 볼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전과는 다른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보였거든요. 아타나스의 가족이 나를 보호해 주었으니 이제는 내가 희생할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아타나스의 십 대 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 음식을 구해 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모두가 함께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지요.

약 30분 뒤에 우리는 이제 르완다 애국 전선이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러 돌아왔습니다. 군인 몇 명도 우리를 따라왔고 나는 그들에게 우리가 숨어 있던 곳을 보여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믿기 어려워하던 군인들도 구멍 밖으로 모든 형제 자매들이 한 사람씩 나오기 시작하자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아내는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씻지도 못하고 옷을 빨아 입지도 못한 채 거의 3주 동안이나 지하에 있었으니까요.”

군인들은 두 부족의 사람들이 그 구멍 안에 함께 있었다는 걸 알고 매우 놀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설명해 주었지요.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부족 간에 전혀 차별을 하지 않아요.” 그들은 놀라워하면서 “구멍에서 나온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설탕을 갖다 줘!”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를 어떤 집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그곳에는 약 100명의 사람들이 임시로 머물고 있었지요. 그 후에 어떤 자매가 자기 집에서 꼭 함께 지내자며 우리 열여섯 명 모두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우리 형 가족과 여동생 가족 그리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때와 예기치 못한 일이 [우리] 모두에게 닥친다”는 점을 알고 있지요. 아내는 우리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는 많은 형제 자매를 잃었어요. 도망 다니고 숨어 지내면서 고통스러운 일을 견뎌 낸 사람들도 많지요. 하지만 우린 기도를 통해 여호와와의 관계를 튼튼하게 했고 그분의 손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조직을 통해 적절한 때에 도움을 베풀어 우리를 위로해 주셨지요.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넘치도록 축복해 주셨습니다.”—전도 9:11.

[208, 209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 끔찍했던 시기를 견뎌 낼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알베르 바하티

출생 1958년

침례 1980년

소개 장로로 섬기고 있으며 세 자녀의 아버지이다. 아내와 큰딸은 정규 파이오니아이며 아들은 봉사의 종으로 일하고 있다. 조용한 성격의 후투족 형제인 알베르가 1977년에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을 당시 전국에는 전도인이 약 70명뿐이었다. 1988년에 투옥되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가 정당 배지를 달기를 거부하자 전직 군인이었던 이웃 사람이 핀이 달린 배지를 알베르의 살에 꽂고는 “이제야 배지를 달았군!” 하고 비웃듯이 말했다.

■ 대통령들의 사망 사건이 있은 후에 몇몇 형제들과 친척들과 이웃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도망 왔습니다. 하지만 투치족 자매들인 고레티와 수잔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아서 걱정이 되더군요. 매우 위험하긴 했지만 나는 그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도망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고레티와 그의 자녀들이 보였어요. 그 방향으로 계속 가면 바리케이드가 나온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왔지요. 안 그랬으면 틀림없이 죽임을 당했을 겁니다.

며칠 후, 수잔도 다른 다섯 사람과 함께 우리와 합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사람들을 포함하여 우리 집에는 총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큰 위험에 처해 있었지요.

인테라함웨가 적어도 세 차례 우리 집에 왔습니다. 한번은 창문을 통해 내 아내인 베스틴을 보고는 밖으로 나오라고 했지요. 아내는 투치족이었습니다. 나는 그 살인자들과 아내 사이를 가로막고는 “아내를 죽일 거면 나부터 죽이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상의하더니 아내에게 집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여자는 죽이고 싶지 않아. 남자를 죽여야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처남에게 주의를 돌리더군요. 그들이 처남을 밖으로 끌어내자 나는 몸을 던져 그들과 처남 사이를 막아서며 “하느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놔주십시오!” 하고 애원했습니다.

그중 한 명이 팔꿈치로 나를 가격하면서 “하느님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말한 뒤에 그는 마음이 바뀌어 “좋아! 데려가!” 하고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처남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한 달쯤 뒤에 형제 두 명이 음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나는 가지고 있던 콩 얼마를 나누어 주었지요. 그러고 나서 어떤 길이 안전한지 알려 주려고 그들과 함께 가고 있는데 총소리가 들렸고 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유탄 파편에 눈을 맞은 것이었지요. 한 이웃 사람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지만 부상을 입은 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집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내전이 더욱 심해져서 사람들이 우리 집에 계속 머무는 것이 매우 위험해졌지요. 그래서 우리 집에 있던 사람들은 다른 형제들 집으로 피신했고 그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1994년 6월까지 그들 모두를 지켜 주었습니다. 나는 10월이 되어서야 아내와 식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어요. 끔찍했던 그 모든 시기를 견뎌 낼 수 있도록 나와 우리 가족을 도와주신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

[삽화]

알베르 바하티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숨겨 준 사람들

[210-212면 네모와 삽화]

‘이것이 정로라’

가스파르드 니용기라

출생 1954년

침례 1978년

소개 잘 웃고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으며 진리를 위해 두려움 없이 싸우는 투사이다. 세 명의 딸을 두었으며 현재 르완다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4월 7일 이른 아침, 총격이 시작된 후에 나는 투치족이 사는 집 열다섯 채가 불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중에는 우리 형제들의 집 두 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집이 다음 차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투치족인 아내와 우리 두 딸에게 벌어질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소문과 거짓 보도가 난무하는 가운데 사람들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지요. 아내와 아이들이 인근에 사는 형제 집으로 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나중에 합류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 후 내가 가도 위험하지 않겠다 싶어 그 집에 가 보니 아내는 그곳에 없었어요. 큰 학교 건물로 피신해야만 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한 이웃 사람이 내게 와서는 “학교에 피신해 있는 투치족은 모두 죽임을 당할 거예요!” 하고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즉시 학교로 달려가서 아내와 우리 아이들을 찾아냈어요. 그리고 형제 자매들을 포함해 2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모으고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나는데 민병대가 사람들을 마을 밖에 있는 한 장소로 데려가더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장소에서 죽임을 당한 투치족은 총 20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한 이웃 여자가 그 학교 건물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인테라함웨가 학교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 여자의 남편은 갓난아이를 안고 도망했습니다. 그 여자는 공포에 질려 허둥대다가 다른 방향으로 갔지요. 그의 남편은 투치족이었지만 아이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케이드들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집으로 달려와서는 아이에게 먹일 우유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밖에 나갔다가 그만 민병대가 지키고 있던 바리케이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투치족 사람의 아기에게 줄 우유를 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투치족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여긴 군인들은 “이 사람을 죽여 버리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들고 있던 총의 개머리판으로 나를 쳤지요. 얼굴과 코에서 피가 흘렀고 나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내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 근처에 있는 집 뒤로 나를 끌어다 놓았습니다.

한 이웃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는 “여기서 떠나야 해요. 안 그러면 그들이 다시 와서 당신을 정말 죽일 겁니다” 하고 말했지요. 그리고 그는 내가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몸은 매우 아팠지만 그 일은 오히려 내게 보호가 되었습니다. 이튿날 다섯 명의 남자가 내게 와서는 민병대 대장의 운전사 일을 하라고 강요했거든요. 내가 운전을 할 줄 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내가 다친 걸 보고 더는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테라함웨와 함께 순찰을 돌라고 압력을 가하지도 않았지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두려움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투치족 여자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뛰어 들어왔지요. 우리는 그 여자를 부엌에 있는 찬장 속에 숨겨 주었고 두 아이는 우리 애들과 함께 다른 방에 있게 했습니다. 반군인 르완다 애국 전선은 계속 진격해 오고 있었고, 인테라함웨가 투치족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투치족 아내를 둔 후투족 남자들까지 모두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다시 도망할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반군이 이미 우리가 사는 지역까지 장악해 버린 상태였어요. 이제 투치족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반대로 내가 죽임을 당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웃 사람들 여러 명과 함께 바리케이드로 갔습니다. 이제는 반군이 그곳을 지키고 있더군요. 군인들은 내가 후투족인 데다가 머리에 붕대를 감은 걸 보고 민병대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과 나에게 이렇게 소리쳤어요. “너희 중에는 살인자들도 있고 약탈자들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보고 도와 달라고! 이 중에 투치족을 숨겨 주거나 보호해 준 사람이 있기나 해?” 나는 내가 숨겨 주었던 여자와 아이들을 보여 주었지요. 군인들은 아이들을 한쪽으로 데려가더니 “머리에 붕대를 한 이 남자 너희가 아는 사람이야?” 하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저 아저씨는 인테라함웨가 아니에요. 여호와의 증인이고 착한 사람이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그 투치족 여자와 그 두 아이의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이제는 그들이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입니다!

그 대답에 만족한 군인들은 키갈리에서 20킬로미터가량 떨어져 있는 난민 수용소로 우리를 데려갔는데, 그곳에는 내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1만 6000명 정도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열네 개 회중에서 온 약 60명의 형제 자매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집회를 마련했는데 첫 집회에 96명이나 참석했지요! 하지만 살해당한 벗들과 강간을 당한 자매들의 소식을 듣는 건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장로는 나 혼자뿐이었고 많은 형제 자매들이 성경을 통해 위로와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었지요. 나는 가슴 찢어질 듯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신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공포에 떨면서 여러 주를 보내던 우리는 7월 10일에 마침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두렵고 위험했던 시기에 나는 ‘이것이 정로라’라는 제목의 노래를 자주 생각했지요. 그 노래의 이러한 가사는 내게 정말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좌나 우로 결코 가는 일 없이, 하나님 길로만 나아가리라.”

[223, 224면 네모와 삽화]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헹크 뷔설

출생 1957년

침례 1976년

소개 네덜란드 베델에서 봉사하다가 1984년에 길르앗 학교에 참석했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봉사하도록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차드로 임지가 바뀌었다. 1992년 9월에 르완다로 임명되었다. 지금은 아내인 베르트와 함께 르완다 지부 사무실에서 섬기고 있다.

■ 내가 르완다에서 처음으로 임명받은 회중은 키갈리 수드 회중이었습니다. 회중에는 아이들이 정말 많았고 형제 자매들은 온정이 넘치고 후대도 참 잘했지요. 1992년 당시에는 르완다에 회중이 많지 않았으며 전도인 수도 150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당국에서는 계속 우리를 의심하고 있었고, 그래서 전파 활동 중에 경찰이 우리를 불러 세워 신분증을 검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대학살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르완다를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콩고 동부 지역에 있는 난민들을 도우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이로비에 있던 나는 르완다 국경과 인접해 있는 고마라는 도시로 갔습니다. 생전 처음 가 보는 곳인 데다가 아는 것이라곤 한 장로 형제의 이름밖에 없었지요. 그 형제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택시 기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다른 기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30분도 안 되어 나를 그 장로 형제 집 앞으로 데려다 주더군요. 르완다 전국 위원으로 일하는 형제 두 명이 국경을 넘어 고마로 왔고, 나는 케냐 지부에서 르완다의 형제들을 돕기 위해 마련한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나이로비에서 고마에 두 번째로 갔을 때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나는 르완다 국경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지요. 거리는 얼마 안 되었지만 르완다에서 물밀듯 빠져나오는 수많은 난민들 사이를 헤치며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헹크 은두구(스와힐리어로 ‘형제’라는 뜻)! 헹크 은두구!” 하고요.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하고 살피는데 알퐁신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당시 열네 살 정도였던 알퐁신은 내가 이전에 키갈리에 있을 때 나와 한회중에 있던 여자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엄마를 잃어버렸던 것이지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꼭 붙어 다녔습니다. 그리고 피난 온 형제 자매의 집결 장소로 사용되던 왕국회관으로 그 애를 데려다 주었지요. 알퐁신은 어느 콩고인 가족의 돌봄을 받게 되었고 나중에는 같은 회중 출신인 한 난민 자매가 그 애를 보살펴 주었습니다. 후에 알퐁신은 키갈리에서 엄마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삽화]

헹크와 그의 아내인 베르트

[235, 236면 네모와 삽화]

여호와께서는 놀랍고도 큰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귄터 레슈케

출생 1937년

침례 1953년

소개 1958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길르앗 제43기 학급에 참석했다. 1967년부터 가봉,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케냐에서 봉사했으며 그 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여행하는 활동을 했다. 현재는 르완다 지부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 나는 1980년에 르완다를 처음으로 방문했습니다. 케냐에서 봉사하다가 지역 감독자 일을 하러 간 것이었지요. 당시 르완다에는 회중이 일곱 개밖에 없었고 전도인도 127명뿐이었습니다. 나는 르완다에서 처음으로 열린 파이오니아 봉사 학교에서 다른 형제 한 명과 함께 강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 학급에 참석했던 22명의 파이오니아 가운데 많은 사람이 지금도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지요. 형제들이 열심히 봉사하고 진리에 대해 좋은 인식을 나타내는 모습을 본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케냐로 돌아왔습니다.

1996년에 케냐 지부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케냐에서 18년을 지낸 나는 이미 그곳에 정이 많이 들어 있었는데 이제 르완다로 가서 봉사하라는 내용이었지요. 르완다에 도착해 보니 그곳 상황은 여전히 불안정하더군요. 밤이 되면 자주 총소리가 들렸습니다. 하지만 곧 나는 새로운 임지에서의 봉사를 즐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르완다에서의 활동을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신다는 걸 경험할 때면 봉사가 더 즐거웠습니다.

당시에는 대회가 매우 열악한 장소에서 열렸어요. 그래도 형제들은 불평하지 않고 땅바닥이나 바위 위에 앉아 대회를 보곤 했지요. 침례장은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천막 천을 깔아 만들었습니다. 아직도 르완다의 오지에는 그런 장소에서 대회를 보는 곳이 많아요. 하지만 그동안 벽이 없는 간단한 구조의 대회 회관들이 지어진 곳도 있고, 확장이 가능하게 설계된 왕국회관도 몇 채 건축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매우 열정적으로 좋은 소식을 선포했습니다. 키갈리에 있는 회중들에서는 전도인들이 주말에 집회를 매우 이른 시간에 본 다음 집회가 끝나면 야외로 나가 어두워질 때까지 봉사를 계속했지요.

나는 회중의 어린 청소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늘 노력했습니다. 그 아이들이 나중에 전도인이 되면 더 많은 책임들을 맡게 될 거였으니까요. 많은 청소년들은 나이가 어린데도 두려움 없는 태도로 진리의 편에 섰으며 자신이 여호와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정말 뿌듯합니다!

예를 들어, 남부 지역에 사는 열한 살 된 뤽이라는 소년은 교실에서 국가를 불러 보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지요. 뤽은 국가 대신에 왕국 노래를 한 곡 불러도 될지 공손하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허락해 주었고 뤽이 노래를 다 부르고 나자 모두가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그 노래의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사도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이 어린 청소년이 창조주를 찬양하는 일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지요. 이러한 경험들은 내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또 한번은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이유로 여러 해 전에 수감 생활을 했던 한 자매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자매는 교도소에 있을 때 남자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의 이름을 “쉬카마 호다리”(스와힐리어로 ‘확고함을 유지하다’라는 뜻)라고 지었습니다. 쉬카마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독신 형제 성서 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봉사의 종이자 특별 파이오니아로 섬기고 있습니다.

르완다에 있는 우리 형제들은 여러 해 동안 금지령과 내전과 대학살을 포함하여 매우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봉사에서 열심을 보이고 충실함을 나타냈습니다. 그런 모습은 내게 늘 감동을 주었지요. 이 형제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특권입니다. 또한 나는 여호와의 보호와 축복과 지원을 항상 느꼈으며 그로 인해 여호와와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놀랍고도 큰일들을 행하셨습니다!—시 136:4.

[254, 255면 도표와 삽화]

연대표—르완다

1970

1970 최초의 전도인들이 봉사 보고를 내다.

1975 최초의 르완다인 가족이 콩고에서 돌아오다.

1976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가 키냐르완다어로 발행되다.

1978 「파수대」가 키냐르완다어로 월 1회 발행되기 시작하다.

1980

1982 금지령이 내려지다. 책임 맡은 형제들이 투옥되다.

1986 전체 전도인의 3분의 1이 투옥되다.

1990

1990 북부 지역에서 전쟁이 터지다.

1992 르완다 전역의 증인들을 위해 최초의 지역 대회가 열리다.

활동이 인가되다.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1994 투치족 대학살.

1996 선교인들이 돌아오다.

봉사부가 개설되다.

1998 키냐르완다어판 「파수대」가 영어판과 동시에 발행되기 시작하다.

1999 벽이 없는 대회 회관이 키갈리에서 봉헌되다.

2000

2000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다.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가 활동을 시작하다.

2001 새 지부 건물을 위한 부지를 매입하다.

2006 새로운 지부 시설이 봉헌되다.

2007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키냐르완다어로 발행되다.

2010

2010 키냐르완다어로 「신세계역 성경」 완역이 발행되다.

[234면 그래프와 삽화]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전도인 총수

파이오니아 총수

20,000

15,000

10,000

5,000

1985 1990 1995 2000 2005 2010

[16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우간다

콩고 민주 공화국

니이라공고 화산

고마

부룬디

탄자니아

르완다

키갈리

비룽가 산맥

카리심비 화산

루헹게리 (지금의 무산제)

기세니 (지금의 루바부)

키부 호

부카부

카놈베

마사카

기타라마 (지금의 무항가)

부게세라

니아비신두 (지금의 니안자)

사베

부타레 (지금의 후예)

적도

[164, 165면 삽화]

키부 호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모습

[169면 삽화]

오덴 므와이소바와 에네아 므와이소바

[170면 삽화]

가스파르드 르와카부부와 딸 데보라 그리고 아내 멜라니

[171면 삽화]

키냐르완다어로 된 「“이 천국의 기쁜 소식”」

[172면 삽화]

쥐스탱 르와가토레

[172면 삽화]

페르디낭 무가루라

[173면 삽화]

1976년에 침례받은 세 사람: 레오폴 하레리마나, 피에르 트와기라예주, 에마뉘엘 바자친다

[174면 삽화]

키냐르완다어 출판물

[179면 삽화]

포카스 하키줌와미

[180면 삽화]

팔라틴 은산주르위모 형제 부부(오른쪽) 그리고 자녀들

[181면 삽화]

오데트 무칸데케지

[182면 삽화]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앙리 세뇽가

[188면 삽화]

등록 증서, 1992년 4월 13일

[190면 삽화]

축구 경기가 열릴 수 있도록 형제들이 연단을 옮기는 모습

[192면 삽화]

르와카부부 형제 가족과 솜베 형제 가족과 함께한 레너드 엘리스와 낸시 엘리스(중앙)

[193면 삽화]

키갈리 근처에서 추락한 비행기 잔해

[199면 삽화]

“우리에게는 형제애가 없었다” 키부예(지금의 카롱기)의 한 가톨릭교회에 쓰여 있는 글

[214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뒷줄) 앙드레 트와히르와, 장 드 디외, 이마쿠엘레이, 샹탈 (아기와 함께), 수잔; (앞줄) 장 드 디외와 샹탈의 자녀들인 장뤼크와 아가페

[216면 삽화]

베이다스트 비메니이마나가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모습

[217면 삽화]

타르시스 세미네가와 그의 아내인 샹탈

[218면 삽화]

타르시스와 쥐스탱, 타르시스와 그의 가족이 한 달 동안 숨어 있었던 오두막 곁에서

[226면 삽화]

위: 르완다 증인들을 위한 난민 수용소 아래: 증인들과 증인이 아닌 사람들이 함께 지냈던 난민 수용소

콩고의 고마

탄자니아의 베나코

[229면 삽화]

이 왕국회관은 병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38면 삽화]

오레스테와 그의 가족, 1996년

[240면 삽화]

테오발드 무니암푼두와 베랑실 무니암푼두

[241면 삽화]

새로운 대회 회관 부지를 평평하게 고르고 있는 투치족과 후투족 형제 자매들

[242면 삽화]

벽이 없는 대회 회관, 키갈리, 2006년

[243면 삽화]

봉사 훈련 학교, 키갈리, 2008년

[246면 삽화]

기세니에서 열린 특별 대회일에 수화 사용자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 2011년

[248면 삽화]

프랑수아그자비에 하키지마나

[252, 253면 삽화]

형제 자매들은 이 비옥한 밭에서 “수확하는 ‘주인’”과 함께 일하고 있으며, 손을 늦추겠다는 생각은 한시도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