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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버마)

미얀마 (버마)

아시아의 거대한 두 나라인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미얀마는 다양한 모습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 가장 큰 도시인 양곤(이전 명칭은 랑군)에는 고층 건물과 사람들로 붐비는 상가가 있고 많은 차들이 도로를 달립니다. 하지만 양곤을 벗어나면 물소가 밭을 가는 시골 마을의 전원 풍경이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외국인을 신기하게 쳐다보며, 시간에 쫓기지 않고 느긋하게 살아갑니다.

미얀마는 아직도 아시아의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삐걱대는 버스는 여기저기 움푹 팬 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립니다. 그 옆에서 소달구지가 시장에 내다 팔 곡물을 싣고 가고, 들판에서는 목동이 염소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미얀마 사람들은 치마처럼 허리에 둘러 입는 전통 의복(룽기)을 입습니다. 여자들은 화장품 대신 나무 껍질을 갈아 만든 반죽(타나카)을 얼굴에 바릅니다. 사람들은 종교심이 깊습니다. 독실한 불교인들은 유명 인사들보다 승려들을 더 존경하며, 번쩍이는 불상에 매일 금박을 입히면서 경의를 표합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온순하고 사려 깊으며 호기심이 많습니다. 이 나라에는 8개의 주요 민족이 있고 그 밖에도 최소한 127개의 소수 민족이 있습니다. 민족마다 고유한 언어와 의복과 음식과 문화가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에야와디(이라와디) 강 유역에 넓게 자리 잡은 기름진 중앙 평원에 삽니다. 거대한 에야와디 강은 얼음에 덮인 히말라야에서부터 따뜻한 안다만 해에 이르기까지 2170킬로미터를 굽이굽이 흘러갑니다. 인구가 많은 다른 지역으로는 거대한 삼각주 지대와 활 모양의 고지대 즉 라오스,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태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가 있습니다.

미얀마의 여호와의 증인은 거의 100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인내의 기록을 쌓아 왔습니다. 그들은 폭력이 난무하고 혼란과 정치적 격변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중립을 지켰습니다. (요한 17:14) 여호와의 백성은 신체적인 고난과 종교적 박해를 당하고 다른 나라의 형제들과 자유롭게 접촉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칠 줄 모르고 하느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해 왔습니다. 이제 그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미얀마의 형제들은 거의 100년 동안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인내의 기록을 쌓아 왔습니다

활동을 개척하다

역사적인 해인 1914년에 두 명의 영국인이 증기선을 타고 숨 막힐 듯 더운 양곤의 부둣가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헨드리 카마이클과 그의 파이오니아 짝이 버마에서 전파 활동을 개척하라는 만만찮은 임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도에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구역은 이 나라 전체였습니다.

“그들이 신세계에도 형제 대신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됩니다”

양곤에서 활동을 시작한 헨드리와 그의 짝은 얼마 후에 영국계 인도인인 버트럼 마셀린과 버논 프렌치를 만났습니다. * 그들은 왕국 소식에 진실한 관심을 나타냈으며, 곧 그리스도교국과의 관계를 끊고 친구들에게 비공식 증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20명가량의 사람들이 버트럼의 집에 정기적으로 모여 「파수대」로 성서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

양곤의 전도인들, 1932년

1928년에는 또 다른 영국인 파이오니아인 조지 라이트가 인도에서 버마를 방문하여 다섯 달 동안 이 나라를 여행하면서 많은 양의 성서 출판물을 전했습니다. 그때 진리의 씨를 뿌리는 데 사용된 출판물 중에는 1920년에 발행된 「지금 살아 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소책자도 있었습니다. 그 소책자는 버마어로 번역된 최초의 그리스도인 출판물이었습니다.

2년 후에는 파이오니아인 클로드 굿맨과 로널드 티핀이 양곤에 있는 형제들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 소수의 형제들은 충실하게 모임을 열고 있었지만 조직적인 전파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클로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형제들에게 일요일마다 봉사하러 나오라고 격려했습니다. 한 형제는 자기가 파이오니아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서 자기 대신 전파하게 할 수는 없냐고 물었습니다. 로널드는 그 형제에게 ‘그들이 신세계에도 형제 대신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형제들에게는 그처럼 솔직한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로드와 로널드는 함께 봉사할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여보, 진리를 찾았어!”

그 해에 로널드와 클로드는 양곤에서 철도역장으로 근무하는 시드니 쿠트를 만났습니다. 시드니는 당시에 ‘무지개 세트’라고 하던 밝은 색의 표지로 된 10권의 책 한 질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중 한 권을 읽다가 아내 레이철에게 “여보, 진리를 찾았어!” 하고 말했습니다. 곧 쿠트 가족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드니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의 딸 노마 바버는 오랫동안 선교인으로 일했으며 지금은 영국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노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성경 참고서를 만드셨어요. 성서의 가르침을 설명해 주는 성구를 찾으실 때마다 그 책의 해당 항목에 적어 넣으셨지요. 아버지는 그 책에 「어디 나오지?」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시드니 쿠트(가운데)는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 레이철(왼쪽)은 사람들에게 성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시드니는 성서를 연구하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인도 지부에 편지를 보내 버마에 증인들이 있는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얼마 후에 그는 출판물이 가득 담긴 큰 나무 상자와 증인들의 명단을 받았습니다. 노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명단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 집에 와서 하루를 함께 보내자고 초대하셨어요. 후에 대여섯 명의 형제가 우리 집에 와서 비공식 증거를 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죠. 부모님은 지체 없이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출판물을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또 모든 친척들에게도 편지와 서적을 보내셨어요.”

만달레이에 살던 시드니의 누나 데이지 디수자는 남동생의 편지와 「천국—세계의 희망」 소책자를 받자마자 답장을 써서 더 많은 출판물과 성서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데이지의 딸인 필리스 차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새벽까지 열중해서 출판물을 읽으며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셨어요. 그러고는 우리 여섯 자녀를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중대 발표를 하셨지요. ‘난 이제 가톨릭교회에서 탈퇴할 거야. 진리를 찾았거든!’” 후에 데이지의 남편과 자녀들도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디수자 가족은 사대에 걸쳐 여호와 하느님을 계속 충실히 섬기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파이오니아들

1930년대 초에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남북 간선 철도 곧 양곤에서 중국 국경 근처의 미치나 시까지 이어진 철도를 따라 좋은 소식을 전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양곤의 동쪽 해안 지대에 있는 몰라마인(모울메인)과 서쪽 해안 지대의 시트웨(아키아브)에서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몰라마인과 만달레이에 작은 회중들이 생겨났습니다.

1938년에는 인도 지부 대신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에서 버마의 활동을 감독하게 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파이오니아들이 버마에 와서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충실한 파이오니아들 중에는 프레드 페이튼, 헥터 오츠, 프랭크 듀어, 믹 엥겔, 스튜어트 켈티도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모두 진정한 의미의 파이오니아 곧 개척자였습니다.

프랭크 듀어

프레드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마에서 4년간 봉사하면서 거의 그 나라 전역을 다녔습니다. 그동안 말라리아, 장티푸스, 이질 등 여러 가지 건강 문제를 견뎌야 했습니다. 하루 종일 봉사하고 나면 잠잘 곳이 없는 때가 많았죠.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내 필요를 돌봐 주셨고 내가 그분의 영에 힘입어 계속 봉사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강인한 뉴질랜드 사람인 프랭크 듀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적 떼나 반란군과 맞닥뜨리기도 하고 겁을 주려는 관리들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의와 겸손을 나타내면서 온화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면 만만찮은 장애물도 대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버마에 사는 다른 외국인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대개 외국인들은 현지인들을 무시했지만, 그 파이오니아들은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친절한 접근 방식은 직선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보다 부드러움과 섬세함을 좋아하는 겸손한 버마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말과 행동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요한 13:35.

역사적인 대회

그 파이오니아들이 온 지 몇 달 후에 오스트레일리아 지부는 양곤에서 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대회장은 양곤 시청이었는데, 양곤 시청은 대리석 계단과 동으로 된 거대한 문이 있는 궁전 같은 건물이었습니다.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사람들이 왔고, 오스트레일리아 지부의 종인 알렉스 맥길리브레이가 시드니에서 형제들과 함께 왔습니다.

전운이 감돌던 때였으므로, 널리 광고된 “우주적 전쟁이 가까웠다”라는 주제의 공개 강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대단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프레드 페이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회장이 그렇게 빨리 채워지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정문을 열자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올라가 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10분도 안 되어 850석인 강당에 1000명도 넘는 사람이 밀려들었습니다.” 프랭크 듀어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정문을 닫아야 했고, 들어오지 못한 사람도 1000명은 족히 되었습니다. 정문을 닫았는데도 몇몇 젊은 사람들은 끝내 작은 옆문을 통해 대회장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열렬한 관심도 격려적이었지만, 형제들은 여러 현지 민족들이 뒤섞인 청중을 보면서 격려를 받았습니다. 현지인들은 대부분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진리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 나라의 기독교인들은 카인족(카렌족)과 카친족과 친족이 대부분이었고, 좋은 소식이 거의 전해지지 않은 외딴 지역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현지인들의 밭도 무르익어 수확할 때가 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성서의 예언과 일치하게, 형제들은 버마의 여러 민족 가운데서도 “큰 무리”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계시 7:9.

최초의 카인족 증인

최초의 카인족 증인인 추 메이 “데이지”(왼쪽)와 흐닌 메이 “릴리”(오른쪽)

1940년 어느 날, 루비 고프라는 파이오니아는 양곤의 외곽에 있는 작은 도시인 인세인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관심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루비는 “여호와 하느님, 집에 가기 전에 양 같은 사람을 한 명만 만나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루비는 바로 다음 집에서 카인족 침례교인인 흠웨 자잉을 만났습니다. 그는 왕국 소식을 잘 들었습니다. 곧 흠웨 자잉과 두 딸 추 메이(데이지)와 흐닌 메이(릴리)는 성서 연구를 하면서 영적으로 잘 발전했습니다. 얼마 후에 흠웨 자잉은 사망했지만, 둘째 딸인 릴리는 카인족으로는 최초로 침례받은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데이지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릴리와 데이지는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날 그들의 자손과 성서 연구생 가운데 수백 명이 미얀마와 그 밖의 나라에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닥친 시련

1939년에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전쟁의 열기가 고조되는 틈을 타서 버마의 기독교 교직자들은 식민 정부에 우리 출판물을 금지시키라고 더욱 압력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양곤의 출판물 보관소를 맡고 있던 믹 엥겔은 미국의 고위 관리와 접촉하여, 약 2톤의 출판물을 군용 트럭에 싣고 버마에서 중국으로 옮길 수 있는 허가장을 받아 냈습니다.

프레드 페이튼과 헥터 오츠는 출판물을 중국 접경 지역의 라시오 시에 있는 종착역까지 운반했습니다. 그들이 중국 호송을 담당하는 관리를 만났을 때, 그는 화를 내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뭐요? 급하게 필요한 군수품과 의약품도 싣지 못해 여기서 이렇게 썩어 가는 판에, 그 잘난 당신네 책을 실을 자리를 내주란 말이오?” 프레드는 잠깐 멈칫했다가 가방에서 허가장을 꺼냈고, 양곤에서 내린 명령을 무시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통행 책임자는 형제들이 사용하도록 운전사가 딸린 작은 트럭 한 대와 보급품을 내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약 2400킬로미터를 달려 중국 중남부에 있는 충칭(중경)에 가서 그 소중한 출판물을 전하고 중국 국민 정부의 주석인 장제스에게 직접 증거하기까지 했습니다.

관리들이 보관소에 왔을 때는 서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국 1941년 5월에 인도의 식민 정부는 양곤에 있는 버마 당국에 전보를 보내 우리 출판물을 압수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전신국에서 일하던 두 명의 형제는 그 전보를 보고 급히 믹 엥겔에게 연락했습니다. 믹은 릴리와 데이지를 불러서 서둘러 서적 보관소로 갔습니다. 그들은 남아 있는 서적 40상자를 싣고 양곤 주변의 안전한 집들에 나누어 숨겼습니다. 관리들이 보관소에 왔을 때는 서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일본은 진주만에 공격을 감행한 지 4일 후인 1941년 12월 11일에, 버마에도 융단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말에 소수의 증인들은 양곤 중앙 철도역 위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모였습니다. 성경에 근거한 훌륭한 연설이 끝나고 나서 릴리가 그 집의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12주 후에 일본군이 양곤에 진입했을 때 그 도시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미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도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다가 굶주림이나 탈진이나 병 때문에 사망했습니다. 가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 시드니 쿠트는 뇌성말라리아로 인도 국경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 형제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또 다른 형제는 집에 폭탄이 떨어져 아내와 가족을 잃었습니다.

버마에 남아 있는 증인들은 몇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릴리와 데이지는 만달레이 근처의 구릉지에 있는 조용한 도시인 핀우르윈(마이미오)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뿌린 진리의 씨는 나중에 열매를 맺었습니다. 또 다른 증인인 시릴 게이는 양곤에서 북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타야와디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지냈습니다.

감격의 재회

전쟁이 끝나자, 인도로 피난 갔던 형제 자매들이 대부분 버마로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1946년 4월에 양곤 회중에는 8명의 활동적인 전도인이 있었습니다. 그해 말에 회중 전도인이 24명으로 늘어나자, 형제들은 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대회는 인세인의 어느 학교에서 이틀간 열렸습니다. 1932년에 양곤에서 진리를 배운 테오 시리아폴로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인도에서 돌아와 보니 내가 한 시간짜리 공개 연설을 하게 되어 있더군요. 그 전까지는 인도에서 집회 때 5분 연설을 두 번 해 본 게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참석자가 100명도 넘었습니다.”

몇 주 후에, 진리에 관심이 있던 어느 카인족 마을의 지도자가 알론에 있는 땅을 회중에 기증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알론은 양곤 중심부에서 가까운 강 근처의 교외 지역이었습니다. 형제들은 대나무를 이용해서 그곳에 약 100석의 좌석을 갖춘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회중은 기쁨에 넘쳤습니다. 형제 자매들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잃지 않았고 이제 열심히 전파 활동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최초의 길르앗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위: 처음으로 온 길르앗 선교인인 휴버트 스메드스타드, 로버트 커크, 노먼 바버, 로버트 리처즈 아래: (뒷줄) 낸시 디수자, 밀턴 헨첼, 네이선 노어, 로버트 커크, 테런스 디수자, (앞줄) 러셀 모블리, 페넬로페 자르비스-배그, 필리스 차토스, 데이지 디수자, 바실 차토스

1947년 초에는 몇몇 형제들이 들뜬 마음으로 양곤의 부두에 모여, 버마에 처음으로 입국하는 길르앗 선교인인 로버트 커크를 환영했습니다. 얼마 후에는 세 명의 선교인인 노먼 바버, 로버트 리처즈, 휴버트 스메드스타드가 도착했고, 전쟁 중에 인도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프랭크 듀어도 입국했습니다.

선교인들이 도착한 양곤은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죽 늘어선 허름한 대나무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음식을 만들고 씻기도 하며 생활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인들은 성서 진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왔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고 바쁘게 봉사를 수행했습니다.

1947년 9월 1일에는 양곤 중심부 근처 시그널 파고다 로드에 있는 선교인 집에 워치 타워 협회의 지부 사무실이 개설되었습니다. 로버트 커크가 지부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양곤 회중은 알론의 대나무 왕국회관에서 보갈레이 제이 스트리트에 있는 아파트로 옮겼습니다. 그 아파트 건물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사무국 곧 영국 식민 정부 청사로 쓰이는 웅장한 건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식민 정부가 사라질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내전이 발발하다!

1948년 1월 4일에 영국은 새로운 버마 정부에 정권을 이양했습니다. 60년간의 식민 통치 끝에 버마가 독립국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버마는 내전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여러 민족들이 독립된 주를 세우려고 전쟁을 벌이는 동안, 개인이 조직한 군대와 범죄 집단들은 세력을 확장하려고 서로 싸웠습니다. 1949년 초에는 반군 세력이 나라 전체를 거의 장악했고, 양곤 외곽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투가 치열할 때도 있었고 소강 상태일 때도 있었지만, 형제들은 조심스럽게 전파했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시그널 파고다 로드의 선교인 집에서 39번가에 있는 큰 아파트로 이전했습니다. 그곳은 몇몇 외국 대사관이 자리 잡고 있는 안전한 지역이었으며, 중앙 우체국과는 걸어서 3분 거리였습니다.

서서히 정부군이 우세해지면서 반군들을 산악 지역으로 몰아냈습니다. 1950년대 중반에 정부군은 버마의 상당 부분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내전이 끝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 내전은 이런저런 형태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마어로 전파하고 가르치다

1950년대 중반까지 버마의 형제들은 거의 영어로만 봉사를 했습니다. 영어는 큰 도시에 사는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버마어(미얀마어), 카인어, 카친어, 친어 같은 현지어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좋은 소식을 전할 것입니까?

1934년에 시드니 쿠트는 카인족 교사에게 부탁하여 몇 가지 소책자를 버마어와 카인어로 번역했습니다. 후에 다른 전도인들이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과 몇 가지 소책자를 버마어로 번역했습니다. 1950년에 로버트 커크는 바우 형제에게 「파수대」 연구 기사를 버마어로 번역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가 손으로 써서 기사를 번역하면 양곤에 있는 인쇄업자가 식자와 인쇄 작업을 했고, 형제들은 회중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인쇄된 기사를 나눠 주었습니다. 나중에 지부 사무실은 번역 작업을 더 빨리 하기 위해 버마어 타자기를 구입했습니다.

「파수대」 연구 기사를 버마어로 번역한 바우(왼쪽)

이 초기의 번역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바우 형제가 더 이상 번역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네이가 포한이 그 일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억을 떠올립니다. “낮에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일을 하고 밤에는 흐릿한 전구 불빛 아래서 늦게까지 기사들을 번역했습니다. 제 영어 실력이 한참 모자라서 번역에 틀린 데가 아주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잡지를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로버트 커크가 도리스 라지에게 「파수대」를 버마어로 번역하는 일을 해 달라고 말하자, 도리스는 큰 부담감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기본 교육밖에 받지 못했고 번역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커크 형제가 한번 해 보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번역을 시작했지요.”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도리스는 양곤 베델에서 번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93세인 네이가 포한도 지금까지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왕국 활동을 확장하기 위해 변함없는 열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956년에 네이선 노어가 버마어 「파수대」를 발표했습니다

1956년에 세계 본부의 네이선 노어가 버마를 방문하여 버마어 「파수대」를 발표했습니다. 또한 그는 선교인들에게 더 효율적으로 봉사하기 위해 버마어를 배울 것을 권했습니다. 그의 말에 격려를 받은 선교인들은 버마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이듬해에도 세계 본부에서 프레더릭 프랜즈가 방문하여 양곤 철도청 강당에서 열린 5일간의 대회에서 기조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시골 지역의 도시들로 파이오니아를 파견하여 전파 활동을 더욱 확장하라고 격려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이 최초로 파견되어 유익을 얻은 곳은 한때 버마의 수도였고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만달레이였습니다.

만달레이에서 결실을 맺다

1957년 초에 여섯 명의 새로운 특별 파이오니아가 만달레이에 도착했습니다. 최근에 결혼한 선교인인 로버트 리처즈와 그의 카인족 아내 베이비는 이미 그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 파이오니아들에게 만달레이는 쉽지 않은 구역이었습니다. 만달레이는 불교의 중심지이고 버마에 있는 불교 승려의 절반가량이 그 도시에 있습니다. 하지만 파이오니아들은 고대 고린도의 경우처럼 ‘이 도시에도 여호와의 백성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사도 18:10.

그중에는 당시 스물한 살의 카친족 학생이었던 로빈 자우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느 날 아침 로버트 리처즈와 그의 아내 베이비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자신들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전파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집집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마태 10:11-13) 그들은 성서 이야기를 하고 나서 잡지와 책을 몇 권 주고 주소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날 저녁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그 책을 다 읽었습니다. 바로 그날 로버트의 집에 가서 몇 시간 동안 질문을 퍼부었지요. 로버트는 모든 질문에 성서를 사용해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빈 자우자는 카친족 중에서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버마 북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여러 해 동안 봉사하면서 거의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현재 그의 자녀들 중 두 명이 양곤 베델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프라밀라 갈리아라라는 열일곱 살의 소녀도 열심 있는 제자였습니다. 그는 얼마 전에 양곤에서 진리를 접했습니다. 프라밀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이나교도였던 아버지는 내 새로운 믿음을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내 성서와 성서 출판물을 태워 버린 적도 두 번 있고, 사람들이 보는 데서 나를 때린 적도 여러 번 있었지요. 내가 그리스도인 집회에 가지 못하게 집에 가둬 두기도 했고, 심지어는 리처즈 형제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기도 하셨어요! 하지만 내 믿음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어 결국 박해를 중단하셨습니다.” 프라밀라는 대학을 그만두고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순회 감독자인 던스턴 오닐과 결혼했습니다. 그때 이래로 프라밀라는 45명이 진리 안에 들어오도록 도왔습니다.

만달레이에서 우리의 활동이 순조롭게 진척되는 동안, 지부 사무실은 파테인(바세인), 칼레이미오, 바모, 미치나, 몰라마인, 미에이크(메르귀) 등 다른 주요 도시로도 선교인이나 파이오니아를 파견했습니다. 이 모든 도시들에 튼튼한 회중이 생겨난 것을 보면, 여호와께서 활동을 축복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선교인들이 추방되다!

전파 활동이 계속 확장되는 동안, 정치적·민족적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면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 되었습니다. 결국 군부는 1962년 3월에 정부를 장악했습니다. 수많은 인도인들과 영국계 인도인들은 인도와 방글라데시(당시에는 동파키스탄)로 추방되었고, 버마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24시간만 체류할 수 있는 비자밖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버마는 국제 사회와의 접촉을 점차 차단해 나갔습니다.

형제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군사 정권은 숭배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거기에는 종교가 정치에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그리스도교국의 선교사들은 계속 정치 문제에 개입했습니다. 참다못한 정부는 결국 1966년 5월에 모든 외국인 선교인에게 버마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증인 선교인들은 정치와는 조금도 관련을 맺지 않았지만, 그들도 곧 이 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버마의 형제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명 31:6) 하지만 일부 형제들은 왕국 활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인지 걱정을 했습니다.

곧 여호와의 인도가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순회 감독자로 일한 경험이 있고 지부에서 얼마의 훈련을 받은 모리스 라지가 지부 사무실을 돌보도록 신속하게 임명되었습니다. 인도인인 모리스는 다른 인도인들이 추방되었을 때 함께 추방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이 있기 몇 년 전에 나는 버마 시민권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시민권을 받기 위해 내야 할 돈이 450차트 * 부족해서 나중으로 미뤘죠. 어느 날, 내가 예전에 다녔던 회사 앞을 지나가는데, 사장이 나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봐, 라지. 와서 돈 받아 가게. 자네 퇴직금 받아 가는 걸 잊어버렸더군.’ 퇴직금은 450차트였습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450차트로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돈이 시민권을 받는 데 모자란 액수와 정확히 같았기 때문에, 시민권을 받는 데 그 돈을 사용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정말 잘했습니다. 다른 인도인들은 버마에서 추방되었지만, 나는 이 나라에 남아서 자유롭게 여행하고 출판물을 수입하고 전파 활동에 꼭 필요한 다른 책임들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버마 시민권자였기에 그 모든 일이 가능했지요.”

모리스는 던스턴 오닐과 함께 전국을 여행하면서 모든 회중과 외딴 지역에 있는 집단을 격려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들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충성을 나타내면 그분도 우리를 도와주실 겁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도와주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특별 파이오니아들이 새로 임명되었고 전파 활동은 더욱 빠르게 확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46년이 지난 지금 모리스는 지부 위원으로 섬기면서 여전히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회중들에 격려를 베풀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연로한 갈렙처럼, 하느님의 일에 대한 그의 열심은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여호수아 14:11.

활동이 친 주로 퍼져 나가다

특별 파이오니아가 처음으로 임명된 지역 가운데는 친 주도 있었습니다. 친 주는 방글라데시 및 인도와 맞닿아 있는 산악 지역입니다. 영국 식민 통치 기간에 있었던 침례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친 주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서와 성서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깊이 존중합니다.

한때 군인이었지만 진리를 받고 나서 특별 파이오니아가 된 랄 차나가 1966년 말에 당시 친 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팔람에 도착했습니다. 던스턴과 프라밀라 오닐 부부와 탄툼도 그곳에서 랄 차나와 합류했습니다. 탄툼 역시 군인이었다가 최근에 침례받은 형제였습니다. 이 열심 있는 봉사자들은 관심을 가진 몇몇 가족을 찾아냈으며, 얼마 후에는 작지만 활동적인 회중을 세웠습니다.

이듬해에 탄툼은 팔람 남쪽에 있는 하카로 이주하여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고 작은 집단을 세웠습니다. 후에 그는 친 주 전역에서 봉사했으며 반나, 수르쿠아, 강고 등 여러 지역에 회중을 세우는 데 기여했습니다. 45년이 지난 지금도 탄툼은 고향 마을인 반나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탄툼이 하카를 떠났을 때, 20세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도널드 듀어가 그를 대신했습니다. 도널드의 부모인 프랭크와 릴리 듀어(이전 이름은 릴리 메이)가 얼마 전에 추방되었기 때문에, 18세인 도널드의 남동생 새뮤얼도 하카로 와서 형과 함께 봉사했습니다. 도널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함석으로 만든 작은 집에서 살았는데 여름에는 찌는 듯이 덥고 겨울에는 살이 에일 듯이 추웠습니다. 하지만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죠. 혼자 봉사할 때가 많았고, 현지 언어인 하카친어도 거의 할 줄 몰랐습니다. 집회는 동생과 둘이 보았고 한두 명의 전도인이 더 참석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점차 우울해졌고 임지를 떠날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연감」에서 말라위의 형제들이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충실을 유지한 감동적인 기록을 읽었습니다. * 나는 ‘외로움도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박해를 인내할 수 있겠어?’ 하고 생각했습니다. 기도로 여호와께 내 염려를 털어놓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성서와 「파수대」 기사들을 읽고 묵상하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모리스 라지와 던스턴 오닐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두 천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시간은 걸렸지만 확실히 나는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후에 도널드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활용하여 외딴 지역에 있는 증인들을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하카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도 결실을 맺었습니다. 현재 하카에는 한 회중이 번창하고 있으며, 크고 작은 그리스도인 대회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열립니다. 하카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던 전도인들인 존슨 랄방과 대니얼 상카 두 사람은 열심 있는 특별 파이오니아가 되어 친 주의 많은 지역에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산을 오르다’

친 주의 고도는 해발 900미터에서 1800미터에 이르며 우뚝 솟은 몇몇 봉우리들은 높이가 3000미터에 달합니다. 많은 산들을 덮고 있는 울창한 숲은 우뚝 솟은 티크, 위엄 있는 침엽수, 화려한 색상의 철쭉, 우아한 난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형이 험난해서 이동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 지역의 도시와 마을들은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로 연결되어 있는데, 비가 오면 거의 통행이 불가능하며 그나마도 산사태로 자주 끊어집니다. 많은 경우 오지에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애물이 있어도,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고 굳게 다짐한 여호와의 종들은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친 주에서 남편과 함께 순회 활동을 한 에이 에이 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야와디 삼각주의 평야 지대에서 자란 나에게 친 주의 산지는 숨 막힐 듯 아름다웠습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첫 번째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지만, 언덕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는 숨이 가빠 주저앉고 말았어요. 언덕을 몇 개 더 넘고 나니 기운이 다 빠져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나는 시간 여유를 갖고 힘을 아끼면서 산을 오르는 법을 배웠지요. 조금 지나자 하루에 많게는 30킬로미터씩 6일 이상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투피 회중 성원들은 하카에서 열리는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270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친 주의 형제들은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했습니다. 노새, 말, 자전거를 타다가 최근에는 오토바이와 픽업트럭과 사륜구동 차량도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교통수단은 걷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특별 파이오니아인 초윈과 데이비드 자마는 마투피 주변의 마을들에 가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며 먼 길을 걸었습니다. 마투피 회중은 그리스도인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27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하카까지 6일 내지 8일을 걸어갔다가 다시 6일 내지 8일을 걸어 돌아왔습니다. 길을 걸으며 그들이 부른 왕국 노래는 메아리가 되어 그림같이 아름다운 언덕들 사이로 울려 퍼졌습니다.

형제들은 그렇게 힘든 여행을 하는 동안 산지의 고르지 않은 날씨도 견뎌야 했고 모기 떼와 온갖 벌레들에 시달렸습니다. 특히 우기에는 모기와 벌레들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순회 감독자인 민 르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숲을 헤치며 걸어가다 보니 거머리들이 내 다리로 기어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거머리들을 떼어 냈는데 또 두 마리가 달라붙었습니다. 쓰러진 통나무 위로 펄쩍 뛰어올라갔지만, 거머리 떼가 통나무를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나는 쏜살같이 숲을 뚫고 달렸습니다. 마침내 도로에 다다랐을 때는 온몸이 거머리 투성이였습니다.”

친 주의 산지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한 지역 감독자 굼자 노와 그의 아내 난루

하지만 친 주에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견뎌야 했던 것은 거머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미얀마에는 멧돼지, 곰, 표범, 호랑이가 서식하고 있으며, 일부 자료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독사가 있다고 합니다. 지역 감독자인 굼자 노와 그의 아내 난루는 친 주에서 회중들을 방문하면서 산지를 이동할 때, 밤에 야생 동물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동그란 띠 형태로 불을 피웠습니다!

이 지칠 줄 모르는 복음 전파자들은 값진 유산을 남겼습니다. 모리스 라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친 주를 떠난 후에도 기꺼이 다시 그곳에 가려고 했지요. 그들의 노력은 참으로 여호와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친 주는 이 나라에서 가장 인구 밀도가 낮은 편에 속하지만, 현재 이곳에는 7개의 회중과 몇 개의 격지 집단이 있습니다.

“미치나에는 ‘양’이 없습니다”

1966년에 몇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가 미치나에 도착했습니다. 미치나는 중국에서 가까운 카친 주에 있으며 에야와디 강이 급격하게 굽은 지점에 있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작은 도시입니다. 그보다 6년 전에 로버트와 베이비 리처즈 부부가 이곳에서 잠시 봉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치나에는 ‘양’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하지만 새로 도착한 그 파이오니아들은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미아 마웅이 있었습니다. 그는 19세의 침례교인이었으며, 성서를 이해하게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파이오니아가 직장에 찾아와서 성서 연구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그 제안이 내 기도의 응답이라고 느꼈습니다. 남동생인 산 에이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연구를 했고 영적으로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우리와 성서 연구를 한 윌슨 테인은 정말 잘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방법도 보여 주었죠! 연습과 실연을 통해 우리는 성서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담대하게 전파하고, 반대에 대처하고, 연설을 준비하여 제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연설을 짜서 윌슨 테인에게 들려주면, 그는 잘 듣고 개선할 점들을 제안해 주었습니다. 그처럼 세심하게 가르쳐 준 덕분에 우리는 영적인 목표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 철도 근처의 도시들인 남티, 호핀, 모닌, 카타에는 잘 발전하는 회중들이 있습니다”

1968년에 산 에이와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면서 미치나의 파이오니아는 8명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서 연구를 사회한 사람들 중에는 친형제자매 가운데 7명과 어머니도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들 모두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우리는 미치나와 만달레이를 잇는 철도 주변의 도시와 마을들을 한 번에 하루 내지 사흘간 다니면서 전파했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는 나중에 결실을 맺었습니다. 오늘날 그 철도 근처의 도시들인 남티, 호핀, 모닌, 카타에는 잘 발전하는 회중들이 있습니다.”

산 에이는 미치나의 사업 구역에서 봉사하다가 카친족 침례교인이고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품람을 만났습니다. 품람은 진리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히말라야 산맥 기슭에 있는 작은 도시인 푸타오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친척에게 전파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25명이 그리스도인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품람은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자기 아내와 일곱 명의 자녀와 많은 친척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현재 그는 미치나에서 파이오니아이자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객차가 사라지다

1969년에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양곤에서 미치나로 가는 특별 열차를 타고 떠나는 증인들

카친 주에서 영적 활동이 빠르게 성장하자, 지부 사무실은 항상 대회를 열던 양곤이 아니라 미치나에서 1969년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대회 참석자들이 양곤에서 북쪽으로 110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미치나에 갈 수 있도록 지부는 버마 철도청에 여섯 량의 객차를 임대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요청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습니다. 카친 주는 반란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이었으므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철도청은 형제들의 요청을 흔쾌히 들어 주었습니다.

1969년에 미치나에서 열린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한 장로들. (뒷줄) 프랜시스 바이도파우, 모리스 라지, 틴 페이 탄, 미아 마웅, (가운데 줄) 던스턴 오닐, 찰리 아웅 테인, 아웅 틴 슈웨, 윌슨 테인, 산 에이, (앞줄) 마웅 카, 도널드 듀어, 데이비드 에이브러햄, 로빈 자우자

대회 참석자들이 탄 기차가 미치나에 도착하게 되어 있는 날, 모리스 라지와 얼마의 형제들은 그들을 환영하기 위해 역으로 갔습니다. 모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역장이 허겁지겁 뛰어와서 방금 전보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역무원들이 우리 형제들이 탄 여섯 량의 객차를 기차에서 분리하여 만달레이와 미치나 사이에 두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기관차가 그 객차들을 끌고 고개를 오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대회 일자를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날짜를 바꾸면 이런저런 허가를 다시 받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몇 주는 족히 걸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데 기차가 역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을 가득 태운 여섯 량의 객차가 모두 도착한 것입니다! 형제들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니 한 형제가 ‘여섯 량을 분리하긴 했는데, 우리가 탄 객차는 아니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여섯 량을 분리하긴 했는데, 우리가 탄 객차는 아니었어요!’

미치나 대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회 중에 세 가지 새로운 출판물이 버마어로 발표되었고 다섯 가지는 영어로 발표되었습니다. 3년 전에 선교인들이 추방되었을 때 버마로 들어오는 영적 양식은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줄어들었지만, 이제 그 시냇물은 큰 강이 되어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나가족을 가르치다

미치나 대회가 끝나고 4개월 후에 지부 사무실은 캄티에 있는 우체국 직원인 바이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인도와 접한 북서쪽 국경 지대에 있는 캄티는 높은 산악 지대 아래 강가에 자리 잡은 도시입니다. 이곳에는 나가족 사람들이 사는데, 나가족이란 한때 사람을 사냥하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여러 부족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입니다. 제칠 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신자였던 바이는 영적인 도움을 베풀어 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부 사무실은 두 명의 특별 파이오니아인 아웅 나잉과 윈페를 신속하게 그곳으로 파견했습니다.

윈페는 이렇게 말합니다. “캄티 활주로에 내려서 사나운 나가족 전사들이 허리만 옷으로 가린 채 서 있는 모습을 보자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그때 바이가 서둘러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서 재빨리 우리를 데리고 관심자들에게 갔습니다. 곧 우리는 다섯 사람과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아크 모이아(뒷줄 맨 오른쪽)와 캄티 회중, 나가족이 사는 지역에서 활동이 시작되었을 무렵

하지만 당국은 우리를 현지의 반란군과 내통하는 침례교 교직자로 오해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당국은 우리가 도착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그 지역을 떠나라고 명령했습니다.”

3년 후 그 지역에 새로운 관리들이 부임했을 때, 18세의 파이오니아인 비아크 모이아는 그 두 파이오니아의 뒤를 이어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얼마 후 바이도 우체국에서 퇴직하고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또 다른 몇 명의 파이오니아가 이 지역에 왔습니다. 이 열심 있는 파이오니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캄티에 회중을 세웠고 인근 마을들에 몇 개의 작은 집단을 세웠습니다. 비아크 모이아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가족 형제 자매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출판물에 나오는 그림을 잘 활용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또 여러 성구와 왕국 노래를 암기했습니다.”

오늘날 캄티에서는 정기적으로 지역 대회가 열리는데, 캄티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15시간을 가야 있는 먼 도시 호말린에서도 참석자들이 옵니다.

“황금의 삼각지대”에서 반대가 일어나다

한편 이 나라의 반대편에서도 중국, 라오스, 태국과의 접경 지역인 고원 지대로 활동이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골든트라이앵글 곧 황금의 삼각지대의 심장부입니다. 황금의 삼각지대는 완만한 구릉지가 이어지고 비옥한 계곡이 있는 아름다운 지역이지만 아편 생산과 반란과 그 밖의 불법 행위로 악명이 높은 곳입니다. 이 위험한 지역으로 진리를 전하러 들어간 파이오니아들은 조심스럽고 분별력 있게 처신했습니다. (마태 10:16) 하지만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그들의 전파 활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인 로빈 자우자와 데이비드 에이브러햄이 샨 주의 북적이는 도시인 라시오에 도착하자, 그 지역의 교직자들은 곧바로 그들을 반란 세력으로 몰아세워 고발했습니다. 로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체포되어 교도소로 호송되었고, 정부 부처에서 발급해 준 서류를 그곳에 있는 경찰에게 제시했습니다. 조금 후에 군대의 소령이 걸어 들어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안녕하시오, 자우자 씨. 드디어 여호와의 증인이 라시오까지 오셨구먼!’ 나와 학교 동창인 그는 즉시 우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그 두 파이오니아는 봉사를 시작했고 얼마 후 꽤 규모가 큰 회중을 세웠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2년 후 그들은 그 지역 자치 정부로 소환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군 장교와 부족의 지도자와 교직자가 70명도 넘게 모여 있었습니다. 로빈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화가 난 교직자들은 우리가 사람들에게 압력을 가해 종교 전통을 버리게 만든다고 비난했습니다. 그 모임의 사회자가 우리에게 답변할 기회를 주었을 때, 나는 성경을 사용해서 변호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재빨리 속으로 기도한 다음 거짓 종교 전통, 군 복무, 국가주의 의식에 대한 성경의 견해를 설명했습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사회자는 일어서서 버마의 법은 모든 종교에 숭배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단언했습니다. 교직자들은 크게 실망했지만, 우리는 풀려나 계속 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후에, 중국 국경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 망포에서 성난 침례교인 폭도들이 왕국회관을 불태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증인들이 겁을 먹지 않자, 폭도들은 특별 파이오니아의 집을 불태우고 형제 자매들의 집에 가서 협박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이 그 지역 통치자에게 탄원했지만, 그는 침례교인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정부가 개입해서 형제들에게 새로운 왕국회관을 지을 수 있는 허가를 내주었습니다. 새로운 부지는 마을 구석에 있던 원래의 부지와는 달리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남쪽으로 황금의 삼각지대와 접해 있는 카인 주 산지에는 외딴 마을인 레이토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레고리 사릴로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레고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마을의 사제는 교인들에게 내 텃밭을 못쓰게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나에게 음식을 주었는데, 한 친구가 그 음식에 독이 들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하루는 사제의 추종자들이 나에게 다음날 어느 길로 갈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날 나는 다른 길로 가서 나를 죽이려고 숨어 있던 사람들을 피했습니다. 나를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신고하자, 당국은 사제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내 영혼을 사냥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시 35:4.

엄정 중립을 지키다

여러 해에 걸쳐 버마의 형제 자매들은 또 다른 중대한 문제로 충절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민족 간의 전쟁과 정치 투쟁으로 인해,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는 그들의 입장이 시험을 받았던 것입니다.—요한 18:36.

특별 파이오니아인 흘라 아웅은 미얀마 남부의 탄피우자야트라는 마을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탄피우자야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버마와 태국 사이에 건설된 악명 높은 “죽음의 철도”의 서쪽 종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흘라 아웅은 분리주의 반란군과 정부군 사이의 전투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부군이 밤에 마을들을 습격하여 남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총부리를 들이대고 끌고 갔으며 군대에서 짐을 나르는 일을 시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밤 도널드 듀어와 함께 우리 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군인들이 우리 마을을 습격했습니다. 아내가 도망치라고 다급히 소리쳤고 그 덕분에 가까스로 숲 속으로 숨었습니다. 그처럼 아슬아슬한 위기를 겪고 난 후, 나는 다시 습격을 당하면 신속히 몸을 숨길 수 있게 집에 비밀 은신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특별 파이오니아인 라잔 판디트는 탄피우자야트보다 더 남쪽에 있는 도시인 다웨이에 가서 봉사했습니다. 그는 얼마 후에 근처의 마을에서 몇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곳은 반란군의 거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군인들이 나를 체포하더니 내가 반란군과 한패라고 하면서 구타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자, 그들은 어떻게 다웨이에 왔는지 말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내가 비행기를 타고 왔다는 증거로, 기념으로 가지고 있던 비행기 표를 보여 주었습니다. 반란군은 절대로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덕분에 더 이상 구타를 당하지 않았고 결국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은 내 성서 연구생 한 사람을 심문했는데, 그는 우리가 단지 성서를 공부했을 뿐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후 군인들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으며 몇 사람은 잡지 통로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시 관리들이 형제들에게 투표나 애국 의식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중립을 타협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양곤에서 북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강변 도시 잘룬에서, 시 관리들은 증인들에게 투표에 참여하라고 압력을 가했습니다. 형제들은 근거가 되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확고한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요한 6:15) 시 관리들은 지역 관청에 탄원했습니다. 하지만 지역 관청의 관리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투표에서 면제되었습니다.

버마와 인도 사이의 국경 근처에 있는 캄파트라는 도시에서는, 23명의 증인 어린이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자 여교장이 그들을 퇴학시켰습니다. 그런 다음 두 명의 장로를 소환하여 도시 치안 판사와 군사령관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모인 자리에 출두하게 했습니다. 두 장로 중 한 사람인 폴 카이 칸탕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입장에 대한 성경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동안 일부 관리들은 매우 적대적인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그때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이 ‘기 경례 중에 존중하는 태도로 가만히 서 있을’ 수 있다고 명시한 정부 문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관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에, 군사령관은 교장에게 퇴학당한 학생들을 복학시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또한 교장은 학교의 모든 부서에 그 문서의 사본을 나눠 주었습니다.”

오늘날 미얀마 정부의 최고위층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여호와의 증인의 입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대로, 여호와의 종들은 성서 원칙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함으로 훌륭한 증거를 해 왔습니다.—누가 21:13.

군인들이 진리를 받아들이다

미얀마 현대 역사의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많은 사람이 정부군에서 복무하거나 반란군에 가담했습니다. 1세기의 로마 장교 고넬료처럼, 그들 중에도 ‘독실하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 10:2) 그들이 진리를 배우게 되면 여호와의 의로운 표준에 따라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말씀의 힘 덕분에, 이 두 사람은 증오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랑의 띠로 연합되었습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는 흘론 망이 있습니다. 그는 해군 하사관으로 몰라마인에서 근무하던 중에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의 말은 이러합니다. “나는 당장 봉사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대하려고 하던 중에, 상관들이 나를 승진시키고 군 장학금을 주어 서방의 선진국으로 유학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하지만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려는 내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여호와를 섬기기 시작하자 상관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참하느님을 섬기는 특권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크 린(왼쪽)과 사탄툰 아웅(오른쪽)은 서로 반대편에 소속되어 정글에서 몇 차례 치열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라방감은 군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로빈 자우자가 그에게 「낙원을 잃은 때부터 낙원을 찾을 때까지」 * 책을 보여 주었습니다. 라방감은 책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가져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로빈은 그 책이 한 권밖에 없었기 때문에 라방감에게 하룻밤만 빌려 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날 로빈이 라방감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책 가져가세요. 이젠 나도 내 책이 있거든요!” 그는 밤새 한숨도 안 자고 250페이지나 되는 책을 여러 권의 공책에 전부 베껴 썼던 것입니다! 얼마 후 라방감은 군에서 제대하고 자신이 만든 “낙원 책”을 사용해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도록 도왔습니다.

산악 지대인 샨 주에서 버마군 대위인 사탄툰 아웅과 와 주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크 린은 서로 반대편에 소속되어 정글에서 몇 차례 치열한 교전을 벌였습니다. 마침내 양측이 협상을 벌여 휴전을 하자, 두 사람은 샨 주에 정착했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진리를 배웠고 군에서 제대한 뒤 침례를 받았습니다. 한때 적이었던 두 사람은 순회 대회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인 형제로서 따뜻한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말씀의 힘 덕분에, 그들은 증오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랑의 띠로 연합되었습니다.—요한 8:32; 13:35.

“모든 부류의 사람들”과 논리적으로 추리하다

1965년부터 1976년까지 버마의 전도인 수는 300퍼센트 이상 증가했습니다. 증인의 전파 활동에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어 전도인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정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디모데 첫째 2:4) 그래서 1970년대 중반부터 불교인, 힌두교인, 정령 숭배자 등 버마의 다양한 종교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한층 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통 의복을 입은 불교 승려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파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불교인은 인격체인 하느님이나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힌두교인은 수백만에 달하는 신을 숭배하며, 버마의 정령 숭배자들은 나트라고 하는 강력한 영들을 섬깁니다. 온갖 미신, 점술, 영매술이 그러한 종교들의 주된 특징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이 성서를 거룩한 책으로 여기지만, 대개 성서에 나오는 인물이나 역사나 문화나 사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혹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의 강력한 진리가 그 어떤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히브리 4:12) 그들은 그저 하느님의 영에 의지하고 “가르치는 기술”을 발휘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한 기술에는 합리적인 논증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하고 변화하려는 동기를 갖게 하는 것이 포함되었습니다.—디모데 둘째 4:2.

한 가지 예로, 오랫동안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한 로절린은 불교인들에게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논증을 사용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흔히 불교인들은 창조주가 계시다는 내용을 배우게 되면 ‘그럼 창조주는 누가 만들었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들은 사람이 환생해서 동물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연구생이 키우는 동물을 예로 들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동물은 주인이 있다는 것을 아나요?’

‘그럼요.’

‘하지만 주인의 직업이나 결혼 생활이나 배경에 대해서도 알까요?’

‘그렇지는 않죠.’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영이신 하느님과는 다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의 기원이 무엇인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나는 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진실한 불교인들이 이러한 논리가 일리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더 많은 증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논리적인 추리와 진정한 그리스도인 사랑이 합쳐지면 사람들의 마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한때 불교인이었던 온 트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불교에서 가르치는 열반에 대한 믿음과 성서에 나오는 지상 낙원의 약속을 비교해 보니, 낙원 희망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진리에 이르는 길이 여러 개라고 믿었기 때문에 배운 것에 따라 행동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죠. 그러다가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알게 된 진리에 따라 행동하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버마의 증인들, 1987년

물론 사람들이 종교적 신념을 바꾸도록 도우려면 재치와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쿠마르 차카라바니의 아버지는 독실한 힌두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베델 성원인 지미 자비에르가 열 살 된 아들 쿠마르에게 글 읽는 법을 가르치도록 허락했습니다. 쿠마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아버지는 종교가 아니라 읽기만 가르치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미는 아버지에게 「나의 성서 이야기 책」은 아이들에게 읽는 법을 가르치는 데 아주 좋은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지미는 나를 가르친 다음 시간을 내어 아버지와 이야기하면서 진실한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아버지가 종교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하자, 지미는 재치 있게 ‘성서에 대답이 들어 있습니다. 함께 알아보시면 어떨까요?’ 하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진리를 받아들였고 우리 가족 중에 63명이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혼란의 와중에 대회를 열다

1980년대 중반에 버마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점점 더 고조되었습니다. 결국 1988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군부는 시위를 신속히 진압했고 거의 온 나라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베델 성원인 초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국은 통행금지를 엄격하게 시행했고 참석자가 5명이 넘는 모임은 금지시켰습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지역 대회를 취소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양곤 지구의 군사령관을 찾아가 1000명이 참석하는 대회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틀 후에 우리는 허가를 받았습니다! 허가서를 다른 여러 지역의 관청에 보여 주자, 그들도 관할 지역에서 대회를 열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모든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모임을 소홀히 하지 않다

1988년의 소요 사태 이후로 버마의 경제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그래도 형제 자매들은 삶에서 왕국 권익을 계속 첫째로 구함으로 하느님에 대한 깊은 믿음을 나타냈습니다.—마태 6:33.

가족과 함께 사가잉의 외딴 마을에 살았던 친칸달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타한에서 열리는 지역 대회에 가고 싶었는데, 대회에 참석하려면 배와 트럭을 타고 이틀간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비운 동안 우리가 키우는 닭들을 지켜 줄 사람이 없었죠. 그래도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하면서 대회에 참석했습니다. 대회에 갔다 와 보니 닭이 19마리나 없어졌더군요. 우리에겐 엄청난 타격이었죠. 하지만 1년 만에 몇 마리 안 되던 닭이 60마리 이상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해에 병이 돌아 우리 마을에서 닭이 많이 죽었는데, 우리가 키우던 닭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습니다.”

아웅 틴 뉴트와 그의 아내 니에인 미아도 영적인 초점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곤에서 북서쪽으로 64킬로미터 떨어진 촌샤라는 작은 마을에서 9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아웅 틴 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보통 우리 가족이 먹을 것이라곤 죽과 야채뿐이었습니다. 돈도 없었고 내다 팔 물건도 없었죠. 그래도 우울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족에게 말했습니다. ‘예수께서도 머리 둘 곳이 없었어. 그러니 내가 나무 밑에서 살게 되거나 먹을 게 없어서 죽게 되더라도 계속 충실히 하느님을 섬길 거야.’

“여호와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히브리 13:6

하루는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나는 ‘걱정 마. 하느님이 도와주실 거야’ 하고 말했습니다. 오전에 야외 봉사를 하고 나서 아들들을 데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하지만 겨우 한 끼 먹을 만큼밖에 잡지 못했습니다. 나는 수련이 한데 모여 있는 물가에 고기잡이 망을 놓아 두고 아들들에게 이따가 집회 끝나고 다시 오자고 말했습니다. 그날 오후에는 바람이 몹시 불었습니다. 집회 후에 강에 가 보니 많은 물고기가 바람을 피해 수련 아래에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망을 내려 물고기를 많이 잡았고, 물고기를 팔아서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을 살 수 있었습니다.”

미얀마에 사는 여호와의 종들은 “내가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고 결코 너를 버리지 않겠다”라고 하신 하느님의 가슴 뭉클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거듭 경험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가 나를 돕는 분이시니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다. 사람이 내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히브리 13:5, 6.

인쇄와 출판의 발전

1956년부터 미얀마 사람들은 미얀마어(버마어) 「파수대」를 통해 정기적으로 공급되는 영적 양식으로부터 유익을 얻어 왔습니다. 민족간의 전쟁과 내란과 경제적 혼란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파수대」는 한 호도 빠짐없이 발행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잡지를 어떻게 생산했습니까?

여러 해 동안 지부 사무실은 번역된 잡지의 본문을 타자기로 쳐서 원고 몇 부를 정부 검열관에게 제출했습니다. 검열관이 원고를 승인하면 지부는 인쇄용지를 구매하기 위한 신청서를 냈습니다. 종이를 구매한 후 한 형제가 종이와 잡지 원고를 인쇄업자에게 가져가면 인쇄업자는 미얀마어(버마어) 활자를 사용하여 수작업으로 각 페이지를 한 글자씩 조판했습니다. 형제가 본문이 정확한지 교정을 보고 나면 인쇄업자는 삐걱거리는 낡은 인쇄기로 잡지를 인쇄했습니다. 그런 다음 잡지를 다시 검열관에게 보내면 검열관은 잡지 발행을 승인하는 증서와 증서 고유 번호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힘든 절차를 밟으려면 여러 주가 걸렸고 종이와 인쇄의 품질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에 지부에 새로운 출판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인쇄 작업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세계 본부에서 개발한 다종 언어 전산 사식 시스템(멥스)은 컴퓨터, 컴퓨터 프로그램, 사식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186개 언어로 인쇄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미얀마어도 있었습니다! *

지부에서 일한 적이 있는 미아 마웅은 이렇게 말합니다. “미얀마에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서적을 조판하고 출판한 건 여호와의 증인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멥스 시스템과 더불어 지부에서 디자인한 우아한 미얀마어 서체를 사용한 것은 미얀마의 인쇄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처럼 인쇄를 깔끔하게 할 수 있는지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멥스를 사용하면서 활판 인쇄보다 질이 훨씬 더 좋은 오프셋 인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멥스 덕분에 삽화의 인쇄 품질도 크게 개선되면서 「파수대」는 시각적으로 훨씬 더 눈길을 끄는 잡지가 되었습니다.

1991년에 미얀마 정부가 「깨어라!」의 발행을 승인하자 형제들은 감격했습니다. 일반 사람들도 기뻐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보부의 한 고위 관리는 많은 독자들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했습니다. “「깨어라!」는 여느 종교 잡지와는 다릅니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루며 이해하기도 쉽죠. 이 잡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잡지 인쇄 부수는 900퍼센트 이상 증가했습니다!

지난 20년 사이에 지부에서 매달 인쇄하는 잡지 부수는 1만 5000부에서 14만 1000부로 약 900퍼센트 증가했습니다! 이제 양곤에서는 「파수대」와 「깨어라!」를 쉽게 볼 수 있으며, 전국 각지의 많은 사람이 이 잡지를 즐겨 읽고 있습니다.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필요하게 되다

1988년의 소요 사태 이후에 군 당국은 미얀마의 사회 단체와 종교 단체가 정부에 등록할 것을 권고했습니다. 물론 지부 사무실도 그러한 권고를 따랐습니다. 2년 뒤인 1990년 1월 5일에 정부는 “여호와의 증인 (워치 타워) 협회”를 미얀마에서 공식적으로 인가해 주었습니다.

베델 시설이 너무 비좁아 바닥에서 다림질을 하는 자매의 모습

그 일이 있기 전에 형제들은 39번가에 있던 지부 사무실을 양곤 북부 교외의 인야 가(街)로 이전했습니다. 그곳은 부유층이 사는 지역이었으며, 이전한 2층 주택은 2000제곱미터의 대지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시설도 이제는 너무 비좁았습니다. 당시 지구 감독자로 미얀마를 방문한 비브 모리츠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25명의 베델 가족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방에는 스토브가 없어서 한 자매가 핫플레이트 하나로 요리를 했습니다. 세탁실에도 세탁기가 없어서 자매 한 명이 바닥에 있는 움푹 팬 곳에서 빨래를 했습니다. 형제들은 스토브와 세탁기를 구매하고 싶었지만, 그런 물건들을 수입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분명 더 큰 지부 시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통치체는 기존의 2층 주택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숙소와 사무실이 있는 4층 건물을 신축하는 방안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공사를 추진하려는 형제들 앞에는 험난한 장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첫째로, 정부 관청 여섯 군데에서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둘째로, 현지 건축업자들은 철골 건축 기술이 없어서 공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셋째로, 해외의 증인 자원봉사자들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건축 자재는 국내에서 조달할 수도 없고 수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보나 마나 결과는 뻔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여호와를 신뢰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원하기만 하시면 새로운 지부 사무실은 건축될 것이었습니다!—시 127:1.

‘힘이 아니라 나의 영으로’

지부의 법률부에서 일하는 초윈은 그 후에 있었던 일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의 건축 허가 신청서는 관청인 종무부를 비롯하여 6개의 정부 관청 중 다섯 군데에서 통과되었습니다. 그런데 양곤 도시 개발 위원회가 4층 건물은 너무 높다고 하면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이번에도 거절을 당했습니다. 지부 위원회는 내게 계속 시도하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세 번째로 신청서를 냈더니 드디어 허가가 나왔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민부를 찾아갔습니다. 이민부 관리들은 외국인은 관광 비자로 7일간만 입국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자원봉사하러 오는 우리 기술자들이 미얀마 사람들에게 선진 건축 기술을 가르칠 것이라고 설명하자, 그들은 자원봉사자들에게 6개월 비자를 내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찾아간 무역부에서 우리는 모든 수입이 완전히 동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에게 우리가 추진하는 건축 공사의 성격을 설명하자, 그들은 미화로 100만 달러 이상의 건축 자재를 수입할 수 있는 면허를 내주었습니다. 수입세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재무부를 방문한 결과 세금을 내지 않고 자재를 수입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로도 되지 않고, 힘으로도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한다.’”—스가랴 4:6.

외국인 형제들과 미얀마 형제들이 연합해서 함께 일했습니다

1997년에 자원봉사자들이 건축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형제들이 대부분의 건축 자재를 기증했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태국에서도 필요한 자재를 보내 주었습니다. 공사를 감독하는 일에 참여한 브루스 피커링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몇몇 형제들이 전체 철골을 미리 제작한 다음 미얀마로 와서 볼트로 하나씩 조여 모두 조립했습니다. 놀랍게도, 볼트와 구멍이 안 맞는 경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형제들 외에도 그리스, 뉴질랜드, 독일, 미국, 영국, 피지에서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왔습니다.

미얀마의 전도인들은 30년 만에 처음으로 외국인 형제 자매들과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도널드 듀어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정말 꿈만 같았죠. 그들의 영성과 사랑과 자기희생적인 영은 우리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형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유용한 건축 기술을 배웠습니다. 조명이라곤 촛불밖에 모르던 전도인들이 전등을 설치하는 배선 기술을 배웠습니다. 기껏해야 부채밖에 써 보지 못한 형제들이 에어컨을 설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심지어는 전동 공구를 쓰는 법도 배웠습니다!”

미얀마 베델

한편 외국인 자원봉사자들은 미얀마 형제 자매들의 믿음과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브루스 피커링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넉넉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집으로 식사 초대를 해서, 자기 가족이 며칠 동안 먹을 음식을 우리에게 대접했습니다. 그들의 본을 통해 인생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가족과 믿음과 형제 관계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000년 1월 22일에 국립 극장에서 열린 특별 모임에서 새로운 지부 시설이 봉헌되었습니다. 미얀마 형제들은 통치체 성원인 존 E. 바 형제가 방문하여 봉헌 연설을 한 것을 매우 기뻐했습니다.

새로운 왕국회관을 짓다

새로운 지부 시설이 완공될 무렵, 형제들은 또 다른 절실한 필요에 관심을 돌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왕국회관이었습니다. 1999년에 일본에서 노부히코 고야마와 그의 아내 아야가 미얀마에 왔습니다. 노부히코는 지부에 왕국회관 건축 데스크를 신설하는 일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먼저 우리는 전국에 있는 회중의 집회 장소들을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비행기, 오토바이, 자전거, 배를 타거나 걸어서 전국을 여행했습니다. 많은 곳이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종종 정부의 여행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새로운 왕국회관을 지어야 할지 결정하면, 통치체는 재원이 부족한 나라를 위한 건축 기금을 할당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건축 팀을 만들었고, 건축 팀은 첫 번째 왕국회관을 짓기 위해 양곤 교외의 슈웨피타로 갔습니다. 외국인 형제들과 현지 형제들이 한데 어울려 일하자, 현지 경찰은 놀라서 건축을 몇 차례 중단시키고는 미얀마인이 그처럼 외국인과 함께 일해도 되는지 상관에게 확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형제들을 칭찬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감탄했습니다. ‘외국인이 화장실 청소를 하다니! 그런 모습은 난생 처음 봤어요. 당신들은 정말 남다르군요!’

새로 지은 왕국회관에 배를 타고 도착한 모습

또 다른 건축 팀은 미얀마와 태국 사이의 국경 지대에 있는 타치레이크에서 새로운 왕국회관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태국 형제들이 매일 국경을 건너와 미얀마 형제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 형제들은 서로 언어가 다른데도 연합해서 일했습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왕국회관이 완공될 무렵, 적대 관계에 있던 국경 지대의 군사 집단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근처에서 폭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쳤지만, 왕국회관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들자 72명이 왕국회관에 모여 평화의 하느님 여호와께 건물을 봉헌했습니다.”

1999년 이래로 왕국회관 건축 팀들은 전국에 65채가 넘는 왕국회관을 지었습니다

1999년 이래로 왕국회관 건축 팀들은 전국에 65채가 넘는 왕국회관을 새로 지었습니다. 그에 대해 현지 전도인들은 어떻게 느낍니까? 한 자매는 고마운 마음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새 왕국회관을 갖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제 관심자들을 집회에 초대하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우리에게 이런 친절을 나타내 주신 여호와와 그분의 조직에 감사합니다!” 많은 형제들이 이 자매의 말에 공감합니다.

선교인들이 도착하다

수십 년간 폐쇄 정책을 고수하던 미얀마는 1990년대에 서서히 국제 사회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지부 사무실에서도 정부로부터 다시 선교인 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마침내 2003년 1월에 길르앗 졸업생인 아오키 히로시와 아오키 준코 부부가 일본에서 왔습니다. 약 37년 만에 처음으로 미얀마에 선교인이 입국한 것입니다.

아오키 히로시와 아오키 준코, 약 37년 만에 처음으로 미얀마에 입국한 선교인 부부

히로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나라에 외국인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당국이 우리 전파 활동의 성격을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처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현지 형제 자매들의 재방문과 성서 연구를 따라다녔죠. 곧 우리는 미얀마 사람들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전 봉사를 시작한 첫날 새로운 성서 연구를 다섯 건이나 시작했습니다!”

준코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종 우리를 인도하시는 여호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어요. 한번은 오토바이를 타고 만달레이 근처에 가서 성서 연구를 하고 돌아오는데 타이어에 펑크가 났어요. 오토바이를 끌고 가까운 공장에 가서 타이어 수리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죠. 경비는 히로시와 오토바이를 공장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지만, 나는 경비실에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경비는 궁금한 것이 많았어요.

그가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요?’

‘친구들을 좀 만나려고요.’

‘뭐 때문에요? 종교 모임을 하나요?’ 하고 그가 캐물었지요.

나는 그 사람의 동기를 알 수 없어서 못 들은 척 했어요.

그가 다그쳐 물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보세요! 어느 종교에서 나온 거죠?’

나는 가방에서 「파수대」를 한 부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지요.

그는 흥분해서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하고 말했어요. 그러고는 다른 직원들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거 봐! 천사가 타이어에 펑크를 내서 우리한테 여호와의 증인을 보내 준 거야!’

그 남자는 자기 가방을 열어 성경과 우리 전도지 하나를 꺼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증인과 연구를 했지만 만달레이로 이사 오면서 연락이 끊어졌던 거예요. 우리는 그 자리에서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다른 직원 몇 사람도 연구를 했지요.”

2005년에는 필리핀에서 봉사 훈련 학교(현재는 독신 형제 성서 학교)를 졸업한 네 명의 선교인이 미얀마에 왔습니다. 그 형제들 중에 넬슨 후니오는 선교인들이 흔히 겪는 향수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잠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친절한 형제가 히브리서 11:15, 16을 보여 주었죠. 그 성구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이 살던 우르의 집을 그리워하며 못 잊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목적에 따라 계속 앞만 보고 나아갔다고 알려 줍니다. 그 구절을 읽은 후로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임지를 내 고향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본이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다

1세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내게서 들은 그것들을 충실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그들도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충분한 자격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디모데 둘째 2:2) 이 원칙을 마음에 새긴 선교인들은 미얀마의 지방 회중들이 전 세계의 여호와의 백성에게 적용되는 신권적인 방식을 좀 더 밀접히 따르도록 돕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예를 들어, 선교인들은 미얀마의 많은 전도인들이 성서 연구생을 가르칠 때 연구생이 책에 있는 대답을 그대로 되풀이해서 읽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미얀마 학교에서도 그런 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조마르 우비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구생의 생각과 감정을 이끌어 내기 위해 견해 질문을 하도록 참을성 있게 전도인들을 격려했습니다. 전도인들은 기꺼이 그 제안에 따랐고 그 결과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선교인들은 많은 회중에 장로나 봉사의 종이 한 명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임명된 형제들 중 일부는 열심히 일하고 충실하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권위적으로 양들을 대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물론 1세기에도 그와 같은 인간적인 경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장로들에게 이렇게 권고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돌보아야 할 하느님의 양 떼를 치십시오. ··· 하느님의 상속 재산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도리어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베드로 첫째 5:2, 3) 선교인들은 형제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습니까? 벤자민 레이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더욱더 친절하고 부드럽고 다가가기 쉬운 사람이 되어 좋은 본을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의 좋은 본은 서서히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장로들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 좀 더 인자하게 양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번역의 개선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다

여러 해 동안 미얀마의 형제들은 19세기에 번역된 성서를 사용했습니다. 그 성서는 어느 기독교 선교사가 불교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것이었습니다. 번역판에는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팔리어 단어들이 많이 나오며 이해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래서 2008년에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 신세계역」이 미얀마어로 발표되자 형제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모리스 라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청중은 오랫동안 박수를 멈추지 않았고, 성서를 받고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전도인들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번역판은 표현이 단순 명료하고 정확합니다. 불교인들도 쉽게 이해할 정도입니다!” 이 번역판이 나오자 이 나라의 성서 연구 수는 금세 40퍼센트 이상 증가했습니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도리스 라지는 양곤 베델에서 번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언어가 그렇듯이, 미얀마어도 팔리어와 산스크리트어에 뿌리를 둔 문어체와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구어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어체로 말을 하기도 하고 구어체로 글을 쓰기도 합니다. 예전에 발행된 출판물은 대부분 문어체로 되어 있는데, 이제 문어체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미얀마 지부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 미얀마어로 출판물을 번역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얀마 지부의 번역부 성원들

이 새로운 출판물들은 즉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번역부 감독자인 탄 트웨 우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출판물은 수준이 높지만 난 이해를 못하겠어요’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는 우리 출판물을 받으면 얼굴이 밝아지면서 즉시 읽기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출판물은 정말 이해하기 쉽네요!’ 하고 말합니다.” 회중 집회에서도 참석자들이 출판물의 내용을 분명히 이해하기 때문에 해설에 더 많이 참여하고 해설의 질도 개선되었습니다.

현재 번역부에서는 26명의 전 시간 번역자들이 미얀마어, 하카친어, 스고카인어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밖에도 11개의 지방 언어로 출판물이 번역되었습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

2008년 5월 2일 강력한 폭풍인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시속 240킬로미터의 강풍을 몰고 미얀마에 상륙했습니다. 나르기스는 에야와디 삼각주에서 태국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휩쓸며 가는 곳마다 파괴와 죽음을 남겼습니다. 이 사이클론으로 200만 명 이상이 피해를 입고 약 14만 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영향을 받았지만 놀랍게도 부상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새로 지은 왕국회관으로 대피해 목숨을 건졌습니다. 에야와디 삼각주에 있는 해안 마을인 보팅곤에서는, 20명의 증인과 80명의 마을 주민이 왕국회관으로 대피하여 9시간 동안 지붕 아래에 있는 들보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물이 왕국회관 천장 가까이로 차올라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 후 물이 빠졌습니다.

새로 짓고 있는 자기 집 밖에 서 있는 메이 신우

툰킨 형제 부부와 구호 팀, 사이클론 나르기스가 지나간 후 다시 지은 그 부부의 집 앞에서

지부 사무실은 가장 피해가 심한 에야와디 삼각주 하구 지역으로 구호 팀을 급파했습니다. 구호 팀은 식품과 물과 약품을 가지고 시체가 널려 있는 황폐된 지역을 지나 그 마을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그 지역에 처음으로 도착한 구호 단체였습니다. 구호 팀은 형제 자매들에게 구호 물자를 전달하고 성경에 근거한 연설로 그들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그들의 소유물이 사이클론에 다 쓸려 갔기 때문에 성서와 성서 출판물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대규모 구호 활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지부 사무실은 양곤과 파테인에 재해 구호 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구호 위원회는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를 조직하여 피해자들에게 물과 쌀과 기타 필수품을 전달했습니다. 또한 사이클론으로 손상을 입거나 완전히 파괴된 증인들의 집을 다시 짓기 위해 건축 팀도 조직했습니다.

자원봉사자로 일한 토비아스 룬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아내 소피아가 메이 신우를 찾았을 때, 그 아이는 무너진 자기 집 잔해 사이에서 햇볕에 성서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열여섯 살 된 청소년 자매인 메이 신우는 그 집안에서 유일한 전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지었지만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죠. 얼마 후 우리 건축 팀이 헬멧을 쓰고 전동 공구와 건축 자재를 가지고 도착해서 메이 신우의 가족을 위해 새 집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건축 현장은 그 지역에서 큰 구경거리가 되었고, 현장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여러 날 동안 쪼그리고 앉아서 건축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여러분의 조직은 정말 잘 연합되어 있고 사랑이 넘치는군요. 우리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메이 신우의 부모와 친형제자매들도 집회에 참석하고 있으며, 가족 모두가 영적으로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구호 활동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여러 톤에 달하는 구호 물자를 전달하고 160채의 집과 8채의 왕국회관을 수리하거나 새로 지었습니다. 사이클론 나르기스는 미얀마에 비극과 역경을 몰고 왔지만, 폭풍의 구름이 걷히면서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연합시켜 주고 여호와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사랑의 띠가 분명히 나타난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행사

2007년 초에 미얀마 지부 사무실은 가슴 설레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일이 있기 1년 전에 아내 재닛과 함께 미얀마 지부에 도착한 존 샤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통치체는 우리에게 양곤에서 국제 대회를 개최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2009년 국제 대회에는 10개국에서 온 많은 외국 형제들이 참석할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얀마 지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존은 계속 이렇게 말합니다.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큰 모임을 어디에서 열지? 먼 지역에 사는 전도인들도 참석해야 하나? 그럼 어디에 머물게 하지? 양곤까지는 어떻게 오게 할까? 형제들이 가족의 식비를 감당할 수 있을까? 미얀마 당국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런 모임을 허락이나 해 줄까?’ 장애물이 끝도 없이 많아 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하느님에게는 가능합니다”라는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누가 18:27) 그래서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곧 우리는 적당한 장소를 찾았습니다. 도심에서 가깝고 냉방 시설을 갖춘 1만 1000석 규모의 미얀마 국립 실내 체육관이었습니다. 즉시 우리는 그 체육관을 임대하기 위해 당국에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달이 흘러 대회가 몇 주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우리의 신청은 승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체육관 운영진이 우리가 대회를 여는 바로 그 기간에 킥복싱 대회를 열기로 이미 계획했던 것입니다! 다른 장소를 물색할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행사의 주최자와 수십 명의 관리들과 함께 참을성 있게 협상을 했습니다. 결국 그 행사의 주최자는 대회를 연기해 주겠다고 했지만, 참가 신청을 한 16명의 프로 킥복싱 선수들이 출전 계약을 변경해 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수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특별한 모임을 위해 그 장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듣고는 모두 계약 변경에 동의했습니다.”

지부 위원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초윈, 흘라 아웅, 존 샤프, 도널드 듀어, 모리스 라지

또 다른 지부 위원인 초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체육관을 사용하려면 여전히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의 신청은 이미 네 번이나 거부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께 기도한 후 미얀마의 모든 경기장을 담당하고 있는 군 장성과 만났습니다. 대회가 2주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 그렇게 고위직에 있는 정부 관리와 처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쁘게도 그는 우리의 요청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미얀마 전역과 해외에서 비행기, 기차, 배, 버스, 트럭을 타거나 걸어서 양곤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미얀마의 많은 형제들은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 단위로 여러 달 동안 돈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농사를 짓거나 돼지를 키우거나 바느질 일을 하거나 강에서 사금을 채취했습니다. 상당수는 대도시에 가 본 적도 없고 외국인을 본 적도 없었습니다.

미얀마 북부에서 1300명이 넘는 대회 참석자들은 양곤으로 가는 특별 임대 열차를 타기 위해 만달레이 철도역에 모여들었습니다. 나가 구릉 지대에 사는 형제들은 철도역까지 오는 데 6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들이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두 명의 전도인이 타던 임시변통으로 만든 휠체어가 망가지는 바람에, 그들은 그 두 사람을 업어서 데려왔습니다. 많은 사람이 역 승강장에서 밤을 보내면서 대화를 나누고 웃고 왕국 노래를 불렀습니다. 교통편을 마련하는 일을 도운 붐친 카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두가 들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음식과 물과 깔개를 나눠 주었죠. 드디어 기차가 도착하자, 장로들은 형제들을 인솔하여 각각 정해진 객차에 타게 했습니다. 얼마 후 스피커에서 ‘여호와의 증인 기차가 출발합니다!’ 하는 방송이 울려 퍼졌습니다. 나는 아직 기차를 못 탄 사람이 없는지 살펴본 다음 기차에 뛰어올랐습니다!”

한편 양곤에서는 거의 700명에 달하는 외국인 참석자들이 호텔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3000명이 넘는 미얀마인 참석자들은 어디에서 묵을 것입니까? 숙박부에서 일한 민 르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양곤에 있는 전도인들의 마음을 열어 형제 자매들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어떤 가족들은 15명의 손님을 맞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손님들을 당국에 등록하기 위한 비용을 내고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매일 체육관까지 오가는 교통편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수십 명은 인근의 몇몇 왕국회관에 머물렀고 수백 명은 큰 공장 건물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약 500명의 참석자들은 여전히 잘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체육관 운영진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그들은 참석자들이 체육관에서 잠을 자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양곤에 있는 전도인들의 마음을 열어 형제 자매들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2009년에 열린 “깨어 있으십시오!” 국제 대회로 형제들의 믿음이 강해졌고 양곤에서 큰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체육관의 관리 상태가 좋지 않았으므로, 350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대회를 열기 위해 열흘간 시설을 보수했습니다. 대회 감독자인 테이 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배관과 전기 시설과 냉방 시설을 수리한 다음 체육관 전체에 페인트 칠을 하고 청소도 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한 결과 훌륭한 증거가 행해졌습니다. 체육관을 책임지고 있는 군 장교는 기뻐하며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체육관을 매년 사용하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2009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열린 대회에 5000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마지막 날에는 많은 사람이 전통 의상을 입고 대회에 참석하여 대회장을 다채로운 색으로 수놓았습니다. 한 자매는 “회기 시작 전부터 모두가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통치체 성원인 게리트 뢰시가 마치는 기도를 끝내자, 청중은 한동안 박수를 치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86세 된 자매는 많은 사람의 느낌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신세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많은 정부 관리들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 관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임은 정말 특별합니다. 욕하는 사람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빈랑을 씹는 사람도 없군요. 온갖 민족의 사람들이 연합되어 있고요. 이런 모임은 난생 처음입니다!” 모리스 라지의 말에 따르면, “양곤의 고위 사령관도 이런 감동적인 행사는 자신도 자신의 동료들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이 대회가 정말 특별했다고 말했습니다. 한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회 전에는 국제적인 형제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형제들에게 들은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대회에서 그러한 형제 관계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형제들이 우리에게 보여 준 사랑을 결코 잊지 못할 겁니다.”

“대회 전에는 국제적인 형제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형제들에게 들은 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대회에서 그러한 형제 관계를 직접 체험했습니다!”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2000년 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십시오. 희어져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요한 4:35) 오늘날 미얀마의 밭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이 나라에는 3790명의 전도인이 있는데, 전도인 대 인구 비율이 1 대 1만 5931이나 됩니다. 참으로 거대한 밭이 수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012년 기념식에 8005명이 참석했으므로, 성장의 가능성도 매우 큽니다!

한 가지 예로 방글라데시와 맞닿아 있는 해안 지방의 라킨 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곳에는 거의 400만 명이 살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모리스 라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출판물이나 영적인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매달 여러 통 받습니다. 또한 미얀마의 불교인들 가운데서,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진리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인’에게 수확하는 일에 일꾼들을 더 보내 달라고 계속 청하고 있습니다.”—마태 9:37, 38.

“우리는 ‘주인’에게 수확하는 일에 일꾼들을 더 보내 달라고 계속 청하고 있습니다”

거의 100년 전에 두 명의 용감한 파이오니아가 이 불교 국가에 좋은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이래로 다양한 민족적 배경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편에 섰습니다. 끔찍한 분쟁, 정치적 격변, 널리 퍼진 가난, 종교적 박해, 국제적 고립,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미얀마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흔들림 없이 정성을 바쳐 왔습니다. 그들은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온전히 인내하며 기쁨으로 오래 참”겠다고 지금도 굳게 결심하고 있습니다.—골로새 1:11.

^ 2항 예전에는 미얀마를 버마라고 했는데, 그 이름은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족인 바마(버마)족에서 따온 것이다. 1989년에 이 나라의 국명은 여러 민족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이름인 미얀마 연방으로 바뀌었다. 이 연감에서는 1989년 이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는 버마를, 그해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미얀마를 사용할 것이다.

^ 8항 영국계 인도인이란 인도인과 영국인의 혈통을 모두 물려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영국의 통치를 받던 시기에 많은 영국계 인도인들이 당시 “영국령 인도”의 일부로 여겨지던 버마로 이주했다.

^ 8항 버트럼 마셀린은 버마에서 침례받은 최초의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는 1960년대 후반에 버마에서 사망할 때까지 충실을 유지했다.

^ 62항 이 금액은 약 95달러(미화)에 해당하는 것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액수였다.

^ 71항 「1966 여호와의 증인 연감」(영문) 192면 참조.

^ 113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했지만 지금은 절판됨.

^ 140항 지금은 멥스로 600개가 넘는 언어를 처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