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문제—6000만 명을 죽이는 것이 해결책입니까?
황당하게 놀란 열다섯 살 된 한 소녀는 떠나가는 남자 친구를 눈물 고인 눈으로 노려본다. 남자 친구로부터 바보같이 왜 임신했냐는 말을 들은 것이다. 소녀는 남자 친구가 자기를 사랑하는 줄로 알았다.
한 여인은 여섯째 아기를 임신했음을 알게 되자 눈앞이 캄캄했다. 남편은 실직하였고, 다섯 아이는 밤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든다. 어떻게 한 아이를 더 키울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아기를 낳을 형편이 못 됩니다.” 옷을 잘 차려 입은 한 여인이 의사에게 설명한다. 이 여인은 마침내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하여 새로운 직업을 가질 참이었다. 남편은 변호사 일에 온 정신을 쏟고 있다. 이들에게 아기를 키울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에서 살면서 제각기 난처한 문제에 직면하지만 해결책은 같은 것을 택한다. 낙태다.
낙태는 정치·사회·의학·신학계에서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90년대에 격렬한 논란이 된 문제다. 미국에서 낙태 반대자들은 태아의 권리를 위해 시위 운동을 벌인다. 낙태 찬성자들은 자유라는 근거와 여성의 결정권으로 맞선다. 낙태를 반대하는 십자군과 낙태를 찬성하는 자유 투사들은 선거 운동, 법정, 교회, 심지어 거리에서도 싸움을 벌인다.
수많은 사람은 주도권을 잡으려는 양측의 격렬한 논쟁에 끼여 갈팡질팡하고 있다. “선택권 지지”(pro-choice: 낙태 찬성), “생명권 지지”(pro-life: 낙태 반대)라는 말은 바로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주의 깊이 선택한 용어다. 자유를 우상화하는 이 시대에 선택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생명권을 지지하지 않을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낙태 찬성 그룹들은, 안전하지 않은 불법 낙태 수술을 받다가 죽은 억압받는 여자들의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옷걸이용 철사를 내보인다. 낙태 반대자들은 낙태된 수많은 아기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게 하려고 낙태된 아기를 담은 커다란 병을 내보인다.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한 이 비극은 로렌스 H. 트라이브가 지은 책 「낙태: 절대적 사실의 대립」(Abortion: The Clash of Absolutes)에 적절하게 묘사되어 있다. “태아가 실제로 사람임을 쉽게 그려 볼 수 있고, 태아의 상태를 중요시하고 가엾게 여기는 많은 사람은 임신부와 임신부가 처한 곤경을 거의 헤아리지 않는다. ··· 임신부와 임신부의 몸을 쉽게 그려 볼 수 있고, 임신부에게 자기 삶을 주관할 권리가 있다고 외치는 다른 많은 사람은 임신부 속에 있는 태아를 거의 그려 보지 않으며 태아에게 허용될 수 있는 삶을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 도덕 전쟁이 계속 벌어지는 동안 올해에도 5000만 명에서 6000만 명의 태아가 권리 싸움터에서 희생될 것이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 문제에서 당신은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 다음의 주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결정권은 근본적으로 여성에게 있는가?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과연 있는가? 생명은 언제 시작되는가? 그리고 별로 제기되지 않지만, ‘생명과 출산의 창조주께서는 낙태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도 있다.
낙태는 옛날부터 있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낙태가 흔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서는 태동기 전 즉 임신부가 태아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기 전에 하는 낙태는 허용할 만한 것으로 여겼다. 성혁명과 더불어 응분의 결과 곧 원치 않는 수많은 임신이 초래되었다.
1960년대는 여성 운동으로 특징을 이루었다. 이 운동의 기초석은 이른바 생식권이다. 일부 사람들은 강간이나 근친 상간으로 임신하게 된 여자 혹은 건강이 위태로운 임신부의 낙태 권리를 부르짖는다. 의료 과학 기술 덕분에 모태를 검사하여 분만 결함 여부와 아기의 성별을 알아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의사의 비관적인 진단 때문에 낙태하는 경우도 있다. 40세가 넘은 임신부는 기형아를 낳을까 봐 걱정할지 모른다.
가난에 찌든 나라들에서, 피임법을 쓰기 어려운 많은 여성은 자녀를 더 낳으면 부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부 임신부들은 낙태 찬성론의 정의를 확대 적용하여, 단지 임신 시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태아의 성별을 알아보고 나서 단순히 원치 않기 때문에 낙태한다.
이런 논쟁에서 마구 튀어 나오는 공격적인 말은 생명이 언제 시작되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수정란 세포가 생명체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어떤 상태의 생명체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한 세포 조직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도토리가 도토리나무인가? 그렇다면 태아는 사람인가? 태아에게 인권이 있는가? 말씨름은 끝날 줄 모른다. 병원에서 조산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손에 땀을 쥐며 일하던 의사가 그 조산아와 같은 달 수의 태아를 죽이기 위해 또 땀을 흘린다는 사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아기가 모태 안에 있을 때 죽이는 것은 법으로 허용되지만, 모태 밖에 있을 때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아예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해 마음만 먹으면 피임법을 쓸 수 있는, “해방된” 여권 신장론자들이 낙태를 합법화하라고 소리지른다. 이들은 사실상 이미 수태하고 생식할 능력을 사용한 후에 이른바 생식권이라는 것을 격렬하게 주장한다. 그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그 생식을 취소할 권리다. 정당한가? “내 몸이에요!” 그러나 사실인가?
임신부: ‘내 몸이다!’
아기: “아니에요! 제 몸이에요!”
「낙태 문제 지침서」(Abortion—A Citizens’ Guide to the Issues)는 임신 첫 12주 안에 “젤리 상태의 조그마한 조직 덩어리는 매우 쉽게 제거할 수 있다”고 알려 준다. 낙태를 “조직 덩어리를 제거하는 것”으로 혹은 “수태의 산물을 지우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일인가? 혹은 이런 말들은 달갑지 않은 사실을 부드럽게 나타내고 불편한 양심을 편하게 하려고 꾸며댄 표현들이 아닌가?
원치 않는 그 조직 덩어리는 자체의 염색체 단위를 온전히 갖춘 생명체로 무럭무럭 자란다. 염색체는 예언된 자서전처럼 독특한 개인이 형성되어 가는 자세한 이야기를 알려 준다. 저명한 태아학 연구 전문 교수 A. W. 라일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어느 단계의 태아든지 그것이 모체의 단순한 부속 기관이라는 견해를 가질 수 없다. 발생학적으로 태아는 수태될 때부터 어머니와는 분리되는 개체다.”
무책임한 행위
그렇지만 많은 사람은 낙태를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지 않으려는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발생하는 어떤 “사고”이든 처리하기 위한 안전 장치로 낙태를 이용하려고 한다.
통계가 알려 주는 바에 따르면, 금세기에 사춘기 연령이 낮아졌다. 따라서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연령이 낮아졌다. 그런 청소년은 자녀를 갖는 특권에 따르는 막중한 책임에 대해 가르침받는가? 미국인 남녀는 보통 16세에 동정을 잃는다. 다섯 명 중 한 명은 열세 살이 되기 전에 동정을 잃는다. 기혼 남녀 중 3분의 1은 혼외 정사를 갖고 있거나 가진 적이 있다. 난잡한 성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낙태하기 일쑤다. 에이즈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매춘을 합법화하라는 외침이 이따금 있듯이, 낙태를 합법화하면 어느 정도 낙태 수술을 안전하게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도덕병을 널리 퍼뜨릴 수 있고 실제로 널리 퍼뜨리는 온상을 만들었다.
폭력 피해자인가, 상황 피해자인가?
흥미롭게도, 연구 결과가 알려 주듯이, 강간을 당해 임신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강간 피해로 보고된 3500건을 차례로 조사한 결과 임신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8만 6000건의 낙태 중 강간당해 임신한 경우는 22건뿐이었다. 그러므로 강간이나 근친 상간으로 임신했기 때문에 낙태하려는 비율은 매우 적다.
고칠 수 없는 분만 결함을 지닌, 심하게 기형이 된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끔찍한 진단을 받은 경우는 어떠한가? 결함의 초기 조짐을 보고 일부 의사들은 서둘러 낙태를 하라고 강력하게 권한다. 의사들은 진단에 대해 절대적으로 자신할 수 있는가? 많은 부모는 그런 섬뜩한 예견이 근거가 없는 때도 있었음을 증언할 수 있다. 이들이 낳은 예쁘고 건강한 자녀는 그 사실을 증명한다. 결함이 있다고 생각되는 자녀를 낳아야 하는데도 마냥 좋아하는 부모도 있다. 사실, 미국의 경우 태아에게 어느 정도 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낙태하려는 사람은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독자가 이 기사를 읽는 동안에도 수백 명의 태아가 죽어 간다. 어디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의 생활은 어떤 영향을 받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