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숭배의 자유를 깊이 인식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

숭배의 자유를 깊이 인식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

숭배의 자유를 깊이 인식하고 있는 러시아 사람들

1991년에 소련(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이래,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숭배하는 면에서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서 다른 나라로 이주한 사람들 역시 그러한 자유를 깊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구소련 지역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숭배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자유를, 기쁨을 주는 참으로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 동안이나 그러한 자유를 박탈당하였습니다.

1917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에서는 성서를 읽는 것이 위험 천만한 일이 되었으므로, 자유를 잃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은 예외였습니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4년 전인 1956년 4월 16일자 「뉴스위크」지에서는 동독의 한 젊은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성서를 읽는 사람은 여호와의 증인 외에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증인들은, 성서 연구 집회를 열고 성서의 소식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교도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렇지만 아래의 네모 안의 내용이 알려 주는 바와 같이, 증인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성서에 근거한 희망에 주의를 집중하였습니다.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기 시작하자, 그곳에 있는 증인들은 성서의 교훈을 다루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곱 개의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모두 합해서 7만 4252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년 후인 1993년에는 구소련의 15개 공화국 * 가운데 4개국에서 개최된 여덟 개의 대회에 11만 232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러한 참석자들 중에는 소련의 교도소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이 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느님을 숭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데 대해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1993년 이래, 구소련의 공화국들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해마다 자국에서 그리스도인 모임들을 개최하여 자유롭게 함께 모일 수 있는 특권에 대해 깊은 인식을 나타내 왔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는 총 28만 2333명의 여호와의 증인과 그들의 벗들이 구소련의 공화국들에서 열린 80개나 되는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 지역 대회에서 기쁜 마음으로 함께 모여 숭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모두 합해서 1만 3452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뜻밖이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작년에는 러시아어 대회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개최되었습니다. 구소련 지역 외의 나라들에서 열린 그러한 네 개의 대회에는 총 6336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러한 대회는 어느 곳에서 개최되었습니까? 그리고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서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영적 필요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

러시아는 유구한 종교의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있는 수백 년 전에 지어진 화려한 대성당들은 그리스도교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정교회 역시 사람들이 성서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최근에 발행된 「러시아의 불행—역사의 짐」(The Russian TragedyThe Burden of History)이라는 책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성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러시아의 종교학자인 세르게이 이바넨코는 그로 인해 초래된 결과를 이렇게 알려 줍니다. “정교회 신자들은 성서 지식이 없기 때문에, 결국 정교회 교구민 상당수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더 쉽게 미신과 신비주의와 주술의 영향을 받고 있다.”

러시아의 문호인 톨스토이 역시 그와 비슷한 점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러시아 정]교회의 교리들이, 이론상으로는 교활하고 해로운 속임수인데다 실질적으로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미신과 마술들을 모아 놓은 것이어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온전한 의미를 완전히 가려 버리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은 소련 공산당이 무신론을 조장하는 선전을 하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구호를 내세우며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 역할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공산주의 자체도 하나의 종교가 되어, 종종 붉은 종교로 일컬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붉은 종교는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꼈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의 권유로 많은 러시아 사람들이 성서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훌륭한 교육 제도 덕분에 러시아 사람들은 전세계에서 문자 해득률이 가장 높은 국민 가운데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러시아 사람들은 성서를 읽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구소련 지역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 독일, 미국과 같은 나라로 이주하였는데, 특히 1990년대에 많이 이주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결과가 있었습니까?

독일에서 누리는 숭배의 자유

18세기와 19세기에 많은 독일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예로 15세 된 소피가 있는데, 소피는 1762년에 남편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후에 예카테리나 여제로 알려지게 된 소피는 자기의 오랜 통치 기간에 독일 농부들을 불러 러시아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독일계 사람들 대다수가 시베리아 지방이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같은 소련의 공화국들로 추방되었습니다. 근년에 들어서는,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많은 독일인들을 비롯하여 구소련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경제 여건이 더 나은 곳에서 살기 위해 독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92년 12월에는 독일 최초로 러시아어 회중이 베를린에 형성되었습니다. 작년에는 독일에 있는 52개의 회중과 43개의 작은 집단들이 세 개의 러시아어 순회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7월 30일에서 8월 1일까지 쾰른에서 열린 “하느님의 예언의 말씀” 러시아어 지역 대회에는 최고 참석자수가 4920명에 달하였으며, 164명이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앞서 4월 1일에는 예수의 죽음의 기념식을 거행하기 위해 독일 내의 러시아어 회중들에 6175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미국에 있는 러시아 사람들

미국에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구소련 출신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이렇게 보도하였습니다. “1991년에서 1996년 사이에 브루클린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늘어난 이민자 집단은 러시아 사람들이었다. 같은 기간에 미국 이민 귀화국에서는, 구소련 지역에서 온 33만 9000명이 넘는 이민자의 입국을 허락하였다.”

나중에 1999년 1월의 「뉴욕 타임스」지 보도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구소련으로부터 뉴욕 시와 그 주변 지역으로 이주한 유대인이 약 40만 명이나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근년에 들어서는 미국의 다른 지역에도 러시아 사람들이 수천 명씩 정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북부에는 약 3만 5000명의 새로운 러시아 이민자가 들어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구소련 출신 이민자 거주지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이 사람들은 성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에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 수백 명이 참 하느님 여호와를 섬기는 숭배자가 되었습니다.

1994년 4월 1일에는, 근래에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뉴욕 브루클린에 여호와의 증인의 러시아어 회중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후로 펜실베이니아, 캘리포니아, 워싱턴 주에도 러시아어 회중이 설립되었습니다. 또한 미국의 다른 여러 지역에는 성서 연구 집단들이 조직되었습니다.

미국 최초의 대회

지난해 8월 20일에서 22일에 미국과 캐나다 전역에서 온 최고 670명이나 되는 참석자들은 뉴욕 시에서 열린 최초의 러시아어 지역 대회에 참석하는 감격을 맛보았습니다. 모든 연설은 러시아어로 제공되었으며,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러시아어 회중 성원들이 야곱과 에서에 관한 성서 기록을 다룬 드라마를 고대 의상을 입고 제공하였습니다. 그 드라마는 참으로 이 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었습니다.

이 대회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 또 한 가지 일은 14명이 침례를 받은 것으로서, 침례받은 모든 사람의 모습이 위에 실린 사진에 나와 있습니다. 몇몇 사람은 뉴욕 시에서 열린 그 대회에서 침례를 받기 위해 오리건 주 포틀랜드나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로부터 약 400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왔습니다. 이 열네 사람은 이전에 구소련 공화국들인 러시아, 몰도바, 벨로루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의 경험담을 들어 보면, 그들이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그분을 숭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스베틀라나(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모스크바에서 자랐습니다. 17세 때 자기보다 나이가 여러 살 많은 유명한 가수와 결혼을 하였으며, 1989년에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여기저기 먼 곳까지 여행을 다녔으며, 5년 후에 두 사람은 이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스베틀라나는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어떤 증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친구들은 스베틀라나에게 “이단 분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그 이단 분파는 스베틀라나의 “인생을 조종하고 전재산을 빼앗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스베틀라나는 성서에서 가르치는 바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증인들이 성서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보여 주었을 때에 관해 스베틀라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유일하게 증인들만이 하느님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안드레이(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는 청소년 시절에, 운동 선수로서 수준 높은 훈련을 받기 위해 시베리아에 있는 집을 떠나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습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소련이 해체되었으며, 안드레이는 스물두 살 때인 1993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하느님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했고 러시아 정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절 축하 행사 기간에, 하느님을 좀더 가까이 느끼고 싶은 마음에 교회에서 밤을 꼬박 새운 적도 있었습니다.”

그 무렵에 스베틀라나가 안드레이를 만나서 자기가 성서 연구를 통해 배우고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 주게 되었습니다. 안드레이는 스베틀라나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가는 데 동의하였으며, 나중에는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1999년 1월에 두 사람은 결혼하였습니다. 이들은 이 대회에서 침례를 받고는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였습니다.

파빌(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은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디 근처에서 태어났지만, 나중에 러시아의 날치크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대도시는 숱한 전투가 벌어진 체첸(체치냐)과 다게스탄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파빌은 1996년 8월에 그곳에서 증인들을 처음으로 만났지만 바로 그 다음달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습니다. 파빌은 마약에 빠져 있었으며 딸도 하나 있었지만, 그 아이의 엄마와 함께 러시아에 남겨 두고 떠났습니다.

파빌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게 되었으며,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활을 바로잡았으며, 딸아이의 엄마에게 자기가 새로 발견한 신앙에 대해 편지로 알려 주었습니다. 딸아이의 엄마 역시 현재 증인들과 함께 성서 연구를 하고 있으며, 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와서 파빌과 결혼하고 캘리포니아에서 함께 여호와를 섬길 계획입니다.

게오르게(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는 모스크바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는 1996년에 미국으로 왔으며, 그 이듬해에 아제르바이잔 출신인 플로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게오르게는 러시아 정교회에 나갔지만, 「파수대」지를 읽고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워치 타워 협회에 편지를 보냈으며, 「삼위일체를 믿어야 하는가?」 팜플렛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8년에 게오르게와 플로라는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제는 플로라 역시 침례를 받을 계획입니다.

이 대회에서 또 한 가지 두드러졌던 점은 모스크바로부터 온 축전이었는데, 모스크바에서는 같은 주말에 1만 5108명이 대회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뉴욕 시 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스크바에서 600명이 침례를 받았다는 발표를 듣고는 참으로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 그 주간에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그 대회에 관한 불길한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발표는 더더욱 감동을 주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

1999년 7월 21일에 증인들은 모스크바의 도심지 근처에 있는 올림픽 경기장을 사용하기로 계약하였는데, 그 경기장은 러시아 정교회에 속한 큰 교회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회가 시작되기 1주일 전에 반대의 조짐이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경기장 임대료를 이미 지불하였는데도, 경기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는 8월 18일 수요일까지도 여전히 나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28면의 네모 안에 나오는 내용과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증인은 러시아에서 법적으로 인가를 받은 종교 단체라는 사실을 관리들에게 강조하였습니다.

금요일 아침 회기에 참석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1만 5000명가량이나 되었으므로 증인측 대표들은 초조해졌습니다. 대회에 참석하려고 멀리 떨어진 도시와 마을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경기장 관리측은 몇 시간 동안 토의를 한 후 마침내 8월 19일 목요일 저녁 8시경, 증인측 대표들에게 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고 기쁘게 통보하였습니다. 시 행정 당국에서 대회를 개최하는 데 이의가 없다고 알려 온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경기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느라 증인 자원 봉사자들은 밤을 새워 일하였습니다. 첫째 날 오전 회기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그 대회를 개최하는 데 대한 반대가 있다는 소식을 알고 있던 보도 기관의 취재진도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소리 높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이 차질 없이 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정말 기쁘군요.”

질서 있는 행실의 본

경기장 관리측은 안전을 위한 조처를 취해 놓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공항에서 탑승객들을 검사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금속 탐지 장치를 갖춘 경비원들이 모든 입구에 배치되었습니다. 또한 경찰들도 경기장 내부 곳곳에 배치되었습니다. 대회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위협이 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회기 중, 경기장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내용의 전화가 걸려 온 것입니다. 그러한 전화가 걸려 온 것은, 그 날 프로그램 중 끝에서 두 번째 연설이 끝나기 바로 전이었습니다. 경기장 관리측의 요청에 따라, 경기장에서 즉시 대피할 것을 알리는 간단한 광고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주 질서 정연하게 대피하였으며 경기장 직원들과 경찰은 이에 대해 탄복하였습니다. 그처럼 질서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혹시 미리 연습을 해 본 것은 아닌지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폭탄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튿날 프로그램에서는 토요일 회기 때 제공하지 못했던 것까지 함께 다루었습니다. 경기장 관리측은 그 대회에 대해 매우 흡족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와 그 밖의 지역에서

8월의 마지막 주말과 9월의 첫 번째 주말에는 그리스에서도 러시아어 지역 대회가 열렸습니다. 첫 대회는 아테네에서, 다음 대회는 테살로니카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총 참석자 수는 746명이었으며 34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그리스에는 구소련의 남부에 있는 공화국들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이루어진 8개의 러시아어 회중과 17개의 작은 집단이 있습니다. 이러한 회중들과 집단들에서는 러시아어를 비롯하여 이민자들이 사용하는 여러가지 언어로 집회를 열고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침례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빅토르가 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1998년 8월에 아테네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대회에서 그의 아내가 침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참석자들이 나타낸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고르라는 남자는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을 받아서 읽고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성상(聖像)들을 내다 버렸습니다. 또한 자기를 소개할 때도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테네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 편지하여 1998년 11월에 증인들의 방문을 받은 그는 곧바로 회중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하였으며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집회에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침례를 받은 이고르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가 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여기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은 세계 전역의 다른 나라들로도 이주하였습니다. 많은 경우, 그러한 사람들 역시 성서를 연구하고 공개적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을 숭배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기쁨을 주는 참으로 소중한 특권입니다!

[각주]

^ 5항 지금은 독립 국가들이 된 15개 공화국은 그루지야,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몰도바, 벨로루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에스토니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이다.

[22면 네모]

성서를 사랑하는 러시아 사람들

러시아의 명망 있는 종교학자인 세르게이 이바넨코 교수는 여호와의 증인을 가리켜 성서 연구에 진정으로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는 최근에 러시아어로 발행된 자신의 저서 「성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O lyudyakh, nikogda nye rasstayushchikhsya s bibliey)에서,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의 초기 역사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자기들의 신앙에 충실히 고착한다는 이유로 투옥되었을 때에도 성서를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냈다.” 그 점을 뒷받침하는 예로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경험담을 언급하였다.

“재소자들은 성서를 가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검문 검색 중에 성서가 발견되면 압수되었다. 북부 지방에 있는 한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던 한 여호와의 증인은, 매우 높은 전압의 전기가 흐르는 변압기 안에 성서를 숨겨 두었다. 그는 특정한 전선 가닥 하나하나에다 성서를 한 부분씩 끈으로 묶어 놓았는데, 치명적인 전기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성서의 특정 부분을—이를테면, 마태의 복음서를—꺼내려면 어떤 끈을 당겨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뿐이었다. 물론, 간수들이 아무리 철저하게 살펴도 검문 검색은 소용이 없었으며, 이 독특한 성서는 전혀 발각되지 않았다.”

[28면 네모]

러시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법적으로 다시 등록되다

러시아에서 여호와의 증인은 100여 년 동안이나 하느님의 왕국에 관해 활동적으로 선포해 왔다. 하지만 정부의 제한 조처 때문에 증인들은 1991년 3월 27일에야 처음으로 법적 인가를 받았다. 당시 증인들은 ‘소련 내 여호와의 증인 종교 단체 운영 본부’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1997년 9월 26일에 “양심과 종교 결사의 자유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이 제정되었다. 이 새로운 법은 세계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 법안이 통과된 것을, 러시아에서 소수 종교 단체들의 종교 활동을 규제하려는 시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증인은 갖은 어려움 끝에 1991년에 법적으로 등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새로 제정된 양심의 자유에 관한 법 때문에 다른 모든 종교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다시 법적으로 등록해야 하였다. 이로 인해 여러가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조처는 러시아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을 억압하는 정책을 다시 펴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러시아 연방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적 관용과 숭배의 자유가 보호를 받을 것인가?

마침내 대답이 왔다. 참으로 기쁘게도 증인들은, 1999년 4월 29일에 러시아 법무부로부터 “러시아 여호와의 증인 운영 본부” 등록 증서를 발부받음으로써 다시 한 번 법적 인가를 받았다!

[23면 삽화]

미국 최초의 러시아어 지역 대회

[24면 삽화]

뉴욕 대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러시아어 회중이 준비하여 제공한 성서 드라마

[25면 삽화]

구소련의 여섯 개 공화국 출신으로 뉴욕 대회에서 침례를 받은 14명의 모습

[26, 27면 삽화]

1만 5000여 명이 모인 모스크바 올림픽 경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