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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꿈이 실현되기까지

나의 꿈이 실현되기까지

나의 꿈이 실현되기까지

알레나 지트니코바의 체험담

나는 소련의 위성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랐는데, 우리 가족은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평화로운 세상을 보게 되기를 갈망하였습니다. 하지만 행복하고 연합된 사회를 만들려던 공산주의의 이상은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끝나 버렸습니다. 지금부터 나의 꿈이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실현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나는 1962년 9월 12일에 태어났습니다. 프라하에서 약 290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마을인 호르니 베네쇼프에서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열렬한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념을 믿었으며 그 이념에 따라 살았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두 오빠와 나 그리고 나와 쌍둥이인 자매도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노동과 착실한 생활을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공산주의야말로 가장 훌륭한 정부 형태라고 생각하였으며 공산주의를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집회에 자주 참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의 위선 때문에 종교를 경멸하였으므로, 우리는 하느님이 없다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 가르침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때가 되면 모든 사람이 집과 충분한 식품을 받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나은 사람들이 되어 평화롭게 살게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전망이었으며, 나는 자라면서 그 전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믿었으며, 나 역시도 공산주의를 지지해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어린 소녀 시절에 나는 파이오니아가 되려고 준비하였는데, 파이오니아란 인기 있는 공산주의 청소년 단체인 파이오니아 소년단의 단원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은 좋은 특성들을 발전시키고 애국심을 키우라는 강한 권고를 받았습니다. 나는 아홉 살 때 엄숙한 파이오니아 선서를 하였으며, 두르고 다니도록 빨간 스카프를 지급받았습니다. 또한 특별 행사 때는 파이오니아의 공식 제복을 입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나는 훌륭한 파이오니아가 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급우들이 저속한 말을 하면 그들을 나무라면서, 파이오니아 여단원들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이념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탐욕과 시기심으로 흐르는 인간의 성향을 저항하기는커녕, 공공 자산을 훔쳤습니다. 남들에게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라고 권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남에게서 훔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식구에게서 훔치는 것이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자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이처럼 위선이 많은 걸까? 공산주의의 훌륭한 이념을 지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이다지도 드문 이유는 뭘까? 노력을 하는데도 이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재검토의 시기

십대 중반이었을 때 나는 여름 방학 중 얼마 동안을 같은 반 친구인 알레나와 함께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른이지만 알레나의 벗이었던 타냐가 우리를 보러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에게 꼭 해 줄 말이 있는데, 정말 중요한 것에 관한 거야. 나 말이야,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어.” 우리는 타냐가 그러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놀라움이 가시고 나자, 우리는 “무슨 증거가 있죠?” “하느님은 어떤 모양으로 생겼죠?” “하느님은 어디에 사나요?” “하느님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죠?” 등 많은 질문을 타냐에게 퍼부었습니다.

타냐는 우리의 질문에 한 가지씩 대답해 주었습니다. 타냐는 땅이 인류를 위한 낙원 같은 집이 되는 것이 하느님의 원래 목적이었다고 설명해 주었으며, 이러한 목적이 마침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도 알려 주었습니다. 타냐가 성서를 펴서 깨끗한 땅에서 서로를 아끼는 훌륭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보여 주었을 때, 나는 그 약속들이 내가 믿고 있는 약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에게 이 놀라운 일들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하느님의 왕국에 의해 실현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아버지가 좋아하지 않을 것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이었을 때, 이웃집 여자 아이가 우리 부모 모르게 나를 교회에 데리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제는 성서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습니다. 심지어는 종교 책자들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그에 대해 말하자, 부모는 내게 다시는 교회에 가지 말라고 엄하게 꾸짖었으며 내가 집에 가져온 모든 책자들을 없애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나를 매로 때렸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집에서는 하느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나 하느님을 믿으며, 종교는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하느님이라는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 때문에 사람들이 고안해 낸 것일 뿐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타냐와 같은 지적인 여성—사실 타냐는 학교 교사였음—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타냐의 말에는 틀림없이 뭔가 참된 것이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타냐의 말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타냐가 하는 말이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었습니다. “타냐, 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확신하게 만든 것이 뭐였어요?”

타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성서였지. 너희들이 한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성서에 들어 있단다. 성서를 좀 더 배워 보지 않겠니?”

내가 성서 연구를 시작하면 부모가 좋아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알아보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강했습니다. 그래서 타냐는 호르니 베네쇼프의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인 루드밀라의 주소를 내게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루드밀라와 함께 지상 낙원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들을 검토하면서, ‘이 약속들이 실현될 것이라는 어떤 보증이 있지?’ 하고 자문해 보곤 하였습니다.

루드밀라는 내가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이 배워야만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을 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연구를 통해 나는 땅과 땅에 있는 많은 복잡한 형태의 생명체들이 순전한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고도의 지성을 지닌 창조주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성서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참으로 논리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집마다 누군가에 의해서 지어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히브리 3:4.

나는 우리 가족도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말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내 개인 소지품 중에서, 내가 받아서 갖고 있던 오래되고 낡은 성서에서 떨어져 나온 책장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부모는 크게 근심하였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

내가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아버지의 의심이 사실임이 확인되자, 아버지는 나에게 먼 길을 같이 산책하자고 하였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아버지는 강경하게 이처럼 말하였습니다. “당장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정리해야 한다. 안 그러면 아빠는 마을의 읍장으로 계속 일을 할 수 없게 된단다. 네가 아빠의 경력을 망치게 되는 거지. 아빠는 읍장 자리를 내놓고 전에 일하던 공장으로 되돌아가야 할 거야. 너 때문에 가족 모두가 치욕을 당하게 될 게다.”

“하지만 아빠, 성서는 합리적인 책이에요. 삶에 대한 아주 훌륭한 조언들도 들어 있고요” 하고 나는 애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아빠는 여태껏 성서나 하느님 없이도 행복하게 잘 살아 왔단다. 아빠는 모든 일을 다 직접 해냈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단다. 그런데 네가 그처럼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믿다니 정말 뜻밖이로구나! 너도 진정한 삶을 살아가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보면 하느님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게다.”

아버지의 끈질긴 태도는 내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잠시 내 믿음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믿음에 강한 기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알고 지낸 것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아버지와 함께 지냈으며, 집에 있으면 언제나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좋은 의도로 말하는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성서 연구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열여덟 살 때 나는 학교를 마치고 직장에 다니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인 프라하로 갔습니다.

프라하에서의 생활

나는 은행에 취직하였으며, 아버지가 공산주의를 통해 실현되고 있다고 말한 진정한 삶에 대해 알게 되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고향 사람들만큼이나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도덕과 위선과 이기주의와 과음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호르니 베네쇼프에 있는 우리 집 근처에 사는 한 증인이 프라하를 방문하러 왔다가, 증인들이 나와 만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는 에바라는 여자와 프라하에서 다시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매번 연구가 끝날 때마다, 에바는 “다음 주에도 또 올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때때로 에바에게 그가 내 입장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지만, 에바는 결코 자신의 의견을 내게 강요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말해 주지 않겠어요.” 그런 다음 그는 내가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성서의 내용에 주의를 이끌었습니다. 한 가지 큰 걱정거리는 부모와의 관계였기 때문에, 부모와 왕래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에바는 탈출기 20:12을 펴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에는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지만 혹시 부모보다 앞자리에 두어야 할 분이 있을까요?”

내가 자신 있게 대답을 못했기 때문에, 에바는 성서를 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을 보여 주었습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진 사람은 내게 합당하지 않습니다.” (마태 10:37) 그리하여 나는 부모도 공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께서는 더 큰 애정을 받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에바는 항상 관련된 성서 원칙을 지적해 주려고 노력하였으며, 그런 다음 결정은 내가 내리도록 하곤 하였습니다.

관심사들의 충돌

1982년 9월에 나는 마침내 프라하에 있는 어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으며, 그 학교에서 농학을 공부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서, 대학 공부를 착실히 해 나가면서 동시에 성서 연구에도 원하는 만큼 주의를 기울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교수에게 학교를 그만둘까 생각 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교수는, “학생을 이해하고 도와줄 사람과 만나게 해 주겠어요”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그 대학교의 학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학장은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우리 학교 최우수생이 학교를 그만두려는 이유가 무엇이죠?”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일들을 할 시간이 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려는 이유를 그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두 시간 정도 그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그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내가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성서도 공부하고 마르크스도 공부하세요. 그러고 난 다음 선택을 하세요.” 그는 마치 성서 연구를 하라고 격려라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음모가 좌절되다

하지만 그 다음날로 학장과 그 면담을 주선한 교수는 멀리 내 고향 마을까지 가서 부모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부모에게 내가 금지되어 있는 위험한 분파와 접촉하고 있다고 경고하였으며 내가 학교를 그만두려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학장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약속하였습니다. “따님이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결정을 내리면, 우리가 손을 써서 따님이 프라하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게 하겠습니다. 그러면 따님은 두 분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분파와의 접촉도 끊어지겠지요.”

1983년 1월에 나는 정말로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역시 성서 연구를 하고 있던 한 친구가, 어느 나이 지긋한 부인의 집에 방을 얻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나는 학장이 부모를 만난 것이나 그가 아버지에게 한 약속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을 구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이유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집주인 아주머니도 그 이유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으며, 그래서 나에게 알리지 않고 그 대학교의 학장에게 찾아가 내가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학장은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조심하세요! 알레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위험한 분파에 속해 있어요. 그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어야 했지요. 알레나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 그 종교를 그만두어야 됩니다. 저는 손을 써서 알레나가 프라하에서는 절대로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할 겁니다!”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날 밤 집에 온 다음, 나를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알레나, 오늘 학생이 다니던 학교에 가 봤어요.” 나는 이제 그날 밤 안으로 짐을 싸서 그 아파트에서 나가야 되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학장이 한 일은 옳지 않아요. 당신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을 수 있으니까. 중요한 것은 행실이 어떠냐 하는 거지요. 직업을 구하도록 도와줄게요.” 그날 밤 나는 기도를 하면서, 여호와께 도움을 베풀어 주신 데 대해 감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나를 집에 데리고 가려고 프라하에 왔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버지의 논리도 나를 설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와 그분의 약속에 대한 내 믿음의 기초는 더 확고하게 다져져 있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나를 두고 돌아갔으며, 나는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아버지를 만난 일로 인해 심한 감정적 동요가 있긴 했지만, 그 경험으로 인해 여호와와는 더 가까워졌습니다. 나는 그분에게 속한 사람이 되어 그분을 섬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1983년 11월 19일에, 프라하에 있는 한 아파트의 욕조에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내가 내린 결정으로 축복을 받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금지된 증인들의 출판물을 생산하는 일을 돕는 데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에는 철저한 보안이 필요하였는데, 그 일을 하다가 적발된 몇몇 사람을 당국에서 이미 투옥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맡은 일은 타자기를 사용하여, 체코어로 번역된 「파수대」의 사본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본들은 성서 연구용으로 증인들에게 배부되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프라하의 한 아파트에 모여 서적을 만드는 일을 하는 집단에 합류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그 아파트의 한 방에서 가구를 거의 다 꺼낸 다음, 우리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인쇄된 서적 낱장들을 순서대로 모으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모은 낱장들은 나중에 풀로 붙이거나 바느질하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종종 나는 이 일을 전 시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공산주의 청소년 단체에 속한 파이오니아였을 때, 나는 어린이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청소년들과 함께 활동하며, 여러 명의 청소년들이 침례받은 여호와의 종이 되도록 도와 왔습니다. 가족 중에는 증인이 된 사람이 아직 없지만, 나는 성서에서 약속한 대로 많은 영적 아버지 어머니와 형제 자매를 갖게 되었습니다.—마가 10:29, 30.

1989년에 이 나라에서는 공산주의 정부가 민주주의 정부로 대치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법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성서 연구를 위해 공개적으로 모이고, 체포될 위험 없이 집집으로 다니며 전파하고, 해외로 여행하여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는 심문이나 체포나 협박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봉사하다

1990년에 나는 동료 그리스도인인 페트르와 결혼하였습니다. 1992년 4월에 우리 부부는 파이오니아가 되겠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는데, 증인들의 경우에 파이오니아란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1994년 6월에는 마침내 프라하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서 출판물을 생산하는 일을 더는 비밀리에 하지 않으며, 체코 공화국 전역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공개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부모에게 우리가 약 60명의 지부 가족 성원들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는 시설을 방문해서 구경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초대를 부모가 받아들였을 때, 남편과 나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의 집과 사무실을 꼼꼼히 살펴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말, 여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아버지로부터 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 그 어떤 말보다도 멋진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것을 누림

공산주의를 통해 더 좋은 세상을 실현할 것이라는 우리의 희망은 한낱 간절한 꿈에 불과하였습니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더할 나위 없이 진실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성공할 수 없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인간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예레미야 10:23.

종종 나는, 아버지가 “진정한 삶”이라고 부른 삶을 내가 누리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소망을 떠올리곤 합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공산주의가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서 연구를 통해, 성서가 “참된 생명”이라고 부르는 삶—하느님의 의로운 신세계에서 누리게 될 삶—이야말로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약속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디모데 첫째 6:19)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생활에서 성서의 가르침을 적용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은, 비록 죄와 인간 불완전성의 영향 아래 있기는 하지만, 놀라운 방식으로 평화롭게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연합을 깨뜨리려는 시도나 그들의 하느님 여호와에 대한 헌신적인 애정을 끊으려는 시도를 모두 성공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이 점이 내게 특히 인상 깊게 새겨졌던 때는, 우리 부부가 2001년 5월 19일에 우크라이나 리비프 인근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새로운 지부 시설의 봉헌식에 손님으로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을 때였습니다. 그 봉헌식에서 나는 이전에 공산주의 청소년 단체인 파이오니아 소년단의 단원이었던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들도 한때는 나처럼 공산주의가 모든 인류에게 참된 평화와 연합을 가져다 주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현재 아내와 함께 러시아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그리고리에프도 전에는 파이오니아 소년단의 단원이었습니다.

파이오니아 소년단의 여름 캠프장이 있던 자리에 여호와의 증인이 새로운 지부를 건축하였으니 아이러니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부 시설은 공간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35개국에서 온 839명만이 봉헌식 프로그램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오전에 리비프에 있는 한 축구 경기장에는 3만 881명이 모여 전날 제공된 프로그램을 요약한 내용을 들었습니다. * 그들 중에는 이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멀리서 여섯 시간 이상을 여행하여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참석자들은 새로운 지부 시설을 견학할 수 있는 마련에 대해 알게 되자, 스타디움에 올 때 타고 왔던 여러 대의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오후 중반쯤 되자, 지부에는 시설을 견학할 사람들을 태운 버스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이 지부 시설에서 손님으로 하룻밤을 묵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날 저녁까지 1만 6000명이 훨씬 넘는 사랑스런 동료 신자들이 견학을 마친 다음 버스에 타고 집으로 향했는데, 그들 중에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평화가 가득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줄 최고의 희망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크라이나에만도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믿게 된 점은,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이 정부야말로 모든 나라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형제 관계와 평화를 실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참된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각주]

^ 51항 같은 시간에 키예프에 있는 한 스타디움—약 5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도 4만 1143명이 모여 봉헌식 프로그램을 요약한 내용을 들었다. 도합 7만 2024명의 참석 수를 기록한 이 모임은 우크라이나의 여호와의 증인 역사상 가장 큰 모임이 되었다.

[12면 삽화]

열 살 때의 모습, 공산주의 단체인 파이오니아 소년단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16면 삽화]

남편 페트르와 함께

[16면 삽화]

우크라이나 지부 봉헌식에서 만난 블라디미르는 전에는 공산주의 파이오니아 소년단의 단원이었다

[16, 17면 삽화]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봉헌식 프로그램을 요약한 내용을 듣고 있는 모습

[17면 삽화]

1만 6000명이 넘는 사람이 지부 시설을 견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