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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언제나 상을 주신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언제나 상을 주신다

체험담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자들에게 언제나 상을 주신다

버넌 던컴

나는 저녁 늦게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여느 때처럼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아내인 아일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오늘 저녁 집회는 어땠어?”

아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새로운 임명을 알리는 편지가 낭독되었는데, 당신 이름도 들어 있었어요. 당신이 음향 기기를 돌보는 종으로 임명되었대요. 편지 끝 부분에는 ‘만일 이 새로 임명된 형제들 중에 누구라도 흡연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임명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리는 편지를 협회에 써 보내야 한다’는 말도 있었어요.” * 나는 말을 끌면서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말대로 해야겠군.”

나는 이를 악물고는, 옆에 있는 재떨이에 담배를 문질러 꺼버렸습니다. “내가 왜 그 임명을 맡도록 선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까지 임명을 거절해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거고.” 나는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이 결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내 삶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내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 있었던 몇 가지 일들에 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어릴 때의 가정 생활

나는 1914년 9월 21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모인 버넌과 라일라는 사랑이 많고 근면한 분들로 가족을 잘 부양했습니다. 내 밑으로는 남동생들인 요크, 올랜도, 더글러스 그리고 여동생들인 아일린과 코럴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어머니는 내 손에 바이올린을 쥐어 주고, 해리스 음악 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교통비와 수업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나는 토론토에 있는 왕립 음악 학교에서 음악 이론과 화성법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열두 살 때, 토론토 시내의 유명한 음악 회관인 매시 홀에서 열린 전 도시 경연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나는 입상을 했고 부상으로 악어 가죽으로 된 케이스에 들어 있는 멋진 바이올린을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나는 피아노와 더블 베이스를 연주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종종 우리는 그룹을 이루어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열리는 소규모 파티나 학생 단체의 무도회에서 연주했습니다. 내가 아일린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바로 그런 무도회 중 하나에서였습니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도시 여러 곳에서, 여러 관현악단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퍼디 마우리 관현악단에서 함께 연주하도록 초청을 받았습니다. 1943년까지 이 일은 보수도 좋고 안정된 직장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알게 되다

나의 부모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 처음으로 성서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토론토 시내에 있는 한 백화점에서 쇼윈도 장식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구내 식당에서 아버지는 당시 성경 연구생으로 불렸던 여호와의 증인인 다른 두 직원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듣고서,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들은 내용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습니다. 몇 년 뒤인 1927년에, 성경 연구생들은 토론토의 캐나다 전국 박람회장 내에 있는 대경기장에서 큰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온 25명의 참석자가 우리 집에서 묵었습니다. 우리 집은 박람회장 서쪽 입구에서 두 구획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성경 연구생 중 한 사람인 에이다 블렛소 자매가 어머니를 자주 방문하기 시작했으며, 최근 출판물도 남겨 두고 갔습니다. 어느 날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던컴 부인, 제가 한동안 출판물을 전해 드렸는데, 좀 읽어 보셨나요?” 여섯 자녀를 키우고 있긴 했지만, 바로 그때부터 어머니는 잡지를 읽기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결코 잡지를 읽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출판물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음악에도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일린과 나는 1935년 6월에 성공회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3세 때 연합 교회를 떠난 이후로 다른 종교와 관련을 맺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인 신고서에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적었습니다. 실제로는 아직 증인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부부는 나중에 언젠가는 자녀를 갖게 되기를 고대하면서 좋은 부모가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함께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일들로 인해 방해를 받았습니다. 얼마 후에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1935년 크리스마스 때, 우리는 포장된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 책의 제목은 「하나님의 거문고」였습니다. 아내는 “어머, 어머님이 이상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보내셨네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직장에 가고 나면, 아내는 그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읽은 내용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런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갖고 싶어했던 우리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937년 2월 1일에 우리 딸이 태어났지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 가족은 전파하는 일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만이 아직 「위안」(지금의 「깨어라!」)지의 예약을 맡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잡지 예약을 맡는 것이 그 달의 야외 봉사 목표였습니다. 나는 아직 협회 출판물을 읽어 본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요, 아버지, 제 이름으로 하나 신청해 주세요. 그러면 아버지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질 테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여름이 되어 우리 관현악단은 휴양지에서 연주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고, 「위안」지도 우편으로 배달되었습니다. 가을이 되어 관현악단은 다시 토론토로 돌아왔고, 그 잡지도 새 우편 주소로 계속 배달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잡지 중에 단 한 부도 포장조차 뜯어보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에, 나는 잔뜩 쌓여 있는 잡지 꾸러미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잡지들을 위해 돈을 냈으니까, 적어도 무슨 내용이 들어 있는지는 알아보기 위해 몇 개만이라도 읽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첫 번째로 펴 본 잡지의 내용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의 정치적 음모와 부패상을 폭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내가 읽은 내용을 동료 연주가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말하는 내용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나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잡지를 읽어 나갔습니다. 부지중에 여호와에 관해 증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 마련한 이 훌륭한 성서 출판물들을 읽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았습니다.—마태 24:45.

주 중에는 일 때문에 바빴지만, 나는 곧 아내와 함께 일요일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1938년 어느 일요일에, 우리가 집회에 도착하였을 때, 두 명의 연로한 자매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 중 한 자매가 “젊은 형제, 형제는 이미 여호와의 편에 서 있나요? 알겠지만, 아마겟돈이 바로 문턱에 와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만이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조직이야말로 그분의 조직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1938년 10월 15일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약 여섯 달 후에 아내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여호와께 헌신한 종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느님의 백성과 연합함으로 얼마나 많은 기쁨을 경험했는지 모릅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면 마치 집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기라도 하면, 나는 집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언제나 몹시 알고 싶어했습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바로 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은 여호와에 대한 나의 봉사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큰 변화의 시기

우리에게 있어 또 다른 중대한 조정이 1943년 5월 1일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1942년 9월에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린 ‘신세계 신권 대회’라는 큰 대회에 처음으로 참석하였습니다. 그 대회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끔찍한 세계 대전이 벌어지고 있던 와중에 열렸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당시 워치 타워 협회장인 노어 형제가 청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평화—그것은 지속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의 공개 강연을 담대하게 제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노어 형제가 계시록 17장을 통해, 전후에 평화 기간이 있게 될 것이며, 그 시기에 큰 전파 활동이 수행될 것임을 설명했던 것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어 형제가 앞서 했던 “입다와 그의 서원”이라는 연설에서 가장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더 많은 수의 파이오니아들을 구하는 부름이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서로 바라보다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바로 우리들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즉시 더 중요한 활동을 하기 위한 계획들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940년 7월 4일 이래 캐나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1943년 5월 1일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했을 때에도, 여호와에 관해 증거하고 야외 봉사에서 협회 출판물을 전하는 일은 여전히 불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봉사를 하면서, 우리는 개인용 제임스 왕역 성서만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우리가 첫 번째 파이오니아 임지인 온타리오 주 패리사운드에 도착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을 때, 지부 사무실에서는 우리와 함께 야외에서 일하도록 경험 많은 파이오니아인 스튜어트 맨 형제를 보내 주었습니다. 참으로 사랑에 넘치는 마련이었습니다! 맨 형제는 유쾌한 성격이라 잘 웃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협회에서 우리를 해밀턴 시로 재임명했을 때 우리는 여러 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군에 징집되었습니다. 군대에 가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는데도 말입니다. 군에 입대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나는 1943년 12월 31일에 체포되었습니다. 재판 절차를 거친 후에, 나는 수용소에서 대체 봉사를 하도록 선고받았으며, 1945년 8월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석방되자마자 아내와 나는 즉시 파이오니아 임명을 받고 온타리오 주 콘월로 갔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협회의 법률부로부터 즉결 재판소에서 일하라는 특별한 임명을 받고 퀘벡으로 떠나게 됐습니다. 그때는 바로 뒤플레시가 퀘벡을 다스리던 시기로,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박해가 특히 심했던 때였습니다. 나는 매주 여러 날씩 네 곳의 재판소에서 우리 형제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흥분되면서도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시기였습니다.

1946년에 있었던 클리블랜드 대회 후에, 아내와 나는 캐나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니면서 순회 및 지역 활동을 하도록 임명받았습니다. 참으로 짧은 기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1948년에 우리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11기 학급에 초대되었습니다. 앨버트 슈로더와 맥스웰 프렌드 형제가 강사로 일했으며, 우리 학급의 전체 학생 108명 중에는 기름부음받은 자 40명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여호와를 섬겨 온 그토록 많은 그분의 종들과 함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부요하게 해 주고 보람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어느 날, 브루클린으로부터 노어 형제가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강연 중에 그는 일본어를 배울 자원자 스물다섯 명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108명 모두가 자원했습니다! 이제 누가 일본어를 배우도록 선택될지는 협회장이 결정할 문제였습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그 선택을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결과가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입니다. 선택되어 그 후 일본에서 활동을 개척하는 특권을 받았던 그 스물다섯 명 중 많은 사람이 아직도 그들의 임지에서—매우 연로한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서—봉사하고 있습니다. 로이드 배리와 멜바 배리 부부처럼 일부는 다른 곳으로 임지가 바뀌기도 했습니다. 로이드 배리 형제는 작년에 사망할 때까지 통치체 성원으로 일했습니다. 우리는 그들 모두와 함께 여호와께서 상을 주신 것에 대해 크게 기뻐합니다.

졸업식 날이 되어, 우리는 자메이카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러나 퀘벡에서 있었던 미결 사건의 재판 일정 때문에 캐나다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많은 음악!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기 위해 음악을 뒤로 하기는 했지만, 음악이 나를 떠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듬해에 협회장 네이선 노어 형제와 그의 비서인 밀턴 헨첼 형제가 토론토에 있는 메이플 리프 가든 경기장을 방문했습니다. 노어 형제가 한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저물었다!”라는 제목의 공개 강연을 듣고 우리 모두는 마치 전기 충격을 받은 듯한 큰 자극을 받았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대회 관현악단을 지휘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왕국 봉사 노래책」(Kingdom Service Song Book, 1944)에 있는 유명한 노래 몇 곡을 왈츠풍으로 편곡했습니다. 형제들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토요일 오후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 우리는 일요일에 계획된 프로그램을 위해 예행 연습을 했습니다. 나는 헨첼 형제가 경기장 바닥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을 언뜻 보았습니다. 그래서 관현악단 연습을 중지하고 헨첼 형제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내게 “관현악단에 연주자가 몇 명이나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모두 나오면 35명쯤 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내년 여름 뉴욕에서는 인원이 두 배 정도 될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름이 오기 전에, 나는 브루클린으로 초대되었습니다. 사정상, 처음에는 아내가 함께 가지 못했습니다. 콜럼비아 하이츠 124번지의 신축 건물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원래의 건물에 숙소를 배정받았습니다. 작은 방에서 두 명의 기름부음받은 형제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그 두 형제는 연로한 페인 형제와 칼 클라인 형제였습니다. 나는 그들을 그때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복잡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랬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마음이 아주 잘 맞았습니다. 그 연로한 형제들은 오래 참음과 인내심을 나타냈습니다. 나는 단지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이룰 수 있는 일을 보여 주는 훌륭한 교훈이었습니다. 클라인 형제를 만나 함께 일하면서 나는 그러한 축복들을 받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친절하고 기꺼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잘 일할 수 있었으며 50년 이상 친밀한 벗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1950, 1953, 1955, 1958년 대회에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돕게 된 것은 내게 큰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1963년, 캘리포니아 주 패서디나의 로즈 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회에서, 앨 캐블런과 함께 관현악단과 관련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던 1953년 대회 중에는, 일요일 공개 강연을 하기 전에 음악 프로그램이 제공되었습니다. 에릭 프로스트가 소프라노 가수인 에디트 슈미오닉(훗날의 바이간트)을 소개했고, 그는 우리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춰 프로스트가 작곡한 “너희 증인들, 전진하여라!”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형제 자매들의 성량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교인 해리 아넛이 북로디지아(지금의 잠비아)에서 녹음한 훌륭한 테이프를 가지고 와서 들려주어 우리를 기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소리는 스타디움 전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1966년 노래책 녹음

분홍색 표지로 된 노래책 「마음의 음악에 맞추어 노래함」을 기억하십니까? 이 책의 준비 작업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노어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녹음을 하려고 하는데, 소규모로 관현악단을 조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바이올린 몇 개와 플루트 몇 개 정도로 말입니다. ‘나팔을 부는’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 베델 왕국회관을 스튜디오로 사용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국회관을 사용하자니 몇 가지 걱정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덧대지 않은 맨벽이나 타일이 깔린 바닥, 철제 접의자에서 소리가 울리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누가 이 거슬리는 음향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까? 누군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토미 미첼이 있잖아요! 그 형제는 ABC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첼 형제와 연락하였고, 그는 기꺼이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녹음하기로 한 첫 번째 토요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연주자들이 소개되었는데, 그 중 한 형제가 트롬본 케이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노어 형제가 했던 “‘나팔을 부는’ 사람은 원치 않습니다!”라는 말이 기억났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보니, 그 형제는 케이스에서 자기 트롬본을 꺼내서 활주관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고 연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톰 미첼이었습니다. 그가 처음 몇 소절을 연주하는 것을 들어 보니 선율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트롬본으로 마치 바이올린 같은 소리를 냈습니다! 나는 ‘이 형제는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노어 형제도 결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관현악단은 훌륭한 연주자들이자 사랑스러운 형제 자매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프리마돈나라도 되는 양 혼자서 우쭐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녹음하는 일이 힘들긴 했지만,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작업이 끝났을 때, 우리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함께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 강한 동료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특권을 즐겼으며, 여호와의 도움으로 작업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보람 있는 부가적인 특권들

참으로 여러 해 동안, 나는 전 시간 봉사를 즐겼습니다. 28년 동안 순회 및 지역 활동을 수행했으며, 그 일은 한결같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5년 동안 온타리오 주에 있는 노벌 대회 회관을 관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외국어 지역 대회나 매주 있는 순회 대회로 아내와 나는 매우 바빴습니다. 1979년과 1980년에는 건축가들과 엔지니어들이 핼턴힐스에 새로운 협회 지부를 세우는 일을 계획할 때에 그 대회 회관 시설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회 회관에서 일한 후에 우리는 브루클린의 음악 관련 분야에서 더 일하도록 임명받았으며, 1982년부터 1984년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1994년 6월 17일에 사망했습니다. 우리의 59번째 결혼 기념일이 지나고 7일 후였습니다. 우리는 51년간 헌신적인 파이오니아 봉사를 함께했습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돌이켜 보면, 성서가 얼마나 값진 지침이 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가끔 나는 아내의 개인용 성서를 사용하다가, 아내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들—아내가 표시해 놓은 성구 전체나 특정한 어구들이나 별개의 단어들—을 보면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성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한 구절은 시편 137편인데, 거기에는 여호와께 드리는 이러한 아름다운 기도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가 다시는 하프를 연주하지 못하리라! 내가 만일 너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일 너를 내 가장 큰 기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가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리라!” (시 137:5, 6, 오늘날의 영어 역본) 내가 음악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내 가장 큰 기쁨은 여호와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일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상으로 주셨습니다.

[각주]

^ 5항 「파수대」 1973년 9월 1일호에서는, 그때 이후로 어떤 사람이 침례를 받고 여호와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사전에 담배를 끊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28면 삽화]

아내 아일린과 함께, 1947년

[30면 삽화]

초창기의 녹음 작업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