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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유산을 받는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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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담

특별한 유산을 받는 축복

캐럴 앨런

나는 예쁜 새 책을 꼭 쥐고서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겁에 질린 나머지, 눈물이 얼굴로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여자 아이였던 내가 낯선 도시에서, 수만 명의 사람들 한가운데서 길을 잃고 만 것입니다!

거의 60년의 세월이 지난 최근에, 그 당시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된 것은, 얼마 전 남편 폴과 함께 뉴욕 주 패터슨에 있는 아름다운 워치타워 교육 센터에 가게 되면서였습니다. 남편은 그곳에서 열리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 학교의 제2기 학급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던 것입니다.

남편과 함께 볕이 잘 드는 로비를 둘러보다가, “대회들”이라는 설명문이 붙은 커다란 전시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전시물의 가운데쯤에 오래된 흑백 사진 하나가 있었는데, 내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책을 어린이들마다 매우 기뻐하며 흔들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나는 사진 설명을 얼른 읽어 보았습니다. “1941년—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대회, 오전 회기가 시작되었을 때, 1만 5000명의 어린이가—5세부터 18세까지—주경기장의 연단 바로 앞에 모였다. ·⁠·⁠· 러더퍼드 형제는 새로운 책 「어린이들」(Children)을 발표하였다.”

어린이들 모두 개인용으로 한 권씩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은 모두 자기 부모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나만 빼고 말입니다. 나는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 안내인이 친절하게도 나를 데리고 가더니 높다란 헌금함 위에 세워 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초조해하며 그 넓은 계단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갑자기, 내가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습니다! “봅 아저씨! 봅 아저씨!” 드디어 가족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봅 레이너 아저씨는,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던 나의 부모에게 나를 데려다 주었습니다.

나의 삶을 틀 잡아 준 초창기의 일들

그 전시물을 보게 되자 무수한 기억들—나의 삶을 틀 잡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 멋진 패터슨 시설에 올 수 있게 해 준 일들—이 되살아났습니다. 백여 년 전에 있었던 일들, 특히 나의 조부모와 부모가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 생각났습니다.

후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알려지게 된 성경 연구생 가운데 전 시간 봉사자 한 사람이 1894년 12월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스크랜턴의 집에 있던 나의 친할아버지 클레이턴 J. 우드워스를 방문하였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클레이턴이 갓 결혼했을 때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장인 찰스 테이즈 러셀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의 내용이 「파수대」(영문) 1895년 6월 15일호에 실렸습니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저희는 명목상의 교회에 10년가량 몸담아 온 젊은 부부입니다. 하지만 확신하건대, 이제 저희는 그 어둠에서 나와 가장 높으신 분의 성별된 자녀들에게 지금 밝아 오고 있는 새 날의 빛 속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 저희 부부는 서로 만나기 오래 전부터, 각자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주님의 뜻이라면, 외국의 밭에서 선교인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03년에, 나의 외증조부모인 서배스천 크레즈기와 캐서런 크레즈기가 워치 타워의 대표자 두 사람이 가져온 성서의 소식을 기쁜 마음으로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의 아름다운 포코노 산지에 자리 잡은, 그들이 살고 있던 큰 농장으로 그 두 사람이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딸들인 코라와 메리도 남편인 워싱턴 하우얼 그리고 에드먼드 하우얼과 함께 그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워치 타워의 대표자들이었던 칼 해멀리와 레이 랫클리프는 일주일 내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귀 기울여 듣고 배운 결과, 이내 여섯 명 가족 전원이 열심 있는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해, 1903년에, 코라 하우얼과 워싱턴 하우얼 사이에 캐서런이라는 이름을 가진 딸이 태어났습니다. 마침내 캐서런이 내 아버지인 클레이턴 J. 우드워스 2세와 결혼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흥미있습니다.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말 의미 있는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 클레이턴 J. 우드워스 1세가 지녔던 사랑에 찬 통찰력과 부모로서의 관심이 드러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에 찬 도움을 받다

아버지 클레이턴 2세는 1906년에 하우얼 농장에서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스크랜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초창기에, 할아버지 우드워스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던 하우얼가(家)와 잘 알고 지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문이 자자하던 그 집안의 융숭한 대접을 자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지역의 성경 연구생들로 구성된 회중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하우얼가의 세 아들들의 결혼식을 주례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의 복지를 염두에 두고, 그 결혼식 때마다 반드시 아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성경 연구생들의 봉사 활동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봉사를 위한 방문을 할 때 아버지가 차를 운전해서 모시고 가곤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자신은 활동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음악에 대한 관심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이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으며, 아버지는 전문 음악가로서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코라 하우얼과 워싱턴 하우얼 부부의 딸인 캐서런 역시 피아노를 연주하고 가르치기도 하는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문 음악가로서의 삶이 그의 앞에 막 펼쳐지려고 하던 때에, 캐서런은 그것을 추구하는 일을 제쳐 두고 전 시간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반려자로 그보다 나은 신붓감을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침례를 받고 나서 6개월 뒤인 1931년 6월에 어머니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아버지가 1946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를 위해 대규모 대회 관현악단의 핵심 단원들을 훈련시키도록 요청받게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였습니다. 그때 이후로 여러 해에 걸쳐, 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의 많은 대회들에서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겪은 시련과 수감 생활

패터슨 로비에서, 남편과 나는 바로 다음 페이지에 실려 있는 사진이 전시된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사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는데, 50년도 훨씬 전에 할아버지가 내게 보내 주었던 것과 같은 사진이었기 때문입니다.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로 광적인 애국심이 만연해 있던 시기에, 워치 타워 협회장인 조셉 F. 러더퍼드(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를 비롯하여 이 여덟 명의 성경 연구생이 부당하게 투옥되었으며, 보석도 허용되지 않은 채 감금되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혐의 내용은 「종말을 고한 비밀」(The Finished Mystery)이라는 제목이 붙은 「성경 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 제7권에서 기술된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을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 해에 걸쳐, 찰스 테이즈 러셀은 「성경 연구」 처음 여섯 권을 집필하였는데, 제7권은 저술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또 한 명의 성경 연구생이 러셀의 노트를 받았으며, 그 두 사람이 제7권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17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재판에서, 할아버지와 나머지 성경 연구생들 대부분은 각기 20년씩 네 가지 형기를 동시에 복역하는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패터슨 로비에 있는 그 사진에 대한 설명은 이러합니다. “러더퍼드와 그의 동료들이 형을 선고받은 지 9개월 후인—그리고 전쟁이 끝난 때인—1919년 3월 21일에 항소 법원은 여덟 명의 피고 전원에 대한 보석을 명령하였고, 그들은 3월 26일에 브루클린에서 각각 1만 달러의 보석금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1920년 5월 5일, J. F. 러더퍼드와 나머지 사람들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 여덟 명은 형을 선고받고 나서 바로 조지아 주 애틀랜타 연방 교도소로 이송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뉴욕 브루클린의 레이먼드 가에 있는 감옥에 수감된 채 처음 며칠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곳에 있으면서 가로세로가 1.8미터 2.4미터 되는 감방의 “이루 말할 수 없이 불결하고 지저분한 상태”에 있게 된 상황을 묘사하는 글을 썼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신문 더미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것들을 하찮게 생각하려 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청결함과 자중심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그 신문지들과 비누와 수건 한 장에 달려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할아버지의 유머감은 여전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감옥을 가리켜 “오텔 드 레이몽디”(“레이먼드 호텔”)라고 부르면서, “투숙 기간이 끝나면 바로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의 마당을 거닐던 이야기도 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잠깐 동안 서서 머리를 빗으려고 하는데, 그때 소매치기가 할아버지의 회중시계를 낚아챘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글에 의하면, “시계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1958년에 브루클린 베델을 방문하였을 때, 당시 워치 타워 협회의 총무 겸 재무였던 그랜트 수터가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부르더니 바로 그 시계를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미친 영향

1918년에 할아버지가 부당하게 투옥되었을 때, 아버지는 겨우 열두 살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살던 집을 닫아 두고는 아버지를 데리고 할머니의 어머니와 세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서 함께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결혼 전의 성은 아서였는데, 할머니네 가족은 미국의 제21대 대통령인 체스터 앨런 아서가 친척이라는 것을 가문의 자랑거리로 여겼습니다.

할아버지 우드워스가 미국에 대한 반국가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장기형을 선고받게 되자, 아서가(家)에서는 그로 인해 자신들의 가문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버지로서는 감정적으로 힘든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취급을 받았던 것이 아버지가 공개 봉사의 직무에 참여하는 일을 처음에 망설이게 만든 한 가지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석방되고 나서, 가족들과 함께 스크랜턴의 퀸시 가에 있는 회벽토를 바른 큰 집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어렸을 때지만, 나는 그 집에 대해—그리고 할머니의 예쁜 자기 그릇들에 대해—잘 알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 그릇들을 씻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할머니의 거룩한 접시라고 불렀습니다. 1943년에 할머니가 사망한 후로는, 어머니가 종종 손님 접대를 하면서 그 아름다운 접시들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왕국 봉사에서 바쁘게 일함

하루는 패터슨 교정에서 사진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러더퍼드 형제가 1919년 오하이오 주 시더포인트 대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대회에서 러더퍼드 형제는 모두에게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그 대회에서 새로 발표된 잡지인 「황금 시대」(The Golden Age)를 사용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잡지의 편집인으로 임명되었으며, 1940년대까지, 그러니까 사망 직전까지 그 잡지의 기사를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 잡지의 이름은 1937년에 「위안」(Consolation)으로 그리고 1946년에는 「깨어라!」(Awake!)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스크랜턴에 있는 집에서도 집필 일을 하고 240킬로미터쯤 떨어진 브루클린의 워치 타워 본부에서도 집필 일을 하였는데, 한 번에 한곳에서 2주일씩 보내면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기억에 의하면, 할아버지의 타자치는 소리가 새벽 5시까지도 끊이지 않았던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공개 전파 활동에 참여하는 책임 역시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사실, 할아버지는 성서 출판물을 넣을 수 있는 큰 안주머니가 달린 남자 조끼를 직접 디자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94세인 나의 외숙모, 네이오미 하우얼은 아직도 그것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할아버지는 여성용 책가방을 디자인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활발한 성서 토의를 하고 난 뒤에, 할아버지의 봉사 짝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C. J., 한 가지 실수를 하셨군요.”

할아버지는 “무슨 말이지요?” 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조끼를 살펴보니 양쪽 주머니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한테 「황금 시대」를 예약하라고 제안하는 걸 잊어버리셨어요.” 잡지 편집인이 자기가 편집하는 잡지를 제공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습니다.

자랄 때의 추억들

어렸을 적 내가 할아버지 무릎 위에 앉을 때면 할아버지가 내 작은 손을 잡고 “손가락 이야기”를 해 주던 기억이 납니다. “엄지손가락 토미”로 시작해서 다음은 “검지손가락 피터”로 이어지는, 각 손가락이 지닌 특별한 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할아버지는 손가락 전체를 조심스레 감싸면서 이러한 교훈을 해 주었습니다. “서로서로 도우면서 모두가 함께 일할 때 제일 잘할 수 있단다.”

나의 부모는 결혼한 뒤에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로 이사하였으며, 에드 후퍼·메리 후퍼 부부와 절친한 벗이 되었습니다. 그 집안 식구들은 20세기로 접어들 무렵부터 성경 연구생이었습니다. 내가 에드 아저씨, 메리 아줌마라고 부른 그 두 사람은 나의 부모와 뗄려야 뗄 수 없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후퍼 부부는 하나밖에 없던 어린 딸아이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1934년에 태어났을 때, 나는 그들의 특별한 “딸”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영적으로 풍요로운 환경 가운데서 자란 덕택에, 나는 만 여덟 살이 되기 전에 하느님께 헌신하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성서를 읽는 일은 내 어린 시절에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가져다 주실 신세계에서의 삶을 묘사한 이사야 11:6-9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성서 전체를 통독하려고 처음 노력을 기울였던 때는 1944년이었는데, 뉴욕 주 버펄로 대회에서 발표된 「미 표준역」 성서 특별판을 개인용으로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 여호와를 “구약”에서 무려 7000번 가까이 합당한 위치로 회복시킨 이 번역판을 읽게 되었을 때 참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주말은 언제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나의 부모와 후퍼 부부는 나를 데리고 시골 지역 증거 활동을 나섰습니다. 도시락을 준비해 가서 시냇가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어떤 사람의 농장으로 가서 야외 성서 강연을 하였는데, 그 강연을 듣도록 이웃 사람 모두를 초대하곤 하였습니다. 생활은 단순하였습니다. 우리는 가족끼리 함께하는 활동에서 기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가족들 가운데 많은 벗들이 여행하는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에드 후퍼 그리고 봅 레이너와 그의 두 아들이 있습니다. 리처드 레이너는 아내 린다와 함께 여전히 그 활동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름은 특히 더 즐거운 시기였습니다. 나는 하우얼 농장에서 사촌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1949년에 나의 사촌 그레이스는 맬컴 앨런과 결혼하였습니다. 내가 몇 년 뒤에 맬컴의 남동생과 결혼을 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사촌 동생인 매리온은 우루과이에서 선교인으로 일하였습니다. 그는 1966년에 하워드 힐본과 결혼하였습니다. 사촌들은 두 사람 다 남편과 함께 브루클린 본부에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할아버지와 나의 졸업

내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할아버지는 내게 편지 쓰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할아버지가 보내 준 편지들 가운데는 오래된 가족 사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진들 뒷면에는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타자로 친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와 다른 동료들이 부당하게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당시의 사진을 내가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51년 말에 할아버지는 암으로 성대를 잃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기민한 재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니고 다니던 메모장에 써야만 하였습니다. 나는 1952년 1월에 고등학교 중간 학기 졸업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나는 12월 초에, 내가 하게 될 졸업식 연설 원고를 할아버지에게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글에서 손볼 것 몇 가지를 표시한 다음, 마지막 장에 내 가슴에 너무나 와 닿는 이러한 두 마디를 써 넣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기쁘구나.” 할아버지는 1951년 12월 18일, 81세의 나이로 지상 행로를 마쳤습니다. * 나는 마지막 장에 그 두 마디가 쓰여져 있는, 빛 바랜 졸업식 연설 원고를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졸업을 하자마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전 시간 전파 활동을 가리켜 일컫는 파이오니아 봉사에 가담하였습니다. 1958년에는 뉴욕 시에서 개최된 대규모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123개국에서 온 최고 25만 3922명의 사람들이 양키 스타디움과 폴로 그라운드를 가득 메웠습니다. 그 대회에서, 하루는 “우드워스 밀스”라고 쓰여진 가슴표를 달고 있는 아프리카 대표자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의 30년 전에,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그의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나의 유산이 가져다 준 행복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어머니가 파이오니아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때부터 40년 뒤인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파이오니아를 계속하였습니다! 아버지도 가능할 때면 파이오니아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9개월 앞서 사망하였습니다. 우리와 함께 연구한 사람들은 평생의 소중한 벗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아들들 가운데는 브루클린 본부에서 봉사하게 된 사람들 그리고 파이오니아 활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1959년은 매우 특별한 해였습니다. 바로 그 해에 폴 앨런을 소개받았던 것입니다. 폴은 여호와의 증인의 선교인 훈련을 위한 학교인 길르앗 제7기 학급을 졸업하고, 그 해 1946년에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서로 만났을 때는, 우리 두 사람 다 폴의 다음 임지가, 내가 파이오니아를 하던 곳인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폴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그러했습니다. 1963년 7월에 우리는 하우얼 농장에서 에드 후퍼의 주례로, 양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 차를 가져 본 적이 없었습니다. 클리블랜드를 떠나 남편의 다음 임지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물이 내가 타던 1961년식 폴크스바겐 ‘딱정벌레’ 차 안에 다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다음 회중 방문을 위해 이동을 하는 월요일이 되면, 짐을 싣는 모습을 보려고 종종 벗들이 들르곤 하였습니다. 여행 가방, 서류 가방, 서류함, 타자기 등이 그 작은 자동차 안으로 사라져 들어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서커스 묘기와 같았습니다.

남편 폴과 나는 현재의 삶의 기복을 즐기기도 하고 혹은 인내하기도 하면서 셀 수 없이 멀고 긴 거리를 여행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만 공급하실 수 있는 힘으로 그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지나간 세월은 여호와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오랜 벗들과 새로운 벗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행복한 세월이었습니다. 남편이 훈련받는 덕택에 우리가 패터슨에서 보낸 두 달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생애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지상 조직을 가까이서 지켜봄으로, 내가 귀중한 영적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이러한 한 가지 확신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이 조직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의 조직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작으나마 이 조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각주]

^ 44항 「파수대」(영문) 1952년 2월 15일호 128면 참조.

[25면 삽화]

에드 후퍼와 함께, 「어린이들」 서적을 개인용으로 받았던 1941년의 세인트루이스 대회가 있기 바로 전

[26면 삽화]

할아버지, 1948년

[26면 삽화]

나의 부모(동그라미 안)가 결혼했을 때 하우얼 농장에서

[27면 삽화]

1918년에 부당하게 투옥되었던 여덟 명의 성경 연구생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할아버지)

[29면 삽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세상 소유물 전부가 우리 폴크스바겐 안에 다 들어갔다

[29면 삽화]

남편 폴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