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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체험담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헤르베르트 뮐러

히틀러의 군대가 네덜란드를 침략한 지 몇 개월 후에,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내 이름이 나치의 일급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고, 그리하여 나는 짐승처럼 쫓겨 다녔습니다.

한번은, 숨고 도망 다니는 일에 너무 지친 나머지, 나치 군대에 붙잡히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말을 아내에게 하였습니다. 그때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습니다. “모든 적들이 공격한다 해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 그 노래를 떠올리면서 나는 새 힘을 얻게 되었고, 독일에 있던 나의 부모에 대한 추억과 나의 벗들이 나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 주던 날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이제 그 추억들 중 얼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의 부모가 세워 놓은 본

내가 1913년에 독일의 코피츠라는 읍에서 태어났을 때, 나의 부모는 복음주의 교회의 신자였습니다. * 7년 뒤인 1920년에 아버지는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4월 6일, 아버지는 키르헨아우스트리츠베샤이니궁(교회 탈퇴 신고서)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읍의 등기 담당 공무원이 신고서를 작성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일주일 뒤에 다시 그 사무소를 찾아가서 탈퇴 신고서에 딸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 공무원은 문서를 다시 작성해 주었는데, 교회 탈퇴가 마르타 마르가레타 뮐러에게도 적용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당시는, 내 여동생 마르가레타가 태어난 지 1년 6개월 되었을 때였습니다. 여호와를 섬기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해에 나의 부모는 성경 연구생들에게 침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자녀들을 엄하게 키우긴 하였지만, 여호와에 대한 아버지의 충성스러운 태도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의 인도를 받아들이기가 비교적 쉬웠습니다. 또한 나의 부모는 충성심 때문에 마음을 움직여 조정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는 우리가 집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1925년의 어느 일요일, 부모는 우리에게 산책하러 나가자고 하였습니다. 약간의 다과를 준비해 가지고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정말이지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최근 대회에서 몇 가지 점을 배웠는데, 그 때문에 일요일 활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바로잡게 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경우에도, 아버지는 동일하게 기꺼이 조정하려는 태도를 나타냈습니다.

나의 부모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전파 활동을 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저녁에 우리는 「교직자들을 고발함」(Ecclesiastics Indicted) 전도지를 배부하기 위해 회중 식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드레스덴에서 3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레겐스부르크 시까지 여행하였습니다. 다음날, 우리는 그 도시 전체에 전도지를 배부하였고, 배부 활동을 마치고 나서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까지 거의 24시간을 보낸 셈이었습니다.

집을 떠나다

회중 내의 유겐트그루페(청소년 그룹)에서 나누었던 교제 역시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매주, 14세가 넘은 청소년들은 회중 내의 몇몇 연장자 형제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게임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였으며, 성서를 연구하고, 창조와 과학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32년에 그 그룹과 나누던 교제도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 해 4월, 아버지는 마그데부르크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사무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협회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알면서 파이오니아를 하기 원하는 사람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파이오니아를 하는 것이 부모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14세의 나이에 자전거와 재봉틀 그리고 타자기를 비롯한 사무 기기들을 수리하는 일을 시작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가족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가족에게는 나의 지원이 필요하였습니다. 더군다나, 나는 침례조차 받지 않았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침례와 관련된 점들을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려고 나와 함께 앉아서 몇 가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고서 내가 침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영적 진보를 했다는 확신이 서게 되었는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임명을 수행하는 일에 네 자신을 바치거라.” 나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일주일 뒤에 나는 마그데부르크로 오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청소년 그룹에 속해 있던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을 때, 친구들은 나를 떠나 보내면서 경쾌한 노래를 불러 주고 싶어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고른 노래에 그들은 깜짝 놀랐는데, 친구들의 생각엔 그 노래의 가사가 매우 심각한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몇몇 친구들이 자기들의 바이올린, 만돌린, 기타를 집어 들었고 모두가 이러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모든 적들이 공격한다 해도,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이 세상의 어떤 화가 닥친다 해도 떨지 않는 믿음을.” 그날, 나는 그러한 가사 내용이 장래에 나를 그토록 자주 강화시켜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격동기의 시작

마그데부르크의 형제들은 나의 운전 실력을 테스트해 본 뒤, 나와 또 다른 네 명의 파이오니아에게 차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벨기에 가까이에 있는 슈나이펠이라는 지역으로 향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래지 않아 우리가 운전하는 차가 정말로 꼭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우리가 오는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그리하여 사제들의 부추김을 받은 마을 주민들이 우리를 쫓아내기 위해 벼르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 차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곡괭이와 쇠스랑으로 공격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때가 많았습니다.

1933년 기념식이 있은 후에, 그 지역의 감독자인 파울 그로스만은 우리에게 독일에서 협회의 활동이 금지되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있지 않아서, 나는 지부 사무실의 요청을 받게 되었는데, 차를 가지고 마그데부르크로 와서, 거기에 있는 출판물을 실어, 마그데부르크에서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색스니 주(州)로 출판물을 운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마그데부르크에 도착했을 때는 협회 사무실이 이미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에 의해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한 형제에게 차를 맡겨 두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래 머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스위스의 협회 사무실에서는 나에게 네덜란드에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나는 한두 주 안에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에게 즉시 떠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였으며, 몇 시간 내로 집을 떠났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나를 탈주 혐의로 체포하기 위해 아버지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이 너무 늦었던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1933년 8월 15일,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헴스테데 읍에 있는 파이오니아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나는 네덜란드 말을 한 마디도 모르면서 전파하러 나갔습니다. 연설문이 실려 있는 증거 카드를 가지고 시작하였습니다. 가톨릭교인인 한 여자가 「화목」 책을 받았을 때는 정말 용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그날, 소책자도 27부나 전하였습니다. 첫날 봉사를 마치면서, 나는 다시 자유롭게 전파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그 당시, 파이오니아들에게 있어서 출판물을 전하였을 때 받게 되는 기부금 외에, 수입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게 생긴 돈은 식품을 비롯한 그 밖의 생활필수품을 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월말에 돈이 조금이라도 남게 되면, 파이오니아들의 개인 비용으로 나누어 썼습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거의 가진 것이 없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충분히 공급해 주셨고, 그 때문에 나는 1934년에 스위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충실한 반려자

그 대회에서 나는 열여덟 살의 에리카 핑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집에 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었습니다. 에리카는 내 여동생 마르가레타의 친구였으며, 진리에 대한 에리카의 확고한 태도가 늘 내게 깊은 인상을 주어 왔었습니다. 에리카가 1932년에 침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게슈타포에게 그가 “하일 히틀러!”라고 말하기를 거부했다고 신고하였습니다. 게슈타포는 에리카를 추궁하면서, 거부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다그쳤습니다. 에리카는 경찰서에서 경찰관에게 사도행전 17:3을 읽어 주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자로 임명하셨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너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또 있나?” 하고 경찰관은 다그쳤습니다. 에리카는 그 누구의 이름도 대지 않았습니다. 경찰관이 놓아주지 않겠다고 협박하자, 에리카는 이름을 대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에리카를 노려보며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여기서 꺼져 버려. 집에나 가란 말이야. 하일 히틀러!”

대회를 마친 뒤, 나는 네덜란드로 돌아왔지만 에리카는 스위스에 머물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두 사람은 서로의 우정이 자라 왔다고 느꼈습니다. 아직 스위스에 있을 때, 에리카는 고향에서 게슈타포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에리카는 스위스에 머무르면서 파이오니아를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몇 달 뒤에, 그는 협회로부터 스페인으로 가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마드리드에서 파이오니아를 하다가, 그 다음에는 빌바오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산세바스티안에서 파이오니아를 하였는데, 바로 그곳에서 에리카는 교직자가 선동한 박해로 인해 파이오니아 짝과 함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1935년에 그들은 스페인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에리카는 네덜란드로 오게 되었으며, 같은 해에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전운이 감도는 시기에

우리는 결혼한 후에 헴스테데에서 파이오니아를 하였으며, 나중에 로테르담 시로 이사하였습니다. 1937년에 그곳에서 아들 볼프강이 태어났습니다. 1년 뒤에 우리는 네덜란드 북부 그로닝겐 시로 이사하였는데, 독일 출신 파이오니아인 페르디난트 홀토르프와 헬가 홀토르프 부부와 그들의 딸과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았습니다. 1938년 7월에 협회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독일 국적의 증인들에게는 전파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경고해 왔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는 지구의 종(순회 감독자)으로 임명되었고 우리 가족은 리히트드라거(빛 비추는 자)호로 이사하였습니다. 이 협회 소유의 배는 네덜란드 북부에서 전파하는 일을 하는 파이오니아들의 활동 근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간, 나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는데, 계속 전파하는 일을 하도록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한 회중에서 다음 회중으로 옮겨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바로 그렇게 계속 전파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활동을 증가시킨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빔 케텔라라이가 좋은 본보기였습니다.

내가 빔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진리를 깨달은 청년이었지만 농장 일꾼이라서 매우 바빴습니다. 나는 빔에게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시간을 내고 싶다면, 다른 일거리를 찾아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빔은 그렇게 하였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빔에게 파이오니아를 하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지요” 하고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먹고 살게 될 겁니다. 여호와께서 돌보실 테니까요” 하고 그를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빔은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와중에도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였습니다. 빔은 현재는 80대의 나이지만 여전히 열심 있는 증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보셨음이 분명합니다.

금지령과 지명 수배

우리의 둘째 아이인 라이나가 태어난 지 1년쯤 지난 뒤인 1940년 5월, 네덜란드 군대는 항복하였고 나치가 네덜란드를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7월에는 게슈타포가 협회 사무실과 인쇄 공장을 압류하였습니다. 이듬해, 증인들을 체포하는 일이 전국을 휩쓸었고, 그리하여 나도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증인이자 징집 연령에 해당되는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게슈타포가 나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뻔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다시는 나의 가족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도리없이 받아들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다가 1941년 5월에 게슈타포는 나를 감옥에서 내보내면서, 가서 군 복무를 위해 출두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날로 나는 잠적하여 눈에 띄지 않게 활동하였으며, 같은 달에 순회 활동을 재개하였습니다. 게슈타포는 나를 일급 수배자 명단에 올려놓았습니다.

나의 가족이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

나의 아내와 자녀들은 네덜란드 동부의 포르덴이라는 마을로 이사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가족들이 겪을 수 있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집을 방문하는 횟수를 극히 제한해야만 하였습니다. (마태 10:16) 안전을 위해, 형제들은 나의 본명이 아니라 다이체 얀(독일의 요한)이라는 나의 가명만을 사용하였습니다. 나의 네 살배기 아들 볼프강마저도 “아빠”에 관해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였고 오로지 “오메 얀”(요한 아저씨)이라고만 하게 하였습니다. 그 아이에게 있어서, 그것은 감정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내가 도피해 다니는 동안, 아내 에리카는 자녀들을 보살폈고 계속 전파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라이나가 두 살이었을 때, 아내는 라이나를 자전거 짐칸에 태워서 시골 지역에서 전파하는 데 데리고 다녔습니다. 식량을 구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지만, 아내가 식구들과 함께 먹을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극심한 고생을 하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마태 6:33) 내가 한 번 재봉틀을 수리해 준 적이 있었던, 한 가톨릭교인인 농부가 아내에게 감자를 주었습니다. 그는 또한 나에게서 온 전갈을 아내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은, 아내가 약국에서 약품 하나를 사면서 1길더를 지불하였습니다. 약국 주인은 아내가 숨어 지내고 있으며 식량 배급 카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아내에게 약품과 함께 2길더를 주었습니다. 그러한 동정심의 표현 덕분에 아내는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히브리 13:5.

함께 일했던 용기 있는 형제들

한편, 나는 회중을 방문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나는 회중의 책임 있는 형제들만 만났습니다. 게슈타포가 계속 나를 뒤쫓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곳에서 절대로 몇 시간 이상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형제 자매들에게는 나를 만나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기들이 속해 있던 소규모 성서 연구 집단의 증인들과만 알고 지냈습니다. 그 때문에, 친자매 간이었던 어떤 두 사람은 같은 도시의 다른 구획에 살고 있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야 두 사람 다 전쟁 중에 증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협회 출판물을 숨겨 둘 만한 곳을 찾는 것도 내 임무였습니다. 우리는 필요할 경우에 대비해서, 「파수대」지를 만드는 데 쓸 종이와 등사 기계 그리고 타자기들도 숨겨 두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협회가 발행한 서적을 숨겨 두는 장소를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출판물이 꽉 찬 상자 30개를 옮기던 때가 기억나는데, 정말 조마조마한 일이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금지된 일이긴 하였지만 우리는 네덜란드 동부 농장에서 서부 도시들로 식량을 운송하기 위해 조직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차에 식량을 실어서 서부로 가곤 하였습니다. 강에 다다랐을 때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터라, 사용할 수 있는 다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방법을 달리하여, 우리는 짐을 풀어서 작은 배로 옮기고, 그 강을 왕복해서 오가며 식량을 나른 뒤, 다시 그 짐을 다른 마차에 실었습니다. 우리가 목적지인 도시에 도착하게 되면, 어둠이 깔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발굽에 양말을 신긴 뒤, 조용하게 회중의 비밀 식량 창고로 갔습니다. 그 창고에서 궁핍한 형제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독일군이 그러한 식량 창고를 발견하게 된다면, 누군가가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형제들이 도움이 되겠다며 자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아메르스포르트 시의 블루밍크 가족은 독일군 수비대가 자기 집 가까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도 자기들이 쓰는 거실을 식량 창고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용기 있는 증인들이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내와 내가 금지령의 세월 속에서도 충실함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1945년 5월에 독일군은 패배하였고, 나의 도피 생활도 결국 끝나게 되었습니다. 협회는 다른 형제들이 일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해서 내가 여행하는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1947년에 베르투스 판더베일이 내가 하던 일을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 그 즈음에, 셋째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는 네덜란드 동부에 정착하였습니다.

가슴 아팠던 일과 기뻤던 일

나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내가 집을 떠나 네덜란드로 가고 나서 약 1년 뒤에 아버지가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두 차례 석방되긴 하였지만, 매번 다시 투옥되었습니다. 1938년 2월에 아버지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다음에는 다하우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1942년 5월 14일에, 나의 아버지는 사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충성을 지켰습니다.

어머니도 다하우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어머니는 1945년에 풀려날 때까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의 부모가 세워 놓은 확고한 모범은 내가 영적인 축복들을 누리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1954년에 우리와 함께 살도록 어머니를 모셔 오는 것은 특권이었습니다. 여동생 마르가레타도—1945년 이래로 공산주의 국가가 된 동독에서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다가—함께 왔습니다.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고 네덜란드 말을 전혀 할 줄 몰랐지만, 1957년 10월에 충실하게 지상 행로를 마칠 때까지 야외 봉사에 계속 참여하였습니다.

1955년 독일의 뉘른베르크 대회는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한 후에, 드레스덴에서 온 형제들이 아내 에리카에게 에리카의 어머니도 그 대회에 참석해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당시 드레스덴은 동독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에리카는 21년간 자기 어머니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남이 주선되었고, 어머니와 딸은 부둥켜안았습니다. 너무나도 기쁜 재회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는 여덟 명의 자녀가 있게 되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차 사고로 아들 하나를 잃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자녀들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의 근원입니다. 아들 볼프강과 그의 아내가 순회 활동을 하며, 그들의 아들 역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나는 네덜란드에서 여호와의 일의 진전을 목격해 온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1933년에 이곳에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을 때, 약 100명의 증인이 있었습니다. 현재는 3만 명 이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육체의 힘은 쇠해 가고 있지만, 아내와 나는 지나간 날들에 불렀던 그 노래의 가사대로 살기로 여전히 결심하고 있습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는 믿음을 나타내리.”

[각주]

^ 5항 노래 194번—「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Songs of Praise to Jehovah, 1928).

^ 7항 지금은 피르나라고 부르는 코피츠 읍은 드레스덴 시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엘베 강을 끼고 있다.

^ 38항 「파수대」 1998년 1월 1일호에 실린 판더베일 형제의 체험담, “진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참조.

[23면 삽화]

야외 봉사를 마친 뒤 잠시 쉬고 있는 “유겐트그루페”

[24면 삽화]

동료 파이오니아들과 나는 슈나이펠 구역을 돌보았다. 당시 나는 20세였다

[25면 삽화]

아내와 아들 볼프강과 함께, 1940년

[26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손자 요나탄과 그의 아내 미럄, 아내 에리카, 나, 아들 볼프강과 그의 아내 율리아

[26면 삽화]

아버지와 함께 수감되었던 한 형제가 1941년에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