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일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일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사도 20:35.
1. 오늘날 무슨 잘못된 태도가 널리 퍼져 있으며, 그러한 태도가 해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1900년대의 마지막 몇십 년 동안 “자기중심주의”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중심주의”는 사실상 “내가 먼저”라는 식의 생각을 말하며, 탐욕스럽고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2000년에도 자기중심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라거나 “그래서 나에게 득이 되는 게 뭐죠?”라는 질문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습니까? 그러한 이기적인 태도는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태도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원칙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사도 20:35.
2. 주는 것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에게는 “생명의 근원”이 있습니다. (시 36:9) 그분은 우리가 행복하고 보람 있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십니다. 사실 그분은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의 근원이십니다. (야고보 1:17) “행복하신 하느님”이신 여호와께서는 끊임없이 주십니다. (디모데 첫째 1:11) 그분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들을 사랑하시며, 참으로 많은 것을 그들에게 주십니다. (요한 3:16) 또한 사람들의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라면 자녀를 기르기 위해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하고 얼마나 많이 주어야 하는지를 알 것입니다. 게다가 여러 해 동안 자녀는 부모가 치르는 희생에 대해 깨닫지 못합니다. 자녀는 그 모든 희생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그래도 부모는 자신이 비이기적으로 주어서 자녀가 잘되는 것을 보면 행복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3. 여호와와 동료 신자들을 섬기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 그와 비슷하게, 사랑에 근거하여 주는 것은 참 숭배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동료 신자들을 사랑하므로, 여호와와 동료 신자들을 섬기는 것 즉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마태 22:37-39) 이기적인 동기로 숭배하는 사람은 결국은 기쁨을 거의 누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받기를 바라는 것보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비이기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실제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숭배와 관련된 몇몇 성서 단어들이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와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러한 단어 세 가지를 검토할 것입니다.
예수의 공적 봉사
4. 그리스도교국의 “공적 봉사”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습니까?
4 그리스어 원어로, 숭배와 관련이 있는 한 가지 중요한 단어는 레이투르기아인데, 「신세계역」에서는 이 단어를 * 하지만 그리스도교국의 형식주의적인 전례들은 참으로 유익한 공적 봉사가 아닙니다.
“공적 봉사”로 번역합니다. 그리스도교국에서 사용하는 “전례”(典禮, liturgy)라는 단어는 레이투르기아에서 나온 말입니다.5, 6. (ㄱ)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공적 봉사가 행해졌으며,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ㄴ) 이스라엘에서 행해지던 공적 봉사는 훨씬 더 탁월한 어떤 봉사로 대치되었으며,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레이투르기아와 관련이 있는 그리스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자기 자리에 서서 공적 봉사를 행하며[레이투르기아의 변화형] 같은 희생을 자주 바칩니다.” (히브리 10:11)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가치 있는 공적 봉사를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쳤고 백성의 죄를 덮는 희생을 바쳤습니다. (역대 둘째 15:3; 말라기 2:7) 제사장들과 백성이 여호와의 율법을 따랐을 때, 그 나라에는 기뻐할 만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신명 16:15.
6 율법 아래서 공적 봉사를 행하는 것은 이스라엘 제사장들에게 참으로 큰 특권이었지만, 그들의 봉사는 이스라엘이 불충실 때문에 버림받게 되었을 때 그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태 21:43) 여호와께서는 훨씬 더 탁월한 봉사—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공적 봉사—를 마련하셨습니다. 예수에 관한 이러한 설명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영원히 계속 살아 계시므로 어떤 후계자 없이도 자기의 제사직을 유지하십니다. 따라서 그는 또한 자기를 통하여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시기 때문입니다.”—히브리 7:24, 25.
7. 예수께서 행하시는 공적 봉사가 비길 데 없는 유익을 가져다 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7 예수께서는 후계자 없이 영원히 계속 제사장으로 일하십니다. 따라서 오직 그분만이 사람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사람이 만든 성전이 아니라 숭배를 위한 여호와의 웅대한 마련인 성전의 실체에서 비길 데 없는 공적 봉사를 행하고 계신데, 그 성전 마련은 기원 29년부터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현재 그 성전의 지성소인 하늘에서 섬기고 계십니다. 그분은 “거룩한 곳과 참된 천막의 공복[레이투르고스]이십니다. 그 천막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것이며,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8:2; 9:11, 12) 예수는 매우 높은 지위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복”이십니다. 그분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자신의 높은 권위를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는 일은 그분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 기쁨은 ‘그분 앞에 놓여 있었던 기쁨’의 일부로서, 그분이 지상 행로 전체에 걸쳐 인내하도록 힘을 주었습니다.—히브리 12:2.
8. 예수께서는 어떻게 율법 계약을 대치하는 공적 봉사를 행하셨습니까?
8 예수께서 행하시는 공적 봉사에는 또 다른 부면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께서는 더욱 탁월한 공적 봉사의 직무를 얻으셨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가 되십니다. 그 계약은 더 나은 약속에 근거하여 법적으로 확립된 것입니다.” (히브리 8:6) 모세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었던 관계의 기초가 된 계약의 중개자로 일하였습니다. (탈출 19:4, 5) 예수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로 일하셨는데, 그 계약은 많은 나라에서 나온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나라 즉 “하느님의 이스라엘”의 탄생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6:16; 히브리 8:8, 13; 계시 5:9, 10) 실로 탁월한 공적 봉사였습니다! 우리는 공복이신 예수를 알게 된 것을 참으로 행복하게 여깁니다! 그분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숭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한 14:6.
그리스도인들도 공적 봉사를 행한다
9, 10.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공적 봉사 가운데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9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만큼 숭고한 공적 봉사를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의 상을 받을 때, 예수 곁에 있는 자신들의 자리에서 하늘의 왕 겸 제사장들로서 그분의 공적 봉사에 참여하게 됩니다. (계시 20:6; 22:1-5) 하지만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공적 봉사를 행하며, 그러한 봉사를 행하는 가운데 큰 기쁨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팔레스타인에 기근이 들었을 때, 유대에 사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유럽에 사는 형제들이 기부한 것들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일도 공적 봉사였습니다. (로마 15:27; 고린도 둘째 9:12)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행복한 마음으로 그와 같은 봉사를 행하여, 형제들이 고난이나 자연재해나 그 밖의 재난들을 겪을 때 신속하게 도움을 베풉니다.—잠언 14:21.
10 바울은 또 하나의 공적 봉사를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바친 희생과 공적 봉사 위에 내가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즐거워하며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합니다.” (빌립보 2:17) 빌립보 사람들을 위해 기울인 바울의 수고는 사랑과 부지런함으로 행한 공적 봉사였습니다. 오늘날에도, 특히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비슷한 공적 봉사를 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으로 섬기면서 적절한 때에 영적 양식을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마태 24:45-47) 더 나아가 그들은 하나의 그룹으로서 “거룩한 제사직”을 임명받아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영적인 희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고 “[그들]을 어둠에서 불러 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탁월성을 ··· 널리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첫째 2:5, 9) 그들은 바울처럼 그러한 특권들 가운데 기뻐하는데, 그러한 책임들을 수행하느라 자신들이 “음료 제물처럼 부어지”더라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인 “다른 양들”도 그들에게 가담하여 여호와와 그분의 목적에 대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 (요한 10:16; 마태 24:14) 참으로 중요하고 기쁨을 주는 공적 봉사입니다!—시 107:21, 22.
신성한 봉사를 드리라
11. 여예언자 안나는 어떻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됩니까?
11 우리의 숭배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그리스어 단어는 라트레이아인데, 「신세계역」에서는 “신성한 봉사”로 번역합니다. 신성한 봉사는 숭배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84세 된 과부이자 여예언자인 안나는 “빠지지 않고 성전에 나왔으며, 단식과 간구를 하며 밤낮으로 신성한 봉사를 드리고[라트레이아와 관련이 있는 그리스어 단어] 있었”던 것으로 묘사됩니다. (누가 2:36, 37) 안나는 한결같이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안나는 남녀노소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훌륭한 모범이 됩니다. 안나가 열렬히 여호와께 기도하고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그분을 숭배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에는 기도와 집회 참석이 포함됩니다.—로마 12:12; 히브리 10:24, 25.
12.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의 한 가지 주요 부면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공적 봉사이기도 합니까?
12 사도 바울은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의 한 가지 주요 부면을 언급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과 관련하여 나의 영으로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하느님께서 나의 증인이십니다. 나는 항상 기도 가운데서 여러분을 끊임없이 언급[합니다].” (로마 1:9)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것은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을 위해 행하는 공적 봉사일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께 드리는 숭배 행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듣는 귀를 발견하든 발견하지 못하든 간에, 전파 활동은 여호와께 드리는 신성한 봉사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늘의 아버지의 훌륭한 성품과 은혜로운 목적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분명히 우리는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시 71:23.
우리는 어디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가?
13.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안뜰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희망은 무엇이며, 누가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까?
13 바울은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을 받게 되어 있으니, 계속 과분한 친절을 가지고 있도록 합시다. 그것을 통하여 경건한 두려움과 외경심을 가지고 하느님께서 히브리 12:28) 기름부음받은 자들은 왕국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기대를 가지고 있으므로, 가장 높으신 분을 숭배하면서 믿음 안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만이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성소와 안뜰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릴 수 있으며, 지성소 곧 하늘에서 예수와 함께 섬기게 되기를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동료인 다른 양 반열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놀라운 희망 가운데 그들과 함께 기뻐하고 있습니다.—히브리 6:19, 20; 10:19-22.
받아들이실 만한 방식으로 신성한 봉사를 드립시다.” (14. 큰 무리는 예수의 공적 봉사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고 있습니까?
14 그러면 다른 양들의 경우는 어디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립니까? 사도 요한이 미리 보았듯이, 다른 양들의 큰 무리는 이 마지막 날에 등장하였으며, “‘어린 양’의 피에 자기들의 긴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계시 7:14) 이것은 그들이 기름부음받은 동료 숭배자들처럼, 예수의 공적 봉사 즉 그분이 인류를 위해 자신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바치셨다는 사실에 대해 믿음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양들 역시 “[여호와]의 계약을 붙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예수의 공적 봉사로부터 유익을 얻습니다. (이사야 56:6) 그렇다고 그들이 새 계약의 당사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새 계약과 관련된 법들에 순종하고 새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마련들에 협조함으로써 새 계약을 붙잡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스라엘과 연합해 있으며, 동일한 영적 식탁에서 양식을 먹고 하느님의 이스라엘 성원들과 함께 일하면서, 하느님을 공개적으로 찬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 희생을 바칩니다.—히브리 13:15.
15. 큰 무리는 어디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리며, 이 축복된 일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15 따라서 큰 무리는 “왕좌 앞과 ‘어린 양’ 앞에 흰 긴옷을 입고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하느님의 왕좌 앞에 있으며, 그분의 성전에서 주야로 그분에게 신성한 봉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계신 분은 그들 위에 자기의 천막을 펴실 것입니다.” (계시 7:9, 15) 이스라엘에서 개종자들은 솔로몬의 성전의 바깥뜰에서 숭배하였습니다. 그와 비슷하게 큰 무리 역시 여호와의 영적 성전의 바깥뜰에서 그분을 숭배합니다. 거기서 섬기는 일로 인해 그들은 기쁨을 누립니다. (시 122:1) 그들의 동료인 기름부음받은 자들의 마지막 성원이 하늘의 상속 재산을 받은 후에도,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계속 그분에게 신성한 봉사를 드릴 것입니다.—계시 21:3.
받아들여지지 않는 신성한 봉사
16. 신성한 봉사와 관련하여 경고가 되는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16 고대 이스라엘 시대에, 신성한 봉사는 여호와의 법과 일치하게 드려야 하였습니다. (탈출 30:9; 레위 10:1, 2)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가 여호와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것이 되려면 지켜야 할 요구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 여러분이 모든 지혜와 영적 이해력에 있어서 그분의 뜻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가득 차게 되도록 여러분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청해 왔습니다. 그것은 모든 선한 일에서 계속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증가시켜서, 그분을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여러분이 여호와께 합당하게 걷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골로새 1:9, 10) 하느님을 숭배하는 올바른 방식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정확한 성경 지식과 영적 이해력과 경건한 지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없으면, 심각한 재난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17. (ㄱ) 모세 시대에 신성한 봉사가 어떻게 곁길로 벗어났습니까? (ㄴ) 오늘날 신성한 봉사가 어떻게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갈 수 있습니까?
17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돌이키시고, 그들이 하늘의 군대에게 신성한 봉사를 드리게 넘겨 주셨습니다.” (사도 7:42)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행하신 강력한 일들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른 신들에게로 향하였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게 하려면 충성이 꼭 필요합니다. (시 18:25) 사실, 오늘날 여호와로부터 돌아서서 별이나 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들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재물”을 섬기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고, 바울은 탐심을 가리켜 우상 숭배라고 하였습니다. (마태 6:24; 골로새 3:5) 사탄은 스스로 자신을 신으로 높였습니다. (고린도 둘째 4:4) 그러한 형태의 우상 숭배가 널리 퍼져 있으며, 올무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따른다고 주장은 하지만 실제로는 부유해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람이나 사실상 자신이나 자신의 생각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은 실제로 누구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였지만 그분이 행하신 큰 행적들에 대한 영예를 더러운 우상들에게 돌렸던 이사야 시대의 유대인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이사야 48:1, 5.
18. 과거에 그리고 오늘날, 어떻게 신성한 봉사를 그릇되게 수행하는 일이 있어 왔습니까?
요한 16:2) 후에 사도 바울이 된 사울은, ‘스데반이 살해된 것을 좋게 여기고’ “주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살해할 기세로” 행하였을 때 틀림없이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8:1; 9:1) 오늘날 인종 청소와 종족 말살을 자행하는 일부 범죄자들 역시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숭배는 실제로는 국가주의나 부족주의나 부나 자기 자신이라는 신들을 비롯하여 다른 신들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18 예수께서는 또한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죽이는 사람들이 모두 자기들이 하느님께 신성한 봉사를 드린다고 생각할 시간이 옵니다.” (19. (ㄱ)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를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ㄴ) 어떤 종류의 신성한 봉사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까?
19 예수께서는 “너의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해야 하고, 오직 그분에게만 신성한 봉사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4:10) 이 말씀은 사탄에게 하신 것이었지만, 그분의 말씀에 유의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께 신성한 봉사를 드리는 것은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숭고한 특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숭배와 관련된 공적 봉사를 행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 사람들을 위해 공적 봉사를 행하는 것은 기쁨을 주는 일로서, 큰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시 41:1, 2; 59:16) 하지만 그러한 봉사는, 마음을 다해 올바른 방법으로 행할 경우에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하느님을 올바로 숭배하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여호와께서는 누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를 받아들이십니까? 우리의 숭배와 관련이 있는 세 번째 성서 단어를 살펴본다면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러한 점을 검토할 것입니다.
[각주]
^ 4항 그리스도교국에서 전례는 대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체성사와 같은 예배나 특정한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 10항 사도 행전 13:2에서는, 안티오크에 있던 예언자들과 가르치는 사람들이 여호와를 “공개적으로 섬기”고 있었다고 알려 준다. (이 표현은 레이투르기아와 관련이 있는 그리스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에서 언급하는 공개적으로 섬기는 일에는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예수께서는 어떤 중요한 공적 봉사를 행하셨습니까?
●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공적 봉사를 행합니까?
●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신성한 봉사란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신성한 봉사를 드립니까?
●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가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게 하려면 어떤 것들을 갖추어야 합니까?
[연구 질문]
[10면 삽화]
부모는 주는 일에서 큰 기쁨을 발견한다
[12, 13면 삽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좋은 소식을 선포함으로 공적 봉사를 행한다
[14면 삽화]
우리가 드리는 신성한 봉사가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실 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과 이해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