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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 팀이었다

우리는 한 팀이었다

체험담

우리는 한 팀이었다

멜바 배리

지난 1999년 7월 2일, 남편과 나는 57년간의 결혼 생활 중에 수천 번이나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의 한 대규모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남편 로이드 배리는 하와이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습니다. 남편을 살리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지만, 남편은 사망하였습니다. *

내 주변에 모여들어 그러한 비극적인 일에 대처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하와이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의 삶은 물론, 세계 전역의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한 후 거의 2년 동안,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낸 소중한 시간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외국 선교 임지에서 함께 여러 해를 보냈으며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도 함께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나는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과 남편과 내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결혼하기 위해서 직면해야 했던 도전들에 대해서도 회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우선, 내가 증인이 된 경위와, 지난 1939년에 남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내가 증인이 된 경위

나를 사랑하고 아껴 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은 제임스 존스와 헨리에타 존스입니다. 나는 겨우 열네 살이던 1932년에 학업을 마쳤습니다. 당시 세계는 대공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가족을 돕기 위해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내 밑으로 여동생이 두 명 더 있었던 것입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나는 어린 여직원들을 밑에 두고 일하는 보수가 좋은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편, 1935년에 어머니는 여호와의 증인으로부터 성서 출판물을 받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리를 찾았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포함하여 나머지 가족은 어머니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보게 되었고, 그 제목에 호기심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몰래 그 소책자를 읽어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나는 즉시 ‘모범 연구’라는 주 중에 열리는 집회에 어머니와 함께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모범 연구」(Model Study)라는 소책자에는 질문과 대답 그리고 그 대답을 지지하는 성구들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후에 그 소책자는 3호까지 발행되었습니다.

그 무렵인 1938년 4월에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온 대표자인 조셉 F. 러더퍼드가 시드니를 방문하였습니다. 러더퍼드 형제의 공개 강연은 내가 참석한 첫 번째 공개 강연 집회였습니다. 그 강연은 원래 시드니 시 공회당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지만, 반대자들은 우리가 그 장소를 사용하기로 계약한 것을 취소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연설은 훨씬 더 큰 장소인 시드니 스포츠 그라운드에서 행해졌습니다. 반대로 인해 홍보가 더 많이 되었기 때문에 약 1만 명이 참석하였는데,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에 증인이 1300명밖에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참석자 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처음으로—그리고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채—야외 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우리 집단이 전파 구역에 도착하자, 인도자는 내게 “저기 있는 저 집을 방문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그 집에서 한 부인이 현관에 나왔을 때, “미안합니다만, 지금이 몇 시인지 좀 알려 주시겠어요?” 하고 묻고 말았습니다. 그 부인은 안에 들어가서 시간을 확인한 다음, 다시 나와서 몇 시인지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그 방문은 끝났습니다. 나는 다시 차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으며, 얼마 후에는 사람들에게 왕국 소식을 전하는 일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태 24:14) 1939년 3월에, 나는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도로시 허칭스라는 사람이 사는 옆집 욕조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임명을 수행할 형제들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침례를 받은 후 얼마 있지 않아서 보통은 그리스도인 남자들에게 주어지는 회중적 책임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가정집에서 집회를 열었지만, 때로는 공개 강연을 위해서 강당을 빌리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 지부 사무실인 베델에서 일하는 잘생긴 한 젊은 형제가 우리의 작은 회중에 와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그가 우리 회중에 온 이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중에 나의 남편이 된 로이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로이드의 가족을 만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여호와를 전 시간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전 시간 전파 활동에 참여하고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신청하였을 때, 나는 베델에서 봉사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에, 나는 시드니 외곽의 스트래스필드에서 베델 가족 성원이 되었습니다.

1939년 12월에, 나는 대회에 가기 위해서 뉴질랜드로 여행하였습니다. 로이드 역시 뉴질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 대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게 되었으며, 서로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로이드는 웰링턴에서 열린 대회에서 그리고 나중에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여동생들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활동이 금지되다

1941년 1월 18일 토요일에, 연방 정부 관리들이 약 여섯 대의 검은 리무진에 나눠 타고 지부 사무실에 와서는 재산을 압류하였습니다. 나는 베델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작은 경비실에서 일하고 있었으므로, 그 관리들과 마주치게 된 첫 번째 베델 성원이었습니다. 약 18시간 전에 금지령이 내려질 것이라는 통지를 받았기 때문에, 서적과 서류 거의 전부가 지부에서 옮겨진 상태였습니다. 다음 주에, 로이드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베델 가족이 투옥되었습니다.

나는 수감된 형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영적 양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로이드를 격려하기 위해서, 그에게 “연애편지”를 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연애편지라면 으레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형식으로 편지의 서두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파수대」 기사들을 전부 베껴 쓴 다음, 마치 그의 연인인 것처럼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로이드는 4개월 반 만에 풀려났습니다.

결혼과 계속된 봉사

1940년에 로이드의 어머니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으며, 로이드는 어머니에게 우리가 결혼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로이드의 어머니는 로이드에게 사물의 제도의 종결이 매우 가까운 것 같아 보였으므로 결혼하지 말 것을 권하였습니다. (마태 24:3-14) 로이드는 친구들에게도 결혼 의사를 밝혔지만,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그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1942년 2월의 어느 날, 로이드는 조용히 나를 데리고—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4명의 증인들과 함께—등기소에 갔으며,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결혼식을 주재하는 마련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부부로서 베델 봉사를 계속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특별 파이오니아 활동에 참여할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와가와가라는 한 시골 마을에서 봉사하라는 임명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전파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었고 우리는 재정적 지원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무거운 짐을 여호와께 전적으로 내맡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시 55:22.

우리는 2인용 자전거를 타고 시골 지역으로 가서, 얼마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성서 연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게 주인은 우리가 하는 일을 매우 깊이 인식한 나머지, 매주 우리에게 과일과 야채를 공급해 주었습니다. 와가와가에서 6개월을 보낸 후에, 우리는 다시 베델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베델 가족은 1942년 5월에 스트래스필드에 있는 사무실에서 철수하여, 가정집들로 옮겨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베델 가족은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약 2주에 한 번씩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남편과 내가 8월에 베델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러한 여러 장소들 중 한 군데에서 다른 베델 가족과 합류하였습니다. 우리가 낮 시간 동안에 받은 임명은 기존의 지하 인쇄소 중 한 곳에서 일하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1943년 6월에 우리의 활동에 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습니다.

외국에서 수행할 봉사를 위한 준비

1947년 4월에 우리는 미국 뉴욕 주 사우스랜싱에 있던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도록 예비 신청서를 받았습니다. 그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회중들을 방문하면서 영적으로 강화시키는 일을 하라는 임명도 받았습니다. 몇 달 후에, 우리는 길르앗 제11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일을 정리하고 짐을 꾸리는 데 3주일의 여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1947년 12월에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 한 채 같은 학급에 초대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다른 15명과 함께 뉴욕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길르앗 학교에서 보낸 몇 달은 쏜살같이 지나갔으며, 우리가 받은 선교 임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에 가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남편은 다시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하도록 임명된 회중들은 로스앤젤레스 시로부터 멕시코 접경 지역까지 흩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매주 증인들이 사랑을 나타내어 한 회중에서 다음 회중까지 우리를 태워다 주었습니다. 이 광대한 순회구에 포함되어 있던 지역은 현재 3개의 영어 지역구와 3개의 스페인어 지역구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지역구에는 약 10개의 순회구가 있습니다!

어느새 1949년 10월이 되어, 우리는 군대 수송선을 개조한 배를 타고 일본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 배의 한쪽 끝에는 남자들만 타게 되어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여자와 어린이들만 타게 되어 있었습니다. 요코하마에 도착하기 만 하루 전에 태풍을 만났는데, 아마 그 때문에 구름이 깨끗이 걷혔던 것 같습니다. 그 덕분에 다음날인 10월 31일에 해가 떴을 때, 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웅장한 후지 산의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임명에 대한 참으로 멋진 환영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부두에 가까워지자, 머리카락 색이 까만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몹시 시끄러운 딸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정말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이군’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나막신을 신고 나무로 만든 선창 위를 걷는 통에 딸각거리는 소리가 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요코하마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기차를 타고 우리의 선교 임명지인 고베로 갔습니다. 고베에는 몇 달 먼저 일본에 도착한 길르앗 동기생 돈 해슬릿이 선교인 집을 세내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 집은 아름답고 큰 서양식 2층집이었는데, 가구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깔고 잘 요 대용으로, 마당에 있는 키가 큰 풀들을 베어 바닥에 깔았습니다. 그리하여 여행 가방에 든 소지품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의 선교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난방과 요리를 위해서 히바치라고 하는 목탄 화로를 구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남편은 두 명의 동료 선교인인 퍼시 이즐로브와 일마 이즐로브가 의식을 잃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남편은 창문을 열어서 차고 신선한 공기가 통하게 하여 그 두 사람이 의식을 회복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나 역시 목탄 화로로 요리를 하다가 기절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에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우리는 한 달 동안 하루에 11시간씩 일본어를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우리는 말을 건넬 때 사용하기 위해 한두 문장을 적은 종이를 가지고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야외 봉사를 나간 첫날에, 다카기 미요라는 사랑스런 여자를 만났으며, 그는 나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재방문을 가면 미요와 나는 일본어-영어 사전을 가지고 씨름을 해야 했는데, 마침내 성서 연구가 잘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99년에 일본에서 있었던 증축된 일본 지부 시설을 위한 봉헌식에 참석하였는데, 그때 나는 미요를 비롯하여 나와 함께 연구한 소중한 사람들을 여러 명 다시 만날 수 있었습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여전히 열심 있는 왕국 선포자들로서, 최선을 다해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1950년 4월 1일 고베에서, 약 180명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하였습니다. 놀랍게도, 다음날 아침 35명이 야외 봉사에 참여하려고 나왔습니다. 선교인 한 사람당 이 새로운 사람들을 서너 명씩 데리고 다니면서 봉사를 하였습니다. 집주인들은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인 내게 말을 건네는 대신 그 전날 기념식에 참석하였다가 나를 따라 봉사를 나온 일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한 대화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지만, 나는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사람들 중에 더 많은 지식을 얻고 지금까지도 전파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많은 특권들과 임명들

우리는 1952년까지 고베에서 선교 활동을 계속하다가, 그해에 도쿄로 임명되었으며, 도쿄에서 남편은 지부 사무실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남편은 임명으로 인해 일본 전역과 다른 나라들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세계 본부의 네이선 H. 노어가 도쿄를 방문하던 중에 한 번은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남편이 다음번 지구 방문 때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나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갈 것입니다.” 노어 형제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자비로 여비를 댈 수 있다면, 같이 가도 좋습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고향을 떠난 지 어언 9년이 지났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우리는 서둘러서 가족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비행기표를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남편과 나는 임명을 수행하느라 바빴으며, 우리에게는 가족을 방문하는 데 드는 돈이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은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있듯이, 어머니는 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돈을 모아서 네가 3년 후에 또 올 수 있게 해야겠구나.” 우리는 그 말을 기억하며 헤어졌지만,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이듬해 7월에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신세계에서 어머니와 재회할 것이라는 참으로 놀라운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1960년까지는 선교 활동이 나의 유일한 임명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오늘부터 당신은 전체 베델 가족을 위해서 세탁과 다리미질을 하도록 마련되었습니다.” 당시 베델 가족은 약 12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선교 임명에 더하여 그 일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1962년에는 우리가 살던 일본식 집을 허물고, 이듬해에 그 자리에 6층으로 된 새로운 베델 집을 지었습니다. 나는 새로 베델에 들어온 젊은 형제들이 자신들의 방을 깨끗이 정리 정돈하고 자신이 사용한 물품이나 소지품은 스스로 치우도록 도와주는 일을 임명받았습니다. 일본에서는 남자 아이들에게 집안일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세속 교육이 중시되었으며,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 주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그 형제들은 내가 그들의 어머니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형제들이 발전하여 조직 내에서 중대한 책임이 따르는 다른 임명들을 맡게 되었습니다.

아주 무더웠던 어느 여름 날, 한 성서 연구생은 우리의 시설을 견학하러 왔다가 내가 샤워실을 북북 문질러 닦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여자 관심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임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세요. 당신 대신 이 일을 하도록 가정부를 고용할 비용을 대 드리고 싶어요.” 나는 그 관심자에게 친절한 생각에 대해 감사하기는 하지만, 여호와의 조직 내에서 임명받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하고자 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무렵, 남편과 나는 길르앗 제39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1964년에 46세의 나이로 길르앗 학교에 다시 가게 되다니 이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학교 과정은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책임을 잘 돌보도록 돕기 위해서 특별히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10개월 과정이 끝난 후, 우리는 다시 일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3000명이 넘는 왕국 선포자들이 있었습니다.

성장에 가속도가 붙어서 1972년에는 1만 4000명 이상의 증인이 있게 되었으며, 도쿄 남쪽의 누마즈에 5층으로 된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베델 건물에서는 후지산의 장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매월 100만 부 이상의 일본어 잡지가 새로 설치된 거대한 윤전 인쇄기에서 인쇄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나에게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974년 말에, 남편은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본부로부터 통치체에서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처음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제 다 끝났어. 그이는 하늘 희망을 가지고 있고 나는 땅의 희망을 가지고 있으니, 어차피 우리는 조만간 헤어져야 할 거야. 그이는 아마 혼자 브루클린으로 가겠지.’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는 내 생각을 바로잡게 되었고, 1975년 3월에 기꺼이 남편과 함께 일본을 떠났습니다.

본부에서 누린 축복들

심지어 브루클린에서도, 남편은 일본의 밭에 상당히 많은 마음을 기울였으며, 우리가 일본에서 겪은 경험에 대해 늘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경험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남편은 생애의 마지막 24년 동안 지구 활동을 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으며, 그로 인해 전 세계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남편을 따라 세계 곳곳을 여행하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에 있는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방문한 것은, 많은 형제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이 어떤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 북부에서 만난 열 살 된 소녀인 엔텔리아의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엔텔리아는 하느님의 이름을 사랑하였으며, 편도로 한 시간 반을 걸어서 집회에 오고 갔습니다. 엔텔리아는 가족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는데도,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엔텔리아의 회중을 방문해 보니, 그 회중에는 흐릿한 백열전구가 단 한 개밖에 없었는데, 연사의 연설 원고 위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전구가 비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집회 장소가 칠흑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러한 어둠 속에서 형제 자매들이 부르는 아름다운 노래를 듣는 것은 가슴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 중 하나는, 1998년 12월에 우리 부부가 쿠바에서 열린 “하느님이 인도하는 생활의 길” 지역 대회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의 형제들이 브루클린 본부 성원들 중 일부가 그들을 방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소리 높여 열심히 여호와께 찬양을 돌리고 있는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만난 수많은 기억들을 나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과 함께 있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하다

내가 태어난 나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이지만, 나는 여호와의 조직이 보내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도 그랬고, 이제 미국에 온 지 25년이 넘었는데, 여기서도 그러합니다. 내가 남편과 사별하였을 때, 내게 떠오른 생각은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임명하신 곳인 브루클린 베델에 머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80대입니다. 61년간 전 시간 봉사를 해 왔지만, 나는 아직도 여호와께서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그분을 기꺼이 섬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나를 참으로 잘 돌봐 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사랑한 내 사랑하는 동반자와 함께 보낼 수 있었던 57년이 넘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호와께서 남편과 나를 계속 축복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남편과 내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일과 사랑을 그분이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히브리 6:10.

[각주]

^ 4항 「파수대」 1999년 10월 1일호 16면과 17면 참조.

[25면 삽화]

어머니와 함께, 1956년

[26면 삽화]

남편과 일단의 일본인 전도인들과 함께, 1950년대 초

[26면 삽화]

일본에서 나의 첫 번째 성서 연구생인 다카기 미요와 함께, 1950년대 초와 1999년

[28면 삽화]

일본에서 남편과 함께 잡지 배부 활동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