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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우리는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체험담

우리는 여호와를 시험하였다

폴 스크리브너

“안녕하세요, 스택하우스 부인. 오늘 아침에는 부활절 케이크를 주문받고 있습니다. 가족이 드실 케이크를 꼭 하나 준비하고 싶으실 거라고 믿습니다.” 때는 1938년 초봄이었으며, 나는 미국 뉴저지 주 앳코에서 내가 관리하던, 제너럴 베이킹 제과 회사의 고객들 중 가장 확실한 단골 손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택하우스 부인은 내 제의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별로 관심이 없는데요. 우리는 부활절을 안 지키거든요.”

그 말을 듣고 나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부활절을 안 지킨다?’ 물론, 영업 사원이 지켜야 하는 철칙은 ‘고객은 언제나 옳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는 이러한 방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세요. 그래도 이 케이크는 정말 맛있는 케이크입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 제품을 좋아하시잖아요. 물론 저 ·⁠·⁠· 부인께서 부활절은 안 지키시지만, 가족들은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을까요?”

“안 그럴 것 같은데요.” 그는 또다시 거절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고 스크리브너 씨하고 언제 한번 얘기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이 좋을 것 같군요.” 그렇게 해서 나누게 된 대화는 내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게 되었습니다! 뉴저지 주 벌린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 부회(회중)의 성원이던 스택하우스 부인은 부활절 기념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설명해 주었으며 세 권의 책자를 주었습니다. 그 책자들의 제목은 각각 「안전」(Safety)과 「폭로함」(Uncovered)과 「보호」(Protection)였습니다.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서도 약간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그 책자들을 가지고 집에 갔습니다. 스택하우스 부인이 해 준 말은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습니다. 그 말속에는 내가 어린 시절에 배웠던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 성경 연구생들과 접촉하다

나는 1907년 1월 31일에 태어났으며, 내가 여덟 살이던 1915년에는 아버지가 암으로 사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나는 외조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매사추세츠 주 몰든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외삼촌인 벤저민 랜섬과 외숙모도 그 집 3층에 살고 있었습니다. 외삼촌은 20세기가 되기 전부터 만국 성경 연구생들과 연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나는 외삼촌을 아주 좋아하였지만, 감리교인이던 다른 외가 식구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여러 해 후에, 외숙모는 외삼촌과 이혼하기 전에 신앙을 이유로 외삼촌을 잠깐 동안이나마 정신 병원에 가두어 놓는 데 성공한 적도 있었습니다! 의사들은 외삼촌의 정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고는, 사과하며 그를 퇴원시켰습니다.

외삼촌은 특히 방문 연사가 오거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보스턴에서 열리는 만국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한번은, 다름 아닌 찰스 테이즈 러셀이 방문 연사로 왔는데, 그는 당시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다른 특별한 행사 중에는 “창조 사진극”이 상영되기도 하였습니다. 1915년에 있었던 일이지만, 지금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으로 바치기 위해 그를 데리고 산으로 올라가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이며, 아브라함과 이삭이 땔나무를 한 짐 가지고 산을 터벅터벅 올라가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아버지 없는 소년이던 나에게 그러한 장면은 매우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후 외삼촌과 외숙모는 메인 주로 이사하였고, 어머니가 재혼하여 우리 가족은 뉴저지 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외삼촌을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뉴저지 주에서 십대 시절을 보내면서 매리온 네프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내가 자주 놀러 가던 한 장로교 가족의 여덟 자녀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 자주 그 가족과 그 가족이 다니던 교회의 청소년 그룹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결국 나 자신도 장로교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서 배웠던 얼마의 지식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매리온과 나는 1928년에 결혼하였으며, 첫딸 도리스는 1935년에 그리고 둘째 딸 루이스는 1938년에 태어났습니다. 아장아장 걷는 딸과 갓 태어난 딸을 두게 된 우리 부부는 자녀를 키우는 데 영적인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책자들에서 진리를 발견하다

아내와 나는 앞으로 다닐 교회를 물색하고 있었으며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요일마다 우리는 교대로 한 사람은 집에서 아이들을 보고 다른 한 사람은 교회를 한 군데씩 참석해 보았습니다. 그 일요일에는 아내가 집에 있을 차례였지만, 내가 아이들을 보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스택하우스 부인이 내게 준 세 권의 책자 가운데 먼저 「안전」을 읽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단 읽기 시작하자,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어느 교회도 제공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찾았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다음 주에도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나는 자진해서 아이들을 보면서 두 번째 책자인 「폭로함」을 읽었습니다. 읽는 내용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외삼촌이 믿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나? 우리 외가 식구들은 삼촌의 종교가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괜한 걱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폭로함」을 읽은 지 며칠 후 퇴근해서 집에 왔을 때, 아내는 이러한 말로 나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집에 가져온 책자들을 읽었는데 정말 흥미롭던데요.” 그 말을 듣고는 정말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책자들의 뒷면에는 새로 발행된 책인 「적」(Enemies)에 대한 광고가 있었는데, 그 책은 거짓 종교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책을 구해서 읽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서적 주문서를 우체통에 넣기도 전에, 한 증인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는 바로 그 책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책을 보고 나니 분명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일을 그만두고 뉴저지 주 캠던에 있던 여호와의 증인 부회의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몇 달 후인 1938년 7월 31일 일요일에, 우리를 포함하여 약 50명이—내가 부활절 케이크를 팔려고 했던—스택하우스 자매의 집 잔디밭에 모여서 레코드에 녹음된 러더퍼드 판사의 침례 연설을 들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그 집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우리 중 19명은 가까운 개울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파이오니아가 되기로 결심하다

침례받고 나서 얼마 후에, 우리 부회의 한 자매는 파이오니아라고 하는, 공개 봉사의 직무를 자기 생활의 주된 활동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해 내게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즉시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얼마 후에는 한 가족을 알게 되었는데, 그 가족 성원들은 모두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지긋한 코니그 형제와 그의 아내와 성인이 된 딸은 모두 인근 회중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을 둔 아버지였던 나는 코니그 형제 가족이 봉사의 직무에서 누리는 풍성한 기쁨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종종 그 집에 들러 빵이 가득 실린 내 트럭을 세워 놓고는, 그 가족과 함께 호별 봉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도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파이오니아를 할 수 있을 것입니까? 우리 부부에게는 어린 두 자녀가 있었고, 내 직장 일은 매우 바빴습니다. 사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미군에 입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장에 남아 있는 민간인들이 할 일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더 많은 고객을 관리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으며, 그렇게 일을 하는 한 결코 파이오니아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파이오니아가 되고 싶은 나의 열망에 대해 코니그 형제에게 말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저 여호와의 봉사에서 계속 열심히 일하면서, 그 목표에 대해 그분에게 계속 기도하세요. 여호와께서 목표를 달성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나는 1년 이상, 그가 말한 그대로 했습니다. 나는 자주 마태 6:8 같은 성구들을 묵상하였는데, 그 성구는 여호와께서 심지어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다는 점을 확신시켜 줍니다. 또한 나는 마태 6:33의 교훈에 따라 하느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지구의 종(지금의 순회 감독자)이던 멜빈 윈체스터 형제도 나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내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말라기 3:10의 말씀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성구는 여호와를 시험하여 그분이 우리에게 축복을 쏟아 붓지 않나 지켜보라고 격려합니다. 다음과 같은 아내의 대답은 내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파이오니아를 하고 싶다면, 나 때문에 주저하지 마세요. 당신이 파이오니아를 하면 아이들은 내가 돌보면 돼요. 어차피 우리에게 돈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는 않으니까요.” 이미 12년간 결혼 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나는 아내가 알뜰하고 꼼꼼한 가정 주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아내는 훌륭한 파이오니아 짝이었으며, 약 60년간의 전 시간 봉사에서 우리가 성공을 거둔 비결 중 하나는, 가진 것이 얼마 없어도 만족할 줄 알며 그 얼마 안 되는 것을 많아 보이게 할 줄 아는 아내의 재능이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계획한 후, 우리 부부는 1941년 여름까지 얼마의 돈을 저축한 다음, 우리 가족이 살기 위해 5.5미터 길이의 여행용 트레일러를 구입하였습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1941년 7월에 정규 파이오니아가 되었으며, 그때 이래로 지금까지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나의 첫 번째 임지는 뉴저지 주와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를 잇는 50번 도로에 있는 열 군데의 정류장이었는데,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는 8월 초에 우리가 참석할 대회가 열리게 되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그 도로 인근에 살고 있는 형제들의 이름과 주소가 적힌 명단을 받았으며,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 내가 언제 도착할 것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대회에 도착하면, 나는 파이오니아 부서를 찾아가 다른 임지를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여호와를 시험해 봐야겠지요”

우리는 우리의 작은 여행용 트레일러에 서적을 가득 싣고 형제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캠던에서 열리는 집회에 마지막으로 참석하였습니다. 돌봐야 할 어린 두 딸이 있었고 대회가 끝난 다음에는 갈 곳도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형제들에게는 우리의 계획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으며, 몇몇 형제들은 “머지않아 다시 돌아오게 될 겁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글쎄요.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돌봐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여호와를 시험해 봐야겠지요.”

매사추세츠 주에서부터 미시시피 주에 이르기까지 20개 도시들에서 60년간 파이오니아를 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여호와께서는 기대 이상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내와 나와 우리 두 딸에게 쏟아 부어 주신 축복들은 내가 1941년에 가졌던 모든 소망을 훨씬 뛰어 넘은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축복들 가운데에는 우리 두 딸이 인근 회중에서 파이오니아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는 축복과 (가장 최근에 세어 보았을 때) 미국 동부 연안의 사방에 흩어져 있는 약 100명의 영적 아들들과 딸들을 갖게 된 축복이 포함됩니다. 나와 연구한 사람들 중 52명이 여호와 하느님께 헌신하였으며 아내와 연구한 사람들 중에는 48명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1941년 8월에 우리는 세인트루이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나는 베델에서 나온 T. J. 설리번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는 내 임명 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전운이 감돌고 있었고 사람들이 징병되고 있었기 때문에 내게는 그 편지가 필요하였습니다. 나는 설리번 형제에게 아내도 봉사의 직무에서 나만큼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으며 나와 함께 파이오니아를 하고 싶어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아직 대회장에 파이오니아 부서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였지만, 설리번 형제는 그 자리에서 아내를 파이오니아로 등록시켰으며 우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대회가 끝나면 어디로 가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할 계획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그리 걱정할 것 없습니다. 파이오니아들을 필요로 하는 지역에서 온 누군가를 대회장에서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요. 어디서 봉사하고 있는지 우리에게 편지로 알려 주기만 하면, 그곳을 두 사람의 임지로 임명하겠습니다.” 정말로 그가 말한 대로 되었습니다. 이전에 지구의 종이었던 잭 디위트 형제는 버지니아 주 뉴마켓에 있는 얼마의 사람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몇 명의 파이오니아를 위한 빈방이 있는 파이오니아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회가 끝난 후, 우리는 뉴마켓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뉴마켓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파이오니아 활동을 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벤저민 랜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외삼촌이었습니다. 외삼촌이 보스턴에서 내 마음속에 진리의 씨를 심어 놓은 지 25년 이상이 지난 후에 외삼촌과 함께 호별 봉사를 하는 것은 정말 큰 기쁨이었습니다! 외삼촌은 여러 해 동안 가족의 무관심과 조롱과 심지어는 박해를 받기까지 했지만, 여호와와 봉사의 직무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뉴마켓에 있는 파이오니아 집에서 8개월간 즐겁게 지냈습니다. 그 기간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서적을 닭이나 달걀과 바꾸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외삼촌과 우리 부부와 다른 세 명의 파이오니아들은 펜실베이니아 주 하노버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받은 여섯 군데의 임지 중 첫 번째 임지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우리의 중립 입장 때문에 적대적인 태도에 직면해야 했던 때도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어김없이 우리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에서 우리의 낡은 뷰익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재방문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적대적인 가톨릭교인들이 사는 동네를 통과하여 몇 킬로미터를 걸어가야만 하였습니다. 여러 명의 불량 청소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가는데, 그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돌멩이들이 내 귀를 스치듯 날아오는 속에서 나는 서둘러 길을 가면서, 그들이 뒤쫓아 오지 않기만을 바랐습니다. 다행히 다친 데 없이 관심자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 재향 군인회의 존경받는 회원이던 그 집주인은 내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겠습니다. 영화를 보러 시내에 가기로 했던 것을 깜빡 잊고 있었거든요.” 길 모퉁이에서 돌을 던지던 불량 청소년들이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그 신사가 덧붙여 이렇게 말하자 마음이 놓였습니다. “가는 길에 그냥 같이 걸으면 어떻겠습니까? 가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덕분에 나는 그에게 증거하게 되었으며, 위험 지대를 안전하게 통과하였습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과 봉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음

전쟁이 끝난 후, 우리는 버지니아 주에서 몇 군데의 임지를 받았는데, 그 중 샬럿스빌에서는 특별 파이오니아와 정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면서 8년간 머물렀습니다. 1956년까지 딸들이 성장하여 출가하였으며, 우리 부부는 다시 한 번 임지가 바뀌어, 버지니아 주의 해리슨버그에서는 파이오니아로 그리고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링컨턴에서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1966년에 나는 순회 활동을 하여 회중에서 회중으로 여행하면서 형제들을 격려하라는 임명을 받았습니다. 윈체스터 형제가 1930년대에 뉴저지 주에서 나를 격려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2년 동안 테네시 주에 있는 한 순회구의 회중들을 섬겼습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다시 시작하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1968년부터 1977년까지, 우리는 조지아 주에서 미시시피 주까지 미국의 남부 지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습니다.

조지아 주 이스트먼에서, 나는 회중 감독자(지금의 주임 감독자)로 임명되었는데, 그 임명은 여러 해 동안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였지만 몸이 많이 쇠약해진 사랑스런 연로한 형제 파웰 커클랜드를 대신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매우 감사해하였으며 나를 잘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의 지원은 매우 중요하였습니다. 회중 내에 약간의 불화가 있었는데, 얼마의 탁월한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심각한 감정 문제로 비화되었으며,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잠언 3:5, 6과 같은 성구들이 떠올랐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너 자신의 이해에 의존하지 말아라. 너의 모든 길에서 그분을 유의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의사소통의 문을 계속 열어 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우리는 회중을 연합시킬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모두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1977년이 되자 우리는 노화 현상이 미치는 영향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는 두 딸이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샬럿스빌 지역으로 다시 임명되었습니다. 지난 23년간 이 지역에서 봉사하면서 버지니아 러커스빌 회중의 설립을 도운 것과, 오래 전에 우리와 성서 연구를 한 사람들의 자녀들과 손자녀들이 자라서 회중 장로와 파이오니아와 베델 봉사자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훌륭한 야외 봉사 계획에 고착할 수 있으며, 나는 샬럿스빌 동부 회중에서 장로로 활동적으로 봉사하면서 서적 연구를 사회하고 공개 강연을 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우리도 지난 여러 해 동안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딸 도리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십대 후반에 한동안 영적으로 약해져서 증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하였습니다. 하지만 딸아이는 여호와에 대한 사랑을 결코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도리스의 아들인 빌은 뉴욕 주 월킬에 있는 베델에서 15년째 봉사하고 있습니다. 두 딸은 지금은 모두 남편과 사별하였지만, 인근에서 정규 파이오니아로 기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배운 교훈들

나는 여호와를 섬기는 데서 성공하게 해 주는 몇 가지 간단한 규칙들을 적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규칙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생활을 단순하게 유지한다. 개인 생활을 포함하여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된다. 매사에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의 지침을 적용한다.’—마태 24:45.

아내는 자녀를 기르면서도 성공적으로 파이오니아를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짧지만 효과적인 제안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제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실용적인 계획을 세우고 지킨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진정한 천직으로 삼는다. 건강에 좋은 식사 습관을 유지한다. 적당한 휴식을 취한다. 오락을 과도하게 즐기지 않는다. 봉사의 직무의 모든 부면들을 포함하여, 진리를 자녀의 삶에서 즐거운 경험이 되게 한다. 봉사가 자녀들에게 언제나 흥미 있는 경험이 되게 한다.’

이제 우리는 90대가 되었습니다. 스택하우스 자매의 집 잔디밭에서 침례 연설을 들은 지도 어느덧 62년이 지났으며, 우리는 전 시간 봉사에 60년을 바쳤습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누린 인생에 전적으로 깊이 만족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자녀들이 어렸을 때 내가 받았던, 영적인 목표를 첫째 자리에 두고 그 목표를 향해 계속 노력하라는 격려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으며, 여러 해 동안 나를 지원해 준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에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지만, 나는 종종 전도서 2:25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내 자신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잘 먹고 마시는 사람이 누구인가?”

우리의 경우에, 참으로 여호와께서는 말라기 3:10에 있는 자신의 약속을 넘치도록 지키셨습니다. 실로 그분은 ‘더 이상 부족함이 없을 때까지 우리에게 축복을 쏟아 부어’ 주셨습니다!

[29면 네모와 삽화]

전시에 대한 기억들

전쟁이 끝난 지 거의 60년이 되어 가지만, 우리 가족 모두는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리스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펜실베이니아 주는 굉장히 추울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밤에 기온이 영하 35도까지 떨어졌어요.” 루이스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언니와 나는 우리의 낡은 뷰익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서로 발을 포개고 앉아 발이 차가워지지 않게 하였지요.”

도리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쌍하다거나 가난하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보다 이사를 많이 다니기는 했지만, 항상 풍족하게 먹었으며 우리보다 조금 나이 많은 딸들을 둔 오하이오 주의 친한 가족들이 새것이나 다름없는 좋은 옷을 물려주어 옷도 잘 차려입었습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점을 지적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셨으며, 우리는 봉사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느꼈으며 아버지 어머니와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폴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차는 1936년형 뷰익 스페셜이었는데, 그 모델은 축이 잘 망가지기로 유명하였습니다. 엔진이 자동차의 나머지 부분에 비해서 힘이 너무 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축은 하필이면 한 달 중에서도 가장 추운 날 밤에만 고장나는 것 같았습니다. 축이 고장나면, 나는 쏜살같이 폐차장에 가서 축을 하나 구해 오곤 하였습니다. 축을 교체하는 데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매리온은 이렇게 말합니다. “배급증도 잊을 수 없어요. 고기, 휘발유, 자동차 타이어 등 무엇이든 배급을 했지요. 새로운 임지에 도착할 때마다, 관할 당국에 가서 배급증을 신청해야 하였습니다. 배급증을 받기까지 여러 달이 걸릴 수도 있었으며, 매번 이제야 배급증을 받았나 싶으면 또다시 새로운 임지로 가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새 임지에 가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요.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항상 우리를 돌봐 주셨어요.”

[삽화]

우리 부부와 두 딸 도리스(왼쪽)와 루이스, 2000년

[25면 삽화]

내가 열한 살이던 1918년에 어머니와 함께

[26면 삽화]

딸들이 침례받은 1948년의 우리 가족

[26면 삽화]

결혼 사진, 1928년 10월

[26면 삽화]

딸들(왼쪽 맨 끝과 오른쪽 맨 끝)과 나, 1955년 양키 스타디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