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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을 첫째로 구하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왕국을 첫째로 구하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체험담

왕국을 첫째로 구하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제사 수널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러한 발표를 들었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불법이며, 그들의 활동은 금지되었습니다.”

때는 1950년, 20대 아가씨들인 우리 네 사람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선교인으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전해에 그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선교 봉사가 언제나 내 인생의 목표였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나는 어릴 때 교회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교회에 다니기를 중단하였습니다. 1933년에 내가 감독 교회에서 견진 성사를 받던 날, 교회의 감독은 성서는 한 구절만 읽어 주고는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두 번 다시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이 바뀌다

아버지 윌리엄 칼과 어머니 메리 애덤스는 슬하에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중 돈과 조얼과 칼은 아들이었고, 딸로는 막내인 여동생 조이와 맏이인 내가 있었습니다. 분명히 내가 13살이었을 때인 것 같은데, 하루는 방과 후에 어머니가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소책자를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소책자에는 「천국—세계의 희망」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내게 “이것은 진리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성서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수께서 하신 다음과 같은 조언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과 모범으로 우리에게 분명히 새겨 주었습니다. “왕국과 그분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하십시오.”—마태 6:33.

내가 어머니의 말을 항상 인식 깊은 태도로 들었던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제게 전도 좀 그만 하세요. 안 그러면 이제부터는 어머니를 도와 접시의 물기 닦는 일을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재치 있게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정기적으로 우리 자녀 모두를 클라라 라이언의 집에서 열리는 성서 연구에 데리고 갔는데, 그는 미국 일리노이 주 엘름허스트에 있는 우리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살았습니다.

클라라는 피아노 교습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학생들이 연례 발표회에서 연주를 할 때, 그 기회를 이용하여 하느님의 왕국과 부활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해 온 터라 음악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클라라가 하는 말을 잘 들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우리 자녀들은 어머니와 함께 시카고 서부에서 열리는 회중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려면 버스와 시가 전차를 타고 긴 여행을 해야 했지만, 그 일은 우리에게 왕국을 첫째로 구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초기 훈련의 일부였습니다. 어머니가 침례를 받은 지 3년 뒤인 1938년에, 나는 어머니와 함께 시카고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은 무선 전화로 연결하여 대회를 즐긴 50개의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나는 거기서 들은 내용으로 인해 마음이 감동되었습니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 또한 나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나는 193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아버지는 내가 시카고에 있는 아메리카 음악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다음 두 해 동안 음악 공부를 했고, 두 개의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으며, 음악 분야에서 직업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의 바이올린 선생님인 허버트 버틀러는 미국에서 살기 위해 유럽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이 읽어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피자들」(Refugees) *이라는 소책자를 드렸습니다. 선생님은 그 소책자를 읽었고, 그 다음 주에 교습을 마치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사, 연주를 잘하는구나. 공부를 계속한다면 라디오 방송 관현악단에 들어가거나 음악을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가 드린 소책자를 가리키면서 계속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네 마음이 여기에 가 있는 것 같구나. 그것을 네 천직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니?”

나는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음악 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대신, 1940년 7월에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라는 어머니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트레일러 야영촌에 있는 천막에서 머물렀습니다. 물론, 나는 내 바이올린을 가져왔고, 대회 관현악단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트레일러 야영촌에서 많은 파이오니아(전 시간 복음 전파자)를 만났습니다. 그들 모두는 매우 행복해하였습니다. 나는 침례를 받고 파이오니아 봉사 신청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또한 평생토록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게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고향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시카고에서 봉사하였습니다. 1943년에는 켄터키 주로 이사하였습니다. 그해 여름, 지역 대회가 있기 바로 전에 나는 길르앗 학교 제2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고, 나중에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위한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학급은 1943년 9월에 시작될 예정이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열린 대회 기간에, 나는 한 증인과 함께 머물렀는데, 그는 자기 딸의 옷장에서 내가 원하는 옷은 무엇이든 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딸은 군에 입대하였고, 어머니에게 자기 물건은 모두 남들에게 줘 버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것들이 내게는 예수께서 하신 이러한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러므로 왕국과 그분의 의를 계속 첫째로 구하십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더하여질 것입니다.” (마태 6:33) 5개월간의 길르앗 학교 생활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1944년 1월 31일에 졸업을 한 나는 선교 봉사를 하게 될 날을 열렬히 고대하였습니다.

그들 역시 전 시간 봉사를 택했다

어머니는 1942년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 세 명의 남동생과 여동생은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종종 방과 후에 동생들을 만나 함께 야외 봉사를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또한 동생들이 집안의 허드렛일을 돕도록 가르쳤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낮에 봉사를 하기 위해 밤늦게까지 다리미질과 다른 필요한 일을 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내가 켄터키 주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던 1943년 1월에 남동생인 돈도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자신과 우리 어머니가 대학을 나왔듯이, 자녀들이 모두 대학 교육을 받기를 바라다가 이 일로 인해 실망하였습니다. 돈은 거의 2년 가까이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의 성원으로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조얼은 집에서 생활하던 1943년 6월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조얼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대회에 참석하게 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얼이 그 지역에서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해 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버지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책으로 아들과 연구를 하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질문들에 쉽게 대답하였지만, 조얼에게 그 책에 나와 있는 내용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대 보라고 강요하였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의 태도는 조얼이 성서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얼은 선발 징병 위원회가 형인 돈에게 성직자 자격으로 징집을 면제시켜 준 것처럼 자기에게도 동일한 처우를 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조얼이 너무 어리다고 보고는 그를 성직자로 분류하기를 거부하였으며 징병 통지서를 보내왔습니다. 조얼이 징병 조처에 따르기를 거부하자,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습니다. 그는 연방 수사국에 의해 소재가 파악된 후, 쿡카운티 교도소에서 사흘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조얼이 보석으로 풀려날 수 있도록 우리 집을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 후로 아버지는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젊은 증인들을 위해서도 그와 똑같이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 문제의 부당성으로 인해 격분하였고, 호소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조얼과 함께 워싱턴으로 갔습니다. 마침내 조얼은 성직자로 분류되었고, 그 소송은 기각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선교 임지에 있는 나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승리를 여호와께 돌려야 할 것 같구나!” 1946년 8월 말에 조얼 역시 브루클린에 있는 본부 성원으로 봉사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칼은 1947년 초에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까지 방학을 이용하여 몇 차례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으며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칼은 다른 곳으로 가서 파이오니아 임명을 수행하기 전에 얼마 동안 아버지의 사업을 도왔습니다. 1947년 말에 칼은 형들인 돈과 조얼과 함께 브루클린 본부에서 베델 가족 성원으로 봉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이는 고등학교를 마치면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951년에는 오빠들과 함께 베델에서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조이는 숙소를 관리하는 일을 하였고 예약부에서도 일하였습니다. 1955년에 조이는 베델 가족 성원인 로저 모건과 결혼하였습니다. 7년가량 지난 뒤에, 그들은 자녀를 가지기로 결정하고 베델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두 자녀를 양육하게 되었고, 그들 역시 여호와를 섬기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모두 전 시간 봉사를 하고 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필요한 격려를 베풀었으며, 그리하여 아버지 역시 여호와께 헌신하고 1952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병환으로 인해 제약이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사망하기 전까지 15년 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왕국 진리를 전하는 방법을 찾는 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파이오니아 봉사를 잠시 중단하였다가, 사망하기 전까지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동차를 가져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자전거를 타지도 않았습니다. 키가 작았던 어머니는 성서 연구를 사회하기 위해 어디든 걸어 다녔으며, 멀리 시골까지 걸어가는 경우도 자주 있었습니다.

선교의 밭으로

우리 그룹은 길르앗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여행에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을 때까지 1년간 뉴욕 시 북부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였습니다. 마침내 1945년에 우리는 임지인 쿠바로 떠났고,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 방식에 차츰 적응해 갔습니다. 우리의 전파 활동에 대한 반응은 좋았으며, 얼마 안 있어 우리 모두는 많은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다시 임명되었습니다. 하루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자기 단골손님 한 사람을 만나 보라고 나에게 강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손님은 수잔 엔프루아라는 프랑스 여자였고 성서를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받기 원하였습니다.

수잔은 유대인이었는데,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의 남편이 그와 두 자녀를 다른 나라로 피신시켰던 것입니다. 수잔은 자기가 배우는 것들을 신속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수잔은 먼저 그를 방문해 달라고 내게 요청했던 여자에게 이야기하였고, 그 다음으로 프랑스 출신의 친구인 블랑슈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두 사람 모두 침례받을 단계까지 진보하였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돕기 위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수잔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고, 딸은 뉴욕의 ‘라디오 시티 뮤직홀’에서 춤을 추게 되기를 희망하며 발레를 배우고 있었습니다. 수잔은 자녀들에게 「파수대」와 「깨어라!」 잡지를 예약하여 보내 주었습니다. 그 결과, 수잔의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의 쌍둥이 자매까지 모두 증인이 되었습니다. 수잔의 남편인 루이는 그 무렵에 도미니카 공화국 정부가 우리의 활동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아내가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대해 겁을 냈습니다. 하지만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에 그도 결국 증인이 되었습니다.

금지령 하에서도 여전히 봉사함

1949년에 우리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임명된 지 그리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었지만, 우리는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5:29)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지시하셨듯이, 하느님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알림으로 왕국을 계속 첫째로 구하였습니다. (마태 24:14) 하지만 우리는 전파 활동을 수행해 나가면서 “뱀과 같이 조심스럽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마태 10:16) 이를테면, 내 바이올린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는 성서 연구를 사회할 때 바이올린을 가져갔습니다. 내 연구생들은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몇몇 가족들은 여호와의 종이 되었습니다!

금지령이 발해진 뒤 우리 네 명의 여자—메리 아니올, 소피아 소비아크, 이디스 모건 그리고 나—는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에 있는 선교인 집에서 수도인 산토도밍고의 지부에 위치한 선교인 집으로 이사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음악 교습을 하기 위해 매달 한 번씩 원래의 임지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나는 바이올린 가방에 영적 양식을 넣어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가져다 주고 그들의 증거 활동에 대한 보고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산프란시스코데마코리스의 형제들이 그리스도인 중립 입장으로 인해 산티아고에 수감되었을 때, 나는 그들에게 돈뿐 아니라 가능하다면 성서도 가져다 주고, 그들의 가족들에게 전해 줄 소식을 가져와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산티아고의 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은 내가 옆구리에 끼고 있는 바이올린 가방을 보더니, “그건 뭣하러 가져가는 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요”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연주한 노래들 중 한 곡은 어느 증인이 나치 강제 수용소에 있으면서 작곡한 노래였습니다. 지금 그 노래는 여호와의 증인의 노래책에 29번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수감된 형제들이 그 노래를 부르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그 곡을 연주했습니다.

나는 증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정부 수반인 트루히요 소유의 농장으로 이송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서 조금만 가면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오쯤 되어 버스에서 내려 농장으로 가는 길을 묻게 되었습니다. 어느 작은 가게의 주인은 연이어 있는 산마루 너머를 가리켰고, 내가 바이올린을 맡겨 두면 자기 말을 빌려 주고 길 안내를 할 소년을 딸려 보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언덕들을 넘고 강을 건너야 했는데, 우리 둘은 헤엄치는 말의 등에 앉은 채로 강을 건넜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무지갯빛이 나는 녹색과 파란색 깃털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검은귀아마존앵무의 무리를 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저렇게 아름다운 새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우리는 오후 네 시에 농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담당 군인은 친절하게도 내가 형제들과 이야기하게 해 주었으며, 형제들을 위해 가져온 것들을 모두 건네주도록 허락하였는데, 심지어 작은 성서까지 허락해 주었습니다.

이제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돌아오는 길 내내 기도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다시 그 가게에 도착했습니다. 마지막 버스가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 가게 주인에게 지나가는 트럭 한 대를 잡아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그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남자와 함께 가는 것은 안전하였습니까?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피아를 아세요? 제 여동생이 소피아와 연구했거든요.” 나는 여호와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신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그들은 나를 산토도밍고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1953년에 나는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한 도미니카 공화국 사람들 가운데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모두가 그 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나는 선교 봉사 짝인 메리 아니올과 함께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전파 활동이 어떻게 진척되고 있는지에 관해 보고한 다음, 금지령 하에서 어떻게 전파 활동을 수행하는지를 보여 주는 프로그램에 잠깐 참여하였습니다.

순회 활동의 특별한 기쁨

그해 여름에 나는 루돌프 수널을 만났는데, 그 이듬해에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그의 가족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펜실베이니아 주 앨러게니에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그리스도인 중립으로 인해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뉴욕 브루클린에서 베델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얼마 안 있어, 남편은 여행하는 감독자로 회중들을 방문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그 후 18년 동안, 나는 남편과 함께 순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등지를 여행하며 봉사하였습니다. 우리는 대개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그 형제들을 잘 알게 되고 그들과 더불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특별한 기쁨을 맛보게 해 주었습니다. 형제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따뜻하고도 진실한 사랑과 후대를 나타냈습니다. 조얼은 이전의 내 선교 봉사 짝이었던 메리 아니올과 결혼하였고, 그 후 두 사람은 3년간 순회 활동을 하면서 펜실베이니아와 미시간 주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후 1958년에 조얼은 또다시 베델 가족 성원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메리도 함께 초대받았습니다.

칼은 베델에 들어간 지 7년가량 되었을 때, 부가적인 경험을 쌓도록 몇 개월 동안 순회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길르앗 학교 강사가 되었습니다. 1963년에 그는 바비와 결혼하였고, 바비는 2002년 10월에 사망할 때까지 베델에서 충실히 봉사하였습니다.

돈은 여러 해 동안 베델에 있으면서 지부 사무실이나 선교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가끔씩 다른 나라로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는 동양,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임명을 수행하였습니다. 돈의 충성스러운 아내인 돌로러스도 종종 그와 함께 여행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바뀌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사망하였지만, 사망하기 전에 우리가 여호와 하느님을 섬기는 길을 택한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내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아버지의 의도대로 대학 교육을 추구했을 경우에 누렸을 축복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여동생 조이가 있는 곳 근처로 이사하려는 어머니를 도와 이삿짐을 싸고 난 후, 남편과 나는 그 당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시어머니가 있는 곳 근처에서 지내기 위해 뉴잉글랜드에서의 파이오니아 임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사망한 뒤, 친정어머니는 13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리고 1987년 1월 18일에 어머니는 93세를 일기로 지상 임명을 마쳤습니다.

어머니는 종종 친구들로부터 자녀를 모두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도록 키웠다는 칭찬을 들을 때면, 겸허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일하기 좋은 ‘흙’이 내게 있었던 것뿐이지요.” (마태 13:23) 우리에게 열심과 겸손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인,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부모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여전히 왕국을 첫째로

우리는 하느님의 왕국을 우리의 인생에서 계속 첫째 자리에 두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 대한 예수의 조언을 적용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습니다. (누가 6:38; 14:12-14)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후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안정되고 행복하였습니다.

남편과 나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저녁 한때를 즐기며 악기를 함께 연주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하지만 음악이 내 직업은 아닙니다. 음악은 인생에서 부가적인 즐거움입니다. 현재 남편과 나는 우리가 파이오니아 봉사에서 맺은 열매, 즉 여러 해에 걸쳐 우리가 도움을 베푼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나는 현재 건강 문제를 겪고 있지만, 전 시간 봉사를 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리의 삶은 매우 행복했고 안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면,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할 때 했던 기도에 여호와께서 응답해 주신 것에 대해 그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자, 오늘은 어떻게 왕국을 첫째로 구할 수 있을까?’

[각주]

^ 14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하였지만, 절판됨.

[24면 삽화]

우리 가족, 1948년(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이, 돈, 어머니, 조얼, 칼, 나, 아버지

[25면 삽화]

어머니는 봉사에서 열심 있는 모범을 보였다

[26면 삽화]

50년도 더 지난 지금의 칼, 돈, 조얼, 조이, 나

[27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선교인으로 봉사할 때의 나, 메리 아니올, 소피아 소비아크, 이디스 모건

[28면 삽화]

양키 스타디움에서 메리(왼쪽)와 함께, 1953년

[29면 삽화]

순회 활동을 하던 시절에 남편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