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 첫째 4:8.
1-3. (ㄱ) 성서에서는 사랑이라는 여호와의 속성에 대해 무엇이라고 언급하며, 그 언급은 어떤 면에서 독특한 것입니까? (ㄴ) 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속성은 모두 탁월하고 완벽하며 매력적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모든 특성 가운데서 가장 우리의 마음을 끄는 특성은 사랑입니다. 여호와의 사랑만큼 우리를 여호와께로 이끄는 힘이 강한 것은 없습니다. 행복하게도, 사랑은 그분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 점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2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다른 주요 속성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특출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능력이시라든가 하느님이 공의이시라든가 심지어 하느님이 지혜이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러한 특성들을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 세 가지 특성의 궁극적인 근원이십니다. 하지만 사랑과 관련해서는 요한 첫째 4:8에서 좀 더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여호와 속에 아주 깊이 배어 있는 속성입니다. 사랑은 그분의 본질 혹은 본성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은 그분이 행동을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분의 공의와 지혜는 그분이 행동하시는 방식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랑은 그분이 행동하시도록 동기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그분이 다른 속성들을 사용하시는 방법에는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반영되어 있습니다.
3 여호와는 흔히 사랑의 구현이라고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관하여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여호와에 관하여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비할 데 없는 사랑의 몇 가지 부면을 검토해 봅시다.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동
4, 5. (ㄱ)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이 사상 최고로 강력한 사랑의 띠로 결합되어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여호와께서 사랑을 나타내신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하나는 다른 모든 경우보다 두드러집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분이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고 죽게 하신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 성서에서는 예수를 가리켜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처음 나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골로새 1:15)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의 아들은 물질적 우주가 있기 전에도 존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얼마 동안이나 함께 있었습니까? 어떤 과학자들은 우주의 나이가 130억 년은 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추정이 정확하다 해도, 여호와의 맏아들의 수명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분은 무슨 일을 하며 지내셨습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숙련된 일꾼”으로 즐겁게 일하였습니다. (잠언 8:30; 요한 1:3)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은 다른 모든 것이 존재하게 하기 위하여 함께 일하셨습니다. 두 분은 흥미진진하고 행복한 시간을 함께 보내신 것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시간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유대 관계의 띠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그 누가 측정해 볼 엄두나 낼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은 사상 최고로 강력한 사랑의 띠로 결합되어 계십니다.
6. 예수가 침례를 받을 때, 여호와께서는 아들에 대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셨습니까?
6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인간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하늘에서 정다운 교제를 수십 년 동안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가 성장하여 완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여호와께서는 하늘에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는 30세쯤 되어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하늘에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아들, 사랑하는 자이다. 내가 그를 승인하였다.” (마태 3:17) 예수가 예언된 것을 모두, 자신에게 요구된 것을 모두 충실하게 행하는 것을 보시고 그분의 아버지께서는 틀림없이 매우 기쁘셨을 것입니다!—요한 5:36; 17:4.
7, 8. (ㄱ) 예수는 기원 33년 니산월 14일에 무슨 일을 겪었으며,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는 어떤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ㄴ)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들이 고통당하고 죽게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마태 26:14-16, 46, 47, 56, 59, 67; 27:26, 38-44, 46; 요한 19:1.
7 그러면 기원 33년 니산월 14일에 예수가 배반당하고 나서 성난 폭도에게 체포될 때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예수가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주먹으로 맞을 때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여 등의 살가죽이 찢겨져 너덜너덜해질 때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예수가 못으로 손과 발이 꿰뚫려 나무 기둥에 박혀서 거기에 매달린 채 있고 사람들이 예수를 향해 욕을 할 때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격심한 고통 속에서 아버지에게 부르짖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 예수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사랑하는 아들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느끼셨겠습니까?—8 여호와는 감정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그분이 겪으셨을 고통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겨우 말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동기 정도입니다. 이 아버지는 왜 그러한 고통을 당하고만 계셨습니까? 소형 복음서라고 불리어 왔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성구인 요한 3:16에서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밝혀 주십니다. 그 성구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매우 사랑하시어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신 동기는 바로 그것,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큰 사랑을 본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시는 방법
9. 우리에 대한 여호와의 견해가 어떠하다고 우리가 믿게 되기를 사탄은 원하며,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증하십니까?
9 그런데 이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개인적으로 사랑하십니까? 요한 3:16에서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사랑하신다는 점에는 일부 사람들도 동의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사실은 ‘하느님께서 나까지 개인적으로 사랑하실 수는 결코 없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지도 소중히 여기지도 않으신다고 우리가 믿게 되기를 열렬히 바라는 자는 사탄 마귀입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가 정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라거나 정말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할지라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보증하시듯이, 그분은 자신의 충실한 종 한 사람 한 사람을 매우 가치 있게 여기십니다.
10, 11. 참새에 관한 예수의 예는 우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10 예를 들어, 마태 10:29-31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고려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에 대해 이렇게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작은 가치의 주화 한 닢에 팔리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중의 하나도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아시는 일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머리털까지도 모두 세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많은 참새들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1세기 사람들에게 이 말씀이 의미한 바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1 예수 시대에 식품으로 파는 새 중에 참새가 가장 쌌습니다. 작은 가치의 주화 한 닢만 있으면 참새 두 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중에 말씀하신 누가 12:6, 7에 의하면, 주화 두 닢을 줄 경우에는 참새를 네 마리가 아니라 다섯 마리를 살 수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듯이, 덤으로 얹어 주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러한 새들이 사람들의 눈에는 가치 없게 여겨졌을지 모르지만, 창조주께서는 어떻게 여기셨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의 한 마리도[덤으로 얹어 주는 한 마리까지도] 하느님 앞에서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말씀의 요지가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단 한 마리의 참새도 그렇게 가치 있게 여기신다면, 인간은 얼마나 더 가치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호와께서는 우리에 대해 세세한 점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어져 있을 정도입니다!
12. 예수께서 우리의 머리털이 세어져 있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신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 예수께서 여기서 과장된 말씀을 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부활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우리를 재창조하시려면 우리에 대해 정말 상세히 아셔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복잡한 유전 정보와 우리의 한평생의 모든 기억과 경험 등 온갖 세부 사항을 기억하실 정도로, 그토록 우리를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에 비하면 평균적으로 10만 개가량 자라는 우리의 머리털을 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우리 개개인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아름답게 보증해 줍니다!
13. 여호사밧 왕의 경우는 여호와께서 우리가 불완전한데도 우리에게서 선한 것을 찾으신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 줍니까?
13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사랑을 확증해 주는 또 다른 사실을 밝혀 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서 선한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예로서, 선한 왕 여호사밧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 왕이 어리석은 행동을 범했을 때 여호와의 예언자는 그에게 “그 일 때문에 여호와 자신으로부터 당신에 대하여 분개하는 일이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소식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서 선한 것들도 발견되었[습니다].” (역대 둘째 19:1-3)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의로운 분노로 인해 여호사밧에게서 “선한 것들”을 보시지 못하게 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가 불완전한데도 우리에게서 선한 것을 찾으신다는 것을 알 때 안심이 되지 않습니까?
‘기꺼이 용서하시는’ 하느님
14. 죄를 짓게 되면 우리는 어떤 짐스러운 감정을 경험하게 될 수 있으며, 그러나 어떻게 한다면 여호와께 용서를 받게 될 수 있습니까?
14 우리는 죄를 짓게 되면 낙담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이 다시는 여호와를 섬기기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기꺼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시 86:5) 그렇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죄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힘써 노력한다면, 우리는 여호와께 용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의 이 놀라운 부면을 성서에서 어떻게 묘사하는지 고려해 보십시오.
15.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를 얼마나 멀리 치우십니까?
15 시편 필자 다윗은 생생한 표현을 사용하여, 여호와께서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지를 묘사하였습니다. “동쪽이 서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듯이, 그분은 우리의 범법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셨다.” (사체로는 본지에서; 시 103:12, 앰플리파이드 바이블) 동쪽은 서쪽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어떤 의미에서, 동쪽은 언제나 서쪽에서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먼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지점에 있습니다. 한 학자는, 이 표현이 “가능한 한 가장 먼 거리,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거리”를 의미한다고 지적합니다. 다윗의 영감받은 말은, 여호와께서 용서하실 때는 우리의 죄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치워 버리신다는 점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16.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경우, 그 이후로는 그분이 우리를 깨끗한 사람으로 보신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6 옅은 색깔의 옷에서 얼룩을 없애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도, 얼룩은 여전히 눈에 보이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용서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묘사하시는지 유의해 보십시오. “너희의 죄가 진홍색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심홍색 천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될 것이다.” (이사야 1:18) “진홍색”이란 말은 짙은 빨간색을 가리킵니다. * “심홍색”은 염색한 물건이 띠고 있는 짙은 색깔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죄의 얼룩을 없앨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진홍색이나 심홍색과 같은 죄들을 가져다가 눈이나 염색하지 않은 양털과 같이 하얗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경우, 여생을 그러한 죄의 얼룩을 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여호와께서는 어떤 의미로 우리의 죄를 그분의 등 뒤로 던지십니까?
이사야 38:17) 여기에서 여호와는 회개한 범죄자의 죄를 가져다가 그것을 자신의 뒤로, 즉 자신이 다시는 쳐다보거나 유의할 수 없는 곳으로 던져 버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위의 말이 전달하는 사상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죄를] 있지도 않은 일처럼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안이 되는 말이 아닙니까?
17 히스기야가 치사적인 병에서 목숨을 건진 뒤 지은 감동적인 감사의 노래에서 그는 여호와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저의 모든 죄를 당신의 등 뒤로 던지셨습니다.” (18. 예언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용서하실 때 우리의 죄를 영구적으로 없애 버리신다는 점을 어떻게 알려 줍니까?
18 회복 약속에서 예언자 미가는 여호와께서 회개하는 백성을 용서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당신과 같은 하느님이 누구이겠습니까? 당신은 그 상속 재산의 남은 자의 ··· 범법에 대하여 눈감아 주시는 분입니다. ··· 당신은 그들의 모든 죄를 바다 깊은 곳에 던지실 것입니다.” (미가 7:18, 19) 이 말이 성서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의미했던 바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다 깊은 곳에” 던져진 것을 되찾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미가의 말은, 여호와께서는 용서하실 때 우리의 죄를 영구적으로 없애 버리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의 부드러운 동정심”
19, 20. (ㄱ) “자비를 보이다” 혹은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ㄴ)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동정심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 어머니가 아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사용합니까?
19 여호와의 사랑의 또 한 가지 부면은 동정심입니다. 동정심이란 무엇입니까? 성서에서 동정심은 자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동정심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그리스어 단어는 여러 개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동사 라함을 고려해 보십시오. 이 단어는 많은 경우 “자비를 보이다” 혹은 “불쌍히 여기다”로 번역됩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시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태”라는 단어와 관련이 있으며, “어머니의 동정심”이라고 묘사할 수 있습니다.
20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동정심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 어머니가 아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을 사용합니다. 이사야 49:15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여자가 자기 젖먹이 아기를 잊고 자기 태에서 난 아들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라함] 않을 수 있겠느냐? 비록 이 여자들은 잊을 수 있어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앰플리파이드 바이블) 어머니가 젖먹이에게 젖을 주고 아기를 돌보는 일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젖먹이는 무력한 존재이며, 밤낮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기를 소홀히 한 어머니에 관한 보고가 적지 않은데, 특히 이 “위급한 때”에 그러합니다. (디모데 둘째 3:1, 3) “[그래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여호와께서는 단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의 종들에 대해 가지고 계신 부드러운 동정심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본연의 감정—어머니가 젖먹이에 대해 정상적으로 느끼는 동정심—보다도 헤아릴 수 없이 더 강력합니다.
21, 22. 고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일을 겪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21 사랑 많은 부모와도 같은 여호와께서는 동정심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이 특성은 고대 이스라엘을 대하신 방식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기원전 16세기 말엽에,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심한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탈출 1:11, 14) 고난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동정심을 가지신 하느님께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22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의 괴로움을 ··· 보았고, ···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나는 그들이 겪는 고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탈출 3:7)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시거나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는 감정 이입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감정 이입—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낄 줄 아는 것—은 동정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단지 자신의 백성이 느끼는 것처럼 느끼는 것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행동까지 하셨습니다. 이사야 63:9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사랑과 동정심으로 그분이 그들을 도로 사[셨다].” 여호와께서는 “강한 손”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셨습니다. (신명 4:34) 그 후에도 그분은 그들에게 기적으로 식품을 공급해 주셨고, 그들을 구출하셔서 비옥한 그들 자신의 땅으로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23. (ㄱ) 시편 필자의 말은 어떻게 여호와께서 우리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줍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까?
23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동정심을 나타내시면서 하나의 집단으로만 상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많으신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 개개인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겪고 있을지 모르는 어떠한 고통에 대해서도 그분은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시편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로운 사람들을 향하고, 그분의 귀는 도와 달라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향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꺾인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영이 억눌린 자들을 구원하신다.” (시 34:15, 18)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의 고통의 원인을 제거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도와 달라고 그분에게 부르짖는 사람들을 위해 풍부한 마련을 해 놓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인 성서는 실효를 거둘 수 있는 실용적인 조언을 베풀어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회중에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감독자들을 마련해 주시는데, 그들은 그분의 동정심을 반영하여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합니다. (야고보 5:14, 15) 여호와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청하는 사람들에게 ··· 성령을” 주십니다. (시 65:2; 누가 11:13) 이 모든 마련들은 “우리 하느님의 부드러운 동정심”의 표현입니다.—누가 1:78.
24. 당신은 여호와의 사랑에 어떻게 호응할 것입니까?
24 하늘의 우리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숙고해 보니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지 않습니까? 앞 기사에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랑에 넘친 방식으로 그분의 능력과 공의와 지혜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는 여호와께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우리 개개인에 대한 사랑을 놀라운 방식으로 손수 표현해 오셨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는 ‘나는 과연 여호와의 사랑에 호응할 것인가?’ 하고 자문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당신도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 그 사랑에 호응하기를 바랍니다. (마가 12:29, 30)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당신의 생활 방식을 통해 당신이 진심으로 여호와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하느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더욱더 가까이 오셔서 영원무궁토록 가까이 계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야고보 4:8.
[각주]
^ 16항 한 학자에 의하면 진홍색은 “결코 바래지 않는 색, 혹은 불변의 색이었다. 이슬이 내리고 비가 내려도, 세탁을 해도, 오랫동안 사용해도, 그 색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기억하십니까?
● 사랑이 여호와의 지배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 여호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고 죽게 하신 것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랑의 행동을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는 우리 개개인을 사랑한다는 것을 어떻게 우리에게 보증해 주십니까?
● 성서에서는 여호와의 용서를 어떤 생생한 방식으로 묘사합니까?
[연구 질문]
[15면 삽화]
“하느님께서는 ···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16, 17면 삽화]
“여러분은 많은 참새들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사진 자료 제공]
© J. Heidecker/VIREO
[18면 삽화]
아기에 대한 어머니의 감정은 여호와의 동정심에 대해 가르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