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바로 가기

차례 바로 가기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신다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신다

체험담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신다

에넬레시 음장가

때는 1972년이었습니다. 말라위 청년 연맹 단원들인 젊은 남자 10명이 우리 집에 들이닥치더니 나를 붙잡아 인근의 사탕수수 밭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나를 구타하더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나를 버려둔 채 떠났습니다.

말라위에 있는 수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와 같은 악의적인 공격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그들을 인내하도록 도와주었습니까?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1921년 12월 31일에 한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중앙 아프리카 장로교회의 목사였습니다. 나는 말라위의 수도인 릴롱궤 근처의 작은 마을인 은코마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열다섯 살에 엠마스 음장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역시 목사였던, 아버지의 한 친구가 우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과 관련되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증인들은 악귀가 들렸으며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악귀가 들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고에 어찌나 겁을 먹었던지 다른 마을로 이사하였고 남편은 그곳에서 상점 점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공교롭게도 새로 이사 간 집 근처에도 역시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성서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마음이 움직인 남편은, 증인인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답을 얻은 남편은 성서 연구를 해 보자는 그 증인의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일하던 상점에서 성서 연구를 했지만 나중에는 우리 집에서 주간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매번 여호와의 증인들이 올 때마다 나는 집을 떠나 있었는데, 증인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편은 계속 성서 연구를 하였습니다.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인, 1951년 4월에 남편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의 결혼 생활이 끝나게 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어려웠던 몇 주간

하루는 나의 친구인 엘렌 카드잘레로가 내 남편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나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날부터 남편과 말도 하지 않았고 식사도 차려 주지 않았습니다. 물을 길어와 남편을 위해 목욕물을 데워 주는 일도 중단하였는데, 그러한 일은 관습적으로 아내가 해야 할 일로 여겨졌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3주 동안 그러한 대접을 묵묵히 견딘 남편은, 같이 앉아서 이야기 좀 하자고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증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 주었습니다. 고린도 첫째 9:16을 비롯한 여러 성구들을 읽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깊이 감동되었으며 나 역시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저녁에 남편에게 맛있는 식사를 차려 주었는데, 사랑 많은 남편은 무척이나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리를 전함

부모는 우리가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우리를 심하게 반대하였습니다. 가족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 더 이상 자기들을 찾아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족의 반응은 우리를 슬프게 했지만, 우리는 영적 형제와 자매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많이 갖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약속을 신뢰하였습니다.—마태 19:29.

나는 성서 연구를 통해 신속히 발전하였고 남편이 침례를 받은 지 불과 3개월 반 만인 1951년 8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내 친구인 엘렌에게 진리를 꼭 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쁘게도 그는 성서 연구를 하자는 내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1952년 5월에 엘렌은 침례를 받았고 내 영적 자매가 되었는데, 그로 인해 우리의 우정의 유대가 강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가장 절친한 친구입니다.

남편이 1954년에 회중들을 방문하는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이미 여섯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가족이 있는 여행하는 감독자는 한 주는 회중을 방문하면서 보내고 그다음 한 주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자신이 여행하는 동안에는 언제나 내가 가족 성서 연구를 사회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녀들과의 연구가 즐거운 것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와와 그분의 말씀에 들어 있는 진리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관해 진심에서 우러나온 확신을 가지고 말하였으며 우리는 가족이 함께 전파 활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훈련 프로그램은 자녀들의 믿음을 강화시켜 주었으며 곧 직면하게 될 박해에 대비해 자녀들을 준비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종교적 박해가 시작되다

1964년에 말라위는 독립 국가가 되었습니다. 집권당의 관리들이 우리의 정치적 중립 입장에 대해 알게 되자 그들은 강제로 당원증을 사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 남편과 내가 그렇게 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청년 연맹 단원들은 우리의 옥수수 밭을 못쓰게 만들어 버렸는데, 그 밭은 이듬해에 우리가 먹을 식량의 주요 공급원이었습니다. 청년 연맹 단원들은 옥수수를 베어 내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카무주[반다 대통령]의 카드를 사길 거절하는 모든 자들의 푸른 옥수수 밭은 흰개미 밥이 될 거라네. 그들은 그걸 보고 눈물을 흘리게 되리라.” 하지만 그처럼 식량이 없어졌는데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돌보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사랑에 찬 방법으로 우리를 강화시켜 주셨습니다.—빌립보 4:12, 13.

1964년 8월 어느 늦은 밤, 집에는 아이들과 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었던 굴레왐쿨루 즉 부족 무용가들로 이루어진 한 비밀 결사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였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공격하고서는 자신들을 죽은 조상들의 영으로 가장하였습니다. 청년 연맹이 굴레왐쿨루를 보내 우리를 공격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재빨리 아이들을 깨워서 공격자들이 집에 다다르기 전에 숲 속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숨어 있던 곳에서 보니, 밝은 불빛이 눈에 띄었습니다. 굴레왐쿨루가 풀을 엮어서 지붕을 만든 우리 집에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우리 집은 모든 소유물과 함께 완전히 타 버렸습니다. 다 타 버려서 잔해만 남아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우리 집을 떠나며 공격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그 증인 작자가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멋진 불을 피워 주었구먼 그래.” 우리는 안전하게 도망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여호와께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우리의 모든 재산을 파괴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를 신뢰하겠다는 우리의 결심까지 파괴하지는 못했습니다.—시 118:8.

굴레왐쿨루가 우리 외에도 우리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다섯 가족에게 그와 같은 악랄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근 회중 형제들이 도움을 주려고 왔을 때 우리는 매우 기뻤으며 그들에게 깊이 감사하였습니다! 그 형제들은 우리 집을 개축해 주었으며 몇 주일간 먹을 음식도 공급해 주었습니다.

박해가 거세지다

1967년 9월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모두 잡아들이려는 대대적인 운동이 전국에서 일제히 벌어졌습니다. 무자비하고 약탈을 일삼는 젊은이들인 청년 연맹과 말라위 청년 개척단 단원들이 우리를 찾기 위해 커다란 벌채용 칼로 무장한 채 집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들은 증인들을 발견하면 당원증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에 도착하자 당원증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당원증을 사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당원증을 사지 않을 겁니다.” 그러자 그들은 남편과 나를 붙잡더니 아무것도 가지고 갈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우리를 지방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어린 자녀들은 우리가 집에 없자 몹시 걱정을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나이가 더 많은 아들 다니엘이 얼마 후 집으로 돌아왔고, 한 이웃 사람을 통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 다니엘은 동생들을 데리고 경찰서로 향했습니다. 경찰이 우리를 릴롱궤로 데려가기 위해 트럭에 태우고 있는데 때마침 아이들이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들도 함께 갈 수 있었습니다.

릴롱궤에 있는 경찰 본부에서는 엉터리 재판이 열렸습니다. 경찰관들이 “당신들은 계속 여호와의 증인 종교를 믿을 겁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는데, 그러한 대답이 자동적으로 7년 간의 투옥형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도 그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조직을 “관리한” 사람들은 1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우리는 먹지도 쉬지도 못한 채 하룻밤을 보낸 뒤, 경찰에 의해 마울라 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감방에 어찌나 사람들이 많던지 바닥에는 심지어 잠을 잘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화장실이라고는 사람들로 붐비는 각 감방에 놓아 둔 양동이 하나가 고작이었습니다. 배급되는 음식은 양이 적었고 질도 좋지 않았습니다. 2주가 지나자 교도관들은 우리가 평화로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옥외에 있는 교도소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많은 증인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날마다 서로를 격려하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훌륭한 증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는 말라위 정부가 국제적인 압력을 받는 바람에 형기 중 약 3개월을 복역한 후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경찰관들은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지만, 말라위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었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금지령은 1967년 10월 20일부터 1993년 8월 12일까지 거의 26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힘든 시기이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엄정 중립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짐승처럼 쫓기다

1972년 10월에 정부가 내린 한 포고령이 계기가 되어 격렬한 박해의 물결이 새롭게 일었습니다. 그 포고령은 모든 여호와의 증인을 직장에서 해고시키고 마을에 살고 있는 증인들을 모두 집에서 내쫓을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증인들은 짐승처럼 쫓겨 다녔습니다.

그 무렵 한 젊은 그리스도인 형제가 남편에게 전할 긴급한 소식을 가지고 우리 집으로 와서는 ‘청년 연맹이 남편의 목을 벤 뒤, 머리를 장대에 매달아 이 지역 추장들에게 갖다 줄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우리가 가능한 한 빨리 따라갈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한 뒤, 신속하게 집을 떠났습니다. 나는 서둘러서 아이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청년 연맹 단원 10명이 남편을 찾으려고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에 난입했지만 남편이 어디론가 가고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그 남자들은 나를 인근에 있는 사탕수수 밭으로 끌고 가서 발로 차고 사탕수수 줄기로 구타하였습니다. 그러더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나를 버려둔 채 떠났습니다. 나는 의식을 되찾은 후, 기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 남편은 나를 찾으러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어둠을 틈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심하게 구타당한 나를 발견한 남편은 차를 가지고 있는 한 친구와 함께 나를 부드럽게 차에 태웠습니다. 그러고는 릴롱궤에 있는 한 형제의 집으로 갔습니다. 나는 그곳에 있으면서 구타로 인해 입은 부상에서 서서히 회복되었고 남편은 이 나라에서 도피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곳 없는 난민들

우리 딸 디네시와 사위에게는 5톤 트럭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때 말라위 청년 개척단 단원이었지만 우리의 처지에 동정심을 느끼게 된 한 운전사를 고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원해서 우리를 비롯하여 여러 증인들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그 운전사는 몸을 숨기기로 미리 약속한 여러 장소에서 며칠 저녁에 걸쳐 증인들을 트럭에 태웠습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말라위 청년 개척단 제복을 입고는 증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을 몰고서 경찰이 세워 놓은 여러 방책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는 여러 위험을 감수하면서 많은 증인들이 국경을 넘어 잠비아로 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몇 개월 후에 잠비아 당국이 우리를 말라위로 송환시켰지만, 우리는 고향 마을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남겨두고 온 모든 소유물을 도난당한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지붕으로 덮어 놓은 금속 판까지 떼어 갔습니다. 안전하게 있을 곳을 찾을 수 없었던 우리는 모잠비크로 도피하여 음랑게니 난민 수용소에서 2년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모잠비크에 들어선 새 정부는 1975년 6월에 수용소를 폐쇄하고 우리를 말라위로 강제 송환시켰는데, 여호와의 백성에게 있어서 말라위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다시 잠비아로 도피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잠비아의 치구무키레 난민 수용소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후, 호송 행렬을 이룬 버스와 군 트럭들이 주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섰고 중무장한 많은 잠비아 군인들이 수용소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살 멋진 집들이 지어졌으며 그곳까지 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교통편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트럭과 버스에 밀어넣기 시작했고 그러자 공포심이 엄습해 왔습니다. 군인들이 허공에다 자동 화기를 발포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형제 자매들은 깜짝 놀라 흩어졌습니다.

그런 혼란한 중에 남편이 실수로 넘어져 사람들의 발 밑에 깔렸지만 한 형제가 남편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큰 환난의 시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난민들이 말라위 쪽을 향해 뛰었습니다. 아직 잠비아에 있었을 때 우리는 한 강에 당도했고, 형제들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강을 건너가도록 돕기 위해 손에 손을 맞잡아 여러 개의 인간 사슬을 형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강 건너편에 이르자 잠비아 군인들이 우리를 모아 말라위로 강제 송환시켰습니다.

또다시 말라위로 돌아온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대규모 정치 집회와 신문을 통해 마을에 도착하는 “새로운 얼굴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새로운 얼굴들”이란 여호와의 증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로 가기로 결정했는데, 수도로 가면 마을에 있을 때만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셋집을 하나 얻을 수 있었고, 남편은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회중들을 비밀리에 방문하는 일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회중 집회 참석

우리가 충실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회중 집회였습니다! 우리는 모잠비크와 잠비아의 난민 수용소에 있을 때 풀로 지붕을 엮은 수수한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자유롭게 참석하였습니다. 말라위에서 집회를 위해 모이는 것은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언제나 그만한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발각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보통 외떨어진 곳에서 밤늦게 집회를 가졌습니다. 모임 때문에 주의를 끄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우리는 박수가 아니라 간단히 양손을 비비는 방법으로 연사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였습니다.

침례는 밤늦게 행해졌습니다. 우리 아들 아비유디도 그러한 상황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침례 연설이 있은 후, 아들을 비롯한 침례 지원자들은 어둠 속에서 얕은 구멍을 파 놓은 한 늪지대로 인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침례를 받았습니다.

안전한 보관소 역할을 한 우리의 작은 집

릴롱궤에 있는 우리 집은 정부 금지령 기간의 후반기에 안전한 보관소로 이용되었습니다. 잠비아 지부 사무실에서 보낸 우편물과 서적은 비밀리에 우리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배달원으로 봉사한 형제들은 잠비아에서 온 발송품을 가지러 우리 집으로 왔으며 우편물과 서적을 말라위 전역으로 운송하였습니다. 당시에 배부된 「파수대」지는 두께가 얇았는데, 성서 인쇄용 종이에 인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덕분에 배달원으로 봉사한 형제들은 일반 종이에 인쇄했을 경우보다 두 배나 많은 잡지를 운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들은 또한 연구 기사만 들어 있는 소형 「파수대」지도 배부하였습니다. 종이 한 장으로 되어 있었던 소형 잡지는 셔츠 주머니 속에 쉽게 숨길 수 있었습니다.

배달원으로 봉사한 형제들은 때때로 어두운 밤에 금지된 서적이 든 상자를 자전거에 높이 쌓아 올린 채 자유와 생명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 자전거로 숲 속을 다녔습니다. 그들은 경찰이 세워 놓은 방책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위험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에게 영적 양식을 전해 주기 위해 궂은 날씨도 마다하지 않고 엄청난 거리를 여행하였습니다. 소중한 존재였던 그 형제들은 참으로 용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과부들을 돌보신다

1992년 12월, 남편은 순회 방문 주간에 연설을 하던 중 뇌졸중을 일으켰습니다. 남편은 그 후로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또 한 차례 뇌졸중이 일어나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건강을 상실한 상태에 대처한다는 것이 남편에게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우리가 회중으로부터 받은 사랑에 찬 지원은 내가 절망감을 떨쳐 버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나는 남편이 76세의 나이로 1994년 11월에 사망할 때까지 집에서 남편을 돌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57년간 결혼 생활을 하였으며 남편은 사망하기 전에 금지령이 해제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충실한 동반자를 잃은 것을 슬퍼합니다.

내가 과부가 된 후, 사위는 아내와 다섯 자녀뿐만 아니라 나까지 부양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슬프게도 사위는 얼마 동안 병을 앓더니 2000년 8월에 사망하였습니다. 어떻게 내 딸이 우리를 위해 숙식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까? 다시 한 번 나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돌보시며 참으로 “아버지 없는 소년들의 아버지, 과부들의 재판관”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 68:5) 여호와께서는 지상에 있는 그분의 종들을 통해 아름다운 새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집은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었습니까? 우리 회중의 형제 자매들이 우리가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는 단지 5주 만에 우리를 위해 집을 지어 주었던 것입니다! 벽돌공으로 일하는 다른 회중 형제들이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이 증인들 모두가 보여 준 사랑과 친절에 우리는 깊이 감동하였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지어 준 집은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도 더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중에서 나타낸 이러한 사랑은 이웃 사람들에게 훌륭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내가 마치 낙원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새 집이 벽돌과 모르타르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표현대로 그 집은 참으로 사랑으로 지어진 집입니다.—갈라디아 6:10.

여호와의 변함없는 돌봄

때때로 깊은 절망에 빠질 뻔하기도 하였지만, 여호와께서는 나를 선대해 주셨습니다. 아홉 자녀 중 일곱이 여전히 생존해 있으며, 현재 내 가족은 123명에 이릅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매우 감사합니다!

현재 82세인 나는 하느님의 영이 말라위에서 어떤 일을 이루어 왔는지를 볼 때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지난 4년 동안에만도 왕국회관이 1개에서 600개가 넘는 수로 증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현재 릴롱궤에는 새로운 지부 사무실이 있으며 우리는 우리를 강화시켜 주는 영적 양식을 제한 없이 즐기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는 이사야 54:17에 있는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를 경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성구는 “너를 치려고 만들어지는 무기는 무엇이든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증합니다. 여호와를 50년이 넘게 섬기고 난 지금, 그 어떤 시련에 직면한다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을 나는 확신합니다.

[각주]

^ 17항 말라위의 여호와의 증인 역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한 「1999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49-223면 참조.

[24면 삽화]

남편 엠마스는 1951년 4월에 침례를 받았다

[26면 삽화]

배달원으로 봉사한 용감한 형제들

[28면 삽화]

사랑으로 지어지고 있는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