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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확신을 두라

여호와께 확신을 두라

여호와께 확신을 두라

“오 주권자인 주 여호와여, 당신은 나의 희망이시요, 어린 시절부터 나의 확신이[십니다].”—시 71:5.

1. 목동 다윗은 어떤 도전에 맞섰습니까?

키가 거의 3미터나 되는 남자가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투 대열의 병사들이 하나같이 그 사람과 맞서기를 두려워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주에 걸쳐 매일 아침저녁으로 블레셋의 그 거인 골리앗은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면서 자기와 겨룰 대표 투사를 내보내라고 도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도전에 응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는 병사가 아니라 나이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목동 다윗은 그 적수에 비해 정말 왜소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의 몸무게는 골리앗의 갑옷과 무기 무게 정도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년은 그 거인과 맞섰으며, 영원한 용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사무엘 첫째 17:1-51.

2, 3. (ㄱ) 다윗이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골리앗과 맞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우리는 여호와께 확신을 두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어떤 두 가지 일을 검토할 것입니까?

2 다윗이 그런 용기를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훗날 필시 다윗이 기록하였을 글을 읽어 보면 이러합니다. “오 주권자인 주 여호와여, 당신은 나의 희망이시요, 어린 시절부터 나의 확신이[십니다].” (시 71:5) 그렇습니다. 다윗은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를 전적으로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골리앗에 맞서 나가면서 “너는 칼과 장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에게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 곧 네가 조롱하는 이스라엘의 전투 대열의 하느님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무엘 첫째 17:45) 골리앗은 자신의 막강한 힘과 무기에 확신을 두었지만, 다윗은 여호와께 확신을 두었습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크고 우수한 무기를 갖추었더라도, 우주의 주권자이신 주께서 자기 편에 계신데, 다윗이 일개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3 다윗에 관해 읽다 보면 여호와에 대한 우리의 확신도 더 강해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확신을 두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두 가지를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우선,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런 확신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을 극복하고 그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이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워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께 확신을 두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을 극복함

4, 5.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확신을 두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확신을 두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매우 많은 경우, 사람들은 도대체 나쁜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느님이 고난을 가져오신다고 가르침을 받습니다.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면 교직자들은 하느님이 희생자를 하느님의 곁에 두려고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말하곤 합니다. 게다가, 하느님이 온갖 비극적인 일과 악한 일 등,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오래 전에 예정해 놓으셨다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도 많습니다. 그토록 무정한 하느님에게 확신을 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을 눈멀게 하는 사탄은 그 모든 “악귀들의 가르침”을 퍼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디모데 첫째 4:1; 고린도 둘째 4:4.

5 사탄은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하느님의 적은 우리가 인류에게 고난이 일어나는 참된 이유를 모르기를 바랍니다. 또 사탄은 고난이 일어나는 성경적인 이유를 배워 알게 된 사람도 그 이유를 망각하게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고난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 세 가지를 때때로 다시 숙고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살면서 부딪치는 난관들이 여호와께서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다시 새길 수 있게 됩니다.—빌립보 1:9, 10.

6. 베드로 첫째 5:8에서는 인간이 고난을 겪는 한 가지 이유를 어떻게 알려 줍니까?

6 사람에게 고난이 일어나는 한 가지 이유는 사탄이 여호와의 충실한 백성의 충절을 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욥의 충절을 꺾으려 하였습니다. 욥의 경우에 사탄은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인 그는 여호와의 충실한 종들을 “삼키려고” 애씁니다. (베드로 첫째 5:8) 바로 여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관련됩니다! 사탄은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중단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흔히 박해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고난이 고통스럽기는 해도 인내해야 할 훌륭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사탄이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고 그렇게 하여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욥 2:4; 잠언 27:11)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박해를 인내할 힘을 주심에 따라, 그분에 대한 우리의 확신도 강해지게 됩니다.—시 9:9, 10.

7. 갈라디아 6:7은 고난을 겪게 되는 어떤 이유를 깨닫게 해 줍니까?

7 고난을 겪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사람은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둘 것”이라는 원칙에 나와 있습니다. (갈라디아 6:7)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 따라 잘못된 것을 뿌린 결과로 상당한 고난을 거두어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서 난폭 운전을 하다가 그만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자기가 좋아서 흡연을 하다가 결국 심장병이나 폐암에 걸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부도덕한 성행위에 빠져드는 사람들은 가정 파탄, 자중심 상실, 성 매개 질환, 원치 않는 임신 등으로 고난을 겪을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고난에 대해 하느님을 원망하려 들지 모르지만, 그들은 사실상 자기 자신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해를 입는 것입니다.—잠언 19:3.

8. 전도서 9:11에 의하면 사람들이 고난을 겪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8 고난을 겪게 되는 세 번째 이유는 전도서 9:11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자들이라고 경주에 이기는 것도 아니고 용사들이라고 전투에 이기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지혜로운 자들이라고 양식을 얻는 것도 아니고, 이해력 있는 자들이라고 부를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이 있는 자들이라고 호의를 얻는 것도 아니다. 때와 예기치 못한 일이 그들 모두에게 닥치기 때문이다.” 때때로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은 단순히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힘이 센 사람과 약한 사람 누구에게나 고난과 죽음은 어느 때고 예기치 못한 때에 닥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의 한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그 전에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처벌하신 것이 아니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누가 13:4)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런 고난을 일으키신 것이 아닙니다.

9. 많은 사람은 고난과 관련하여 무엇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9 고난을 겪게 되는 이유들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한 가지 부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느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10, 11. (ㄱ) 로마 8:19-22에 의하면, “모든 창조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ㄴ) 창조물을 허무한 것에 복종시킨 이가 누구인지를 어떻게 판정할 수 있습니까?

10 이 중요한 논제가 사도 바울이 로마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에 밝혀져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창조물의 간절한 기대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창조물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기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복종시키신 분에 의한 것이며, 희망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 희망은 창조물 자신도 부패의 종 상태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이 지금까지 계속 함께 신음하며 함께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로마 8:19-22.

11 이 구절들의 요점을 이해하려면 먼저 몇 가지 주요 질문을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창조물을 허무한 것에 복종시키는 이는 누구입니까? 사탄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담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둘은 누구도 그처럼 복종시키는 이일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창조물을 허무한 것에 복종시키는 이는 “희망에 근거”하여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충실한 사람들이 결국은 ‘부패의 종 상태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아담도 사탄도 그런 희망을 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만 그렇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물을 허무한 것에 복종시키신 분은 여호와이심이 분명합니다.

12. “모든 창조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어떻게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12 그렇지만, 이 구절에서 “모든 창조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입니까? “모든 창조물”이란 동식물을 포함하여 자연계 전체를 가리킨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이나 식물에게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릴 희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베드로 둘째 2:12) 그러므로 “모든 창조물”이란 인류를 가리키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창조물이야말로 에덴에서 일어난 반역 때문에 죄와 죽음의 영향을 받게 되어 희망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로마 5:12.

13. 에덴에서 일어난 반역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13 그 반역이 인류에게 안겨 준 결과는 정확하게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허무한 것이라는 한마디의 말로 그 결과를 묘사합니다. * 한 참조 문헌에 따르면, 이 말은 “설계된 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물건의 쓸모없음”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살도록 설계되어 있었고, 완전하고 연합된 한 가족으로서 협력하여 지상 낙원을 돌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잠깐밖에 살지 못하면서 고통스럽고 흔히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욥이 묘사하였듯이,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이 짧고 소란만 가득합니다.” (욥 14:1) 실로 허무합니다!

14, 15. (ㄱ) 여호와께서 인류에게 내리신 선고가 공의로운 것임을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ㄴ) 창조물이 허무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기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고 바울이 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이제 본래 질문을 고려해 봅시다. “온 땅의 ‘심판관’”께서 인류를 이토록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 삶에 복종시키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세 18:25)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공정한 일이었습니까? 우리의 첫 조상이 어떤 일을 한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하느님께 반역을 한 것은 여호와의 주권에 대대적인 도전을 제기한 사탄의 편을 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여호와 없이 반역한 영적 피조물의 인도를 받으며 스스로를 다스리면 더 잘될 것이라는 주장을 행동으로 지지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반역자들에게 선고를 내리시면서 사실상 그들이 요청한 것을 주신 셈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사탄의 영향력 아래 스스로를 다스려 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인류를 희망에 근거하여 허무한 것에 굴복시키는 것보다 더 완벽하게 공정한 결정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15 물론 이것은 창조물 ‘자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 없이 죄와 부패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살면서 후손을 낳도록 허락하심으로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죄와 죽음의 허무함에 굴복하기는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말씀에 귀 기울일 기회가 있고, 여호와를 도외시한 인간의 다스림은 고통과 절망과 허무함을 초래할 뿐이지만 여호와의 주권은 의롭고 이상적인 것이라는 점을 배워 알 기회가 있습니다. (예레미야 10:23; 계시 4:11) 그리고 우리는 사탄의 영향력이 문제를 가중시킬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역사가 이러한 사실들을 확증해 줍니다.—전도 8:9.

16. (ㄱ)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난이 여호와께서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여호와께서는 충실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어 무슨 희망을 주셨습니까?

16 확실히 여호와께서 인류를 허무한 것에 복종시키신 데에는 공정한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을 괴롭히는 허무함과 고난이 여호와 때문입니까? 이 점을 재판관이 범죄자에게 공정한 선고를 내리는 것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수형자가 형을 살면서 상당한 고난을 겪겠지만, 그가 그 재판관 때문에 자신이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는 결코 악의 근원이 아니십니다. 야고보 1:13에서는 “하느님은 악한 일로 시련을 받으실 수도 없고 또한 그분 자신이 아무에게도 시련을 주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 선고를 “희망에 근거”하여 내리셨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아담과 하와의 충실한 후손들이 허무한 것이 끝나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 가운데 기뻐하도록 만들어 줄 사랑의 마련을 하셨습니다. 영원무궁토록, 충실한 인류는 모든 창조물이 고통스러운 허무한 상태로 재차 낮추어지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할 필요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태를 공정하게 처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주권의 정당성은 영원토록 확립될 것입니다.—이사야 25:8.

17. 오늘날 세상에서 고난이 일어나는 이유들을 검토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17 사람이 고난을 겪는 데는 그런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검토해 볼 때, 악에 대해 여호와를 비난하거나 그분에 대한 확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타당합니까? 오히려 그 점을 연구해 보면 모세의 이러한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반석, 그분의 활동은 완전하다, 그분의 모든 길은 공의이므로. 충실한 하느님, 그분에게는 불공정이 없으시고, 그분은 의롭고 올바르시다.” (신명 32:4)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점들을 묵상함으로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흐려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시련을 겪을 때에도 우리의 정신에 의심을 심으려는 사탄의 노력을 물리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서두에서 말한 두 가지 중 나머지 것은 어떠합니까?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

18, 19. 성서에서는 어떠한 말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격려하며, 그와 관련하여 어떤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18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강력하게 권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너 자신의 이해에 의존하지 말아라. 너의 모든 길에서 그분을 유의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잠언 3:5, 6) 참으로 아름답고 확신을 주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온 우주에, 우리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보다 더 신뢰할 만한 이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잠언의 그 말씀대로 실행하는 것은 그 말씀을 읽는 것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우러나오는 느낌, 일종의 더없이 행복한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느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모든 난관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매일의 도전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풀려 나가게 그것도 즉시 그렇게 되게 해 주실 것으로 기대해도 된다는 의미라고 믿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신뢰한다는 것은 단순한 느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관련되어 있으며, 비현실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에게 있어서 신뢰한다는 것에는 면밀히 생각하여 자기 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관련됩니다.

20, 21.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예를 들어 설명하십시오.

20 잠언 3:5에 나오는 말씀에 다시 유의하십시오. 거기에서는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이해에 의존하는 것을 대조함으로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이해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신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섬기면서 그 능력을 사용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로마 12:1) 그러나 우리는 무엇에 의존하고 즉 의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여호와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분의 지혜를 올바로 인식하여, 다시 말해 우리의 지혜보다 무한히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받아들입니까? (이사야 55:8, 9)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그분의 생각이 인도하는 대로 우리의 생각을 순응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1 예를 들어 어린 자녀가 자동차의 뒷좌석에 앉아 있고 아이의 부모는 앞 좌석에 앉아 있다고 합시다. 아이의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을 하다가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거나 날씨나 도로 사정과 관련된 문제 등의 난관에 부딪칠 때, 순종적이고 신뢰심이 있는 자녀라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아이가 뒷좌석에 앉아 큰 소리로 방향을 외치면서 자기 아버지에게 차를 어떻게 운전할 것인지 지시할 것입니까? 부모의 결정을 의문시하거나 부모가 안전벨트를 채우고 얌전히 있으라고 일깨워 주는 것을 거부할 것입니까?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아이는 부모가 불완전하더라도 그런 문제들을 올바로 처리할 것으로 신뢰합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여호와는 완전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특히 도전이 되는 상황이 닥칠 때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이사야 30:21.

22, 23. (ㄱ) 문제들이 닥칠 때 왜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해야 하며,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ㄴ)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무엇을 논할 것입니까?

22 그러나 잠언 3:6에서는 난관이 닥쳤을 때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길에서 여호와를 유의’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생활 중에 결정을 내릴 때마다 우리가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이 나타나야 합니다. 문제들이 생길 때에는 절망하거나 겁에 질리지 말아야 하고,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지에 관한 여호와의 인도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을, 여호와의 주권을 옹호하고 사탄이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하는 것에 기여할 기회로, 여호와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순종과 같은 특성들을 길러 나갈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히브리 5:7, 8.

23 우리는 어떤 장애물들이 앞길을 불안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과 그분의 조직의 인도에 의지하는 방식을 통해서 그 점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닥칠 때 우리는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그 점을 고려할 것입니다.

[각주]

^ 13항 바울이 “허무한 것”이라는 말에 사용한 그리스어 단어는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표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한 표현을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번역하는 데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단어이다.—전도 1:2, 14; 2:11, 17; 3:19; 12:8.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 다윗은 여호와께 확신을 두었다는 것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 오늘날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치는 세 가지 이유는 무엇이며, 때때로 그것을 검토해 보는 것이 좋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 여호와께서는 인류에게 어떤 선고를 내리셨으며, 그것이 공정한 선고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여호와를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합니까?

[연구 질문]

[8면 삽화]

다윗은 여호와께 확신을 두었다

[10면 삽화]

예수께서 알려 주셨듯이, 예루살렘의 한 망대가 무너진 것은 여호와께서 일으키신 일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