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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았다

체험담

어린 시절부터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았다

리처드 에이브러햄슨

“오 하느님, 당신은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나를 가르치셨고, 지금까지 나는 당신의 놀라운 일들에 관하여 알리고 있습니다.” 시편 71:17의 이 말씀이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의 어머니, 패니 에이브러햄슨은 1924년에 성경 연구생 곧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습니다. 그때 나는 겨우 한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성서 진리를 배우게 되자 이웃 사람들에게 가서 배운 것들을 알려 주곤 하였으며, 나와 형, 누나에게도 역시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글을 배우기 전에도 어머니는 내가 하느님의 왕국의 축복에 관한 성구들을 많이 암기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내 고향 미국 오리건 주, 라그랜드의 성경 연구생 집단은 몇 명 안 되는 여자들과 아이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격지 집단이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순례자라고 부르던 여행하는 봉사자가 일 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였습니다. 순례자들은 격려적인 연설을 했고, 우리를 데리고 호별 봉사에 참여했으며, 어린이들에게 친절한 관심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소중한 사람들 중에는 실드 투트지언, 진 오렐, 존 부스가 있었습니다.

1931년에 성경 연구생들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 열린 대회에 우리 집단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회에 대표자가 참석하지 못했던 부회(회중을 가리켜 당시에 부른 명칭)와 격지 집단 역시 그 이름을 받아들이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하기 위하여 그해 8월에 지방적인 모임을 가졌습니다. 라그랜드에 있는 우리의 작은 집단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1933년의 「위기」(The Crisis) 소책자 배부 활동을 할 때 나는 성서 제공 연설을 외워서 처음으로 혼자 호별 방문 증거를 하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우리의 활동에 대한 박해가 점차 거세졌습니다. 그에 대처하기 위해 부회는 분단(分團)이라고 부른 그룹들로 조직되어 작은 대회들을 열었고 일 년에 한두 차례 분단 운동이라고 하는 전파 활동을 벌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회들에서 전파하는 방법과 방해하는 경찰들에게 존중심을 가지고 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증인들은 즉결 재판소나 법정에 종종 불려갔기 때문에, 우리는 ‘재판 절차’라는 지침의 내용을 연습하곤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대에 대처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게 해 주었습니다.

소년기에 성서 진리 안에서 자라다

나는 성서 진리와 하느님의 하늘 왕국 아래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성서에 근거한 희망에 대한 인식이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다스릴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침례받는 것에 대해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계시 5:10; 14:1, 3) 하지만 만일 여호와의 뜻을 행하기로 마음에 결정하였다면 침례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1933년 8월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 선생님은 내가 공개 연설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가외의 훈련을 시키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이 훈련이 여호와를 더 잘 섬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 년 동안 연설 강사의 빨래를 해 주는 것으로 수업료를 지불했습니다. 그 훈련은 내가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 유용하였습니다. 나는 열네 살 때 류머티즘열에 걸려서 한 해 동안 학교를 쉬어야 했습니다.

1939년에는 전 시간 봉사자인 워런 헨첼이 우리 지역에 왔습니다. * 영적으로 말해서 그는 형과 같았으며 나를 야외 봉사에 데리고 나가서 여러 시간 함께 봉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곧 내가 얼마 동안만 전 시간 봉사를 하는 임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그해 여름에 우리 집단은 부회로 조직되었습니다. 워런은 부회의 종으로, 나는 「파수대」 연구 사회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워런이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본부인 베델에서 봉사하기 위해 떠나고 나서는 내가 부회의 종이 되었습니다.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함

부회의 종으로 섬기면서 책임이 커지자 정규 전 시간 봉사를 시작하려는 나의 열망이 더욱 강하게 되었고,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마친 다음 17세의 나이로 그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우리와 같은 종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족을 잘 부양하고 높은 원칙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숙식 문제를 아버지에게 돌봐 달라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1940년 9월 1일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나에게 잠언 3:5, 6의 이러한 말씀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너 자신의 이해에 의존하지 말아라. 너의 모든 길에서 그분을 유의하여라. 그러면 그분이 너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나의 삶을 항상 여호와의 손에 맡긴 것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워싱턴 주 중북부 지역에서 봉사를 하던 조 하트와 마거릿 하트 부부와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구역은 다양했습니다. 소 목장, 양 목장, 인디언 보호 구역이 있었고, 조그만 읍들과 마을들도 있었습니다. 1941년 봄에는 워싱턴 주 워내치에 있는 회중의 부회의 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워싱턴 주 월라월라에서 열린 대회들 중 하나에서 나는 강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환영하는 안내인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확성 장치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꽤 애를 먹고 있는 한 젊은 형제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맡은 일을 서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지방의 종인 앨버트 호프먼 형제가 돌아와서 내가 맡은 임무에서 떠나 있는 것을 보고는, 나에게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임무에 고착하는 일의 가치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나는 그의 조언을 잊지 않았습니다.

1941년 8월에 여호와의 증인은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큰 대회를 계획하였습니다. 하트 부부는 픽업 트럭의 뒤 칸에 덮개를 씌우고 의자를 설치했습니다. 우리 파이오니아 아홉 명은 그 트럭을 타고 세인트루이스까지 2400킬로미터를 여행하였습니다. 그 여행은 가고 오는 데 대략 일주일씩 걸렸습니다. 경찰은 대회 최고 참석자 수를 11만 5000명으로 추산하였습니다. 아마도 참석자는 그보다 적었을 테지만, 당시에 미국 전역에 있는 약 6만 5000명의 증인들보다는 확실히 많았습니다. 실로 그 대회는 영적으로 세워 주는 것이었습니다.

브루클린 베델에서의 봉사

워내치에 돌아온 후에, 나는 브루클린 베델에 와서 봉사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1941년 10월 27일에 베델에 도착하자마자 공장 감독자였던 네이선 H. 노어 형제의 사무실로 안내받아 갔습니다. 그는 친절하게 베델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었고, 또한 베델 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여호와께 밀접히 고착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발송부로 가서 발송할 출판물 상자를 묶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1942년 1월 8일, 전 세계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인도하던 조셉 러더퍼드가 사망하였습니다. 닷새 후 협회의 이사들은 후임자로 노어 형제를 선출하였습니다. 협회에서 오랫동안 총무 겸 재무 이사로 봉사한 W. E. 밴 앰버그는 이 사실을 베델 가족에게 알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1916년에] C. T. 러셀이 사망하고 J. F. 러더퍼드가 그의 후임이 된 때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 인도하시고 번영케 하셨습니다. 이제 그 일이 협회장 네이선 H. 노어를 통해 계속 진척될 것임을 온전히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1942년 2월에는 “신권 전도 상급 과정”이 시작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델 형제들이 성서 논제에 대해 조사하고 자료를 적절하게 정리하여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 받았던 공개 연설 훈련의 도움으로 이 과정에서 빠르게 진보할 수 있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나는 봉사부에 임명되었는데, 그곳에서는 미국 증인들의 봉사의 직무를 감독하는 일을 합니다. 그해 후반에는 증인들의 부회를 방문하는 봉사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다시 시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형제들의 종이라고 불리던 이 여행하는 봉사자들은 순회 감독자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942년 여름에 이러한 봉사를 수행할 형제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과정이 베델에 마련되었는데, 나는 그 훈련을 받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강사 중 한 사람이었던 노어 형제가 우리에게 강조한 이러한 점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결국 아무도 기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1942년 10월에 여행하는 봉사가 시행되었습니다. 베델에 있던 우리 중 일부는 특정 주말에 그 봉사에 참여하여, 뉴욕 시에서 400킬로미터 이내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우리는 회중의 전파 활동과 집회 참석을 검토하고 회중에서 책임을 맡은 형제들과 모임을 갖고, 한두 차례 연설을 하고, 지방의 증인들과 함께 봉사를 하였습니다.

1944년에는 봉사부에서 일하던 형제들을 육개월간의 여행하는 봉사에 내보냈는데,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델라웨어, 메릴랜드, 버지니아, 펜실베이니아 주들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몇 달 동안 나는 로드아일랜드, 매사추세츠, 코네티컷 주들에 있는 회중들도 방문하였습니다. 베델로 돌아오자 노어 형제와 그의 비서인 밀턴 헨첼 형제의 사무실에서 비상근(非常勤)으로 일하였는데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전 세계적인 활동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W. E. 밴 앰버그와 그의 보조자인 그랜트 수터의 감독 아래 재무 사무실에서도 비상근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1946년에 나는 베델에 있는 여러 사무실들을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큰 변화들

1945년에 회중들을 섬기던 중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서 줄리아 차르노스커스를 알게 되었습니다. 1947년 중반 즈음에 우리는 결혼을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베델 봉사를 매우 좋아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결혼 배우자를 베델에서 봉사하도록 데리고 오는 마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1948년 1월에 나는 베델을 떠나 줄리아(줄리)와 결혼하였습니다. 나는 프로비던스에 있는 한 슈퍼마켓에서 시간제 직장을 구했고, 우리는 함께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1949년 9월에 위스콘신 주 북서부에서 순회 활동을 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대부분이 작은 읍과 시골로 된 낙농 지역에서 전파하는 일은 아내와 나에게 커다란 변화였습니다. 겨울은 길고 추웠는데 여러 주에 걸쳐 기온이 섭씨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지고 눈이 많이 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차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항상 우리를 다음 회중으로 태워다 주었습니다.

순회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순회 대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모든 일이 잘 돌보아지고 있는지 보려고 철저하게 확인하던 일을 기억하는데,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다소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지역 감독자였던 니콜러스 코벌랙은 지방 형제들은 그들 방식대로 일을 돌보는 일에 익숙해 있으며, 내가 그 정도까지 일들을 관리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 조언은 그 이후로 많은 임무를 다루는 데 내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1950년에는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많은 큰 대회들 중 첫 번째 대회에 참석할 대표자들을 위해 숙박 시설을 마련하는 일을 감독하도록 임시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 대회는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감동을 주었는데, 대표자들은 67개 나라에서 왔고 최고 참석자 수는 12만 3707명에 달하였습니다! 대회가 끝난 후에 아내와 나는 여행하는 봉사를 계속 하였습니다. 우리는 순회 활동을 하면서 매우 행복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무슨 전 시간 봉사든 맡을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베델 봉사와 선교 봉사를 위한 신청서를 매년 제출하였습니다. 1952년에 우리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제20기 학급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고 참으로 기뻤으며 그 학교에서 선교 봉사를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해외에서의 봉사

1953년에 졸업을 하고 난 후 우리는 영국으로 임명되었는데, 나는 잉글랜드 남부에서 지역 봉사를 수행하였습니다. 아내와 나는 매우 즐겁게 이 봉사를 수행하였기 때문에 활동을 시작하고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덴마크로 가라는 임지 변경 통지를 받고는 놀랐습니다. 덴마크에서는 지부 사무실을 감독할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내가 그곳에서 가까운 데 있었고 또 브루클린에서 그러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도움을 베풀도록 파견된 것입니다. 배편으로 네덜란드로 가서 거기서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우리는 1954년 8월 9일에 도착하였습니다.

처리해야 했던 한 가지 문제는 책임 있는 위치에 있던 형제들 중 일부가 브루클린 본부로부터 오는 지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출판물을 덴마크어로 번역하던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베델을 떠났으며 결국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기를 중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비상근 번역자로 일하던 두 명의 파이오니아 외르겐 라르센과 안나 라르센 부부가 상근 번역자로 일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잡지를 한 호도 빠짐없이 덴마크어로 계속 번역할 수 있었습니다. 라르센 부부는 지금도 덴마크 베델에서 섬기고 있으며 외르겐은 지부 위원회의 조정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 초창기에 노어 형제의 정기적인 방문은 진정한 격려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시간을 내어 앉아서 이야기하고,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통찰력을 갖게 해 주는 경험담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1955년에 방문했을 때에는 인쇄 시설을 갖춘 새로운 지부를 건축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리하여 덴마크에서 사용할 잡지를 우리 스스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코펜하겐 북쪽의 근교에 대지를 매입하였고 1957년 여름에는 새로 건축한 건물로 이사를 마쳤습니다. 그때쯤 해리 존슨이 그의 아내 캐린과 함께 길르앗 제26기 학급을 졸업한 후 덴마크에 도착하였으며, 인쇄 시설을 설치하고 가동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우리는 덴마크에서 큰 대회를 열 수 있도록 조직을 개선하였으며, 내가 미국에서 대회 일을 하며 얻은 경험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1961년에 코펜하겐에서 대규모 국제 대회가 열렸고 30개 이상의 나라에서 온 대표자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최고 참석자 수는 3만 3513명이었습니다. 1969년에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열린 모든 대회들 가운데 가장 컸던 대회를 개최하였고 최고 참석자 수는 4만 2073명이었습니다!

1963년에 나는 길르앗 제38기 학급에 참석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학급은 열 달로 조정된 과정으로서 특히 지부 요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브루클린 베델 가족들과 다시 함께 생활하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며, 다년간 본부 운영을 해 온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것 역시 즐거웠습니다.

이 훈련 과정을 마치고 덴마크로 돌아가 그곳에서 계속 책임 맡은 일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에 더해 나는 서유럽과 북유럽의 지부들을 방문하면서 지부 요원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책임 이행을 돕는 지구 감독자로 섬기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최근에는 이 일을 서아프리카와 카리브 해 지역에서 하였습니다.

1970년대 후반에 덴마크의 형제들은 번역과 인쇄 업무의 증가로 말미암아 더 큰 시설을 건축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코펜하겐 서쪽으로 6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좋은 대지가 있었습니다. 다른 형제들과 함께 나는 이 새로운 시설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며, 아내와 나는 베델 가족과 함께 이 훌륭한 새 집에서 살게 될 때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브루클린으로 돌아오다

1980년 11월에 아내와 나는 브루클린 베델에서 봉사하라는 초대를 받았고, 1981년 1월 초에 브루클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50대 후반이었고 덴마크의 사랑하는 우리 형제 자매들과 함께 봉사하면서 우리의 반생애를 보낸 후라 미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있고 싶은 곳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았고, 현재 맡은 임무와 그 임무로 인해 생기는 도전이 무엇이든 그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우리는 브루클린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았습니다. 아내는 회계 사무실에 배치되어 덴마크에서 했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집필부에 임명되어 우리 출판물의 출판 과정을 계획하는 일을 도왔습니다. 1980년대 초는 타자기를 사용하거나 납을 녹여 식자하던 일을 컴퓨터 조판과 오프셋 인쇄로 대치하던 때였기 때문에 브루클린에서 하는 업무 운영상의 변화의 시기였습니다. 나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지만 조직상의 절차와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총천연색 오프셋 인쇄를 시작하고 컬러 삽화와 사진을 사용함에 따라 미술부의 조직을 강화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조직하는 일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9년 동안 이 부서를 감독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1992년에는 통치체의 출판 위원회를 보조하는 임무를 받았으며, 그 후 재무 사무실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현재 여호와의 증인의 재무와 관련된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해 온 봉사

어린 시절부터 그리고 70년간의 헌신한 봉사자로 사는 동안,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말씀인 성서와 그분의 놀라운 조직에 속해 있는 유능한 형제들을 사용하셔서 나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63년이 넘게 전 시간 봉사를 즐겨 왔으며, 그중 55년을 나의 충성스러운 아내 줄리와 함께 보냈습니다. 진실로 나는 여호와께 풍부한 축복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1940년에 내가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아버지는 내 결정에 대해 비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그 일을 하려고 집을 떠나면 도움을 얻으려고 나에게 달려올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지난 세월 동안 나는 결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관대하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으며, 종종 도움을 주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후에 아버지는 우리의 활동을 존중해 주었으며 1972년에 사망하기 전에는 성서 진리를 배우는 일에서 얼마의 발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늘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는 1985년에 10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해서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문제가 생길 때도 있었지만, 아내와 나는 맡은 임무에서 떠나는 일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우리의 결심대로 행하도록 항상 우리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나이가 들고 도움이 필요했을 때에도 누나인 빅토리아 마린이 나서서 친절하게 부모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누나의 사랑에 찬 도움에 깊이 감사하며 그 때문에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우리가 맡은 모든 임무 가운데 나를 충성스럽게 지원하였으며, 그렇게 하는 것을 여호와에 대한 개인적 헌신의 일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여든 살이 되었고 약간의 건강 문제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여호와께 풍부한 축복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나는 시편 필자로부터 큰 격려를 받는데,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어린 시절부터 가르치셨다고 선언한 후에 이렇게 간청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노년이 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시고, 장차 오는 이에게 당신의 위력에 관하여 알리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시 71:17, 18.

[각주]

^ 12항 워런 헨첼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 여러 해 동안 봉사한 밀턴 헨첼 형제의 형이다.

[20면 삽화]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한 1940년에 어머니와 함께

[21면 삽화]

동료 파이오니아인 조 하트와 마거릿 하트와 함께

[23면 삽화]

결혼식 날, 1948년 1월

[23면 삽화]

길르앗 동기들과 함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돈 워드와 버지니아 워드, 게르트루이다 스테겡가, 아내, 나, 1953년

[23면 삽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프레더릭 W. 프랜즈와 네이선 H. 노어와 함께, 1961년

[25면 삽화]

우리 부부의 현재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