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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만족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경건한 만족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체험담

경건한 만족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벤저민 이케추쿠 오수에케

나는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에 온전히 참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부모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보더니 내 셔츠를 움켜쥐면서 “도둑놈!” 하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단검을 집어 들고는 평평한 면으로 나를 때렸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훔쳐 갔다는 것입니까?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1930년에 나이지리아 남동부에 있는 우무아리암이라는 마을에서 7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첫째 여동생은 열세 살에 사망하였습니다. 부모는 성공회 신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농부였고 어머니는 소규모 상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장터까지 걸어간 다음, 깡통에 들은 야자유를 사서 그날 늦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일찍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기차역이 있는 한 마을로 걸어가 기름을 팔았습니다. 이윤이라고 남아 봐야 대개 미화 15센트(약 180원)가 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그 돈으로 가족이 먹을 식료품을 사서 그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약 15년 동안 그러한 생활을 해 오다가 1950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성공회가 우리 마을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지만, 초등학교를 마치기 위해 집에서 약 3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하숙을 해야 하였습니다. 부모는 내가 계속 교육을 받게 해 줄 만한 돈이 없었고, 그래서 나는 직업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이지리아 서부 라고스의 한 철도 승무원의 집에서, 그 뒤에는 나이지리아 북부 카두나의 한 공무원의 집에서 집사로 일했습니다. 나이지리아 중서부에 있는 베닌시티에서는 변호사의 사무원으로 일했고, 그 후에는 제재소에서 노동자로 일했습니다. 1953년에는 베닌시티를 떠나 한 사촌과 함께 지내기 위해 카메룬으로 갔으며, 사촌의 도움으로 고무 농장에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내 한 달 임금은 미화로 약 9달러(약 1만 원)였습니다. 내가 한 일들은 천한 일들뿐이었지만, 나는 먹을 것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만족하였습니다.

가난뱅이가 부를 나누어 주다

직장 동료인 실바누스 오케미리는 여호와의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고무나무의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 풀을 베어 고무나무 주위를 덮어 주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모든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아는 성서 지식을 나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촌은 내가 증인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단념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사촌은 나에게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벤저민, 오케미리 씨를 만나지 말게. 그 사람은 여호와 종교를 믿는 사람인데다 가난뱅이지. 누구라도 그와 어울리면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말거야.”

1954년 초에 나는 고무 농장의 가혹한 작업 환경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의 성공회는 도덕에 대해 상당히 엄했습니다. 나는 부도덕을 혐오하도록 가르침받으며 자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오래지 않아 동료 교회 신자들 가운데서 볼 수 있는 위선적인 행동에 넌더리가 났습니다. 그들은 성서의 표준을 따르고 있다고 강력히 공언했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은 그러한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마태 15:8) 나는 아버지와 논쟁을 거듭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심한 긴장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 나는 무작정 집을 나왔습니다.

나는 철도역이 위치한 작은 마을인 오모바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또다시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프리실라 이시오차는 나에게 「“이 천국의 기쁜 소식”」 소책자와 「아마겟돈 후—하느님의 신세계」(After Armageddon—God’s New World) 소책자를 주었습니다. * 나는 그 책들에 푹 빠졌으며,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성서를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는 인간의 전통에 집중하였습니다. 하지만 증인들의 서적은 성서를 자유롭게 인용하였습니다.

나는 한 달이 채 안 되어 이시오차 형제 부부에게 언제 교회에 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의 집회에 처음 참석했을 때는 듣는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다루고 있던 「파수대」 기사는 예언서인 에스겔에 언급되어 있는 ‘마곡’의 공격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38:1, 2) 많은 용어들이 생소하긴 했지만, 따뜻한 환영에 깊은 감명을 받아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가기로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집회에 참석하였을 때에는 전파 활동에 관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프리실라에게 언제 전파하러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세 번째 일요일에는 조그만 성서를 들고 그 부부와 함께 전파하러 나갔습니다. 전파할 때 사용할 가방은 물론 성서 출판물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왕국 전도인이 되었고 그달 말에 야외 봉사 보고를 냈습니다!

아무도 나와 성서 연구를 한 적은 없지만, 이시오차 부부를 찾아갈 때마다 믿음을 강화해 주고 격려가 되는 성경 말씀을 조금씩 배웠고 일부 성서 출판물도 얻었습니다. 1954년 12월 11일에 아바에서 열린 지역 대회에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습니다. 나와 함께 살며 견습생 일을 시켜 주었던 또 다른 한 사촌은 나에게 음식을 주거나 훈련을 시켜 주는 일을 중단하였으며,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수를 한 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조금도 앙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하느님과의 그러한 관계는 나에게 위로와 정신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지방 증인들이 나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이시오차 부부는 나에게 음식을 주었고, 내가 소규모 장사를 시작해 보도록 돈을 빌려 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955년 중반에는 중고 자전거를 샀고 1956년 3월에는 정규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있어 빚을 갚았습니다. 장사를 해서 버는 돈이 매우 적긴 했지만 이제는 스스로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신 것은 내게 충분하였습니다.

동생들을 “훔쳐” 가다

자립을 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일은 동생들을 영적으로 돕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편견과 깊은 불신감으로 인해 내가 증인이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동생들이 성서 진리를 배우도록 도울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남동생 어니스트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제의했고, 그러자 아버지는 동생이 나와 함께 지내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어니스트는 신속히 진리를 받아들여 1956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동생의 그러한 변화로 아버지의 반대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결혼한 여동생 역시 남편과 함께 진리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둘째 여동생 펄리시아가 방학을 나와 함께 보내도록 계획하자 아버지는 마지못해 동의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펄리시아 역시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1959년에는 셋째 여동생인 버니스를 데려다 어니스트와 함께 머물게 하려고 집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을 훔쳐 간다고 비난하며, 나를 공격한 것은 바로 이때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여호와를 섬기기로 한 것이 그들의 개인적인 결정임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버니스가 결코 나와 함께 가도록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손은 짧지 않았는데, 버니스가 바로 그 이듬해에 어니스트와 방학을 함께 보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언니들과 마찬가지로 버니스도 진리를 받아들였고 침례를 받았습니다.

‘비결을 배움’

1957년 9월에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기 시작하였으며 매달 약 150시간을 전파 활동에 바쳤습니다. 내 짝인 선데이 이로그벨라치와 나는 에체의 아크푸-나-오부오 시에 있는 광대한 구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처음 참석한 순회 대회에서 우리 집단에 속한 13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 지역에 20개의 회중이 있는 것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1958년에 아바 동부 회중과 연합하고 있던 정규 파이오니아인 크리스티아나 아주이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열심에 감탄하였으며 그해 12월에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1959년 초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어 우리의 영적 형제들로 이루어진 회중들을 방문하여 강화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때부터 1972년까지 우리 부부는 나이지리아 동부와 중서부에 있는 여호와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거의 모든 회중을 방문하였습니다.

회중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우리가 주로 사용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습니다. 큰 도시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했을 때에는 형제들이 택시를 불러 다음 회중까지 갈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진흙으로 된 바닥에 천장이 없는 방에 묵기도 하였습니다. 라피아야자로 만든 침대에서 자기도 하였습니다. 풀로 된 매트리스 위에 깔개를 덮은 침대도 있었고 아예 매트리스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음식의 양이나 질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적은 필수품으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어떤 음식을 주든지 잘 먹었으며 집주인은 그 점에 대해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도시들도 있어서 항상 석유등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회중들과 함께 많은 즐거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 시절에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권고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입니다.” (디모데 첫째 6:8) 바울은 역경을 겪으면서도 만족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는 실로 부족하게 지내는 법을 알며, 실로 풍부하게 지내는 법도 압니다. 모든 일에서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배부르게 지내는 법과 배고프게 지내는 법, 풍부하게 지내는 법과 궁핍을 견디는 법에 관한 비결을 배웠습니다.” 우리도 동일한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또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분[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내게는 모든 일을 할 힘이 있습니다.” (빌립보 4:12, 13) 우리의 경우에도 그 말은 실로 참되었습니다! 우리는 만족감을 얻고, 세워 주는 그리스도인 활동들로 꽉 찬 생활을 하며, 정신의 평화를 경험하는 축복을 누렸습니다.

가족이 함께 회중들을 섬김

1959년 말에 큰아들 조얼이 태어났으며 1962년에는 둘째 아들 새뮤얼이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여행하는 활동을 계속했는데,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며 회중들을 방문하였습니다. 1967년에는 나이지리아에 내전이 일어났습니다. 쉴 새 없는 공습으로 인해 학교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아내는 나와 함께 여행하는 활동을 하기 전에 교사로 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전 중에 아내는 우리 아이들을 집에서 가르쳤습니다. 새뮤얼은 여섯 살 무렵에는 읽고 쓸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전이 끝나고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동배들에 비해 두 학년이나 앞서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여행하는 활동을 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에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도록 임명된 것은 우리에게 유익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한곳에 머무르면서 가족의 영성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아들들에게 경건한 만족의 가치를 가르쳤습니다. 1973년에 새뮤얼은 침례를 받았고 같은 해에 조얼은 정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두 아들 모두 훌륭한 그리스도인 여자와 결혼하여 현재 진리 안에서 자신의 가족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내전의 비참함

내전이 일어났을 때 나는 가족을 동반한 채 순회 감독자로 오니차에 있는 한 회중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내전은 물질을 축적하거나 신뢰하는 것이 헛된 일임을 한층 더 깊이 마음에 새기도록 해 주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던 소유물들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전이 확대됨에 따라 모든 장정이 징집되었습니다. 입대를 거부한 많은 형제들이 고문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식량난으로 나라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카사바 500그램의 가격이 미화 7센트(약 80원)에서 14달러(약 1만 6000원)로, 소금 한 컵의 가격이 미화 8달러(약 1만 원)에서 42달러(약 5만 원)로 올랐습니다. 우유와 버터와 설탕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덜 익은 파파야를 갈아 약간의 카사바 가루와 섞어 먹었습니다. 또한 메뚜기, 카사바 껍질, 히비스커스 잎, 부들 등을 비롯해서 발견할 수 있는 잎사귀란 잎사귀는 모두 먹었습니다. 육류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도마뱀을 잡아 아이들이 먹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상황이 얼마나 나빠지든 간에 언제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훨씬 더 위험했던 것은 내전으로 인한 영적 결핍 상태였습니다. 대부분의 형제들이 전쟁 지역을 피해 밀림이나 다른 마을들로 도망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성서 출판물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에 더해 정부군의 봉쇄로 인해 비아프라 지역으로 새로운 성서 출판물이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회중이 집회를 열기 위해 노력하기는 했지만, 지부 사무실로부터의 지침이 그들에게 전달될 수 없었기 때문에 형제들의 영성이 나빠졌습니다.

영적인 굶주림과 싸움

여행하는 감독자들은 각 회중을 방문하는 마련을 계속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많은 형제들이 살던 곳을 떠났기 때문에 나는 그들이 있을 법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형제들을 찾아보았습니다. 한번은 아내와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에 남겨 두고, 혼자 6주 동안 여러 마을과 밀림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형제들을 찾아본 적도 있습니다.

오그분카 시에 있는 회중을 방문하고 있던 중에 오키그웨 지역의 이수오치 시 근방에 증인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지역에 있는 형제들에게 우무아쿠 마을에 있는 캐슈 농장에 모여 달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한 연로한 형제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농장까지 약 15킬로미터를 갔는데, 그곳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약 200명의 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나는 한 파이오니아 자매의 도움을 받아, 로마라 숲으로 피신한 약 100명의 또 다른 증인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로렌스 우그우에그부는 전쟁으로 황폐된 도시인 오웨리에 살고 있던 일단의 용감한 형제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하지 근방에 증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가 없었는데, 군인들이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두 사람은 야음을 틈타 자전거를 타고 그곳으로 가서 울타리가 쳐진 한 형제의 소유지 안에서 약 120명의 증인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일부 다른 증인들의 은신처도 방문하였습니다.

아이작 은와구 형제는 살던 곳을 떠난 다른 형제들을 찾도록 나를 도와주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썼습니다. 그는 나를 카누에 태우고 오타미리 강을 건너 내가 에그부-엣체 마을에 모인 150명이 넘는 증인들과 만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던 한 형제는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입니다! 살아서 순회 감독자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제 전쟁이 한창인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습니다.”

나는 징집될 위험에 놓여 있었지만 여호와께서 보호하고 계심을 재삼재사 느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약 250명의 형제들과 모임을 갖고 나서 머물고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일단의 의용군이 도로에 설치된 방책에서 나를 멈춰 세웠습니다. “당신은 왜 군에 입대하지 않았지?” 그들이 물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전파하는 선교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체포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리 없이 잠깐 기도한 후에 그들의 지휘관에게 “저를 놓아주시기 바랍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우리가 당신을 놓아주어야 한단 말이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놓아주십시오.”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가도 좋소” 하고 말했습니다. 군인들 중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시 65:1, 2.

만족은 많은 축복을 가져온다

1970년에 내전이 끝난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순회 활동을 하였습니다. 회중들의 재조직을 돕는 일은 큰 특권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 부부는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였으며, 그러던 중 1976년에 나는 또다시 순회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해 중반 무렵에는 지역 활동을 하도록 임명되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뒤에 우리 부부는 여호와의 증인의 나이지리아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도록 초대되었으며, 현재 이곳에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곳 지부에 있으면서 내전 중이나 그 외의 다른 시기에 만난 형제 자매들이 여전히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여러 해에 걸쳐 아내는 나를 훌륭하게 지원하여 주었으며 충성스러운 동반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1978년 이래로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는 건강 문제를 인내하면서도 아내가 나타내 온 긍정적이고도 결연한 태도는, 내가 계속해서 책임을 수행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시편 필자의 말이 참됨을 경험해 왔습니다. “여호와께서 병상에서 그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시 41:3.

신권 활동을 하면서 보낸 세월을 돌아보노라면, 여호와께서 해 주신 놀라운 축복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분이 마련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함으로 커다란 행복을 누려 왔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부부를 비롯해서 내 동생들과 자녀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모두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을 보는 기쁨은 그 어떤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풍성하고 의미 있는 삶으로 나를 만족시켜 주셨습니다. 내가 열망한 것 중에 충족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각주]

^ 10항 여호와의 증인이 발행함. 지금은 절판됨.

[27면 네모]

형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 시기적절한 마련

1960년대 중반에 나이지리아 북부와 동부에 있는 종족들 간의 적개심으로 인해 소란과 반란 그리고 무법과 종족 간의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한 사태 변화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초래하였지만, 증인들은 그러한 분쟁 가운데서도 엄정 중립을 유지하기로 결심하였다. 약 20명의 증인들이 살해당하였으며 대부분의 증인들이 소유물을 전부 잃었다.

1967년 5월 30일에 나이지리아 동부에 있는 주들이 연방에서 탈퇴하여 비아프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연방군이 동원되었고 동부 지역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력적인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비아프라 지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중립 입장 때문에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신문들은 신랄한 논평을 실어 증인들에 대한 반대 여론을 자극하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종들이 영적 양식을 틀림없이 받을 수 있게 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는가?

1968년 초에 공무원 한 사람은 유럽에 있는 한 근무처에서 그리고 또 다른 한 공무원은 비아프라 활주로에서 일하도록 발령을 받았다. 두 사람은 모두 증인이었다. 그들은 업무상 비아프라와 바깥 세상을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의 양쪽 끝에 있게 되었다. 이 두 증인은 자원해서 영적 양식을 비아프라로 반입하는 위험한 임무를 맡았다. 그들은 또한 곤경에 처한 우리 형제들에게 구호물자를 공급하는 일도 도왔다. 이 두 형제는 꼭 필요했던 그러한 마련이 1970년에 끝난 내전 기간 내내 계속되게 할 수 있었다. 그중 한 형제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그 마련은 사람이 계획할 수 있는 일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23면 삽화]

1956년의 나

[25면 삽화]

아들들인 조얼과 새뮤얼과 함께, 1965년

[26면 삽화]

가족이 함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다!

[27면 삽화]

현재 우리 부부는 나이지리아 지부에서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