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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삶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삶

체험담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지만 만족스러운 삶

오드리 하이드

63년이 넘게 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그중 59년을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보낸 생애를 뒤돌아볼 때, 나의 삶은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첫 번째 남편이 암으로 서서히 죽어 가고, 두 번째 남편도 알츠하이머병의 끔찍한 영향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행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내가 어떻게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네브래스카 주의 경계에서 가까운 콜로라도 북동부의 평원에 있는 핵스턴이라는 작은 읍 근처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나는 아버지 오릴 모크와 어머니 니나 모크의 여섯 자녀 가운데 다섯째였습니다. 1913년부터 1920년 사이에 러셀, 웨인, 클라라, 아디스가 태어났고 나는 1921년에 태어났습니다. 커티스는 1925년에 태어났습니다.

1913년에 어머니는 성경 연구생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성경 연구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시간이 흘러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성경 연구생이 되었습니다.

유익했던 평원 생활

아버지는 매우 진보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농장에 있는 건물들에는 모두 전등이 달려 있었는데, 당시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전통적으로 농장에서 나는 것들을 먹었습니다. 우리 농장의 닭이 낳은 달걀, 우리 농장의 소에서 짠 우유, 크림, 버터가 그러한 것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말을 사용하여 땅을 갈고, 밀과 옥수수뿐만 아니라 딸기와 감자도 재배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아이들 모두가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심지어 학교에 갈 나이가 되기 전에도 밭에서 일하도록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름철에 뜨거운 햇볕 아래서 긴 밭고랑을 매던 때가 기억납니다. ‘고랑 끝까지 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몸에는 땀이 흐르고, 벌이 쏘아 댔습니다. 때때로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우리처럼 그렇게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면 우리가 일을 하도록 배운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맡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디스가 젖 짜는 일을 나보다 더 잘했기 때문에, 나는 마구간을 청소하고 삽으로 말똥을 치우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게임도 즐겼습니다. 아디스와 나는 동네 팀에서 소프트볼 경기를 했습니다. 나는 투수를 하거나 삼루수를 했고 아디스는 일루수를 했습니다.

대평원의 맑은 밤하늘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면 우리의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느님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에도 시편 147:4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 대해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별의 수를 세시고, 그 모두를 그 이름으로 부르시는 분.” 그처럼 맑은 밤에는 흔히 우리 집의 개 ‘저지’가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나와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오후에는 종종 현관에 앉아서 바람이 가로지르는 푸른 밀밭을 감상하곤 하였는데, 밀밭은 햇살을 받아 은빛이 났습니다.

어머니의 훌륭한 모범

어머니는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집안의 가장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경하도록 우리를 가르쳤습니다. 1939년에 아버지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비록 우리에게 열심히 일하게 하고 우리를 애지중지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종종 말 몇 마리를 한데 묶어서 눈썰매를 태워 주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서를 존중하도록 가르쳐 준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며 그분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는 점을 배웠습니다. (시 36:9; 83:18) 또한 우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지침을 베풀어 주시는데 우리의 즐거움을 빼앗으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점도 배웠습니다. (이사야 48:17) 어머니는 우리에게 해야 할 특별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주지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끝이 올 것입니다.”—마태 24:14.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집에 없으면 언제나 나는 어머니를 찾으러 다니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예닐곱 살 때쯤 헛간에서 어머니를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헛간 위층의 건초 두는 곳에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에게 하느님이 또 대홍수를 내리시는 것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하느님께서 다시는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셨다고 말하자 나는 안심이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여러 차례 지하의 대피 장소로 뛰어갔던 기억도 납니다. 토네이도가 발생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전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일단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서 살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집집으로 전파하는 일은 어머니에게 도전이 되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어머니는 1969년 11월 24일에 84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충실을 유지하였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귀에다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하늘에 가서 아는 분들을 만나게 될 거예요.” 그때 어머니 곁에 함께 있으면서 그러한 희망에 대한 나의 확신을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정말 좋은 딸이구나.”

우리가 전파하기 시작하다

1939년에 러셀은 파이오니아가 되었는데,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복음 전파자들을 파이오니아라고 부릅니다. 러셀은 1944년까지 오클라호마와 네브래스카에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다가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베델이라고도 함)에서 봉사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나는 1941년 9월 20일에 파이오니아를 시작하였고 콜로라도, 캔자스, 네브래스카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시절은 정말 행복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여호와에 관해 배우도록 도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여호와께 의지하는 법도 배웠기 때문입니다.

러셀이 파이오니아를 시작할 무렵에, 웨인은 얼마 동안 다니던 세속 직장을 그만두고 동부 연안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는 베델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웨인은 뉴욕의 이서카 근처에 있는 왕국 농장에서 얼마 동안 봉사하였습니다. 그 농장에서는 농사를 지어 소규모의 농장 식구들뿐 아니라 브루클린 베델에 있는 약 200명의 베델 성원을 위하여 식품을 공급하였습니다. 웨인은 1988년에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 사용하였습니다.

언니인 아디스는 제임스 컨과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 다섯 자녀를 두었습니다. 언니는 1997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다른 언니인 클라라는 지금까지도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고 있으며, 나는 지금도 휴가 때면 콜로라도에 있는 그 언니의 집을 찾아갑니다. 막냇동생인 커티스는 40년대 중반에 브루클린 베델에 들어왔습니다. 커티스는 여러 가지 물품과 생산물을 싣고서 왕국 농장을 오가는 트럭을 운전하였습니다. 그는 독신으로 살다가 197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나의 열망—베델 봉사

오빠들이 일찍부터 베델로 갔기 때문에 나 역시도 그곳에서 봉사하려는 열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오빠들의 훌륭한 모범 덕분에 나도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조직의 역사에 관한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그리고 나 자신이 마지막 날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베델에서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 나갔습니다. 나는 여호와께 내가 베델에서 봉사하게 해 주신다면 그리스도인 의무를 돌보아야 하는 경우가 아닌 한 결코 베델을 떠나지 않겠다고 기도로 서약하였습니다.

나는 1945년 6월 20일에 베델에 들어왔고 하우스키퍼로 일하도록 배정되었습니다. 나는 매일 13개의 방을 청소하고 26개의 침대를 정돈해야 하였으며 그 외에도 복도, 계단, 창문을 청소해야 하였습니다. 일은 힘들었습니다. 나는 일하면서 매일 이렇게 되뇌었습니다. ‘그래, 넌 피곤해. 하지만 넌 하느님의 집인 베델에 있는 거야!’

베델 봉사 초기에 매우 당황스러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덤웨이터가 물건을 다른 층으로 운반하는 작은 엘리베이터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일을 하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덤웨이터를 아래로 내려 보내 주시겠습니까?”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었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청소를 담당하던 층에 살고 있는 형제들 가운데 웨이터가 한 명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형제의 방문을 노크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방에서 내려오라고 합니다.”

네이선 노어와 결혼하다

1920년대 이래로 결혼하기를 원하는 베델 성원들은 베델을 떠나 다른 곳에서 왕국 권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 초에는 얼마 동안 베델 봉사를 해 왔던 몇몇 사람이 결혼을 하고 나서도 베델에 머무르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세계적인 왕국 봉사를 인도하고 있던 네이선 H. 노어가 나에게 관심을 보였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이 사람은 베델에 남을 사람이야!’

네이선은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인 활동을 감독하는 일에서 많은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전에 주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여러 가지 이유들에 대해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당시 네이선은 세계 전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들을 방문하기 위해 자주 여행을 하였고 한 번에 몇 주씩 떠나 있었던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네이선은 우리가 상당한 기간을 떨어져 지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소녀 시절에 결혼은 봄에 하고 신혼여행은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의 섬들로 가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겨울인 1953년 1월 31일에 결혼하였고, 신혼여행으로 뉴저지에서 그 주의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을 보냈습니다. 월요일에는 다시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주 후에 우리는 실제로 한 주간의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열심히 하는 동반자

네이선은 1923년에 베델에 들어왔을 때 18세였습니다. 그는 증인의 활동을 인도하고 있던 조셉 F. 러더퍼드나 인쇄 책임자인 로버트 J. 마틴 형제와 같은 오래된 형제들로부터 값진 훈련을 받았습니다. 1932년 9월에 마틴 형제가 사망하였을 때 네이선은 인쇄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에 러더퍼드 형제는 유럽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들을 방문할 때 네이선을 데리고 갔습니다. 1942년 1월에 러더퍼드 형제가 사망하자 네이선은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적인 활동을 감독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매우 진보적이었으며 항상 미래의 성장을 염두에 두고 사전에 계획을 세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물의 제도의 끝이 매우 가까웠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남편의 계획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어 형제, 이것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믿음이 있기나 합니까?” 남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 끝이 빨리 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 특히 강한 확신을 가지고 추진한 한 가지 계획은 선교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943년 2월 1일에, 당시 오빠 웨인이 봉사하고 있던 큰 농장에서 선교인 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이 학교는 약 5개월간의 집중적인 성서 연구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남편은 학생들이 기분 전환을 위한 시간을 얼마간 갖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학급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남편도 함께 소프트볼 경기를 하였지만 후에는 여름 지역 대회 참석에 지장을 줄 수 있는 부상을 입지 않도록 경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남편은 심판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남편이 경기를 하는 외국인 학생들을 편들어 지나칠 정도로까지 규칙을 엉뚱하게 적용할 때 학생들은 재미있어하였습니다.

남편과 함께한 여행

결국 나는 남편과 함께 외국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지부에서 봉사하는 자원 봉사자들과 선교인들과 함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나타낸 사랑과 정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고, 그들의 하루 일과와 임명받은 나라에서의 생활환경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방문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수년에 걸쳐 계속 받았습니다.

우리의 여행을 뒤돌아보면, 많은 경험들이 기억납니다. 예로서,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두 자매가 내 앞에서 서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자매들에게 “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사과하면서, 폴란드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고 그들의 집이 도청을 당하고 있어서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아다흐 자매는 폴란드에서 금지령 아래 봉사한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이 자매는 곱슬머리였는데 앞머리로 이마를 가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아다흐 자매가 앞머리를 들어 올려서, 박해자에게 맞아서 생긴 깊게 파인 상처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형제 자매들이 인내해야 했던 잔혹한 취급의 결과를 직접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베델 다음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하와이입니다. 1957년에 하와이의 힐로 시에서 열린 대회가 기억납니다. 그 대회는 정말 큰 대회였고 대회 참석자 수는 그 지역 증인들의 총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시장은 남편에게 그 도시 방문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시 열쇠를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맞으러 나와서 우리에게 화환을 걸어 주었습니다.

흥분을 자아낸 또 다른 대회는 1955년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대회였는데, 그 대회는 히틀러가 열병장으로 사용하던 곳에서 개최되었습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여호와의 백성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고 맹세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는데, 이제 이 스타디움을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연단은 매우 컸고 아주 인상적인 144개의 거대한 기둥이 연단 뒤편에 서 있었습니다. 나는 연단 위에서 10만 7000명이 넘는 거대한 청중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중석의 뒤편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마지막 줄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독일 형제들의 충절과 나치의 통치 아래서 박해받는 동안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받은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충성을 지키고 여호와에 대한 충절을 유지하고자 하는 우리의 결심을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마지막 연설을 하였고 연설을 마치면서 청중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였습니다. 청중도 잘 가라고 손수건을 흔들며 즉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광경은 마치 아름다운 꽃밭과도 같았습니다.

또한 잊을 수 없는 것은 1974년 12월에 포르투갈을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포르투갈에서 우리의 증거 활동이 합법화된 후에 리스본에서 처음으로 열린 증인들의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증거 활동은 50년 동안이나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에는 당시에 왕국 전도인이 1만 4000명에 불과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열린 모임에 총 4만 6000명이 넘게 참석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우린 이제 더는 숨지 않아도 돼요. 우리는 자유롭습니다”라고 말할 때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여행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비행기나 식당에서 하는 비공식 증거와 가두 증거를 즐깁니다. 나는 언제나 출판물을 가지고 다님으로 증거할 준비를 갖춥니다. 한번은 이륙이 늦어진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자가 나에게 어디서 일하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은 그 여자와의 대화로 이어졌고 주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과도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베델 봉사와 전파 활동은 나를 바쁘고 매우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의 병과 사별에 대비한 격려

1976년에 남편은 암에 걸렸고 나는 베델 가족과 함께 그가 병을 이겨 내도록 도왔습니다. 남편의 건강은 나빠졌지만 우리는 그때 훈련을 받기 위해 브루클린에 와 있던 세계 전역의 지부 사무실에서 봉사하는 여러 성원들을 우리 방에 초대하곤 하였습니다. 돈 스틸과 얼린 스틸, 로이드 배리와 멜바 배리, 더글러스 게스트와 메리 게스트, 마르틴 포에칭거와 게르트루트 포에칭거, 프라이스 휴스 등 많은 사람들이 방을 찾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이 봉사하는 나라의 경험담 얼마를 우리에게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나는 특히 금지령 아래서 우리 형제들이 나타낸 확고함과 관련된 경험담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고는 내가 혼자되어서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유익한 조언 몇 마디를 해 주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행복했소. 많은 사람들은 결코 그런 생활을 하지 못하오.” 우리의 결혼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 한 가지는 남편의 사려 깊음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 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습니다. “여보, 만약 내가 사람들을 당신에게 소개해 주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그 사람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오.” 남편이 미리 이야기를 해 주었기에 나는 기뻤습니다.

남편은 나에게 “죽은 후에 우리의 희망은 확실하오. 우리는 결코 다시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오”라고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남편은 나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앞을 봐요. 그곳에 당신이 받을 상이 있기 때문이오. 과거에 얽매여 살지 말아요. 비록 당신의 기억은 계속 남아 있을지라도 말이오. 시간이 아픔을 낫게 해 줄 것이오. 비탄에 잠겨 있거나 자신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요. 당신이 이러한 기쁨과 축복을 누렸다는 것을 행복하게 여겨요.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이 기쁨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기억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니까.” 남편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바쁘게 지내도록 해요.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는 데 당신의 삶을 사용하려고 노력해요. 그렇게 하면 살아가면서 기쁨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오.” 결국 남편은 1977년 6월 8일에 지상 생애를 마쳤습니다.

글렌 하이드와 결혼하다

남편은 내가 옛일을 기억하며 살 수도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1978년에 뉴욕 월킬에 있는 워치타워 농장으로 옮기고 나서 매우 잘생기고 조용하고 점잖은 사람이었던 글렌 하이드와 결혼하였습니다. 글렌은 증인이 되기 전에, 미국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해군에서 복무하였습니다.

글렌은 PT선(초계 어뢰정)을 탔으며 기관실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엔진 소음 때문에 청력 일부를 잃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소방수가 되었습니다. 전시의 경험 때문에 글렌은 수년 동안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글렌은 비공식 증거를 한 자신의 비서 덕분에 성서 진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1968년에 글렌은 브루클린에서 소방수로 봉사하도록 베델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워치타워 농장에서 자체 소방차를 보유하게 되자 글렌은 1975년에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글렌은 알츠하이머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결혼하고 10년이 지나서 글렌은 사망하였습니다.

나는 어떻게 극복하였습니까? 네이선이 자신의 죽음을 알고 나에게 주었던 지혜의 말은 다시금 나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네이선이 내가 혼자되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적어 준 것들을 계속 읽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배우자와 사별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며, 그러면 그들 역시 네이선의 조언을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네이선이 나에게 하라고 격려한 대로 앞을 보는 것이 유익합니다.

소중한 형제 관계

내가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데 특히 도움을 준 것은 베델 가족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친구들이었습니다. 특히 가까운 한 친구는 에스터 로페즈인데, 에스터는 1944년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 제3기를 졸업하였습니다. 에스터는 1950년 2월에 우리의 성서 출판물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기 위해 브루클린으로 돌아왔습니다. 흔히 네이선이 여행을 떠나 있을 때면, 에스터가 나에게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에스터 역시 지금은 워치타워 농장에 있습니다. 지금은 90대 중반이 되었고 건강이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요양원에서 돌봄을 받고 있습니다.

나의 직계 가족 중에는 러셀과 클라라만이 살아 있습니다. 러셀은 90세가 넘었고 브루클린 베델에서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러셀은 결혼하고 나서도 베델에 남아 있게 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1952년에 러셀은 동료 베델 가족인 진 라슨과 결혼하였습니다. 진의 오빠인 맥스는 1939년에 베델에 와서 1942년에 네이선의 뒤를 이어 인쇄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맥스는 다발성 경화증을 앓고 있는 사랑하는 아내 헬렌을 돌보는 일을 돕는 것을 포함하여 베델에서 많은 책임을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전 시간 봉사를 하며 여호와를 섬긴 63년이 넘는 세월을 뒤돌아볼 때 나의 삶은 진정으로 만족스러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델은 나의 집이 되었고 나는 계속 이곳에서 기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하는 것의 보람을 알려 주고 여호와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준 부모 덕분입니다. 하지만 삶을 진정으로 만족스러운 것이 되게 해 주는 것은 우리의 놀라운 형제 관계 그리고 낙원이 된 땅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의 위대한 창조주, 오직 한 분인 참 하느님 여호와를 영원히 섬기게 되리라는 희망입니다.

[24면 삽화]

나의 부모, 1912년 6월 결혼식 날에

[24면 삽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러셀, 웨인, 클라라, 아디스, 나, 커티스, 1927년

[25면 삽화]

프랜시스 맥노트와 바버라 맥노트 사이에 서서, 1944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던 때

[25면 삽화]

베델에서, 1951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 에스터 로페즈, 올케인 진

[26면 삽화]

네이선과 그의 부모와 함께

[26면 삽화]

네이선과 함께 1955년

[27면 삽화]

네이선과 함께, 하와이에서

[29면 삽화]

두 번째 남편 글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