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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희생함으로 얻게 된 풍요롭고 행복한 삶

기꺼이 희생함으로 얻게 된 풍요롭고 행복한 삶

체험담

기꺼이 희생함으로 얻게 된 풍요롭고 행복한 삶

마리안 주미가와 로자 주미가

시편 54:6에서 시편 필자는 “내가 당신에게 기꺼이 희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은 프랑스에 사는 마리안 주미가와 그의 아내 로자의 인생에서 주된 관심사가 되어 왔습니다. 최근에 그들은 여호와께 봉사를 드리면서 길고 풍요로운 생애를 누리는 중에 있었던 몇몇 인상적인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마리안: 나의 부모는 폴란드에서 이민 온 로마 가톨릭교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겸손한 분이었습니다. 학교에 다닐 기회는 전혀 없었지만, 아버지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참호 속에서 근무하면서 읽고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분이었지만, 교회는 종종 아버지를 실망시켰습니다.

한 사건이 특히 아버지의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전쟁 중에 하루는 군목이 아버지의 부대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서 포탄이 터지자, 공포에 사로잡힌 그 군목은 허둥대며 말에 올라타더니 빨리 달리라고 십자가로 말을 때리며 도망가 버렸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의 “대리인”이 서둘러 도망가려고 “거룩한” 물건을 사용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과 직접 목격한 전쟁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하여 종종 하느님께 영예를 돌렸습니다.

“작은 폴란드”

1911년에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살던 안나 치소브스키라는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9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폴란드에서 프랑스로 이민을 왔고,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광부로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나는 1926년 3월에 프랑스 남서부에 있는 카냑레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후에 부모는 프랑스 북부 랑스 근처의 로상고엘에 있는 폴란드인 공동체에 정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빵집 주인도, 정육점 주인도, 교구 목사도 모두 폴란드 사람이었습니다. 이 지역이 작은 폴란드라고 불린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공동체의 활동에 관여했습니다. 아버지는 종종 공연을 조직했는데, 그러한 공연에는 연극, 음악, 노래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또한 사제와 정기적으로 토론했는데, 사제가 대개 “많은 것이 신비에 싸여 있다”고 대답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1930년의 어느 날, 두 여자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들은 성경 연구생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여호와의 증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서 오랫동안 읽고 싶어 했던 책인 성서를 한 권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또한 그 여자들이 주고 간, 성서에 근거한 출판물들도 열심히 읽었습니다. 부모는 그 출판물들에서 읽은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바쁜 생활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성경 연구생이 마련하는 집회들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제와의 토론은 점점 더 격렬해져 갔으며, 마침내 하루는 사제가 부모에게 만일 성경 연구생과 계속 연합하면 누나인 스테파니가 교리 문답반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수고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부터 내 딸을 비롯한 우리 아이들은 우리와 함께 성경 연구생의 집회에 나갈 거니까요.” 아버지는 교회에서 탈퇴했고, 부모는 1932년 초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에는 왕국 전도인이 약 800명 정도밖에 없었습니다.

로자: 헝가리 출신인 나의 부모도 남편의 가족처럼 광산에서 일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에 정착했습니다. 나는 1925년에 태어났지요. 1937년에, 여호와의 증인인 오귀스트 뵈겡이 부모에게 헝가리어로 된 「파수대」를 가져다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오귀스트 아저씨라고 불렀지요. 부모는 그 잡지들에 흥미를 느꼈지만, 두 분 중 아무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어리긴 했지만 「파수대」에서 읽은 내용에 감명을 받았고, 오귀스트 아저씨의 며느리인 쉬잔 뵈겡은 그런 나를 따뜻이 돌봐 주었습니다. 부모는 쉬잔이 나를 데리고 집회에 가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내가 직업을 갖게 되자, 아버지는 내가 일요일에 집회에 참석하는 것을 언짢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대체적으로 마음씨 좋은 분이었지만,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너는 주 중에도 집에 없으면서 일요일에는 집회까지 가는구나!” 하지만 나는 계속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결국 어느 날 아버지는 “짐을 싸서 나가거라!” 하고 말했습니다. 때는 늦은 저녁이었고, 당시 겨우 열일곱 살이던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결국 나는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쉬잔의 집으로 갔습니다. 내가 일주일 정도 쉬잔의 집에서 지낸 후에, 아버지는 언니를 보내서 나를 집으로 데려오게 하였지요. 나는 천성적으로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요한 첫째 4:18에 담긴 사상은 내가 굳건함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성구에서는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라고 알려 줍니다. 나는 1942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귀중한 영적 유산

마리안: 나는 1942년에 누나들인 스테파니와 멜라니 그리고 형 스테판과 함께 침례를 받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생활은 하느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모두 탁자에 둘러앉으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폴란드어로 성서를 읽어 주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가 왕국 전파 활동을 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영적으로 풍요로웠던 그러한 시간들을 통해 우리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분을 더욱더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건강이 나빠져 어쩔 수 없이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계속해서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우리를 부양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는 가외의 시간이 생겼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회중 청소년들과 폴란드어로 성서 연구를 했습니다. 나는 그 연구를 통해 폴란드어를 읽는 법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다른 방법으로도 청소년들을 격려했습니다. 한번은 그 당시 프랑스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던 귀스타브 조페 형제가 우리 회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는 합창단을 조직하고 고대 의상을 갖춰 입고 연기하는 성서 드라마도 연출했습니다. 그 드라마는 벨사살 왕이 베푼 잔치에서 손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쓴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 5:1-31) 다니엘 역은 루이 삐에쇼따가 맡았는데, 그는 나중에 나치에 대항하여 확고한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 우리는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부모가 항상 영적인 일로 바쁘게 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재 나는 부모가 우리에게 남겨 준 유산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프랑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한번은 우리 마을이 수색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군인들이 모든 집을 포위했습니다. 아버지는 옷장 밑에 이중 바닥을 만들어 두었는데, 우리는 그 속에 여러 가지 성서 출판물들을 숨겨 놓았습니다. 하지만 「파시즘 혹은 자유」(Fascism or Freedom)라는 소책자 몇 부는 부엌에서 쓰는 가구 서랍에 들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재빨리 그 소책자들을 복도에 걸려 있는 겉옷의 주머니 속에 숨겼습니다. 군인 두 명과 프랑스 경찰 한 명이 우리 집을 수색했습니다. 우리는 숨을 죽였습니다. 군인 한 사람이 복도에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수색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책자들을 들고 우리가 있던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우리를 노려보더니 소책자들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계속해서 다른 곳을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 소책자들을 집어서 군인들이 이미 수색을 마친 서랍 속에 넣었습니다. 그 군인은 그 소책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 소책자들에 대해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시간 봉사를 시작하다

1948년에 나는 파이오니아 봉사로 여호와를 전 시간 섬길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바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며칠 뒤에 나는 프랑스의 여호와의 증인 지부 사무실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벨기에 근처에 있는 스당 회중에서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임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부모는 내가 그런 방법으로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파이오니아 봉사는 휴가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집에서는 언제든지 나를 환영할 것이며 문제가 생기면 아버지를 의지해도 좋다고 말했습니다. 부모는 돈이 많지 않았지만 나에게 새 자전거를 한 대 사 주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자전거를 산 영수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영수증을 볼 때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61년에 사망했지만, 아버지가 해 준 지혜로운 말들은 여전히 내 귓전에 울리는 듯합니다. 그 말들은 여러 해에 걸친 봉사 기간 내내 내게 격려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스당 회중의 성원이었던 75세 된 그리스도인 자매 엘리즈 모트는 또 다른 격려의 근원이었습니다. 여름철이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외딴 마을들로 전파하러 다녔는데, 엘리즈는 기차를 타고 나와 합류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관사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엘리즈는 집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생각해 낼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이라고는 내 자전거의 짐을 놓는 자리에 엘리즈를 태우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전거를 타기에는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방석을 한 개 가지고 엘리즈의 집으로 가서 그를 자전거에 태웠습니다. 엘리즈는 더는 기차를 타지 않았고, 기차 요금을 아낀 돈으로 점심시간에 우리가 마실 따뜻한 음료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자전거가 대중교통 수단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많은 책임들

1950년에 나는 프랑스 북부 지역 전체를 섬기는 순회 감독자로 봉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는 겨우 23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나는 지부 사무실에서 실수를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라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내가 영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매주 바뀌는 잠자리에는 어떻게 적응해야 하지?’ 게다가 나는 여섯 살 때부터 외사시로 고생해 왔습니다. 그러한 병으로 인해 나의 한쪽 눈은 바깥쪽을 향해 있습니다. 나는 항상 이것 때문에 주위의 시선을 무척 의식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염려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때 나는 길르앗 선교인 학교의 졸업생인 스테판 베후니크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베후니크 형제는 전파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폴란드에서 추방되어 프랑스로 재임명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용기는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와 진리에 대하여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나를 엄하게 대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에게서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의 담대함은 내가 확신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순회 활동을 통해 야외 봉사에서 얼마의 훌륭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1953년에 나는 파올리라고 하는 남자를 방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파리 남부에 사는 그는 「파수대」지를 예약하여 구독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만났고, 그가 군인이었지만 퇴역하였다는 것과 「파수대」지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근 호 「파수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관한 기사를 읽고는 혼자서 나름대로 기념식을 지켰고 그날 저녁의 나머지 시간을 시편을 읽으면서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날 오후에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떠나기 전에, 우리는 침례에 관해서도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중에 나는 1954년 초에 열릴 예정이던 순회 대회에 참석하도록 그를 초대하였습니다. 그는 순회 대회에 참석했고, 그 대회에서 침례받은 26명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여전히 나에게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로자: 나는 1948년 10월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벨기에 근처의 아노르에서 봉사한 후에, 나는 이렌 콜란스키(현재는 이렌 르루아)라는 파이오니아와 함께 파리로 임명되었습니다. 우리는 파리 중심부에 있는 생제르맹데프레의 한 작은 방에서 살았습니다. 시골 소녀였던 나는 파리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들 모두가 세련되고 매우 지적인 사람들일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파하다 보니, 그들도 여느 사람들과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되었습니다. 종종 수위가 우리를 쫓아냈고, 성서 연구를 시작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부 사람들은 우리의 소식을 받아들였습니다.

1951년에 열린 한 순회 대회에서 이렌과 나는 우리의 파이오니아 봉사에 관한 회견을 했습니다. 그 회견을 사회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젊은 순회 감독자인 마리안 주미가였습니다. 우리는 전에도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 순회 대회 이후로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했지요. 마리안과 나는 침례받은 해와 파이오니아를 시작한 해가 같다는 사실을 비롯하여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둘 다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심사숙고한 끝에 우리는 1956년 7월 31일에 결혼했지요. 결혼과 함께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아내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남편과 함께 순회 활동을 하는 일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순회 활동은 매주 잠자리가 바뀌는 것을 의미했지요. 처음에는 그런 생활이 결코 쉽지 않았지만, 큰 기쁨을 주는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삶

마리안: 여러 해 동안 우리는 몇몇 대회들을 준비하는 일을 돕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특히 1966년에 보르도에서 열린 한 대회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포르투갈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로 와서 대회를 볼 수 있었던 포르투갈 증인들의 유익을 위해 대회 프로그램을 포르투갈어로도 제공했습니다. 포르투갈에서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 형제 자매들이 오긴 했지만, 문제는 그들을 묵게 할 숙소였습니다. 보르도에 사는 증인들의 집에는 그들을 묵게 할 방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빈 영화관을 하나 임대했습니다. 우리는 좌석을 모두 치우고 무대에 있던 커튼을 사용해서 영화관 내부를 두 개의 숙소로 만들어 한쪽은 형제들이, 다른 한쪽은 자매들이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샤워 시설과 세면기를 설치하였고, 콘크리트 바닥에 건초를 깔고 그 위에 두꺼운 천을 덮었습니다. 모두가 그러한 마련에 만족했습니다.

대회 회기가 끝나면 우리는 그곳에 묵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방문했습니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지요. 그들이 몇 년간 박해를 인내하는 가운데 겪은 경험들을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큰 격려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대회가 끝나고 그들이 떠날 때 우리는 모두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2년 전인 1964년에는 또 다른 특권이 주어졌는데, 그해에 나는 지역 감독자로 봉사하라는 요청을 받았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나는 과연 그 일을 해낼 자격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책임 있는 형제들이 나에게 그 임명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했다면, 그들은 분명히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여행하는 감독자들과 긴밀하게 접촉하며 봉사하는 것은 훌륭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매우 중요하게 보시는 참을성과 꾸준함의 진정한 모범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면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를 찾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1982년에 지부 사무실은 우리에게, 파리 외곽의 불로뉴비양쿠르에 있는 12명의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작은 폴란드어 집단도 돌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요청은 매우 뜻밖이었습니다. 폴란드어로 신권 용어들은 알고 있었지만, 문장을 구성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집단에 속한 형제들의 친절과 자진적인 협조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 그 회중에는 거의 60명의 파이오니아를 포함하여 약 170명의 전도인이 있습니다. 후에 아내와 나는 덴마크, 독일, 오스트리아에 있는 폴란드어 집단들과 회중들도 방문하였습니다.

상황이 바뀌다

여러 회중들을 방문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었지만, 나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우리는 2001년에 여행하는 봉사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내 여동생 루트가 살고 있는 피티비에라는 곳에 아파트를 구했습니다. 지부 사무실에서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특별 파이오니아로 임명해 주고 요구 시간을 우리의 상황에 맞게 조절해 주었습니다.

로자: 내게는 우리가 순회 활동을 그만둔 후 처음 1년간이 무척이나 힘든 기간이었어요. 너무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내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아직도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면서 시간과 남아 있는 활력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켰지요. 현재는 우리 회중의 파이오니아들과 함께 봉사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셨다

마리안: 나는 아내가 지난 48년 동안 내 동반자가 되어 준 것에 대하여 여호와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행하는 활동을 했던 그 모든 세월 동안, 아내는 훌륭하게 나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아내가 ‘이제는 정착해서 우리만의 가정을 꾸몄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로자: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당신의 생활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에요. 항상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니 말이에요.” 하지만 대체 무엇이 진정으로 “정상적인 생활”입니까? 우리는 흔히 영적인 활동들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는 많은 것들에 둘러싸이게 됩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편안한 침대와 탁자 그리고 몇 가지 다른 기본 필수품이 전부이지요. 우리는 파이오니아로서 물질적으로는 가진 것이 거의 없었지만, 여호와의 뜻을 행하는 데 필요한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나이가 들었을 때 집도 없고 연금도 받을 수 없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여호와를 찾는 자들에게는 좋은 것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으리라”라는 시편 34:10의 말씀을 인용하곤 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우리를 돌보아 주셨습니다.

마리안: 정말 그렇습니다! 사실 여호와께서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1958년에 우리 순회구를 대표해서 뉴욕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게 되었지요. 하지만 아내의 항공권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에 한 형제가 겉봉에 “뉴욕”이라고 쓰여져 있는 봉투를 건네주더군요. 그 안에 동봉되어 있던 선물로 인해 아내는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여호와께 드리는 봉사에 바친 세월에 대해 한 점의 후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잃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오히려 모든 것—전 시간 봉사를 하면서 누리는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얻었습니다. 여호와는 참으로 놀라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는 법을 배웠고,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깊어졌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인 형제들 가운데는 충실함을 지키는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형제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여러 해에 걸쳐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삶을 희생으로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것이 아내와 내가 지금까지 힘써 노력해 온 일이자 앞으로도 하기로 결심한 일입니다.

[각주]

^ 14항 “나는 ‘죽음의 행진’을 살아 남았다”라는 제목의 루이 삐에쇼따의 체험담이 「파수대」 1980년 12월호에 실려 있다.

[20면 삽화]

1930년경에 자녀들인 스테파니, 스테판, 멜라니, 마리안과 함께한 프랑수아 주미가와 안나 주미가. 오른쪽의 걸상에 올라서 있는 아이가 마리안이다

[22면 삽화]

위: 프랑스 북부 아르멘티에르의 한 시장에서 가판대를 놓고 성서 출판물을 전하는 모습, 1950년

[22면 삽화]

왼쪽: 마리안과 함께한 스테판 베후니크, 1950년

[23면 삽화]

1951년에 파이오니아 짝인 이렌(왼쪽에서 네 번째)과 함께 대회를 광고하고 있는 로자(맨 왼쪽)

[23면 삽화]

결혼식 전날의 마리안과 로자

[23면 삽화]

순회 방문을 하면서 주로 사용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