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리트바크와의 회견
이반 리트바크와의 회견
출생: 1922년
침례: 1942년
약력: 1944-46년 투옥. 1947년부터 1953년까지 러시아 북단의 강제 수용소들에서 복역.
1947년에, 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루츠크에 있는 보안이 가장 삼엄한 감옥으로 끌려가, 그 안에서 양손을 무릎에 얹은 채 곧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였습니다. 다리를 뻗을 수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그런 식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검정 코트를 입은 사람이 나를 심문하였습니다. 그는 내게서 우리의 활동을 인도하는 형제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내가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알려 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1947년 5월 5일, 군사 법정은 내게 10년의 수용소 감금형을 선고하여 보안이 가장 삼엄한 격지의 수용소들에 보냈습니다. 사실, 당시 나는 젊었기 때문에 그들의 명칭으로 제1급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제1급에 속한 사람들은 증인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청년들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가축 운반용 화차에 태워져 러시아의 북단에 있는 보르쿠타로 실려 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증기선에 실려 나흘을 항해한 끝에 카라 해협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툰드라 벌판에 왜소한 북극 자작나무뿐이었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밤낮으로 나흘간을 걸어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젊었습니다. 우리는 굳은 빵 조각과 훈제 순록 고기를 받았습니다. 이 식량과 함께 우리는 그릇과 따뜻한 천으로 만든 담요를 지급받았습니다. 비가 엄청나게 오더군요. 우리가 메고 다니는 담요가 물에 푹 젖어, 지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담요 한 장을 붙들고 비틀어 짜고 나면, 다시 가벼워지곤 하였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동안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지붕이, 내 머리를 가릴 지붕이 생기겠지!’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이끼가 무성한 공지(空地)였습니다. 간수들이 말하더군요. “짐들을 풀어. 여기가 살 곳이야.”
어떤 죄수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다른 죄수들은 정부를 저주하였습니다. 거기서 나는 결코 아무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 나의 하느님, 당신은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요새이십니다. 여기서도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소서.”
그들은 철조망이 없어서 경계선을 따라 밧줄을 쳤습니다. 보초도 세웠습니다. 일상 그렇듯이 보초들은 항상 책을 읽고 있었으며, 우리가 2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발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끼 깔린 땅바닥에서 그날 밤을 지냈습니다. 비는 우리 위로 퍼붓고 있었습니다. 내가 밤에 깨어나서 1500명을 둘러보니 그 사람들 모두에게서 김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주변은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이곳은 이끼 지대인 데다가 물까지 뒤덮여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비행기가 착륙해서 우리에게 식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비행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간수들에게는 특별한 트랙터가 있었는데, 타이어가 엄청나게 커서 진창에 빠지질 않았습니다. 그 트랙터가 간수들에게는 일용품을 날라다 주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 비행장을 만드느라 사흘 동안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이끼를 제거해야 하였습니다. 경비행기 한 대가 밀가루를 가져왔습니다. 그 밀가루를 끓는 물에 갠 것을 우리는 식사로 먹었습니다.
우리는 등골이 빠지도록 일을 하였습니다. 길을 닦는 공사를 해서 철도 레일을 깔았습니다. 우리는 인간 컨베이어 벨트 노릇을 해서, 무거운 돌을 날랐습니다. 그 겨울은 내내 음산하기만 하고 대단히 추웠습니다.
우리는 노천에서 하늘을 보면서 잠을 자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비가 바로 쏟아져, 몸이 젖고 배고프고 추웠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젊었던지라 활력이 있었습니다. 간수들은 걱정 말라고, 곧 지붕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군용 트랙터에 400명용 천막을 칠 만한 피륙이 실려 왔습니다. 우리는 그 천을 펼쳐서 천막을 세웠는데, 그래도 잘 곳은 여전히 이끼 깔린 땅바닥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풀을 모아다가 우리가 기거하는 그 임시변통의 천막 안에 깔아 두었더니, 그 풀이 부식하여 퇴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가운데서 잠을 잤습니다.그러고 나니까 이가 생기더군요. 이에 물려 우리는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옷 구석구석까지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붙어 있었습니다. 실로 끔찍했습니다. 일하고 돌아와서 눕기만 하면, 그것들이 몸을 갉아 대는 바람에 우리는 긁고 또 긁어야 하였습니다. 잠이 들기만 하면 살을 뜯어먹었습니다. 우리는 십장에게 “이가 우리를 산 채로 먹습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그는 “이제 곧 당신들을 먹은 이를 갖다가 불고기를 해야겠군” 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온이 영하 30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교도관들은 날씨가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습니다. 드디어 날씨가 다소 누그러지자, 그들은 이동용 소독 설비를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영하 20도였고, 천막은 온통 찢어져 있었습니다. “옷을 벗어”라고 하더군요. “이제 세탁을 하게 된다. 옷을 벗어라. 너희들의 의복을 소독할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는 영하 20도의 날씨 속에서 옷을 하나하나 벗어, 갈기갈기 찢어진 천막 속에서 드디어 발가벗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판자들을 가져와, 우리는 그것을 마루로 삼았습니다. 그 판자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내 몸을 바라보았습니다. 참으로 흉물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도 마찬가지더군요.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온통 오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습니다. 나는 화차에 오를 수도 없었습니다. 기진맥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제1급—건강한 젊은 일꾼—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었거든요. 젊은 남자들이 말입니다. 이제 나는 피할 길이라고는 없어 보였기 때문에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증인이 아닌 사람들 가운데는 이 노역을 면하기 위해서 일부러 손이나 다리 하나를 얼려서 그 때문에 잘라 내게 만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무섭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루는 초소 중 한 곳 가까이에 서 있다가 보니 거기에 의사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체포된 뒤로 함께 이동해 오면서 하느님의 왕국에 대하여 증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죄수였지만 이미 사면을 받은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 다가가서 보니까, 틀림없이 그는 자유의 몸인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름이 사샤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이반, 자네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내게 그 말을 하자 나는 어린애처럼 울고 말았습니다. 그는 “당장 의무대에 가 보게” 하더군요.
의무대에 간 다음, 나는 노역 제1급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수용소 안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3급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휴무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지정된 지역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곳 지휘관이 말하더군요. “나는 널 이곳으로 초대하지 않았다. 네 발로 온 것이다. 그러니 알아서 네 할 일을 하라.” 그래서 나는 조금씩 그곳 생활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내게 더 이상 등골이 빠지는 노역은 없었습니다.
나는 1953년 8월 16일에 석방되었습니다. “마음대로 가라”고 하더군요. 내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나를 보존해 주신 데 대해 여호와께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나는 먼저 숲 속으로 갔습니다. 그곳 작은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서 장래를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장래의 활동을 위하여 나를 보존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
[30면 삽입]
‘조금만 더 있으면 지붕이, 내 머리를 가릴 지붕이 생기겠지!’
[31면 삽입]
그곳 작은 숲으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서 나를 보존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렸습니다